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타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게타(동음이의어) 문서
게타(동음이의어)번 문단을
게타(동음이의어)#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4><bgcolor=#EE9021,#B87A00> '''{{{#FFF 원수정}}}''' ||
||<width=22%><bgcolor=#FFD860,#785545>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tablebgcolor=#FFEFA5,#000><-3>[[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 [[칼리굴라|가이우스(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1세|클라우디우스]] | [[네로]] ||
||<bgcolor=#FFD860,#785545> [[네 황제의 해]] ||<-3>[[갈바]]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비텔리우스]] ||
||<bgcolor=#FFD860,#785545> [[플라비우스 왕조]] ||<-3>[[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 | [[도미티아누스]] ||
||<bgcolor=#FFD860,#785545><|2>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3>[[네르바]]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 | 공동 즉위 [[루키우스 베루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콤모두스]] ||
||<-3>비정통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
||<bgcolor=#FFD860,#785545> [[다섯 황제의 해]] ||<-3>[[페르티낙스]]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bgcolor=#FFD860,#785545> [[세베루스 왕조]] ||<-3>[[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공동 즉위 [[게타]] · [[카라칼라]] ||
||<bgcolor=#FFD860,#785545> - ||<-3>[[마크리누스]] · [[디아두메니아누스]] ||
||<bgcolor=#FFD860,#785545> [[세베루스 왕조]] ||<-3>[[엘라가발루스]]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
||<bgcolor=#FFD860,#785545> [[군인 황제 시대]] ||<-3>[[막시미누스 트라쿠스]] | 공동 즉위 [[고르디아누스 1세]] · [[고르디아누스 2세]] | 공동 즉위 [[푸피에누스|푸피에누스(막시무스)]] · [[발비누스]] | [[고르디아누스 3세]] | [[필리푸스 아라부스]] · [[필리푸스 2세]] | [[데키우스]] | 공동 통치 [[데키우스]] ·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 공동 즉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호스틸리아누스]] · [[볼루시아누스]] | [[아이밀리아누스]] | 공동 즉위 [[발레리아누스]] · [[갈리에누스]]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퀸틸루스]] | [[아우렐리아누스]] | [[타키투스(황제)|타키투스]] | [[플로리아누스]] | [[프로부스]] | [[카루스]] | 공동 즉위 [[누메리아누스]] · [[카리누스]] [br] 비정통 [[스폰시아누스]] ||
||<-4><bgcolor=#EE9021,#B87A00> '''{{{#FFF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 ||<-3>[[카리누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
||<width=50%><-2><bgcolor=#EE9021,#B87A00> '''{{{#FFF 서방}}}''' ||<width=50%><-2><bgcolor=#EE9021,#B87A00> '''{{{#FFF 동방}}}''' ||
||<bgcolor=#FFD860,#785545> [[사두정치|양두정치]] ||[[막시미아누스]] ||<bgcolor=#FFD860,#785545> [[사두정치|양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
||<bgcolor=#FFD860,#785545> [[사두정치]]
##
##
## 정제 즉위 순서대로 기재합니다.
##
##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우스 1세]]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막센티우스]] | 2차 재위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누스 1세]] ||<width=22%><bgcolor=#FFD860,#785545>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 [[갈레리우스]] | [[리키니우스]] | [[막시미누스 다이아]] | [[발레리우스 발렌스]] | [[마르티니아누스]] ||
||<-4><bgcolor=#EE9021,#B87A00> '''{{{#FFF 통일}}}'''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콘스탄티누스 왕조]] ||<-3>[[콘스탄티누스 1세]] ||
||<-2><bgcolor=#EE9021,#B87A00> '''{{{#FFF 서방}}}''' ||<-2><bgcolor=#EE9021,#B87A00> '''{{{#FFF 동방}}}'''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콘스탄티누스 왕조]] ||공동 즉위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스]][br]비정통 [[마그넨티우스]] ·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 · [[베트라니오]] ||<bgcolor=#FFD860,#785545>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
||<-4><bgcolor=#EE9021,#B87A00> '''{{{#FFF 통일}}}'''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콘스탄티누스 왕조]] ||<-3>[[콘스탄티우스 2세]] ||
||<width=50%><-2><bgcolor=#EE9021,#B87A00> '''{{{#FFF 서방}}}''' ||<width=50%><-2><bgcolor=#EE9021,#B87A00> '''{{{#FFF 동방}}}'''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bgcolor=#FFD860,#785545>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
||<-4><bgcolor=#EE9021,#B87A00> '''{{{#FFF 통일}}}'''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콘스탄티누스 왕조]] ||<-3>[[율리아누스]]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 ||<-3>[[요비아누스]]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3>[[발렌티니아누스 1세]] ||
||<-2><bgcolor=#EE9021,#B87A00> '''{{{#FFF 서방}}}''' ||<-2><bgcolor=#EE9021,#B87A00> '''{{{#FFF 동방}}}''' ||
||<|2><bgcolor=#FFD860,#785545>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 [[그라티아누스]] | [[발렌티니아누스 2세]] ||<|2><bgcolor=#FFD860,#785545>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2>[[발렌스]][br]비정통 [[프로코피우스(반란자)|프로코피우스]] ||
||비정통 [[에우게니우스]]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테오도시우스 왕조]] ||[[마그누스 막시무스]] · [[플라비우스 빅토르]] ||<bgcolor=#FFD860,#785545>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
||<-4><bgcolor=#EE9021,#B87A00> '''{{{#FFF 통일}}}''' ||
||<bgcolor=#FFD860,#785545><height=35> [[테오도시우스 왕조]] ||<-3>[[테오도시우스 1세]] ||
||<-2><bgcolor=#EE9021,#B87A00> '''{{{#FFF 서방}}}''' ||<-2><bgcolor=#EE9021,#B87A00> '''{{{#FFF 동방}}}''' ||
||<bgcolor=#FFD860,#785545><|2> [[테오도시우스 왕조]] ||[[호노리우스]] | [[콘스탄티우스 3세]] | [[발렌티니아누스 3세]] [br] 비정통 [[히스파니아의 막시무스]] ||<bgcolor=#FFD860,#785545><|2> [[테오도시우스 왕조]] ||<|2>[[아르카디우스]] | [[테오도시우스 2세]] | [[마르키아누스]] ||
||비정통 [[콘스탄티누스 3세]] · [[프리스쿠스 아탈루스]] · [[요안네스]] ||
