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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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장점
3.1. 기병 대처
3.2. 단병접전
4. 창작물


1. 개요[편집]



swordsman

검을 다루는 병사. 전근대까지 기병은 대부분이 검을 필수장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은 주무기로 검을 든 보병을 일컫는다.


2. 역사[편집]


전근대시대 도검은 상대적으로 고가의 공산품인데다가 작고 휴대성이 뛰어난 특성상, 특별한 검보병이 별도로 편성되지 않거나, 편성되더라도 그 숫자가 현저히 적은 편이었다. 가령 안악 3호분에 그려진 안악행렬도에서도 검과 방패를 든 환도수가 등장하지만 단 4명으로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이 14명, 중무장한 개마무사가 8명, 도끼로만 무장한 부월수가 10명씩 등장하는 것에 비하면 그 숫자는 얼마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고대가 아니라 공업 능력이 어느정도 발달된 중세에 이르러서는 전문적인 군인이나 전사라면 으레 도검 하나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만 보통은 창이나 활 등 다른 무기를 주로 사용했다.

실제 역사상 편성되었던 유명한 도검병은 아래와 같다.


3. 장점[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도검제일주의

검에게는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뚜렷한 강점이 없지만 치명적인 약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처럼 휘둘러 찌를 수 있고, 도끼처럼 찍어 벨 수 있고, 철퇴처럼 후려칠 수 있고, 단검처럼 당겨 썰거나 눌러 찌를 수 있다. 무언가 특수한 목적과 방향을 가진 다른 무기들과 달리 검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기에 강점이 약점으로 변하는 일이 거의 없다.

무기를 다루는 기교 면에서도 검은 냉병기들보다 우위에 있다. 다른 냉병기들은 배우기는 쉬우나 운용 방식이 한정적이다. 이에 비하여 검은 범용성 덕분에 형태가 바뀌더라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스쿨이나 유파 등에서 검을 기본으로 교습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물론 오랜 기간을 배워야 그 기교를 활용할 수 있기에 검술은 오랜 기간 지배계급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Akademia Szermierzy의 피오레 롱소드 검술 시연

상기에 언급한 장점 이외에도 검은 한가지 더 장점이 있는데 바로 다양한 보조무기들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1] 필요하면 총, 활, 쇠뇌, 폴암, 투척무기 등을 적극적으로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로마 레기온도 투창이나 다트같은 보조무기들을 썼으며 독일의 도펠죌트너도 할버드나 총, 쇠뇌 같은 것을 보조무기로 썼다. 이외에도 검 자체로도 훌륭한 보조무기가 될 수 있기에, 전문적인 창잡이나 활잡이들도 도검 하나 정도는 지니고 있는 경우가 흔했다.


3.1. 기병 대처[편집]


Nihayat al-Su'l wa'l Umniyaya fi Ta'lim A'mal al-Furusiyya, 맘루크들의 훈련교범에서는 당시 기병의 주류인 검으로 무장한 기병(sword-armed cavalry)들이 보병들의 대열 내로 들어오려 할 때는 철퇴을 쓰는 것이 좋으며 활, 투창, 창으로는 접근거부를 노려 볼 수 있을지언정 기병을 제압할 수 없다고 써놓았으며 동시에 가까이 접근해서 교전하라고 훈련교범에다가 썼다(Infantry armed with mace or sword. one cannot stampede horses with arrows, javelins or spears. Rather one should try to get close to them and among them).[2]

다른 기록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쉽게 할 수 있다. 검 한자루만 가지고 있는 때 일지라도 그것을 말의 목 위에 올려두고 있다가 우측베기(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베어내기)나 올려베기를 한다면 상대의 돌격하며 찌르는 창질을 간단히 받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왼손에 adarga(방패의 일종)를 들고 있다면, 그걸로 창을 오른쪽으로 빗겨내면서 좌측베기로 상대의 얼굴을 벨 수 있다.

which can easily be done. since even if we have nothing but a sword, if we hold it at the horse's neck,we can easily counter the opponent's encounter from below with a rising or a right-hand cut.If we have an 'adarga', we can give it to the opponent's spear, displacing ourselves on our right side, and then cut to his face with a left-hand b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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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ri Montii Exercitiorum Atque Artis Militaris Collectanea in Tris Libros Distincta (1509)


명나라의 병서인 무비지에서는

중군(中軍)에서 백고초기(白高招旗)를 세우면 갑옷을 입은 각 도수(刀手)는 모여서 대기하는데, 북 소리가 들리면 몸을 날려 왜도(倭刀)의 용법대로 머리를 낮추어 말의 다리를 베고, 몸을 일으켜 말의 머리를 베는 두 가지 도법(刀法)으로 기병을 상대하라.

