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왜구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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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왜구의 침입
시기
1350년 ~ 1389년
장소
한반도 전역과 대한해협, 대마도 일대
원인
동북아시아 혼란에 따른 왜구의 발흥
교전
고려 파일:고려 의장기.svg
왜구
지휘관
이성계
최영
정지
최무선
박위
홍사우
나세
우인열
지용기
이지란
김속명 등
아기발도
패가대[1]
후지 츠네미츠
병력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왜구의 공세 기조 약화
영향
신흥 무인세력 및 신진사대부의 성장
1. 개요
2. 특징
2.1. 왜구의 정체와 구성원
2.2. 규모
2.3. 기병과 함선을 이용한 기동전
2.4. 정보력
2.5. 전략과 전술
2.6. 왜구의 풍습
2.8. 계절에 따른 차이
3. 발단과 배경
3.1. 고려
3.2. 일본
4. 1350년대의 왜구 침공
4.1. 1350~1351년, 충정왕 시기의 왜구 공세
4.2. 1352년~1359년, 공민왕의 즉위와 왜구의 공세
5. 1360년대, 유린 당하는 고려
5.1. 1361년~1362년, 북로남왜
5.2. 1363년, 수안현 침략
5.3. 1364년, 갈도침략과 이작도 전투
5.4. 1364년, 김속명의 진해 전투
5.5. 1365년, 창릉 침략
5.6. 1366년, 심악현 침략
5.7. 1367년, 제주도 목호들의 분란
5.8. 잠잠해지는 왜구와 회유 작전
6. 1370년대, 더 강력해진 왜구들
6.1. 1370년, 제1차 요동정벌 무렵의 왜구 공세
6.2. 고려의 왜구에 대한 명나라 홍무제의 반응
6.3. 왜구의 공세와 수군 양성 계획
6.4. 1373년, 삼일포 전투
6.5. 1374년, 합포 전투등과 공민왕의 죽음
6.6. 1375년, 우왕의 즉위와 왜구의 공세
6.7. 1376년, 홍산대첩
6.7.1. 3월~7월
6.7.3. 9월~10월
6.8. 1377년
6.9. 1378년, 해풍 전투
6.10. 1379년
7. 1380년대, 고려의 반격
7.1. 1380년, 사상 최대의 왜구 결집과 대승
7.2. 1381년 ~ 1382년 소강기
7.3. 1383년, 관음포 전투, 정지의 승리
7.4. 1384년 ~ 1387년
7.5. 1388년, 제2차 요동정벌과 왜구의 준동
7.6. 1389년, 박위의 제1차 대마도 정벌
8. 결과: 조선의 건국과 화약 무기의 발달
9.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국가가 경인년(1350년, 충정왕 2년 / 공민왕 즉위 1년 전) 이래 왜적들의 침구를 당하자 나라에서도 계속 병사를 동원해 추격 체포했으나 뿌리를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근년 들어 왜적들이 더욱 광포해져 장수를 살해하고 인민들을 노략질하니 바닷가의 주(州)·군(郡)마다 소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심지어 경기(京畿) 지역을 재차 침범하는 등 전혀 겁내거나 꺼리는 것도 없으니 다가올 후환을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장상(將相)과 대신(大臣)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방어 전략을 마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만일 혹시 왜적이 무리를 지어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돌연 침범해 오면, 장차 무엇으로 그것에 대처하겠습니까?”

