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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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진행 과정
3.1. 체제의 모순과 누적된 병폐
3.2. 북한의 배급제
3.3. 식량난 도래
3.4. 에너지난과 수송난
4. 파멸적인 결과
5. 대한민국의 반응
6. 선군정치 등장
7. 영향
8. 기타
9. 2차 고난의 행군
9.1. 공포정치 재개
10. 참고 자료
10.1. 관련 영상


1. 개요[편집]


1994년~1999년경까지 있었던 북한의 체제 붕괴 위기. 약 100만 명가량 아사(餓死)했다고 추정한다.

유래는 김일성이 1938년 말~1939년 초,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빨치산이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 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다. 북한에서 말하는 두번째 고난의 행군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전후부터 천리마운동이 전개되는 시기까지다. 1996년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제시된 세번째 고난의 행군은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은 백두밀림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살며 싸워 나가야 한다는 언술에서 나온 것으로 1990년대 계속되는 경제난과 기아를 극복하고 사회적 이탈을 막으며, 주민들의 희생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통일부 북한정보 포탈)


2. 설명[편집]


1995년 봄. 평양의 공기는 음산했다.

2월경부터 쌀값이 미치기 시작했다. 1kg에 50원 정도였는데 자고 나면 올라 석 달쯤 뒤엔 230원까지 치솟았다.

120원쯤 됐을 때 사람들이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냐”며 술렁거렸다. 200원이 넘었을 때 거리는 축 늘어져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들로 넘쳤다.

식인 사건 등 범죄 소식이 퍼지며 도시 분위기는 불과 몇달 만에 흉흉하게 변했다.

난 1994년 12월 말 기차역에서 만난 평북 구성의 여인에게서 대량 아사 소식을 처음 들었다.

군수공장이 밀집한 그곳 로동자구(區)에선 여름부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가을쯤부터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불과 100여km 떨어진 곳에서 그런 참사가 벌어지는 줄 몰랐다. 그때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

몇 달 뒤 굶주림은 평양까지 순식간에 삼켰다.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외부에서는 1995∼1998년으로 보지만, 실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아사자 수는 300만 명이라 알려졌지만 난 100만 명 미만으로 추산한다. 300만 명이 굶어 죽을 정도면 어림잡아 1000만 명은 심각한 신체·정신적 장애를 겪어야 했을 것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하 생략)

-주성하 기자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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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에 나온 기사의 그림. 탈북자 이애란 씨가 탈북 후 한국의 한 고급식당에서 나온 통감자를 보자 북한에서 먹던 통감자가 생각나, 그때의 트라우마로 감자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내용이다.[1]


북한의 뒷배와 지원을 해주던 소련의 붕괴와 김일성의 실책에 가까운 3개의 대사업으로 곳간이 텅텅비어서 서서히 세가 기울어가던 북한이 완전히 재기불능의 수준으로 망가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고난의 행군"이라는 표현은 원래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일성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쫓겨 다니며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유격전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던 시기[2]와 1956년에 있었던 8월 종파사건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북한의 경제난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현재에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유격전을 1차 고난의 행군, 8월 종파 사건을 2차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한국과 달리 경공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냅다 중공업 우선 경제정책을 폈으나 정작 첨단 제품을 생산하기엔 기술 수준이 모자라 수입에 의존했다. 그런데 1980년대 중후반 들어서 동구권 붕괴 및 소련 해체와 함께 북한 경제도 이미 쇠락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구권과 소련은 북한에게 무상지원과 물물교환 형태의 유상지원으로 북한에게 석유와 기계제품 같은 국가유지에 필수적인 제품을 지원했는데 동구 공산정권과 소련 해체 후에 같은 사회주의 동맹이란 울타리가 없어지고 소련이 붕괴하고 탄생한 러시아는 제 코가 석자인 마당에 외화가 부족하여 한국에서는 불곰사업을 통해 빚을 일부 탕감받기도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기존 외상금도 떼먹은 북한에 달러 현금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자원과 제품과 부품 공급이 끊겼고 이후로 추락이 시작되어서 1990년대 중반 필수적인 유지관리도 못하니 전력 철도 제철 기계 비료 화학 산업이 연쇄붕괴하며 경제가 나락에 빠졌기 때문이다.[3]

고난의 행군 이전에도 북한이 전쟁 이후 초반이라면 몰라도 서서히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남한은 경공업을 하면서 산업기반이 쌓이고 기술력도 쌓이자 박정희 정부부터 대대적으로 중공업을 시작하였고[4] 이후 베트남 전쟁을 통한 외화벌이 및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으며 이 자본을 기반으로 한강의 기적을 통해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뤄낸데다, 전두환 정부부터 준비해 노태우 정부가 개최한 1988 서울 올림픽이 서구권 동구권이 전부 참여하는 대박을 친다. 반대로 북한이 자랑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삽질과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에 망하면서 임수경 방북 사건을 통해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인민들한테도 알려지는 등 그야말로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남한에 패배했다는 것이 가시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1987년부터 그토록 추진했던 제3차 7개년계획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 실패로 이어진 것이다. 북한측은 이를 타개하고자 1992년 라진-선봉 무역지대를 만들며 외국인기업법 등 3개 법률을 제정해 제한적 개방을 시도했고, 1994년 완충기 설정 후 경공업과 농업, 무역업을 키우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특히 농업은 농업의 ㄴ자도 모르는 김일성이 주도로 만든 주체농법은 소련의 지원하에 만들어진 대량의 비료가 필수요건이었는데 소련이 망하고 나서 지원이 없어지자 주체농법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토지는 황폐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최소한 배급제도는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급으로 일단 굶어죽지는 않았다. 1980년대부터 산업생산이 한계에 접어들고 농촌에선 1990년대 초반부터 조짐이 보였지만[5] 고난의 행군 이전인 1993년경까지만해도 부족하지만 배급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으며 국가도 정상적으로 운영되는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지옥 같은 상황을 숨길 수 없는 1994년 이후의 북한과는 달리, 1993년까지는 적어도 외신에 소개되는 평양의 모습은 그럭저럭 한나라의 수도 수준은 갖추었었다.[6] 그러나 고난의 행군은 말 그대로 북한의 사회 체계와 국가 기간 산업전반을 붕괴시켜 버렸고, 그 영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김정일은 텃밭에서 자란 작물 소유권을 인정해주다보니 1980년대 말까지 주로 신선식품류나 쓰다남은 잡화물을 거래하거나, 아니면 8.3 인민소비품같은 부업벌이를 하거나 여러 길거리 음식을 사먹는 요식거리하는 곳으로 여겨지던 장마당은 식량을 살 수 있는 시장으로써 역할과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급속한 물가상승과 배급중단으로 인해 기본 월급으로 도저히 먹고살지 못하게 되면서 대다수 주민들은 장마당에서의 부업벌이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고, 국영기업들도 장마당을 통해 모자른 자재를 공급받고 장마당에서의 돈벌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는데 1980년대부터 뿌리내리던 시장경제가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했다.[7]

이는 탈북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결과와 꽃제비라는 부랑아들을 낳음과 동시에 수령에 대한 실망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본격적으로 경제적인 의미의 계층 분화[8], 이전에도 평양시내 당간부와 농촌지역 사민들의 생활수준 차이는 극과극이었지만 이제는 같은 지역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화교재일교포, 탈북자의 가족의 지위도 급속히 상승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외부로부터 자금도입이 원활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9]


3. 진행 과정[편집]



3.1. 체제의 모순과 누적된 병폐[편집]


'고난의 행군 이전에 북한이 정상적으로 굴러갔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수의 출처불명 소스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 북한이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는 복지국가라는 주장까지 있지만 이는 허구에 가깝다.

1990년대 북한의 사회 경제적 고난의 행군 과정을 이해하려면 북한 경제에 대한 대략적 이해와,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에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경제 상황을 보아야 한다.

6.25가 끝나고 1960년대까지는 남북한 모두 힘겨운 시기였다. 그러나 남한은 미국과 서방권의 지원으로 북한은 동구 사회주의 동맹과 중국의 원조로 굶어죽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는데 1960년대 북한 생활수준이 높았다는 건 신뢰하기 힘들다. 당시 출신성분이 좋아 김일성대를 졸업한 김길선과 조선중앙TV 기자 출신 장일선도 1960년대 지방에선 어느 집이건 강냉이밥이라도 두 끼나 먹지 세 끼 챙겨먹는 집이 없었다며 남한에서 북한 측이 1960년대에 잘 살았다는 소문을 근거없다고 부정했다. 생활수준이란 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긴 하지만 천리마 운동으로 주민들을 쉬는 날 없이 노력동원 시키면서 '새벽별 보기 운동' '천삽 뜨고 허리 펴기 운동'이나 시키던 북한의 1960년대는 결코 윤택한 수준이 아니다.[10]

1958년에 북한을 탈출한 김책군관학교 교장 출신 장학봉에 따르면, "전쟁이후 주민생활 형편이 점점 악화되었는데 극빈하게 되면서 한 민족을 갈라서 종파를 가르고, 연안파니 소련파니 하면서 딴 민족, 적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생활은 점차 구차하게 되고 일반백성들은 정책이 옳지 않다고 불만을 표출하였다. 불만을 토로하다가 당시에 붙잡혀 들어간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하지만 밀고자에게 큰 혜택을 베풀어, 출세를 원한 밀고자에 의해 이런 불만은 제압당했다고 한다. 신장으로 따지고 보면 북한이탈주민의 경우 남성은 해방 이후 출생자부터, 여성은 50년대 초 출생자부터 남한 출신에 신장이 역전되었다고 한다. 북한이탈주민의 주 출신지인 함경도 일대는 분단 전만 해도 남북한에서 가장 키가 큰 지역이었는데도 역전을 당한 것이다. 국부가 많아 1인당 GDP는 많을 수 있어도, 실제로 주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적었을 수 있다. #

그나마 1970년대가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한 시기라 하여 북한 주민이나 탈북자들이 이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은 소련이나 동구권과의 무역의 탈을 쓴 원조나 내부에서 긁어낼 대로 긁어낸 것들을 통한 표면적인 번영이었을 뿐, 이미 1970년대에 북한의 경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1972년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북한의 대외 채무는 1974년부터 지불능력이 없음을 드러냈고 1976년 스웨덴, 서독,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의 채권단으로부터 채무상환유예(rescheduling)라는 명목으로 대량의 탕감을 받았으나[11] 오히려 배째라식 버티기로 점점 늘어나 결국 북한은 1980년 중반 이후 채무상환 능력을 상실하여 원금은 말할 것도 없고, 이자조차 거의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상의 지불 포기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의 IMF 상황보다 더 심각한 외환 상황이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약 20년 전에 이미 도래했던 것이다.

  • 출처: KDI 북한 경제 리뷰 2012년 3월호

이런 외환 사정은 1980년대부터 한계에 봉착하여 북한은 외교관들에게 월급과 외교공관 운영비가 중단되어 한때 120여개 해외공관을 1990년대 초 40개로 줄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충성자금 할당은 전혀 줄지 않아 마약 밀수를 저지르다가 추방되고, 외교관들이 한국이나 미국등 서방국으로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12]

북한/경제/역사에서 보듯이 1980년에 북한의 경제는 성장은커녕 실패의 연속이었고 북한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데이터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북한이 1인당 GDP는 1975년에 남한에 추월당하는데 이후로의 안드로 차이는 무시하고 1975년에 과연 남한이 복지 체계가 있었나 보면 답이 나온다. 무상의료도 아닌 전국민 의료보험은 1989년에야 남한에서 가능했는데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니 대외에 표방하는 선전을 그대로 인용하여 북한의 구매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근거가 전혀 없다. 사실 무상의료 무상배급은 예산 500조 원인 대한민국에서도 불가능하다. 북한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는 1989년 785달러로 최고점을 찍은 뒤 1990년에는 -8.2%로 마이너스 성장을 찍으며 725달러를 기록하는데 이는 1982년 수준인 715 달러와 비슷한 수치이다. #1, #2

즉 북한은 고난의 행군 이전에도 이미 1970~1980년대 부터 망해가고 있었다. 소위 황금의 70년대에 제공되었다는 북한에서 표방하는 무상의료 수준이라는 것도 우리나라 보건소 관리 수준으로 의사가 담당지역 주민의 가정을 연 1∼4회 순회하면서 의료상담, 치료 및 위생교육 등 체계적 진료를 하도록 되어있는 제도이다. 그러나 과다한 의료대상, 넓은 진료범위, 의약품 부족 등으로 대부분 형식적 진료행위에 그친다. 이를 근거로 북한 무상의료를 북유럽의 무상의료 수준으로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무상의료나 무상교육은 대외에 표방하는 선전의 도구이지 실제로 북한의 경제력의 한계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과거 소련에서 "노동자의 천국, 지상낙원, 인류최초 남녀평등 실현, 무상복지 무상의료 교육" 타령을 그대로 북한에서 써먹은걸 과거 운동권들 처럼 무비판적으로 순진하게 믿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북한에선 1980년대 중반부터 평양에서 조차 의약품 공급 중단으로 예방접중이 중단되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 환자들이 약을 구해서 의사를 찾아가야 했다. 고난의 행군시기엔 마취제없이 술을 먹여 수술을 시킬 정도로 의료기반이 붕괴했다. 탈북자 출신으로 북한 간호장교로 1980년부터 11년간 개성지역 전방군단에서 복무한 이순실의 기억으로는 배급이 그나마 잘 나온다는 전연 2군단 15사단에 근무했는데[13] 이미 1986년도부터 인민군에 된장과 간장 공급이 중단되어 약탈에 나섰고, 오후 한끼는 강냉이죽에 뽕잎을 섞은 푸레기죽(풀죽)을 먹어야 했으며 환자 대다수는 영양실조였다. 총참모부 군관 출신 임영선에 따르면 이미 1986~1987년도부터 인민군에 허약이(영양실조)가 퍼졌고, 1990년에 총참모부 직속 병원에서 영양실조 군인 병동을 차려서 집단 수용할 정도로 만연했다.

그렇다고 1970년대 북한이 살만했던건 상대적 평가로, 공식적으로 1인당 GDP가 1975년에야 남북한이 역전되었다고 하지만 이것도 믿을만한게 못되는게 1971년에 입대하여 1979년에 탈북한 안찬일 박사도 회고하길, 자신이 출신성분과 토대가 좋아[14] 정찰총국 산하 판문점 민경대대에서 특별 공급을 받으며 복무했음에도 지나가는 차량 수 헬기와, 남한 군인의 피복[15]과 체격수준으로 월등하게 남한이 앞서는걸 느꼈다는데 귀순후에 보니 일반 북한 군인은 지하족이라고 부르는 천조각 입한 고무신을 신고 오직 정찰총국과 호위사령부만 가죽 전투화 그마저도 돼지가죽 신발인데 남한에선 개나소나 소가죽 전투화를 신고 있어 놀랐다고 한다.[16]

안박사가 복무한 민경대대 조차 특별 공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쌀만 충분하고, 나머지 간장이나 된장 반찬은 자체 해결해야해서 농사를 지어야 했으며, 제대 후 추천을 받아 김일성종합대로 진학한 군대고참이 방학때 밥얻어 먹으러 부대로 면회[17]오는걸 보며 김대출신이 평소 밥도 잘 못먹는 북한 체제의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1973년 모친상으로 휴가를 얻어 개성에서 신의주까지 열차를 소달구지 속도로 도착했을때는 이미 사망한지 13일이 지나 장례까지 마친상태였으며 묘에 가서 제를 올릴 술 한병 조차 공급표가 있어도 국가상점이 텅텅비어 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강철환은 1989년 요덕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요덕군에 있는 한 농장에 배치되었는데, 10년만에 달라진 사회분위기를 체감했다. 10년 전엔 안전원이나 보위원들에게 뇌물이 통하지 않았으나, 10년 후에 나온 사회는 뇌물천지였던 것이다. 재일교포에 일본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농장으로 보위원 안전원과 군당책임 비서까지 나와서 한턱 얻어먹으려고 매일 줄을 섰다. 결국 뇌물로 농장을 탈출해 좋은 직장인 국가상점에 재배치되었고, 평양과 지방에 출장이 자유로운 직책인 소비재 구매원으로 옮기고 나서 김책공대 입학 준비를 하는데 이것도 뇌물로 당시 10만 엔이면 추천입학이 되었다.[18] 평양에서 친구들과 단파 라디오와 남한 노래를 듣고 김일성 김정일 욕을 해도 이미 뇌물을 뿌려 친해진 보위원이 자기 아들 딸 장가갈 때 도와준 보답으로 진짜 려행증도 구하고, 체포도 면해 탈북을 했다고 한다. 10년 전에 할아버지가 말반동으로 잡혀가 온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간 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인데, 강철환이 겪은 바로는 1991년에 이미 함경남도 검덕지구 광산[19]에 배급이 중단되어 무리배치된 제대군인 수천명이 대규모 쟁의를 일으킬 정도로 북한 사회가 흔들렸다고 한다.

