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승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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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경희궁 승휘전
慶熙宮 承輝殿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건축시기
1620년 추정 (창건) / 1698년 (소실)
1. 개요
2. 역사
3. 여담



1. 개요[편집]


경희궁동궁으로, 왕세자왕세자빈이 머무는 처소이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승휘전이 바로 그런 곳이다. 쉽게 말해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

이름은 ‘빛(輝)을 잇는다(承)’는 뜻이다.

인조 ~ 숙종 시기에만 존재했다. 즉, 경희궁경덕궁[1]일 때만 있었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경희궁 승휘전’이 아닌 ‘경덕궁 승휘전’이 맞다.

위치는 정확히 모른다. 1940년에 제작된 《경희사림》에 실린 '경희궁 배치도'에 따르면 융복전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


2. 역사[편집]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 창건 때 건립되었다. 경희궁을 지은 광해군의 세자 이지는 정작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쫓겨났고, 인조장남소현세자가 처음 사용하였다.

1655년(효종 6년) 12월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헐려고 했다.# 신하들은 반대하였으나 효종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는데#, 효종의 손자 숙종 시기에 승휘전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이 때 철거하고 다시 지은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은 것인 지는 확실하지 않다.

1698년(숙종 24년) 11월에 중궁전 소속 주방에서 일어난 불이 승휘전으로 옮겨 붙어 건물이 전부 타버렸다.# 이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다시 재건하지 않았다. 즉, 80년도 못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


3. 여담[편집]


  • 1675년(숙종 1년) 10월에 승휘전 뜰에 희귀한 쌍무지개가 뜬 적이 있었다.#

  • 1693년(숙종 19년) 3월에 승휘전과 그 주변을 수리하다가 사람 가 나왔다. 누구를 저주하려고 묻은 건 아니고, 옛날 이 일대가 매장 터였기 때문에 발견된 듯하다. 숙종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뼈의 주인들을 가엾게 여겨 이들을 위한 제사를 올렸다.# 이에 헌납 이우겸이 공사를 중지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끝까지 공사를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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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영조 재위기인 1760년이다.[2] 여기엔 '輝'가 아닌 '暉'로 적혀있다. 둘 다 빛, 또는 광채를 의미하는 글자라서 예전부터 서로 혼용해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