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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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계연수(桂延壽)
본관
수안 계씨(遂安 桂氏)

인경(仁卿)

운초(雲樵), 세거선천(世居宣川), 일시당(一始堂)
출생지
평안북도 선천군
생몰연도
1864년 ~ 1920년

1. 개요
2. 행적
2.1. 단군교와 전병훈의 기록
2.2. 태백교와 환단고기의 기록
3. 계연수 실존에 대한 반박
3.1. 수안 계씨 족보에 보이지 않는다.
3.2. 단군교와 태백교의 전승이 다르다.


1. 개요[편집]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라고 하나 그 실존성이 의심되는 인물로,[1] 일각에서는 천부경의 발견자라거나, 환단고기 추종자(속칭 환빠)들에 의해 '환단고기를 저술했다'고 주장되는 인물이다.

2. 행적[편집]


계연수의 행적은 2가지로 전승되어온다.


2.1. 단군교와 전병훈의 기록[편집]


단군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연수는 묘향산에서 도를 닦던 도인인데, 1916년약초를 캐다가 한 석벽에서 천신 환인환웅을 통해 태백산 신시에 도읍할 때에 전하였던 고대의 경전이라 알려진 천부경[2]을 발견하였다. 그가 직접 해석을 해 보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탁본을 뜬 후 단군을 신봉한다는 단군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이듬해 탁본을 보내어 해석을 문의하였다고 한다.

저는 평소 스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동방을 여신 단군은 신인이다. 천부인 3개를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덕화를 펴신 지가 4천 년이 넘었는데, 천부인이란 어떤 물건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중략)

그리하여 제가 마음속에 새기고 구하기를 바랬으나 얻지 못하고, 정성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약초 캐는 걸 업으로 삼아 명산유람한 지 10여 년이 흐른 작년 가을 태백산(묘향산)에 들어갔다가 길도 없고 인적도 끊긴 어느 너부적한 석벽에 옛날에 조각한 글씨 같은 게 새겨져 있는지라 손으로 더듬어 이끼를 벗기고 보니 글자가 분명한데 이것이 과연 신령스런 천부경인지라 두 눈이 홀연히 밝아져 엎드려 절하고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고 읽어보니 한편은 단군천제의 보물경전이라 기쁘기 그지없고 한편은 고운(최치원) 선생의 발자취인지라 기쁘기 그지 없었습니다. (중략)

겨우 한 본을 탁본했는데 점과 획이 모호하여 다시 탁본하려 하니 구름과 안개가 홀연히 일어나는지라 결국 근처 산사로 돌아와서 밤새도록 해석을 해보려 했으나 뜻을 알 수가 없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데 배움이 짧고 늙어서 총기가 흐려진 탓인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단군을 받들어 모시는 교당이 있다는걸 알게 되어 올라가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다음 해 봄에 서울로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이 탁본을 헌상하오니, 이 경전을 해석하여 가르친다면 중생이 반드시 복록을 받으실 것이고 교단이 크게 번창할 것이오니...

계연수가 단군교에 보냈다는 서신 中


최초로 천부경이 실린 책은 전병훈이 쓴 정신철학통편(1920)인데 전병훈은 계연수와 천부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의 현인 선진(仙眞) 최치원이 말하길 단군의 천부경 81자는 신지(神志)[3]

혁덕(赫德)[4] 의 전문(篆文)[5]인데 옛 비석에서 발견되었다. 그 글자를 해독해보고 지금의 묘향산으로 추정되는 백산(白山)에 기록해두었다.(여기까지 최치원이 말함) 내가 살펴보니 최치원이 당에 가 진사(進士)가 되었다가 우리나라로 와서 신선이 되고 난 후, 이 경문(經文)이 작년 정사년(丁巳年:1917년)에 처음으로 평북 영변(寧邊)에서 출현하였다. 약초를 캐는 도인 계연수라는 분이 백산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가 석벽에서 글자를 발견하고 조사했다고 한다. 나는 장차 <정신철학>을 편성하고 곧 인쇄를 하려던 시점에 유학자 윤효정으로부터 천부경을 얻게 되었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전병훈, 《정신철학통편》(1920년)


천부경은 본래 단군시대부터 있던 경전인데 최치원이 발견, 한자로 해석하였고 그후 계연수라는 정체불명의 도인이 약초를 캐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는 내용이다. 한편 당시 북경에 살던 전병훈에게 천부경을 전한 인물은 윤효정이라고 하는데 단군교에서 대선사를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한다. 전병훈은 조선인이었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상당히 명망을 얻고 있었고 단군교에서는 이 점을 이용하려고 윤효정을 북경까지 파견해 천부경을 퍼뜨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6] 또한 단군교는 이듬해(1921년) 기관지인 단탁에 다시 천부경을 실어서 세간에 천부경을 널리 홍보하기 시작했다.

