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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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논쟁
3.1. 독살 부정론
3.2. 독살 긍정론
4. 결과


1. 개요[편집]




조선의 20대 왕 경종이 1724년 이복동생이자 당시 세제 신분이었던 영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설. 이 사안은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영조 치세 내내 그를 괴롭혔던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했다. 효종에게 민회빈 강씨 문제가 있었다면 영조에게는 이 경종 독살설이 있었다.

당시 경종은 몸이 매우 안 좋았고 비만섭식장애를 달고 산 환자였다. 엄밀히 따지면 멀쩡한 사람을 독살시킨 것은 아니고, 환자에게 고의로 의료사고를 일으켰다 혹은 그러려고 시도했다는 음모론이다. 학계에서는 영조가 개입을 했든 안 했든 경종이 오래 살지는 못했으리라고 보는 의견이 다수이다.


2. 배경[편집]


경종 독살설이 등장한 배경은 경종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데에서 비롯된다. 원래 몸이 허약하던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일부터 건강이 급격히 위독해지기 시작했다.

임금의 병환이 계속 여러 날 동안 낫지 않아 수라(水剌) 올리는 것마저 싫어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또 한열(寒熱)의 징후가 있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 약(藥)을 의논하여 시진탕(柴陳湯)을 지어 올렸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병을 이루었고, 해를 지낼수록 깊은 고질이 되었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昏迷)한 증상도 있었다. (중략)

임금의 체부(體膚)의 외형(外形)은 왕성하나 비위(脾胃) 등 내장이 허하였고, 음식을 싫어하는 날수가 오래 되어 마침내 한열(寒熱)의 증세가 발생하였다.

경종실록》, 경종 4년(1724) 8월 2일 4번째 기사


경종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경종은 병약했지만 마르고 병든 이미지가 아니라 비만 체형으로 아팠다. 실록에도 경종은 살이 쪘고 소화기관이 좋지 못했다고 적고 있으며, 때문에 아팠던 당시 기록을 보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열병에 시달렸으며 혼수 증세도 간간히 보인데다가 아픈 당일에는 오한까지 찾아왔다고 적고 있다. 음력으로 8월이면 한여름은 아니지만 더위에 시달리다가 이때 발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며 애초에 환절기다. 아무래도 경종은 서서히 아파오다가 이 즈음에 소화 불량이 제대로 찾아왔고 결국 병석에 눕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병상에 누운 경종은 이튿날 3일에도 오한 증세를 보였고 설사까지 동반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으나 오한과 설사가 반복되는 걸 봐서는 식중독 내지는 장염일 확률이 높다. 임금의 자리에 있는 만큼 식중독일 확률은 적으며[1], 아무래도 바이러스성 장염에 걸린 건 아닐까 추측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만하고 다한증 끝에 경연 중에 소변을 볼 만큼 다뇨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비만 → 당뇨 → 합병증으로 신장질환이 있었을 수도 있다. 특히 체내 크레아티닌 수치가 치솟으면 한여름에도 오한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는 후대에 기록을 바탕으로 한 독자연구일 뿐으로 현대에 와서는 그 옛날 임금의 정확한 병명을 알 길은 없다. 오래도록 앓은 설사 또한 당뇨성 설사 혹은 당뇨와 스트레스로 인한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특히 경종은 세자 시절부터 굉장한 스트레스에 눌려있었고 이런 상태에 오래 있으면 장에 있는 뉴런이 자살한다.

병명이 어쨌든 간에, 확실한 것은 쉽게 나을 간단한 병세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후 와병중인 경종의 증세는 점점 악화된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豉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하였다.

경종실록》, 경종 4년(1724) 8월 21일 1번째 기사


2주 정도가 지난 8월 20일, 경종은 저녁식사로 게장과 생감을 식사로 먹었는데, 이 게장과 생감은 전통적으로 한의학에서 매우 나쁘게 보는 음식 조합이다.[2] 결국 식사 직후부터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자 의관들은 경종이 한의학적으로 꺼리는 게장과 감을 먹은 사실을 알고 경악하여 즉시 곽향정기산과 두시탕, 인삼차를 계속 처방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고, 24일 오전에 경종은 아예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24일 의관 이공윤은 "삼다(蔘茶: 인삼차)를 쓰면 안 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멎게 할 수 있다."라면서 경종에게 계지마황탕을 처방했지만 저녁에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이에 당시 세제(世弟)였던 영조와 도제조였던 우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신하들이 급히 경종을 찾아가고 영조는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 하는 지시를 내렸다. 난데없는 지시에 이공윤은 처음엔 반대했지만 영조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이에 인삼차를 2번 복용했다. 그러자 경종의 안시(眼視)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온기를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다들 안도했으나 얼마 뒤 경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이때 영조와 이광좌는 종묘에 가서 경종의 안녕과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리려 하는데 그 기도가 시작하기도 전에 경종이 결국 사망하고 만다.