고려사》 <우현보 전>


파일:QlR69Ti.png

40여 년 동안 몽골과 벌인 전쟁, 그 후로 80여 년 동안의 간섭에 의한 정치 혼란, 심지어 몽골 반란군의 잔당이나 홍건적 침입까지 그야말로 고려가 여기저기서 한계를 맞이한 시기에 일본 또한 2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공의 여파로 가마쿠라 막부가 아예 붕괴하고 지옥 같은 남북조시대가 열리자 그야말로 고삐가 풀려버린 해적 집단인 왜구의 발흥을 배경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고려는 400여 년을 이어온 시스템의 부패, 정쟁으로 인한 국왕 살해, 국토가 털리는 상황에서도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등등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제각기 많은 문제를 가진 정권들이었지만 원나라가 짧은 기간에 망해 버리는 것으로 이 시대의 동아시아는 혼란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왜구라 부르는 해적 무리가 한반도를 침략한 것은 고대 신라(新羅) 대부터 이어진 유구한 역사지만 1350년을 기점으로 한 이 고려 말기의 왜구들은 규모, 침공 횟수, 전투력이 다른 시대의 왜구들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났다. 또한 다른 왜구들과는 상당히 다른 정체성을 지녔다는 기록들이 상당수 나타난다. 어떤 학설에선 왜구의 시대구분으로 전기왜구와 후기왜구로 나누어 고려 말 왜구를 전기 왜구, 명초의 왜구를 후기 왜구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신라 대의 왜구와 비교하면 적절한 명칭으로 보기 힘들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기록만 봐도 신라대의 왜구의 규모와 침입 횟수가 고려 말 왜구에 못지않았으며 신라 또한 수도인 경주가 위협받고 때론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어쨌든 대개 명나라(明)에 심대한 타격을 미친 명초의 왜구가 중국일본의 연구자들에게 더 관심을 받은 반면에,[2] 국내에 미친 피해와 영향력을 따지자면 무려 수백 차례나 쳐들어왔던 이 고려 말 왜구의 끈질김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중기의 대전쟁 때문인지 고려 말 왜구와의 사투는 국내 대중들에게도 상대적으로 인식이 약한 편인데, 그 실체는 단순히 노략질을 하는 왜구와의 전투를 떠나 고려라는 국가의 존망과 관련된 동아시아 혼란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전쟁이었다. 장장 40여 년의 세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심지어 함경도 한반도 북부에서도 벌어진 대혈전은 해안 지대와 고려의 조운(漕運) 시스템을 거의 붕괴 직전으로 몰아갔다. 당시의 고려는 정치조차도 무너져 가는 상황이었기에 중대한 위기였다.[3]

1380년, 왜구의 공세가 최절정으로 치달았지만 진포해전 때 절망적인 상황에서 극적으로 신병기인 화포를 활용해 승리했다. 그리고 수없이 국토를 지켜낸 명장 이성계의 활약과 마지막 황산대첩으로 고려를 괴롭힌 대규모 기병의 군세는 전멸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왜구의 침공은 계속되었지만 다른 시대와 비슷한 무장한 해적에 가까운 규모로 몰락해 버렸고, 이후에는 박위의 대마도 원정으로 혼란의 시대를 끝내게 된다.

또한 30여 년이 넘게 전국토에서 싸움을 벌이는 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얻은 신흥 무장 세력을 출현시켰고, 그런 신흥 무장 세력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으로 개경의 조정을 장악, 마침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성공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일본에 유달리 고려 시대 유물이 많이 있는 이유가 90% 이상이 이 때 노략질로 훔쳐간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머지 10퍼는 일제 강점기. 때문에 지금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 유물을 오히려 일본의 소장자에게서 돈 주고 사오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개인 소장자를 대상으로 경매에서 구매해 오고 있는 것이다.[4] 일본 공공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 시대 유물은 약탈 증거가 없다며 철면피로 발뺌하는 중이며,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유물들과는 달리 국제법이나 국제 체제도 없었던 전근대 시대에는 끝없는 약탈과 전쟁으로 유물이 돌고 도는 게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600년 ~ 700년 전 중세 시대에 경로도 불분명하게 들어온 유물을 무상으로 돌려받는 것이 힘들다는 문제도 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 111부 동북아시아의 적, 왜구의 등장

토크멘터리 전쟁사 -112부 왜구를 막자, 고려의 반격


2. 특징[편집]


파일:HTC42qQ.jpg

충격과 공포. 고려 말 왜구들은 쇠퇴기에 이른 고려를 집요하게 약탈했다.

