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안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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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구성원
3. 건안문학
4.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建安七子

후한 헌제건안 연간(196~220)에 조조와 그의 아들 조비조식 밑에서 활약한 문학 집단 가운데 특히 뛰어난 재능인 7인을 가리킨다. 조비가 쓴 전론(典論)의 논문(論文)편에 이들 7인의 문학적 재능을 평가한 데에서 유래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조비와 친분이 깊어 조비의 사심이 담기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조식이 양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늘날 사부(詞賦)의 작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건안칠자중 공융, 완우를 뺀 5인과 양수를 거론하는데 공융과 완우가 이 중 가장 먼저 사망했으므로 그 둘의 사후 시점이라 뺐다고 고려하면 당대에 객관적으로도 건안칠자가 문학으로 가장 이름 높았음을 알 수 있다.[1]

이들은 문학에 악부(樂府), 민가(民歌)의 형식을 도입하여 한대 이래 성행하여 온 사부(辭賦)의 격식을 깨고 시가를 문학창작에 있어서의 주요 형식으로 확립시켰다. 그리하여 오언시(五言詩)는 이 때부터 흥성하기 시작하였고 칠언시(七言詩)의 기초도 이 때에 잡혔다.[2]

공융이 불효죄로 먼저 처형당하고 그 다음은 완우가 죽었으며, 이들 중 4명(진림, 서간, 응창, 유정)은 217년에 역병이 유행하자 동시에 병이 들어 죽었고 동년에 왕찬도 길에서 병으로 사망해 위나라 건국 이전에 모두 사망했다. 이듬해에 조비는 원성현의 현령으로 지내던 오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을 평가한다(왕찬전).

이들의 시는 조조 본인의 성정처럼 감정적인 것들이 많다. 조조는 전쟁터에서 고한행이나 각동서문행 등의 시를 쓰기도 했고 조식도 백성들의 참상을 시로 짓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조조는 건안문학을 만들었을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건안 원년인 196년에 조조는 협천자를 했고, 권력을 강화 시키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는데 그 중 하나가 조조가 만든 건안문학이라고 분석한다. 조조 스스로가 시가에 뛰어났기 때문에 문학으로서 권력의 구조를 탄탄히 하려 한 것으로 본 것이다. 즉 조조가 이들과 문학을 통해 교류하면서 '친목질'을 한 것. 출신지를 봐도 이들은 노국, 서주, 청주, 연주, 예주 출신들로 출신지마다 고루고루 배분되어 있다. 시문의 재능이 자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식을 후계로 삼으려 했던 것도 이런 속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건안칠자 중 공융은 기존 한나라의 친위세력, 이를테면 순욱같은 사람과도 연계가 깊었고 결국 이 때문에 조조와의 다툼으로 숙청당했는데, 이외의 사람들은 조비와 친하게 지냈다. 결국 건안문학이라는 것은 조씨의 권력을 위해 창시된 문학이라는 해석도 가능한 부분. 하지만 건안문학은 시문보다 경전의 해석을 중히 여기던 기존의 사대부들에게 반발을 가져왔던 것 같다. 결국 사대부들의 의향대로 후계자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조식이 아니라 그에는 뒤쳐진다고 할 수 밖에 없던 조비가 되었고 명사들의 지지를 받아 후계자 지위에 오른 조비는 구품관인법을 통해 사대부들에게 권력의 일부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이들은 문장은 뛰어났지만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없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어환은 전략에서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왕찬전에 주석으로 달린 전략에 따르면 어환은 이들이 중용받지 못한 이유를 위중장에게 물어보았는데 위중장은 이들은 성격적 결함이 있었으므로 높은 자리에 매겨지지 않음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 답했다.[3] 다만 사람이 모든 것을 갖출 수는 없으니 그 문장이 뛰어난 것 또한 사실이라 답하였다.


2. 구성원[편집]




3. 건안문학[편집]


조조 조비 조식 삼부자와 건안칠자 등 건안 연간에 활동한 문인들[4]의 문학은 대부분 악부 민가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용이 진실하고 감정표현이 진지하며 질박한 언어를 많이 썼다. 그리고 많은 시들이 악부의 옛 곡조와 제목을 채용해 새로운 시대의 내용을 담았다. 아울러 이 시기 불안정한 정세와 전란 탓에 이들의 작품이 어지러운 사회 모습과 처참한 민중생활을 반영하여 거기에서 느껴지는 강개와 격정을 담은 특징을 지녀 이를 건안풍골(建安風骨)이라 칭했다.

건안문학은 위나라 말 정시 연간(240~249년)에 혼란한 현실을 떠나 정신세계를 조명한 죽림칠현이 활동하는 정시문학으로 이어지고 다시 서진 초기 태강 연간(280~289년) 삼국통일 이후를 맞아 화려한 문체로 자긍심을 담아내는 태강문학으로 이어진다.

이들 위진문학은 남북조시대까지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가 당나라 때 한유, 유종원으로부터 전개된 고문운동세력에게 형식주의적이고 사상학적 내용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한유 등의 주장이 중국문학 주류가 되면서 평가가 낮아졌는데 근현대에 오면서 루쉰혜강, 완적을 비롯한 위진문학의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4. 미디어 믹스[편집]


삼국지 7의 한시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등장한다.

천웨이동 삼국지에서 이들이 조식과 잔치를 벌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때 조비가 끼어들며 '공융 선생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건안육자라 해야지요' 라며 고인드립을 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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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편지에서 조식은 진림유수(삼국지)를 극딜한다. 양수는 답편지에서 조식의 문장이 이미 왕찬을 품고 진림을 초월해 다른 문인들 경지를 넘어섰다고 평가했다.[2] 조비가 지은 연가행(燕歌行)을 최초의 칠언시로 본다. 송철규의 중국문학기행 참조.[3] 다만 모두가 성격적 결함 때문에 높이 오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른 이유로 오르지 못한 사람도 존재.[4] 이들 외에 한단순, 번흠, 반욱, 노수, 정의, 정이, 양수, 순위, 유소, 응거 등의 문인들이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