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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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 Han Dynasty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am_Gwok_262_CE.png

지도의 초록색 부분 (262년 기준)
221년 ~ 263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한
조위
별칭
한(漢), 촉(蜀), 촉한(蜀漢), 계한(季漢)
위치
중국 시난(현 쓰촨성 일대)
수도
성도(成都)[1]
면적
1,070,000km² (262년 기준)
인구
900,000명 (221년 기준)
→ 1,082,000명 (263년 기준)
민족
한족, 파촉인[2], 강족, 남중 이족
언어
상고 중국어[3], 파촉어, 한문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도교, 불교[4], 중국 토속 종교
화폐
오수전[5], 직백오수전[6], 직백전, 태평백전
정치체계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유(劉)
역대 황제
소열제 (221년 ~ 223년)
회제 (223년 ~ 263년)
주요 재상
제갈량 (221년 ~ 234년)
현재 국가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베트남|

베트남
display: none; display: 베트남"
행정구
]]
(일부)

1. 개요
2. 국호
3. 역사
3.1. 연표
4. 군사
4.1. 성격
4.1.1. 정책
4.2. 병제
4.3. 지휘관
5.1. 재상중심정치
5.2. 이민족 정책
8. 평가
9. 역대 황제
9.1. 계보
10. 여담
10.1. 촉한의 작위를 봉한 대신들
10.2. 창작물
10.3. 쓰촨성의 관광 유산




1. 개요[편집]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한 국가. 스스로 후한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소설 삼국지연의주인공이 세운 국가로서 많은 민담의 소재가 되었고 후대에 낭만화되었다.

수도성도(成都)[7]였으며 익주 일대를 다스렸다.[8] 기존 통치 세력이었던 유장유비가 내부 세력과 손을 잡고 배신하여 형성되었으며, 형주계 호족이 통치의 근간이었다. 건국 이후 오나라에 형주를 상실하고 복수전을 일으켰으나 패퇴한 뒤 동맹을 맺고 위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263년 위나라의 남정으로 멸망했다.


2. 국호[편집]


후한을 계승하였다고 스스로 표방하였으므로 정식 국호는 단지 (漢)이었다. 다만 중국사에서 한(漢)이라는 국호를 쓴 나라가 많았으므로, 구분하고자 나라가 위치했었던 지방과 이름을 붙여 촉(蜀), 또는 촉한(蜀漢)이라고 부른다. 성한(成漢) 또한 촉 지방에 위치하였고 한나라를 내세웠으므로, 후대에는 일부가 마지막 한나라라는 뜻에서 계한(季漢)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한(漢)이란 국호는 잘 쓰이지 않았다. 금석문에서 보이듯 위나라에서는 촉로[9]나 촉적[10]이라고 불렀다. 오나라에서는 위나라 영토 분할의 맹약에선 한(漢)이라고 일컬었으나, 손권이 칭제한 뒤에는 공문서에도 일괄적으로 촉(蜀)으로 칭하였고, 손호 때는 '서쪽 속국'이라고 하기까지 했다.[11]

물론 위, 오에서 바라는 대로 불러줄지는 만무했겠지만, 놀라운 것은 장완, 비의, 등지처럼 오나라에 간 사신들도 공식 외교 석상에서 스스로 촉(蜀)이라는 명칭을 썼다는 것이다. 촉은 나라 이름 이전에 익주의 지명이지만, 장완, 비의, 등지는 모두 형주 출신이라 지명으로 말할 거리가 적었고, 이때는 사서에도 나오듯 나라를 뜻하게 사용되었다.[12] 촉한 내부에서는 계한보신찬처럼 한으로 불렀다.[13]

사실 정식국호와 통칭이 다른 경우는 현대사회에도 있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경우는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이고 영어로는 Republic of Korea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흔히 South Korea(남한)으로 통칭되며 공식 외교석상에서도 종종 South Korea란 표현이 쓰인다. 즉 이 나라의 공식국호는 한이며, 통칭은 당대엔 촉, 후대엔 촉한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제3조에 따르면 통칭인 'South Korea'는 잘못된 명칭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한국을 흔히 South Korea라고 많이 부르고 해외에서도 그렇게 널리 알려져있기 때문에 대화를 편하게 하기 위해 외교관들간의 대화나 비지니스 미팅에서 자국을 South Korea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촉한의 건국이념에 따르면 '촉' 역시 잘못된 명칭이다. (국호가 아닌 지방 이름이니까) 그러나 나라 밖에서는 그렇게 알려져있기 때문에 사신들이 그렇게 스스로 불러줬다고 볼 수 있다.[14]

위나 오와 달리 촉한만 유독 정식 국호를 쓰지 않은 것은 명분 때문이다. 촉한이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가. '한나라가 역적 조비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한나라를 계승한다'란 명분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호를 한으로 한 것이며, 명목상 '한(촉한)'은 중국 영토의 지배자이며 적법한 황제이다. 이 점에서 애초에 외교적으로 오나라에 간 사신이 스스로를 한이라고 부른다면 싸우자는 거나 마찬가지다. 왜냐면 오나라의 손권은 촉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아 칭제를 했기 때문에 '명분'상으론 칭제한 손권은 한나라의 역적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촉한 입장에서 명분상이고, 실질적으로 한나라(후한)은 버얼써 멸망했고 촉한은 후한과 별개의 나라이고 오나라도 별개의 독립국이다. 즉 당시 촉한은 명분 대신 실리를 택해 오나라와 서로 독립국으로서 교류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한'이란 명칭은 위에 언급했듯이 오나라 입장에선 상당히 실례가 되는 국호며 촉한을 한의 후계자로 인정해버리면 자기가 역적이란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 마찬가지로 위나라에서도 촉한=한을 인정해버리면 자신의 정통성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오는 절대로 한이란 명칭을 쓰지 않은 것이고, 오와 교류하는 사신들은 외교적 배려로 '촉'이란 명칭을 써준 것이다. 당연히 위를 정통으로 보는 정사 삼국지에서도 한나라란 국호를 쓸 리가 만무하다.

정사 삼국지』에는 촉으로 나오나 촉서에서는 한으로 부른다. 그 밖에 『자치통감』은 촉한으로 기록했고, 각주에서 촉, 유촉의 표현을 병용하였다. 촉한정통론이 대두되고 저술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에선 한이라고 불렀으며, 『삼국지평화』는 촉한을 썼다. 『삼국지연의』는 촉으로 기술했으며 『삼국지집해』는 주석을 단 사람들에 따라 촉, 한, 촉한을 병용하였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판소리 등지에서 '한말 위한오 시대'라는 표현이 보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촉, 촉한이 병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중종 때 백성들에게 유교적 덕목을 전파하고자 만든 『이륜행실도』에서 '촉'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기에, 대중 또한 촉을 일반적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 계한(季漢)은 실록에서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으며 별반 불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위, 손오에 대응하는 유촉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자치통감』 호삼성주에서 이미 확인되고, 국내에 들어올 때의 『통감강목』 판본에서도 사용된 유서 깊은 표현이다. # 현대 저서에서는 이중톈의 삼국지강의에서 사용되었고, 이외에 중국 내 삼국지 간행물의 이름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이렇게 국명에 왕실의 성씨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국호는 같으나 국성이 다른 나라들을 구분하기 위함이다.[15] 다만 위에 언급됐다시피 이 나라의 국호는 '촉'이 아니라 '한'이기 때문에 정식 국호를 아예 뺀 유촉은 적절한 칭호는 아니다. 조위, 손오는 둘 다 국호가 들어갔는데, 유촉은 국호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칭호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 나라의 정식 국호는 한이나, 나라 밖에서 이들을 일컫을 때나 외교석상에서 외국에게 스스로를 지칭할 때 통칭으로서 촉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후대에는 손쉽게 구별코자 촉한, 유촉 등을 썼다.


3. 역사[편집]



3.1. 연표[편집]


208년
적벽대전
214년
파촉 평정
218 ~ 219년
한중 공방전
219년
유비 한중왕 즉위, 형주 공방전
221년
유비 황제 즉위 / 촉한 건국
222년
이릉대전
223년
유비 사망, 유선 즉위
225년
제갈량의 남정
227 ~ 234년
제갈량의 북벌
244년
흥세 전투
247 ~ 262년
강유의 북벌
263년
위나라의 남정으로 멸망


4. 군사[편집]






4.1. 성격[편집]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가서 광릉(廣陵)을 차지하고 원술과 싸웠으나 또 패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선주전(先主傳)[16]


장차 패(沛)로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려 하자,

진수, 『정사 삼국지』, 선주전(先主傳)[17]


한 달 남짓 지나자 흩어져 달아났던 사졸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선주전(先主傳)[18]


당대의 군은 부곡이라고 하여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뭉친 세습 군사 집단을 기반으로 이루었는데, 유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유비가 이끈 군대는 다른 세력에서 얻었거나 어떤 세력의 잔존병들을 규합해 모은 경우가 많았다. 처음 군사적으로 발흥한 때에도 공손찬 휘하에서 병사 천여 명과 유주의 오환족 기병을 이끌고 있었고, 도겸에게서 단양병 4천을 받았던 것도 확인된다.

그러나 유비는 일생의 대부분을 각지를 떠돌아다녔으므로 정확한 병력이나 휘하 군사 집단의 특성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촉군이라 일컬어지는 대상은 바로 형주와 익주의 군세가 결합된 시기부터인 것이다.

위서 문제기를 보면, 이릉대전 때 병력이 4만인데 마필(馬匹)은 고작 2, 3천 필에 불과했다고 나온다. 말은 수송이나 운송에도 이용되었으므로, 기병(騎兵)은 본질적으로 훨씬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19] 따라서 촉은 위의 대규모 기병대에 맞서려고 팔진도 같은 보병 전법을 극대화하였다.

파일:D79QPK_VsAA2dbG.jpg
제갈량의 북벌 때 촉병의 모습

촉한은 방호구와 병장기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 촉한의 대장장이 포원은 야금술을 발전시켜 튼튼한 갑옷투구, 또 신도(神刀)라는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또 제갈량은 원융노라고 불리는 십시연노를 개발하여, 『화양국지』에 따르면 힘 좋은 병사 3천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 화살은 쇠로 만들고, 그 길이가 8촌이었는데 한 번에 10발씩 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사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전술한 팔진도와 운용이 반드시 배합하였다.[20]목우유마를 개발한 것도 유명하다.[21]

제갈량이 이끄는 군세는 정돈되어 가지런하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했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제갈량은 쪽수의 불리함을 질적 차이로써 이겨내고자 했던 것 같다.