||<bgcolor=#FFD860,#785545> 최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아비투스(로마)|아비투스]] | [[마요리아누스]] | [[리비우스 세베루스]] | [[안테미우스]] | [[올리브리우스]] | [[글리케리우스]] | [[율리우스 네포스]]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bgcolor=#FFD860,#785545> 레오 왕조 ||[[레오 1세(황제)|레오 1세]] | [[레오 2세(황제)|레오 2세]] | [[제노(로마)|제노]] | [[바실리스쿠스]] · [[마르쿠스(바실리스쿠스의 아들)|마르쿠스]] | 2차 재위 [[제노(로마)|제노]] ||
||<-4><bgcolor=#EE9021,#B87A00> '''{{{#FFF 동방}}}''' ||
||<bgcolor=#FFD860,#785545> [[레오 왕조]] ||<-3>2차 재위 [[제노(로마)|제노]] | [[아나스타시우스 1세]] ||
||<bgcolor=#FFD860,#785545>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3>[[유스티누스 1세]]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유스티누스 2세]] | [[티베리우스 2세]] | [[마우리키우스]] · [[테오도시우스(마우리키우스의 아들)|테오도시우스]] ||
||<bgcolor=#FFD860,#785545> - ||<-3>[[포카스]] ||
||<bgcolor=#FFD860,#785545> [[이라클리오스 왕조]] ||<-3>[[이라클리오스]] | 공동 즉위 [[콘스탄티노스 3세]] · [[이라클로나스]] · [[다비드 티베리오스]] | [[콘스탄스 2세]] · [[콘스탄티노스 4세]] · [[이라클리오스(콘스탄스 2세의 아들)|이라클리오스]] · [[티베리오스(콘스탄스 2세의 아들)|티베리오스]] | [[유스티니아노스 2세]] ||
||<bgcolor=#FFD860,#785545> [[20년간의 혼란]] ||<-3>[[레온티오스]] | [[티베리오스 3세]] | 2차 재위 [[유스티니아노스 2세]] | [[필리피코스]] | [[아나스타시오스 2세]] | [[테오도시오스 3세]] ||
||<bgcolor=#FFD860,#785545> [[이사브리아 왕조]] ||<-3>[[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아르타바스도스의 아들)|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
||<bgcolor=#FFD860,#785545> [[니키포로스 왕조]] ||<-3>[[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미하일 1세 랑가베스의 아들)|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미하일 1세 랑가베스의 아들)|스타브라키오스]] ||
||<bgcolor=#FFD860,#785545> - ||<-3>[[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레온 5세의 아들)|콘스탄티노스]] ||
||<bgcolor=#FFD860,#785545> [[아모리아 왕조]] ||<-3>[[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
||<bgcolor=#FFD860,#785545> [[마케도니아 왕조]] ||<-3>[[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로마)|조이]] · [[테오도라(11세기)|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11세기)|테오도라]] ||
||<bgcolor=#FFD860,#785545> - ||<-3>[[미하일 6세]] ||
||<bgcolor=#FFD860,#785545> [[콤니노스 왕조]] ||<-3>[[이사키오스 1세]] ||
||<bgcolor=#FFD860,#785545> [[두카스 왕조]] ||<-3>[[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콘스탄티노스 10세의 아들)|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미하일 7세의 아들)|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
||<bgcolor=#FFD860,#785545> [[콤니노스 왕조]] ||<-3>[[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미하일 7세의 아들)|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요안니스 2세의 아들)|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
||<bgcolor=#FFD860,#785545> [[앙겔로스 왕조]] ||<-3>[[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
||<-4><bgcolor=#EE9021,#B87A00> '''{{{#FFF 니케아}}}''' ||
||<|2><bgcolor=#FFD860,#785545> [[니케아 제국|라스카리스 왕조]] ||<-3>[[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
||<-3>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
||<-4><bgcolor=#EE9021,#B87A00> '''{{{#FFF 동방}}}''' ||
||<bgcolor=#FFD860,#785545> [[팔레올로고스 왕조]] ||<-3>[[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
||<-4><bgcolor=#9F0807> {{{#!wiki style="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font-size: 1.053em; letter-spacing: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2 {{{#FCE774 __'''아우구스투스'''__ · [[틀:역대 로마 카이사르|{{{#FCE774 카이사르}}}]]}}}}}}}}} ||
||<-4><bgcolor=#9F0807> {{{#!wiki style="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font-size: 1.053em; letter-spacing: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2 {{{#FCE774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국왕|{{{#FCE774 국왕}}}]]}}}{{{#!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49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독재관 및 기병장관|{{{#FCE774 독재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__'''황제'''__}}}[br]{{{#!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12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6세기|{{{#FCE774 기원전 6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12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5세기|{{{#FCE774 기원전 5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12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4세기|{{{#FCE774 기원전 4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12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FCE774 기원전 3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12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FCE774 기원전 2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12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FCE774 기원전 1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1세기|{{{#FCE774 1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2세기|{{{#FCE774 2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3세기|{{{#FCE774 3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4세기|{{{#FCE774 4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5세기|{{{#FCE774 5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6세기|{{{#FCE774 6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7세기|{{{#FCE774 7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8세기|{{{#FCE774 8세기 집정관}}}]]}}}{{{#!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85px; padding: 0 6px"
[[틀:역대 로마 집정관/9세기|{{{#FCE774 9세기 집정관}}}]]}}}}}}}}}}}} ||}}}