강명도에 따르면 이미 1980년대부터 코크스와 중유 부족으로 청진제철소 용광로 세개 중에 하나만 가동되었고 하루 생산량이 고작 800~900톤에 그쳤고 1989년에는 아예 제철소 용광로 불을 꺼먹을 정도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당시 생산량을 연간으로 쳐줘도 30만 톤인데, 현재 한국의 포스코가 포항제철소에 70년대 건설한 제1고로만 해도 생산량이 연간 150만 톤에 기업 전체 연간 조강량은 900만 톤 정도다. 제철이 산업의 "쌀"이라고 할 정도로 기초적인 산업인데 극심한 철강 부족량의 여파가 경제 전체로 퍼지는건 시간문제였다. 결론적으로 수치상으로만 1994년 내지 1995년에 터졌다고 알려졌을 뿐, 고난의 행군은 1994년에 즉각 터진 것이 아니라 수년전부터 위기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김길선 기자와 탈북 철도 엔지니어 양영일의 기억으로는 이미 71년부터 한달에 두번 15일 배급을 줄 때 이틀치는 전시 비축용 용도라며 공제했고, 80년대 이후 인민군대 지원용 기타 다른 용도로 감량지급이 되어 집안에 노인이 있는 집은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고 인민군 징병자들은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강냉이와 염장무로 연명하는 처지였다고 전했다. 80년대 후반에 여러 공장과 기업이 원료부족으로 문을 닫고 군수공장 가동률도 형편없이 떨어져 김일성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김정일의 자력갱생으로 원료를 수입해 와서 무조건 가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공장 노동자 사무원은 물론 기자들 까지 시골에 가서 사금을 캐고 간부들은 숙청을 피하려 달러벌이에 나서면서 부패에 빠져 사회전반이 망가졌다고 회고했다. 최근에도 유투브에서 6-70년대 북한이 잘 살았다는 주장은 대부분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젊은 탈북자들이라며 굶는게 일상인 힘든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탈북 외교관 고영환에 의하면 북한은 몽골에 통조림, 담배, 가위나 학용품 따위를 수출하고 코크스를 물물 교환 형태로 수입했는데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국가간의 신뢰 거래였다. 한번은 몽골 국영 상품점에서 북한산 가위가 왜이리 안팔리냐 물어보니 "너희 나라는 가위를 만들면 종이가 잘려야지 (불량품을) 누가 사겠냐"라고 타박을 받았다. 그나마 과일 통조림이나 담배는 조금 팔렸다고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조잡한 북한산은 아무도 사려하지 않고 당연히 코크스 구입도 끊겼다.

비슷하게 동독의 예를 들 수 있다. 동구권 사회주의중의 모범생으로 선진 산업 국가로 사회주의권에 기술집약적 제품수출을 선도한 동독의 경우, 통일 전 1989년 동독의 1인당 소득은 남한의 두 배에 달했고,구매력 기준으로 1만 달러에 육박했으며 공산권 세계의 종주국인 소련보다도 높았다. 이 수치는 서독의 1인당 소득의 63%에 육박했기 때문에 통일 후에도 가까운 시일안에 경제적 통합과 평준화가 가능할 거라는 희망적인 전망도 있었지만, 실상은 동구권 GDP의 과대평가임이 드러났다. 동구권과 사회주의에서 선전하는 무상의료니 무상주택이니 하는 것은 물자나 서비스의 질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국통화의 공식 환율과 암시장과 시장가와의 수십 배의 차이가 날 정도로 구매력에서는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독의 생산품의 질은 시장경제에서 팔릴 수 없는 수준이었고, 산업 설비는 스크랩(고철)처리 되었기에 동독에선 거의 완전히 처음에서 다시 시작하는 수준의 경제재건이 이뤄져야 했다. 결론적으로 당시 동독의 생활 수준은 남한의 2배는커녕 남한 자체에도 미치지 못했다.

북한은 건국 이래 배급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한 적이 없다고 한다. 경제가 잠시 반짝 하던 1960년대 후반기에는 배급이 아니라 식량과 생필품을 자율판매했다. 그러나 협동농장 체제로 바뀌면서 농촌 생산성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농촌에선 밤에 협동농장서 비료 한주먹 훔쳐다가 자기 텃밭에 뿌리는 식으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고, 텃밭을 갖출 수 없는 평양같은 도시는 물론 배급에서 더 혜택이 있긴 하지만 특히 지방은. 무상 의료 수준이란게 농촌에는 병원이 없고, 도시에 가면 병원가도 약이 없고 입원을 하려면 뇌물을 써야하고... 해서 스스로 약초캐서 달여 먹는 그런 수준의 무상의료였다고 한다. 무상교육이라는 것도 11년짜리 무상교육을 받긴하나 교육과정에 허구한 날 동원에 농촌 모심기전투, 김매기 전투, 오리키우기, 토끼키우기, 고철줍기, 산나물캐기, 김일성 우상화 운동이나 건설 작업에 투입되어 남자는 대부분은 의무교육 과정 졸업년도 중간에 입대하고 출신성분에 따라 대학 군대 공장 탄광 농장이나 건설현장으로 배치되는 게 북한식 무상교육이었다. 즉 사회주의 경제는 배급제로 구매력을 보완하는 기능도 있는대신 물자와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도 반영하지 못하는 요소도 분명히 존재한다.


3.2. 북한의 배급제[편집]


사람의 하루 국제기준에 따른 하루 권장 영양공급량은 2천-2500 kcal인데 쌀로 환산하면 600~700 g이다.[21] 김일성 집권 시기, 그러니까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성인 기준 600 g 2,160 kcal 정도가 배급 기준이었다. 체중이 80 kg중 초과면 더주기도 했고 사람이 쌀만 먹고 사는것도 아니고 아무리 북한의 엥겔지수가 높아도 다른 공산품 수요가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먹고 살게만 해주는 수준이 목표였다.[22]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계층
일일 배급량(그램)
수혜자
1
900
중노동자 또는 위험 직업
2
800
광부, 위험 장비 운전자
3
700
일반 노동자들
4
600
대학생, 은퇴 공로자들, 환자들
5
500
중고등학생들
6
400
초등학생들
7
300
은퇴자들, 유치원생,
기타 부양대상자들
8
200
2~4세 어린이들, 수형자들
9
100
1세 이하 어린이들

  • 출처 : 계층별 식량 배급량, 2005 북한 이해, 통일교육센터, 통일부, 2006년 3월, pp 245-247

물론 이건 공식적인 규정이고 지연지급이나 감량지급이 빈번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난 2005년에도 배급 문제는 심각해서 WFP(유엔세계식량계획) 보도로 일하는 사람 기준으로 250 g이고 실제론 더 적게 배급 되었다고 한다.#[23]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에서도 나오지만 인민군 병사에겐 매일 800g의 식량배급이 나와야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끝난 2010년대에도 겨우 300~400g만 공급되며 병사들은 훔치거나 굶어죽거나 아니면 부모에게 연락해서 근처에 민가에 돈을 주고 밥을 대먹거나 군관에게 뇌물을 바쳐 집에 돌아가거나 해야한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몇 년간 배급제를 유지했으나 1958년 식량을 제외한 모든 소비품에 대해서는 배급제를 폐지하고 국영상점을 통한 자유구매로 전환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이른바 '공급표'가 등장하여, 배급제가 사실상 부활됐다. 물론 모든 소비품에 대해서는 아니었지만, 웬만한 생필품에 대해서는 배급제로 전환됐다. [24]

1980년대 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식량의 경우, 보름에 한 번씩 공급하게 되어 있으나 배급이 하루 이틀 지연되기 시작했다. 생필품의 경우, 세대별 공급표 에는 국가가 이번 달에 공급한다고 쓰여 있으나 국영상점에 가면 '물건이 없어 줄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제품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더욱 악화됐다. 식량의 경우, 이제는 지연이 아니라 감량이 시작되었다. 일년 열 두 달분이 아니라 예컨대 열 달분, 8개월분의 식량이 공급되었다. 물론 감량 배급은 1970, 80년대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1990년대의 감량 배급은 보다 심각했다. 특히 주민들 입장에서는 감량의 정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불안정성과, 얼마나 감량될지 사전에 알 수가 없다는 예측 불가능성의 충격이 컸다. 그러던 것이 1995~98년의 고난의 행군기로 들어가면 배급은 아예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미공급기인 것이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흔들리는 배급제…'자력갱생적 시장경제'의 길>


그러나 북한은 1980년대 후반 즈음부터 농사 작황이 좋지 않아 양이 조금씩 줄기 시작하더니, 고난의 행군 시기 들어서는 텃밭에서 농사를 짓든지 아니면 장마당에서 그냥 곡물을 사든지하는 식으로 대체해버렸다. 이후 김정일과 현재 이어지는 김정은 집권 시기까지, 100g이 조금 넘는 양을 아주 가끔 배급하고 있다. 국가 전반의 산업은 붕괴되었으며, 당시의 북한에서 배급을 중단하였다는 건 배급에만 의존하며 살았던 인민들을 전부 다 굶겨서 죽이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배급되는 물량을 알아서 먹고살라는 식으로 지시한 것인데 텃밭에서 작물을 기르기는 했지만 텃밭에서 작물을 기른다해도 풍족한 것이 아니고 작황이 안좋으면 장마당에서 따로 곡물을 사야 되는데 한달 월급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만큼의 곡물을 구할 수 없고[25] 에너지난까지 겹치며 물류가 마비되어 정상적인 운송도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단, 배급제는 사회주의 체제와 무관하게 물자의 부족을 이유로 실시된다. 평시에도 제대로 배급제를 실시한 사례는 공산권에서도 북한이나 쿠바, 1950~1980년대의 중국 정도이고. 소련에서도 배급제스탈린 집권 초기(정확히는 1929~1935),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및 전후 복구 시기(1941~1947)에만 시행되었으며, 1947년 12월 들어서면서 배급제를 완전히 폐지했다.[26] 물론 배급제 폐지 이후에도 간간히 상당수 소비재나 사치품들을 배급하기도 했지만 법적으로 공식화된 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물건을 팔았냐면, 국가에서 각 가게마다 물건을 보급하고, 소비자들은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방식으로, 사실 유통 과정 자체만 본다면[27] 서방과는 큰 차이는 없었다.[28]

다만 TV나 자동차 같은 사치품을 제외한 생필품은 국가에서 명목상은 싸게 공급했는데 대부분 동구권에서 수입한 고가품은 중앙 당간부나 되어야 만져볼 수 있으니 시중에 나올리가 없고, 일반 공산품은 물건 공급이 달리는 경우가 꽤 빈번해서 일단 비싼건 둘째고 물건이 없었다, 일당 '공급표'라는게 있어서 공산품을 국영상점에서 살 수 있는데 농장원이나 군인 대학생들에겐 나오지도 않고, 평양이나 잘해야 도시에서나 나오기 때문에 친척에게 부탁하여 구입하던가 암시장에서 공급표를 사서 들어가야 했다.[29]

북한 노동자들의 평균월급은 60원~90원 안팎이었고 공식 달러로 환산해도 수십 달러 정도에 불과한 초라한 수준이지만 배급제로 가처분 소득을 보충해주었기 때문에 소득 수준보다 나은 구매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기간산업과 배급제가 붕괴되고 물가 폭등으로 북한 돈의 가치가 나날이 떨어지면서 이런 혜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다.

하여튼, 북한은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 영향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인민들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일은 더 하고 학생들까지 노동과 농사일까지 하게 되었다. 당연히 배가 고프니 도저히 일하러 올 수 없는 사람이 늘게 되어 노동자들은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배급이 줄자 북한의 인민들은 장마당에서 식량을 구해서 먹게 되었고, 부족한 식량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농사에 동원되면서 기초적인 국가 시스템은 마비되었다. 철도는 움직이지 않았고, 편지 배달을 할 집배원도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으로 일부 지방에서는 부족하게나마 여유가 생겼는데 교통과 통신의 마비로 인해 이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가 2010년경까지 이어졌는데[30], 열차는 석탄이 필요하고 트럭은 기름이 필요한데, 열차가 남는 기름을 수송하려 해도 석탄이 없고, 트럭으로 남는 석탄을 수송하려 해도 기름이 없다고 한다. 말과 수레로나마 수송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가 차라리 낫다 싶을 수준. 석탄을 캐려면 광산에 전기가 필요하고, 전기를 만들려면 발전소에 석탄이 필요하고, 발전소에 석탄을 대려면 열차에 석탄이나 트럭에 석유가 필요하고 하는 식인데, 모든 곳이 멈춘다.


3.3. 식량난 도래[편집]


89년 평양축전을 치르면서 북한 경제는 폭삭했다. 당시 외국에서 2만명이 참가했는데 이들에게 몽땅 공짜로 해준 것이다.

엎친데 덮쳐 89~93년에는 농사가 전혀 안됐다. 특히 냉해가 심한 93년에는 함북, 함남, 양강, 자강 4개도는 한 정보에서 쌀이 1㎏도 생산되지 않았다. 죄다 쭉정이였다.

그 결과 92년부터 식량 배급이 중단됐다. 그래도 사정이 낫다는 평양에서조차 석달간 식량 배급이 중단된 적이 있다. 인민반장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당장 굶어 죽게된 사람들에게 연명할식량을 나눠주는 형편이었다. 2㎏줄 것을 1㎏주는 그런 식이었다. 지방에는 통강냉이를 나눠줬다. 껍질도 까지않은 젖은 강냉이 말이다. 북조선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나마 어떤 지방에는 통강냉이도 못줘 배(과일)를 나눠주기도 했다.

원래 함경북도 화성은 배가 유명하다. 국영종합농장 배 밭만 1만2천정보나 된다. 에는 1백% 러시아에 보냈다. 그런데 90년부터 러시아가 배를 안받았다. 북한은 할 수 없이 배를 몽땅 술과 사료로 만들었다. 왜냐면 수송이 안되니까. 썩이느니 술이나 만들자 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식량난이 워낙 심하니까 함북 도당은 93년 8~10월 석달간 배를 강냉이 대신 나눠줬다.

그러자 배를 먹고 죽은 사람도 생겼다. 이것은 내가 직접 93년 10월 청진 병원에서 본 일이다.

식량으로 나눠준 배를 먹기 위해서는 먼저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그러면 배가 풀어진다. 거기에 강냉이 가루를 넣고 휘젓는다.

이것을 식히면 꾸덕꾸덕해진다. 이를 잘라 종이에 둘둘말아 도시락을 싸오는 것이다. 하지만 배와 강냉이가 섞인것은 나중에 벽돌처럼 딱딱해진다. 그런데 한 50대 노동자가 이것만을 계속 먹다 하도 배가 아파 병원에 실려온 것이다.

배를 째본 의사는 깜짝 놀랐다. 위장에서 소화가 안된 강냉이와 배가 나온 것이다. 이 환자는 결국 수술 도중 죽고 말았다. 워낙 영양실조가 심해 힘든 수술을 견디지 못하고 죽고만 것이다. 배를 먹다가 배 터져 죽은 경우다.

식량난이 심해지자 주민들은 급기야 국영농장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배급을 못받고 굶어 죽느니 훔쳐 먹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하도 농장 습격이 심해지자 농장에서는 횃불을 들고 밤마다 보초를 섰다. 그러나 횃불 보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농장을 습격하곤 했다. 한때는 보초들과 주민이 충돌해 전쟁을 방불케하는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당시 노동당도 이 같은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국영농장에 대한 습격은 바로 국가에 대한 항거이기 때문이다.

