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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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선 이외의 경인선에 대한 내용은 경인선(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고속도로에 대한 내용은 경인고속도로 문서 참고하십시오.
개통 당시에는 노량진이 기점이었으며 1900년 7월 경성까지 연장되었으나,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구로 이북 구간이 경부선 구간에 편입되고 나머지만 경인선으로 남았다. 그 흔적은 경부선 용산 - 구로 구간 중 경부3선에 남아있는데 경부3선은 사실상 경인선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부3선을 타는 열차는 대부분 1호선 경인선 계통인 용산-동인천 급행/특급열차이며, 경부선 열차는 1호선 영등포-광명 셔틀열차밖에 없다.
이 노선을 운행하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역번호는 경인선을 본선으로, 경부선-천안직결선-장항선을 지선으로 부여되어 있다.
1897년 3월 22일 대한제국은 주한미국전권공사 겸 기업가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게 사업을 맡겨 기공하였다. 미국이 기공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한제국 정부가 '국내철도규칙’(1896. 7. 15)을 반포하면서 철도규격을 표준궤로 채택하였는데, 미국 철도가 표준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사업권을 가져오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 조직이 매우 불안정하여 조만간에 나라로서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고(경술국치) 대놓고 소문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미국의 대한반도 투자를 크게 위축시켰다. 그리고 1898년에 자금난을 겪어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던 것을 당해 5월 10일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양도받아[13] 1899(광무 3)년 9월 18일에 완공시킨다(철도의 날). 당시 일본의 철로는 협궤였기 때문에 협궤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미 표준궤로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대륙과 연결이 용이하단 이점 덕에 협궤논의는 무산되고 계속해서 표준궤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노선은 제물포(현 인천역) - 축현(현 동인천역)- 우각동[14] - 부평 - 소사(현 부천) - 오류동 - 노량진이었다. 1899년 개통 당시 노량진역은 임시 정류장이었다. 이후 한강철교 완공과 함께 용산을 지나 경성까지 가는 노선이 완공되었다.
개통 당시 길이는 33.2km, 최고 속도는 30km/h였다. 모갈 증기기관차가 운행하였다. 노량진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으로, 표정속도는 19.8km/h였다.[15] 당시 운임은 상등석 1원 50전, 중등석 80전, 하등석 40전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4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상등석이 60,000원, 중등석은 32,000원, 하등석은 16,000원 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인천 - 노량진 구간 소요시간은 완행열차로 58분, 동인천 - 노량진 구간 소요시간은 급행열차로 약 43분, 특급열차로 38분이고 운임은 현금으로 2,350원[16] 으로 소요시간은 특급 기준 40%정도로, 운임은 하등석 기준 11%정도로 감소한 셈이다.
급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선형이 매우 좋지 못했고[17] , 그래서 개통 10년도 못 된 1907년과 1908년 사이에 대규모 개량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개량공사를 통해 현재의 주안 - 동인천 구간 선형이 크게 변경되었다. 미카형 증기기관차가 미국에서 직수입 혹은 일본을 통해 간접 공수되어 투입되었으며,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운행되었다.
개화기 경인선은 명목상 사철이지만 사실상 국유철도로 기능했는데 한일합방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설치되고 정식으로 일본의 국유철도가 되었다. 1904년 경부선 개통으로 경인선은 실질적으로 경부선 지선이 되었지만 조선 수위도시 서울과 외항 인천을 연결하는 노선으로써 그 당시부터 수송량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는 1928년에 복선화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 부족으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결국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도 현재처럼 선택정차 운영이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단해 모든 역을 필수정차역으로 운영했다.[18]
1945년 해방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경인선은 해방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운영을 보였으며, 미군정에 의해 운영되다가 정부 수립후 교통부가 관할하고, 1963년에 대한민국 철도청이 출범하면서 철도청이 경인선을 관할했다. 6.25 전쟁으로 경인선도 조선인민군에 의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 정부는 일제가 이루지 못한 경인선 복선화에 나섰고, 부족한 재정 상황에서도 공사를 추진해 1965년에 구로 - 인천 구간 복선화를 완료했다. 이 시기에 증기기관차 - 객차 편성을 대신해 일본에서 니가타 디젤동차를 도입하여 운행시간 단축을 이뤄내기도 하였다.[19]
1960년대에도 모든 열차가 모든 역에 정차했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과 동시에 전철화를 하여 직결된 수도권 전철 1호선에 편입되었다. 이후로 일반열차는 비정기적 관광열차 외에는 운행하지 않으며 통근형 전동차가 운행 중이다. 기록상 일반열차의 마지막 운행일은 1974년 8월 14일이다. 초기에 중장년층 이상 연령대에서 주로 기억하는 '식빵' 이라는 별명을 가진 초저항 전동차가 전철화 직후 주로 운행했다.