왜구와 고려의 전쟁은 1년 이상의 소강기도 없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벌어진 대혈전이었다. 피해의 규모는 몽골의 침략이 더 크지만, 순수한 전투 시간은 이쪽이 길었다. 하지만 거의 대중에게 관심을 못 받는 편이라, 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우르르 털고 갔던 수준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당시의 왜구들은 지배자들의 혼란상으로 몰락한 고려군을 수차례 패배시킨, 말 그대로 약탈 목적의 군대(Marauder)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2.1. 왜구의 정체와 구성원[편집]


왜구의 정체와 구성원은 한중일을 막론하고 논쟁하는 요소인데, 고려 말 왜구에 대해서는 남조의 생존 전략설[5]동아시아 혼란기의 해양 세력 연대설이 존재한다. 이성계가 퇴치한 아기발도의 경우에는 왜구들에게 존중받는 일종의 귀족이라는 기록이 있고, 소수설이지만 몽골인 - 고려인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6] 비슷한 시기에 원나라, 홍건적의 잔당들이 세력의 생존을 목적으로 고려를 침략했던 전례를 보면, 동아시아 혼란기의 막바지에 최후의 생존을 노리던 세력들의 활동의 일부라고 정리하기도 한다. 아직은 연구가 부족해서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만, 당시 약탈 부대의 규모가 북조를 상대하느라 바빴던 큐슈로만 한정하기 힘든 대규모였으며, 상당한 교육을 받았거나 유목 민족이나 고려인들과의 연관성에 대한 가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왜구 이외의 세력에 대한 이야기는 가설에 그친다. 일반적으로는 큐슈가 포위 직전에 몰린 상태에서 활로를 뚫고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남조 세력의 활동이라고 추정된다. 그 외에는 직접적인 군세를 동원할만한 세력에 대한 증거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결론을 한정하면 남조 세력이 자신들의 수도가 공략당하는 상황에서 수천명의 귀한 기병이나 지휘관들, 그리고 500여척의 함대를 고려에다가 꼴아박아서 전멸시켰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남조 세력으로 특정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참고로 이런 유형의 도박은 후대의 일본 제국조차 저지르지 않았던 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주만 공습만 해도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고생은 하고 있었지만 중국군을 상대로 일본군은 완승을 거두고 대륙의 중요도시들을 전부 지배하고 있었다. 본토와 수도에서 적군은 한차 떨어져 있었던 상황에서 미국을 기습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고려 말기 침입한 왜구들의 정체를 남조라고 특정할 경우, 남조는 일본 제국을 능가하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이런 가설에는 진포대첩에 이어진 황산대첩과 같이 왜구의 세력에 돌이킬수 없는 치명타를 먹인 고려의 극적인 승리를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이며 실제론 일본 본토에서 수세에 몰린 남조 세력이 한반도로 근거지를 옮기려 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실제로 남북조 시대 일본의 무사들은 근거지를 잃고도 훨씬 먼곳으로 달아나서 세력을 회복한 뒤에 다시 쳐들어오는 경우가 잦았다. 교토에서 쫓겨난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부하들을 이끌고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규슈에서 재무장한 뒤 수도인 교토를 탈환했으며, 혼슈 북쪽 끝인 무쓰 지방에 있던 남조의 장수인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세력이 남하하여 오사카 일대인 이즈미노구니사카이에서 전투를 벌인 것, 남조의 수군 세력으로 기내 지방에 근거지를 두었던 구마노 수군의 활동 범위는 규슈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 사서인 건내기를 보면 슈고 다이묘아카마쓰 미쓰스케가 1441년 가키쓰의 난으로 토벌당하자 미쓰스케의 동생인 아카마쓰 사마노스케 노리시게하리마 지방에서 사라진 뒤에 행방이 묘연했었는데 알고 보니 고려(조선)으로 건너가 1개국(한 지방)을 빼앗아 나라가 곤란에 처했다고 고려(조선)의 사신이 알려왔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이렇듯 고려 말 왜구들은 얼마든지 넓은 범위에 걸쳐 이동과 원정을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기동력이 뛰어난 집단이었다.[7]

또한, 위험한 도박이라 보기엔 당시 남조 무사들 입장에선 고려 조운선을 약탈해 병량을 조달하는 것이 상당히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도 반론으로 들 수 있다. 당시 고려는 세곡 운반 체계를 수상교통에 의지하고 있었고 수군을 비롯한 해상 방위 세력도 미흡했다.[8]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지리에 익숙한 대마도 등의 지원이 있다면 고려 침입은 많은 군량미를 일본 내에서 구하는 것에 비해 적은 노력으로 약탈해 올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리고 남조 배후설에선 요시노야마의 남조 조정 자체보단 남조 정서부 편을 들은 키쿠치 씨 등의 규슈 주요 호족들을 왜구의 정체로 추정한다는 점에서도 도박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일본 남북조 내전은 단일한 두 세력의 전쟁이 아니라 한국의 후삼국시대처럼 휘하 지역 무사들의 이합집산과 독자 행동이 존재했다.