4.1.1. 정책[편집]


생산력이 풍부하고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 덕분에 난세 때마다 파촉을 근거지로 독립 세력이 들어섰으나, 중국의 중심은 늘 중원이었고, 따라서 중원이 안정된다면 변방 지역에 불과한 파촉은 절대적인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방어에 유리하다는 것은 그만큼 고립되었다는 뜻으로, 영향을 확장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한실 부흥을 국가적 명분으로 삼았던 촉한은 끊임없이 대외 팽창을 꾀했다. 한중공방전을 필두로, 제갈량의 북벌 다섯 번이 있었는데 위연은 더욱 더 빠르고 공세적으로 나아가고자 자오곡 대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강유는 일곱 번이나 출정하였는데, 단곡 전투에서 패배한 뒤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군사 활동이 방어를 기준으로 재편성되었다.


4.2. 병제[편집]


중국의 현대사학자 백수이(白寿彝)가 쓴 『중국통사』[22]에서, 사민부[23]에 나오는 대갑장사(帶甲將士)를 세병제를 전제로 한 수치가 아니라 상비병의 숫자로 간주하고, 한나라 때 징병제가 그대로 실시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듯 촉한의 병제는 한나라의 병제를 모방하였고, 그 때문에 위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큰 틀에서 다르지 않을 뿐, 촉한 특색의 편제도 있었으므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촉한 소열제는 처음에 다섯 군을 두었다. 장교의 편제는 대략 서한과 비슷했으나, 사병 편제는 산기[24]

와 무기[25]의 구분이 있었다. 제갈무후가 촉을 다스릴 때는 팔진법으로 전사들을 조련했다."

왕응린(王應麟), 『옥해(玉海)』


"촉은 다섯 군을 뒀는데, 좌군과 우군에는 장군, 독, 호 등을 한 명씩 두었고, 중군에는 사, 감, 호, 전, 참군 등을 한 명씩 두었으며, 전군에는 사, 장군, 감, 호, 독군 등 한 명씩 두었고, 후군에는 독과 장군을 겸하는 한 명을 두었다. 그 장교의 편제는 대략 한과 같았으나 사병의 편제는 돌장, 무전, 빈수, 청강, 산기, 무기 등의 구분이 있었는데 모두가 촉나라 사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역대병제(歷代兵制)』


촉의 중앙군은 전(前), 후(後), 좌(左), 우(右)의 사군[26]중군(中軍)으로 나뉘었다. 이때 사군은 조위의 외군[27]과 비슷했으며, 중군은 중도호(中都護), 중감군(中監軍), 중령군(中領軍), 중호군(中護軍), 중참군(中參軍) 등의 관직을 설치한 중앙 기동 부대와 좌우우림부(左右羽林部), 호분(虎賁), 호보영좌중우삼부(虎步營左中右三部), 호기영(虎騎營) 등으로 구성된 수도 방위군으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도 한나라를 모방하여 중앙에 둔기(屯騎), 보병(步兵), 사성(射聲), 월기(越騎), 장수(長水) 등 다섯 교위(校尉)를 두었다.

  • 우림군(羽林軍): 우림감(羽林監)이 우림좌부독(羽林左部督)과 우림우부독(羽林右部督)과 더불어 좌우 두 군영으로 황궁을 숙위했다.

  • 호보영(虎步營), 호기영(虎騎營): 호보영은 중호보병(中虎步兵)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중군의 주력 정예 부대로, 좌, 우, 중의 세 군영으로 나뉘어 숙위를 담당했다. 호보감(虎步監)이 최고지휘관인데 강유가 호보감으로서 중호보병 5천~6천여 명을 지휘한 적이 있었고, 제갈량은 일찍이 호보감 맹염으로 하여금 중호보병을 이끌고 무공현(武功縣) 위수 동쪽에 주둔하게 하여 위군을 방어한 적이 있었다. 《수경(水經), 위수주(渭水注)》에 따르면, "사마의가 위수의 물이 불어난 틈을 이용하여 기병 1만 기를 내어 공격해 왔는데, 중호보병에게 격퇴 당했다(司馬懿趁渭河水漲,出騎萬人來攻營, 被中虎步兵擊退)"라고 하였다. 호기영은 호기감(虎騎監)이 군을 이끌고 황궁을 수비했다.

  • 오교영군(五校營軍): 둔기(屯騎), 보병(步兵), 사성(射聲), 월기(越騎), 장수(長水) 등 다섯 교위(校尉)는 도성에 주둔하며 황궁을 수비했다. 촉한은 한의 대통을 이었음을 천명했으므로 한의 제도를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촉한의 다섯 교위의 규모 역시 한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할 것이다. 둔기교위, 보병교위, 사성교위, 월기교위는 각각 정병 700인을 이끌었고, 장수교위는 기병 736기를 거느렸다.

지방군은 크게 전방 도독(都督)의 직할 부대와 각 군현(郡縣)의 방위군으로 구성되었다. 문산군(汶山郡) 서오부(西五部)의 험준한 요충지에는 문산(汶山), 용학(龍鶴), 염방(冉駹), 백마(白馬), 광용(匡用) 등 다섯 곳에 방어시설을 설치하고 아문(牙門)을 배치하여 아군(牙軍)을 주둔시켰고, 공도현(邛都縣)에는 칠부영군(七部營軍)과 사부사유(四部斯臾) 등을 설치했다. 242년에는 적갑(赤甲)과 북군이아문(北軍二牙門)을 창설했고, 부릉군(涪陵郡)에 조군군(助郡軍)을 설치했다.

제갈량 시대에 남중(南中)의 청강(青羌)을 촉으로 이주시켰고, 파종(巴賨), 청강 등 이민족을 군에 편제시켰다. 《후한서》의 주석을 보면 "수병도 촉병이다(叟兵亦爲蜀兵)"라고 했는데, 수(叟)란 촉에 거주하는 저족, 강족과 같은 계통의 소수민족 별칭으로서 큰 부족은 일곤(曰昆)이라 하였고 작은 부족은 일수(曰叟)라 하였다. 종수(賨叟)나 판순만(板楯蠻)이라고 불리던 빈수(賓叟)는 고대 파인(巴人)의 한 갈래로 낭중(閬中)과 가릉강(嘉陵江) 중류지역에 분포하였다. 주로 나(羅), 박(朴), 독(督), 악(鄂),도(度), 석(夕), 공(龔)의 7대 씨족으로 구성된 이 소수민족은 노(弩)를 아주 잘 다뤘다. 파인의 영수인 범목(范目)은 일찍이 저 일곱 씨족을 이끌고 한 고제 유방을 도와 관중 지역을 평정하기도 했다. 청강(青羌)은 청수(青叟)라고도 한다.《화양국지》《남중지(南中志)》에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하고 "남중의 경졸[28]인 강청 만여 가구를 촉으로 이주시키고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무전[29]으로 삼고 비군이라고 불렀다. 그 (비군을 제외한) 약한 무리는 큰 씨족인 초, 옹, 누, 찬, 맹, 양, 모, 이, 와 묶어 부곡으로 삼고, (비군으로는) 오부도위를 편성하여 오자라고 불렀다"라고 청강에 대해 기술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민족들이 기존 병제에 일부분으로 편입되기보다는 종병(賨兵), 수병(叟兵), 청강병(青羌兵) 등 별도로 편제되었다.

  • 적갑군(赤甲軍): 동한 시대에 이미 적갑군 편제가 있던 곳에서 제갈량이 경졸 3천을 선발하여 연노병으로 삼았고 한중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다.[30] 적갑군이라는 편제 자체가 유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활약이나 무장, 부대의 존재기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무당비군(無當飛軍): 225년 제갈량이 남정하여 남중 사군을 평정하고 그곳을 장가(牂柯), 월수(越嶲), 주제(朱提), 건녕(建寧), 영창(永昌), 운남(雲南), 흥고(興古)의 칠군으로 재편했다.[31] 개선하면서 남중의 경졸(힘이 센 병졸) 청강(青羌) 1만여 가구를 촉으로 이주시켰는데 그중 정예인원을 선별하여 부대를 조직하고 오부도위(五部都尉)로 편성했다. 청강은 청수(青叟)라고도 부르는데 고대 서남지역 강족의 한 갈래이다. 늘 푸른 옷을 걸쳤기 때문에 청강이라 불렀다. 촉의 수병(叟兵, 소수민족 병사) 중에서 싸움을 잘하기로 청강을 꼽는데 전투력에서 판순만(板楯蠻)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했다. 오부도위는 비군이라 불렀다. 《한진춘추》의 사마의 격퇴 기록에서 왕평이 무당감을 맡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이끈 군대를 "무당비군"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상세는 불확실하다.

  • 백이병(白毦兵): 제갈량집 1권, 제갈근에게 제갈량이 보낸 서신에서 진도가 지휘하는 부대로 한 번 언급된다. 시열상 이릉대전 이후에 해당한다. 영안에 주둔하며 진도의 지휘를 받았다. 서신에서는 서방상병(西方上兵)이라고 칭하며 유비의 휘하에 있던 병력이라고 하는데, 이 서술에서 유비 휘하의 친위대로 진도가 대장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진도는 여남 사람으로 유비가 예주목으로 있을 때부터 수행했고 그 명망과 지위는 조운 다음으로 높았다. 223년 벼슬이 영안도독(永安都督), 정서장군(征西將軍), 봉정후(封亭侯)에 이르렀다. 양희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 "정남장군은 중후하고, 정서장군은 충직한데 가려 뽑은 병사를 통솔하여 맹장으로서 공을 세웠다. 조자룡과 진숙지를 찬양한다"라 했는데, 이를 통해 진도가 이끄는 백이병이 모두 선발되어 조직되었다고 가정한다. 이(毦)는 야크(소과의 동물)의 꼬리털을 엮어 만든 장식물을 말하는데, 여기서 백이(白毦)를 흰 야크의 꼬리털로 만든 장식물로 간주한다. 《화양국지》에 전이(氈毦)[32]는 촉에서 나는 귀중품이라 했는데, 제갈량은 백이를 손권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여 이민족 부대라는 명확한 사료적 근거는 없으며 그 규모나 발생 시기, 무장이나 지휘관의 연원이 모두 불확실하다. 그러나 최대한 확실한 부분에 대해서 적었으며, 바이두 백과에서는 도겸에게서 받았던 단양병 기원설, 마초 부곡 기원설, 서남 소수민족 부대설을 차례로 언급하였다. 田余庆 교수는 이들을 제갈량의 북벌에 종사한 이민족 부대로 보았다.

이처럼 촉의 군대는 중앙과 지방의 중외양군 체제로 되어 있으며 한족 뿐 아니라 소수 민족도 모병하여 특기에 맞게 군대로 편성했다. 촉의 중앙군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 후, 좌, 우군은 정벌을 담당하고, 중군은 정벌 및 경기지방과 도성의 숙위를 담당한 것이다.


4.3. 지휘관[편집]


촉한의 지휘관들은 대개 입촉까지 함께한 1세대, 이릉대전에서 중진을 맡은 2세대, 제갈량의 북벌에 참가한 3세대, 제갈량 사후부터 멸망까지의 4세대로 나뉜다.