게타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
게타
GETA


파일:800px-Publius_Septimius_Geta_Louvre_Ma1076.jpg

이름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Publius Septimius Geta)
출생
189년 3월 7일
로마 제국 로마
사망
211년 12월 26일 (향년 22세)
로마 제국 로마
재위 기간
로마 황제
211년 2월 2일 ~ 211년 12월 26일 (326일)
전임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후임자
카라칼라
부모
아버지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어머니 : 율리아 돔나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2.2. 아버지의 죽음과 유언
2.3. 암살
3. 평가
4. 여담



1. 개요[편집]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둘째아들이자 카라칼라의 친동생. 로마 제국의 21대 황제로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다. 형 카라칼라와 공동황제였으며, 형에 의해 어머니 앞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재위기간은 209년부터 211년까지이다.


2. 생애[편집]



2.1. 황제가 되기 전[편집]


파일:external/www.cachecoins.org/geta.jpg
파일:external/www.wildwinds.com/RIC_0016a-o.jpg
카이사르 시절의 게타가 도안된 로마시대 주화들

본명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Publius Septimius Geta)로, 할아버지, 큰아버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의 풀네임을 그대로 따왔다.

189년 3월 7일생으로 고향은 로마이다. 간혹 메디올라눔 태생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로마 태생이 맞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율리아 돔나 사이에서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위에는 연년생 형인 카라칼라가 있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 세베루스가 콤모두스 아래에서 지방 총독에 부임했다고 하며, 외모는 아버지 세베루스를 붕어빵 수준으로 많이 닮았다고 한다.