<강명도 1995년 중앙일보 탈출기 5>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말 대대적인 집단농장화를 완수한 북한의 농업은 외견상 전쟁으로 인한 물자와 노동력의 부족을 해소해 가면서 착실히 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근저에는 사회주의 농업의 고질적 병폐인 부족의 경제와 국가로부터의 과도한 수탈이 만연해 있었다.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베트남 전쟁 등으로 연이어 위기를 느낀 북한은 국가경제 운용에 대하여 자력갱생을 원칙으로 내세웠고, 이는 척박한 북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중요한 화학 비료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졌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경제위기가 1960년대 말 북한의 과도한 무력 도발과 이어지는 갑산파 숙청의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일성은 1970년대 초부터 적시적작, 적지적작을 통해 화학 비료의 사용을 줄인다면서 다락 밭 개간, 강냉이 영양 단지 농법, 밀식 재배를 주축으로 하는 주체농법을 내세웠고, 1975년 435만 톤의 식량을 생산하면서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농법은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체농법의 꽃이라 할 만할 "영양단지 농법"은 사진처럼 거름이 많은 부식토에 미리 옥수수 알을 심어 싹을 틔워 놓은 뒤 이를 에 옮겨 심는 것으로, 말하자면 옥수수 농사를 위한 모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벼운 모를 심는 모내기만 해도 엄청나게 노동 집약적인 농법이라 논 하나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달라붙어야 할 정도인데, 그게 옥수수를 심은 모종에 산비탈에 만든 다락 밭이 작업장이라고 하면 어떨까? 더 심각한 건 심는 건 이앙기를 개조해서 굴리면 된다 쳐도 진짜 문제는 파종이다. 만 해도 파종기를 써도 인력이 많이 들어간다. 근데 옥수수는 한 칸에 한 알씩 일일이 심어줘야 하고, 그런 파종기는 적어도 민수용으론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국 가뜩이나 기계 써도 인력을 미친 듯이 먹는 작업을 기계 없이 순수 인력만으로 해야 했다.

막대한 노동력이 주체농법에 투입되기 시작하자, 이런 주기적인 '농촌 지원 전투'에 동원되면서 사회의 전체적인 생산 능력마저 떨어뜨렸다. 게다가 척박한 한반도 산악 지대에서 지력을 미친 듯이 소모하는 옥수수를, 그것도 밀식으로 재배하면서 일시적인 식량 증가는 가능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지력의 고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의 농업 생산량은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감자를 심는 것이 낫기 때문에 감자를 보급하려 했지만 옥수수보다 척박한 량강도 고산지대에서 재배가 용이하다는 정도의 장점이 있을 뿐, 단위 면적당 수확량 및 열량 충족도, 특히 보존/수송에 있어서 난점이 있기 때문에[31] 북한의 처참한 물류 수송 환경으로는 감자 역시 옥수수에 비해 쓸모가 없다. 1998년부터 그렇게 대홍단 감자 노래를 불렀으면서 그놈의 감자 농사가 여태껏 량강도를 못 벗어나고 여전히 옥수수을 주식으로 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식량 생산량이 줄어드는 것은 남한도 마찬가지 현상이기는 한데, 남한의 경우에는 생산성은 좋은데 맛대가리라곤 쥐뿔도 없어서 혹평이 쏟아지는 통일벼 재배의 포기, 대규모 도시화로 인한 농지 감소, 밀가루 등의 저렴한 대체 작물 수입, 당분 및 육류 등의 섭취량 증가로 인한 주식 작물 소비량의 상대적 감소 등이 원인이다. 한마디로 수요가 줄어들어서 생산도 자연스럽게 감소 추세였던 거지만, 북한은 그런 거 없이 여전히 사람들이 배고픈데 식량 생산이 줄어들었으니 문제였다. 거기다 남한은 식량 수입이라도 했었지, 자력 갱생을 고집하는 북한에 식량 수입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이때부터 북한의 국제신용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던 중이었으니 수입하려고 해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터이다.

또한 산을 깎아 다락밭을 만들다 보니, 비가 왔을 때 물을 저장하고 흙이 씻겨내려가지 않도록 하던 나무들이 모조리 사라져 조금만 비가 적게 와도 지하수가 고갈되어 가뭄이 들고,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비에 쓸려 내려간 흙이[32] 하천 바닥과 저수지 바닥에 쌓여 쉽게 홍수가 발생하게 되었다. 무리하게 경사가 급한 곳에도 다락밭을 만들면서, 옹벽이나 사방댐같은 안전 시설물도 제대로 설치하지 않다 보니 산사태 발생도 늘어나서 기껏 만들어 놓은 밭과 작업로를 쓸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렇게 다락밭으로 인한 인재로 서류상 생산 면적은 늘어났음에도 생산량 증가가 주춤하자, 북한은 남한의 녹화사업이나 그린벨트처럼 나무를 더 심거나 할 생각은 안 하고 산림 개간 및 관리를 허용하는 권한을 중앙 정부에서 지방으로 이양, 더 쉽게 다락밭과 화전을 만들게 하는 악수를 두게 된다. 결과적으로 다락밭 개간 → 산림 황폐화 → 산림의 물 저장 기능, 토양 침식 방지 기능, 산사태, 홍수 등 재해 방지 기능 약화 → 재해로 인한 피해로 식량 생산 감소 → 다락밭을 다시 개간하는 악순환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지방 도시에서는 1980년대부터 배급이 밀리는 현상이 발생했고, 평안북도 신의주시함경북도 청진시 등 대도시들도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런 식량 공급의 부진이, 함경북도 청진시직할시에서 일반시로 격하된 이유 중 하나였다. 직할시 주민들의 식량 공급 규정은 일반시보다 훨씬 급이 높은데, 당시 북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0년 371만 (농촌진흥청 추산)까지 떨어진 식량 생산량은 1991년 441만 톤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일어나기 직전인 1993년에는 동아시아를 휩쓴 냉해로 인해 다시 388만 톤으로 떨어지는 등 극심한 등락이 반복되었다.

참고로 2013년 북한의 식량 생산량 추정치는 약 480만 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북한에서 필요한 식량은 약 600만 톤에 육박한다. 일반적인 국가에서 연간 100만 톤 정도의 식량 부족이라면 외국에서 수입하면 되지만, 북한의 경우 군사력 유지와 정권과 체제의 유지, 세습을 위해 여기저기 돈을 쏟아붓다 보니 식량 사올 돈이 없다는 게 문제로 그 좋은 본보기가 바로 금수산태양궁전이다.

이 즈음 되면 일찌감치 헝가리중국, 베트남의 사례를 본받아 농업 부문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조금 자세히 짚어보자면 영농 조직의 소규모화와 자율화, 정부 수매의 축소와 개별 처분권 강화 등이 골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헝가리, 중국베트남이야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공산당이 실용주의적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해 해결 가능했지, 일인 독재 체제, 그것도 개인숭배의 정점에 오른 북한에 있어서는 체제 전복이나 거의 다름없는 말인 것이다.

다만 소규모화와 자율화에서 무작정 개인 농화하는 것은 자칫 개별 농가의 영세화로 이어져 국내 농업의 전반적인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 일례로 폴란드는 막 공산화 되었을 시절에 집단 농장을 만들어냈으나,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이어서 벌어진 포즈난 항쟁 이후 스탈린주의파가 물러나고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면서 백지화,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개별 자영농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그 결과 폴란드 농업은 영세화를 면하기 힘들었다.[33] 소련의 경우, 스탈린 시절 쿨라크 때려잡기로 인한 농촌 파괴로 생산성이 소련시절 내내 제정러시아 시절보다 뒤떨어져 곤두박질 쳤고 소련 해체전까지 적대국 미국에서 식량을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다. 그러나 소련해체 이후 협동농장 체제에서 벗어나자 경지 면적과 농민수가 2/3로 줄어도 현재 식량을 자급하고 수출까지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결국 땅 한번 파보지 못한 방구석 농부 출신 김일성이나 마르크스-레닌 주의 농법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체제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강제적 정부 수매는 국방과 경제의 병진 노선과 직결되는 문제다. 간단히 말하자면 '군량미 확보'. 그리고 농업 집단화와 주체농법은 수령 스스로가 우긴 결과이니 철회=수령의 오류 인정이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수령의 무오류성을 하나의 사상으로 확립해 놓은 상태였고, 그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이 바로 김정일이었다.[34] 수령은 언제나 옳은 진리이고 자신이 그것을 이어받았으므로 자신의 권력승계는 정당하다고 전국민을 세뇌시켜놓고 이제와서 수령의 '령도'와 당의 '지시'가 잘못되어서 지금 이 사단을 냈다고 인정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태수습과 국가재난 극복보다 체제유지와 정권안정을 우선시하는 북한체제의 실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소련이나 중국처럼 후임 지도자가 전임 지도자의 정책을 바꾸거나, 혹은 헝가리베트남처럼 당 내의 개혁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철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사실 이는 김일성이 정확히 의도한 바였다. 심지어 하부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할 수조차 없는 여건이었다. 결국 북한은 어영부영하는 사이 1995년 갖은 자연 재해를 겪고 농촌진흥청 추산 345만 톤에 불과한 식량 생산량을 기록하면서 기록적인 경제난의 막을 올렸다.

사실 이렇게 식량부족이나 북한농업의 문제점이 적혀있기는 하지만 중립적으로 본다면 어쨌든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는 식량증산이 통계상으로나마 성공적이라서 기본적인 식량자급 자체는 가능했었고, 동구권과 러시아의 지원으로 비료 생산도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1980년대에 농업부문에 있어서 한계가 드러나고는 있었지만 대책없이 1990년대를 맞은게 영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다가 동구권 붕괴와 맞물려 원료 수입 중지와 물류난으로 비료 생산과 보급이 바닥을 치고 1989년부터 1993년에도 북한에서 주장(?)하는 기록적인 흉작과 냉해 홍수때문에[35] 300만 톤 정도 식량을 생산하며 나락에 빠져들었고 이후 1999년 식량생산량 400만 톤 생산했다가 다시 꼴아박았다가 2002년에 가야 400만 톤을 찍었다. 북한의 인구로 매년 500만 톤을 생산해야 자급량으로 보지만, 낱알 생산이 500만 톤이라면 탈곡 후에는 350만 톤 정도가 남는다. 결국엔 국제 사회에서 몇십만 톤을 지원받는다고 쳐도 400만 톤 이하로 내려가면 주민들은 한 해 내내 기아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고난의 행군은 단순한 식량 부족만으로 발생한 사태는 아니었다. 단순히 식량 부족이 문제의 전부였다면 아무리 신용이 부족할지언정 유엔과 국제기구에서 지원해줄수 있고 지금도 지원해준다. 아무리 대북제제가 촘촘해져도 미국에서도 대북 식량 지원은 예외이고 대부분이 미국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그런데 김일성이 죽기 전 까지 김정일은 식량난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 1994년에 김일성이 죽고 나서야 국제 사회에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기준으로 북한의 수요량 대비 생산량 자체는 고난의 행군 때보다 획기적으로 나아진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때보다는 쌀밥 먹는 사람이 크게 늘고 굶는 사람은 줄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식량난만 문제가 아니란 사실이다.


3.4. 에너지난과 수송난[편집]


1960년대부터 내세운 자력갱생을 관철하기 위해 북한은 줄곧 전력 중심의 에너지 수급 정책을 고수했다. 수력과 석탄 자원은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소련이나 중국을 통해 들여온 석유는 군수부문이나 단거리를 수송하는 민간 차량, 각종 선박 등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북한의 높은 전철화율과 철도 중심의 수송 체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장거리에 거쳐 계획적으로, 저렴한 수송이 가능한 철도가 교통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다.

그런데 현재에도 동구권 시절에 들여온 발전기계와 설비들을 내용연수를 수십년이 넘도록 혹사시키고 있고 이미 1990년대 초반에 파산한 체코나 동독 업체의 발전기와 변압기를 자체적으로 부품을 만들어 수리하는데다가 배선도 일제강점기때 설비를 우려먹으므로 발전 효율 저하와 송전 손실이 막대하다. 발전 효율은 아예 설비를 폐기하고 새로 지어야 할 정도인데 설비가 고장나자 그나마 남아있는 평양 화력 발전소에 발전기가 3대중에 한대만이 돌아갔는데 노후화된 설비에 발전량을 혹사시키니 발전기 터빈까지 부러져버렸고 땜빵 수리에도 고장이 잦아서 평양시내가 단전이 빈번하자 대책이라고 아예 새로 동평양화력을 지어버렸다.

북한은 1980년대 까지 소련과 중국 동구권에서 무상으로 또는 국제시세보다 저렴하게 원유를 250만에서 300만 톤까지 공급 받았는데 사회주의 동맹이 해체되자마자 동구권과 소련에선 지원을 끊어버렸고, 현재 중국에서 원유 55만 톤, 휘발류와 석유제품 약 20만 톤을 지원받는게 전부이다.[36] 제3국[37]과의 우회수입, 밀수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치를 합친다 해도 100만 톤에서 최대 150만 톤을 넘지 않는다고 본다. 연료 소비량이 1980년대의 반토막내지 3분의 1내지 난것이다.

예를 들자면 일본의 개화기 시절 때에는 적은 비용과 빠른 속도로 건설할 수 있는 협궤를 깔아 물류 이동을 통한 산업화에 성공했었지만, 후대에서는 협궤의 단점 때문에 후손들이 두고두고 고생을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아직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철도 정책 자체는 대단히 성공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열차 관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의 철도 시스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으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정교하게 굴러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예외로, 조선 고종의 주도로 서방 열강 자본으로 철도건설이 시작되고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병참기지화정책에 따라 본격적으로 철도노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철도는 대부분의 사례에서 국가의 주도로 운영되며, 특히 비 선진국 국가에서는 이 효율과 절대적 수송량이 높지 못했기에 결국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한 교통체계를 구상하었고 경인고속도로를 시작으로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등 주요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교통체계를 짰다. 물론 이와 같은 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대한민국은 성공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좁은 국토에 과밀된 도시화와 차량과밀의 원인 중 하나로 고속도로가 꼽히기도 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현재는 교통대란을 해소하기 위해 넉넉해진 국가재정을 바탕으로 철도에 힘을 실어주는 중이다.

아무튼, 북한은 특히 석유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 부족한 재원을 주요 철도의 전철화에 집중했고, 그 결과 전체 철도의 80%를 전철화하는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철도 수송 능력의 강화에 절실하게 필요한 복선화와 선형 개량은 포기해야 했다. 거기에 김일성은 전철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주제에 가장 중요한 철도 복선화 요구를 대놓고 무시했다. 전철화를 택하고 복선화를 포기한 것 자체는 1970년대 한국의 구 중앙선, 현 영동선과 태백선이 그랬듯 산악지형에서는 시설비용이 과다하게 드는 복선화 및 선형개량 대비 유리한 결단이므로 자금, 인력 등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일리있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놈의 자력갱생 운운만 안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게 전철화를 이뤄내면서 수송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 참 좋았을 거고 고난의 행군도 어느 정도 완화됐겠지만, 문제는 이로 인해서 향상된 견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각종 제반 사항들이 제때 개선되지 못하면서 북한의 전기 철도는 전기 먹는 기계로 전락해버렸다. 여기서 제반 사항이라고 함은, 예를 들면 한꺼번에 많은 짐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좀 더 무거운 중량화차와 이를 받아낼 중량 궤도가 필요하다. 또한 열차 편성이 길어지면 그만큼 대피선이나 신호장 등도 확충되어야 단선에서도 무리 없이 교행이 가능해진다. 거기에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받아먹을 수 있도록 기관차의 내부 시스템도 정비해야 하는 등등, 돈 먹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업들이 제대로 수행되는 일은 없었다. 철도전기화에 온 힘을 쓴 북한은 이어지는 후속 사업들에서 연달아 실패를 거듭했다. 오죽하면 김일성이 대놓고 "니들은 전철화만 해 놓으면 다냐? 다른 것도 제때 해 놔야 할 거 아냐!"라며 짜증을 냈을 정도였지만, 80년대부터 경제위기 보고를 무시하고 밀어붙인게 김일성 김정일이며 마지막 쌈짓돈을 평양 13차 청년학생축전으로 현금 60억내지 80억달러를 허공에 날려버린게 결정타였다. 적어도 이 금액이면 90년대 내내 쌀이나 옥수수를 국제 시세로 사와서 전 북한주민이 먹고도 남을정도의 금액이다.