1세대 장수로는 오호대장군이 있는데 장비, 황충, 마초는 특히 야전에서 직접적으로 큰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 다만 오호대장군이란 이름은 후대의 창작으로,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이후 임명한 사방장군(관우/마초/장비/황충)에 익군장군 조운이 여기 해당된다. 관우/장비/조운은 유비의 오랜 부하들로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고, 황충과 마초는 입촉 당시 귀순해 공을 세운 부하들이다.

2세대는 황권, 풍습, 정기, 장남, 부융 등이 있었으나 상당수가 이릉대전 때 사망, 또는 투항했다.

3세대 장수들은 촉한의 지휘관 가운데 가장 위나라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난 장수들이 상당했다. 공성전, 야전 같은 큰 전투에서 위군을 격파한 일이 있는 위연, 오의[33], 왕평, 강유, 장억, 마충, 등지 등이 있고 그 외 사료에 기록이 소실된 원침, 고상, 구부, 진도 등의 군부고관들도 있었다.

4세대는 강유의 북벌을 보조한 하후패, 요화, 장익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기록이 소실된 호제, 왕사, 유은 등이 있었다. 멸망 이후 곽익, 나헌 등은 서진시대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항장의 임용이 두드러지기도 했는데, 아래는 촉한에 투항하였던 무장들의 행보이다.

  • 마초 - 표기장군 겸 가절 영 양주목, 태향후
  • 황충 - 후장군, 관내후
  • 조운 - 진동장군, 영창정후[34]
  • 왕평 - 진북대장군
  • 곽순 - 좌장군
  • 하후패 - 거기장군
  • 강유 - 대장군, 녹상서사 영 량주자사


5. 정치[편집]


제갈량은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는다." 라는 치실(治實) 정신을 제창하였다. 남중을 대하는 데 있어선 마음을 공략하는 것을 취함이 상책이며, '이민족과 한족이 대체로 무사하고 별고 없이 편안함'의 효과를 거두었다. 손오에 대하여 실질적인 외교를 취해, 제갈량의 북벌을 위해 '동쪽을 고려하는 걱정'을 해소하였다.

만줄남(萬繩楠), 『위진남북조사논고(魏晉南北朝史論稿)』 제3장 《제갈량의 치실 정신을 논하다》 제1절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는다》


법에 따른 나라를 다스림에서는 "선리가 강하고, 후리가 약하다." 강한 세력을 지닌 자들을 억누르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법도와 규범, 관직을 간략하게 하는 것을 제창하여, 권제를 엄격하게 따르고, 널리 성심을 열고, 공평하게 행동했다.

만줄남(萬繩楠), 『위진남북조사논고(魏晉南北朝史論稿)』 제3장 《제갈량의 치실정신을 논하다》 제2절 《제갈량의 촉 통치》


제갈량은 유학자이자 법치를 중시했으므로 국가 운영 자체가 법을 중심으로 운영 됐으며 상벌이 명확해 국가가 문란해지지 않았다. 신(臣)의 권한이 매우 컸으나 황제의 권위를 능멸하지 않고 충성했으므로 황제권이 막강했으나 법과 재상 중심으로 운영된 특이한 국가다.[35]

이는 기본적으로 유비 세력이 한에 충성하고 황실을 복원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확장된 세력이며 아예 조위가 건국되자 유비가 한 황실 그 자체가 됐으므로 당연히 신하가 황실에 충성하는 건 자연히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漢)에 충성하는 것이었다.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이는 선양으로 건국 돼 정통성에 하자가 있는 조위나 호족들의 연합으로 구성된 손오와는 확연히 차별화 되는 특징이었다.

유비가 살아있었을 당시엔 당연히 유비가 명실상부 권력의 으뜸이었으나 그가 촉한을 건국하고 얼마 안 있어 사망한지라 보통 유선대가 촉한 체계의 기본이 된다.

당시 권력의 으뜸은 제갈량이었고 모든 것이 그 중심으로 돌아갔으나 그는 황제를 업신여기지 않고 존중하며 항상 승인을 받아냈다. 조조나 사마사도 황제를 능멸하거나 무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통하긴 했지만 형식적으로 승인을 받아내는 과정을 거쳤는데 제갈량은 순수하게 항시 유선의 승인을 받았고 그가 정치력을 행사하길 바랐다. 이것이 그가 생각한 법치 국가이고 이상적인 국가 체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촉한사영으로 대표되는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에 군사적으로는 강유까지 하여 그들이 독자적으로 국가를 이끌었으나 황제권을 능멸하진 않았기에 황제의 권위는 높았다만 단지 지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죽고 내정을 도맡을 명재상들이 사라지자 촉한 말에는 오히려 문제가 된다.[36]

5.1. 재상중심정치[편집]





유비가 죽은 뒤로 이엄마저 실각하자 제갈량상국으로서 나라 안팎의 모든 일들을 모두 다루었다. 제갈량은 승상으로서 외정, 녹상서사로서 내정을 틀어쥐었는데 중앙의 행정, 인사[37], 군사, 외교를 모두 총괄하였다. 또 익주목을 맡았는데, 나라 전체가 익주 하나였던 촉한에서 익주목이라 함은 곧 지방 행정과 군사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유사[38]

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평명[39]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제갈량, 『출사표[40]


제갈량은 전출사표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태도로 이렇게 말하였지만, 이때 관리를 감찰하는 직책인 사례교위는 바로 제갈량 자신이었다. 다시 말해서, 관원에 대한 상벌을 관련 감찰기관의 판단에 맡겨두라는 제갈량의 요구는, 곧 제갈량 자신의 판단에 맡겨두라는 뜻이며, 유선이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지 말라는 요구였던 것이다.[41]

또 전출사표에서 제갈량은 환제영제의 예를 들어 말하는데, 이로 보아 황제의 친위 세력이 되는 환관들을 정치 전면에 나오지 못하도록 억제했던 듯하다.

丞相亮將北征,住漢中,慮後主富於春秋,朱紫難別, 以允秉心公亮,欲任以宮省之事。

승상 제갈량이 북벌에 앞서 한중에 주둔했을 때, 후주가 어려서 뭐가 좋고 나쁜지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동윤이 마음이 공명하였으므로 그에게 궁궐의 일을 맡기려고 했다.

진수, 『정사 삼국지』, 동윤전(董允傳)[42]


이에 상해대학 교수인 주자언은 『성단에서 걸어 내려온 제갈량: 삼국사신론』에서 "이는 완전히 기군(欺君) 행위이다. 나아가 이렇게 탄식한다. 세상 사람들은 조조가 주군을 괴롭히고, 한 헌제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 말하지만, 왜 제갈량의 기군 행위는 보고도 못 본 척하는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기술하였다. 유선은 이렇게 임명된 동윤을 두려워하고 꺼렸으며, 언제 한번은 이처럼 비꼬기도 하였다:

"정치는 갈씨(葛氏)에게서 비롯하고 제사는 과인(寡人)이 맡겠소." 제갈량 또한 유선이 정치에 익숙치 않다 여겼으므로 마침내 안팎을 총괄했다.

진수, 『정사 삼국지』, 후주전(後主傳)[43]


유선은 따라서 황실 의례를 맡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죽은 다음인 장완 시대부터 승상부를 설치하지 않고 정사는 상서령, 군사는 대사마대장군이 이끌도록 나누었으며, 비서령으로 하여금 상서령과 균형을 유지토록 했다.[44] 또 유선이 신권 1인자에게 북벌에 필요한 개부(開府)를 명령한 것을 보면, 이때 재상의 실력이 상당히 깎였던 것으로 보이고, 동윤이 죽은 뒤에는 황호를 내세우며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촉한에서 이렇게 재상중심 정치가 가능했었던 까닭은 재상을 견제할 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황후 감부인은 일찍이 죽었으며, 종실유봉은 자결당했고, 장비범강장달에게 살해당했다. 무엇보다 유비가 권력 승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다.

유선이 집권한 뒤, 정책은 제갈량에 의해 주로 진행되었다. 그는 조정 내에서 규범을 제정하고 대신을 훈계하며, 조정의 풍토는 청렴하고 인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촉한의 경제는 해마다 위나라와 싸워도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제갈량은 세상을 떠난 뒤에 촉한의 백성들이 그리워했으며, 그 치국 능력과 효과는 당세와 후세에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도 장완, 비의, 동윤, 강유 등이 제갈량의 정책을 이어갔고, 이후 유선은 환관 황호를 총애해 조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지방의 정치 풍토는 청렴했다.

조곤생(趙昆生), 『삼국 정치와 사회(三國政治與社會)』 제4장 《촉한의 정치와 사회》 제1절 《촉한 정권 출현의 특정과 방식》


그래도 이들이 정권을 잡은 동안 정국은 안정되었고 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건전한 재상 중심 정치, 어떤 사람은 권신의 독재 정치라고 생각할 것이나, 판단은 각자 하는 것이다.

다만 위에 언급된대로 제갈량이 권신이냐 아니냐 여부는 각자 판단할 노릇이고 촉한의 제갈량이 후한의 조조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건 사실이나, 둘을 같은 류로 보는 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조조는 스스로 찬탈을 하진 않았으나 조정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고 구석을 받는 등 명백히 후한 황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역신으로 볼만한 행위를 계속했다. 헌제는 이름만 남아있었고 그렇기에 조조의 사후에 갓 위왕으로 즉위해 사실상 아무 업적도 없던 조비가 쉽게 제위를 선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촉한 황실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자기 파벌을 키우거나 역심이라고 볼만한 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당연히 그가 역신이라는 평가도 없다. 즉 제갈량이 권신이라고 쳐도 그는 충신인 권신이었던 셈이다.[45]


5.2. 이민족 정책[편집]


촉이 이민족에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는 순진한 오해가 널리 유포되었으나, 실제로는 이민족과 많은 마찰을 겪었다. 수도인 성도 인근 백여 Km 거리의 문산군 이민족조차 오래토록 저항한 사례는 그 단면 중 하나이다. 북부로는 강족 부족들을, 남부로는 남만의 이족들과 접한 촉은 이들을 회유하려 노력하였으나, 정권이 수명을 다하던 순간까지 완벽한 복속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고 죽은 이후 벌어진 제갈량의 남만정벌에서도 이러한 현실은 잘 드러난다. 일부 사료에서의 윤색된 묘사와 달리, 남만정벌에서 제갈량이 돌아오자마자 제갈량이 임명한 현지 관료들이 사망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초기 반란의 근원지이자 성도 인근으로 군사적인 공격을 행하기까지 했던, 성도 인근의 월수군은 이 원정 이후에도 살아남아 독립세력으로 남아 십수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정복되었다.