9세이던 198년, 1살 위의 형 카라칼라가 황제(Augustus)로서 아버지와 공동황제가 되었을 때 부황제(Caesar) 칭호를 받았고, 199년 가을에 어머니, 형과 함께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길에 동행했다. 이 원정길에서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변까지 침공해서 부유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하고 귀환했다. 그리고 202년 열린 로마에서의 개선식에서 아버지, 형과 함께 나란히 개선장군이 타는 마차를 타고 갓 건립한 세베루스 개선문을 지났다.

203년 형의 장인이자 황실 근위대장인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와 14세의 나이에 집정관을 지냈고, 205년 1월 1일에는 16세의 나이에 17세의 친형 카라칼라와 집정관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형과 사사건건 다투면서 불화가 매우 커져 나중에 가면 형제간의 불화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아버지의 명령으로 가까스로 취임했지만 그래도 형과는 여전히 사이가 나빴다.

208년부터 211년까지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에서 벌어진 스코틀랜드 원정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하였다. 전투는 원주민들의 게릴라 전술로 병력 손실이 많았고, 큰 성공을 직접적으로 거두진 못했지만, 브리타니아 속주 방어선과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안정화되었다.


2.2. 아버지의 죽음과 유언[편집]


브리타니아 북쪽 병영에 있는 동안, 카라칼라와 게타는 불화가 너무 커서 아버지 세베루스만 아니었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를 극단적인 상황까지 사이가 악화된 상태였다. 둘은 동복친형제임에도 원정길 내내 서로를 견제했고, 그 긴장감은 부모조차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211년 2월 4일,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영국 땅에 있는 에부라쿰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게타는 론디니움(런던)에 있었는데, 평소 효성이 지극하던 그는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자 오늘날의 요크에 해당하는 에부라쿰까지 달려와 며칠 전부터 곁을 지켰다고 한다.

동시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죽기 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제가 서로 아끼면서 사이좋게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무시해도 좋다. 그러나 병사들을 우대하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1]


2.3. 암살[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veran_dynasty_-_tondo.png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뒤, 왼쪽 하단에 그려진 동생의 얼굴을 지우게 했다.

브리타니아에서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하자 23세의 카라칼라와 22세의 게타는 공동황제가 되었다. 이 때 이들은 브리타니아의 칼레도니아인들과 강화조약을 맺고는 아버지의 유해를 수도에 매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로마 귀환을 서둘렀다. 이윽고 황제 일행은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형제 간의 공존은 힘들었고, 그 공존 역시 세베루스 부부의 헛된 꿈에 불과할 정도로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극도로 사이가 나빴는데, 브리타니아 원정을 치루면서 이 관계는 더 악화됐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영국에 있는 동안 한 막사 안에서 단 한 번도 함께 있지 않았고, 식사 역시 따로 먹었으며, 병사들이 보는 상황에도 늘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증오했다. 그러다보니 상황이 언제든지 파국으로 갈 수 있기에 어머니 율리아 돔나는 두 아들의 공동 통치를 유지케하고 형제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총동원해 이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지 않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로마 귀환 이후, 공동황제가 된 카라칼라와 게타는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둘은 각기 군대를 갈라 나눴고, 내란의 기미가 곳곳에서 감지될 정도로 극도의 불안 상태가 유지되었다. 팔라티누스 황궁은 두 형제의 명에 따라 두 부분으로 분할됐고, 형제를 따르는 시종, 호위병들에게 둘은 상대방의 공간 자체를 가지 못하게 했다. 이는 원로원과 법정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카라칼라는 자신의 법정에서, 게타는 자신의 법정에서 각각 다른 의견의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당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급기야 카라칼라와 게타가 제국을 둘로 나누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간곡한 만류와 협박으로 실패했고 이는 골육상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무례하긴 했지만 폭력적인 사람이 아닌 게타와 달리, 카라칼라는 장인, 장모, 아내, 처남, 그리고 아이에 불과한 처조카까지 살해할 정도로 그 잔인함과 냉혹함이 아버지 세베루스 이상이었다. 카라칼라는 211년 동생과 제국을 분할하기로 했던 협약이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동생이 위험하다고 생각되자, 게타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12월 17일 열린 사투르날리아 축제에서 카라칼라는 게타 암살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과거 플라우티아누스 일가가 도륙된 과정을 알고 있던 게타의 친구와 지지자들은 게타를 보호했고 이 암살시도는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211년 12월 로마의 황궁 안에서는 대형 참사가 벌어지게 된다.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가 머물던 곳으로 유인하였고 근위병들과 함께 경호원들과 황궁으로 들어오던 게타를 공격하면서 게타가 어머니에게 도망갈 때 어머니 앞에서 동생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22세의 게타는 어머니를 껴안으며 죽었는데, 카라칼라는 비무장 상태의 동생을 백부장에서 빼앗은 칼로(또는 숨겨둔 단검으로) 동생을 죽였다. 이때 게타는 형의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죽으면서 "어머니, 형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절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 게타를 경호하던 지지자들도 모두 근위병들에게 살해된다.