이후 통행량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1999년에 구로 - 부평 구간이 2복선화되었고, 2002년에 부평 - 주안, 2005년에 주안 - 동인천 구간이 2복선화되었다.[20]
초저항과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는 2020년에 모두 퇴역되었으며, 현재는 한국철도공사 31x000호대 전동차와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전동차가 투입되어 운행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수도권 전철 1호선, 수도권 전철 1호선/급행, 수도권 전철 1호선/운행 계통 문서를 참고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22년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경인선을 경유하는 정기열차의 운행 빈도는 다음과 같다(단위: 회/일, 작성기준: 편도, 주중).
수도권 전철 개통 이전에는 보통 등급 일반열차(비둘기호 등)가 통근열차 역할을 하며 운행되었으며, 지금도 아주 가끔 관광용 단체 무궁화호가 새벽 및 밤시간대에 들어오기도 한다. 때문에 철도통계연보에서 수송실적이 잡히는 역들이 간헐적으로 있다. 스크린도어 위치와 일반열차 출입문 위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스크린도어가 없는 1선(급행선)에서 승하차한다. 주로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위한 전세열차로서 투입되는 경우인데, 철도 패키지 여행 특성상 대부분 승객은 중년 여성들이다. 내장산 단풍 구경을 위해 임시 새마을호가 경인선에 들어와 패키지 관광객들을 가득 태우고 정읍으로 떠난 적도 있으며, 이런 임시열차는 직통으로 다니거나 아니면 중간에 한 역에 정차해 다른 관광객들을 더 태우고는 바로 목적지로 가는게 주 패턴이다. 임시 무궁화호 목적지도 정선이나 곡성과 같은 관광지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개찰구는 비상용 게이트를 개방하거나 자동개집표기를 비상 모드로 전환하여 통과한다.
경인선 인근 지역 중 상당수는 부설 이후부터 무계획적인 시가지가 들어서 시가지 단절이 심하다. 이어져야 할 지선도로들도 단절되어 있고 이로 인해 간선도로의 정체도 심각한 수준이다. 횡단하는 도로(과선교, 지하차도 등)를 건설하기도 어려워 자동차로 건너기도 힘들며, 이외에도 소음도 매우 심하다.
경인선은 수도권 전철 운행 개시 이래 상상 이상의 수송량을 보이고 있다. 이 엄청난 수송량에 대처하기 위해 2복선이 건설되었지만[21] , 이는 시가지 단절을 더 심화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근 주민들 중 상당수가 지하화를 강력히 원하며, 인근 지방자치단체 및 국회의원의 필수 공약이기도 하다. km당 건설비를 1,500억으로 계산하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9호선 1단계 구간 km당 건설비가 약 1,400억). 비용을 감수할 정도로 편익이 있는지가 문제이다.
송도에 인천신항이 건설되면서 인천항을 이용하는 화물운송은 장기적으로 수인선, 인천신항선,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로 옮겨갈 예정이기 때문에 경인선 지하화로 인해 생기는 화물운송 제약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온수와 소사, 부평 등 지하로 교차하는 부분에서는 공사 과정이 고난도이다. 여객열차가 운행되고 있고 선로 수가 훨씬 많은 경부선에 비해서는 실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현재 기본 계획은 선로를 현 선로 지하에 건설하고 현재 선로 부지는 매각하여 사업비에 충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선로 부지가 아닌 부일로, 경인로 등의 인근 도로에 지하철처럼 건설될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복복선보다는 복선+대피선 건설로 공사비 절감을 추구할 수도 있다.
