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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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명칭
2.1. 어원과 파생
2.2. 한국어 표기와 발음
3. 생활사
4. 역사
4.1. 기원과 형성
4.2. 요나라의 건국
4.3. 요-서요 멸망 이후
5. 한국사와의 관계
5.1. '고구려 계승' 낭설
6. 기타
7. 거란족의 국가 목록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거란()은 요하시라무렌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했던 준몽골어족[1] 동호계 유목민 또는 반유목민 집단이다.


2. 명칭[편집]



2.1. 어원과 파생[편집]


언어별 명칭
거란어
/*kʰitai(n)/ 또는 /*kʰitan/[2]
중세 중국어
契丹 (/kʰeitɑn/, /kʰɨt̚tɑn/)
중국어
契丹 (Qìdān)
일본어
契丹 (きったん, Kittan)
중세 몽골어
ᠬᠢᠲᠠᠳ (Qitad)
몽골어
Кидан (Kidan)
/ Хятад (Hyatad)[3]
페르시아어
ختاى (Khatāy)
위구르어
خىتاي (Xitay)
키르기스어
Кытай (Kytai)
거란어로 자신들 거란족을 가리키는 명칭은 키둔(/*qid ún/) 또는 키디(/*qid i/)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이 키타이(/*kʰitai/) 또는 키탄(/*kʰitan/)으로 변형되었다. 이는 각각 중국어몽골어를 통해 치단(契丹, Qìdān)[4]키단(Кидан)으로 전사되었으며, 마르코 폴로는 훗날 《동방견문록》으로도 불리는 자신의 책에서, 북중국을 가리켜 카타이(Catai), 남중국을 '만지'(Mangi, 蠻子)라고 불렀다. 이 '키타이' 또는 '카타이', '키탄'이라는 어휘의 뜻은 , 칼날, 날붙이로 추정되며, 이 설이 사실이라면 거란이라는 국호는 칼(날)의 부족이라는 의미가 되는 셈이다.[5]

이 가운데 키타이(Khitai)라는 호칭은 요나라가 북중국의 일부를 지배하던 중세 이후 서방 세계에도 전해져, '중국', '중국 대륙', '중국인'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일부 국가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언어에서는 지금도 중국 혹은 한족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위구르어의 히타이(خىتاي)나 포르투갈어카타이(Catai), 몽골햐타드(Хятад), 카자흐어크타이(Қытай) 등이 키타이의 파생이다.

영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캐세이(Cathay)는 중국을 가리키는 고어의 하나이다. 이 이름을 사용한 예로 과거 홍콩의 국적 항공사였던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을 들 수 있다. 나중에 '키타이'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나 로버트 E 하워드의 《코난 사가》에서 동방의 부족과 군주를 가리키는 말로 차용되었다.

이렇게 중국의 고대 국가에서 유래한 명칭으로는 '키타이'(캐세이)말고도 진나라에서 유래한 '차이나'(China)와 '시나'(Sina), 북위(선비 탁발부)에서 유래한 '타브가치'(Tabgach), 원나라의 상도(上都, 새너두)에서 유래한 '제나두'(Xanadu)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순수 한족과는 거리가 멀거나 혼혈이었던 왕조에서 파생한 이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본어에서는 킷탄(きったん)이라 읽는다. 한자어의 훈음이 다양한 일본에서도 '킷탄'이라는 용례는 이것 하나밖에 없다 보니, 상용한자표에도 독음이 들어있지 않다.


2.2. 한국어 표기와 발음[편집]