라고 했다.

효종실록 14권, 6년(1655 을미년, 청 순치(順治) 12년) 6월 17일(경오) 3번째기사에서도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 잡혀간 사람을 만났는데, 교하(交河)의 사노(私奴) 응상(應祥)이었습니다.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물었더니, 그가 갑군(甲軍)으로서 지난해에 남방의 싸움터에 따라갔는데 남군이 패한 체하고 북군을 유인하여 협격해서 북군이 전멸하고 왕자(王子)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남군은 태반이 보졸(步卒)인데 철갑으로 머리와 몸을 싸고 손에는 큰 칼을 들고 몸을 굽히고 곧바로 달려가 말의 다리만을 찍으며 선봉에는 코끼리를 탄 자가 많이 있었다 합니다.

라는 증언이 있다.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무로마치 시대의 전사상자 비율을 본다면 스즈키 마사야는 화살 87%, 칼과 나기나타 8%, 투석 3%, 창 1%라고 연구결과를 내놓았고 토머스 콘랜은 말은 화살 61%, 칼 35%, 창 3%이고 사람은 화살 73%, 칼 25%, 창 2%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덤으로 백병전에서 칼에 의한 부상 비율은 92%라고 콘랜은 설명하였다. 게다가 당시 전장은 넓은 평야 지대가 아니라 좁아터진 해안가라 검병이 기병에게 접근하기도 적절하였다.


3.2. 단병접전[편집]


검은 백병전에서 특히 유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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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 소그드족의 허리띠 장식. 5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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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백병전의 비중이 매우 높았는데 당연히 이런 백병전의 주요 무장은 창이 아니라 검이었다. 1214년 부빈 전투[3]에 관한 연대기에는 양측의 기사들이 서로 창을 겨누고 돌격한 뒤에 칼을 뽑아들어 접전을 벌였으며 잔인한 연합군 기사들이 "길고 가느다란 칼"을 투구의 틈 사이로 찔러 넣어 프랑스 기사들을 죽인다고 비난하는 기록이 있다. 호버크와 방패로 보호받는 상반신은 폴암의 타격과 창의 찌르기도 어렵지 않게 방어해냈기 때문에 가까이 달라붙어서 검, 칼자루로 머리를 마구 내려치거나 투구의 눈구멍과 골반의 갑옷 연결부를 찌르는 공격이 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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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배나 허벅지를 찔리고 주저앉은 말, 근접거리에서 목과 눈을 찌르기 위해 검을 높이 든 자세,
칼자루 타격 등 마상전투와 갑주검술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13세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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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스 돌격 이후 롱소드와 런들대거로 전투를 벌이는 트랜지셔널 아머 시대의 기병들. 14세기 후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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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iath Fechtbuch (MS Germ.Quart.2020)

갑옷을 상대하기 어렵고 내구성이 약해서 군용 무기로는 부적합했다는 낭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갑옷을 입고 싸우는 전투에서도 대체로 둔기보다 검이 우선시 되었다.

16세기 이베리아인 기사 돈 후안 퀴사다는 백병전에 돌입하면 첫 번째로 에스터크을 뽑아 들어야 하며, 즉시 적의 약점인 얼굴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갑옷 연결부를 찌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버렸든 놓쳤든 부러졌든) 에스터크를 잃어버릴 경우 아밍 소드를 들고 싸우며, 아밍소드마저 잃어버린 기사는 워해머와 단검, 레슬링과 주먹으로 싸운다.

15세기의 용병대장이자 군사학 저술가였던 피에트로 몬테 역시 에스터크를 '전신 판금갑옷을 입은 중기병들이 전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기'라고 설명했다.

12세기 동로마의 역사가 요안니스 킨나모스는 1167년의 시르미온 전투에 대해, '하루 종일 지속된 전투로 로마군의 창과 검이 모두 부러졌지만 예비무기인 철퇴를 들고 끝까지 싸워서 헝가리군을 격퇴했다'고 묘사했다.