경종이 계속 와병중이긴 했으나 위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상황을 급속도로 악화시키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게장과 생감으로 꾸려진 8월 20일날의 식사였다. 따라서 이 식단을 누가 짰느냐를 둘러싸고 스캔들이 집요하게 발생했으며, 영조 치세 내내 고변이나 난이 발생하면 반대세력은 이 게장 식단을 영조가 올린 것이라 주장하며 영조를 '형을 죽인 패륜임금'으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3. 논쟁[편집]


일단 영조가 어떤 의도를 가졌었든지 간에, 당시 경종의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다는 것은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경종이 병석에 눕기 시작한 게 7월 중순이었고, 오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게 8월 2일이었으며 논란의 핵심인 게장과 생감이 올라간 게 8월 20일이었다. 따라서 경종은 한달이 넘는 시간 동안 복통과 설사, 오한에 계속 시달렸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과식이나 식중독에 의한 설사는 하루나 이틀 정도 문제가 되는 음식물을 비워내면 증상이 사라진다. 하지만 경종의 증세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으며 저렇게 오랜 기간 설사 증세에 시달렸으면 심각한 탈수 증세도 의심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영조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의도한 것이든, 단순히 형의 증세가 위독하여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올렸다가 사고를 낸 것이든 경종은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실록상의 기록만 보면 경종은 그냥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다가 죽은 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3.1. 독살 부정론[편집]


우선 게장은 당시에도 나쁜 음식 궁합으로 취급받았으나, 인체에 해롭다는 속설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먹으면#. 따라서 경종의 사인이 게장과 감일 확률은 낮다. 또한 인삼을 처방하는 것에 대해 영조와 어의의 의견이 서로 갈리긴 했지만, 문제는 어의가 별로 실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툭하면 이 약 처방하다가 다른 약 처방하는 식으로 말을 바꿨고 자신의 의술만을 최고라고 주장하였는지라, 실록에서도 "그렇게 잘났는데 왜 임금께서 여전히 골골대고 효험이 없음?"이라고 적으며 비아냥댈 정도였다.

다만 영조 역시 어느 정도 문제가 있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어의가 내린 처방을 무시하고 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한 점이다.[3] 심지어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은 사망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끽해봐야 영조의 '실책'이지 독살설을 제기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4][5]

또한 이 부분이 과연 영조의 실책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의원 이공윤이 반대한 인삼차는 영조가 언급하기 이전에도 경종이 처음 증상이 나타났던 7월 무렵부터 이미 지속적으로 처방되었으나 이공윤이 반대하여 처방을 잠깐 멈추고 계지마황탕을 올렸다. 그러나 처방된 마황은 교감신경을 항진시키는 에페드린이 주 성분으로 한의학에서 계지와 함께 쓰면 땀을 크게 낸다고 알려졌다. 탈수가 심해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발한제를 먹임은 상식적으로 옳지 않다. 또한 한의학에서도 이미 상한론에서 설사를 하는데 마황을 써서 생기는 부작용과 마황을 지나치게 써서 탈수 증상이 왔을 때의 부작용이 수없이 경고하였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경종이 이전에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공윤의 주장대로 인삼차를 끊고 계지마황탕을 올린 직후에 바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하고 인삼과 부자를 올린 이후에 경종은 잠시 의식을 회복했다가 곧 승하하고 말았다. 그리고 인삼과 부자가 과연 틀린 처방인가도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인삼과 부자는 한의학적으로 상극도 아니고, 인삼과 부자만으로 이루어진 처방도 영조가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이었다.