위 내용은 어디까지나 추진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일 뿐이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부천, 재정자립도도 높고 그 많았던 빚도 다 해소했지만 그래도 아직 거대 토목 사업을 벌이긴 부담스러운 인천, 재정자립도는 높지만 그만큼 쓸 곳이 많은 서울[22] 모두 교통 예산이 풍족하지 않고 국비를 사용하려 해도 예타조사에서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 국비 투입이 거의 불가능하므로[23] 민자 유치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요금이 비싸진다는 단점이 있어 쉽지 않다. 인근에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시행된다면 교통분담금 명목으로 사업비를 조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업과 동시에 인근 재개발을 동시에 시행할 가능성도 높다.
2016년 3월 12일, 서울시 등에 따르면 타당성 분석은 추진한다고 한다.[24]
2016년 10월 25일, 사업 타당성 연구 용역에서 경제성이 낮아 철도부지를 일반 재산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와 경인선 지하화가 난관에 봉착했다고 한다.[25]
일단 인천시에서는 제2경인선이 지어지면 그동안 경인선에 몰려있던 수요가 분산되니 복선+대피선 방식으로도 충분히 감당이 가능하며, 이러면 공사비가 줄어 타당성 확보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제2경인선의 경우 아직 선형도 확정짓지 못한 상황이다. 즉 경인선의 지하화문제는 적어도 제2경인선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어야 추진할 동력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후 2022년 6월 13일 인천일보 기사에도 경인고속도로 및 경인선 지하화가 나와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26]
노반이 지나는 서울, 부천, 인천 구간 중에 큰 산이 없어서 터널이 없다. 백운 - 동암 구간, 부평아트센터 근처를 통과할 때 짧게 있긴 하나, 이 곳은 2015년 이후로 새롭게 조성한 공원이 들어선 것이라서 터널이라 보기에는 약간 미흡하다. 평야 지형을 따라가는 지질적 장점도 있었지만 처음에 경인선이 부설되던 시기만 하더라도 터널을 굴착하는 기술이 매우 미흡했기에 산이 있으면 그 산을 돌아서 가는 형태로 철로를 깔았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역들은 스크린도어가 열릴 때 "안전문이 열립니다." 나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라는 방송이 나오는데 음질이 매우 안 좋다. 이는 GS네오텍(소사역 등)이나 현대엘리베이터(부평역 급행 승강장 등)의 스피커 부품 문제이다.
경부철도가처럼 경인철도가라는 철도찬가도 있다.
간선도로인 경인로가 나란히 지어져 있다. 그래서 경인선과 경인로 모두 상시 혼잡한 상태를 유지 중이며, 혹여나 경인선이 기후 등의 이유로 운행이 중단되었을 경우 경인로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에 빠지며, 부평역부터 영등포역까지 완전히 겹치는 88번은 특히 더욱 그러하다.
서울 남서부와 인천 남동부를 이어주는 제2경인선 계획이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됐다.
지금은 옛말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경원선과 더불어 저항제어 차량이 자주 다녀서 발열 등의 문제로 인해 승객들과 철도 동호인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었다.
2022년 기준 경인선 일평균 승하차 순위이다. 환승역의 경우 경인선이 아닌 다른 노선의 승하차객은 제외한다.
자세한 내용은 경인선/역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속도로에 대한 내용은 경인고속도로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경인선(京仁線, Gyeongin Line)은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역과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을 연결하는 총 길이 27km의 철도 노선이다. 노면전차를 제외한 한반도 최초의 철도 노선이자[2] 현재 존재하는 한국 철도 노선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일하게 19세기에 만들어졌다. 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최초의 전 구간 개통 고속도로 노선인 경인고속도로를 제치고 고속국도 1호선을 부여받았지만, 일반철도만큼은 경인선이 1번(301)을 부여받았다. 경부선은 302번, 고속선의 경우에는 서울-인천 사이에 고속선이 없기 때문에 경부고속선이 1번(101)이다.