아울러 고려 말 왜구의 정체를 두고 동아시아 해양세력이라거나 혹은 고려인이 더 많았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1376년 10월에 일본에서 귀국한 고려의 사신 나흥유가 전달한 일본 승려 도쿠소 슈사(得宗周佐)의 편지를 보면, 왜구의 발생 배경 및 그 실체에 관해 "서해도 일로의 규슈 지역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이 할거하여 공부(세금)을 바치지 않은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다. 서변 해도(쓰시마와 이키섬 등)의 완고한 백성들이 이 틈을 타고 고려를 침구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들(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를 가리킴)의 소행이 아니다. 조정(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이 장수를 규슈에 파견해 들어가서 매일 싸우고 있으니, 바라건대 규슈만 평정된다면 해적(왜구)은 금지시킬 수 있을 것임을 하늘과 태양에 두고 맹세한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조정이 장수를 규슈에 파견해 들어가서 매일 싸우고 있으니'라는 구절은 당시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을 파견해 규슈에서 남조와 격전을 치르고 있었던 점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만일 고려 말 왜구의 정체가 동아시아 해양세력이라거나 혹은 고려인이 더 많았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일본측 인사가 전적으로 왜구 발생의 원인을 자국 내의 반란 세력들 탓이라고 인정했을까? 오히려 고려 사신한테 "왜구는 여러 잡다한 세력들이 섞여 우리가 금지시킬 수 없다. 그리고 왜구 중에는 당신네 고려 백성들도 많으니, 고려 백성들 단속부터 제대로 하라."고 대답했어야 아귀가 맞는다.[9]


2.2. 규모[편집]


당시 왜구는 중세 영국머시아노섬브리아를 휩쓸던 데인 수준의 규모까진 아니었지만, 동북아시아에 나타난 왜구들 중에서는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다. 30여년에 걸친 세월동안 200여척에서 최대 500여척에 이르는 왜구들은 거의 연례 행사로 나타나 고려를 압박했는데, 군대의 기강이 와해되고 북쪽에서도 수만에 달하는 필사적인 침략군을 연달아서 상대했던 고려군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게다가 후술하듯 이 당시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일본, 명나라, 동남아 국가들에서 갈취해온 무기들과 갑옷으로 상당수가 무장을 한 상태였고 중장기병도 별도로 운영하는 등 반 정규군에 가까운 속성을 보였다.


2.3. 기병과 함선을 이용한 기동전[편집]


왜구들은 황산대첩에서 1,600여필의 말들이 노획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병을 대규모로 동원했다. 심지어 기록상에서는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왜구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왜구는 함선을 통해 강을 거슬러 내륙을 휩쓸었다. 선박과 기병, 이 두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왜구는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게 되었다. 그외에 기마대가 있는 해적으로는 동여진이 있는데, 여진은 원래 기마 유목민족이니 크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은 농경민족이고 농경민족에게 기병은 비용이 상당하고 젊은 시절부터 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순수한 해적 출신이라고 보기가 힘들어진다.[10][11] 이때 침공해 온 왜구들의 정체가 실제로는 패망 직전에 몰린 일본 남조 조정의 군대가 아닐까하는 설도 이것을 근거로 제기되었다.[12]


2.4. 정보력[편집]


