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아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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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건국의 아버지들 구성원
2.1. 뉴햄프셔 주 대표 (총8명)
2.2. 매사추세츠 주 대표 (총11명)
2.4. 코네티컷 주 대표 (총9명)
2.5. 뉴욕 주 대표 (총13명)
2.6. 뉴저지 주 대표 (총14명)
2.7. 펜실베이니아 주 대표 (총21명)
2.8. 델라웨어 주 대표 (총8명)
2.9. 메릴랜드 주 대표 (총10명)
2.10. 버지니아 주 대표 (총17명)
2.11. 노스캐롤라이나 주 대표 (총9명)
2.12.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대표 (총16명)
2.13. 조지아 주 대표 (총8명)
3. 충성파로 분류된 인물들
4. 인물들의 인지도
5. 사상
6. 평가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미국에서 독립 전쟁 및 연방 성립과 관련하여 미국 역사 초기의 4명의 대통령을 포함하고[2] , 대륙 회의 연합규약, 미국 독립선언서, 연합규약, 미국 헌법 등의 문서 작성에 참여, 서명한 13개 주[3] 대표 정치인과 관련 인물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2. 건국의 아버지들 구성원[편집]
총 147명의 13개 주 대표들이 참여했다. 거버니어 모리스와 존 디킨슨은 2개 주에서 대표 직을 맡았으므로 총 149명에서 2명을 뺀 147명이 대륙 회의 연합규약, 미국 독립선언서, 연합규약, 미국 헌법 등의 문서 작성에 참여, 서명한 것을 알 수 있다.
2.1. 뉴햄프셔 주 대표 (총8명)[편집]
2.2. 매사추세츠 주 대표 (총11명)[편집]
2.3. 로드아일랜드 주 대표 (총5명)[6][편집]
2.4. 코네티컷 주 대표 (총9명)[편집]
2.5. 뉴욕 주 대표 (총13명)[편집]
2.6. 뉴저지 주 대표 (총14명)[편집]
2.7. 펜실베이니아 주 대표 (총21명)[편집]
2.8. 델라웨어 주 대표 (총8명)[편집]
2.9. 메릴랜드 주 대표 (총10명)[편집]
2.10. 버지니아 주 대표 (총17명)[편집]
2.11. 노스캐롤라이나 주 대표 (총9명)[편집]
2.12.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대표 (총16명)[편집]
2.13. 조지아 주 대표 (총8명)[편집]
3. 충성파로 분류된 인물들[편집]
- 아이작 로우: 대륙회의 뉴욕 주 대표이자 뉴욕 시의 유명한 상인이다. 대영제국의 납세 정책을 반대했지만 무력 사용 등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애국파 일원들 사이에서 온건파였다. 1774년 대륙회의 연합규약을 서명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이후 충성파로 전향. 뉴저지 대륙회의 대표들에게 반역죄 혐의를 받고 뉴저지 주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조지 워싱턴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회유를 시도했지만 1779년 뉴욕 내 영국 점령군과 협력해서 뉴욕 주 의회가 로우의 재산을 몰수했다. 1783년 영국으로 이주하고 나서 1791년 사망했다.