개통 당시에는 노량진이 기점이었으며 1900년 7월 경성까지 연장되었으나,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구로 이북 구간이 경부선 구간에 편입되고 나머지만 경인선으로 남았다. 그 흔적은 경부선 용산 - 구로 구간 중 경부3선에 남아있는데 경부3선은 사실상 경인선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부3선을 타는 열차는 대부분 1호선 경인선 계통인 용산-동인천 급행/특급열차이며, 경부선 열차는 1호선 영등포-광명 셔틀열차밖에 없다.
이 노선을 운행하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역번호는 경인선을 본선으로, 경부선-천안직결선-장항선을 지선으로 부여되어 있다.
2. 연혁[편집]
- 편의를 위해 경부선으로 편입된 서울-구로 구간 내용 일부 삽입
2.1. 착공과 개통[편집]
1897년 3월 22일 대한제국은 주한미국전권공사 겸 기업가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게 사업을 맡겨 기공하였다. 미국이 기공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한제국 정부가 '국내철도규칙’(1896. 7. 15)을 반포하면서 철도규격을 표준궤로 채택하였는데, 미국 철도가 표준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사업권을 가져오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 조직이 매우 불안정하여 조만간에 나라로서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고(경술국치) 대놓고 소문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미국의 대한반도 투자를 크게 위축시켰다. 그리고 1898년에 자금난을 겪어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던 것을 당해 5월 10일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양도받아[13] 1899(광무 3)년 9월 18일에 완공시킨다(철도의 날). 당시 일본의 철로는 협궤였기 때문에 협궤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미 표준궤로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대륙과 연결이 용이하단 이점 덕에 협궤논의는 무산되고 계속해서 표준궤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노선은 제물포(현 인천역) - 축현(현 동인천역)- 우각동[14] - 부평 - 소사(현 부천) - 오류동 - 노량진이었다. 1899년 개통 당시 노량진역은 임시 정류장이었다. 이후 한강철교 완공과 함께 용산을 지나 경성까지 가는 노선이 완공되었다.
개통 당시 길이는 33.2km, 최고 속도는 30km/h였다. 모갈 증기기관차가 운행하였다. 노량진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으로, 표정속도는 19.8km/h였다.[15] 당시 운임은 상등석 1원 50전, 중등석 80전, 하등석 40전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4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상등석이 60,000원, 중등석은 32,000원, 하등석은 16,000원 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인천 - 노량진 구간 소요시간은 완행열차로 58분, 동인천 - 노량진 구간 소요시간은 급행열차로 약 43분, 특급열차로 38분이고 운임은 현금으로 2,350원[16] 으로 소요시간은 특급 기준 40%정도로, 운임은 하등석 기준 11%정도로 감소한 셈이다.
급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선형이 매우 좋지 못했고[17] , 그래서 개통 10년도 못 된 1907년과 1908년 사이에 대규모 개량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개량공사를 통해 현재의 주안 - 동인천 구간 선형이 크게 변경되었다. 미카형 증기기관차가 미국에서 직수입 혹은 일본을 통해 간접 공수되어 투입되었으며,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운행되었다.
