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빈 박씨(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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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 | 敬嬪 朴氏


파일:경빈박씨묘소.jpg

경빈박씨묘 전경
출생
1480년대 후반
조선 경상도 상주군
(現 경상북도 상주시)
사망
1533년 6월 25일(음력 5월 23일)
조선 경상도 상주군 유배지
(現 경상북도 상주시)
능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산33-47
재위기간
조선 숙의
1507년 ~ 1509년 10월 8일
조선 소의
1509년 10월 8일 ~ 1517년 8월 19일
조선 경빈
1517년 8월 19일 ~ 1533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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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밀양 박씨
부모
부친 - 박수림(朴秀林)
배우자
중종
자녀
슬하 1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아들 - 복성군(福城君, 1509 ~ 1533)[1]
장녀 - 혜순옹주(惠順翁主, 1512 ~ 1584)
차녀 - 혜정옹주(惠靜翁主, 1514 ~ 1580)

봉작
숙의(淑儀) → 소의(昭儀) → 경빈(敬嬪)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기타
5. 자녀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16세기 초 조선 중종의 후궁.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의 생모이자 작서의 변으로 폐출 당한 불운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중종실록에 따르면 상주 지방의 사족 박수림(朴秀林)의 딸로 연산군 11년(1505) 채홍사 때문에 미색이 알려졌다. 그래서 이듬해(1506)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궁중에 들어와서 중종에게 총애를 받았다.

일설에는 박원종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박씨를 양녀로 삼아 후궁으로 들여보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박씨는 본관이 밀양이고 박원종은 순천이라 같은 집안도 아니었거니와, 박원종의 생질장경왕후였으므로 굳이 외부인을 양녀로 삼을 이유도 없었다.[1]

중종 4년(1509) 박씨는 아들 복성군[2]을 낳았다. 중종은 여러 후궁 중에서도 첫 아들을 낳은 박씨를 총애하였다. 중종 10년(1515) 장경왕후가 미래의 인종을 낳고 엿새만에 숨을 거두자, 중종은 박씨를 새 왕비로 삼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신하들 중 정광필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보다 앞서 왕비 자리[坤位]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숙의 박씨(淑儀 朴氏)가 후궁 가운데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왕후[章敬]의 예를 따라 스스로 왕비 자리[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중략)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아뢰기를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 여성의 미덕)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7월 22일

정광필이 한 '미천한 출신'이라는 말부터가 경빈 박씨를 저격하는 표현이다.[3] 더군다나 이때 훗날 인종이 되는 장경왕후 소생의 원자가 있었으므로, 박씨가 왕비가 되면 원자보다 먼저 태어난 복성군과 서열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이 때문에 조정 내 분위기는 원자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미 아들을 낳은 후궁을 새 왕비로 책봉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귀결됐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경빈 박씨나 희빈 홍씨 같은 후궁들은 전부 왕비 후보에서 제외되고 중종의 계비로 문정왕후가 간택되었다.

중종 22년(1527) 작서의 변이 일어났을 때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고문을 동원하여 가혹하게 문초하여도 아무도 박씨가 범인이라고 증언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종은 박씨를 내치기로 결정하고 그해 4월 21일 복성군과 함께 궁궐에서 폐출하여 본가가 있는 상주로 유배를 보냈다. 아버지 박수림과 오라비 박인형(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등도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경빈이 폐출되고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그해 12월에 중종이 대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용하였다.

그러나 6년이 지나 중종 28년(1533)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그해 5월 23일 중종은 사사(賜死)를 명하였다. 이때 중종은 의녀 두 사람을 상주로 보내 사약을 내렸다. 사흘이 지나 그달 26일에는 복성군도 사사되고, 두 옹주도 작첩을 빼앗기고 서인이 되었다. 박씨의 첫째 딸 혜순옹주의 남편 김인경(金仁慶, 1515~83)은 변방으로 유배를 떠났고, 둘째 딸 혜정옹주의 남편 당성위 홍려(唐城尉 洪礪, ? ~ 1533)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복성군이 사사당한) 5월 26일에 먼저 사망했다. 작서의 변 당시 겨우 화를 피한 아버지와 오빠들도 이 때에 멀리 귀양을 떠났다.[4] 그야말로 경빈 박씨의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흐름과 변동에 대해서는 작서의 변 항목 참고.