동생을 살해한 카라칼라는 마침내 유일무이한 황제가 됐지만, 당대의 디오, 헤로디아누스 등에 따르면 이후 그는 발기부전이라는 고통과 불면증, 환각환청이라는 저주로 죽을 때까지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 카라칼라는 동생의 초상화를 제거하도록 지시하고, 게타의 지지자들과 친구들, 그리고 저명한 법률가이자 친위대장인 파피니아누스를 무자비하게 제거했다.[2] 그리고 게타 암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카라칼라의 행동을 비난하는 군인들[3]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인상시켜 주었고 이에 그들은 돈을 받고 카라칼라에게 충성을 맹세한다.[4] 이렇게 카라칼라에 의해서 살해됨으로 인해 게타의 이미지는 순교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3. 평가[편집]


고대 기록 등을 통해, 게타는 그동안 순교자 이미지의 불행한 황제 중 한명으로 평가받았다. 디오 카시우스의 경우에는 게타를 옹호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지만 대개 고대 로마인 사가들은 게타에게 호의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 기록들에서는 스물 둘의 나이에 쓰러진 그의 장점을 부각했고 형 카라칼라의 잔인함과 비열함을 상징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서술했다. 그러나 그가 제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카라칼라보다 더 나은 또는 더 많은 덕을 지닌 황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게타도 형인 카라칼라만큼 성품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기록이 상당히 많으며, 형 카라칼라처럼 결점이 분명해도 꽤 영리했다는 이야기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그가 카라칼라에게 살해당하면서 부풀려진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게타의 이미지가 좋아진 것은 분명 211년 형의 손에 암살된 이유가 컸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게타는 아버지와 가장 닮았으나, "어려서부터 얼굴이 잘생겼고 무례하진 않았지만, 무뚝뚝했으며, 여자를 밝혔고 애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비열하고 탐욕스러웠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또 그는 살아생전 "다양한 향신료를 넣은 음식과 포도주를 좋아했고, 자신의 옷과 보석에 돈을 많이 쓰면서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선물을 하지 않는다"고 평판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를 평할 때, 대개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세베루스 치세 후기의 변화된 계획으로, 새로운 후계구도에 직면한 형 카라칼라 입장에선 자신과 대립각을 키우고 비열하게 행동한 동생 게타에게 적개심과 분노, 수치심을 느낄만 하다"고 말한다.

다만 살아생전 비정함과 짠돌이의 대명사로 대중에게 알려졌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경우처럼 단순히 성격에 모가 났다고 좋은 황제가 되진 못했을 거라 단정 짓는 것도 잘못된 것이긴 하다. 애초에 게타는 22살의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 실력을 입증할 기회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지지기반이 원로원과 법률가,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등 세베루스 가의 엘리트 집단인 부분 역시 게타가 형에게 살해되지 않거나, 공존했다면 괜찮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듣는 이유이다.


4. 여담[편집]


형 카라칼라에게 암살된 이후, 모든 초상화들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것처럼 파괴된 탓에 제위 등극 후 대리석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에 따르면, 제위 등극 직전부터 풍성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해 형과 달리 젊은 시절의 아버지 외모가 연상됐다고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1 14:31:11에 나무위키 게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의 사이가 극도로 벌어져 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카라칼라와 게타 간의 대립과 결과를 너무 잘 알았기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미 결과를 예측했다고 말한다.[2] 자신을 변호해 달라는 카라칼라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3] 디오에 따르면 군인들은 세베루스 황제와 닮은 게타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세베루스 황제가 창설한 제2 파르티카 군단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4] 하지만 당시 로마의 재정상태를 감안하면 무리한 인상이었다. 그 결과, 국고는 고갈되었고, 이는 결국 카라칼라가 화폐 개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안토니니아누스'라는 화폐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