한국어인 거란 역시 한자어 글단(契丹) 표기가 유입되어 만들어졌다. 이 한자에 대한 훈음은 각각 '부족 이름 글'()과 '붉을 단'()으로 쓰이는데, 독음이 거의 일정한 한국어 한자 가운데서도 읽는 법이 특이한 사례로 꼽힌다. '맺을 계'자를 '부족 이름 글'이라는 독특한 훈음으로 읽는 것은 고유명사의 특징에 따른 것으로, 비슷한 예로 '홑 단'()이 흉노의 군주호인 선우를 가리킬 때는 '오랑캐 이름 선'이라 읽히는 것을 들 수 있다. '붉을 단'(丹) 역시 활음조 현상에 의해 '단'에서 '란'으로 음이 변했다. 이는 꽃 '목단'(牧丹)이 한국어에서 '모란'으로 읽히는 예와 같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어 내부에서의 변화에 한하며, 중국어에서는 계약 등을 뜻하는 '맺을 계'의 병음 '/qì/'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 밖에 글안이라는 표기도 보이는데, 이는 원래 한자에 대응시키기 위해 한자 독음을 재해석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신채호가 남긴 글에도 '글안'이 보이고, 네이버 한자사전 해당 항목에서도 독음을 '글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끝의 역삼각형 기호(▽)는 비상용 독음을 나타내며, '이 글자(붉을 단)는 원래 이렇게 읽는 글자가 아니나 이 단어에서만 이렇게 읽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국한문혼용 및 병용 표기가 사라진 후 번역된 중국 서적이나 사극 자막 등에서 간혹 '계단족'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상술했듯 본래 '거란'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일반적인 한자의 훈음으로 오기한 것이다.


3. 생활사[편집]


훗날 이들이 반유목에 가까워지면서 농경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반농반목수렵채집, 어로 정주민이었던 여진-만주족과는 달리 이들은 더 유목민의 성격이 짙었다.[6] 겨울에는 얼은 호수에서 얼음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하여 잡은 물고기와 짐승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두어연(頭魚宴)이라는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오랜 대전쟁을 치렀기에 공격적인 야만족이나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독자적인 거란 문자를 만들고, 상당한 불교 문명을 이룩했으며 거란의 장신구가 북송에서 유행하는 등 고도의 문명을 향유하는 이면도 지니고 있었다. 요나라 시대의 불교 유물 및 유적은 중국의 불교 문화재 가운데에서도 평가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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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를 몽땅 밀어버리고 주변 머리만 남겨놓는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을 가진 민족이었다. 이 역시 만주 지역의 유목민들이 향유하던 변발 전통의 일종이다. 그나마 뒷머리만 조금 남겨서 앞모습만 본다면 스킨헤드로 보이는 만주족의 변발과는 달리 거란족은 정수리-뒷머리를 민 다음 옆머리와 앞머리만 남겨놓은지라 더욱 기이하다.

장례 풍습의 경우 귀족과 황족 등 높은 신분층들 한정으로 시신을 건조하게 하여 미라를 만들고, 시신 얼굴에 금으로 만들었거나 금으로 도금한 은제 가면들을 덮었는데, 일종의 데드마스크였다.

성에 개방적이었는지 춘화도 남아 있다.


4. 역사[편집]


흉노 또는 동호-선비 계열의 유목민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경의 사서에서부터 독자적인 민족으로서 식별되었다. 고대에는 몽골 고원의 유연-돌궐과 만주의 고구려, 화북의 북위, 의 신민으로서 내몽골 일대를 영유했으며, 668년의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위구르와 당나라에게 차례로 정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흥하여 당과 위구르를 약탈했다. 이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는 대립했다. 10세기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후 실위와 해를 통일하고 분열되어 있었던 몽골의 부족들을 흡수하면서 요나라를 세웠다. 이후 요나라는 랴오둥 반도와 중국 허베이성 일대, 막북(漠北)[7] 지역까지 정복하고, 동아시아 북부의 패자로 군림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 등 전쟁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으면서 성장 동력을 상실했으며,[8] 지배력이 약화되자 여진족 완안부의 수장인 온얀아쿠타의 휘하에서 일거에 일어난 금나라와 북송의 연합 공격에 멸망하고 말았다. 거란족의 일부는 서역으로 도망가 서요를 건국했으며, 남은 거란족들은 금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부흥운동을 수차례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몽골 제국이 발흥하자 거란족은 몽골에 흡수되어 몽골 사회 각계에서 활동했다. 몽골 제국 초기까지의 거란족은 몽골족과 어느 정도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세에 이르러 언어, 문화적으로 비교적 가깝던 몽골족에 동화, 흡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요와 이를 흡수한 셀주크 제국 역시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오늘날에는 다우르족을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하는 학설이 있다.


4.1. 기원과 형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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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성립 이전 거란족의 영역을 대강 나타낸 것(Khitans)[9][10]

거란의 족원은 대체로 흉노동호설로 대비된다. 거란족사와 요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대체로 거란이 동호계 선비족 우문부의 분파로써 우문부, 고막해와 분리되었다고 인식한다. 4세기경 거란은 모용선비족인 전연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고막해의 영향력하에 있게 되었다. 388년 고막해가 탁발선비족인 북위에게 토벌당하자, 이후 독립하게 되었다. 고막해가 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생각해 족보를 따지면, 거란은 선비족의 별종이라 할 수 있다.

