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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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효헌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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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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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군
영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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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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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경은군 이재성 | 景恩君 李載星


조선 장종의 현손
경은군 이재성 | 景恩君 李載星

봉호
경은군(景恩君)
이름
이재성(李載星)
생부
익평군 이희
적모
덕성군부인 덕수 이씨
생모
미상
부인
군부인 안동 권씨
군부인 여흥 이씨
자녀
2남
출생
1860년 12월 21일[A]
사망
미상[1]
1. 소개
2. 생애
2.1. 초반과 가계
2.2. 관직 생활
3. 말년
4. 여담
5. 가족과 후손



1. 소개[편집]


조선왕족이자 대한제국황족.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증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손자이자[2] 익평군서자이다.


2. 생애[편집]



2.1. 초반과 가계[편집]


1860년(철종 11년) 12월 21일[A], 익평군와 그의 소실[3]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만 2세) 때인 1863년(철종 14년) 9월에 아버지 익평군을 잃었다. 실제 핏줄로 보면 그가 익평군의 가계(家係)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서자인데다 당시 아주 어렸기 때문에 덕흥대원군의 12대손인 이덕주[4]가 익평군의 적장자로 입적해서 가문을 이었다. 왕족의 경우는 4대까지는 서얼에서 빠지지만(대표적으로 철종), 경은군의 경우는 영조5대손이라 왕족 신분에서 벗어난 관계로 서얼로 판정되었다.[5]

익평군 사후 경은군은 영평군 이경응과 함께 효종혈통을 물려받은 단 둘뿐인 남성 왕손이었다.[6]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덕흥대원군, 선조, 인조 대에서 갈라진 사람들이 입양 온 것이다.

파일:조선후기 왕실 가계도(혈통).png}}}
양자 관계를 배제하고 혈통 계보만 그린 조선 후기 왕실 가계도.
연한 노란색 바탕 인물은 친아들 없이 사망한 사람들이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독자, 현종의 아들 숙종도 독자였다. 숙종의 장성한 세 아들 중 경종연령군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영조만 아들 둘을 남겼다. 영조의 장자였던 효장세자는 9살에 요절했고, 차남 사도세자가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장남 의소세자도 3살에 죽었고, 차남 정조가 슬하에 2남을 두었으나 정조의 대는 헌종을 끝으로 결국 다 끊기고 말았다. 4남 은신군과 5남 은전군은 아예 자녀가 없었고, 유일하게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만이 슬하에 무려 7남을 두었다. 그런데 그중 4명은 아들이 없었고, 상계군, 풍계군, 전계대원군만 아들을 낳았다. 상계군이 낳은 아들은 서자인데다 요절했고, 전계대원군은 3남(회평군, 영평군, 철종)을 두었는데, 이 3명 다 아들을 못 낳았거나 낳았어도 일찍 죽었다. 그리고 둘째 영평군만이 철종 사후에도 생존했다. 풍계군은 독자 익평군을 낳았고, 익평군도 독자 경은군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영평군과 경은군 둘만 남은 것이었다. 영평군 사후에는 효종의 유일한 남성 후손이었다.

익평군 사후 몇 달 지나지 않은 1863년 12월에 철종 역시 승하했는데 핏줄과 항렬로만 따지면 그가 계승 서열이 가장 높은 왕족이었다.[7] 하지만 만 3세라는 너무 어린 나이, 서출의 한계, 그리고 흥선군신정왕후 조씨의 커넥션 등 여러 문제로 왕이 되지 못했으며 본가의 계통조차 잇지 못했다.


2.2. 관직 생활[편집]


음서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20살 때인 1879년(고종 16년) 9월 승문원[8] 이문학관에 임명받았다.

그가 맡은 벼슬은 주로 왕실 관련 직책이었다. 국상 때마다[9] 종척집사[10]를 지냈고, 종정원 주사[11]를 역임했으며, 《선원보략》[12]을 수정할 때 그것을 관리감독했다. 또한 향관(享官)[13]과 사직서령[14]을 역임했고, 시종원 시어[15], 전선사 주사[16], 비서원승[17] 등 임금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직책을 맡았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종실과 여러 대신들과 함께 고종에게 칭제건원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같은 해부터 독립협회종친 자격으로 찬조금을 후원했다.

대한제국 수립 직후에는 이천군수, 원구단 황궁우 역소 별감, 내부 시찰관 등을 지냈다. 후원해주던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후에는 담배 제조 공장인 연초제조주식회사(煙草製造株式會社)를 세워서 경영했다.

1899년(광무 3년) 말에 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이에 황제의 4대손은 황족으로 대우한다는 예법에 따라 경은도정(景恩都正) 작호를 받았고 1900년(광무 4년) 경은군(景恩君)으로 승격했다.