안방준의 은봉전서에 기록된 안방준의 숙부 안중홍와 원균의 대화에서도, 원균은 '백병전에서 칼이 부러지면 철퇴를 들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자신의 용맹을 자랑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것과 다른 사료들을 보면, 선조실록과 왜란 시기 의병장들의 기록에도 조총과 왜검이 일본군의 주력 무기로 묘사돼 있고 인조실록에는 왜병들이 모두 검술을 배웠기 때문에 조선군을 단병전에서 압도할 수 있었으며 전투의 승패는 결국 단병전에서 결정이 나고 단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검술이라고 평가한 내용이 있다.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강 위에 왕래하는 자들이 혹 한둘 혹 서넛이 큰 칼을 메고 작은 칼을 끼고 있는데 햇빛이 내리쏘아 빛나는 번개와 같았다. ... 칼날은 매우 예리하고 알몸으로 나가 싸우며 쌍도(雙刀)를 잘 쓴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며 보전(步戰)에 능하고 수전(水戰)에 겁을 먹는다. 칼을 쓰고 총을 쏘는 데는 정밀하나 활과 창을 사용하는 데 서투르며, 진영을 겁박(劫迫)하고 복병을 설치하면 중국인도 그 꾀에 빠진다. (재조번방지)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궁병(射者)·창병(槍者)·총병(銃者)·기병(騎者)이 모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을 차고서도 그 기술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절강병과 왜병과 호병을 보면 모두 검법을 알고 있는데,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4]

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접전해 볼 겨를도 없이 먼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검술이 전쟁(戰陣)에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진정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인조실록 1628년 9월 29일 기사)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短兵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强兵)을 만들었습니다." (인조실록 1630년 1월 6일 기사)


근대에 들어선 이후인 중일전쟁에서도 검병이 활용된 적이 있다. 기관총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백병전까지 걸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그림으로 남길 정도로 백병전 비중이 의외로 높았던 중국전선에서는 일본도와 착검돌격한 일본군에게 지지 않기 위해 중국군에서 항일대도를 만들었는데 중국군 자체에서 항일대도용 검술은 만들지 않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민간 무술가를 초빙하여 연구와 교육을 맡기는 방식으로 항일대도술을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의 중국군이 통합된 국군이 아니라 군벌군대의 연합체에 가까웠으므로 이 항일대도용 검술도 군벌마다 부대마다 각기 다른 것을 사용하였다.

가령 1920년 하남의 풍옥상 군벌에 가담한 섬서성 마씨통비문의 마봉도는 명나라 시대의 교범인 단도법선(單刀法選)의 기술을 차용해 파봉팔도(破鋒八刀)로 정립해서 가르쳤다.재현영상 형의권의 한씨 성을 가진 협객을 초빙하여 형의육합도법을 기본으로 8가지의 총검 파훼법을 창안한 것이 파봉팔도로 불렸다는 이설도 존재하며, 이 역시 풍옥상 군벌의 29사단 서북대도대에 교습되었다고 한다.

소림72예로 유명한 김은충(金恩忠)[5]은 1933년 중국 서북군 29사단 대도대의 교육을 책임지고 이 내용을 실용대도술이라는 34페이지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또한 응조번자권의 유법맹(劉法孟)은 1933년 광동군 19사단에서 편성된 대도대의 교육을 맡아 이를 대도술(大刀術)로 정립, 출판하기도 했다.영상 다큐멘터리 영상에서는 이들의 체계와는 확연히 다른 또다른 도법을 훈련하는 당시 영상들도 많이 나오므로, 실제로는 대도술의 종류는 사단별, 군벌별로 제각각 다양했다고 볼 수 있다.

근본 내용 자체는 평범한 중국도법이지만 파봉팔도나 실용대도술은 모두 총검을 상대로 한 내용만을 가르친다. 파봉팔도의 소스가 된 단도법선 자체가 창을 검으로 격파하는 비법을 담은 책이다. 이는 당시 실전에서 가장 쉽게 맞닥뜨리는 것이 일본군의 총검돌격이므로 여기에 대한 대비책을 빨리 교육해야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봉도가 단도법선을 참고한 것도 총검을 이기는 법을 얻고자 했음으로 볼 수 있다. 다른 대도술도 그러했는지는 교범이나 관련 자료를 찾아야 확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김은충 실용대도술을 재현한 영상.


4. 창작물[편집]



4.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편집]


검병(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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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칼에만 칼집이 있어 보관 때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명백한 오해다. 도끼도 창도 폴암류 무기도 모두 날 쪽에 씌우는 형태의 덮개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모두 통틀어 Sheath라고 한다.[2] 물론 접근거부만 할 수 있어도 충분히 유용하다. 적의 기동 방향을 제한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3] 신성 로마 제국 + 노르만 왕조 시절의 땅을 가졌던 잉글랜드 + 포르투갈 + 불로뉴 vs 프랑스의 대립이었는데 슬슬 강해지고 있던 프랑스가 연합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박살을 내며 승리해버렸다. 그리고 이 시기의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의 드넓은 영지를 야금야금 먹혀가고 있었는데 그 시절 잉글랜드의 수장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로 유명한 존 왕이다.[4] 四技. 앞에서 말한 궁술, 창술, 사격술, 기마술. 기마술을 빼면 모두 원거리 공격을 하는 무기이다.[5] 놀랍게도 조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