이것이 철도 하나의 문제로 끝나면 참 다행이었을 텐데, 문제는 발전소에서 석탄을 받아야 전기를 생산하고, 전기가 들어와야 석탄을 캔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탄광들은 갱도 식이기 때문에 조금만 발전기가 멈춰도 지하수가 차버려 못 쓰게 된다. 이렇게 해서 멈춰버린 탄광들이 부지기수다.[38]

수력 발전소가 있다고 하지만, 하상계수[39]가 큰 한반도에서 수력 발전은 계절에 따라서 발전량의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므로 화력이나 원자력 발전은 필수다.[40] 무엇보다 수력발전이란 한반도, 중국, 인도, 동남아 같은 몬순성 기후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다. 현재도 수력 발전이 발달한 나라는 대부분이 영국, 노르웨이1년 내내 강수량이 고른 해양성 기후를 띤 나라들이다.

게다가 그 수력 발전소들의 상당수는 일제 강점기의 설비 혹은 소련이나 동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쓰다가 새로운 발전기를 도입하면서 버려야 하는 것들을 북한에 무상 공여해준 것들이고, 그걸 북한 측은 운영하는 식이기에 고장이 나면 더 이상 고칠 수도 없고 어떻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발전의 효율성은 처참하다. 일례로 청진 화력발전소는 2015년 가동을 중단했는데 그 이유는 연료 부족은 물론 유일하게 돌아가던 발전기 하나마저도 완전히 고장났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이며, 그나마 돌아가는 평양 화력발전소조차도 상당수 발전기들은 고장이 나서 돌리지 못한 상태에서 작동이 가능한 발전기들을 최대한 돌리지만 수명이 이미 초과된 발전기들을 가동해봤자 효율이 떨어지기에 김정은이 동평양 화력발전소를 세우라고 지시해서 이를 보완했을 정도다.

이런 수송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로, 결국 김일성이 직접 "차도 좀 멀리 많이 굴려라!"라고 주문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북한은 1970년대부터 평양원산간 고속도로를 비롯해 각종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유류 소비량도 1980년대 중반까지 큰 폭으로 늘어났다. 문제는 이후 북한 경제의 내부 예비 고갈과 1980년대의 삽질로 쓸 수 있는 예산이 크게 줄고, 이로 인한 성장률 감소 현상이 지속되면서 유류 소비량의 증가 현상은 둔화되었고,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1990년대 동구권의 체제 전환이었다. 그동안 무상 지원이나 현물 교환으로 들어오던 각종 원자재나 기계 부품 공급이 끊겼다. 소련 몰락 이후에 제 코가 석 자인 러시아에서는 달러를 요구했는데, 북한에는 달러가 없었다. 그동안 동구권과의 거래는 시장가치로 교환되는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조잡한 공산품과 토산물을 수출하면 동구권에서 자체적으로 상품에 대한 노동 투입량을 평가하여 각국마다 통화 단위로 장부에 계상하고 그만큼의 가치의 수입품을 북한에 보내는 방식이었기에 달러가 필요 없었다. 중국의 경우 1978년 덩샤오핑 집권이후 북한에 중국식 경제 개방을 요구했다가 단칼에 거절 당한 후 지원을 완전히 끊어 버렸고 이 조치에 격분한 김일성도 중국의 개혁개방 조치를 배신으로 여겨, 북한 외교관들이 외국에 갈때 중국을 거쳐 국제선을 타지 말고 모스크바로 열차 7박8일로 가서 가라고 할정도로 불편한 관계였다.

다급해진 북한 정부는 1991년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라는 나름의 승부수를 띄웠지만, 1970~1980년대에 시장경제에 적응할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끝에 다급하게 도입한 특구가 제대로 돌아갈 리는 만무했고, 들어오는 달러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 일단 무역이란 것이 자유로운 상업 활동과 구매력 높은 상품, 신용과 신뢰, 철저한 이윤 보장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인데 그런 게 전혀 없는 북한과 어느 나라가 무역을 하겠다고 나서겠나? 심지어 혈맹이란 중국조차도 북한에 선불을 먼저 받아야 하겠다고 할 정도다. 게다가 거의 의존하고 있던 공산권 형님인 중국러시아는 체제를 전환하고[41], 심지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몽골, 베트남, 불가리아 등 공산권 동지 국가들이 90년대 들어 북한의 불구대천 원수 대한민국과 국교를 맺어 정치/체제적으로 매우 큰 충격까지 받게 되었다.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남한은 너무나 성장한 상태였고, 북한은 그 자신의 폐쇄성이나 지도자의 쓸데없는 고집 등으로 인하여 점점 더 심하게 나락으로 빠져갔다.

사실 북한도 1984년 합영법과 합작법을 시행하고, 1986년 관광총국을 만드는 등 이래저래 뭔가 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것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전면적인 시장화 개혁·개방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돈 몇 푼에 합영·합작 기업의 뒤통수를 치는 등 뻘짓만 잔뜩 하다가 시간을 날려 먹었다는 것이다.[42]

결국 1993년 북한의 화력 발전량은 88억kWh(추정)를 기록하며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100억kWh선이 무너지는 참사를 맞이했으며, 현재도 100억kWh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전력이 부족해지자 군수·중공업 부문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공급했지만, 그 결과 안 그래도 빈약했던 경공업 부문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면서 농민들과 근로자들의 생활고는 가중되었다.

여기에 국가 교통의 근간을 이루는 철도가 전력 부족으로 운행에 어려움을 겪고, 이를 보완해야 할 도로 교통 또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서 국가 수송 체계 또한 전면적인 마비에 직면했다. 설령 쌀이 있다 해도 실어 나를 수 없는 전근대적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일례로 1996년 청진 철도국에서는 남포항에 쌀이 들어와 있는데 이걸 실어올 수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철도국이 말이다.

에너지난과 수송난이 고난의 행군에 미친 영향은 식량난의 피해 분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UN에서 2002년에 자강도, 강원도를 제외한 북한 전역에서 실시한 어린이 발육 부진 현황 조사를 보면, 식량 생산이 적고 공업 비중이 높은 함경·도 및 량강도 같은 동북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43], 평안·도가 뒤를 이었으며, 이북곡창지대인 황해·도는 지방 중에서는 가장 피해가 적었다. 물론 가장 피해가 적은 건 평양시남포시였다.

1920년대 소련 대기근이나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대기근이 주로 농촌 지역에 피해가 집중되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의 시장화가 주로 함경북도 및 량강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반정부 움직임 또한 나름대로 나타나는 것은,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과 함께 이 시기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의 에너지와 수송난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북한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 노선 투자에 소홀했다. 그 결과 70년대 부터 유지관리에 한계에 부딪혀 노후화된 철도와 철도 차량을 공산권에 공짜내지 헐값이 들여왔고, 그마저도 부족하여 80년대 들어 전력난과 연료난으로 일제강점기에 남만주 철도회사가 쓰던 증기기관 열차를 다시 꺼내서 써야 할 정도로 발전은 커녕 퇴보를 거듭했다.

  • 북한의 제한된 예산으로는 철도 개선에 전철화와 복선화, 선형개량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고, 김정일은 이 중 전철화를 택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철도는 대부분 전철로 바뀌었지만 대신 다른 정비 사업에 쓸 돈이 없어졌고, 이는 개량된 전철을 가지고도 전력난으로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 했다.

  •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대체 에너지 자원이지만 수력 발전 같은 건 북한의 들쭉날쭉한 강수량으로는 효율이 개판이었고, 80년대에 마지막 여윳돈마저 고갈되며 북한은 고립되었다.

  • 주요 수송 수단이었던 철도의 효율성이 떨어지자 국가 전체가 마비되는 결과를 낳았다. 전철을 굴리려면 전기가 필요하지만 문제는 전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석탄을 나르지 못하고 또한 석탄을 캐는 탄광 역시 전기가 없어 석탄을 캐지 못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 큰형님들인 소련과 중국에서 지원이라도 받으면 좋았겠지만 소련은 러시아로 체제가 바뀐데다가 정부에서 공무원 월급과 연금조차 제때 못주고, 직장에서 임금을 체불하거나 월급 대신 물건을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것이 당연시 될 정도로 골골거리던 상황이었고 중국 역시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쁜 상황이었다.

그렇게 막장에 막장에 막장을 거듭한 끝에 1990년대에는 에너지 공급량이 바닥을 치며 국가 전체가 마비가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4. 파멸적인 결과[편집]


(전략)... ‘김일성의 저주’로 불린 1994년 8월의 대홍수는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더욱이 8월은 농작물이 숙성하는 시기인데 어느 하루도 그치지 않는 비로 하여 그나마 물에 잠기지 않은 농작물도 여물지 못하고 쭉정이만 남았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저주’로 불린 대홍수는 김일성의 암살설로 비화됐습니다. 김일성이 후계자이고 아들인 김정일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북한에 재앙을 불러왔다는 설이었는데 이러한 설은 주민들 속에 큰 공포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주민들은 비록 농사는 망쳤지만 전쟁예비물자로 저축한 식량이 많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부터 농사가 안 돼 전쟁예비물자를 다 털어 먹었다는 사실을 당시 북한의 인민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농사는 망쳤지만 아편은 그 어느 때보다 잘 되었습니다. 도시 노동자들의 배급이 끊기고 인민들이 느끼는 식량난이 커가고 있었지만 청림리 주민들은 아편을 심는 자신들만은 나라에서 정상적인 배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편의 진은 8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채집을 했습니다. 아미산 총국은 아편을 생산하는 기간인 8월 달까지 청림리 주민들에게 배급을 주었습니다. 생산된 아편을 다 거두어 갔을 때 이곳 주민들은 곧 ‘우대상품’이 차례지리라 꿈꾸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예년보다 아편이 잘 되었으니 양복지나 대동강 텔레비죤(TV)과 같은 ‘우대상품’의 가짓수도 더 늘어날 것이라는 게 이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우대상품’은 커녕 9월에 받아야 식량조차 공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곳 백도라지농장 김상원 초급당비서가 수십 리도 넘는 량강도 농촌경리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양정과를 쉼없이 오가며 청림리 주민들의 배급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군 당위원회를 찾아가 “중앙에서 아편을 거두어 갔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거칠게 항의했다가 김상원은 직무정지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초급당 비서까지 직무 정지되다 보니 주민들의 배급을 위해 뛸 사람이 없었습니다. 청림리 주민들은 국가배급에 매달려 뙈기밭 농사를 포기했던 자신들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굶주린 주민들은 마을에 남아 있는 가축들을 마구 도둑질하고 축산작업반을 습격해 농장에서 키우던 까지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1994년 10월 9일 축산을 전문으로 하는 제6작업반에서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된 어린이와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가 함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목을 매 숨졌습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던 10월 굶주림으로 죽음의 문턱에 선 청림리 주민들은 아편농사를 지어 ‘우대상품’으로 받았던 텔레비죤(TV)과 고급양복지를 헐값에 팔아먹었습니다. 심지어 돈이 된다면 늄(알루미늄)으로 된 밥 가마까지 팔아먹었습니다.

김상원 초급당비서가 처벌을 받은 상태에서 량강도 무역국과 교섭해 이깔나무 30입방을 주고받아 왔다는 것이 포장지에 소와 양의 머리 그림이 있는 사료용 강냉이 1톤 680kg이었습니다. 통나무 1입방 당 사료용 강냉이 56kg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식량은 통나무를 베어내는데 동원된 농업노동자들과 젖먹이 어린이가 있는 가정들에 조금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청림리 6백 세대의 가정들에 800그램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800그램의 식량은 한 가정이 한 끼 먹을 량도 안됐습니다.

1994년 10월말에 청림리에서 노약자들과 늙은이들을 비롯해 가정세대 7개가 멸족했습니다. 청림리의 식량위기는 보천군에 큰 공포를 불러왔습니다. 군 당위원회에서 현장을 방문했지만 군수예비물자까지 다 털어먹어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해 눈 내리는 12월, 김상원 초급당 비서는 늙고 병든 몸을 끌고 마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작업반장들을 불러냈습니다. 작업반장들과 함께 집집의 문을 일일이 두드려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인기척이 없는 집은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농장에서 젊은 청년들을 불러 모아 굶주린 주민들에게 뜨거운 물을 끓여 나누어 주는 자원봉사도 조직했습니다. 또 농장 진료소에서 비상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아편을 량강도 무역국에 주고 강냉이 가루 2백여kg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가져온 강냉이 가루를 1kg을 큰 밥솥에 넣고 끓여 마을의 모든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1994년 12월 청림리에서 대량아사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가정은 누가 살고 누가 죽는다는 순서가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가정은 온 집안 식구가 통째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고 몰래 보관하던 아편까지 다 팔아 보았지만 식량난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식량이 없는 가정에 오늘 쌀 1kg을 가져다주면 그들의 죽음을 하루 정도 더 늦추어 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95년 1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청림리를 떠나는 14살 소녀와 10살 되는 그의 남동생에게 김상원 초급당비서는 닦은 강냉이 한줌과 손톱눈 크기의 아편을 쥐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지만 누구도 초급당비서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편이 고향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하루 식량이 될 수 있음을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1월의 강추위 속에 “여러분 물을 끓여 마십시다”라고 소리치며 눈보라를 헤치던 김상원 초급당비서의 목소리는 큰 동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량강도 당위원회의 지시로 도농촌경리위원회 수출원천동원사업소에 통나무를 팔아 청림리 주민들을 살릴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눈이 녹는 3월, 몇 백 키로그램의 강냉이가 지원됐지만 이미 마을주민들의 4분의 1 이상이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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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량강도 보천군 지역의 참상에 대한 탈북민의 증언.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95-00_01202816.jpg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된 고난의 행군 시기 참상[44]
1997년 10월 2일, 북한 주민들의 굶주리는 모습이 미국 CBS 뉴스에 방영되며 전 세계에게 큰 충격을 줬다.(KBS, MBC) 당시 북한을 취재한 기자 피터 밴 센트는 북한 인구의 5분의 1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하며, 북한을 돌며 북한의 고난의 행군으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촬영하였다.

북한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22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지만 황장엽의 회고록[45]을 근거로 300만이 굶어 죽은 것으로 주장했다. 2008년 UN에서 조사단을 파견해 직접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결과로 추정한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자는 의외로 북한 측주장에 가까운 약 30~40만 명이다. 물론 그래도 많은 숫자임은 확실하다. 당장 이 당시 인구 17만 명의 김책시에서만 하루에 무려 200명이 죽어나갔을 정도로 심각했다.