경은군으로 승격할 무렵, 경운궁(덕수궁) 담장 확장 공사를 마무리한 공적으로 종2품으로 품계가 올라갔다.[18] 같은 해 2월 13일 회양군 공립 소학교교사가 되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19] 해고당하고 경은군 작위 또한 박탈당했다. 1902년(광무 6년)에 사면받았고, 1903년(광무 7년) 8월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20][21]으로 임명받으면서 다시 경은군(景恩君)으로 봉해졌다.

동구릉 수릉관으로 재직 중이던 1906년(광무 10년) 3월 2일에 《대한매일신보》에서 그의 행적을 비판하는 기사를 냈다.

능관의 부도덕한 짓

본사 전서구의 소보를 근거로 했다. 요즘 동구릉 능관들이 법률과 규율을 가볍게 여기며 사리와 체면을 더럽혀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존엄한 재실 근처에 색주가를 문드러지게 설치하고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 난잡하게 즐겼다. 그러다 그 일이 탄로나서 앞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엄중하게 처벌한다는데, 그 색주가를 경은군 이재성씨가 주도 지휘하여 설치했다고 한다. 군에 봉해진 수릉관으로서 이런 더럽고 패악한 행위를 감행하여 조정의 체면을 남김없이 파괴하고 손상시키니, 수릉하며 절제할 행동을 삼가지 않은 채 불손하고 폐단을 허다하게 일으키는 것을 이로 미루어 상상할 수 있다 하더라.[22]

1906년 3월 2일 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그해 7월 16일에는 고종에게 가까운 종친이라는 이유로 훈 1등 태극장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인 1907년(광무 11년) 1월에는 《국조어첩》[23]의 서사관이 되었다.#

순종 즉위 후인 1907년(융희 원년) 9월 30일에는, 예장소의 광중명정 서사관으로 참여한 공로로 숙마 1필을 선물로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해 10월 14일에는 항일 의병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

직명을 거두다

경은군 이재성씨는 종적이 수상하고 의병으로 간섭했다하여 그 직첩을 우선 거두어 들이라고 조칙을 내리셨더라.[24]

1907년 10월 16일 자 《대한매일신보》 기사[25]



3. 말년[편집]


1910년(융희 4년) 3월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가는 곳이 어디인가

경은군 이재성씨는 요새 무슨 사건 때문인지 거처를 알지 못한다는데 경시청에서 그 종적을 샅샅이 찾는다는 말이 있다더라.[26]

1910년 3월 23일 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언제 죽었는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첫번째 부인 안동 권씨의 묘가 서울 왕십리에 있었으나 그마저도 위치를 잊고 말았다.


4. 여담[편집]


  • 1898년(광무 2년) 이천군수로 재직할 당시, 경기도 관찰부에 납부해야 할 3,000원을 도둑맞았다.(...) 그 때문에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김영덕이 이천의 세금을 면제해줄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 이천 군수로 재직 시, 백성들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 들어 그들의 고충을 잘 듣고 이해해주었다고 한다.

  • 승문원 이문학관으로 일할 때, 항상 관복을 똑바로 차려입고 정시 출근하도록 했으나 탈이 있다고 하여 얼마 못가 교체당했다고 한다. 또한 황족으로써 독립협회에 후원하고 의병들과도 어울렸다. 저런 점들을 통틀어 보면, 아마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확실히 범생이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 하다. 이런 면은 조카 뻘인 의친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패러독스 사의 Hearts of Iron IV의 대형 대체역사 모드 중 하나인 마지막 제국에서는 칭제건원을 통해 황제국이 된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조 태황제의 하나뿐인 태자였던 효헌태자 이정이 요절하고 대신 종친 중에서 황위를 이을 인물을 물색하게 되는데,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인 완경군 이재황을 대신하여 낙첨되어 황태제가 되었다. 이후 고조가 천붕하고 황태제로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휘를 천(𠀡)으로 바꾸어 황제로 즉위한다. 사후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로는 강문장인무의열성광황제(康文莊仁武毅烈聖光皇帝)[27]로 정해진다.

5. 가족과 후손[편집]


부인이 둘 있었다. 첫 부인은 안동 권씨로, 1살 연상이며 권재익(權在益)의 딸이다. 1859년(철종 10년) 11월 5일에[28] 태어나 1888년(고종 25년) 5월 25일에[29]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여흥 이씨로, 19살 연하이며 이병로(李丙老)의 딸이다. 1879년(고종 16년) 6월 18일에[30] 태어났고 사망 년과 월일은 알 수 없다.[31]