인삼과 부자로 달이는 삼부탕은 13세기 진자명이 편찬한 <婦人大全良方>에 처음 언급된 처방으로, 동의보감에도 수록되었다.[6] 지나친 탈수 등으로 인하여 신체의 기능이 떨러져 땀이 지나치게 나오거나 설사를 지나치게 할 때 쓰는 처방으로 기를 돋우고 진액을 생성하는 인삼과 (한의학에서 양기라고 부르는) 신체 기능을 크게 항진시키는 부자가 쓰였다. 지나친 탈수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경종에게는 효과적인 처방이었지 독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이공윤의 배경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술이 신비하다는 소문을 듣고 숙종대에 귀양살이를 하던 와중에 초빙된 사람이었다. 또한 경종이 죽은 그 해에도 진찰시에 여러 번 불참하거나 지각하여서 벼슬을 삭탈당할 뻔하고, 성품이 매우 불량한데다가 과하게 강한 약을 많이 썼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사람이 경종의 죽음 직전에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처방을 한 뒤 상태가 더 위중해지자 영조가 나서서 그를 막은 것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영조의 정치적 입장에서도 경종이 죽어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기반세력이 탄탄하다면 모를까, 소론이 득세하는 와중에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준 경종을 스스로 죽이면서까지 왕이 될 이유는 없으니까. 게다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와중에 어의가 한 처방을 뒤집으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한 것은, 그만큼 영조가 경종의 죽음를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경종은 이미 가망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지라, 상식적으로 그냥 내버려둬도 죽을 사람을 일부러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독살할 정도로 영조가 어리석지는 않았다.[7] 영조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도 임금이 끝내 절명했다면 영조에 의한 독살설이라는 낭설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도 영조는 이 음모론 때문에 평생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 굳이 독살을 하고 싶었다면 병세의 차도를 보고 회복될 기미가 보일 때 드러나지 않게 함이 합리적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옹호해줄 세력이 미미하다면 자칫 이를 빌미로 쿠데타 같은 반정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데,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인삼차를 권한 것은 그만큼 경종이 살아나길 원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 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기반을 제대로 만들고[8]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영조 개인의 입장에서도 더욱 편했던 것이다.

여기에 계유정난과 비교해서, "어차피 왕이 되면 끝나는 건데 영조가 도박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세조와 영조는 처한 상황이 180도 달랐다. 세조는 단종이라는 제대로 정통성을 갖춘 왕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건달들을 불러모아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쿠데타를 벌여서 결국 왕위를 받아냈다. 반면 영조는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경종에 의해 후계자로 세워진 상황이라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정적이 아닌 보호자였다.[9]


3.2. 독살 긍정론[편집]


독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삼과 음식을 제공해서 죽인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건 음식을 알맞게 먹지 못해서 죽었다고 해야 하지 독살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과 게장의 조합이 독이 된다는 가설이 현대의학적으로 참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대에는 그것이 참된 내용이라고 인식되었던 이상" 두 음식을 올린 연잉군의 행위는 의심스럽다고 생각이 들기에 자연스럽다. 당장 경종의 친모만 하더라도,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의식을 벌였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그러면 현대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그런 짓을 한다고 인현왕후의 신체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해서, 장희빈이 무죄가 되는가? 물론 현대법적으로는 아무리 잘해봐야 명예훼손 이상의 것이 성립하기 어렵겠으나, 적어도 당대에는 그런 의식이 저주를 불러온다는 인식이 있었고 장희빈이 이를 주도했다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어불성설은 아니다. 현대의 형법으로도 미수범으로 다투어볼 여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연잉군도 당대에 독으로 알려진 감과 게장의 조합을 경종에게 올렸다면, 잘 해봐야 "연잉군이 무식했다" 고 변호하는게 최선이다.

다만 독살설이 사실이 맞느냐는 주장과는 별개로, 위의 주장을 근거로 독살설을 부정하는 건 무리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세제 시절의 영조는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걸핏하면 역적 모의 명단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데, 당시 임금이 경종이어서 망정이지 다른 왕이었으면 금방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비록 경종이 본인 생각이야 어쨌든 간에 죽을 당시까지 영조를 보호해준 덕에 죽는 일까지는 면했지만 당시의 영조로서는 참으로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는 상태였으며, 경종이 조금이라도 오래 살았다면 주변 소론 대신들의 부추김에 따라 마음을 바꿀 가능성 또한 상당하고 혹시나 경종이 자식을 갖게 된다면[10]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자기는 진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11]