다만 이러한 과거 추계는 북한의 공식적인 인구 조사 발표를 신뢰한다는 가정하에 세운 것으로 현재에는 그 추정치의 기반이 되는 북한 인구 자체 발표가 불신을 받는다. 실제로 북한의 통계 자체는 신뢰성이 매우 떨어지므로 북한 인구는 북한사람도 실제로는 모른다. 인구통계는 중앙당 간부 중에서도 고위직이나 해당 분야 정책 실무자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는 아사자를 100만 명 미만을 주장하는데 300만 명 이상 사망하려면 1000만 명 이상이 신체적 정신적 불구가 되기 때문에 300만은 가능한 수치가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주기자는 북한 인구를 500만 정도 부풀린 약 2,050만으로 추정한다. 이 수치대로라면 1990년대에도 상당수의 통계조작이 있었고,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추산한 한국 통계청과 국제사회의 추계치도 상당부분 실제를 반영하지 못한다. 2021년 초 북한 외교관 출신 김동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NISS) 수석연구위원은 당시 실무자로[46] 국제 사회 식량지원 업무를 담당했다고 밝히며 배나TV에서 1994년 북한 외무성 1부장 강석주가 김정일에게 제의서로 약 50만 명이 이미 아사했고 더 많은 아사자가 예상된다는 내용의 식량부족을 보고 했고, 북한에서 국제사회에 피해롤 호소하며 밝힌 사망자수는 80만이나 실제로는 100만 이상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또한 김동수 박사도 북한 공식 인구 통계에 대해서 발표되지 않은 내외부의 자료를 기반으로 실제 북한 인구 추정치는 북한의 공식 인구보다 최소 100만에서 200만정도 적다고 밝혔다. 서울대 사회학과 박경숙 교수도 또한 북한 통계를 신뢰할 수 없다고 보며 북한이 발표한 자료는 여러 면에서 체계적인 오류가 있다고 의심한다. 인구 손실은 300만보다 훨씬 적은 90만 정도로 예상했다.통일부 북한통계 해설자료

하지만 인구의 5%가 사라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비교하자면 북한 공식인구가 1993년 기준 2,100만 명이고(실제로는 더 적었을 가능성도 높지만), 아사자는 현재 추정치론 100만 명 내외이니 당시 북한 인구 약 5프로가 굶어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간신히 먹고는 살던 1970~198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북한 성인은 그래도 허우대가 비교적 좋은 반면, 고난의 행군 이후 출생자들은 키와 체격이 아주 왜소하다. 2006년 11월 21일자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2005년 기준 남북한 키 차이는 남자 6.9, 여자 4.2cm가 됐다. (참고)

이 때의 청소년들은 성장이 매우 느려서 탈북 관련 TV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10대 후반의 고등학생이 한국의 10대 전반 초등학생과 비슷하였고, 10대 중반의 여학생은 아예 한국의 8~9세 정도의 성장을 보일 정도로 영양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북한 고아원 출신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외신 기자들이 북한의 고아원 등 아동 시설을 취재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비쩍 말라서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의 아이들이 찍힌 것이 많았는데, 이런 아이들이 (북한 기준으로는)그래도 그나마 건강한 아이들이라고 해서 스튜디오를 경악시켰으며, 이보다 더 심각한(즉 죽기 직전의 상태인) 아이들은 아예 사진은 고사하고 공개조차 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발육부진에 더해 임산부의 영양실조로 인한 기형아, 장애인의 발생률도 이 때 기점으로 급증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이 들이닥친 덕에 노동가능 인구와 징병가능 인구가 충격적인 수준으로 급감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해버렸다.[47]

더 심각한 것은, 대약진운동 가지 병크로 인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으며 수습 또한 고난의 행군과 비교하면 단기간에 성공한 반면, 고난의 행군은 무려 만 5년에 걸쳐 이런 엄청난 기근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워낙 구멍이 크고 광범위해서 어디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반 세기 동안 내부 자원을 있는 대로 쥐어 짜내고 갉아먹으며 쌓여온 적폐가 마침내 폭발해 발생한 기근이니, 단기간 내에 수습이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북한이라는 나라 전체가 아사 직전이었다고 봐야 한다. 오죽했으면 고난의 행군 당시 70대 전후의 노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왜정 때보다 더 어렵다, 왜정때는 왜놈들은 쌀밥먹고, 우리는 잡곡이라도 먹었는데,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마오쩌둥마저 권위는 유지했으나 실권을 크게 상실하고, 뒷방 늙은이 직전까지 전락할 정도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도, 오직 외부에만 책임을 돌리고 사실상 정권 핵심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북한의 정치 체계가 정상적인 수준의 평가 기능은커녕, 최소한의 판단 능력조차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이 때부터 북한 정권이 어떤 집단인지 깨닫게 되었다. 특히 한국 내 북한에 대한 환상은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깨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지나친 영양 결핍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정도다. 성인에 진입한 90~00년대 출생자들의 키가 머리 하나 크기 감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21년 현재 10~20대에 신장이 150cm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48] 이들을 발육부진 세대, 미공급 세대라고 부른다. 출생자들의 낮은 신장으로 인하여 이들의 군 복무 시기부터 대폭 하향된 신검 신장 기준이 확인이 되면서 이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 대재앙은 북한의 교육에도 커다란 악영향을 줬다. 이 시기를 겪은 아동들, 그러니까 1990년대 출생자들의 문맹률이 이전 세대에 비해 증가했다. 이 시기에 태어난 절대 다수의 탈북 청소년이 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이 정도까지는 과장이다. 출석률이 한때 25% 가량으로 떨어지기도 했으나 사람들이 장사를 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 한겨레학교에서 30명 남짓한 탈북 청소년들이 공부를 하는데, 그 가운데 1~2명 정도가 문맹자로 나왔다고 한다. # 다만 문맹률이 0에 가깝다는 과거에 비하면 이 정도도 급격히 늘어난 것은 맞다.

당시의 북한 관련 통계를 보면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인데, UN 추산 1인당 GNI가 1989년 약 900달러 수준에서 1998년에는 500$수준으로 급감했고, 이후 2006년까지 900달러대를 회복하지 못했다. 2019년까지는 수치상으로는 대략 1990년대 초반 수준으로 경제 상황은 상당히 나아졌고 시장도 크게 활성화되었다. 주민들이 경제적 통제를 상당부분 무너트려 2010년대 후반에는 하루 세 끼 먹는 주민이 90%가량 된다는 조사도 있다. 탈북자 대상 조사지만 평양 출신이나 신의주, 평성 같은 잘 사는 동네에서 온 사람들도 적기에 북한 전역의 수치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처음 언급한 1960년대보다 나은 부분도 있어 2010년대 후반이 군인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북한 역사상 가장 서민이 살기 좋다고 할 수도 있다. #

하지만 시장화의 부작용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져 빈부격차가 급속히 커진 데다 사회 복지 제도와 배급 체계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으로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장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해 출세한 계층[49]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의 사정은 군인, 농민, 군수공장 노동자는 오히려 국가에 얽메여 가난하고, 그렇지 않은 계층은 사경제로 인해 의외로 잘 산다. 2010년대 후반의 말을 들어보면 "결혼식 전문업체", "목욕탕"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사와 뇌물 등으로 주민이 방해를 이겨낸 것이다. 탈북자들은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탈북한 사람이 많고, 미디어에서도 대북제재 효과 같은 예외적 문제를 제외하면 식량지원이나 학정을 강조하기 위해 식량난을 과장시켰기에 이 시기의 북한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한에 각인되었다. 정치인이나 식량을 지원하는 단체를 제외하고 경제만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업상 필요로 식량 수요가 과장되어 나타난다는 주장도 한다. #1#2 그래서 일종의 북한 주민에 대한 혐오까지 조장되어 탈북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한다. # "북한 이탈 주민이면 당연히 어렵고, 힘들게 살았을 것이라는 1990년대 이미지가 일반 국민들한테는 크게 각인이 되어 있어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북한 이탈 주민들에 대한 편견, 차별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고요."라고 주장한다. 북한 주민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경제 상황을 시장 경제로 나아지게 했는데 외부에는 이것이 잘 알려지지 않아 마치 가난해도 그것을 극복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로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2020년에는 군병력이 주는데도 신병 징집 기준을 6cm 높였다는 주장도 있다. 2006년만 해도 2025년에 차이가 더 벌어진다고 하였으나 이런 변수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

출산율을 감소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자신이 가난하기는 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가난한 것은 모르던 시대였다. 그냥 근대 국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정도로 여겼다는 것으로,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당시의 동유럽과 달리 출산율이 심하게 감소하지는 않았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국가를 포함하여 경제성장을 빠르게 이룩하던 시기 출산율이 급감하고, 산아제한정책에도 호응도가 높았다. 북한에서 가장 빠르게 합계출산율이 감소하던 시기는 1970년대로, 이때 4명대를 기록하던 합계출산율이 2명대로 줄어들었다. # 1995년경까지 감소를 하다가, 그 이후에는 거의 2명대 초반~1명대 후반인 정적인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몽골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출산율로, 탈북자들은 북한은 사회 안전망의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가정을 꾸린다는 말을 한다.

김정일은 이 처참한 결과에 대한 책임과 관심을 애먼 곳으로 돌리느라 급급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심화조 사건이었다.

1997년에 김정일이 정식 집권한 후 이듬해부터 '강행군'과 '구보행군'으로 변경했고, 2000년 북한은 조선로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화폐개혁으로 알거지가 속출하여 이렇게는 못 산다고 집단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난의 행군을 끝낸 것은 주민의 의지지 김정일의 대단한 정치적 수완이 아니였다.[50]


5. 대한민국의 반응[편집]


일단 한국의 민간에서는 북한의 기아 사태가 사실인가 아닌가로 언론사간에 키배가 벌어졌다.

예전부터 주류 언론은 북한의 어려운 경제 사태나 식량난에 대해 심심하면 보도하였는데, 국내의 종북 진영에서는 그런 보도에 대해 습관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우월 선전 목적의 거짓 흑색선전이라고 보고 비판하곤 했다.이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북방 외교 특히 한중 수교로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중국에서 수집되는 정보가 속속 국내에 들어왔으며 다수의 탈북자도 함께 유입되었으나 진보라고 자처하는 종북주의자들은 과장내지 허위보도라고 치부했고 고난의 행군 초기에도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못 믿는다며 진위 논쟁판이 벌어졌다.

당시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대학운동권은 정치색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반미 민족주의 세력이 강했고, 또다른 이념 좌파 측에서는 아직도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이념과 체제의 모순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외신에서도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 보도하자, 한겨레는 정연주 기자를 북한에 보내 현지 취재하고 북한의 경제난은 조중동이 일부 조선족들과 결탁해 만들어낸 가짜 뉴스라는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이 논쟁은 대규모 탈북사태와 그에 그 와중에 국경에서 익사한 시체들의 사진들이 공개되어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어질 때까지 한참을 계속되었고, 지금에도 그 진영논리로 선동을 하던 자칭 진보들의 반성은 전혀 없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한강의 기적 - 3저호황 - 1988 서울 올림픽 성공 - 북방정책 성공 - 공산권 몰락 - 문민정부 출범 등으로 북한과의 체제대결에서 승리했다는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고 국민감정도 문민정부가 출범한 가운데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북진멸공통일을 부르짓는 여론은 거의 없었다. 특히나 북한이 1993년에 NPT(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했지만, 곧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미 핵합의를 이루고 김일성과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도 추진되었다가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되었다. 그렇기에 고난의 행군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국 정부와 여론은 동족을 지원하여 살려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1990년대 중반에 경수로로 수조 원을 퍼주고도 북한의 핵개발 소식이 속속들이 전해지자 보수진영에서 슬슬 퍼주기 반대 여론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고난의 행군때 반공 극우 이데올로기로 우파 진영에서 식량지원을 반대한 게 아니라 진보 진영에서 고난의 행군과 식량난을 부인한 게 사실에 가깝다.

1994년 김일성 사후 조문 파동으로 냉랭해지던 남북관계는 1995년에 북한이 식량난으로 쌀 지원을 요청하면서 반전할 기회가 찾아왔다. 동년 5월 26일 나웅배 통일부총리가 "민족복리 차원에서 어떤 전제조건이나 정치적 부대조건 없이 북한이 필요로 하는 곡물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 하고 발표한 후 6월 17일부터 사흘 간 비공개 회담을 진행해 남한이 북한에 1차로 원산지 표시 없이 쌀 15만 톤을 무상 제공키로 합의했다.

이걸로 남북관계에 새 물꼬가 트일까 싶었으나, 얼마 뒤 '인공기 사건'이 훼방을 놓았다. 이 사건은 전후사정이 생략된 채 보수언론에서 "북한측이 생트집 잡아서 쌀을 실은 남한 배에 인공기를 걸라고 강요한 것"이라고 보도해 파문이 인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원섭 전 한겨레 논설위원실장의 1997년 저서 <새로운 모색>에 따르면 전말은 아래와 같았다.

남북 양측 대표들은 국기게양에 대해 대북지원선이 태극기와 인공기를 모두 게양한 채 항해하다가 입항 후 모두 내리기로 구두로 합의하였는데, 원래 국제 관례상 외국 영해를 항해하는 선박의 경우 선미에 소속국가 국기를, 중앙 마스트에 영해국 국기를 각각 걸도록 하는 거지만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이같이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의내용은 어찌된 영문인지 선원들에게 전달이 안 됐으며, 통일원과 해운항만청조차 비밀주의를 너무 지킨 탓에 구두합의 사실을 몰랐다.

당시 씨아펙스호 선장은 뱃길 안내차 나온 북한 도선사가 가져온 인공기를 국제 관례대로 중앙 마스트에 단 채 청진 내항으로 접근했는데, 청진항 관계자가 놀라 선미에 걸린 태극기를 모두 내리도록 강요했다. 이에 씨아펙스호 선장도 국제 관례를 내세우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해가 지자 모든 기를 내렸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중앙 마스트에 인공기를 걸고 쌀을 하역해야 했다. 작업 후 돌아가려 하다가 조선삼천리총회사 과장이 허겁지겁 달려와 "아래 일꾼들의 실무적 착오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유감이다."라며 이제야 베이징 측 합의사항을 전달받았다며 사과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정부는 즉각 합의사항 위반에 대해 항의했다가, 북한측이 조선삼천리총회사 명의의 사과문을 보내오자 이를 수용했다. 그러고도 정부는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북행중이던 대북 쌀지원선들의 뱃머리를 돌리게 하고는 북한 당국자의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가 없으면 쌀 제공을 중단한다고 강경 입장을 밝히자, 북한이 전금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의 명의로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하여 일단 수습됐다.

이 사건 뒤에도 파동은 끝나지 않았다. 대북 쌀 지원선 삼선비너스호 일등항해사가 청진항 사진을 찍다가 북한에 정탐 행위로 몰려 억류되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 항해사는 안기부에서 보안교육을 받고 청진항 입항 후 카메라를 봉인하는 절차를 거쳤는데도 몰래 숨겨둔 다른 카메라로 찍어서 발각된 것이다. 7월에는 안승운 목사가 납북되는 사건[51]이 일어나며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 사건 역시 한국 정부가 쌀 지원을 차질없이 하겠다고 약속하며 공식적으로 사과해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위와 같은 두 가지 사건은 남북간에 감정적인 앙금을 낳아 차후 회담을 어렵게 했다. 9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3차 회담에서 북측이 쌀 추가지원 규모에 대해 우선 협의하자고 하자, 남한이 86우성호 선원 송환 및 회담장소 변경을 주장하며 양측이 팽팽히 맞서다 결국 결렬되었다.

대북 쌀 지원 문제는 북한이 처음으로 일본에 쌀 지원을 요청하자 이를 알아차린 한국 정부가 남북 당국자 간 대화 재개 기회를 마련키 위해 쌀 지원을 자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처음엔 어떠한 조건 없이 쌀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북측의 막나가는 행동으로 국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났고 정부에서도 회의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즉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나 북한 특유의 막무가내식 행동으로 인해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한 것이다. 일각에선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쌀 지원을 하여 김영삼의 정치적 성과로 직결시키려 했다고도 해석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쌀 지원이 국익에 도움 안 된다고 판단해 대북정책을 강경 일변도로 되돌렸고, 10월 7일 코렉스부산호 출항을 끝으로 대북 쌀 지원은 끝났다. 김영삼 대통령도 <뉴욕타임즈> 회견에서 "더 이상 남북회담은 없다"고 강경대응했고, 북한 역시 뻗대는 행동으로 일관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도 1996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북한이 변화하지 않는 한 추가적 대북지원에 반대한다고 입장을 강조했다. 경실련 논평도 참고. 반면 북한은 북한대로 호전적 성명을 연일 내보내며 국제구호단체 등의 지원을 받은 채 기어이 버티며 남한에 대한 적개심을 계속 보여왔다.