- 조셉 갤러웨이: 대륙회의 펜실베이니아 주 대표이자 법학자이다. 필라델피아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아이작 로우와 함께 온건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며, 대영 제국이 13개 주에게 납세를 요구하고 13개 주를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1774년 대륙회의 연합규약을 서명했다. 그러나 대륙회의는 1775년 갤러웨이의 주장을 거부했고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하자 대륙회의를 탈퇴하고 1777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북아메리카 총사령관인 윌리엄 하우를 만나서 필라델피아 전역에서 본국 지지자를 모아서 영국군을 협력했다. 그러나 1778년 프랑스 왕국의 미국 독립전쟁 참전 이후 영국군은 필라델피아에서 물러나서 뉴욕으로 갔고 갤러웨이도 동행했다. 1778년 딸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으며,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는 갤러웨이에게 대역죄를 선고하고 펜실베이니아 주 내 갤러웨이의 재산을 몰수했다. 갤러웨이의 아내는 펜실베이니아의 재산을 되찾을 것이라 믿고 필라델피아에서 거주했지만 애국파 중 한명인 찰스 윌슨 필이 갤러웨이의 아내가 갤러웨이와 만날 것이라고 의심하고 펜실베이니아에서 추방되게 했다. 한편 갤러웨이는 영국에서 충성파 일원들의 리더로서 활동하고 종교학 연구와 저술에만 집중하다 1803년 사망했다. 여담으로 조셉 갤러웨이의 이름은 한글로 일부 번역된 미국 역사 논문에 "독립혁명기 충성파 조셉 갤러웨이"로 언급된다. 논문에 의하면 갤러웨이는 영국과 13개 주 식민지가 연합하는 안을 추진했다. #
4. 인물들의 인지도[편집]
이들의 인지도는 제각각이라 미국 사람들도 모두를 알지는 못한다. 대통령을 지냈던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메디슨이나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유명인사였던 벤저민 프랭클린, 알렉산더 해밀턴[10] , 존 핸콕[11] 등등이야 다들 알지만 이 외에는 인지도가 낮은 이들도 상당수이다. 그래도 버지니아,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의 13주에서는 초등학교 수업 때 자기 지역 대표들에 한해 일부러 조금이라도 더 소개하거나 역사 수업 과제로 제시하는 곳도 있다. 미국사를 주제로 한 구술 면접으로 유명한 미국 시민권 인터뷰에서도 응시생들의 빈약한 기초학력(?)을 감안하여 건국의 아버지들의 목록을 줄줄 읊어보라고까지 요구하지는 않는다.
5. 사상[편집]
자연법과 인권이 근본이 되는 나라를 골자로 삼았다.
다만 자연법과 인권이 근본이 되는 나라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그 방식에 차이를 빚으며 건국의 아버지들 사이에서도 계파가 나누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대영 제국의 왕실 체제에 남는 것을 택한 본국 지지자들인 충성파(Loyalists)와 대영 제국의 왕실 체제에서 남는 것을 거부한 강경 그룹인 애국파(Patriots)였다. 처음에 대륙회의 주 대표로 이름을 올리고 나서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조셉 갤러웨이와 아이작 로우 등이 대표적인 충성파였으며, 패트릭 헨리, 새뮤얼 애덤스 등이 대표적인 애국파였다. 미국 독립전쟁 과정에서 대륙회의에 참가한 충성파 세력은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적인 나라를 세우는 것에 동의한 애국파 인물들이 건국의 아버지로서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미국 독립 전쟁 후 다시 애국파 그룹이 내부 분열을 하였는데, 그 결과가 바로 연방주의자(Federalist)와 반연방주의자(Anti-Federalist)로, 간단하게 말하면 강력한 중앙정부를 추구하는 전자와 각 주의 자치를 중시하는 후자의 대결이다. 이 계파들이 분열한 계기는 미국 헌법을 만든 제헌 회의였다.
연방주의의 대표자로는 강력한 중앙정부와 중앙은행의 성립을 앞장섰던 알렉산더 해밀턴, 반연방주의의 대표는 국교제 폐지로 대표되는 각 주의 경제권과 자치권의 확대를 골자로 정책를 펼친 토마스 제퍼슨이다. 조지 워싱턴의 시대에 연방주의자이며 재무장관으로 활약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의 활약으로 미국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존재가 부각되는 나라가 되었다.
다만 자연스럽게 중앙정부가 성립되며 연방주의자들의 필요성은 사라졌고 미국은 토마스 제퍼슨 이후에 반연방주의자들의 정치력으로 운영되었으며 그들의 당이던 민주공화당의 후신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이 현재까지도 지속되며 미국의 양당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삼권분립과 정부수반의 이양성 역시 이들의 사상 중에 하나.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써 평화롭게 이행한 4년 중임 2선의 원칙은 5대에 걸친 대통령들 동안에 확실히 지켜져왔으며 그 결과 루즈벨트를 제외하고는[12] 3선 이상의 대통령이 출현하는 일을 막아 독재를 억제해내었다.