등국 중에 북위의 군대가 크게 깨뜨리자, 마침내 달아나 흩어져 고막해와 나뉘었다. 수십 년이 지나 점차 커져서, 부락이 화룡의 북쪽 수백 리에 있게 되었다.

─ 《위서》 <거란전>[11]


그 뒤 거란은 고8부(古八部) 시대에 나름 세력을 키웠으나 주변 한국, 중원, 막북의 강호들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 신세였다. 7세기경 거란의 지배 세력 가운데 대하(大賀)씨가 당나라에 귀부하여 국성인 이씨를 하사받았다. 668년 고구려 멸망 뒤 거란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권이 공고해지는 듯했으나, 696년에 이진충이 '무상가한'(無上可汗)을 칭하며 독립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진충이 죽고 후계자인 손만영이 집권한 시기, 돌궐 제2제국의 정복군주인 카프간 카간의 도움을 받은 측천무후에 의해 멸망당했다.[12] 이후 당과 돌궐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돌궐의 영향력에 강하게 종속했다. 이후 발해, , 돌궐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고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위구르(회흘) 역시 이런 열강 구도에 끼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요련(遙輦)씨를 거쳐 야율아보기 등장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4.2. 요나라의 건국[편집]


파일:요나라 지도.png
간접 세력권까지 포함한 요나라의 최대 강역(연두색)

907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대통합했다. 그리고 해족과 습족, 실위를 정복하고 서하, 하서회골, 조복을 복속시킨 다음 발해까지 멸망시킨 후 요나라를 건국했다. 요 건국 뒤에도 거란(키타이)이라는 이름은 요와 함께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되었다.

최종적으로 야율아보기의 거란 제국은 그 영토가 몽골,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 만주에 이르렀다.[13] 그러나 몽골 고원은 직할 지배가 아닌 간접 지배의 형태였고 만주 역시 요동, 연해주발해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여진족발해유민의 반동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그래서 실효적인 지배력이 미친 영토만 따지면 영토가 매우 축소된다. 요나라 항목 참조. 다만 실효적인 지배장소들은 모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적합한 곳이었고 거란의 중심지와도 가까웠다. 외몽골 남부도 그나마 발해유민들이 있었던 옛 부여(만주 평원/동북 평원) 지역에 비하면 나름 직접통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한편 건국 이후에는 북송을 뜯어먹은 뒤 고려서하를 치나 형식적인 굴복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그친다. 이후엔 거란의 여자, 매 등의 착취로 인해 분개한 여진족이 완안아골타 아래에 규합하여 요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결국 1125년 여진금나라북송의 협공을 받게 되는데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 때 금에 영향권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던 요나라의 잔존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 이주하여 서요 또는 카라 키타이를 건국했다.

그런데 요나라와 관련된 설명에서 의아한 것은 요하 유역과 하북성 일대에서 웅거하던 요나라가 1125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왕족인 야율대석이 거란족 유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 서요를 건국하여 요나라를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천조제 이후 공중 분해된 것처럼 설명되곤 한다는 것. 서요가 쿠츨루크의 폭정과 뒤를 이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무너진 뒤에도 일부 거란족의 유민들은 이란 동부까지 이주해 다시 요나라를 이어갔다. 얼마 안가서 또 다시 일 칸국에 의해 복속되었지만 이란, 즉 페르시아 남동부 케르만 주에 세웠던 거란족의 국가는 키르만 왕국 혹은 치얼만(중국어로 케르만/키르만을 칭함) 왕조라고 부르며, 후서요(後西遼)라고도 표기한다.


4.3. 요-서요 멸망 이후[편집]


몽골의 발흥과 함께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멸망해 사라졌다기보다는 페르시아와 파르티아와의 관계와 비슷하게 둘 다 동호에서 갈라져나온 종족들인지라 문화적인 차이도 적고, 금나라와 싸울 때부터 뜻을 함께한 몽골에 이들이 딱히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동화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한 요나라 시절 몽골에 대한 정책도, 몽골에게 가혹한 강경책으로 일관한 금나라와는 달리 요나라는 대부분 간접적인 통치를 행해서 몽골을 직접 탄압한 일도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 때문에 몽골의 거란-요에 대한 적대심 역시 적었다.