남부 원정 자체의 성격도 한계가 명확했다. 손오가 남방 지역을 적극적으로 식민화하여 이민족을 국력에 편입시킨 것과 달리, 촉의 남부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일부 이민족들을 성도와 한중 등지로 강제이주시키고 자원을 착취하는 선에서 원정을 마무리지었고, 이들은 결코 촉의 중앙 행정체계에 편입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민족들을 행정망에 포함시켜 국력화하지 못한 점은 손오와 구별되는 촉 정부 고유의 한계였다.


6. 외교[편집]


황제국을 표방했지만 서역, 동이가 조공한 위, 동남아에서 조공한 오와 달리 조공국이 없었다.


6.1. 오나라[편집]


이릉대전에서 대패하고 화약을 맺었으며, 장비를 암살하고 도망간 범강과 장달을 돌려받지도 못하였다. 손권이 칭제했음에도 유씨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저버리고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동맹을 유지하였다. 도리어 오나라에 예물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사신들은 가서 한(漢) 대신 촉(蜀)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삼국 중 국력이 최하위였던 촉한이 실리주의 외교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국호 항목에 설명된 것과 같이 '한'이란 국호는 정통이 촉한에 있다는 의미이며 손권의 칭제는 이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한은 오와 위 양쪽으로 적을 둘 여력은 없기 때문에 동맹을 택한 것이다. 실제로 위에 비해 국력이 한참 열세였던 오 역시도 촉한과 전략적으로 동맹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며, 유비 사후에 맺어진 둘의 동맹은 촉한이 멸망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7. 국력[편집]



7.1. 인구[편집]


고민 선생의 『위진남북조경제사』에서 촉한의 조세 제도는 아직도 구전산부제[46]

일 가능성을 고증한 바 있다. 양문리는 촉한에서 세금을 인구별로 걷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인구를 숨기려 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촉한 정부의 경제 부담은 인구를 숨기지 않는 양민에게 전가되어, 점점 더 많은 인민이 인구를 숨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오기림(吴奇霖), 촉한의 흥망성쇠 50년 #


또 제갈량이 죽은 뒤에 군대의 병사들이 도망가서 서로의 이름을 사칭하여 간사하게 법을 어긴 자가 적지 않았다.

진수, 『정사 삼국지』, 여예전(呂乂傳)[47]

[48]


후한 때 익주 서남부인 영창군의 인구만 무려 189만 명에 달했고, 조조장로를 격파하고 파동군과 파서군의 인구 8만 명을 이주시킬 정도로 파촉은 본래 그 인구가 많았으며, 중원의 전란을 피해 촉 땅으로 들어온 인구와 유비의 세력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었다.

그러나 잦은 전란과 행정망의 붕괴 때문에 인구가 급감하였고, 이에 두우의 주석에 따르면 221년에 호구는 20만에 인구는 90만이었다고 하며,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멸망 직전에 호구는 28만에 인구는 94만, 군사가 10만 2천에 관리가 4만이었다.[49]


7.2. 경제[편집]


촉한은 하늘이 내린 땅이라는 익주를 차지하고 제갈량의 무농식곡[50] 정책을 계속함과 동시에 폐관식민[51]과 이부민재[52] 정책을 폈다.

촉한의 영토는 성도 평원 중심의 파촉, 익주 북쪽의 한중 분지, 익주 서남부의 남중(오늘날의 운남)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파촉 땅은 산이 많지만 관개 농업을 통해 계단식으로 개간했고, 그 안의 넓은 분지는 농사를 짓기에 알맞고 기름졌다. 그리고 날씨는 온후하여 온난습윤한 지역으로 식생의 종류와 양이 풍부하고 각종 작물이 잘 자라며 일년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사천분지의 남쪽에는 장강이 흐르며 서부의 성도 평원은 생산성이 높은 농업지대이다. 동부의 대부분은 해발 500m 이하의 분지로서 비옥한 평원과 구릉 지대로 이루어져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많이 살았다. 한중은 관중 지방과 촉을 안정적으로 분리해 파촉의 생산력을 보호했고 그 자체로도 기름진 땅이었기에, 제갈량은 "민은국부[53]하다."라고 말했다. 남중은 비록 독자 세력에 가까웠지만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산물이 풍부했다.

때문에 삼성퇴 유적으로 대변되는 고대 촉문명이 일치감치 등장, 소위 중원과는 독자적으로 번성했으며 이후 전국 시대 이곳을 점령한 진의 경제 부분의 일익을 담당,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또한 도강언으로 대표되는, 전한 시대에 이루어진 뛰어난 관개 사업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홍수로 인한 피해와 물 부족은 걱정이 없었다. 그 덕에 예로부터 익주, 지금의 사천 땅은 ‘옥야천리’, ‘천부지토’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촉한이 존재했던 시기인 기원전~기원후 600년까지는 기온이 지금보다 2~4도 낮았었는데 사천분지 내 지역은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에서 익주의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원을 도모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으며, 등애는 촉한을 정벌한 직후 촉한의 융성한 소금 산업, 철업을 이용하여 오를 칠 전초 기지로 사용하면 내년 가을, 겨울 안에 오나라까지 거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도 했다. 오나라의 멸망은 익주에서 양성된 수군의 공격이 큰 소임을 담당했다.


7.2.1. 농업[편집]


유비는 대규모 둔전 위주 정책을 펼치는 대신 주군의 농업 경제 육성과 발전에 힘썼다. 일례로 익주 평정 후 성도의 토지와 저택 등을 상으로 내리자는 건의에 조운이 '밭과 집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생활이 안정된 뒤 역조(役調)를 지운다면 백성들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유비는 조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농업 발전의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제갈량은 민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해야 안심하고 농업생산에 종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백성들을 쉬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또 농사의 풍작을 위해 농토 수리 관개 사업을 매우 중시했다. 도강언은 서촉 농업의 명맥이었다. 제갈량은 이곳의 수리 시설을 계속 유지, 보수, 신축하였다. 또한 익주의 경제는 중원과 같은 심각한 파괴를 당하지 않았고 유비와 제갈량 통치하에서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둔전의 규모도 위, 오만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군량미 환적의 번거로움을 줄이고 소농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익주에는 도강언(都江堰)을 위시하여 양전언(楊塡堰), 오문언(五門堰) 등의 수리 시설이 홍수방지 및 농업용수 공급에 큰 소임을 해내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런 수리 시설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 농업의 관개를 보장, 생산량을 늘리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농사시기, 세금와 역을 적절하게 하여 농민이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였으며 수공업도 장려하였고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제갈량은 '무농식곡(務農殖穀)'과 '이부민재(以阜民財,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한다.)'라는 정책을 주장하였다. 촉땅은 강이 수량이 많고 들판이 비옥한 데다가 제갈량의 정성스런 관리로 농업 생산량이 매우 높아졌다. 도강언 관개구에 있는 면죽(지금의 덕양), 광한 일대의 논은 묘(亩) 30곡(斛) 이상이라는 기록이 있다.[54] 제갈량은 남중의 영창군 법보산(法寶山) 아래(오늘날의 운남성 보산시) 제갈언(諸葛堰)을 건설하기도 했다. 또 그와 동시에 제갈량은 촉과라는 법률을 통해 엄정한 사회기풍을 강조했고 '촉 땅 인사(호족)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스스로 방자'하지 못하게 해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았고' 이로서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였으며 호족 세력이 농민을 침탈하는 것을 막았다.

4차북벌 이후 권농강무(勸農講武, 농사를 권하고 무예를 강습함)하고 목우유마를 만들고 군량미를 운반하여 야곡구에 쌓아놓고 야곡구에 있는 식량창고인 저각을 수리하였다. 이후 백성들과 군사들을 휴식시켰는데(식민휴사, 息民休士) 이로서 3년후에 사용하였다(三年而用後之). 이는 제갈량이 남정할 때와 같으니 백성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또 제갈량은 두미를 초청하며 '잠시 국경을 닫고 농업을 권장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길러 자라게 하고 아울러 갑병을 다스리며 조비의 군대가 피로해질 때까지 기다린 연후에 토벌한다면, 병사들로 하여금 싸우지 않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수고롭지 않게 하고도 천하는 평정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제갈량은 백성들이 풍족한 생활을 하고 국가는 튼튼한 재정수입이 확보되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엄격한 군사훈련을 통한 강병을 길러 적을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원준은 이렇게 말했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이 항상 밭두렁을 일구어 창고에 식량이 가득했고, 무기를 예리하게 갈아 유사시에 대비를 했다. 조회를 할 때는 떠드는 사람이 없었고 길거리에는 술에 취한 사람이 없었다.



7.2.2. 상업[편집]


파촉 땅에는 전한기부터 제철 사업으로 갑부들이 많았다. 공명은 이 좋은 쇠와 무릉의 석유, 천연 가스로 무기와 갑옷 따위를 비롯한 쇠붙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고 하며 사금중랑장(司金中郎將)을 두어 농구기와 무기를 제조하게 했다. 염철(鹽鐵)을 정부에서 관리하여 국가적 수요를 만족 시켰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 수입도 늘렸다. 또 공명은 이를 이용하여 무기를 개량하였다. 결과적으로 강력한 무기와 단단한 철갑은 촉나라의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공명의 북벌시에 사마의는 촉한의 군사와 대치만 할 뿐 감히 대적하지 않았으며, 촉한의 험준한 지형상 군수 물자 수송이 어려운 것을 알고 공명이 군사를 물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소금 수입을 막기 위해 암염을 개발했다. 촉은 원래부터 정염(井鹽)과 철광자원이 풍부했는데, 정염은 정확히 말하면 지하수에 녹아있는 소금을 끓여서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당시에 ‘집에 염천이 나는 우물이 있고, 임공(臨邛)의 염정에서는 ‘물 1곡에 소금 다섯말을 얻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를 점령하자마자 소금과 철을 전매케했고 당시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행해지던 정염 생산을 화정(火井, 천연 가스)를 이용하여 본격화시켰다. 고대에는 소금이 전략 물자였으므로,[55] 공명은 이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 생산량을 늘리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면서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었다. 염부교위(鹽府校尉) 혹은 사염교위(司鹽校尉)를 두고 그 아래 염부전조도위(鹽府典曹都尉)를 두어 염업을 국가가 관리하게 했다. 이로서 촉한은 국가 단위에서 소금과 철의 정제를 관리함으로써 질과 양을 성장시켰으며 소금 산업의 비약적인 향상을 통해 파촉 지역의 소금은 촉한이라는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큰 명성을 떨쳤다.[56]

더불어 공명은 촉금을 국가의 중요 물자라고 인식하고 본래 유명하던 촉한의 비단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규모를 넓혀서 금관이란 기관을 만들어 민영/관영 할 것 없이 직간접적인 관리를 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나라의 특산물로 삼았다. 당시 촉금과 관련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위진 이래 촉금이 생겨나서 양읍의 자리를 빼앗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양읍은 견직물을 생산하는 쪽으로 변하여 결국 얇은 채색 비단은 촉지방에만 있게 되었다.

