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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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1964년 출생
- 타무라시 출신 인물
- 간 내각 국무대신
- 노다 내각 국무대신
- 일본 외무대신
- 일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 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신당 사키가케 국회의원
- 구 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민진당(일본) 국회의원
- 입헌민주당(2020년) 국회의원
- 일본의 도도부현의회의원
- 조치대학 출신
-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후쿠시마현 제3구 중의원으로,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민주당 간사장 대리,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1964년 5월 20일, 후쿠시마현 타무라시에서 태어났다. 후쿠시마현립 아사카 고등학교를 거쳐 조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다. 1987년 4월 마쓰시타 정경숙을 졸업한다. 1991년에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26세였는데, 현의원 사상 최연소였다. 그러던 중 1993년 중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현의원을 임기 중에 사임했다.
1993년의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후쿠시마현 제2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초선한다. 이 선거에서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이 처음 국회에 대량으로 진출했다. 노다 요시히코와 다카이치 사나에, 이토 다쓰야, 모테기 도시미쓰, 마에하라 세이지[1] , 에다노 유키오 등이 이때 첫 당선된 동기로 나머지는 다 한 번씩 완전 낙선해서 9선이지만 겐바와 마에하라, 에다노는 단 한번도 완전 낙선하지 않았기에 10선이다. 특히 같은 해 11월, 호소카와 내각이 제출한 정치개혁법안에 찬성, 다음 달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했다. 1996년에는 앞서 신당 사키가케를 탈당해서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를 중심으로 결성되고 있던 구 민주당의 창당에 참가한다. 같은 해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후쿠시마현 제3구에서 출마하나 자민당의 아라이 히로유키에게 패배하고 석패율제로 부활한다.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출마하여 당선되고, 2003년의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41회 총선거에서 패배했던 아라이 히로유키를 쓰러트리고 4선한다. 2004년 간 나오토의 사임 후 오카다 가쓰야가 민주당 대표로 취임하면서 그는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2005년의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후쿠시마현 제3구에서 5선한다. 같은 해 9월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는 마쓰시타 정경숙의 동기였던 마에하라 세이지를 지지했다. 결국 마에하라는 대표로 선출된다. 마에하라가 호리에 메일 논란으로 사임 후 후임 오자와 이치로 대표에게 간사장 대리의 연임 요청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2007년 3월에는 민주당 분권 조사 회장, 9월에는 중의원 청소년 문제에 관한 특별 위원장에 취임한다. 2009년 8월 31일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자민당 요시노 마사요시를 꺾고 당선된다. 2009년 9월 정권 교체로 중의원 재무금융위원장에 취임한다. 문예춘추 2010년 3월호에서 비 오자와파와 친 오자와파로 계파 갈등이 심해지자 오자와 이치로를 배울 점이 많다고 하면서도 오자와에 의지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
2010년 6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후임 대표 간 나오토는 겐바를 민주당 정책조사회장에 임명했다. 2010년 6월 8일 간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에 취임하고 제2차 개조내각 때까지 연임한다. 2011년 4월 29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의 복구에 예산안의 성립을 향한 3당 합의 문서를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공명당의 이시이 게이이치 정무조사회장과 나눴다.
2011년 9월 2일에 출범한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 외무대신에 취임한다. 당시 나이는 47세로 전임 마에하라 세이지를 제치고 전후 최연소이다.
2012년 12월 16일 치러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본인의 지역구인 후쿠시마현 제3구에 출마해서 자민당 간노 사치코 후보를 더블 스코어로 꺾고 당선되었는데, 이는 노다 내각 발족 당시부터 2012년 12월 26일 내각 총사퇴 시기까지 각료를 지낸 유일한 의원이자, 동시에 지역구를 수성한 유일한 의원이다.
이후 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당선되다가 오카다 가쓰야에 의해 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민진당 시기에서도 역임하다가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민주당에 참여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활동하게 된다. 2019년 1월 16일 무소속 교섭단체 사회 보장을 재건하는 국민 모임을 설립해, 간사장으로 취임한다.
입헌민주당이 주도하는 신당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3. 정치적 성향 및 주장[편집]
- 헌법 개정 + 자위대 명기 + 집단적 자위권 찬성.
- 핵무장 완전 반대.
- 일본의 핵무기금지조약(TPNW) 참가 찬성.[4]
- 사이버성 신설 적극 찬성.
- 일본의 TPP 가입에 찬성한다.
- 원자력 발전소 재개 주장.[5]
- 현행 소비세율 10% 유지.
-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에 대해 조금 찬성.
- 동성결혼 법률 명기 약간 찬성.
- 여성천황제 찬성.
4. 여담[편집]
5. 논란[편집]
- 외무대신 재직 시절이던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아키히토 덴노에 대한 사과 요구 등 한일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을 때 항의의 표시로 자신이 가장 즐겨 듣고 있던 카라의 CD를
눈물을 머금고쓰레기통에 버렸다.
- 2020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을 비롯해 미국 대표팀 등 일부 대표팀들이 후쿠시마산 식재의 방사능 위험성을 고려해 자국서 만든 도시락을 공수하는 일이 현재 진행중인 와중에 이 작자는 유독 한국만을 콕 집어서 IOC에 강력 항의하고 엄중한 주의를 줘야 한다며 어그로를 끌었다. 이는 자신의 지역구의 불만을 표출하여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행위로 보인다. 효과는 확실했는지 이 작자의 지역구인 후쿠시마 3구에서는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6. 소속 정당[편집]
7. 선거 이력[편집]
8. 관련 문서[편집]
9. 둘러보기[편집]
[담당분야] 납치자 문제, ODA[1] 당시 겐바의 마쓰시타 정경숙 동기로 같은 8기생이다.[2] 자위대 보유 명기, 환경권 조항, 프라이버시권, 국민의 알 권리, 교육의 충실을 향한 환경 정비, 각 도도부현에서 1명 이상 참의원 의원 선출, 지방 공공 단체 권한 강화, 총리 해산권 제약에 관련한 부분의 개헌을 찬성했다.[3]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4] 단, 정식 참가는 아닌 어디까지나 옵저버로서 참가하는 것을 찬성한다. 이거에 대해서는 2021년 중원선 NHK 앙케이트 결과를 참고할 것.[5] 다만, 탈탄소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원전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재생에너지를 주력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6] 당 집행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지 않을때는 자주 극장을 찾았다고 한다.[7] 민정당, 사회시민연합, 신당우애와 신설 합당[8] 당적과는 별개로 무소속 출마, 2017년부터는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활동.[9]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0] 1993년 12월
입당, 1996년 8월 30일
탈당, 동년 9월 28일
창당.[석] 지금까지의 선거 중, 유일한 석패율제 당선.[11] 석패율: 96.1%
입당, 1996년 8월 30일
탈당, 동년 9월 28일
창당.[석] 지금까지의 선거 중, 유일한 석패율제 당선.[11] 석패율: 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