2.2. 일제강점기[편집]
개화기 경인선은 명목상 사철이지만 사실상 국유철도로 기능했는데 한일합방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설치되고 정식으로 일본의 국유철도가 되었다. 1904년 경부선 개통으로 경인선은 실질적으로 경부선 지선이 되었지만 조선 수위도시 서울과 외항 인천을 연결하는 노선으로써 그 당시부터 수송량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는 1928년에 복선화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 부족으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결국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도 현재처럼 선택정차 운영이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단해 모든 역을 필수정차역으로 운영했다.[18]
2.3. 해방 이후 - 1974년[편집]
1945년 해방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경인선은 해방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운영을 보였으며, 미군정에 의해 운영되다가 정부 수립후 교통부가 관할하고, 1963년에 대한민국 철도청이 출범하면서 철도청이 경인선을 관할했다. 6.25 전쟁으로 경인선도 조선인민군에 의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 정부는 일제가 이루지 못한 경인선 복선화에 나섰고, 부족한 재정 상황에서도 공사를 추진해 1965년에 구로 - 인천 구간 복선화를 완료했다. 이 시기에 증기기관차 - 객차 편성을 대신해 일본에서 니가타 디젤동차를 도입하여 운행시간 단축을 이뤄내기도 하였다.[19]
1960년대에도 모든 열차가 모든 역에 정차했다.
2.4. 수도권 전철 1호선[편집]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과 동시에 전철화를 하여 직결된 수도권 전철 1호선에 편입되었다. 이후로 일반열차는 비정기적 관광열차 외에는 운행하지 않으며 통근형 전동차가 운행 중이다. 기록상 일반열차의 마지막 운행일은 1974년 8월 14일이다. 초기에 중장년층 이상 연령대에서 주로 기억하는 '식빵' 이라는 별명을 가진 초저항 전동차가 전철화 직후 주로 운행했다.
이후 통행량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1999년에 구로 - 부평 구간이 2복선화되었고, 2002년에 부평 - 주안, 2005년에 주안 - 동인천 구간이 2복선화되었다.[20]
초저항과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는 2020년에 모두 퇴역되었으며, 현재는 한국철도공사 31x000호대 전동차와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전동차가 투입되어 운행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수도권 전철 1호선, 수도권 전철 1호선/급행, 수도권 전철 1호선/운행 계통 문서를 참고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 일반열차 운행 문제[편집]
2022년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경인선을 경유하는 정기열차의 운행 빈도는 다음과 같다(단위: 회/일, 작성기준: 편도, 주중).
복선 전철화 이후 경인선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일반열차가 운행하지 않는다. 서울-인천에 일반열차를 운용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데, 설령 한다 하더라도 무궁화호 기준으로도 서울 - 영등포 - 부천 - 동인천 - 인천만 서게 되어서 소요시간은 짧지만 수익성이 크지 않으며 동인천 특급에서 정차역을 극한으로 줄인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일반열차용 저상홈이 없기도 하고 선로 용량이 넉넉하지도 않아 일반열차를 넣을 틈이 사실상 없다. 결정적으로 경부선 일반열차선에서 경인선으로는 연결선로가 없다. 여객열차가 들어가려면 영등포 등지에서 평면교차를 통해 전철 급행선로나 일반선로로 들어오거나 구로삼각선을 이용해 구일로 들어와야 한다.
수도권 전철 개통 이전에는 보통 등급 일반열차(비둘기호 등)가 통근열차 역할을 하며 운행되었으며, 지금도 아주 가끔 관광용 단체 무궁화호가 새벽 및 밤시간대에 들어오기도 한다. 때문에 철도통계연보에서 수송실적이 잡히는 역들이 간헐적으로 있다. 스크린도어 위치와 일반열차 출입문 위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스크린도어가 없는 1선(급행선)에서 승하차한다. 주로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위한 전세열차로서 투입되는 경우인데, 철도 패키지 여행 특성상 대부분 승객은 중년 여성들이다. 내장산 단풍 구경을 위해 임시 새마을호가 경인선에 들어와 패키지 관광객들을 가득 태우고 정읍으로 떠난 적도 있으며, 이런 임시열차는 직통으로 다니거나 아니면 중간에 한 역에 정차해 다른 관광객들을 더 태우고는 바로 목적지로 가는게 주 패턴이다. 임시 무궁화호 목적지도 정선이나 곡성과 같은 관광지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개찰구는 비상용 게이트를 개방하거나 자동개집표기를 비상 모드로 전환하여 통과한다.