주개검의 〈사수필기 絲繡筆記〉


삼국 시대 때 제갈량이 촉나라를 다스리자, 잠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촉나라 비단이 일시에 유명해졌다. 위나라 문제 조비는 '촉나라 비단' 무늬의 참신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뭇 신하에게 "전후로 매번 촉나라 비단을 얻었으나, 서로 비슷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예문류취 藝文類聚〉 권85


장호가 일찍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오나라 비단, 절강의 비단을 가지고 관청으로 와서 사천의 비단과 같이 붉게 물들였다. 뒤에 경사(京師)로 돌아와 장마철이 지나자 오와 절강의 비단은 모두 색이 변했으나, 오직 촉나라 비단만이 예전과 같았다.

〈능개재만록 能改齋漫綠〉 권15


이처럼 촉의 비단은 삼국의 귀족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오나라와 위나라가 촉한으로부터 수입하는 중요한 수입품 중 하나였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천땅은 서쪽으로는 차마 고원을 통하여 티벳과 인도, 그리고 중동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당대에 남만이라고 불렸던 운남성과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좋은 [57] 와 농지로 유명하다. 남중 정벌 이후 금, 은, 단, 칠, 밭갈이 소 등이 공품으로 들어와 촉한의 군비에도 다소 공급되었다.


7.2.3. 화폐[편집]


일찍이 유장을 공격할 때 유비가 여러 장수와 군사들에게 약속했었다. "만약에 성도(成都)가 평정되면 부고(府庫)에 있는 모든 물건은 나는 관계치 않겠다."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수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이는 쉬운 일입니다. 다만 마땅히 직백전을 주조케 해, 여러 물가를 평정하고, 관리들에게 영을 내려 관시를 하게 하십시오."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58]


남제서에 따르면 오수직백전은 커튼 고리를 징발하여 만들었다.[59] 사서에서 촉한이 동전을 따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기도 하고, 또 한가군 엄도와 월수군 공도에서 구리가 나기는 했으나, 유송 때도 구리가 나긴 났으나 없어서 철전을 찍었던 것을 보면 이는 사실로 추정된다.

직백오수전은 소전[60]이나 오수전보다 큰 실물 가치를 지녀서 겉보기에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삼성이 얘기했듯 직백(直百)이라는 것은 액면 가치가 오수전의 무려 100배인 것이다. 오수전이 2.6 g이었고, 직백오수전은 7.9 ~ 9.5 g이었으니,[61] 고작 3배의 주조 비용이 증가했다 한들, 주조 차익이 100배나 늘어나면 그 화폐는 사실상 헐값을 넘어 똥값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62]

촉한은 이런 식으로 민간 경제를 약탈하였으며, 한중 공방전형주 공방전 등에 사용하였다는 의견도 있다.[63] 관아의 창고가 가득찼다고 서술된 것은, 촉한의 화폐와 화폐 경제가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흥선대원군당백전을 발행해 주조 차익을 거둔 일과 흡사하다.

물론 군사력 위주의 정치와 경제를 지녔던 것은 당시 삼국이 동일했다. 위에서 촉한이 민간에서 자원을 끌어와 형주와 한중에서 전쟁을 치른 것을 지적했는데, 조위의 경우는 촉한과 동오 뿐 아니라 북쪽과 서쪽의 이민족들 역시 견제해야했다. 위(삼국시대) 문서에 나와있다시피 조위는 국경 전체가 사실상의 전선이었고, 이에 따른 군서적 소모는 방어에 특화되어있던 촉한보다 훨씬 심했다.

흥미로운 것은 적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고 민심이 안 좋았던 조위 지역과 달리[64], 파촉 지방 내에서 반란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남만 등 이민족 지역에서도 제갈량의 남정 이후 반란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제갈량의 사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제갈량의 제사를 지낼 정도로 당대의 민심은 촉한 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즉 민간경제를 약탈해 전쟁을 지속한 것은 3국이 전부 해당되었으므로 지도부에 대한 민중의 지지도가 높은 것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촉한은 상대적으로 저들보다 약탈의 정도가 덜 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촉한이건 조위건 전쟁을 지속했고, 후대의 기준에서 봤을 때 민중이 살기 힘들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촉한에서 화폐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위 저서를 쓴 카키누마 쇼헤이는 제갈량이 인민에게 가혹했는데도 왜 칭송을 받는지에 대한 결론 부분에서 "제갈량을 찬양하는 것은 사마의의 군사적 공로를 과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제갈량 등의 찬사는 촉한 멸망 후 뿌리를 내린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제갈량이 사망했을 당시 백성들이 사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유선이 거부했으며, 이후 촉한의 백성들은 물론 주변의 이민족들까지 자발적으로 제사를 지었다는 것이 정사에 명확히 나와있다. 즉 제갈량은 후대에 신격화된 것이 아니라, 당대에 자발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즉, "촉한이 민간 경제를 수탈했으며 제갈량에 한 찬사는 촉한 멸망에 뿌리를 내린 것"이란 것은 후대 사학자 중 한명인 카키누마의 개인적인 해석이지 팩트가 아니며, 특히 제갈량에 대한 평가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위 저서에서는 '민중을 약탈한 정치가가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 리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삼국 모두 전쟁을 치르느라 백성들을 수탈했다면 그 중 덜 수탈하는 정치가가 백성들에게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 문단에서도 '촉한이 삼국 중 수탈이 덜했다'는게 팩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1)전쟁을 치르느라 민간으로부터 많은 자원을 징발한 것은 3국 공통이었다 2)촉한의 지도부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존경을 받았다, 부분까지 팩트란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던 난세에 대한 배경 이해 없이 저 서술만 들으면 마치 촉한의 지도부만 백성들에게 가혹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65] 사실 오나라의 경우 화폐 제도 개혁이 더 처참하게 실패해(쌀 44곡 3두의 값이 '동전으로 따지면 8억전'이라고 쓰여있는 오나라의 목간이 발견되기도 했다) 악화였던 촉한의 태평백전이 일부 유통되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며, 위나라에서는 오수전의 발행에도 불구하고 현물거래 위주였다. 즉 한나라 때 확립된 화폐경제가 동탁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진 이후 삼국시대에는 어느 국가에서도 완벽히 복구되진 못했다.

정사에 발행 기록은 남지 않았으나,[66] 직백오수전은 직백전으로 계속해서 주조되었는데, 후기에 만들은 태평백전은 제조 품질도 좋지 못하고 무게가 3.3 ~ 6 g으로 줄어들었으며, 서진 때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으나 파촉에서 발견된 정평일백은 무려 0.5 g에 불과했다.

촉한이 망했을 때 금은 얼마였는가? 금, 은 각각 이천 근이다. 유비가 입촉했을 때 금자 2천 근과 은자 4천 근의 하사에도 문제가 없었다. 망국 때 촉한의 경제는 참혹했고, 함부로 돈을 날린 것이 밑거름이 되었다. 금과 은이 귀한 가운데 비단, 견사가 각각 20만 필이나 있을 만큼, 촉한은 화폐 경제보다 물물 교환하는 원시 자연 경제로 돌아갔다. 왜 촉한 사람들은 돈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촉한의 화폐는 적폐와 주수[67]

된 지 오래였다. 매년 막대한 군비 지출로 인해서 새로 주조되는 직백오수(直百五銖), 태평백전(太平百錢), 정평백전(定平一百) 등은 화폐의 무게가 많이 줄었고, 심지어 태평백전은 화폐가 너무 작아서 부득이하게 금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새로 주조된 돈은 많아져 군사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일시적인 계책이었다. 돈의 가치가 떨어져 촉한은 경제 체제가 붕괴된 데다, 후기 통치자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아서 촉한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오기림(吴奇霖), 『촉한의 흥망성쇠 50년』 #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한은 망하기 좀 전에, 창고의 식량이 40여만 곡, 금은이 각기 2천 근, 비단인 금, 기, 채, 견이 각기 20만 필이었다고 한다. 걸핏 보기엔 많아 보이나, 유비가 입촉하고 나서 하사한 양과 대조하면 금은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촉한은 인두세 납입과 오에 바치는 조공이 갈수록 특산물비단으로 이루어졌으며,[68] 납입 수단이 화폐에서 , , 직물로 바뀌는 것은 위와 오에서도 나타난 일이다.

고옹의 후손 고훤(顧烜)은 촉한의 돈이 삼오[69]의 여러 현에서 유통되었다고 하였으며, 오나라도 236년 500닢, 238년 1천 닢, 240년대에는 2천 닢과 5천 닢의 액면가를 가진 동전을 발행한 적이 있다.[70] 서진도 똑같으며, 수서 식화지에 따르면 나라까지 촉한의 화폐를 사용하였다.

유비의 직백전 채용은 삼국, 위진남북조 때, 그리고 나아가 중국 수천 년 위폐 주조와 유통의 첫 시작이었다. # 화폐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 것은 당나라 때인 621년에 만들어진 개원통보부터이다.[71]


8. 평가[편집]


후한 말 난세에 일어났던 수많은 군벌 중 하나이자 위, 오와 함께 가장 성공한 군벌. 현대 역사가들은 유교적 명분론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기를 중시하므로 유비, 조조, 손권은 모두 호족들로 바라본다. 일각에서는 종친이라는 특성, 연의로 알려진 낭만적인 일생, 그리고 도원결의에서 도원종언으로 이루어지는 비극적인 삶 때문에 촉한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나,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정권을 계승했으므로 현대에서는 조위의 손을 들어준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중국사의 중세를 이르는 말인, 위진남북조.

8.1. 촉한정통론[편집]


후한을 계승한 촉한에 정통성이 있다는 평가다. 정통성은 전 왕조에 기준을 두는 만큼 비록 세력은 작았으나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이 충분했던 촉한에 정통을 두는 논리다. 마찬가지로 동진과 바로 이어지는 남조 또한 북조에 비해 세력이 작고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조에서 나온 수에게 멸망당했음에도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논리가 있는 것처럼 정통성에 대해 세력보다는 전 왕조와의 연결성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촉한 정통론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유송 때 유유가 많이 밀었다. 한나라의 계승자는 오직 자신들의 형제인 촉한뿐이고 서진이나 위는 역적이라는 것.