더군다나 비록 경종의 보호로 목숨과 세제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경종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연잉군을 제거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세제 책봉부터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던 노론의 반강압적 압박에 경종이 사실상 굴복한 것이었고, 이에 빡친 경종이 얼마 안가 신임사화로 노론을 대거 숙청한 상태였기에 연잉군을 제거할 명분은 쌓이고 쌓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래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영조가 인간으로서 느낄 감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인간은 매사에 계산적일 수는 없으며, 저렇게까지 수세에 몰리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존재다. 사건이 터지고 훗날 보기에는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일들도 많지만, 당장 본인이 현실에서 부닥치면 비슷하게 행동하는 패턴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당시 영조의 상황은 그저 몸 사리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기보단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인데 이판사판으로 질러도 충분한 상황이었다.[12] 동기가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꽤나 충분한 셈이다. 게다가 경종을 살해하면서 영조에게 갈 이득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 최소한 영조가 즉위하지 못할 때에나 먹힐 주장이지, 영조가 즉위를 성공한 마당에 먹힐 주장은 아니다.

경종의 죽음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노론과 더불어 조정을 장악하였다. 전세가 하루 아침에 역전된 것이다. 하다못해 경종이 생각을 바꿔서 말년의 선조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폐세제까진 아니어도 밀풍군이든,[13] 양자든 뭐라도 끼고 다른 말을 했다면 광해군이 당한 것처럼 영조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냥 멀리 갈 것도 없이 경종 본인이 바로 이런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다.[14] 그런데 그런 말을 할 틈도 없이 경종이 덜컥 사망하였으니 사실 영조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데 경종이 죽음으로써 정말 영조에게 이익이 없다고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즉위하고 얼마 안 가 영조는 그 정적인 소론, 특히 준론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하였다. 물론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괄의 난처럼 파천을 한다든가 하는 일도 없이 모두 무난히 극복하였고, 괘서 사건이라든가 과거 시험장에서 당한 일 같은 건 확실히 영조의 기분을 망치는 데에는 충분할지언정 영조의 조정까지 망치는 것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조는 조선 왕조 500년 중 무려 10분의 1인 52년을 집권한 왕이다. 정통성 문제로 어느 정도 시달린 건 사실이지만, 강한 왕권으로 장기간 통치한 영조인 만큼 '심각한 후폭풍을 각오하고' 했다고 하기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소론이 비록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준소와 이광좌로 대표되는 완소로 분열되었다고 하지만 진정한 완소는 당시 세제시강원 조현명조문명 형제, 송인명, 박문수 등 극소수였다. 준소나 완소이나 경종이 죽으면 같이 몰락하고 노론이 득세할 거란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었다. 더욱이 영조는 경종이 승하 당일까지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점도 후에 큰 논란이 되었다.

경종이 병석에 오래 누워 있을수록 이에 위협을 느낀 준소가 세제를 폐하는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병권을 쥔 훈련대장 윤취상, 총융사 김중기, 어영대장 이삼은 모두 준소의 영수 김일경의 사람이었다.[15]세제가 왕위에 오르면 이들이 죽는다는 건 명약관화였다. 더구나 경종 임종시 김일경은 공교롭게도 왕세제 보호론을 주창한 이광덕의 논박을 받아 부신을 바치고 성 밖에서 대죄하고 있었다. 게장과 생감의 진어는 경종의 승하를 재촉하였고 결국 준소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는데 성공한다.

또한 영조는 자신을 의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그런 영조가 생명이 위태로운 경종에게 의학적으로 해로운 음식을 먹이고 말았다. 의학에 조예가 있는 후계자가 위독한 왕에게 해로운 음식을 올린 건 의도와 무관하게 의심을 받는다.


4. 결과[편집]


독살설이 사실인지는 거짓인지와는 무관하게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 때문에 매우 고생했다. 실록에만 기록이 안되었다 뿐이지 게장을 올린게 영조라는 사실은 온 나라에 다 퍼져있던 사실이며, 어의 이공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게하고 그걸 먹고 얼마 뒤 경종이 사망했다는 사실도 의혹의 원인으로 작용했다.[16] 게다가 신임사화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그 주모자들이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정황 때문에 소론을 중심으로 '왕위를 노리던 영조가 끝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대의 시각으로도 그다지 떳떳한 행위가 아니었다는건 실록과 영조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의 인삼과 부자 처방과 달리 누가 게장과 감을 진상했는지는 실록에 누락되어있다. 정말로 영조 본인이 봤을 때 문제가 없는 행위였다면 사관들도 '영조가 게장과 감을 진상했다'고 마음 편히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영조 치세에 역모사건과 반역을 일으킨 사람들이 했던 발언들을 전부 직접 실록에 적지 못하고 미묘하게 돌려적어서 현재까지 내려오도록 만든 것도 마찬가지다.