사실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1994년에 있었기는 했다. 1994년에 남북관계가 급격히 경색되었다가 지미 카터가 중재를 하면서 급속히 가까워졌고, 그 덕택에 서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는데, 이때 남한 측에서 당시 북한 경제상황이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북한의 군축을 유도하고, 그 대신에 고속도로 건설 지원, 발전소 건설, 철도 현대화, 남포공단 개설 등의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었다.[52] 당시 북한도 식량배급량이 줄어드는 등의 상황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으니 받아들일 가능성 자체도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고령에 지병이 있던 상황에서 무리를 하다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틀어졌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한 결과로 현재까지도 여파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으로써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6. 선군정치 등장[편집]


고난의 행군 와중에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시도한다. 공식선포는 1996년이지만 김일성이 죽자마자 사실상의 계엄령이나 다름없는 무자비한 총질을 시작했다. 배급이 끊어지니 로동당일군이나 보위부 지도원들조차도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뇌물로 범죄를 무마하고 창고의 국가재산을 팔아먹기에 이른다. 간부들이 먹거리와 돈 몇 푼에 타락하고 통제가 유명무실해지니 주민들은 공장이나 사업소 농장에 출근하지 않고 먹거리찾아 나물을 캐고 파철(고철)을 줍고 공장 설비를 뜯어다가 헐값에 밀수해서 팔아먹는 형편이고, 협동농장은 밤마다 약탈당했다. 이런 분위기에 평양의 고위급 당간부들조차 술자리에서 체제가 이런 식이면 한 두 해면 무너진다고 여길 정도로 포기 상태였고 김정일은 자기의 지시가 지방은커녕 중앙에도 먹히지 않자 로동당일군과 국가보위부까지 불신[53]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내는 여태까지 조선로동당에 신세진 일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다!"고 남탓을 시전하며[54] 사회 전반을 '총대로 다스릴것'을 명령했다. 지금까지 협동농장을 털다 걸리면 1~2년의 로동단련형에 심하면 도검찰소와 재판소를 거쳐 징역에 해당하는 로동교화형을 받았으나[55]보위국을 동원하여 도둑질은 현장 사살하고 도주범 체포 시에는 공개 총살을 시켰다. 그럼에도 도적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인민보안성(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을 시켜 심화조 사건을 공작함과 동시에 지방에는 보위사령부(보위국)를 동원하여 지방일군들의 군기를 잡아 본보기로 간부들을 처형했다. 김정일은 “간부들 속에서 일상화된 부패타락과 패배주의를 뿌리뽑아야 한다”며 보위사령부에 “총소리를 내야 한다”며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공개처형 방식도 기존의 총살 방식을 변경해 김정일의 지시에 "머리가 썩은 자들은 그 대갈통부터 날려버려야 한다"기존에 세명이 세발씩 머리 가슴 배에 한발씩 쏘던걸 머리에만 9발을 명중시키는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다. 이는 주민들의 반항심을 억누르고 "나라의 경제가 파탄나고 인민생활이 어려워진 것이 김정일의 정책을 왜곡 집행한 일부 간부들 때문이라고" 보여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심화조 사건이 채문덕을 토사구팽하며 마무리되었듯이 군 보위사령부(보위국)의 총질도 끝이 나게 되었다. 곳곳에서 어린아이들이 보위사령부식 공개 총살을 흉내내며 놀이를 한다는 보고가 평양까지 들어와 인심이 흉흉해졌고, 량강도에서 굶어서 기력없는 주민들을 집에서 강제로 끌고나와 도망가지 못하게 뒤에서 군병력이 지키며 공개총살을 강제 참관시켰는데 한참 지난 어느날 김정일이 "감히 인민의 등에 총구를 겨누다니!!"라고 펄펄 뛰면서 보위국을 문책하기 시작했다. 결국 "총 소리가 너무 크다"라는 김정일의 지시로 현대사에 유례 없는 선군정치라는 망나니 칼춤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의 채문덕과 졸개들을 죄다 쳐죽이고 사회안전성의 '사'자도 듣기 싫다며 이제 인민을 위해 일하라고 인민보안성으로 명칭을 변경하라고 지시했고, 보위사령부는 보위국으로 조직이 강등되며 간부들도 숙청되었다.


7. 영향[편집]


굶주린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의 탈북을 감행하였고 이 중 일부는 남한으로 입국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국경 지대와 가까운 함경도 출신들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꾸준하지만 적은 수가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넘어왔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인 문제가 주류였다. 경제적 문제로 생존을 위해 북한에서 도망친 탈북자의 존재가 대규모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다. 이 시기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휴전선을 넘어 탈북하는 사람들도 민간인, 군인을 가리지 않고 급증했다. 최전방 군인들조차도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탈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나원 설립이 대한민국 정부 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1995년에서 1996년 사이 이 시기다. 이전까지는 군 정보기관과 국정원에서 탈북자를 전담 관리했으나 민간인 탈북자가 수십~수백 명으로 늘어나면서 통일부 주관 민간인 수용시설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 여성들의 지위가 급상승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장이나 기업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직장 생활이 의무적(?)인 남성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만 것. 거기에 북한 정권은 직장생활을 하는 남성들은 "사회주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동하지도 않는 직장에서 자리를 사수하도록 엄단을 했다고. 얼핏 들으면 황당해 보이지만, 생활총화나 상호 감시 등을 유지하기 위한 방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가정에서 살림만 하던 여성들이 밖으로 나와 장사를 시작한 것이 장마당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의 경제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되었다. 실업자가 되어버린 남성은 '집 지키는 강아지' 내지는 '낮전등'[56] 정도로 그 위치가 전락하고 말았고, 여성은 지위가 높아지자 이혼까지 할 정도로 위치가 높아졌다. 북한 여성 인권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해당 문서를 읽는 것도 좋다.[57]

타이밍이 묘하게도 김일성이 죽고 바로 시작된 재앙이라서 상당수 북한의 장년층이나 일부 탈북자들까지도 "김정일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라는 생각[58]을 가진 이들이 많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배급경제가 유지되었고[59],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았던 1980년대를 겪다가 이런 대기근을 겪으니 더더욱 잊을 수가 없을 듯. 그러나 김일성의 죽음이 일종의 기폭제로 작용한게 아니라 김일성이 살아 있을때는 차마 체면 때문에 지원 요청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죽고 나서야 김정일이 외무성에 지시하여 식량지원에 전폭적인 노력을 다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했다고 한다. 김일성 살아 있던 1994년에 이미 50만이 지방에서 아사했다고 보고가 올라왔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김정일에게 옹호해주기도 힘든 게 김정일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일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아예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실상 북한을 통치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어차피 김일성이 살아있었다 해도 지원을 해주던 동구권이 완전히 붕괴됐고 북한은 이미 1990년부터 지속적인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기록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전면적인 개혁 개방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결과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1993년에 라진항을 특구로 지정하는 등 부분적인 개방 정책을 펴기는 했다. 경제, 외교 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하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더불어 고난의 행군을 쿠바 같은 북한과 동맹이던 나라에서도 "쟤들은 왜 저러냐?" 하고 어이없어한다. 쿠바를 여행한 한국 여행자가 집주인(은퇴하여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전직 외교관)과 만나 이야기한 경험을 보면, 이 사람이 외교관 시절인 1990년대 북한에 가서 지옥을 눈으로 봤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쿠바는 정말 북한에 견주면 천국이지, 저렇게 굶어 죽는 사람 여긴 없잖아" 이렇게 느끼고 와서 쿠바에 대하여 외국이 뭐라고 비난하면서 코웃음 치면 "북한 같은 나라를 보라고 쯧쯧" 이렇게 반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외교관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과 친하게 지낸 피델 카스트로조차 이 일에 대해서는 김정일은 미쳤다고 욕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과 우호를 다졌고 북한과 일단 우호국이라 외교적으로 대놓고 이러진 못했고, 쿠바 정계에서 "아주 민중을 굶겨 죽이네..."라고 미친 놈이라고 꼴보기 싫다는 투로 투덜거렸다고 한다. 카스트로 역시 서방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은 인물이긴 하지만 국가적 위기에 가톨릭교회, 테크노크라트, 라울 카스트로를 비롯한 당 내 개혁파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개혁 개방을 통해 최소한 국민들을 굶겨죽이지는 않은 카스트로가 김정일한테 비교됨은 카스트로에게 굴욕이다. 카스트로 말고도 쿠바 내 정계는 물론 다른 친북국가 대다수도 같은 반응이었다. 외교적으로 차마 뭐라고 말은 안 했어도 내부적으로는 북한이 미쳤다고 수군거렸으니까.

사실 쿠바도 북한과 비슷한 시기(1993년)에 경제 위기를 겪었다. 이쪽도 소련에 설탕을 팔고 석유나 공산품을 받아오며 그럭저럭 지내다가 소련 붕괴로 물가가 폭등하고 식량공급이 대폭 축소되고 전력공급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1994년 반정부 시위와 보트피플 속출같은 난리가 나는 등 원인도 대강 비슷하다. 그래도 쿠바는 유기농 농업이라든지 여러 모로 노력하고, 적어도 북한이랑 다르게 최소한 민중을 굶기는 일은 안 했다. 대대적인 군비 축소까지 하며 배급 제도 같은 기본적인 사회 복지 시스템은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했고, 또한 농업 체계도 개편해서 유기농 농법을 확산시켰다.

북한에서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못하는 사이 쿠바에선 자영업의 활성화 및 관광 산업 활성화 등의 정책을 통해[60] 2000년대엔 상당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일단 1990년대 초반의 경제난을 그럭저럭 극복했다. 그에 반해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와중에 산업 기반 및 사회 복지 체계 자체가 전부 0으로 됐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매우 컸고, 2000년대에 와서 겨우 부분적인 자영업 활성화 조치를 했는데 그마저도 매우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핵실험까지 더해 중국의 호황과 남한과의 경제 교류 확대라는 절호의 기회를 얻고도 경제를 겨우 1990년대 초반 수준으로 돌려놓는 선에 그쳤다. 더욱이 쿠바처럼 군비에 대한 대대적인 축소는커녕 체제 생존과 미국에 대한 유리한 협상의 기회를 얻고자 1998년, 대포동 미사일을 일본 영공을 지나가게 하면서 발사하는 등 공격적인 도발과 핵과 미사일에 대한 투자를 이 때 부터 막대하게 진행했고 선군정치까지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재화가 군수공업에 몰빵되어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로 올인되었다. 마지막엔 김정일 비자금, 쌈짓돈에서도 빼다가 핵개발에 투자할 정도. 이러다보니 북한 경제와 주민들의 삶의 질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같은 시기 러시아나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체제 변화에 따른 혼란과 침체가 생기긴 했지만, 위기라고는 해도 일단 북한에 비할 수준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속에서도 빈곤 문제는 항상 진지하게 다뤄졌고 개선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은 이루어졌다. 애초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니 이 문제를 완전히 방기해버린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 기준으로도 실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탓하지만 당연히 북한이 하는 소리는 그냥 헛소리다. 자력갱생하는 주체적인 나라라면서 타국의 경제 제재가 무슨 상관일까?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상당부분 제공한 김정일은 정작 인민들에게는 자신이 줴기밥(주먹밥)[61]을 먹고 쪽잠을 자며 일한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뒤로는 혼자 산해진미란 산해진미는 전부 처먹어서 지금도 두고두고 까인다.[62]

고난의 행군이 끝난 뒤, 아니 아직도 이어지던 2000년 초반, 경수로 공사로 북한에서 1년 동안 머물던 만화가 겸 전기기술자 오영진이 목격담을 그린 만화 <남쪽손님>을 보면, 아침을 굶고 온 북한인 노동자가 점심을 먹는데(동석하지는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밥을 푸는 것만 볼 수 있었단다) 적어도 여기 노동자들은 밥이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그런지 엄청나게 퍼먹는데, 정말 남측 사람들이 경악할 정도로 밥을 식판이 넘쳐나도록 퍼가서 먹더란다. 하지만 아침이나 저녁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점심만 엄청나게 폭식하니, 노동자들은 점심시간 끝나면 비몽사몽 식곤증으로 제대로 일하지 못하며 공사에 그리 도움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


8. 기타[편집]


  • 위에서 고난의 행군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대강 서술하긴 했지만, 사실 '왜 하필 1995년이었는가?' 하는 질문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답변은 없다. 일단 파멸적인 식량난은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조짐이 보였고 1993년부터 지방에 아사자가 보고되었지만, 국내에 알려진 게 1995년이긴 했다. 즉 이미 아사자가 속출하던 북한은 국제 사회에 1994년부터 식량지원을 구걸하고 다녔다. 그것도 원수 취급한 영국, 미국유엔에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은 어차피 북한이라는 나라는 건국 이래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아본 적은 없었고 특히 고난의 행군의 핵심으로 알려진 식량난 역시 198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는데, 어쩌다가 약 10년 이상을 버텨오다가 이 시기에 동구권소련에 그간 무상지원과 소련과 동구권에 조잡한 경공업 수출로 물물교환으로 얻어내던 석유나 기계류 수입이 동구권 공산정권과 소련 해체하며 달러 없이는 결제가 불가능해졌고 이를 대책없이 방치하다가 국가 체제 자체가 동반 붕괴하는 현상이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고 북한 체제에 대한 조사와 평양을 제외한 북한 지역 주민들의 90년대 당시 삶을 연구해야 명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의문에 대해 제기되는 설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현상은 기존의 대기근들과는 차별화되는 사태인 고로 김일성의 사망과 이로 인한 국가 행정의 일시적 마비, 도덕적 해이 등의 사회적 요소가 결합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기는 하다. 한편 공산주의식 혁명 의식 실종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 20년 간 없는 살림으로 경제를 일으켰는데, 갈 사람은 다 가고, 2대는 혁명 정신은 없고, 그렇다고 일하자는 동인도 없고... 그러니 자꾸 정체되었다가 김일성 사후에 뻥 터졌다는 것.

  • 위의 1995년에 갑자기 발생했냐는 이유와는 별개로 이러한 상황이 일어난 것에 관해 거시적인 관점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요인은 바로 1980년대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경제권의 붕괴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하던 동유럽의 공산 국가들이 경제력이 약한 북한 등의 국가에게 물물교역 형식으로 원조를 해주고 있었는데, 북한이 수출한 제품은 품질이 너무 낮아 쓸 수도 없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꾸준히 북한 제품을 사주고 북한에 물품을 공급해주고 있었던 것. 그러나 이런 구상무역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자 경제력이 떨어진 북한으로써는 해외의 식량을 제값에 수입할 돈이 없었다. 미국의 농업 회사 카길과 밀을 받고 아연을 넘겨주는 거래를 시작했으나, 북측이 광석을 제때 준비하지 않자 카길도 밀을 실은 배를 멈추고 거래를 끊었다.#

  • 1987년부터 계속 방영한 북한의 장수 만화영화였던 <령리한 너구리> 또한 고난의 행군을 피해가지 못하고 1995년부터 3년간 공백기를 뒀고, 100부작을 목표로 했던 <소년장수>도 1997년 이후 공백기를 뒀다. 결국 돈이 급하니 해외 하청으로 돌린 것이다.

  • 일부 북한학자들은 저런 기근을 겪고도 북한이라는 국가가 붕괴하지 않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북한이 자체의 문제 때문에 붕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63] 그러나 이때까지는 북한의 핵개발이 표면화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북 제재를 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고 중국 역시 북한의 완전한 붕괴는 바라지 않았으므로 암암리에 북한을 돕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64]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사는 줄 알았다는 등, 현대 정세를 조선시대~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비슷하게 여기는 식의 세뇌를 원인으로 드는 시각도 있다. 탈북민 출신인 주성하 기자는 만일 북한이 제 2차 고난의 행군으로 들어간다면 견뎌내지 못 한다고 밝혔다. 2차 '고난의 행군'은 로드맵에 없었다.

  • 2017년 영화 강철비에서도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고난의 행군에 대해 언급된다. 작중 메인 악역인 리태한 정찰총국장(김갑수 분)이 쿠데타를 일으켜 평양을 접수한 뒤 북한의 핵무기 발사 암호를 알아내려고 "300만 명이 굶어죽어가면서도 기어이 핵 로켓트를 만들어 냈는데 너희들이 암호를 풀지 못 하면 우리나라에는 핵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며 북한의 해커병들을 닦달한다.

  • 2018년 영화 공작에서는 시체가 거리에 무더기로 쌓인 장면이 나오는 등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이 때 북한 사람들이 고양이를 많이 잡아먹어서 지금도 북한의 도시 길거리에는 길고양이가 거의 없으며, 탈북자들은 한국에 와서 길고양이가 많은 것에 놀란다고 한다. 물론 먹을 것이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먹은 것이며, 북한에서도 고양이고기가 일반적인 음식은 아니다.

  • 북한 관련 방송 프로그램 중 하나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탈북민이 고난의 행군때 북한에서 본 광경 중 하나로 언급한게 있는데 한 아이가 "나는 우리 엄마 죽어서 떡먹는다"라며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 고난의 행군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 다른 탈북민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이탄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은 경험을 언급했는데. 이탄과 옥수수가루를 섞어서 국수를 만들어 먹으면 소화가 되질 않으니 배는 안 고프지만 배출이 되질 않아서 항문이 막혀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더욱 충격적인건 김정일이 이탄 음식을 더욱 장려했다고...# 심지어 식민지를 경험한 어르신들조차 고난의 행군보다도 식민지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평가했다.[65] 젊은 세대조차 글과 그림으로 배우기만 했음에도 끔찍했다[66]고 하는데 그 식민지를 몸으로 경험했던 어른들이 그렇게 말을 하며 화를 냈다는 것.[67]


9. 2차 고난의 행군[편집]


우리는 그 어디에 기대를 걸거나 바라볼것도 없으며 오직 수백만 로동당원들, 특히는 수십만 당세포비서동지들의 심장을 믿을뿐입니다.

