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쇼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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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44대 천황
겐쇼 덴노
元正天皇


파일:겐쇼 천황.jpg

출생
680년
사망
748년 5월 2일 (향년 68세)
일본 나라현 헤이조쿄
(現 일본 나라현 나라시)
능묘
나호야마서릉(奈保山西陵(내보산서릉)[1]
재위기간
제44대 천황
715년 10월 3일 ~ 724년 3월 3일
일본 상황
724년 3월 3일 ~ 748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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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카(日高(일고, 氷高(빙고)
부모
부황 구사카베 황자
모황 겐메이 덴노
형제자매
1남 2녀 중 장녀
관저
헤이조쿄(平城京(평성경)
한풍 시호
겐쇼 덴노(元正天皇(원정천황)
화풍 시호
일본근자고단정족희천황
(日本根子高瑞淨足姬天皇)[1]
연호
레이키(靈龜(영귀, 715년 ~ 717년)
요로(養老(양로, 717년 ~ 724년)


1. 개요
2. 행적
3. 신라와의 공방전
4. 가족관계



1. 개요[편집]


일본의 제44대 천황. 나라 시대 두 번째 군주이자, 여섯 번째 여성 천황이기도 하며, 어머니 겐메이 덴노 바로 뒤에 여성 천황으로 즉위했다. 이름은 히타카(日高, 氷高)였다.


2. 행적[편집]


어머니인 겐메이 덴노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몬무 덴노[2] 사후 황위는 본래 그의 아들 오비토 황자(쇼무 덴노)가 이어야 했지만 황자의 나이가 너무 어려 오비토의 할머니인 겐메이 덴노가 대신 즉위했다. 그리고 오비토는 겐쇼 덴노가 즉위한 후 황태자로 봉해졌다.

천황 재위 도중인 717년 '요로'(養老)로 개원했으며, 어머니 겐메이 상황의 마음에 따라 나가야 왕을 우대신으로 임명하고, 717년 10월에는 후지와라노 후사사키(후히토의 차남, 북가)를 내신으로 삼아 후사사키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후지와라노 후히토에 의한 《요로 율령》 편찬과 토네리 친왕 등에 의한 일본서기의 완성도 보았으며, 토지 확보 계획을 발표하고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삼세일신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만요슈》에는 겐쇼 덴노가 직접 지은 노래가 실려 있다.

겐쇼 덴노는 747년 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다가 748년 60대의 나이로 붕어했다.


3. 신라와의 공방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삼국사기》와 《해동제국기》에는 이 당시 신라 왕인 성덕왕과 서로 공수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각각의 입장에서 실려있다.

겐쇼 덴노(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신라 성덕왕 14년)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 《해동제국기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720년,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관련 내용이 안나온다.

성덕왕(聖德王) 30년(서기 731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했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삼국사기


731년, 일본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지휘하에 300척의 군함이 쳐들어왔으나 곧바로 신라군이 격퇴했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의 원인이 된 왕성국 사건도 734년에 벌어졌는데, 일본에 보낸 신라 사신이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말한 것이다. 《서경》, 《주례》 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 따르면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다

고 했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무례하다고 하며 사신을 쫓아 버렸다. 왕성국 사건은 앞서 신라가 일본의 침공을 손쉽게 격퇴했다는 자부심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규슈(九州) 미야자키 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 전해 내려오는 《능백묵서》(綾布墨書)에 따르면, 백제 왕 부여풍(扶餘豊)[3]의 아들 부여사(扶餘絲)를 비롯한 일가가 나라 현에 정착했으나, 일본 내 정쟁에 휘말려 부여사의 손자로 추정되는 정가왕(禎嘉王)이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 현 일대로 이주한 뒤, 백제을 칭하며, 연호를 '정거'(定居)라 했다고 한다. 당시 정가왕은 미야자키에 정착한 뒤 지역민들에게 불교 신앙과 건축술, 농업 등을 전파했다. 그러나 718년경에 나당연합군 또는 신라군이 미야자키 현을 침공하여,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백제 유민들 및 토착 지역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만약 718년과 720년의 신라에 의한 일본 침공이 사실이라면 731년의 일본군 병선 300척의 공격은 그에 대한 보복 공격일 수도 있다.


4. 가족관계[편집]


[1] 나라현 나라시 소재[2] 겐쇼 덴노에게는 남동생이 된다.[3]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부흥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1 14:57:51에 나무위키 겐쇼 덴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