그 시작은 김일경이었다. 영조 즉위년(1724) 12월 8일, 영조가 즉위하고 얼마 뒤에 소론이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국문했는데 이때 김일경은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 김일경은 자신을 경종의 충신이라고 자처하고 영조에게는 자신을 지칭할 때 의신(矣身)이라는 존대말 대신 를 뜻하는 오(吾)라는 반말을 쓰는 등, 흡사 육신전에서 세조를 부정하던 사육신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더 노골적이다. 호해이세민이 형제를 살해하고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승계했던 사건들을 들어가며 영조를 비판했고, 여기에 내옥척련(內屋戚聯)이라는 궁인과 영조가 내통했다는 단어를 써가며 경종이 독살되었단 생각을 노골적으로 떠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김일경이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을 숙청한 인물이었고, 국문으로 고문받던 상황이니 어느 정도 설명이 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일경을 숙청한 뒤 한 달이 겨우 지난 이듬해 1월 16일, 영조가 의릉(경종의 릉)에 알릉(참배)하러 가는 행찻길에서 군사(軍士) 이천해(李天海)가 경종 독살을 운운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17] 다음날 이천해를 국문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천해는 16일에 "국가가 무상(無狀)하다(질서가 없다)."를 시작으로 "환국(換局)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따졌는데, 한 달 전 소론 강경파 숙청을 언급한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천해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죄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을 독살범 영조를 고발하는 고발자라고 자칭했다. 영조는 이천해가 독살을 암시하여 "(영조가) 대궐 안을 왕래했다."라고 한 발언에 극도로 분노해서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史官)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며 사관들을 압박했다. 결국 이천해가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 발언은 이날 기사에는 쓰이지 못했다. 다만 사관들이 나중에 신치운의 발언을 기록하며 이때 일을 은근슬쩍 인용함으로써 후세에 알려졌다. #

또한 조사 결과 이유익의 입을 통해 이천해의 흉언을 퍼트린 주범이 경종의 첫번째 왕후 단의왕후의 동생 심유현이라는 얘기가 나와 심유현이 조사를 받았다. 심유현은 경종이 승하할 때 입시하여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종이 목욕할 때도 입시하였는데, 멀쩡하던 임금이 갑자기 사망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 얘기를 퍼트렸다. 그후 이유익, 심유현은 이인좌의 난에 동참했고 이유익은 국문을 받으면서 심유현의 증언이 민심을 선동하여 역모에까지 이르렀다고 한 바 있다. 이천해의 국문 당시 심유현은 외척이여서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고 관직도 제수받았지만, 훗날 이인좌와 결탁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끝내 주살되었다. 그나마 집안이 좋아 심유현만 처리되는 선에서 끝냈지만 이것도 당시 심유현의 모친, 즉 경종비 단의왕후 심씨의 어머니가 생존해 있었기에 대역죄인임에도 관례대로 노적, 즉 처자를 노비로 삼는 형벌을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 독살설 관련 사건으로는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있다. 일단 영조실록 안에는 이인좌가 경종의 독살설을 주장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우선 해당 반란의 주범 중 박필현, 이유익, 이인좌는 경종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고,[18] 더불어 반란 당시 한양에 뿌려전 반란군의 격문에도 납일초주(臘日椒酒)[19], 사왕·숙대(叔帶)[20]를 운운했으며 이런 선전문을 담당했던 이익관을 심문할 때 위에서 독살설을 운운한 이천해를 언급한 일로 보아 이인좌의 난 때도 경종 독살설이 주요 원인이었고 반란군도 이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와 병사(兵使)·수사(水使)가 적들이 흉관(凶關)·흉격(凶檄)을 여러 고을에 투입한 것을 올리니, 모두 불태우라 명하고, 그것을 지니거나 전하는 자는 참하라고 유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흉격(凶檄)의 조어(措語)는 본디 마땅히 곧바로 쓰고 숨기지 말아서 흉적이 천일(天日)을 욕한 죄를 드러냈어야 한다. 아! 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의 무리는 우리 성상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이다. (중략) 대개 심유현은 궁액(宮掖)의 척속(戚屬)으로 성품이 본시 간특하여 항상 분에 넘치는 바람을 품었는데,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李有翼)이 그의 사특한 마음을 알고 이익으로 꾀어 마침내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 여러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흉한 격문이 도로 위에 교체(交替)해 나돌았는데, 심지어 ‘납일초주 사왕숙대(臘日椒酒思王叔帶)’ 등의 말을 함부로 쓰기도 했다. 이는 실로 천고에 없는 흉역(凶逆)이며, 그 원두(源頭)를 추구해 보면 모두가 당론(黨論) 속에서 나온 것인데, 유봉휘와 김일경이 그 괴수가 되고, 박필현과 심유현이 다음이 되며, 이인좌·정희량 등 여러 적에 이르러서는 호서(狐鼠)의 무리에 불과했으니, 족히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영조실록》, 영조 4년(1728) 3월 20일자 기사