우리 당을 어머니당으로 믿고 따르면서 자기 당을 지키려고 수십년세월 모진 고난을 겪어온 인민들의 고생을 이제는 하나라도 덜어주고 우리 인민에게 최대한의 물질문화적복리를 안겨주기 위하여 나는 당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하여 각급 당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6차 세포비서대회 폐회사 중


2021년 4월 8일, 김정은이 조선노동당 제6차 세포비서대회 폐막식에서 고난의 행군 재개를 선언했다.#

이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지도부를 겨냥한 강화된 대북제재와 2020년, 북한을 강타한 마이삭하이선폭우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으로 인한 북-중 국경봉쇄로 인해 북한의 공식 무역 규모가 자그마치 73.4% 급감하고# 비공식 무역도 완전히 차단하여 민생 불안도 높아진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2019년 북미정상회담에서 미국으로부터 대북제재에 관한 양보를 얻어보려는 김정은의 외교 전략이 무산되자 김정은은 자력갱생-정면돌파전으로 미국의 대북제재를 극복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2020년 들어서 김정은 정권에 잇달은 악재가 쏟아졌고 북한의 경제 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김정은은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를 앞두고 있었던 지라 성과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68] 80일 전투까지 개시했지만 북한의 경제 사정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전략) 그러나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수행기간이 지난해까지 끝났지만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되였습니다.
사회주의건설에서 부단한 새로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우리의 노력과 전진을 방해하고 저애하는 갖가지 도전은 외부에도, 내부에도 의연히 존재하고있습니다.(후략)출처
김정은의 8차 당대회 개회사.

결국 김정은은 지난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2016)에서 수립된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수행의 실패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급기야 2월 경, 당대회가 끝난지 얼마 안되어서 노동당 전원회의가 소집되었고 김정은이 대놓고 분개한 채로 삿대질을 하고야 말았다. 김정은이 얼마나 초조한지 알 수 있는 대목으로 이 자리에서 김두일 당 경제부부장이 한 달만에 경질되고야 말았다. 내부 동요를 억제하기 위해 공포 정치를 다시 재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주민 불만의 우려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김정은은 결국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 재개를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불만 우려가 높아지는 경우 국가적인 위기 분위기를 조성해야 주민들은 힘들어서 다른 생각도 못하고, 더불어 경제계획도 어느 정도 달성하기 쉬워지는 효과가 있다.

체중 감량을 애민정신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북한의 경제 지표는 결코 나아지지 않고 있다. 북한의 정치관 중 보수적인 쪽에서는 지도자의 사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위엄을 위해 마치 임금처럼 사치를 부려야 한다. 그것마저 포기하면 주민들은 당국의 의도대로라면 가슴이 아파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진보적인 쪽에서는 살을 빼야 일을 잘하는 것이 맞다.

급기야 7월 5일, 김정은이 직접 이례적으로 "인민들의 식량 형편이 긴장해지고 있다."라며 식량난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7월 27일에 열린 전국노병대회에서 전쟁과 같은 시련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 UN농업기구에서도 북한은 86만 톤이 넘는 곡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차 고난의 행군도 북한 체제 존립에 위협을 주고 있다. 북한의 경제 성장률은 2020년 기준 -4.5%를 기록했고 이는 1997년 이후 최대의 낙폭이었다. 그리고 북한의 GDP는 31조 4000억원으로 김정은 집권 초기인 2012년 기준 33조 8천억 원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감소되었다.# 문제는 북한이 중국을 포함한 세계의 백신지원을 거부하는 상황이라 북한 경제의 숨통을 죄는 봉쇄 국면이 언제 끝날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점이다.[69]

게다가 지구온난화가 야기한 이상 기온 현상은 북한 정권에도 위협이 되고 있다. 당장 2021년 7월 이후 폭염 때문에 북한 대부분 지역에서 농작물 피해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북한의 식량 사정은 매우 악화되어 군용비축미까지 풀었으며 북한 당국은 미국을 두고 대화재개 조건으로 고급 양주, 양복 등의 생필품(...)에 가해진 제재를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그만큼 북한 권력층에 대한 충성자금이 동이 나고 있다는 이야기.

8월이 되자 결국 북한 당국이 우려했던 일이 벌여졌다. 집중호우로 인한 큰 피해가 생겨난 것. 이로 인해 식량 생산에 더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고난의 행군 당시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유학중이었기에 고난의 행군의 처참함과 끔찍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2차 고난의 행군을 선언했다는 사실에 고난의 행군이라는 악몽을 경험해보지도 않은 녀석이 끔찍한 기억을 주민들에게 강요한다며 반발심을 보였다.

그나마 북한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이 다시 오더라도, 심지어 2차 고난의 행군이 1차보다 더 심각한 식량위기가 온다 할지라도, 이미 1차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의 생존법이 있기 때문에 1차만큼 죽어나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1차 고난의 행군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던 이유는 북한 정부의 배급을 믿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후폭풍이 지나간 이후로는 북한 정부를 전적으로 믿는 주민들은 거의 다 사라졌고 각자도생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 세대들은 장마당으로부터 모든 것을 충당 및 해결해왔기 때문에 당에 대한 충성심은 전무한 수준인데 이 세대가 훗날 중장년층이 되었을 때 과연 체제가 유지될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1차만큼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될 뿐이지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2019년 말에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하여 2020~21년에 전세계를 휩쓸어버리면서 때로는 어업과 염전 운영 등을 못하게 아예 막아버릴 뿐만 아니라 코로나에 대해서 백신을 거부하는 기행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 북한에 대해 짜증이 나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도와주던 중국 역시 코로나로 입은 경제적 타격은 상당히 심각하기 때문에 북한에 크게 지원해줄 여력이 없다.[70]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식량을 지원해 주었음에도 북한은 그걸 거부하고 셀프 봉쇄를 시전하며(...) 봉쇄를 풀지 않고 있다.

심지어 코로나가 장기화와 함께 계속해서 변이를 일으키자 북한은 백신 대신 자체봉쇄를 실시해버리면서 장마당은 커녕 외출 그 자체를 극도로 제한시킨 탓에 안그래도 힘든 경제활동에 제약을 받음으로서 장마당이 크게 축소되었으며, 북한에서는 코로나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는 장티푸스 등이 유행함에 따라 과거 1차 고난의 행군 당시 못지않은 사망자가 나오거나 혹은 그 이상 나올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보다 2018년부터 정식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전례가 없을 정도의 고강도 대북제재가 여전히 건재하고, 그나마 주민들의 생활을 위해 풀어주었던 부분도[71] 북한 당국이 자체적으로 막으면서 온갖 전염병들이 넘쳐나며 죽는 사람들이 넘치는 등 평양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한 걸 넘어서 가히 지옥이다. 문재인 정부가 130억원 가량의 식량 지원을 추진했지만 1년 넘게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유행한 2020년 12월까지 거절하여 이 지원을 포기하기도 했다. # 대북지원을 북한 정부가 거절했다는 것을 주민이 모르는 상황에서도 내부의 반발이 커지지만 그것보다 몇 배 심하게 탄압하며, 윗선의 탄압을 주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대가로 노골적인 혜택을 베풀어서 반발을 차단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군국주의적 행보도 심해지는데, 지방에서는 무슨 소리냐며 매우 싫어하지만 지방과 비교해서 큰 혜택을 받고, 지방의 자원을 가져가는 평양에서는 든든하다며 환호하고 있다는 취재도 있다. #[72]


10월 28일, 국가정보원이 국회정보위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식량난으로 인해 전군, 전민 총동원 체제에 돌입하고 있으며 물자난으로 인해 지폐를 발행할 잉크와 용지조차 부족해져 돈표를 발행하고 있으며[73], 게다가 의약품 부족으로 인해 장티푸스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2022년 6월에는 북한 거주 주민과의 인터뷰 영상이 유튜브로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코로나로 인한 봉쇄조치 때문에 30가구 기준 하루에 3명이상 죽어나가고 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북한 당국에서 이러한 내부사정을 외부에 유출시키는 것만으로도 총살을 시킨다는 증언까지 있을 정도. 사실상 1994년의 끔찍한 참상이 다시 반복되는 듯. 게다가 현재 중국과 러시아 역시 코로나와 전쟁으로 인해 자국민에 대한 식량조차 부족한 상황인지라 북한에 지원을 할 여유도 없어 더욱 심각한 상황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 2022년 8월, 김여정 등은 날리지도 않은 대북전단[74]이 코로나를 유행시켰다는 등 불만을 외부로 돌리며 남탓을 하려고 들었다. 김정은은 와병 같은 고생을 했다고 주장하여 감성정치를 꾀하기도 했다.

9.1. 공포정치 재개[편집]


코로나를 핑계로 국경까지 차단하고 북중국경에 폭풍군단과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 도검찰청 인민위원회 합동 그룹빠로 비법월경자 밀수자는 물론 짐승까지 국경연선 접근시 발포하고, 중국산 손전화기 사용자를 체포하며, 관련자 가산몰수/ 정치범수용소 가족 추방 연좌제까지 시행하며, 모든 지역에서 109 상무조가 주파수 도청으로 한국 드라마와 영화 음악 등을 적발하여 공개총살 정치범수용소까지 보내는 극악한 탄압을 시행중이다.

유엔 보고관들 “북 국경지역 총살 등 사형제 해명 요구”

‘총살… 총살… 총살…’ 북한식 코로나 방역법

외부문화 동경하는 北 청년들…김정은 "총소리를 내라” 명령

"수확물 훔치는 자는 쏴도 좋다" 협동농장에서 실탄 배포, 24시간 경비 돌입... 곡물 유출 경계

북한 '한국 드라마 유포 시 처형'... 유엔, 대북서한 발송


10. 참고 자료[편집]




10.1. 관련 영상[편집]


