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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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25년 2월 25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길주에서 소학교 졸업 이후 만주 용정중학교를 거쳐 남만주대학을 졸업했다. 김일성의 연락병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계응태의 수기에 따르면 그는 해방 이전 탄광에서 소년 탄부를 하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8년 소련고급당학교로 유학갔다.

귀국 후 1957년 5월,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을 맡아 1960년 2월까지 재임했다. 1960년 2월,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무역대표로 북베트남을 방문했다. 1961년 12월, 국제무역촉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무역 쪽으로 경력을 집중하여 1962년 2월, 무역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무역성 부상으로 북한의 깡패 외교를 대표하였으며 온건한 무역상 리일경의 숙청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65년 1월, 무역에서 큰 손해가 나면서 무역성 당세포총회가 열렸고 대외무역사업에서 주체를 잃고 혁명의 이익을 침해한 엄중한 결함은 보였다고 큰 비판을 받았다. 이때 계응태가 자신을 '한 성의 책임일군'이라고 하는 것을 봐서 부수상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리주연을 대신하여 사실상 무역상을 대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월에 국제무역촉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승진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내각 무역상에 선출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1년 무역대표단장으로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이라크 등을 두루 방문했다. 하지만 1971년 4월, 무역성 일군들이 수출 납품 기한을 지키지 못하였으며, 필요한 수입물자를 제때 들여오지 못한다고 이는 애국주의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꿀을 사회주의권에 싼값에 팔았더니 그 꿀이 다시 자본주의 국가로 비싼 값에 되팔이된 사건이 있어서 김일성이 격노했다고 한다.

이에 자본주의 국가로의 수출 확대를 필사적으로 똥꼬쇼하였고, 덕분에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무역부장에 유임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3년 3월, 핀란드를 방문했으며 1974년 4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폴란드를 순방했다. 1975년 4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에 수행원으로 동행했으며 1976년 12월 11월, 리종옥과 함께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를 겸하게 되었다. 1977년 1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박성철을 따라 중국을 또 방문했다. 1977년 12월, 조선로동당 5기 15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정무원 부총리 겸 무역부장에 유임되었으나 1978년 4월에 무역부장에선 해임된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대표단장으로 엔도네시아, 불가리아,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지만 성과가 시원찮았는지 1981년 10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되고 경공업위원장을 맡는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부총리로는 재선되었으며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1983년 9월, 부총리에서 해임되고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가 평안남도 책임비서를 맡았다.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두루 지냈다. 1985년 8월에 평안북도 행정경제위원장을 겸하게 된다.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리근모, 김환과 함께 비서국 공안비서에 등용되면서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다.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법안심사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이제는 공안 쪽 커리어를 밟게 된다. 1987년 2월, 리비아를 방문했고 1987년 8월, 리진수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다시 승진했다. 1989년 6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쿠바도 다녀왔다.

1990년 2월, 9기 최고인민회의 선거 중앙선거위원장을 맡았고 5월,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법안심사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잘 나가던 김일성 시대와 비교해서 김정일 시대에는 영 대접이 좋지 않았다는 풍문이 많이 들려오는데 뇌물 수수 문제로 고생했단 얘기도 있고 심화조 사건 당시에 사건이 너무 커진다고 간언했다가 김정일에게 공안비서가 사회안전부를 시기해서 주접을 떤다고 욕만 잔뜩 먹고 깨갱했다는 썰도 있다. 그의 막내아들이 검덕광업연합기업소 노동자로 혁명화를 떠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을 지냈다.

어쨌거나 당정의 원로로 예우는 계속 받았으며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활동은 매우 뜸해져서 얼굴마담으로 이런저런 보고회나 경축대회에 얼굴 내미는 정도였다. 부고에서 연로보장을 받고 있다고 하는 등 사실 공식적으로도 은퇴 상태였다. 그나마 김정일 시대에 당정치가 마비되면서 공안비서와 정치국 위원 자리는 죽을 때까지 유지하였다. 2004년 이후로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말년에 김일성을 숭상하는 글을 집필하면서 보냈다. 2005년에는 치매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

그러다가 2006년 11월 23일 14시 30분에 81세를 일기로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명색이 비서 겸 정치국원인 그의 죽음에 당중앙위원회 단독 명의로 "계응태동지는 해방후부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당중앙위원회와 국가경제기관의 중요한 위치에서 우리 당을 강화발전시키고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계응태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 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령도에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매우 초라한 내용의 부고만 발표한 것을 보아서 김정일과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3.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통일정책국 정치사회분석과, 북한의 주요인물 2009(서울: 통일부, 2008)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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