특히 금나라가 요나라의 원수이기 때문에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에 많은 거란인들이 협력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야율초재. 그 외에도 칭기즈 칸의 참모로 활약한 야율아해(耶律阿海)와 장군으로 활약한 야율독화(耶律禿花) 형제가 있다.[14] 야율유가(耶律留哥)라는 거란인도 동요(東遼)라는 국가를 세웠으나 나중에 몽골에 들어가서 몽골의 신하로 활약하기도 했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일부 거란인들은 만주에 대요수국을 세우고 할거했다가 칭기즈 칸에게 복속되었다.

몽골과 중국은 이 종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물론, 거란/요나라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은 하나도 없다. 한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인들에게도 거란은 그저 오랑캐였다 보니 역사 문제와 달리 이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진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사는 소수민족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2005년 기준으로 중국의 소수 민족[15] 중 34번째로 많다. 약 12만명. 샤머니즘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분포 범위도 거란족의 강역과 대강 일치하고 스스로 거란을 계승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이들이 거란족의 후예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주국 황제이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선통제의 부인인 고불로 완룽(郭布羅 婉容)이 바로 이 다우르족 출신이다. 베이징 등 화북 한족들 역시 거란족과 몽골족의 피가 진하게 섞여 있다. 또한 윈난성 바오산(保山) 시에는 거란족 황실 후예들이 산다고 한다. 서요의 거란 황족 출신 중 야율아소루(耶律阿蘇魯)라는 사람이 몽골 제국의 부하가 되어 윈난성까지 파병되었고, 아소루를 포함한 거란인들이 여기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리국 사람들이 거란인을 학살하자 야율씨 일족은 성씨를 장씨, 뤼씨, 화씨, 양씨 등으로 바꾸어서 살아남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곳 마을에는 아소루의 무덤을 포함하여, 거란 왕족들을 기리는 사당과 족보도 있다고 한다. 사당에는 야율(耶律)이라고 쓰인 간판들이 있다고 한다. 또한 1473년까지 서역의 하미를 지배하였다고 한다.


5. 한국사와의 관계[편집]


한국사 속 국가들과는 여러모로 깊은 악연을 자랑하는데, 거란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8년 (서기 378년) 가을 9월의 기록으로, 이때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의 부락을 함락시켰다고 나온다. 일부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토벌 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그 번병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세력을 키워 그 후손인 발해와 함께 초반에는 같이 힘을 합쳐 당과 일전을 벌이는 등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했으나 본격적으로 세를 키운 이후에는 대립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거란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전성을 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만주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해버린다. 그 뒤 진행된 발해부흥운동을 계속 진압하며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나간건 덤.[16] 그리고 발해 정복을 끝낸 후에는 한반도까지 노려 여요전쟁을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고려의 선전으로 결국 막아내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17]

2017년에는 거란어에는 다른 몽골계 언어와 상이하게 한국어와 어원이 같은 단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면서 거란어가 어떤 식으로든 실제 고구려어와 관련되었을 것을 가정하는 연구도 나오기도 했다. 해당연구 고구려어 항목에서 고구려어와 고대 한국어 관련해 소개된 바 있는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연구이다. 거란인들이 고구려인들의 후손이라는 식의 주장이 아니라, 거란어에서 몽골어, 중국어, 기타 퉁구스어나 만주어 등에서 유래하지 않은 기원이 불분명한 단어와 고대 한국어를 함께 분석해서 고구려어 단어를 많이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거란어 해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서 한자 어휘를 수용하는 것처럼 인접국끼리 문화 교류를 통해 어휘를 주고받는 언어동조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고구려에게 일부 복속되기도 했던 역사적 연원과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만하다.

고려시대 남경, 즉 현재의 서울여요전쟁 때 항복한 거란족 포로를 수용하던 곳이 있었다. 왕이 남경을 방문했을 때 왕을 맞이하는 거란인들이 거란 가무를 추고 거란 악기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거란 포로들 10명 중 1명은 기술자들이었는데 고려 조정은 이들을 옷과 그릇을 만드는 일에 종사케 하여 고려의 제조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고 적혀 있다.

