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고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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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 덴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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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초대 천황


일본 제96대 천황
고다이고 덴노
後醍醐天皇


파일:고다이고 황제.jpg

출생
1288년 11월 26일
야마시로국 교토 교토 어소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1339년 9월 19일 (향년 51세)
남조 야마토국 요시노 금륜왕사
(現 나라현 요시노군 요시노쵸)
능묘
도노오릉(塔尾陵(탑미릉)
재위기간
일본 황태자
1308년 9월 19일 ~ 1318년 3월 29일
제96대 천황
1318년 3월 29일 ~ 1331년 10월 22일
일본 상황
1331년 10월 22일 ~ 1333년 7월 7일
제96대 천황 (복위)
1333년 7월 7일 ~ 1339년 9월 18일
남조 초대 천황
1336년 9월 20일 ~ 1339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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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책이 미래의 선례가 될 것이다."

엔기•덴랴쿠의 치세[1]

로 되돌아가자.










"뭐 후세의 귀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쩌면, 이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요즘 수도에는 (토지 소유 문제 때문에) 고발소송이 넘쳐나니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











1. 사람을 빨리 선발하여 규슈(구주), 도호쿠(동북)로 파견하시고 더욱이 산요(山陽, 산양), 호쿠리쿠(北陸, 북륙)에도 사람을 두어 반란에 대비하십시오.

2. 여러 지방의 조세를 3년간 면제하고, 검약하십시오. 토목을 금하고, 사치를 끊는다면 반란은 저절로 잦아들어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3. 관작의 수여에는 신중하십시오. 공적이 있더라도 신분이 미천한 자에게는 토지와 관작을 주지마십시오.

4. 상을 내릴 때는 공평하십시오. 귀족과 승려에게는 고쿠가(国衙, 국아)령·장원(荘園)을 주고, 무사에게는 지토(地頭, 지두)직을 주십시오.

5. 임시 행행[2]

및 연회는 그만두셔야 하옵니다.

6. 법령은 업숙히 집행하십시오. 법은 국가를 다스리는 데 기본 방침이므로 조령모개[3]

한 혼란한 상태는 허락하지 마십시오.

7. 정치에 유해무익한 자를 내치십시오. 현재 귀족, 궁녀 및 승려 중 중요한 정무에서 사리사욕으로 집행하는 자가 많아 정치에 혼란이 오고 있사옵니다.


"엔기(延喜)·덴랴쿠(天暦)의 치세[4]

로 돌아가자."

"만약 이 의견이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고다이고 덴노의 슬하에서 벗어나 산 속에 틀어박힐 것이다."


  • 고다이고 덴노의 측근이었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는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보수적인 문신관으로 신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 근세에 들어서는 고다이고 덴노를 부덕한 군주로 인식하는 평가가 정착했다.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명령으로 편찬된 《대일본사》에서는 남조를 정통으로 하면서도 고다이고 덴노가 '실정'을 저질렀다고 평가하는 인식이 있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독사여론》에서 왕조 정치가 쇠퇴하고 무가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은 누대에 걸친 덴노가 한 실덕이 한 원인이었다는 관점에서 고다이고 덴노를 그 말미에 붙였다. 비판의 논점은 주로 인재가 많았지만 인재를 잘 쓰지 못하고, 신분 계층에 구애받지 않으며, 가마쿠라 막부를 쓰러뜨리고 난 이후의 행실이 별로였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인식은 메이지 시대까지 쭉 이어지고 이와쿠라 도모미조차도 조큐의 난에서의 패배로 실권을 잃은 고토바 덴노와 묶어서 비판했다. 1867년 양력 11월 대정봉환 이후, 1868년 양력 1월에 포고한 <왕정복고의 대호령[5]>[6]
  •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에서는 고다이고 덴노를 비판하면서도 즉위 직후의 친정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