또한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의 정당싸움에서 존 애덤스는 의회의 싸움이 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13] 존 마샬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고 의회의 법의 헌법 심사를 대법원에 넘겨버림으로써 대법원, 국회, 정부라는 삼권의 분리된 권력이라는 이상적인 삼각 구도를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당대의 다른 계몽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주의 성향이 강했다. 따라서 미국 헌법을 기초할 때도 이렇게 정교분리와 세속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수정헌법 1조에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와 함께 종교의 자유를 함께 규정한 것이 그 예이다.
6. 평가[편집]
단순히 미국을 건국하는데 기여한 걸 넘어서서,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시스템들을 창조하다시피 한 인물들이다.
민주주의의 기반이 될 사상과 개념은 이미 고댓적부터 조금씩 누적되어 왔으나 시대상과 여러 이유로 인해서 그게 현대 민주주의로 발전하지 못한 채 피상적 개념과 이념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상황에서, 미국은 조지 워싱턴과 함께 이들의 활약으로 그걸 극복해내고 뭉쳐서 현대 민주주의를 정립하는데 성공했다. 단적으로 동시기에 민주주의에 가장 근접했다는 계몽시대 유럽의 입헌군주제 영국과[14] , 자유주의로 대표되던 혁명 프랑스도 들여다보면 허점이 많았던 편이었다. 영국만 해도 왕이 맘에 안들면 의회를 언제든 박살낼 수 있고 그게 당연시 되던 시대였으며, 프랑스도 혁명을 이룩한 이들이 수많은 이권과 이념 문제로 대립하고 혼란기 속에서 대내외적 갈등이 연이어 터진 끝에 질려버린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시대를 타고난 초인에게 매료되어서 자신들을 이끌어 줄 왕을 바라며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물을 대부분 외면해버렸다.
그에 비해 미국은 조지 워싱턴부터가 왕이라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역사속 보기 드문 인물인데다, 그를 중심으로 뭉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하나하나가 일개 국가의 지휘봉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이들이었음에도 상호간 이권다툼이나 갈등보단 미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정립을 위해 뭉쳤고,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가정 하에 삼권분립 시스템[15] 과 연방 정부와 주 정부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미래의 초강대국이 될 미국의 기반을 다졌다.
이렇듯 단순히 미국을 독립시키는걸 넘어서서 현대의 보편적 가치관 중 하나가 된 현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할 만한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며, 상술했듯 한명 한명이 큰 권력과 그에 걸맞는 능력을 갖고 있던 상황에서 이들이 조금만 욕심을 부렸다면 쿠데타, 독재, 권력암투로 무너져 사실상 민주주의의 역사가 몇 백 년 후퇴해도 이상할 것이 없던 것이 당시의 시대상황이었다[16] . 왕이라는 존재가 당연시되던 당시에는 그 미국인들조차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선거제 군주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건국의 아버지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결국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필요한 과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했다[17] . 이들이 몸소 실천한 민주주의 정신은 이후로도 견고하게 유지되어, 미국은 건국 후 독재자가 출현하지 않는 정치적 모범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가 짧아서 다른 나라와는 달리 고대 신화가 없는 미국에서[18] 건국의 아버지들은 사실상 고대 신화 속 영웅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도 이들을 半神(demigod)에 비유하곤 한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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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개 주 대표들 중 유일하게 미국 헌법 서명식에 불참했으며, 이후 새로 조약을 비준해서 연방 헌법을 주에 적용했다.[2] 5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도 건국의 아버지들과 같은 독립전쟁 세대지만 직접 미국 대륙회의 연합규약, 미국 독립 선언서, 혹은 미국 헌법 작성 및 서명하는데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건국의 아버지들의 일원은 아니다.[3]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4] 인문학 기사 뉴햄프셔 식민지가 설립 된 방법에서 "나다니엘 폴섬"으로 표기되어 있다.