요나라가 멸망할 때 보주[18]가 고려의 영토가 되면서 그곳에 살던 요나라 주민들 다수가 고려로 귀순했다. 그 외에도 일부 거란인들이 고려로 망명해오기도 했다. 당시 기록에 거란인들뿐만 아니라 요나라에 살던 발해인, 해족, 한족, 일부 여진인들의 귀순이 이어졌다고 적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로 동화되었는데 일부는 무관 등으로 등용되기도 했다. 병든 아버지에게 자신의 살을 잘라 먹여 명종에게 상을 받은 거란인 무관(산원동정[19]) 위초(尉貂)의 효행이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나온다. 또한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 기병 중에는 항복한 거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에 귀부한 거란인들 중에는 고려군에 투신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때 토벌된 뒤 고려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었다. 대요수국의 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몽골에 쫓겨 대거 고려로 침공해오기도 했는데 고려로 내려와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웅거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대요수국의 난, 강동성 전투). 어찌 보면 고려와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한 원흉인셈.

강동성에서 포로로 잡힌 8만의 거란 유민들은 고려에서 도살업을 하거나 갖바치, 고리, 광대 등의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불교에 대한 신앙이 강한 국가에서 안 그래도 이런 일들은 천대받은 일들이었고, 거란은 역사적으로도 고려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유민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리 만무했다. 이는 조선시대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아서 백정 집단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로 이어진다.


5.1. '고구려 계승' 낭설[편집]


유사역사학의 일각에선 거란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실제 문헌에서 거란은 단 한번도 고구려를 계승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 이들은 서희의 외교담판에 나온 거란이 고구려의 계승권을 얻으려 했다는 것을 증거라 하지만, 실제 기록을 자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회담에서 거란 측은 "우리가 옛 고구려의 땅을 점령했으니 모든 고구려 땅은 우리 땅이다, 너희들은 신라에서 나오지 않았느냐"라는 주장을 했고, 고려측은 "우리가 고구려를 계승해서 국호도 고려로 했고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서경) 같은 논리대로라면 동경(요양)은 우리 땅 아니냐"고 대응하여 거란을 침묵시켰다. 거란은 어디까지나 고려의 역사와 명분을 왜곡하여 옛 고구려 땅을 강탈하고자 한 것이지 자국을 고구려의 계승국이라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후에도 얼마동안은 요사에서 고려를 진변(진한변한)이나 "동한"으로 표기하는 등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부정하고자 하는 정도의 표현이 등장하고는 하나, 자국을 고구려의 후계국이라 여기는 표현은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도 일정한 것이 아니라 어쩔 때에는 고구려라는 표기가 등장하기도 하며, 나중에는 아예 고려왕을 '주몽의 후손'[20]이나 '고구려 오부의 주인'[21]이라고 표현하는 등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완전히 인정하게 된다.

참고로 요사에서 기자의 팔조금법 운운하며 고조선을 계승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 기록을 보면 "요(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기자(箕子) 8조의 가르침이 풍속으로 남아 있다." 라는 단순한 지역의 내력 소개를 과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6. 기타[편집]



후발주자인 몽골족의 명성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상당히 강력한 전투민족이었는데 인구가 1억명인 송나라에 반해 인구가 1,000만명도 안 되었던 거란족들은 송나라를 상대로 싸우면 대부분 우세를 보였다. 심지어 여진족의 침략을 받고 다 망해가던 1122년, 여진족을 피해 도망쳐 온 거란족 피난민들로 만들어진 군대인 수천명의 수군(瘦軍 빼빼마르고 볼품이 없는 군대라는 뜻)이 무려 송나라 10만 대군을 물리친 일도 있었다(...)[22]#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에서 시작된 밈으로, 거란족과 싸이버거를 연관짓는 것이 있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에 거란족의 최후에 대해 서술하면서 제국의 멸망과 시간의 허무함에 대해 절절하게 서술한 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 죽여주는 글빨에 비하여 마지막에 거란족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싸이버거를 사야 한다며 구걸을 위한 계좌번호를 첨부하는 반전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 여러 커뮤니티에 퍼지며 패러디되었고 만화화도 되었다. 윾갤콘에는 그들을 구하려면 싸이버거를 잔뜩 사야합니다.라는 콘도 있다.


