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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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종교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21년 9월, 평안남도 증산군에서 태어났다. 원래 평양신학교 학생이었다고 하며 1972년 평양신학원이 새로 개교하면서 1975년에 입학, 1978년에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1980년 10월, 조선사회민주당 조직부장에 선출, 1981년 1월, 조선사회민주당 6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에 선출되었으며 조그련 대표단장으로 스위스, 소련 등을 방문하였다. 1988년 11월 2차 글리온 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였다.

파일:글리온회의(1988년11월24일).jpg
1988년 11월 24일 제2차 글리온 회의[1] 중 찍은 남·북·교포 개신교 관계자들 모습. 사진의 맨 하단 좌측 세 번째 인물이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1989년 3월, 범민족대회 대표를 하였으며 1989년 4월, 조그련 대표로 미국을 방문하여 전 미국교회 협의회가 주최한 <한반도의 통일 및 평화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때 한겨레 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외교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는 등 북한의 종교외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7월, 조그련 대표단장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990년 11월, 스위스를 방문했다. 1991년 2월, 호주에서 열린 세계교회이사회 7차 총회에 참석했으며 1991년 7월, 조그련 대표단장으로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1992년 1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인 권호경 목사가 방북하였을 때도 영접하였다.

파일:wccandncckvistedtonorthkoreainjanuary1992.jpg
왼쪽 끝부터 강영섭 목사, 권호경 총무, 김일성 주석, 박경서 국장, 고기준 목사.

1994년 3월 30일, 6시 30분에 암으로 사망하였으며 북한은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이 소식을 알렸다. 1995년,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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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년 11월 23일~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