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태종무열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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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5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慶州 太宗武烈王陵碑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4-1번지 / (도로명)경주시 대경로 4859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시설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파일:경주_태종무열왕릉비(귀부와이수) 문화재청.jpg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1. 개요
2. 내용
2.1. 없어진 몸통
2.2. 상세
3. 외부 링크
4. 국보 제25호



1. 개요[편집]


慶州 太宗武烈王陵碑. 경주 태종무열왕릉비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무열왕릉 앞에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이다. 661년에 신라태종 무열왕이 승하하고 문무왕이 바로 뒤이어 즉위했는데, 이 해에 무열왕릉비가 세워졌다고 한다.[1]

무열왕릉은 서악동 고분군 중에 하나를 이루는 왕릉인데, 경주에 남아 있는 신라 xx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능들 중에서 정말로 확실하게 어느 왕의 무덤인지가 밝혀진 능은 사실 몇 되지 않는다. 그 태반이 조선시대에 이 무덤은 신라 어느 왕의 능일거라고 경주 김씨 문중 측에서 적당히 비정한 것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고, 명확하게 주인이 밝혀진 능은 고작 7개로 무열왕릉은 이 7개의 능 중 하나다.[2] 그리고 무열왕릉이 무열왕의 능이란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근거가 된 것이 바로 태종무열왕릉비이다.

일반적으로 비석은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螭首)로 이뤄지는데, 귀부는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을 가리키며, 비신은 비석의 내용인 비문이 적힌 몸통이고, 이수는 비신 위에 얹는 비석의 머리를 뜻한다. 하지만 무열왕릉비의 경우, 애석하게도 중요한 비문이 적힌 비신은 없어졌고,[3] 을 새긴 이수와 거북이 모양 귀부만 남았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이수와 귀부만으로도 신라시대의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경주 태종무열왕릉비는 1962년 국보 제25호로 지정됐다.


2. 내용[편집]



2.1. 없어진 몸통[편집]


현재는 무열왕릉비 비석의 몸통이 없어졌지만,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의 내용을 봐선 일연고려시대 당시에도 별 문제 없이 잘 존재하던 비문의 내용을 읽고 작성한 듯하다. 조선 성종시기 작성된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때까지도 약간 훼손되긴 했지만 비문 내용이 써있었을 비석의 몸통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사진 자료에는 이미 몸통이 없어진 상태였으니, 아마도 조선 중~후기에 깨져 파편화된걸로 추정하고 있다. 퇴계 이황때부터 이미 비석은 훼손된 걸로 추정되는데, 퇴계선생이 역사유적물인 태종무열왕릉비를 부셔서 선비들이 고작 벼루를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로 그 지역의 유생들을 꾸짖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석은 고품질의 석재면서 충분히 가공이 되어있기에 벼루로 쓰기 제격이었기 때문.[4]


2.2. 상세[편집]


파일:IMG_2677.jpg

비록 무열왕릉비 비석의 몸통은 없어졌으나, 남아있는 이수와 귀부를 합친 높이가 약 2.1m에 달하고 귀부의 길이는 3.34m며 폭은 2.53m라는 점을 감안하면, 온전했을때의 본래 모습은 거대하고 웅장한 비석이었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거북모양 비석 받침인 귀부의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는 것이다. 거북은 머리를 높게 치들었고, 네 발은 짧지만 쭉 뻗어 있는 모양새인데 전체적으로 힘찬 인상을 풍긴다. 거북의 머리는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눈, 코, 입, 귀가 선명하며, 목과 몸통이 만나는 부분에는 목주름을 4줄까지 묘사했다.

파일: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정밀실측 용역 14.jpg

거북의 등에는 육각형 등무늬 여러 겹을 새겼고, 등의 테두리에는 구름 모양 무늬를 둘렀다. 거북 등에 있는 홈에는 비석을 끼우는데 이 부분도 연꽃 무늬를 둘러서 장식해놨다. 무열왕릉비의 장대한 귀부를 일컬어 혹자는 신라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나타내는 동양 최고의 걸작 조각품이라 칭하기도 한다.[5]

파일:태종무열왕릉비이수전면.jpg

비석의 머리인 이수는 비록 두 조각으로 쪼개진 상태지만,[6] 보존상태는 양호하여 귀부 못지않은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여전히 잘 보여주고 있다. 총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어지럽게 뒤엉켜서 이수의 앞뒤로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데, 서로 얽혀 있는 형상을 비롯해서 아주 생동감 있고 역동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거북이나 용이나 각자 자기식대로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서로 조화되어 있어서 완전한 짜임새를 보여준다고 평가된다.[7]

한편, 이수는 조각의 기법이 뛰어나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나 무덤의 주인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비록 비석의 몸통은 없어졌지만, 천만다행으로 비석의 머릿돌 전면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자가 남았기에 이 비석이 무열왕의 능비이고, 바로 뒤 능이 태종무열왕릉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大太 대태
王宗 왕종
之武 지무
碑烈 비열
실제 이수에서는 이와 같이 세로쓰기로 되어 있으며, 바로 위에 있는 사진의 중하단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희미하게나마 글씨 확인이 가능한 상태다. 여기에 쓰여있는 '태종무열대왕지비'는 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의 글씨라고 전한다.[8]

경주 태종무열왕릉비는 몸통이 없어져서 비문의 내용을 현재로선 파악할수가 없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이수나 귀부는 무사히 잘 보존되어 신라시대의 정교한 조각 수준을 드러내는 작품이자 신라를 대표할만한 최고 걸작 중 하나라는 점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편집]




4. 국보 제25호[편집]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답사여행의 길잡이 2 경주 - 신라 태종무열왕릉비[2] 나머지 6개의 능은 선덕여왕릉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이다. 이들은 기록에 남은 위치정황상 무덤의 주인이 거의 확실하거나, 주변에 남은 유물에서 묘제와 같은 근거가 발견되었다.[3] 비의 몸통은 극히 일부만이 남아서 파편 2조각만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나마도 내용 판독이 가능한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4] 참조: 신동아 - 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12> 신라 최후의 미륵보살 진덕여왕[5]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2 경주 - 신라 태종무열왕릉비[6] 비신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떨어져서 쪼개진 것으로 보인다.[7]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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