4. 지하화 문제[편집]
경인선 인근 지역 중 상당수는 부설 이후부터 무계획적인 시가지가 들어서 시가지 단절이 심하다. 이어져야 할 지선도로들도 단절되어 있고 이로 인해 간선도로의 정체도 심각한 수준이다. 횡단하는 도로(과선교, 지하차도 등)를 건설하기도 어려워 자동차로 건너기도 힘들며, 이외에도 소음도 매우 심하다.
경인선은 수도권 전철 운행 개시 이래 상상 이상의 수송량을 보이고 있다. 이 엄청난 수송량에 대처하기 위해 2복선이 건설되었지만[21] , 이는 시가지 단절을 더 심화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근 주민들 중 상당수가 지하화를 강력히 원하며, 인근 지방자치단체 및 국회의원의 필수 공약이기도 하다. km당 건설비를 1,500억으로 계산하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9호선 1단계 구간 km당 건설비가 약 1,400억). 비용을 감수할 정도로 편익이 있는지가 문제이다.
송도에 인천신항이 건설되면서 인천항을 이용하는 화물운송은 장기적으로 수인선, 인천신항선,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로 옮겨갈 예정이기 때문에 경인선 지하화로 인해 생기는 화물운송 제약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온수와 소사, 부평 등 지하로 교차하는 부분에서는 공사 과정이 고난도이다. 여객열차가 운행되고 있고 선로 수가 훨씬 많은 경부선에 비해서는 실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현재 기본 계획은 선로를 현 선로 지하에 건설하고 현재 선로 부지는 매각하여 사업비에 충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선로 부지가 아닌 부일로, 경인로 등의 인근 도로에 지하철처럼 건설될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복복선보다는 복선+대피선 건설로 공사비 절감을 추구할 수도 있다.
위 내용은 어디까지나 추진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일 뿐이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부천, 재정자립도도 높고 그 많았던 빚도 다 해소했지만 그래도 아직 거대 토목 사업을 벌이긴 부담스러운 인천, 재정자립도는 높지만 그만큼 쓸 곳이 많은 서울[22] 모두 교통 예산이 풍족하지 않고 국비를 사용하려 해도 예타조사에서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 국비 투입이 거의 불가능하므로[23] 민자 유치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요금이 비싸진다는 단점이 있어 쉽지 않다. 인근에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시행된다면 교통분담금 명목으로 사업비를 조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업과 동시에 인근 재개발을 동시에 시행할 가능성도 높다.
2016년 3월 12일, 서울시 등에 따르면 타당성 분석은 추진한다고 한다.[24]
2016년 10월 25일, 사업 타당성 연구 용역에서 경제성이 낮아 철도부지를 일반 재산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와 경인선 지하화가 난관에 봉착했다고 한다.[25]
일단 인천시에서는 제2경인선이 지어지면 그동안 경인선에 몰려있던 수요가 분산되니 복선+대피선 방식으로도 충분히 감당이 가능하며, 이러면 공사비가 줄어 타당성 확보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제2경인선의 경우 아직 선형도 확정짓지 못한 상황이다. 즉 경인선의 지하화문제는 적어도 제2경인선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어야 추진할 동력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후 2022년 6월 13일 인천일보 기사에도 경인고속도로 및 경인선 지하화가 나와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26]
5. 기타[편집]
노반이 지나는 서울, 부천, 인천 구간 중에 큰 산이 없어서 터널이 없다. 백운 - 동암 구간, 부평아트센터 근처를 통과할 때 짧게 있긴 하나, 이 곳은 2015년 이후로 새롭게 조성한 공원이 들어선 것이라서 터널이라 보기에는 약간 미흡하다. 평야 지형을 따라가는 지질적 장점도 있었지만 처음에 경인선이 부설되던 시기만 하더라도 터널을 굴착하는 기술이 매우 미흡했기에 산이 있으면 그 산을 돌아서 가는 형태로 철로를 깔았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역들은 스크린도어가 열릴 때 "안전문이 열립니다." 나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라는 방송이 나오는데 음질이 매우 안 좋다. 이는 GS네오텍(소사역 등)이나 현대엘리베이터(부평역 급행 승강장 등)의 스피커 부품 문제이다.