파일:천부경.jpg
천부경


2.2. 태백교와 환단고기의 기록[편집]


계연수는 어렸을때부터 기억력이 비상해 무엇이든 한번보면 곧바로 기억하였고 27세(1890년)까지 약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한민족의 옛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많아서 양반가와 사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서책,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다.

단군사상에 관심을 갖고 삭주의 진사 이형식과 태천의 진사 백관묵과 교분하였으며 1897년(34세) 실학사상가이자 애국계몽운동가였던 해학 이기(李沂)선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1898년 태백진훈(太白眞訓), 단군세기(檀君世記)를, 1899년 태백일사(太白逸史),참전계경(參佺戒經),천부경요해(天符經要解):[7]등을 발행하였으며 이기와 함께 1909년 단학회(檀學會)를 세우고 태백교를 창교했다고 한다. 이기가 단학회를 세운지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1911년 이기가 내용수집과 감수를 맡고 봉오동,청산리대첩의 영웅인 여천(汝千) 홍범도, 송암(松菴) 오동진 등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記), 태백일사(太白逸史) 의 한국상고사를 기록한 4가지 사서를 하나로 묶어 환단고기 30권을 출간하였다. 참고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실려있다.[8]

환단고기 입수경로
사서
삼성기 상
삼성기 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저자
신라 안함로
(579~640)
고려 원동중
(연대미상)
고려말 이암
(1297~1364)
고려말 범장
(?~1395)
조선 이맥
(1455~1528)
소유자
계연수
백관묵
백관묵 이형식
이형식
이기
편찬
이상 5권의 책을 묶어 1911년 환단고기 30부 발행

이후 그는 만주로 건너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게 되는 이상룡의 서로군정서 막하에서 참획군정을 맡아 국사연구와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20년(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일본밀정에게 살해당한다. 그의 시신은 사지가 절단되어 압록강에 버려졌으며 그가 세운 배달의숙건물과 3,000여척의 서적과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한편 이일이 있기전에 계연수는 배달의숙에서 가르침을 받던 그의 애제자 이유립(당시 13살)에게 60갑자가 지난뒤 경신년(1980년)에 세상에 공개하라며 환단고기를 건네줬다고 한다.


3. 계연수 실존에 대한 반박[편집]



3.1. 수안 계씨 족보에 보이지 않는다.[편집]


(桂)씨의 본관은 수안(遂安)을 비롯하여 금천(衿川) 충주(忠州) 전주(全州) 나주(羅州) 해남(海南) 경주(慶州)등 12본이 있지만 현재는 수안으로 합본되었으며 나머지는 세거지로 파악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에 있는 계씨는 수안 계씨 밖에 없다는 뜻인데 이 수안 계씨 족보에 계연수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계연수가 죽는 과정을 보면,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일본의 밀정에게 죽임당했다고 나와있다. 독립군 내부에 밀정을 잠입시킬 정도면 계연수는 일본에게 매우 요주의 인물이었으며, 이는 즉 독립군 내에서도 상당히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당시 계연수와 관련이 있었다고 언급된 인물들(이기, 홍범도, 오동진, 이상룡 등등)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또 계연수가 명망있는 독립투사였다면 당연히 계연수쪽 집안에서도 이를 알았어야 하고, 설사 먼 친척뻘이라 쳐도 그렇게 훌륭한 분이면 어떻게든 끌어와서 족보에 올려놨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들과 크게 관련없어도 역사에 크게 이름을 떨친 분이면 조작을 해서라도 족보에 올려놓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단단학회와 증산도를 위시한 환단고기 신봉자들[9]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비명횡사한 사람이 수도 없으며, 그렇기에 자손도 남기지 못하고 대가 끊겨서 족보에 누락된 사람이 부지기수라 계연수 또한 누락된거라 설명한다.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독립운동가 계봉우의 예를 들어, "1880년에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출생한 북우 계봉우는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고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면서 『신한독립사』, 『조선역사』, 『오수불망(吳讐不忘)』 등을 편찬하였으며, 북간도 연길 소재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로 활동하다가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 이동휘가 주동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건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권업신문勸業新聞」에 10회에 걸쳐 『만고의사 안중근젼』을 연재했다. 그런 공식적인 인쇄물을 많이 남긴 계봉우도 수안 계씨의 족보에 없다. 실제로 계봉우의 아들 계학림씨는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족보에서조차 아버지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던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원래 빈궁한 관노(官奴)출신에다 많지않은 성씨여서 그의 가계는 물론, 모친이 장(張)씨라는 것 외에는 부친의 이름조차 아직 알 수 없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연수도 족보에 없다." 와 같이 말한다.