중종 36년(1541) 세자(인종)가 중종에게 탄원하기를, "박씨가 요망한 일을 했더라도 미(복성군)가 알았겠습니까." 하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종은 미에게 복성군 신분을 되돌려주도록 허락하였고, 두 옹주 또한 신원해 주었다. 그러나 중종은 경빈 박씨-복성군 모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는 인정하지 않았고, 박씨를 공식적으로 신원해주었는지 또한 실록 상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당시 조정에서는 박씨와 복성군, 당성위 홍려 등이 억울하게 죽은 듯하긴 한데 증거는 없고, 임금의 체면 문제도 있으니 복성군과 옹주들의 신원을 되돌려주는 선에서 수습하자는 분위기였다.

3. 평가[편집]


요사이 외부에 들리는 말로는 박빈(朴嬪)이 국가에 공덕(功德)이 있지도 않으면서 지위가 1품(品)에 오르고 총애(寵愛)가 후궁들 중에 제일이라 하니, 신 등은 전하께서 사정에 치우쳐서 집안을 다스려가는 정사에 누덕(累德)이 될까 싶습니다.

대개 정배(正配)와 잉첩(媵妾), 저군(儲君)과 지서(支庶)는 상하의 구분이 하늘과 땅 같아 바꿀 수 없는 법인데, 만일 분한을 정하지 아니하여 낮은 자가 높은 이를 적대시하고 천한 자와 귀한 자를 나란하게 한다면, 능멸하고 참람한 짓을 하게 될 조짐이 이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참소하여 모함할 발단이 이로 말미암아 싹트게 되는 법이니, 진실로 나라를 가진 분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의리가 앞서면 은혜를 방치하게 되고 은혜가 지나치면 의리가 없어지는 법이니, 반드시 은혜 보이는 도리와 의리 지키는 도리를 둘다 남김없이 극진하게 해야 가법(家法)이 바로잡아지고 다스리는 도리가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중종실록》 중종 17년(1522) 6월 8일자 상소문 #


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만 힘썼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가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시론(時論)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라고 했다.

《중종실록》 중종 22년(1527) 4월 26일 #

당시 대간들이나 실록을 기록한 사관이 비판할 정도로 중종에게 매우 총애받았지만, 그를 이용해 뇌물을 모으고 성품이 좋지 않아 작서의 변으로 폐출될 때에도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4. 기타[편집]


  • 인터넷상에서는 흔히 작서의 변의 진범이 밝혀져 박씨와 복성군 모자가 억울함을 벗었다고 설명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을 주도하고 실행한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자(인종) 또한 중종에게 탄원하며 두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고는 설명하지 않고, 다만 미(복성군)의 딸이 불쌍하게 지내니까 자신이 바라보기 괴롭다고 중종의 동정심을 자극하고자 하였다.

  • 흔히 인터넷상에서는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와 8살 차이가 난다는 설이 퍼져 있는데, 경빈의 생년이 기록에 전해지지 않아 정확하지 않은 정보이다. 경빈의 장남 복성군이 1509년생이라 1501년생인 문정왕후보다 8살 어린데, 여기에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중종반정 직후에 함께 후궁으로 입궐한 장경왕후희빈 홍씨가 각각 1491년, 1494년생임을 감안하다면, 경빈 또한 그들과 비슷한 또래일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다. 문정왕후는 1501년생이므로 어림 잡아서 8살 차이가 나기는 한다.

5. 자녀[편집]



  • 1녀: 혜순옹주(惠順翁主, 1512년 - 1583년).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에게 하가. 1527년 작서의 변 당시 남편과 함께 직첩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1541년에야 복위되었다. 친자녀는 없고, 시동생 김원경(金遠慶)의 아들 김호수(金虎秀)를 양자로 들였다.