설장수(偰長壽)의 상소문 등에서 보자면, 왜구는 미리 정보를 얻어 부유한 사람이 있는 곳, 양식이 많은 곳, 조운선을 약탈해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때문에 청야작전은 전혀 소용이 없었으며, 고려인으로 위장해 고려군을 유인한다든가, 고려군의 군영을 피해 일반 백성을 친다든가, 역으로 고려 백성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돌파하여 고려군의 군영을 먼저 치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해적들이 떠올릴 만한 발상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외국의 행정이나 언어를 분석할 만큼의 교육이 뒷받침된 세력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왜구들이 붙잡은 고려인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실제로 고려 말의 정치인이자 시인인 이색은 그의 시집인 목은집에서 왜구들에게 붙잡힌 고려 귀족의 자제들이 그들한테 정보를 알려주며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해 개돼지보다 못한 짓이라고 무척이나 분개했으나, 그러한 일들은 왜구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또한 왜구들 중에는 고려와 가까운 대마도 출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고려의 언어와 사정에 능숙하여 왜구들의 길잡이 노릇도 하였다. 아울러 고려사 권제 41 공민왕 18년 기사에 의하면 "거제와 남해현에 있는 투화(귀화)한 왜인들이 배반해 자기 나라(일본)로 돌아갔다. 왜인들이 거제도에 살면서 영원히 화친관계를 맺고자 하므로 조정에서 그것을 믿고 허락하였었는데, 이 때에 와서 도적이 되어 침입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서, 고려에 거짓으로 귀순하여 살던 일본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달아나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쳐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비록 일본인이지만, 고려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니 고려의 지리나 내정에 대해 비교적 잘 알았을 것이고, 그러니 왜구들이 고려를 침입할 때, 아주 유용한 안내원이자 정보원 역할을 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2.5. 전략과 전술[편집]


이들이 해적이 아니라 정규군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마지막 요소. 강화도과 경상도를 동시에 치면서 고려 조정을 패닉에 빠트리거나, 일부러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어 고려군을 흩어지게 한 다음 불시에 모여서 격파하는, 대규모 산병 책략에 대한 경험이 높았다. 최영의 주력만 깨트리면 고려군을 괴멸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다른 지방을 무시하고 해풍으로 진격했다. 또한, 양광도로 최영을 끌어내고 개경을 빈집털이하려던 계획은 대단히 소름끼칠 정도로 뛰어난 전략이었다.

고려사 설장수전에 나오는 설장수의 상소문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잘 언급하고 있다. 당시 왜구들은 대낮에 싸움을 치르는 것은 가능한 자제하고, 밤을 노려 관군을 기습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허장성세를 보여 뭉쳐 있던 고려군을 이리저리 흩어지게 한 다음, 고려군이 분산되면 그틈을 노려 다시 뭉쳐 고려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저는 본디 외국 출신의 천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13]

당대에 아무런 도움이 되는 일도 없었는데도 외람되이 큰 은덕을 입고 진양(晋陽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의 수령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한 해 동안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왜구를 방어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습니다. 살펴 보건대 왜적의 배는 수시로 출몰하는지라 백성들이 언제 화를 당할지 예측할 길이 없으며 해안에 자리 잡은 둔영은 이름만 있을 뿐 방어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수비병들이 모조리 오합지졸로 평소 엄격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성능이 우수한 무기와 갑옷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보호해 줄 진지도 구축하지 않고 초가집에 섶울타리로 겨우 비바람이나 막을 막사에 기거할 따름입니다. 왜구가 일단 침입하면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버리니 비록 파(頗)·목(牧)[14]을 장수로 삼더라도 그들을 지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둔영 가운데 먼 곳은 서로 50리, 60리나 떨어져 있으며 가까운 곳도 20리, 30리 아래인 곳이 없으니 왜적들은 그 사이를 통과해 침구하고 있습니다.