즉, '계봉우도 천한 출신이라 본관이 없는데 계연수라고 족보에 없다 하여 가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인데 우선 계봉우의 본관이 천한 출신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계봉우가 어디의 계씨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기는 하지만, '본관이 알려져 있지 않다 = 천한 출신이다'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게다가 계봉우는 그 후손이 멀쩡히 살아 있고 카자흐스탄 한인회가 그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출판하는 등 기록이 존재하고, 1911년에 북간도 광성학교의 교사를 맡았다는 것, 이상설, 이동휘가 주도한 대한광복군정부에서 일했다는 것 등 행적도 명확히 알려져 있다. 출처 그러나 계연수는 알려진 후손도 없을 뿐더러, 공인된 독립운동 유공자들 중 그 누구도 계연수와 함께 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일본에서 암살자를 보내어 그를 암살할 정도라면 그는 아주 명망이 높았거나, 능력이 뛰어났거나, 또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었던 경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명하거나, 유능하거나, 강력한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독립운동가가 한 사람은 있었어야 할 것이나 그런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결국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걸 나타내는 것이다.

게다가 만일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고 정말로 환단고기를 기록하여 보존했다면, 그가 천한 인물일 가능성은 없다. 이유립이 기록(진실을 날조)한 환단고기의 초판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만에 하나 진서라면 계연수는 상당한 학식이 있어 그 정도 규모의 책을 써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천한 사람일 가능성보다 어느정도 교육을 받고 한문의 읽기 쓰기가 가능한 양반계층일 가능성이 높고, 결정적으로 수안 계씨 족보에 계연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의 실존 가능성은 극히 적어진다. 다만 수안계씨가 본거지가 북한에있는만큼, 통일이되고 조사를해봐야 실존여부 종결이날듯말듯하다..



3.2. 단군교와 태백교의 전승이 다르다.[편집]


단군교에선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도닦던 정체불명의 도인인데 1916년 묘향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 탁본을 떠서 보낸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태백교에선 여기에 뼈와 살을 보태서 어디서 태어났으며 누구와 사귀었고 무슨책을 지었으며, 누구의 문하로 들어가 지인들로 부터 받은 사서들을 묶어서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여기에 천부경이 포함되어 있었다라며 단군교보다 더 상세하고 많이 다르게 그의 생애를 기록했다.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단군교가 천부경을 띄우고 빛내기 위해 뜬금없는 계연수라는 사람을 잠깐 등장시켰던 것뿐인 반면, 태백교는 그가 약초를 캐던 사람이고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두 구절을 빼내서 그걸 토대로 산에서 약초캐던 도인에서 독립투사이자 한민족의 찬란했던 옛 역사를 담은 환단고기의 저자인 인물로 재창조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즉, 단군교는 천부경을 알리기 위해 가공의 인물인 계연수를 만들어 잠깐 써먹었고 태백교는 그 인물에 뼈와 살을 보태서 전혀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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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계연수라고 존재한다.[2] 신라 시대 문인 최치원이 새긴 것이라고 한다.[3] 환웅,단군 시대의 사관(史官). 고대 문자를 주관한 것으로 추정됨.[4] 태백일사와 규원사화에 따르면 신지는 환웅 시대 사람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의 발자국을 바탕으로 녹도문(鹿圖文)을 만들었으며 구전으로 전해지던 천부경을 이것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등의 문헌에도 신지가 단군 시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5] 한자의 서체(書體)중 하나. 여기서는 녹도문을 말하는 듯하다.[6] 서우 전병훈은 정신철학통변을 짓고 동양철학과 내단법으로 명성은 얻은 바, 단군교에서 그 당시 이 계통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인인 전병훈을 찾아 문의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새로운 연구나 발견에 전문가를 찾아 문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를 마치 천부경을 퍼트리려는 목적으로 이용했다라고 서술하는 것은 천부경이 뭔가 퍼트려서는 안되는 부정적인 것이거나 단군교가 오늘날 개신교처럼 교단의 확장을 위해 포교를 한 것처럼 서술하여 매우 편협한 견해를 드러낸 문장이라 볼 수 있다.[7] 천부경주해서.[8] 단단학회에선 1909년 세상을 떠난 이기가 1911년 감수를 맡는것에 대해 세상을 뜨기전 이미 감수를 마쳤고 1911년에 기사는 이것을 말하는것이라 해명하고 있다.[9] 증산도가 환빠의 전부인 것은 아니지만 증산도 종교단체는 적극적으로 환단고기를 추종하고 홍보하고 있으며, 실제로 나무위키에서 2018년 10~11월 경에 다수의 증산도 동원계정이 본 문서를 포함해 여러 문서에서 외부개입을 한 것이 들통나 영구적으로 차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