  • 2녀: 혜정옹주(惠靜翁主, 1514년 - 1580년).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에게 하가하여 1녀를 낳았다. 홍여는 가작인두의 변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고, 혜정옹주와 홍씨 가문도 유배되는 등 화를 당했다가 오랜 세월 후에야 복권되었다. 혜정옹주의 딸은 윤임의 손자 윤호(尹琥)와 결혼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풍란 경빈박씨 나종미.png}}} ||<width=400>
파일:풍란 경빈 박씨 박원숙.png
[1] 이는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지 않았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 월탄 박종화의 대하소설이 히트를 치면서 박종화의 소설 <여인천하>에서 경빈을 박원종의 수양딸로 설정한 이래, 다른 역사소설가들의 작품에도 이것이 차용되고 각종 사극에서도 이것이 모방되면서 대중들의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1996년 드라마 조광조와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경빈 박씨가 박원종의 수양딸이라고 등장했다[2] 처음에는 서성군(瑞城君)으로 봉해졌다가 중종 12년(1517)에 복성군으로 봉호가 바뀌었다.[3] 경빈의 부친 박수림은 비록 사족(士族)이지만 비길 데 없이 한미하고 궁색했다고 한다.[4] 박인형, 박인정은 각각 온성벽동에 유배되었는데 중종 33년(1538)에 사헌부에서 이들의 유배형을 풀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중종이 거절하였고, 중종 36년(1541)에는 중종 쪽에서 이들을 방면하는 게 어떻느냐는 뜻을 내비추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고향(상주)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이후에는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두 기록에서 부친 박수림은 언급되지 않는데 귀양된 1533년에서 1538년 사이에 사망했던 것 같다.
〈조선왕조 500년 - 풍란〉의 경빈 박씨(왼쪽은 나종미, 오른쪽은 박원숙 배우가 연기한 모습)