【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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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외에도 한 탈북자는 질긴 고기라도 맛있다며 남한 와서 고맙게 여기고 먹는다고 지인들에게 밝힌 바 있는데, 고난의 행군 시절 정말로 썩은 고기라도 먹었던 기억이 있기에 질긴 고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시절 지옥을 겪어본 탈북자 증언을 보면 그야말로 입에 넣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죄다 먹었다는 증언들이 나온다. 그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일부 탈북자들은 과수원에서, 농촌 일손 돕기 도중, 심지어 가로수에 열린 열매만 봐도 따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탈북자들이 통분히 여기는 것이 바로 음식물 쓰레기인데 이구동성으로 "북한에는 이런 음식 먹고 싶어도 못먹는데 이걸 이리도 버리다니..."라고 말을 잇지 못한다.[2] 다만 교차검증되는 자료에 의하면 그때가 김일성이 힘들게 살던 시절이 맞긴 하다. 과대포장된 면이 있기는 하나 어쨌든 간에 독립운동이든 마적질이든 자칫하면 일제에 잡히거나 밀정의 배신으로 죽을 가능성이 높았던,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꽤나 험난한 삶을 살았다.[3] 이런 상황은 1990년대 후반 중국산으로 교체하며 어느정도 극복한다.[4] 사실 경공업에서 시작하여 중공업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정석이다. 물론 중공업이야말로 공업의 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경공업의 기반이 없이 중공업부터 무작정 밀어붙인다면 어떻게 되는지는 소련잘 보여줬다. 경공업이 소비재 중심이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소비재야말로 대중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경공업으로 경험치를 쌓고 기술력을 확보한 다음 중공업을 도입하는 편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에 훨씬 유리하다.[5] 산골지역 자강도, 량강도, 함경도 지역은 1991년부터 보릿고개가 길어지고 작확량이 눈에 띄게 주는등 위기가 미리 찾아왔다고 한다.[6] 당연히 지방이나 못 사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다.[7] 당연히 장마당을 통해 부자가 된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해 김정은이 화폐개혁을 진행하면서 때려잡게 된다.[8] 그 이전에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나누어지기는 했지만, 이건 정치적인 의미의 계층을 나눈 것이었다.[9] 현재에도 화교들이 북한 경제의 실세이며 돈주들이다. 성인 화교는 한달에 한번 고향에 있는 친척을 방문할 권리가 있는데 이를 기회로 트럭 한대씩 분량을 몰고와서 장마당에 물건을 공급하는 북한당국도 해결 못하는 경제에 거의 필수적인 무역회사 역할을 한다.[10] 정확하게 말하면 1960년대엔 북한이 잘 살았다는 말은 북한이 선진국 수준으로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당시 남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잘 살았다는 뜻이다. 실제 1960년대까지 남한은 가난한 농업국가였고 이제 막 산업화에 첫 발을 디딘 시점이었다. 남한의 1인당 GDP가 북한 1인당 GDP를 역전한 시점이 1974년이다.[11] 일본에게는 1983년 일부 탕감을 받았으나 1984년부터 상환을 거부했다.[12] 대표적으로 태영호국민의힘 의원이 있지만, 전문 외교관 출신은 10여명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외화기업, 정찰총국 보위요원을 합치면 수십여건인데 한국으로 탈출시 북한에 남은 가족들 처벌이 혹독하기 때문에 서방과 미국으로 간 경우를 합치면 몇배 더 많다고 한다. 김동호 박사에 따르면 외교관 뿐만 아니라 고위탈북자 출신이 한국에 김일성대 졸업생 출신과 평양외국어대 출신이 약 70여 명 정도 된다고 한다.[13] 김일성이 현지지도 할때 일당백 칭호를 내려준 곳이라 우대 관리 대상이었다고 한다.[14] 안박사가 집안이 평안북도 신의주에 아버지가 6.25참전병 출신이라 출신성분이 좋아서 대학에 입학했고 탈북 당시 70년대에는 대학생에게 입영 면제 혜택이 있음에도 자원입대하여 조선로동당 입당도 하고 전역 직전 부소대장 상사 였으며 김일성종합대 진학 추천을 받은 상태였다. 다만 원래 정치장교를 희망하여 김일성정치대학 추천을 원했으나 빽에 밀려 김정일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비리를 고발하고 탈북했다.[15] 민경대대는 모직제품을 입히고 일반 군인은 혼방제품으로 군복을 지급했다고 한다.[16] 사회주의 국가의 GDP는 일반적으로 부풀려지는 경향이 존재하기에(정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실질적으로는 1960년대 후반부터 남한이 GDP를 추월했다고 봐도 무방하다.[17] 북에서는 당시 전역 후 6개월 까지는 신분증이 유효해서 복무 부대에 오는게 가능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생필품 수준이 열악하고 중국과 밀무역도 제한적이라 제대 전후로 군대 보급품 빼서 팔아먹거나 제대자들이 브로커로 대신 팔아줘야 장사밑천 장가밑천을 마련해서 먹고살았다고 이순실도 여군들은 특히 군용 여성속옷이나 모포 품질이 공산품 품질보다 훨씬 좋아서 몇개 팔아먹어서 혼수 밑천 장만하는게 당연시 되었다고 한다.[18] 탈북을 먼저해서 입학하진 않았다. 훗날 한국에서 한양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및 졸업했다.[19] 북한 최대 아연, 납, 마그네사이트 생산지[20] 1,800 kcal 미만으로 내려가면 기아 상태로 본다.[21] 한국의 경우 2013년 기준으로 을 하루 206 g 정도로 필요 열량의 악 3분의 1만 쌀로 섭취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일일 권장량은 2,500 kcal[20], 여기서 쌀 100 g의 열량은 360 kcal이므로 부족한 수준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식량이 풍부한 나라의 경우 북한처럼 먹을 것이부족한게 아니라 대부분을 밀가루, 육류 등 다른 음식으로 충당한다는 의미이다.[22] 그리고 배급의 질은 고려하지 않았다. 1984년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에서 보듯이 북한산 쌀은 곰팡이가 끼거나 질이 떨어져서 시장경제에서 판매되기 어려운 쌀을 그대로 주민들에게 지급했다.[23] 참고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14시간 탄광에서 강제노동시키면서 하루 200그램에 염장무만 주기 때문에 6개월 안에 반절이상 죽어나간다고 한다. 보위부요원이 안볼때 개미건 지네건 거미건 입안에 쳐넣기 바쁘고 자살하려고 녹슨못이라도 삼킨다고 한다.[24] 즉 배급제는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보장 해주려고 한게 아니라 물품이 부족해서 시행한 것이다. 특히 식량에 대한 배급제는 지속되어 주민의 선택권을 줄여 생활의 질을 나쁘게 하였다. 이는 현대의 바우처 제공 같은 정책수단에도 지적되는 문제인데 가장 중요한 먹는 것을 이렇게 통제하면 삶의 질이 떨어진다. 배급을 충성하는 사람에게 차등적으로 제공하여 충성을 유도하기도 했다.[25] 아직 사회통제가 작동하던 시기 조차 쌀값이 북한 기준으로 굉장히 비쌌다. 한 달 월급이면 쌀 몇kg 살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시기에도 이랬던 것이 배급이 중단되어서 그 만큼의 쌀을 시장에서 비싼 값에 사야하니 당연히 난리날 수밖에 없다. 2021년 기준 장마당 시세로는 북한 일반직장 월급으로 1kg도 못 산다.[26] 그나마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배급제는 공산주의 경제 원칙에 따른 배급제이기 보다는 전시 상황에 따른 배급제에 가까웠다. 동 시대 영국 역시 전쟁으로 인하여 식량 부족 현상이 두드러지자 식량 배급제를 실시한 바 있고, 그 대단했던 미국조차 2차 대전에 총력전 체제로 들어가면서 배급제를 시행했다. 우리나라도 전쟁 등 위급 상황에서는 식량이나 의약품 등 필수 물자에 대해서는 시장 통제와 배급제를 실시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준비가 되어 있다.[27] 예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이지만 소련과 동독 등 타 동구권도 이런 식의 국영 상점이 존재했다고 보면 된다.[28] 모든 생활 필수 물자에 대한 배급제는 사실상 1930년대에 포기한 셈이고, 이후 소련의 배급제는 일부 생필품을 배급의 형태로 지급하는 사회 보장 제도의 일종에 가까운 개념으로 운영되었다고 보는 쪽이 더 적절하다.[29]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초 생필품이 아닌 자전거, 시계 등의 사치품들은 무진장 비쌌다. 당장 북한만 해도 노동자 월급 70원 하던 1980년대에 흑백TV의 국정 가격이 1,500원이었다. 소련이나 동구권에서는 신혼부부가 아파트를 공급받으려면 7~10년이라 애 한둘 낳고 초등학교 들어갈때 까지 처가살이 시집살이 방 두칸짜리 고물아파트에서 3대가 사는일이 즐비했고, 자동차는 20년 이상 기다려야 살 '차례'가 되었기 때문에 가격은 둘째고 살 수도 없는게 대부분의 사례였다. 폴란드 같은 경우도 자국 자동차 산업 경쟁력이 약해서 서유럽과 일본에서 마찬가지로 자동차를 대거 들여왔다. 북한은 그 정도로까지 봉급 수준이 높지 않아서 1990년대까지도 컬러 TV가 상당히 비싼 물품에 취급되었다. 이후로 중국으로부터 중고 컬러TV가 수입되면서 사치품이라는 것도 옛말이 되었다.[30] 2010년경부터는 "써비차"라고 부르는 개인화물운송업자들이 생겨나면서 수송난이 크게 완화되었다.[31] 감자는 냉장 유통이 안 되거나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싹이 나거나 얼어버리는 등 유통이 쉽지 않다.[32] 같은 세기, 같은 양의 비가 오더라도 나무가 있는 숲은 무성한 나뭇잎층, 나무 밑의 풀과 관목층, 낙엽층을 뚫느라 비가 흙 표면을 침식시키는 힘이 감소하고 설령 침식되더라도 이리저리 얽힌 나무 및 풀뿌리가 어느 정도는 흙으로 전이된 운동 에너지를 막아주지만, 다락밭을 만드느라 민둥산이 되고 낙엽층도 사라지면 그대로 노출된 흙 표면+그대로 운동 에너지를 보존한 빗방울에 의해 침식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다.[33] 하지만 이게 오히려 득이 되기도 했던 것이, 폴란드가 1980년대 외채난으로 인해 가용 예산의 상당수가 외채를 갚는 데 들어가서 식량 부족이 시달릴 때에도 각 폴란드 가정은 시골의 연줄을 통해서 (혈연, 지연 등) 음식을 날라다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경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폴란드는 프랑스, 우크라이나와 함께 유럽에서 알아주는 농업국이다. 북한처럼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이야기.[34] 이는 김정일의 지도력이 그만큼 약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의외로 상당수 전문가들이 김정일의 권력 승계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기도 했다. 말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군 출신에 항일 유격전을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김정일은 군 관련 활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작업을 통해 적자인(김일성과 본처인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므로) 자신에게 이를 이을 정통성을 부여 받고자 한 것이다. 참고로 이 시기에 나온 김정일 어록중 하나가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이다. 이 문구를 전교조의 한 교사가 문화어의 두음법칙정도만 수정해 교실 급훈으로 내걸었다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35]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1993년 기록적인 홍수에도 남한에서는 콩나물, 배추값이 약간 오른 정도로 끝났다 할정도로 북한의 변명에 불과했다.[36] KDI정책연구시리즈 2018-10 북한의 석유 교역 분석과 정책적 시사점[37] 러시아, 이란, 터키, 레바논, 북키프로스[38] 땅굴 대다수가 이렇다. 당장 우리나라 지하철들만 해도 지하수를 퍼내는 펌프질을 멈추고 몇 개월 지나면 전부 물에 잠긴다. 참고로 2016년 서울 지하철 1~8호선에서 하루에 나오는 지하수의 양은 6만8천톤이다. 그나마도 거의 재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류해서 매번 까이고 있다고(기사). 대구광역시는 대구 도시철도 2호선에서 나오는 지하수를 여름철 도로에 뿌리고 있다.[39] 河狀係數. 어느 한 하천에서 어떠한 지점을 정해 놓고 1년 또는 여러 해 동안의 최대 유량을 최소 유량으로 나눈 비율. 수치가 클수록 유량이 크게 변동하고 불안정하다.[40] 쉽게 말해서, 전력은 지속적이고 꾸준한 공급이 생명이다. 지나치게 많이 생산된 전력은 잉여일 뿐이고 부족하면 난리 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여름철에 비가 집중되므로 수력 발전 위주로 전력을 설계했다면 겨울에는 전기가 끊겨 모닥불을 지펴야 하는 지경이 된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연간 강우량은 많지만 가뭄이 심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비들이 모조리 여름에 집중되어서 발생한다. 그 덕분에 하천부 개발, 저수지 확충 등이 이루어진 한편, 대한민국의 전력 공급은 비교를 불허하는 효율을 보여주는 화력과 원자력 위주로 집중되었고 댐에 지어진 수력 발전소에서는 비교적 소규모로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41] 러시아는 공산주의가 몰락했으며, 중국은 정치만 공산주의를 표방할 뿐, 경제 체제 자체는 자본주의를 도입한 지 오래되었다. 여기에 두 나라는 북한이 하는 한심한 짓에 일찌감치 내다 버린 자식 취급하며 제대로 된 대우조차 안 해줬다. 심지어 이 양국이 대한민국과 수교를 맺을 것 같은 조짐을 보이자 김일성이 직접 방문해서 혈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막으려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당시 소련)은 겉으로만 답변을 했을 뿐, 결국 수교를 맺고 말았다. 물론 이에 '배신당했다'며 분노한 김일성은 '자주적노선'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지만. 애시당초 중-소 갈등에서 누구 편을 드는 대신 상남자스러운 독자노선을 걸은 시점에서 중-소 모두 저새끼는 뭔데 개기냐? 라는 생각을 했다.[42] 북한이 무역에 있어서 얼마나 한심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재일동포 사업가가 북한과 합작해 마카오에서 원단을 수입, 남포에서 양복을 제작, 일본 내의 중, 저가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비용은 다 재일동포 사업가 자신의 돈으로 부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본으로 와야 할 제품들이 들어오지 않자 궁금해진 그 재일동포 사업가가 남포로 가서 물으니, "마카오와 홍콩이 돈을 더 주겠다고 해서 그곳으로 수출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이 재일동포 사업가가 기가 막혀 "공장과 사업에 관계된 모든 비용을 내 돈으로 한 것인데 나와 상의 없이 당신들 마음대로 바꾸는 게 어디 있냐"고 따졌더니, "조국의 혁명적인 사업을 위해 돈을 기부한 것으로 여기면 될 것을 왜 따지느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기에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훗날 임종 전 유언으로 자녀들에게 "북한과는 그 어떠한 사업도 하지 마라!"고 했다고 한다. 자고로 이짓은 이쪽 업계에서는 완전 망하고 싶어 안달난 행동이나 다름없다. 현실에선 이짓 저질렀다간 법적 대응으로 위약금과 배상금 직격탄 맞고 빚더미에 올라 이쪽 업계에서는 매장당하는 행위다. 근데 그걸 북한은 국가적으로 당당하게 저지른것. 결국 북한은 그 댓가를 고난의 행군으로 맞은 셈. 이렇다보니 어느 누구도 북한과는 사업을 안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엔 대북제재로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됐다.[43] 이 편차 때문에 일각에서는 고난의 행군에서 동북 지역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이 김정일의 고의적인 동북 지역 핍박이라는 설도 있다. 관련 내용은 지역감정의 북한 부분 참조. 하지만 백두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김정일 자신의 고향이고 북한 인민들은 학생, 청년, 로동자 등 어느 시기건 간에 이곳에 답사를 가도록 되어 있다. 김정일 입장에서 여기까지 가는 길인 함경도를 일부러 굶긴다는 것은 온 인민들에게 정권의 무능함 혹은 사악함을 대놓고 보여주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회령은 김정숙의 고향이고 김정숙, 김형직, 김형권 등 북한 김씨일가의 우상화에 가장 많이 동원된 것이 량강도다. 함경도도 다르지 않아서 백두산 가는 길목일뿐더러 왕재산이니 무산이니 김일성의 이른바 혁명전사 사적지들이 밀집해있는 곳이 함북 일대인데 빨치산 혁명1세대들을 포섭해 권좌에 오르는데 성공한 김정일에게 설령 누가 여길 굶겨죽이자고 해도 먼저 그놈부터 총살당할 것이다.[44] 물론 MBC 기자가 실제로 북한에 가서 취재한 건 아니고 미국 CBS 기자가 취재 및 촬영한 것을 가져온 것이다.[45] 황장엽은 고난의 행군 첫 해에 100만 명이 죽어나갔고, 이후에 추가로 100만 명이 더 죽어나갔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30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소 150만, 많으면 350만은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함흥시에서 입수된 내부 문서는 360만 사망설을 적고 있었다. 그러나 황장엽은 학자 출신으로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300만 이상은 근거가 부족하다.[46] 북한 외무성 국제기구국 유엔과 책임 연구원을 4년 하다가 1994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때 부터 1998년 탈북 할때까지 유엔세계식량계획(WFP),유엔식량농업기구(FAO), 국제 농업 개발 기금(IFAD)가 위치한 이탈리아 2등서기관으로 발령 받아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국제사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구걸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47] 아닌게 아니라 김정은도 이를 알고 있어서 북한군의 병력을 감축시키고 있다.[48] 사실 일제강점기때 함경도와 평안북도는 동아시아에서 평균신장이 가장 컸던 곳 1위였다. 나머지는 그냥 남쪽과 비슷했다.[49] 예를 들면 조총련계 교포 출신들과 화교, 중국이나 일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 이들은 외부로부터 자금 조달이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기 시장화의 혜택을 본 계층으로 손꼽힌다고 한다.[50] 김정일이 무능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굶어죽어가는 북한 인민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인민들이 굶어죽어가는 와중에도 자기는 호화롭게 누릴거 다 누리며 미식을 즐겼다. 자기 딴에는 언감자와 줴기밥을 먹는다고는 했다만 그의 요리사로 일했던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완전 다르다. 거기다가 기쁨조라는 사실상의 후궁까지 끼고살았으니...[51] 그는 2010년 북한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52] 다만 남포공단 계획 자체는 1992년에 합의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어진 것이 2000년대 와서부터였다는 것이 문제였지.[53] 국가보위성은 당시 김정일의 동창이던 제1부부장 김영룡을 반당반혁명종파 분자로 숙청하며 조직자체가 초토화되었다.[54] 그러나 김정일은 후계자로 옹립되기 이전인 1969년 부터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고 로동당내 최요직인 조직지도부 부장직을 1972년부터 지냈고 집권 이후 공석으로 자신이 국가보위부장직과 함께 겸임했다.[55] 단련형과 교화형의 차이는 형기와 공민권 박탈여부로 단련형은 공민권이 박탈되지 않으나, 교화형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추방되며 연좌되어 자식이 군인이면 강제 제대되거나 간부직에서 추방당한다.[56] 낮은 밝으므로 전등을 켤 필요가 없으니 잉여라는 뜻이란다.[57] 위치가 높아진 것과는 별개로 북한의 여성 인권은 여전히 총체적 난국 상태로, 여성 자살률과 성범죄 피해 발생률, 가정폭력 발생률도 높은 편이다.[58] 김정일을 그리 비난하던 황장엽은 적어도 김일성이 집권을 하던 시절에는 죽기 직전까지 굶주리진 않았다며 비난을 하지 않았다. 끝내 황장엽 역시 탈북을 하게 된다.[59] 사실 고난의 행군보다는 덜 심각해서 그렇지 1970년대 당시에도 북한에 식량난이 터졌었고 북한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 박정희도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진지하게 검토했을 정도였다. 평양에서는 그나마 식량을 구할수 있었지만 지방은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천리마 운동속도전 등 김일성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무리하게 북한 주민들을 다그쳤기에 발생했었던 것.[60] 북한도 비슷한 조치를 하긴 했는데 2000년대에 와서야 시행했다는 게 문제. 1990년대 중반에도 상당 부분은 시행하다시피 했으나, 이건 사회 통제가 붕괴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인민들이 어쩔 수 없이 장사했던 게 퍼진 것이다. 북한 정부는 그 무렵 어버버 거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제도적으로 시행됐다.[61] 줴기밥을 자주 먹기는 했는데, 그 줴기밥이란 게 동유럽산 기름, 뉴질랜드쇠고기, 연어알, 캐비아 등을 넣어서 만든, 재료비만 45달러(한화 약 5만원)나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62] 김정일 문서로 들어가 이 작자가 쳐묵쳐묵한 산해진미 목록을 살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이 굶주림을 못 이겨 민가를 습격해 식량을 훔치다 걸려 처벌하자는 얘기가 나오자, "지금 내 아들들이 배고파서 한 일을 처벌하겠다는 거냐?"라는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했다.[63] 여기서 말하는 붕괴란, 수령제 붕괴를 의미한다. 동유럽식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포함한다.[64] 한류가 내륙을 포함한 지방 중견도시에 퍼진 때가 2000년대 중후반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한류 유포 초기에는 한류가 '남조선'을 의미함을 모르거나, 북한이 이것을 곧 이룰 수 있다는 시각도 많았다고 한다.[65] 사실 이 시절에도 일단 돈이 있으면 밥을 사먹을 수는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제국이 미국한데 덤빈답시고 기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을 터뜨린 탓에 물자가 부족해져 배급으로 바뀌었던 것.[66] 물론 이는 젊은 시대가 그 시절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제 시대에 당시 행해지던 차별과 나라를 빼앗긴 설움은 직접 겪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힘들 수 밖에 없다.[67] 실제로 고난의 행군과 일제 식민지 시절을 비교할 때 나오는 소리가 자신들은 좁쌀밥이나 먹는데 일제 녀석들은 쌀밥 먹는 게 못마땅해서 일제를 욕했다라는 건 거의 고정 레퍼토리 수준으로 나온다.[68] 성과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 불만을 가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일을 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둘 다가 목적일 수도 있다.[69] 김정은이 코로나를 얼마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인데 무역은 봉쇄한지 오래고, 어업이나 염전조차 코로나바이러스가 있을 지 모른다는 망상 탓에 금지시켜 버렸다고 한다. 심지어 북한이 심하게 흔들리자 탈북을 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해외에 있던 북한 외교관 등을 다 불러모으는 등 경제 악순환을 일으키고 있는 중.[70] 중국 공산당이 독재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유 역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지 고도 성장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10억이 넘는 중국인들이 언제 난리를 쳐버릴지 모른다. 거기다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은 코로나19 초기대응 실패#로 인해 세계 경제에 무시무시한 타격을 주었다. 코로나가 진정된다면 전세계가 어떠한 형태로던 간에 그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대비해야 된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지원에 소극적이라 북한은 이란과 터키로 방향을 튼 상태다.[71] 인도적 지원은 대북제재에서 면제될 수 있어 식량 지원의 시도도 종종 있었다. 가능한 북한 정권의 비행을 막고자 주민에게는 피해가 덜 가게 제재를 하지만, 북한 당국은 주민까지 위협하는 것이라고 선전한다.[72] 여기서 언급되는 '평성시'는 평양에 이웃한 도시인데도 민심이 상당히 다르다.[73] 돈표에 대해서도 시장에서는 매우 불신을 받고 있는데, 이는 북한의 화폐개혁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74] 4월초에 남측에서 날아온 물품 때문에 코로나가 유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남한에서 그 이전에 무언가를 날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