바닷가 고을의 백성들은 혹은 드문드문 혹은 빽빽하게 촌락을 이루어 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왜적들은 많으면 천 명이나 백 명의 무리로, 적으면 열 명이나 다섯 명으로 대오를 지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요망한 간계를 꾸며 쳐들어옵니다. 환한 대낮에는 그나마 왜구들의 침입로를 살펴서 부대의 규모를 조사한 다음 수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는 척후가 먼 곳을 조망하기 어렵기 때문에 때때로 불의의 기습을 자행하곤 합니다. 병력이 많은 경우에는, 허장성세를 부리면서 이리저리 횡행함으로써 우리 군사의 힘이 분산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몰래 기습을 가하는데, 어떤 때는 둔영을 지나쳐 바로 민가를 습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민가를 버려두고 먼저 둔영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병력이 적을 경우는, 미리 간첩을 보내어 어느 집이 부유한가 알아두었다가 은밀히 약탈하는데, 우리 관군이 그 기미를 알고 추격하여 올 때쯤에는 적은 이미 재물을 가득 싣고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장정을 더 징발하면 백성들은 힘이 부치고 도적은 떠나버렸으며, 백성들을 돌려보내면 그들이 떠나자마자 왜적이 다시 침구합니다. 때문에 백성들은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고 군대는 유사시 활용할 병력이 없습니다. 청야책(淸野策)을 쓴다면 그 폐단은 더욱 심할 것입니다. 대체로 바닷가의 땅은 기름진 곳이 많아 백성들은 그 땅에 정을 붙이고 있는 터에 이 작전을 쓰게 되면 그들에게 이익을 주려는 본래의 의도가 도리어 그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농토가 좁긴 하지만 거기서 붙박이로 살아온 백성들은 그 농토를 기반으로 살아왔는데, 만약 이주민들을 먹여 살리게 한다면 그들마저도 피폐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강제로 이주당한 백성들은 원한을 품고 깊은 내륙으로 옮길 수밖에 없을 것이며 백성들은 뜻밖의 재앙을 받고 생업마저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평소에 가슴 아파하고 통분해 하는 바입니다. 또한 전란 때 산성이나 섬으로 백성들을 피난시켜 보호하라는 명령은 당초 이주 범위가 짧은 거리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현재 왜적은 때때로 60리, 70리를 넘는 거리를 침구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견주어 본다면 비록 1백 리 거리를 두고 이주시키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바닷가 1백 리 사이에 이미 이주한 백성들과 남아 있는 백성들을 모아들여 사방 삼십 리 혹은 오십 리 쯤 되는 경작 가능한 비옥한 토지 중에서 지형이 평탄하고 땔나무와 물이 있는 곳을 선택한 다음, 가구 수가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방어용 성을 축조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2백 ~ 3백 가구를 한도로 관아와 관직을 개설해 그들을 살게 하는데, 집과 담장을 서로 접하게 지어 해당 인원만을 수용시켜야 합니다. 가옥을 제외하고는 곡식을 쌓아 두는 장소만 남겨두고 농토는 모조리 성 밖에 있는 농토를 지급해야 합니다. 성은 높이 쌓고 참호는 깊게 파서 성 위에는 망루를, 성문에는 조교(釣橋)를 설치해 두고 나머지 방어용 기계는 상황에 따라 배치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성(城)과 참호 사이에 품(品)자 모양의 작은 구덩이를 많이 파고 녹각(鹿角) 모양의 목책을 세워 왕래를 막고 야간 경비를 엄격하게 하며 봉화를 철저히 운용해야 합니다. 밭 갈고 김맬 때에는 아무리 멀어도 20여 리 밖으로는 나가지 않으며, 새벽에 나갔다가 저물녘에 돌아오면 왕래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벼가 익으면 베는 대로 운반하여 지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왜적이 침구하면, 청·장년들은 성에 올라가고 노약자들은 음식을 나르며 각자 수비할 곳을 분담해 방어의 의지를 견결히 다질 것이며, 봉수(烽燧)를 올려 이웃 성으로부터 구원병을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 성에서 급보가 오면 정예 기병을 택하여 그곳으로 보내야 합니다. 위급한 상황을 알면서도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 지휘관에게 벌을 내려야 합니다. 보통 적은 조수를 이용해 공격해오고 후퇴하기 때문에, 성을 공격해 땅을 빼앗은 다음 거기에 항구적으로 머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로지 재물을 약탈하는 것을 염두에 둘 뿐,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으면 반드시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그 틈을 타 적에게 기습 공격을 가한 다음 다양한 작전으로 놈들을 기만함으로써 용맹과 많은 병력을 쓸모없이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놈들은 쳐들어와봤자 얻을 것이 없을 것이며 공격해봤자 아군을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적들은 전진하면 앞뒤에서 아군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을 것이며 퇴각하면 앞뒤의 군사가 충돌할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편안한 가운데 놈들이 지치기를 기다린다면 싸우지 않고도 적군을 굴복시킬 것이니 도적은 제어되고 백성은 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옛날의 폐단을 답습하여 쓸데없이 둔영만 설치한다면, 이것은 예를 차리면서 불을 끄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격과 같으니 사태의 해결에 도움도 되지 않고 도리어 사람으로부터 모멸만 받을 것입니다. 양강(兩江)[15]