  •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풍란에서는 배우 나종미와 박원숙이 연기했다. 나름 포스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문정왕후(김혜자 분)와 대립한다. 여담으로 원래는 나종미가 배역을 맡았다가 중간에 박원숙으로 갑자기 배우가 바뀌었는데 이유인 즉, 나종미의 얼굴이 동안이라 노인 분장이 힘들어 김혜자가 맡은 문정왕후와 맞서는 역할로는 약하기 때문이며 나종미의 영화 촬영으로 인해 오래 지방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차 시기가 6월 초인데 경빈 박씨는 6월 말까지 출연할 예정이었기에 하차를 얼마 앞두어 교체함을 두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92236D1-A6F4-4C0E-862F-F4F5AF39922B.png}}} ||
〈조광조〉의 경빈 박씨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bspr.sbs.co.kr/mag06-27.jpg}}} ||
〈여인천하〉의 경빈 박씨
중종반정을 주도한 정국공신 박원종의 수양 딸이며[8] 중종의 장자인 복성군(오승윤[9] 분)을 낳아 중종의 총애가 깊은 점을 이용해[10] 남곤, 심정 등 조정 세력과도 깊이 결탁하여 큰 권세를 누리며 아들인 복성군을 다음 대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성질은 평소에는 침착하다가도 급하고 불 같은 난폭한 면이 있으나 정난정(강수연 분), 김안로(김종결 분) 등처럼 정치 감각과 책략이 뛰어난 캐릭터로 나오며 이들과는 때에 따라 서로 견제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한다. 궁중에서는 문정왕후(전인화 분)와 서로를 자신의 가장 큰 으로 여기며 대립한다.[11] 시종일관 미친 존재감을 보이면서 정난정을 몇 번이고 위협하지만 문정왕후, 정난정, 김안로가 합작해 뒤집어 씌운 작서의 변으로 몰락해 상주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제123화에서 사약을 먹고 비참하게 죽는다.[12] 제124화에서는 복성군(안홍진[13] 분)도 사약을 먹고 죽는다. 문정왕후로서도 일생의 라이벌로서 인상에 크게 남았는지 마지막 화에서 죽기 직전 경빈 박씨의 환영을 본 듯 "경빈이 나를 데리러 왔다. 곧 가겠다"라고 말한 뒤 바로 눈을 감는다. 이 시기 악역 연기가 워낙 출중해서 실존 인물인 경빈 박씨의 이미지도 나빠지는데 한 몫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작중에서도 야망이 컸을 뿐 악행을 저지른건 아니었지만 주인공이 문정왕후와 정난정인지라 정확히 따지자면 악역이 아닌 반동인물로 봐야 한다.[14]
[5] 훗날 김성령은 〈조광조〉의 대본을 집필한 정하연 작가의 후속작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폐비 윤씨를 연기했는데 〈조광조〉에서 중종을 연기했던 이진우와 다시 1번 부부 역할로 호흡을 맞추었다.[6] 일시 정지되고 브금으로 "아아→아↗~~~"는 <여인천하>가 인기 있던 당시 유행어가 되었다.[7] 원래는 이 정도로 비중있는 인물이 아니었는데 도지원의 표독스러운 연기로 인해 미친 존재감급 인물이 된 것. 특히 경빈 박씨가 입버릇처럼 내뱉은 "뭬야-!"는 본래 대본에서 그냥 평범하게 "뭐야?"였는데 뭔가 심심한 듯해서 도지원이 "뭬야?"라고 부른게 입에 착착 붙어서 작가도 그대로 반영하게 됐다고 한다. 이 대사는 2015년에 도지원이 출연한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다시 썼다. 이러한 미친 존재감을 뽐낸 도지원은 2001년 S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지만 경빈 박씨의 강렬한 이미지 탓인지 이후 캐스팅이 쉽게 성사되지 않아 마음 고생이 컸던 모양.[8] 오히려 이로 인해 자신감이라도 생겼는지 친가족을 문전박대하는 조광조의 경빈과는 달리 친가족들에게도 나름 값비싼 재물을 여럿 나누어주는 등 친가족들도 챙겨주는 걸로 묘사된다.[9] 복성군 역할로 SBS 연기대상 아역상을 받았고 이후에 2002년 KBS 드라마 〈매직키드 마수리〉에 캐스팅되어 대박을 터뜨린다. 그녀의 아들 역인 어린 복성군이 경빈에게 얻어맞거나 하는 장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10] 작중 설정상으로 중종의 조강지처인 단경왕후가 쫓겨난 이후 가장 먼저 승은을 입은 후궁이 경빈이라 "사실상 경빈이 조강지처나 다름없다"는 말을 중종 본인이나 자순대비가 하기도 한다.[11] 실제 역사에서는 윤원형(이덕화 분)과 복성군이 비슷한 연배인데다가 문정왕후도 복성군보다 나이가 단지 8살 많을 뿐이었기 때문에 경빈이 문정왕후보다 훨씬 나이가 들었을 테지만 배우들의 연령 때문에 경빈과 문정왕후가 아무리 봐도 동년배로밖에 안 보인다. 생년이 미상인 역사상의 경빈과 달리, 극중에서의 경빈은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에 입궐했을 당시 19살이라는 설정이므로(2화 박원종과 경빈의 첫 대면 장면 참조) 세는나이로 보면 중종과 동갑인 1488년생이 된다. 문정왕후는 역사와 동일하게 1501년생(10화에서 부친 윤지임이 신유년생이라고 언급)이라고 나오므로, 극중 기준 경빈이 13살 연상이 된다.[12] 그 대신이랄까, 123화는 강수연의 클로즈업 엔딩이 아니라 도지원의 엔딩으로 끝났다.[13] 본작에서 홍경주 역을 맡은 배우 안대용의 아들.[14] 다만, 제작진이 경빈을 악역으로 보이도록 시도한 것은 맞다. 작중에서 경빈과 복성군을 모시는 금이를 경빈-복성군(어린시절) 모자가 좀 많이 화풀이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종영 후 제작진이 경빈이 사약을 받는 장면에서 사약을 항아리째로 들이붓는 장면에 대해 "악독한 인물은 험악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작중 돋보이는 표독스런 연기도 실제 기록된 악행이 부족하니 악역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부각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NG 장면을 보면 가짜 사약으로 쓰인 콜라가 코나 눈 등을 통해 들어가서 도지원이 놀라 울먹이는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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