경부철도가처럼 경인철도가라는 철도찬가도 있다.
간선도로인 경인로가 나란히 지어져 있다. 그래서 경인선과 경인로 모두 상시 혼잡한 상태를 유지 중이며, 혹여나 경인선이 기후 등의 이유로 운행이 중단되었을 경우 경인로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에 빠지며, 부평역부터 영등포역까지 완전히 겹치는 88번은 특히 더욱 그러하다.
서울 남서부와 인천 남동부를 이어주는 제2경인선 계획이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됐다.
지금은 옛말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경원선과 더불어 저항제어 차량이 자주 다녀서 발열 등의 문제로 인해 승객들과 철도 동호인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었다.
6. 승하차 통계[편집]
2022년 기준 경인선 일평균 승하차 순위이다. 환승역의 경우 경인선이 아닌 다른 노선의 승하차객은 제외한다.
7. 역명코드[편집]
8. 역 목록[편집]
자세한 내용은 경인선/역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외부 링크[편집]
[1] 곡선반경이 400R인 급커브 구간이다.[2] 노면전차를 포함하면 1899년 5월 20일 개업한 경성전차가 최초이다.[3] 노량진, 오류동, 부천, 부평, 우각동, 동인천, 인천 개업[4] 남대문, 용산, 영등포 개업[5] 12월 선로 이설[6] 남영, 대방, 개봉, 송내, 동암 개업[7] 당시 용산-노량진-대방-신길-영등포-신도림-구로-역곡-부천-송내-부평 구간 운행[8] 부평-동암-주안[9] 주안-동인천[10] 개봉, 제물포[11] 당시 용산-노량진-신도림-구로-부천-송내-부평-주안-동인천 구간 운행[12] 영등포, 역곡[13] 2019년에 경인선 부설권을 갖기 위해 미국과 꾸준히 합의했다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경인선 日완공 11년전 朝-美 논의’ 외교문서 나왔다」, 문화일보, 2019-02-13[14] 도원이 가장 가깝다. 미국 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의 별장 가까이에 역을 짓는다는 이유로 선로까지 꺾어가며 지었다. 부설권이 일제로 넘어가자 존재 이유는 사라졌고 1906년에 폐역했다. 선로도 1908년에 이설하여 더 이상 역 터에 선로는 존재하지 않는다.[15] 지금은 특급 기준 48km/h까지 나온다.[16] 이 중 1회용 교통카드는 보증금 500원이 들어있다. 선후불교통카드 사용시 1,750원이다.[17] 관련 게시글, 출처: 네이버 블로그[18] 「1944년 조선열차시각표-경부, 경의, 경인, 만포, 평원선」, 네이버 블로그[19] 「대한뉴스 제 538호-경인복선 개통」, 아까이브, 2016-11-14[20] 「대한뉴스 제 1881호-경인 전철 복복선 착공식」, 아까이브, 2017-01-02[21] 「대한뉴스 제 1881호-경인 전철 복복선 착공식」, KTV 대한늬우스, 2017-01-02[22] 서울시 차원에서는 경인선 인근이 외곽 주거 지역인데다 이미 재개발된 곳이 많아 효용도 크지 않고 재원 확보도 어렵다.[23] 인근 지역의 낙후화가 사회적 문제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전제가 붙을 것이다.[24] 「'경인선 지하화' 탄력?…7월 타당성·기술 검토 끝난다」, 아시아경제, 2016-03-12[25] 「사업비 대안 부딪친 '경인선 지하화' 난항」, 인천일보, 2016-10-25[26] 「유정복-김동연 “수도권 시·도지사 소통창구 만들자” 당선인들 약속」, 인천일보, 2022-06-13[27] 부천[28] 개봉, 오류동, 역곡, 소사, 송내, 부평, 동암, 주안, 동인천[29] 구일, 온수, 중동, 부개, 백운, 간석, 제물포[30] 도화, 도원,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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