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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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고광채(高光彩)

석로(石老)
본관
장흥 고씨[1]
생몰
1876년 8월 4일 ~ 1942년 12월 30일
출생지
전라도 창평현 군내면 유천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2]
사망지
전라남도 담양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고광채는 1876년 8월 4일 전라도 창평현 군내면 유천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1월 24일 족형(族兄) 고광순이 창평 저산 분암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즉시 가담하여 고광훈, 윤영기(尹泳淇), 박기덕(朴基德) 등과 함께 참모를 맡았다. 이후 각처에 연락하여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원의 양한규로부터 남원 합동작전을 연락 받고 곧 행군을 개시하여 2월에 남원으로 진격하였으나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 의병대가 이미 패주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남원성 포위전을 벌이다가 곧 퇴각했다. 그 후 다시 병력을 증강해 능주로 진격하여 4월 25일에 점령했다.

이튿날 동복으로 진군했지만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접전하다가 패배하자 병사들이 일시적으로 흩어졌다. 이후 고광순, 고광훈, 고강채 등은 전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무기를 개량 제조하고, 전법을 훈련하는 한편 의병을 규합하여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9월 11일 고광순을 도독으로 추대하고 천지신명께 맹서한 다음 지리산 아래에서 장기 항전을 계속하기 위하여 동복을 거쳐 곡성군 구룡산으로 진군했다. 그러다가 참모 신덕균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는 동복을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9월 14일 새벽 동복읍을 점령하고 다수의 일본인을 살해했다.

1907년 9월 17일 고광순은 지리산 화개동에 들어가 진영을 갖추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때 고광채, 고광덕, 고광석, 고광명 등은 유격과 호위를 맡았고, 신덕균은 참모에, 윤영기는 호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월 11일 일본군이 구례 연곡사로 내습했고, 고광순은 군대를 2대로 나누어 끝까지 분전했으나 끝내 패하고 고제량 등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때 고광채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순창(淳昌)·운봉(雲峰)·정읍(井邑)·함양(咸陽) 등지에서 계속 의병 활동을 전개했지만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더이상 의병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담양군에 은거했고 1942년 12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고광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22세 광(光) 항렬.[2] 인근의 삼천리·용수리와 함께 장흥 고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고광문·고광순·고광훈·고제량·고홍석고영한 전 대법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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