사실관계야 어찌 됐건 위나라에 오랫동안 황제가 생존해 있었던데다가 위나라 내에서 후계자에 대해 별 언급도 없었고, 유비는 한왕조의 후계는 맞으나 정통성을 논할정도로 연결점은 없었으므로 촉한정통론을 주장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촉한정통론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헌제의 확보가 우선으로 이뤄져야 했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촉한정통론의 약점은 위나라가 체계를 갖추고 대세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결국 점점 형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촉한정통론에 의하면 위나라와의 어중간한 타협따위는 불가했고, 오와의 협력에 있어서도 결국 촉한은 한나라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국가이념으로 하기 때문에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이런저런 논의가 이뤄졌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오와 촉은 늘상 서로를 경계하였고 이는 이릉대전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끊임 없는 전쟁으로 인해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사망하고, 적통인 헌제가 위에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에 촉한정통론은 인재 영입의 측면에서도 딱히 영향을 주기 어려웠다. 결국 위나라가 장악한 중앙의 영향력을 통해 위나라의 인재풀이 촉한과 오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촉은 위나라를 상대로 몇 번이나 전쟁을 걸었으나 결과는 촉한의 멸망이었다.


8.2.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편집]


호주의 중국 사학자로, 서구에서 몇 안되는 후한삼국시대의 권위자이며 토탈 워: 삼국의 자문을 맡기도 했던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는 촉한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라프는 촉한은 위, 오보다 낙후되었으며 장기적 개발을 못하여 군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영토도 가장 작았으며 호구 조사로도 다른 나라보다 특출한 점이 없었고, 행정 구역의 증가 역시 미약했다고 주장했다. 남만의 개발도 인적, 물적 자원을 발달시키지 못했고, 촉한의 유화책 보다 오나라의 직접적인 동화책 쪽이 자원 확보나 실질적인 국력 상승에 더 큰 성과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데 크레스피그니는 촉한의 거듭된 북벌의 실패를 두고 결과론적으로는 헛된 공격으로 제한적인 힘을 기진맥진하게 하였다고 저평가했다. 특히 삼국지연의에서의 유비와 제갈량에 대한 낭만적인 묘사가 실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9. 역대 황제[편집]


대수
묘호
시호

연호
재위
능호
1
열조(烈祖)[72]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劉備)
장무(章武)
221 ~ 223
혜릉(惠陵)
2
-
안락사공(安樂思公)[서진]
효회황제(孝懷皇帝)[전조]
유선(劉禪)
건흥(建興)
연희(延熙)
경요(景耀)
염흥(炎興)
223 ~ 263
-


9.1. 계보[편집]


한나라 문서의 계보를 참조.


10. 여담[편집]


여러모로 국공내전대만으로 이주해 정통성을 주장한 중화민국의 처지와 비슷하다. 실제로 제갈량의 출사표에 등장하는 말인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한나라(촉한 포함)와 도적(역적)[73]은 양립할 수 없다)이라는 용어는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말로 인용해 왔고 지금도 강경한 사람들, 주로 범람연맹 성향의 중화주의자들은 이 말을 쓴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나라 이름(한나라, 중화민국) 대신 지배하는 중심 지역의 지명(촉, 대만)으로 더 유명하고 그렇게 주로 불린다는 점도 비슷하다.

오늘 날 사천에 해당되는지라 맵고 자극적인 사천 요리의 이미지로 인해 이 시기에도 맵고 자극적인 요리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오나 위로 투항한 촉한 출신 맹달조비에게 촉은 가축의 맛이 밋밋하다고 하여 고기요리에도 꿀과 엿을 쓸 정도로 달게 먹는다고 말해 조비가 놀라 신하들에게 알릴 정도였다. 덕분에 1800년 전 촉한에서는 그저 매운 요리라는 인상만 뚜렷한 현재 사천 요리의 인식과는 달리 주로 달콤한 재료를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1. 촉한의 작위를 봉한 대신들[편집]


이 항목에선 촉한의 왕(王) 10위(位)와 후(侯) 66위(位), 추봉시호적대신(追封諡號的大臣) 12위(位)를 소개한다.

  • 왕: 소열제의 아들 2명, 소열제의 손자 1명.
    • 유영(劉永): 노왕(魯王)-221년, 감릉왕(甘陵王)-230년 개칭
    • 유리(劉理): 양왕(梁王)-221년, 안평왕(安平王)-230년 개칭
      • 유집(劉輯): 안평왕(安平王)-261년, 유리의 아들.
  • 왕: 회제의 아들 7명.
    • 유선(劉璿): 태자-238년
    • 유요(劉瑤): 안정왕(安定王)-238년
    • 유종(劉琮): 서하왕(西河王)-252년
    • 유찬(劉瓚): 신평왕(新平王)-256년
    • 유심(劉谌): 북지왕(北地王)-259년
    • 유순(劉恂): 신흥왕(新興王)-259년
    • 유거(劉虔): 상당왕(上黨王)-259년
  • 현후(縣侯) 1등후작(一等侯爵), 10위(位)
    • 유표(劉豹): 양천후(陽泉侯)-220년 전, 의랑, 선주전에 나오는 인물.
    • 상거(向舉): 청의후(青衣侯)-220년 전, 역시 선주전에 나오는 인물.
(유표와 상거는 장예, 황권, 은순, 조작, 양홍, 하종, 두경, 장상, 윤묵, 주군과 함께 220년 유비에게 제위를 권한 익주 인물들로 유비에게 거절당함, 이후 221년에 태부 허정, 안한장군 미축, 군사장군 제갈량, 태상 뇌공, 광록훈 황주, 소부 왕모 외 촉한의 신하 800여 명이 상서로운 징조를 말하며 유비에게 제위를 권했지만 거절당함, 최종적으로는 제갈량의 진언을 받아 제위 수락.)
  • 위연(魏延): 남정후(南鄭侯)-230년, 정서대장군 영 양주자사
  • 오반(吳班): 면죽후(綿竹侯)-234년, 오의와 같은 집안 동생.
  • 강유(姜维): 평양후(平襄侯)-234년, 대장군 녹상서사 영 양주자사.
  • 오의(吳懿): 제양후(濟陽侯)-234년, 소열제 유비의 인척, 목황후 오씨의 오라버니, 거기장군 한중독
  • 왕평(王平): 안한후(安漢侯)-237년, 진북대장군
  • 마대(馬岱): 진창후(陳倉侯)-234년, 사서상 남아 있는 커리어가 거의 없어 마초의 인척빨+촉한의 비원인 북벌의 성공을 위해 서량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1등 후작에 임명됐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 구부(句扶): 탕거후(宕渠侯)
  • 염축(閻竺): 서성후(西城侯) 파군태수.
  • 향후(鄉侯) 이등후작(二等侯爵), 15위(位)
  • 신탐(申耽): 원향후(員鄉侯)-219년(항장, 이어 봉함). 맹달이 배신한 뒤 위에 항복. 연의에선 거의 잡장 수준이지만 실제론 상용 지방을 장악하고 자기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던 유력 호족이었다. 유비에게 항복하자마자 향후에 봉해지고 정북장군이란 높은 지위에 오른 게 이를 반증. 연의에선 유봉과 맹달의 부장이지만 실제론 신탐이 상용 태수였고 유봉과 맹달은 신탐 가문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 장비(張飛): 서향후(西鄉侯)-221년, 유비의 왼팔, 거기장군 파군태수
    • 장소(張紹): 서향후(西鄉侯)-221년, 장비의 둘째 아들.
  • 마초(馬超): 태향후(斄鄉侯)-221년, 표기장군 영 양주목
    • 마승(馬承): 태향후(斄鄉侯)-222년, 마초의 아들.
  • 제갈량(諸葛亮): 무향후(武鄉侯)-223년, 촉한의 상국 녹상서사 영 익주목, 탁고대신.
  • 이엄(李嚴): 도향후(都鄉侯)-223년, 탁고대신.
  • 유염(劉琰): 도향후(都鄉侯)-223년, 유비가 예주목인 시절부터 따라다닌 노신.
  • 보광(輔匡): 중향후(中鄉侯)-건흥(223-237)중, 계한보신찬 등장.
  • 고상(高翔): 현향후(玄鄉侯)-231년 전, 열전은 없지만 제갈량의 북벌에 적극 참여.
  • 비의(費禕): 성향후(成鄉侯)-244년, 촉한사영의 하나. 대장군 녹상서사 영 익주자사
    • 비승(費承): 성향후(成鄉侯)-253년, 비의의 아들.
  • 장영(張瑛): 서향후(西鄉侯)-255년, 장억의 장남.
  • 요화(廖化): 중향후(中鄉侯)-259년, 우거기장군
  • 동궐(董厥): 남향후(南鄉侯)-261년, 상서령 보국대장군
  • 정후(亭侯), 삼등후작(三等侯爵) 31위(位)
  • 관우(關羽): 한수정후(漢壽亭侯)-200년(후한 헌제에게 받은 작위), 유비의 오른팔. 전장군 가절월[74]
    • 관흥(關興): 한수정후(漢壽亭侯)-220년, 관우의 차남.
      • 관통(關統): 한수정후(漢壽亭侯)-220년 후, 관흥의 적자
      • 관이(關彝): 한수정후(漢壽亭侯)-220년 후, 관흥의 서자.
  • 조운(趙雲): 영창정후(永昌亭侯)-223년, 진군장군, 대장군(사후에 추증됨)
    • 조통(趙統): 영창정후(永昌亭侯)-229년, 조운의 장남.
  • 왕련(王連): 평양정후(平陽亭侯)-223년
  • 비관(費觀): 도정후(都亭侯)-223년, 유장의 인척.
  • 상총(向寵): 도정후(都亭侯)-223년
  • 이회(李恢): 한흥정후(漢興亭侯)-225년
    • 이유(李遺): 한흥정후(漢興亭侯)-231년, 이회의 아들.
  • 여개(呂凱): 양천정후(陽遷亭侯)-225년
    • 여상(呂祥): 양천정후(陽遷亭侯)-225년 후, 여개의 아들.
  • 왕항(王伉): 정후(亭侯)-225넌
  • 진도(陳到): 정후(亭侯)-226년
  • 진진(陳震): 성양정후(城陽亭侯)-229년, 주로 오나라에 사신으로 감.
    • 진제(陳濟): 성양정후(城陽亭侯)-235년, 진진의 아들.
  • 원침(袁綝): 도정후(都亭侯)-231년 전, 전장군, 정서대장군.
  • 허윤(許允): 한성정후(漢城亭侯)-231년 전, 행전호군, 편장군.
  • 이복(李福): 평양정후(平陽亭侯)-건흥(223-237)중
  • 등지(鄧芝): 양무정후(陽武亭侯)-234년
    • 등량(鄧良):양무정후(陽武亭侯)-251년, 등지의 아들.
  • 상랑(向朗): 현명정후(顯明亭侯)-234년
    • 상조(向條): 현명정후(顯明亭侯)-247년
  • 호제(胡濟): 성양정후(成陽亭侯)-234년
  • 장완(蔣琬):안양정후(安陽亭侯)-235년, 촉한사영의 하나. 대사마 녹상서사 영 익주자사
    • 장빈(蔣斌): 안양정후(安陽亭侯)-246년, 장완의 아들.
  • 유민(劉敏): 운정후(雲亭侯)-244년, 장완의 외종동생.
  • 마충(馬忠): 팽향정후(彭鄕亭侯)-249년 전
    • 마수(馬修): 팽향정후(彭鄕亭侯)-249년, 마충의 아들.
  • 장익(張翼): 도정후(都亭侯)-연희(238-257)중
  • 관내후(關內侯) 11위(位) - 봉지가 없는 후작
  • 방통(龐統): 관내후(關內侯)(사후추증)-214년, 파촉 정벌전중 전사함. 군사장군
  • 황충(黃忠): 관내후(關內侯)-219년, 후장군
  • 법막(法邈): 관내후(關內侯)-222년, 법정의 아들.
  • 양홍(楊洪): 관내후(關內侯)-223년
  • 왕모(王謀): 관내후(關內侯)-건흥(223-237)초
  • 유옹(劉邕): 관내후(關內侯)-건흥(223-237)중
    • 유식(劉式): 관내후(關內侯), 유웅의 아들.
  • 장억(張嶷): 관내후(關內侯)-254년 전
    • 장호웅(張護雄): 관내후(關內侯)-254년, 장억의 아들.
  • 종예(宗預): 관내후(關內侯)-약255년
  • 진찬(陳粲): 관내후(關內侯)-258년, 진지의 아들.
  • 추봉시호적대신(追封諡號的大臣) 12위(位) - 세상을 떠난 뒤에 시호를 받은 대신
  • 법정(法正): 익후(翼侯)-220년
  • 제갈량(諸葛亮): 충무후(忠武侯)-234년
  • 장완(蔣琬): 공후(恭侯)-246년
  • 비의(費禕): 경후(敬侯)-253년
  • 진지(陳祗): 충후(忠侯)-258년, 시중 동윤의 후임. 상서령
  • 방통(龐統): 정후(靖侯)-260년
  • 관우(關羽): 장목후(壯繆侯)-260년
  • 장비(張飛): 환후(桓侯)-260년
  • 마초(馬超): 위후(威侯)-260년
  • 황충(黃忠): 강후(剛侯)-260년
  • 조운(趙雲): 순평후(順平侯)-261년
  • 하후패(夏侯覇): 불명, 하후연의 차남, 고평릉 사변으로 인하여 촉한으로 투항함, 촉한의 거기장군.