[5]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한국어: The United States Presidents and Government In Korean 책에서 "니콜라스 길먼"으로 표기되어 있다.[6] 13개 주 대표들 중 유일하게 미국 헌법 서명식에 불참했으며, 이후 새로 조약을 비준해서 연방 헌법을 주에 적용했다.[7] 총장 재임 당시에는 컬럼비아 대학이 아닌 킹스 칼리지였다.[8] 혹은 1757년[9] 1706년과 1713년 사이에 태어났다.[10]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서의 업적이 막대하긴 하나, 오랫동안 세간에는 애런 버와의 결투로 죽은 사람 정도로만 알려져있었다. 그의 실제 행적이 재조명받은 건, 알렉산더 해밀턴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 해밀턴이 흥행한 뒤의 일이다.[11] 이 사람은 본인의 업적 등으로 알려진 게 아니라 독립선언서에 한 서명 덕분에 알려진 좀 특이한 케이스다. 독립선언서를 보면 유독 크게 서명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Put your John Hancock here'(서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미국 관용어구가 만들어지는데 기여했다.[12] 루즈벨트의 경우엔 전시상황, 그것도 독립 직후의 불안정한 시기가 아님에도 미국이 직접 공격을 당했다는 전례없는 특수 상황에서 국가를 강력하게 뭉치게 할 전쟁지도자의 필요성이 알게모르게 미국에 자리잡으며 4선 연임 및 임기 중 사망이라는 그다지 좋지 않은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당연히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야당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사회인사들의 4선 연임에 비판은 끊임없이 따랐고, 루즈벨트가 4선 임기 초반에 사망하고 얼마 안가 2차 세계대전도 마무리 됨에 따라서 미국은 루즈벨트의 재림을 막기 위해서 재빨리 3선 이상을 할 수 없게 헌법으로 아예 차단해버린다.[13] 이는 존 애덤스가 연방주의자였지만 토머스 제퍼슨은 반연방주의자였던 이유가 더 컸다. 연임에 실패했지만 제퍼슨이 편하게 임기를 보내게 할 생각이 없었던 애덤스는 자신이 퇴임하기 바로 전날에 대법원 법관들을 전부 연방주의자로 임명했고 대법원장은 애덤스의 친구였던 존 마샬이 차지했다. 이 때문에 제퍼슨은 임기 내내 사법부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14] 현대적인 입헌군주제를 확립하면서 민주주의 체제에 가장 근접한 체제를 만들어낸 영국은 당대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자유주의 사상가였던 몽테스키외가 이런 영국의 체제를 연구하여 법의 정신을 저술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15] 특히, 건국의 아버지들이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인구 비례로만 입법부를 구성해 놓으면 인구가 많은 주의 목소리만 입법 과정에서 반영이 되어 인구가 적은 주들은 여기에 대한 견제권도 없이 끌려다닐 불평등 방지를 위해서 대중의 목소리와 각 주의 목소리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각 주가 자신들을 입법부에서 적절하게 대표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지킬 수 있도록 승자 독식의 선거인단 제도와 인구 비례가 아닌 각 주당 상원 의석을 2석으로 정하였다. 또한, 정권이나 외압 견제 세력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소신껏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강력한 권한의 연방 대법관의 임기를 종신제로 정하였다. 이러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권력의 시스템적인 제한의 헌법 설계는 널리 칭송받아야 마땅한 부분이다.[16] 이를 다룬 창작물이 바로 어쌔신 크리드 3의 DLC인 워싱턴 왕의 폭정이다. 해당 시리즈의 중요한 키워드인 에덴의 조각을 우연히 손에 넣은 조지 워싱턴이 이에 홀려서 미국의 왕으로 즉위했다가, 그대로 폭군으로 타락하면서 다른 건국의 아버지들을 숙청하고 미국 독립 혁명의 결과물들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대체역사물이며, 결말은 이 모든 것이 에덴의 조각이 보여준 환영임을 알게 된 워싱턴이 경악을 하여 주인공인 라둔하게둔에게 이를 없애버릴 것을 지시하고는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거듭났다는 이야기다.[17]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남아메리카의 그란 콜롬비아는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에 실패하면서 여러 나라로 뿔뿔이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뉘어진 각국도 거진 다 독재자들이 한두명 씩 출몰하면서 과거 스페인령 시절과 비교해서 별반 나아진 것이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18] 아예 없진 않고, 왜행성인 세드나나 콰오아의 어원이 유래한 이누이트 신화나 북아메리카 원주민 신화가 있긴 하나, 미국 내 모든 인종과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진 신화는 아니다. 그리고 보면 알다시피 미합중국을 건국했던 청교도 백인들과는 관계없는 다른 민족들의 신화이기에 딱히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타국의 신화나 전설이 차지하는 위상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