여담으로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군의 격문 내용은 영조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는데, 영조는 죄다 불태우라고 명했다. 하지만 사관은 이런건 죄다 기록해서 역적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고 하며, 불태우라고 명한 기사에 주석으로 '납일초주 사왕숙대'라는 핵심 내용을 핀포인트로 적어놨다.

신치운이 말하기를, "신은 갑진년(1724, 경종 사망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5월 20일자 기사

영조 31년(1755)에 터진 나주 괘서 사건에서도 경종 독살설이 기록되었다. 심지어 주범인 신치운은 영조 앞에서 대놓고 게장을 언급하며 그를 경종의 암살범이라고 타격하고 있다.[21] 이 시기에 소론 준론과 남인들에겐 그냥 경종의 게장 독살설이 정설이었다는 반증. 영조 밑에서 승지를 지내기도 한 신치운은 저 극언 때문에 선대의 이괄, 후대의 김옥균에 맞먹는 대역죄인으로 일가가 모조리 극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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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근대시기인 만큼 식재료가 상하기 쉽고 관리가 어려운 시대였던건 맞지만 아무리 전근대여도 한 국가의 중핵이자 모든 역량이 최고로 집중될 수밖에 없는 궁궐 내에서 그런 사고가 터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임금 같이 '높으신 분'이 먹는 식단은 식사 전 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번, 식사 후 아랫사람들과 나눠먹는 식으로 또 1번, 이렇게 다같이 나눠먹는게 상례였다. 따라서 상한 식재료로 식중독 사태가 벌어졌다면 경종만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2] 현대 의학적 관점으로도 이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게는 식중독을 일으키기 쉬운 식재료이고, 여기다 감의 탄닌 성분까지 더해지면 소화불량이 일어나기 쉽다. 열처리하지 않은 수산물은 바이러스를 잡을 수 없고, 감의 탄닌은 변비를 유발한다. 소화기관 문제로 와병중이던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은 치명타였을 것이다. 다만 게장 문서에는 그에 대한 반론도 함께 정리되어 있으니 유의할 것.[3] 이때는 사상의학을 지은 이제마나 맥론을 지은 정약용처럼 의학을 전문으로 하지 않은 유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의술에 대한 저서를 남기거나 약 처방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의학이 철학에 가까웠기도 하지만, 의사가 배타적인 권한을 행함은 근대에 와서 면허가 등장하면서이다. 당연히 면허제도가 없던 그때는 의학에 접근하기가 훨씬 용이하였다. 세종도 아우인 성녕대군이 위독할 때 의서를 읽으며 약을 처방했다는 기록이 있다.[4] 이 때문인지 노론이 기록한 저술에는 어의 이공윤이 인삼차를 먹이면 안 된다고 반대한 내용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하지만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데다 경종실록은 물론 사망 당시에 기록된 승정원 일기에도 동궁이 그렇게 처방했다는 내용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만 더욱 증폭시키고 말았다.[5] 정확히는 이공윤의 인삼차 반대 운운의 내용은 경종실록에 기록되었으나 훗날 실록의 편파성을 주장하며 노론측에서 주도하여 편찬된 경종개수실록에서는 이 내용이 삭제되었다. 이러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있나...[6] 내경편 진액문 자한 "治陽虛自汗. 人參 五錢, 附子(炮) 一兩. 右剉, 作三貼, 薑 三片, 水煎服." [7] 영조가 초조한 나머지 충동적으로 저질렀다고 볼 수도 있겠다. 허나 왕이 쓰러진 상황에서 적법한 후계자인 영조를 적들이 공격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후대에 군주의 안위를 등한시하고 자기들의 권력 싸움에만 몰두한 간신이라고 공격받을 수도 있다.[8] 영조는 노론 신하들이 야밤에 경종을 찾아가 협박하여 세제로 책봉되었다. 사실상 후계자라고 할 사람이 영조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냥 기다려도 되는데 굳이 이 행태를 벌인 것. 세제로 책봉된 후에 삼수의 옥 때 역모에 얽혔기 때문에 독살설이 없어도 왕위 계승에 시비가 붙을 상황이었다. 