7. 거란족의 국가 목록[편집]


  • 거란국(이진충이 건국)
  • 요나라
  • 동란국
  • 북요
  • 서요
  • 동요
  • 후요
  • 쿠틀룩 칸국[23]


8. 관련 문서[편집]


  • 대요수국의 난
  • 동호
  • 몽골
  • 선비
  • 실위
  • 여요전쟁
  • 오환
  • 해족
  • 습족
  • 다우르족[24]
  • 거란 신화
  • 탕후루
[1] 영어권에서는 para mongolic이라고도 부르며, 몽골어와 가까운 그룹으로서 관련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을 뜻한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학자로는 유하 얀후넨이 있다.[2] 거란 문자 대자 표기, 거란 문자 소자 표기[3] 오늘날에는 '중국'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인다.[4] 契가 '치'로 경구개음화된 것은 훗날의 일이며, 당대 발음으로는 역시 '키'였을 것으로 보인다.[5] 박원길 《유라시아 대륙에 피어났던 야망의 바람》 민속원, 2003. 발췌.[6] 여진족 역시 과거에는 유목과 수렵을 병행하다가 점차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정주민으로 변화했는데 특히 원명교체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건주야진 같은 경우에는 이웃한 명나라나 조선의 농민들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주로 거주하던 요동반도 일대는 요하강 삼각주의 존재로 인해 농사가 상당히 잘 되는 지역이기 때문.[7] 사'막'의 '북'쪽이라는 뜻으로, 고비 사막 북쪽 외몽골 지방이다.[8] 세 차례의 여요전쟁을 치른 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오히려 일변하여 요가 멸망할 때까지 평화-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이는 요나라가 고려 침략전쟁에 군자금을 쏟아부으면서 그 기회를 틈 타 여진족이 강성해지고 나중에는 아예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기습 침공해서 더이상 고려 침략을 재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9] 구글에 거란이라고 치면 십중팔구가 요나라때 영역만 나와서 그 이전의 영역을 나타낸 지도는 찾기 힘든 편이다.[10] Shiwei: 실위, Tatabi: 해(고막해), Mohe: 말갈, Yilou: 읍루[11] 登國中、國軍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12] 다만 이때 이진충과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족들은 당나라의 17만 대군을 무려 두 번이나 격파하는 용맹함을 보여, 당나라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진충손만영 항목을 참조 바람.[13] 야율아보기의 아들이자 요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 야율덕광 시기에 중원 내부로 쳐들어가 잠시 하남성 일대를 지배하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야율덕광을 비롯한 거란족들이 중원의 토착민인 한족들을 상대로 너무나 잔인하고 난폭하게 굴어서, 이를 견디지 못한 한족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켜 맞서는 바람에 결국 야율덕광과 거란족들은 요나라 본국으로 후퇴하였다.[14] 이 두 형제는 칭기즈칸이 초원 통일 전쟁부터 칭기즈칸을 보좌하며 서방정벌까지 나섰다. 그 유명한 발주나의 맹약에도 참가한 인물들이다.[15] 공식적으로 56개로 집계됨.[16] 궁예는 거란을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다. 요사에 보면 915년에 고려가 보검을 보낸 기록이 있고 918년에도 두 차례 거란에 사신을 보내는데 모두 궁예의 집권기였다.[17] 한국 고대사 서적의 상당량이 이때 불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고려실록의 기초인 7대실록이 편찬되었고, 고려사를 읽어봐도 혜종부터 목종까지는 거의 이전 삼국시대 급으로 분량이 없는데 현종부터 분량이 상당히 늘어난다. 이를 통해 여요전쟁 시기 거란의 공습으로 사료가 많이 소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 오늘날의 의주군.[19] 정8품에 해당하는 무관.[20] 요나라가 국서에서 고려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주몽의 후손)라고 지칭.[21] 다른 국서에서 고려 숙종삼한(三韓)과 오부(五部)의 주인으로 지칭.[22] 심지어 이때 송나라 10만 대군의 지휘관은 방랍의 난을 진압하고 서하와 싸워 승리를 거둔 노련한 장수인 동관(童貫)이었다. 단순히 송나라 군대가 허접이어서 거란족 피난민들한테 패배한 게 아니라는 뜻.[23] 호라즘 왕조에 의해 포로가 된 서요의 황족들이 오늘날 이란 케르만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24] 현재 거란족의 직계 후손으로 유력한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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