슬하에 2남을 두었다. 권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남 이춘용(李䡅鎔)을,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 이우용(李萭鎔)을 두었다. 두 사람 모두 《선원속보》에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이외 경은군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철종 사후 생존해있던 효종의 생물학적 남계 후손은 영평군과 경은군 단 둘뿐이었다. 영평군은 친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32] 만약 경은군 이재성의 두 아들 이춘용과 이우용이 대를 잇지 못했다면 효종의 실제 남계 자손은 현재 완전히 끊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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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음력 11월 10일.[1] 1910년까지는 생존[2] 친할아버지는 상계군의 동생 풍계군.[3] 성씨이름은 알 수 없다.[4] 이재성과는 생가로 24촌 형제 뻘이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따라 이재덕(李載悳)으로 개명했다.[5]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은 후에야 장조 임금의 4대손 자격으로 비로소 정식 왕족으로 인정받고 작호를 받았다. 처음에는 도정이었다가 군으로 승격했다.[6] 여성 왕손으로는 영혜옹주 등이 있다.[7] 철종과 가장 가까운 핏줄은 당연히 형제인 영평군이었다. 그러나 영평군은 철종의 동생이 아니고 형이어서 철종의 뒤를 이을 수 없었다. 설령 동생이었어도 헌종과의 항렬 문제가 있었다. 실제 핏줄로 따졌을 때 철종과 고종은 17촌이었고, 철종과 경은군은 5촌이었다. 어마어마한 차이인셈이다.[8] 조선시대외교 문서를 맡은 관청.[9] 신정왕후(1890년)와 명성황후(1895년), 효정왕후(1904년), 순명효황후(1904년).[10] 조선시대 국상 때 가까운 왕실종친 및 인척에게 시키는 임시 벼슬.[11] 宗正院. 종정원은 조선 말기 왕실 계보에 관한 업무를 맡아 보던 관청이다.[12] 왕실 족보.[13] 국가에서 실시하는 각 왕릉, 선원전 등의 제사를 맡아보는 관리.[14] 社稷署令, 사직단과 그 주변의 청소을 관리하던 사직서(社稷署)의 벼슬이다.[15] 侍從院. 1895년 관제 개혁 때 왕실 사무를 관장하는 궁내부 아래에 새로 소속 된 관청. 시어(侍御)는 을 곁에서 보좌하는 직책을 말한다.[16] 典膳司. 고종 시기 궁중 내의 식사 공급 업무를 맡았던 관청.[17] 秘書院. 비서원은 조선 말기에 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비서원승(秘書院丞)은 최고 책임자인 비서원경 바로 아랫 서열.[18] 고종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이후 몇 년 간 계속 경운궁 확장 공사를 했다.[19] 무슨 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에도 없다.[20] 궁내부는 조선 말기 왕실 내부의 여러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으로, 특진관은 1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구성된 관리직이다.[21] 칙임관(勅任官) 4등.[22] 원문: 陵官悖擧 - 本社傳書鳩에 所報ᄅᆞᆯ 據ᄒᆞᆫ즉 近日東九陵陵官들이 法紀를 弁髦ᄒᆞ며 事軆를 瀆셜ᄒᆞ야 莫重尊嚴ᄒᆞᆫ 齋室近側에 色酒家들 爛設ᄒᆞ고 晝夜沈湎娛樂하다가 該事件이 綻露돼야 將次免官重勘하리라ᄂᆞᆫᄃᆡ 該色酒家設置ᄒᆞᆫ 根由인즉 景恩君李載星氏가 主謀指揮ᄒᆞᆷ이라하니 以若封君也와 守陵官으로 此等鄙悖ᄒᆞᆫ 行爲ᄅᆞᆯ 敢行하야 朝家軆貌를 壞損無餘하니 凡於守陵之節에 不敬不愼하고 許多作獘ᄂᆞᆫ 推此可想이라하더라[23] 조선시대 왕족의 계보를 전주 이씨 시조 이한부터 조선 건국 이후까지 순서별로 엮어 기록한 책.[24] 원문: 직명을 거두다 - 경은군 리ᄌᆡ셩씨ᄂᆞᆫ 죵젹이 슈상ᄒᆞ고 의병으로 간셥ᄒᆞ였다ᄒᆞ여 그 직텹을 위션 거두어 드리라고 죠칙이 ᄂᆞ리셧더라[25] 이 때 순종이 내린 명은 "경은군(景恩君) 이재성(李載星)이 남몰래 행동하면서 나쁜 무리와 호응한다고 하니, 직명(職名)을 우선 환수하도록 하라."였다. 이 소식은 《황성신문》에서도 10월 18일자 제1면 1단으로 보도했다.[26] 원문: 가ᄂᆞᆫᄃᆡ가 어디여 - 경은군 리ᄌᆡ셩씨ᄂᆞᆫ 근일에 무ᄉᆞᆷ ᄉᆞ건을 인ᄒᆞᆷ인지 거쳐를 알지못ᄒᆞᆫ다ᄂᆞᆫᄃᆡ 경시쳥에서 그죵젹을 형탐ᄒᆞᆫ다는 말이 잇다더라[27] 줄여서 광황제(光皇帝)[28] 음력 10월 11일.[29] 음력 4월 15일.[30] 음력 4월 29일.[31] 출처: 1900년(광무 3년) 제작《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32] 단, 양자를 들여 법적인 후손들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