10.2. 창작물[편집]


작은 세력으로 계속 노력했다는 이미지 덕분에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선 주역으로 많이 등장하며 연의가 주로 촉 위주로 흘러가 유비, 관우, 장비 3명을 위주로 촉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창작물도 엄청 많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해버린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비장함을 부여하기도 좋은 데다가 역사상의 본인들이야 죽을 맛이었지만 인재가 적다는 것은 문학 등으로 창작했을 때 여러 인물에 포커스가 흩어지는 게 아니라 한두 사람에 집중되어서 주인공으로 띄워주기 좋다. 특히나 파보면 강력한 모습은 보기 힘들어도 의외로 튼실한 면도 보여서 이런 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대부분의 창작물이 전쟁을 다루다보니 위에서 언급된 촉의 다른 장점인 정치 체계나 경제력은 거의 무시 받는다. 대부분 제갈량이 정치를 잘했다 정도로만 끝난다.[75] 하지만 정작 촉한은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30여 년을 더 존속했고, 게다가 위가 전력을 다해 수십년을 더 싸우고도 오와 달리 힘으로 정면 대결해서 멸망시킨 게 아니라 간첩을 엄청난 규모로 보내고, 강유를 철저하게 묶으며, 여기에 유선의 병크까지[76] 줄줄이 운이 따른 결과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SD건담 삼국전에서는 '상(翔)'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유비 건담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익주로 가서 건국을 선포한다.


10.3. 쓰촨성의 관광 유산[편집]


쓰촨성(사천성)에는 난세가 오면 나라[77]가 하나씩 나왔었던, 할거에 특성화된 지역이다. 그런데 이 나라들이 대체로 혼란기에 지방 실력자가 한 몫 잡고 험준한 산악에 기대 버티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나태해지다가 대륙의 정세가 바뀌어 천하 대세가 갈리면 흐지부지 멸망하는 일을 자주 보여준다. 그래서 인지도가 낮고 관심도 덜 받는다. 당장 촉한이 멸망한 지 40년 뒤 촉 땅에 성한이라는 이민족 왕조가 나왔는데 이런 식으로 망했다. 물론 촉한에 비해선 아웃 오브 안중이다.

쓰촨성의 지정학적인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듯한데, 촉한은 망하기 직전까지 공세를 펼친 특이 사례다.[78] 유비의 한중 공방전, 이릉대전,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 등 끝없이 싸워왔다.

이 때문에 촉한은 쓰촨성 관광계의 희망이자 별이자 모든 것이다. 촉한 외 다른 나라들은 쓰촨성에서 아는 사람만 아는 듣보잡 수준인데[79][80] 촉한만은 삼국지의 영향으로 인기가 높아서다. 대충 이 동네 전통 관광 유산의 90%가 촉한 관련이라고 한다. 무후사는 물론이고, 낙봉파 같은 연의에 나온 가상의 지역까지의 도로도 만들었다.

실제로 촉한이라는 나라는 역사상 사천 지역의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민과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회유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면서 인심을 얻으려 했고 촉한 멸망 당시는 이미 유비가 입촉하여 이런 정책을 펼친지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81] 또 촉한의 명재상들인 촉한사영의 통치가 워낙 뛰어났기에 백성들은 그들의 정치를 그리워했으며, 이 때문에 문립이나 나헌 역시 익주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서진 정권에 이들의 후손을 등용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끝까지 촉한 정권에 충성했던 곽익 같은 인사가 원래 보직에 그대로 임명된 것도 그런 의미가 될 것이다.

화양국지에는 촉한이 망하고나서 '유비 세력이 익주를 다스린지 50여년이 흘렀다'라고 굳이 적었는데 말이 50여년이지 거의 반세기 동안 유비 세력의 이념적 영향이 촉한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익주 주류 세력들도 어느 정도는 그 이념에 감화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즉 촉한이 멸망할 당시엔 익주 세력이 촉한의 존속이 곧 자신들의 이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보았기에 촉한이 망할 때 이런 반응들이 나왔던 것이다. 촉한 멸망 이후 성한이 망하는 백여년 후에도 촉의 장로들이나 촉인들이 촉한을 부흥시키려 했던 강유를 안타까워 했고 제갈량의 통치에 대한 칭송이 오래토록 사천 지역에 일종의 신앙으로 남은 것만 봐도 당시 '촉한'이라는 나라가 익주의 사대부나 백성들에게 어떤 위상이었는지가 명백하다.[82]