그러니 세제로 좀 더 지내면서 경종에 대한 충성과 우애를 증명하여 이미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9] 경종이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영조는 삼수의 옥 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괜히 영조가 '황형께서 날 살려준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말한 게 아니다. 경종이 생전에 영조를 낀 노론에게 받은 수모와 모욕을 보면 이때 영조를 죽여버리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10] 불분명한 성기능 장애 문제를 빼고 나이만 보면, 경종이 자식을 가질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11] 세조만 하더라도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가장 약소한 파벌을 이끌며 수세에 몰려있었고, 주변에 변변한 인물조차 없어 동네 건달을 부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이 잘 나서라기보단 김종서를 비롯한 당시 고명대신들이 수세에 몰린 세조의 상황을 근거로 낙관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영조의 꼴이 세조랑 비슷한 처지인 셈. 또 공교롭게도 세조 역시 왕자 시절에 문종이 동생이란 이유로 잘 보살펴준 사례가 있다. 다만 세조는 당시 후계자로 책봉된 것도 아니었고, 엄연히 조카인 단종이 즉위해있었음에도 계유정난으로 뒤집어엎은 게 차이점이긴 하다.[12] 하다 못해 세조도 역모와 관련해서 이름이 오른 적은 없었고 계유정난 전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리며 지냈는데, 영조는 주변의 잘못에 더해 본인도 처신을 잘 못해서 잊을 만하면 이름이 등장하며, 경종이 사망할 당시에는 정말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태였다.[13] 이게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후에 이인좌의 난을 통해서 드러난다. 경종이 좀 더 오래 살면서 소론의 부추김을 받거나 경종 본인이 신임사화 때처럼 분노하거나, 아니면 영조 측에서 뭔가 또 꼬투리가 잡히는 식으로 일이 틀어진다면 밀풍군을 옹립하는 일도 아주 불가능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말 그대로 죽을 위기에 놓인 채 가시밭길을 걷고 있던 영조로서는 이 또한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14] 숙종이 죽기 전에 후계 문제를 흔들어버린 바람에 경종은 노론으로부터 왕으로 취급받지도 못했으며, 그 적수는 바로 세제인 영조였다.[15] 이중에 처신을 잘해 살아남은 이삼을 제외하면 윤취상은 영조 즉위 후 김일경과 함께 주살당하고, 김중기는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처형된다.[16] 경종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당시, 미음이 진상되어 의식을 잃은 경종에게 올려졌는데 하필 이 미음을 쑨 사람이 세제빈 서씨인데다가 그걸 수저로 떠서 경종에게 먹인 사람이 영조였기 때문에 이거 가지고도 오만가지 소문이 돌았다.[17] 한편 영조실록에는 '형조가 조사해보니 이천해가 광병(狂病)을 앓는 것으로 보인다'는 언급도 나와있는데, 혼자 귀신에 홀렸다며 자해한 적이 있다던지, 조사 중에는 '아내와 그 가족이 작당하여 자신을 죽이려 해서 그것을 상언하려고 그랬다'며 횡설수설 했다던지 하는 묘사가 꽤 들어맞기는 한다.[18] 앞에서 언급한 이천해 사건의 배후도 이 3명이고, 반란 진압 후 이인좌와 다른 주범인 이익관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19] 왕망이 납일(臘日,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미일)에 독을 넣은 초주(椒酒, 후추를 넣은 술)로 평제를 독살한 것을 말한다.[20] 둘 다 왕위를 노리고 제 형을 위해한 인물들이다. 종합하자면 각각 영조를 두고(이인좌 측 주장에 따르면) 목호룡의 고변 때 형 경종의 아량으로 살려줬는데 '형의 왕위'가 탐이 나 '독을 썼다'고 직설적으로 공격하는 말이다.[21] 엄밀히 따지자면 신치운의 발언은 나주 괘서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의 발언은 나주 괘서 사건 직후 이에 고무된 신치운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의 자제들이 과거장에서 국왕을 비방하는 글을 쓴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을 일으키면서 추포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는 자리에서 행한 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