그래도 쓰촨성(사천성)에 촉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니, 촉한을 제외하고 쓰촨성에서 유명한 걸 꼽아보자면 고대 삼성퇴 유적, 전촉 황제 왕건 묘나 도강언[83], 당나라 시기 시성 두보가 살던 초당, 진(秦)나라에게 멸망하기 이전 고대 파촉 문명 정도며 그나마 이쪽도 촉한 관련 유적보다는 인기가 없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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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하게 얘기하면 성도는 임시수도 역할로 촉한 자체가 한나라의 계승을 천명한 나라인만큼 명목상 수도는 한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이었다. 그 예로 촉한은 수도 성도가 위치한 촉군을 수도를 관장하는 특별 행정구역인 윤(尹)으로 격상시키지 않았다.[2] 중원과 관련 없이 고촉(古蜀)이나 파(巴) 같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활동하다가 흡수된 선주민이다.[3]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4] 촉한 당시에도 불교가 들어간 흔적이 있다. 사천성 낙산시 마호애묘(麻浩崖墓)에 바로 촉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부처와 승려의 도상이 있는 것. 촉한에서도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는 형태로 수용되었던 증거라 본다. 단 지배층에까지 미친 흔적은 전혀 없다.[5] 중국어 위키백과의 촉한문서에서는 '當中五銖錢與直百錢並用'라고 해서 직백전과 오수전을 병행해서 사용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영어 위키백과의 Wu Zho(오수) 문서와 영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사이트인 동아시아 고대 화폐 관련 사이트 primaltrek.com에서는 지름 21.7밀리미터, 무게 약 2.3그램의 촉오수(蜀五銖)라고 불리는 화폐가 전통적으로 촉한에서 주조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나중의 고고학적인 발견으로 이 화폐가 정말 촉한에서 주조된지는 확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6] 직백오수전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주전지역이 표기된 화폐였으며 배면에 주전된 지역인 건위군을 표시하는 위(爲)자가 새겨져 있었다.[7] 현재도 지명이 같으며, 중국어 표기법을 사용한 청두시로 표기되고 있다.[8] 오늘날 윈난성구이저우성도 다스렸는데 관료를 보내지 않고 간첩 통치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는 남만 지역이 이곳이다.[9] 蜀虜, 촉나라 오랑캐.[10] 蜀賊, 촉나라 도적이다.[11] 이렇게 태도가 바뀐 것은 한나라가 조씨에게 망했으니 천자가 공석이라는 손오정통론에 따른 것이다.[12]정사 삼국지』, "芝對曰, 四州之地..."[13] 또 의양군(義陽)에 부융(傅肜)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선주가 군대를 후퇴시킬 때, 적의 추격을 끊으며 오나라 군대에 저항하다가 병사들이 모두 죽었다. 오나라 장수가 부융에게 투항하라고 말했다. 부융은 욕을 하며 말하길: “오나라 개들아! 어찌 한나라 장수로서 항복하겠는가!” 그리곤 싸우다 죽었다.[14] 당연히 한국의 외교관이나 대사들이 외국에서 영어로 South Korea란 명칭을 썼다고 우리나라의 국호 중 하나가 남한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듯, 촉나라 사람이 촉이란 명칭을 썼다고 해서 '촉한의 국호 중 하나가 촉'이었다고 보는 것도 잘못된 이해이다. 어디까지나 통칭 내지는 별칭, 즉 외부인들이 촉한을 부를 때 촉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15] 예를 들자면 유송조송이 있다. '유한'이라고 지칭할 경우 전한, 후한, 촉한 모두 국성은 유씨로 같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16] 출처: 파성넷[17] 출처: 파성넷[18] 출처: 파성넷[19] 제갈량의 남만 정벌로 유명한 운남 지방에서 소수나마 군마로 쓰기 좋은 말이 나왔기에 기병을 키울 기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량주나 병주, 유주 같은 북방 지역의 군마 생산력을 따라갈 수준은 아니었다.[20] 출처 필요함.[21] 다만 사서에는 "목우로 운송했는데, 군량이 다해 군이 퇴각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어 그렇게 기발한 발명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상해인민출판사(上海人民出版社)에서 1989 ~ 1999년 출판하였다. 총 12권 22책이고 1,400만 자이다. 백수이가 주편집장을 맡았고 22명의 분권 편집장, 500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하였다.[23] 士民簿, 선비와 백성을 담은 문서.[24] 산기상시(散騎常侍)의 준말로, 황제의 직속 부대를 뜻한다.[25] 武騎, 야전군을 뜻한다.[26] 四軍, 네 군대.[27] 外軍, 정벌을 나가는 군대를 뜻한다.[28] 힘이 센 병졸[29] 부대 명칭[30] 화양국지 파지[31] 화양국지[32] 야크 털로 만든 모직물[33] 위연과 오의는 합류시점을 보면 1세대에 가까운 편이지만 행적을 보면 3세대 쪽과 자주 묶이는 편.[34] 조운은 공손찬을 섬기다가 형의 장례를 핑계로 공손찬 휘하를 떠나 낙형했으며,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할 당시 유비에게 임관한 것이기 때문에 유비에게 투항한 적이 없다. 또한 유비가 세력이 공중분해되어 관우조차 곁에 없을 때(즉 기반이 전무할 때)부터 섬긴 것이기 때문에 거의 초창기부터 그를 섬긴 경력있는 신입이지 항장이라고 보긴 어렵다.[35] 하지만 국가가 2대에 멸망했으므로 장기적으로는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국가 건국 초기에는 왕권과 신권이 모두 막강하여 조화롭다가도 또 갈등을 빚는다. 고구려도 5부족 연맹체로 초기엔 화합했으나 권력 다툼 끝에 계루부가 부족을 통합하여 5부로 개편했고 조선도 이성계와 정도전이 화합했으나 이방원이 정도전을 참살했다. 촉한도 유선이 권력욕이 강했다면 제갈량 사후에 장완과의 정치적인 견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유선은 유순하였고 재상은 황제를 존중하니 황권과 신권의 조화가 다소 오래 지속되었고 동윤을 끝으로 신권이 순식간에 종언을 고했고 얼마 안 있어 멸망했다.[36] 당연히 장기적으로 보면 제갈량의 방식대로 황제권을 계속 띄우는게 맞다. 애초에 난세가 황제권이 붕괴되고 신권이 과도하게 세지면서 권력 구조가 문란해진 것이 문제이니. 다만 유선은 그 큰 권력을 담을 그릇이 부족했다.[37] 실제로 유염이막을 내지로 돌려보냈고, 요립이엄이 제갈량이 죽자 한탄했던 것은 제갈량이 등용과 탄핵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38] 有司, 해당 관원.[39] 平明, 공명정대.[40] 출처: 파성넷[41] 홍윤기. (2017). <出師表>에 나타나는 諸葛亮의 독재정치. 중국어문논총, 84, 183-208.[42] 출처: 파성넷[43] 출처: 파성넷[44] 이때 극정이 비서령으로 있었으며, 황호와 같이 일했다.[45] 이 점은 제갈량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었다시피 후한 황실(=의 껍질을 뒤집어쓴 위나라)를 바닥부터 스스로 다져온 조조와 촉한의 개국공신 중 하나 정도의 위치인 제갈량의 차이이다. 제갈량이 걸출한 인물인 것과 별개로 촉한은 누가봐도 유비가 세운 나라였으며, 촉한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유비의 사람들이었기에 제갈량이 힘을 쓰기 위해선 황실의 권위를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조조처럼 황실을 능욕하지 않은 것이 진정한 충신이어서였는지, 그렇게 할 수 없어서인지는 후대사람들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의 행적을 보면 역신이었던 조조와 크게 대비된다는 것이다.[46] 口錢算賦制, 인구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로, 이것은 촉한이 한나라 제도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조위호조제와는 달리 호별로 세금을 징수했다.[47] 출처: 파성넷[48] 그러나 촉한과 비슷한 사례가 조위와 손오에서도 있기에 촉한만의 문제는 아니다.고유전[49] 비교하자면, 오나라의 인구가 230만이고 관리가 3만 2천이었다.[50] 務農殖穀,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기름.[51] 閉關息民, 문을 닫고 백성들을 편히 쉬게 함.[52] 以阜民財,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함.[53] 民殷國富, 백성은 편안하고, 나라는 부강함.[54]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 1993년, 인민출판사.[55] 한 왕조 시절에 이미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전매케 하는 법이 있었으며, 연의에서나 정사 등애전에서나 촉한 정벌 이후 관련 계획에서 등애가 "익주에서 소금을 굽고 철을 벼리며 차근차근 준비해서 오를 쳐야 합니다"라는 진언을 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소금과 철은 중요한 물자였음을 알 수 있다.[56] 여담인데 조미료마저도 사천 지방은 주목할 만했던 듯하다. 향신료 중 사천산이 '촉강'/'천화초'라 불리우며 특별 대접을 받을 만큼 질과 생산량 면에서 독보적이었던 까닭이다. 다만 촉한의 신하였던 맹달은 당시 사천 고기요리의 특징을 /을 많이 쓰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를 생각하면 과거의 사천요리는 좀 더 달았을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57] 제갈공명이 입촉 후 운남성의 차를 갖고 보이차를 만들어 보급하였단 전설이 내려오고 실제로 차의 재배가 촉한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다.[58] 출처: 파성넷[59] "나라를 위해 쓰고자 장막을 거는 고리(帳鉤)를 취해 그 동으로 돈을 만들었다.(劉備取帳鉤銅鑄錢以充國用。) 출처: 파성넷[60] 小錢, 동탁이 오수전을 녹여서 새로 만들었던 동전인데, 크기도 작고 불순물도 많이 섞인 데다 너무 많이 만들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조숭환관에게 1억 닢을 바쳐서 태위를 산 것에서 가늠할 수 있다.[61] #[62] 계산하면, 직백오수전은 크기도 작았으며 불순물도 섞였던 동탁의 동전보다 그 가치가 1/10 이하였던 일이다.[63] 카키누마 요헤이, 『촉한의 선군 정치와 경제 시스템(蜀漢的先軍經濟體系)』, 2011.[64] 한중공방전과 형주공방전 당시 유비 측 세력에 호응해 위나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등.[65] 전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자원을 소모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전쟁을 계속하는 국가라면 당연히 민간의 자원을 끌어다 쓸 수 밖에 없으며, 3국은 이 점에서 모두 자유롭지 않다. 위나라의 경우 촉한, 오나라와의 갈등 외에 고구려와 2차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오나라는 합비를 둘러싸고 위나라와 수십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66] 사실 직백오수전도 정사에 남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료가 발견되었으므로 논할 수 있는 것이다.[67] 注水, 물먹다.[68]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 중세사』[69] 三吳, 오군(吳郡), 오흥(吳興), 회계(會稽)로 오나라를 3개 지역으로 나눈 지역들을 뜻한다.[70]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246년에 동전 제조를 중단하고 액면가 높은 화폐를 무효로 정하였다.[71] 발터 샤이델, 『The monetary systems of the Han and Roman empire』[72] 전조유연은 한왕에 오르면서, 한고조, 광무제, 소열제 셋을 삼조(三祖)로 보고 한문제, 한무제, 한선제, 한명제, 한장제 다섯 황제는 오종(五宗)으로 모셨다. 이 때 시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유비를 열조로 칭한 기록이 있다. #[서진] [전조] [73] 당장은 위나라를 가리켜서 賊이라 표현했겠지만 내심 오나라도 賊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목표는 삼국을 통일해서 옛 한나라의 정통을 승계하는 것이니깐.[74] 관우가 유비의 제일 가는 부하였는데도 장비나 제갈량 등 유비의 다른 부하들보다 최종 관직과 작위가 낮은 이유는 유비가 칭제하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관우 생전에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에 오르고 관우를 사방장군의 으뜸인 전장군에 임명했으나, 219년에 죽고 221년에 유비가 칭제했기 때문. 만약 관우가 칭제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무관 중 가장 높은 직위인 대장군에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실제로 촉한의 대장군 직위는 제갈량 사후에 장완이 임명되기 전까지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장비의 경우 사방장군에서 우장군, 이후 거기장군 등 마초(좌장군->표기장군)처럼 정치적 입지가 높은 인물보다 살짝 낮은 직위에 임명되었었지만 관우는 그 마초보다 더 높은 직위였었기 때문.[75] 오히려 역대 최강급의 행정가였던 제갈량의 정치적 역량이 거의 축소되고, 전쟁터의 책사로 신출귀몰한 전투를 벌인것으로 묘사된다.[76] 유선을 안락공으로 봉하고 잘 대해준 것도 실상은 촉 내부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로 보인다.[77] 혹은 독립국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군벌 세력.[78] 전한도 여기에 들어갈 것이라 많이 생각하지만 한왕에 임명된 유방은 파촉까지 들어가지 않고 한중에서 반년도 안있다가 바로 관중을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으니 장기간 파촉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한 촉한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근거지였던 한중은 현재는 사천성이 아니라 관중 지역과 같은 섬서성 소속이다.[79] 성한, 전촉, 후촉 등을 보면 모두 촉한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한 탓이 크다.[80] 조위, 동오도 해당 지역에서 쓰촨성의 촉한만큼 인기를 보유하고 있진 않다.[81] 실제로 촉한이 멸망하고 유비의 통치술이 살아있는데 그렇게 무너지리라곤 생각 못했다는 발언을 한 이도 있다.[82] 촉한이 멸망할 때 제갈첨을 따라나선 이회의 조카 이구나 황권의 아들 황숭은 모두 익주 출신이었고 강유의 최측근으로 한중의 황금성을 끝까지 방어한 유은 역시 익주 출신이었다. 두진의 경우에도 성도가 함락될 때 촉군 태수에게 '저들은 옛 사람(촉한 출신)을 쓰지 않고 새 사람들을 쓸 것'이라며 낙향을 권유하고 본인도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났는데 이는 두진 역시 촉한이 망하면 촉한 출신 사람들이 기득권에서 밀려서 중히 쓰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효성으로 유명한 이밀 역시 등애가 불렀는데도 조모를 더 생각한다는 식으로 부름을 회피했다. 당대 식견있는 자들은 촉한을 점령한 등애의 뻐기는 듯한 태도를 비웃었고 강유를 따르던 촉한의 군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것에 분노하며 위군에게 무기를 넘겨줄 바에 스스로 바위에 내리쳐 깨버리는 등 전체적으로 촉한 멸망 직후 익주의 분위기는 위나라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류가 생각보다 강했다.[83] 사실 도강언도 제갈량이 몸소 나서서 수리한 곳임을 관광 홍보에 적극 써먹고 있어 어떤 면에선 촉한 관련 관광지이다.[84] 사실 왕건의 경우 폭군인데다 아예 비속어 왕팔의 유래가 된 사람이니 인기가 없는 건 당연하고 파촉도 참 어이없이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