은 수도로 진입하는 요지이며 양천(陽川)[16]은 공물과 조세가 모이는 곳이니 참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이 실행하기 어려울 듯하오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려보자면 처음에는 어려워도 뒤에는 마땅히 쉬워질 것입니다."

《고려사》 설장수 전



2.6. 왜구의 풍습[편집]


왜적은 두세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를 납치해 다가 머리를 삭발시키고 배를 갈라 물에 깨끗이 씻은 후 쌀, 술과 함께 제단에 올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좌우편으로 나위어서서 풍악을 울리고 절을 하였다. 제사가 끝난 후에 그 쌀을 두 손으로 움켜쥐어 나눠 먹고 술을 석 잔씩 마신 다음 그 아이를 불에 태우니, 창자루가 꺾어졌다.

賊掠得二三歲女兒, 剃髮剖腹淨洗, 兼奠米酒祭天. 分左右, 張樂羅拜. 祭畢, 掬分其米而食, 飮酒三鍾, 焚其兒, 槍柄忽折.

고려사》 권126, 열전 제39 변안열전



2.7. 대마도[편집]


고려 말 왜구 문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려와 쓰시마(대마도) 사이에 왜구 문제에 대해 협상을 하는 사자(사신)가 왕래하는 기간 중에는 왜구가 일절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공민왕 16년(1367년) 3월에 강화부를 침구한 이래 공민왕 18년(1369년) 11월에 다시 아주(충남 아산)에 침구할 때까지 약 2년 9개월 동안 단 1건의 왜구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처럼 왜구가 일절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경인년 이후 거의 매년 왜구가 침구해 오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즉, 이는 당시 왜구의 배후 조종인물이 대마도의 영주인 쇼니 요리히사 또는 소 쓰네시게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가 왜구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7]

대마도의 영주인 요리히사나 쓰네시게가 왜구의 준동을 지원하거나 지시했다는 추측도 있는 반면에 대규모로 일어난 왜구에 대해 두번의 여몽 일본 정벌 시도로 인해 쓰시마와 이키 섬부터 초토화 되는 피해를 입어 이 일대를 무사도를 강조하고 전통에 대해 집착하는 사무라이 가문들이 지배력을 잃었기 때문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막부가 쓰시마 섬을 지배하기 이전에도 이 일대의 섬들은 왜구의 활동이 잦고 도적떼들이 자리잡아 한반도와 일본 본토 가리지 않고 털어대는 도적 소굴을 이뤄 골칫거리였는데 이 시기 쓰시마를 관리하는 사무라이 가문들이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왜구의 활동에 대해 방치하고 생계를 유지하려 백성들도 밀접하게 가담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18]

종합적으로 이 시기 왜구의 준동에 배후 세력이 쓰시마의 영주이건 아니건간에 이들의 활동을 일본 본토의 군사력을 통제하던 막부가 제어할 의지가 없거나 힘이 없었다는 것은 동일해 왜구가 활동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환경을 제공했다는건 일치한다.

2.8. 계절에 따른 차이[편집]


일반적으로 겨울에는 왜구들이 침입하지 않았다. 경인년(1350년) 이후 1375년까지 26년 동안, 계절적으로 겨울에 해당하는 10월~이듬해 1월의 약 4개월 동안, 왜구는 총 10회 밖에 침입하지 않았다. 즉 1년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겨울에 침입한 전체 152회 중 10회로, 전체의 6.6%에 불과하다.

이처럼 겨울에 왜구의 침입 횟수가 극도로 적은 까닭은 일본에서 고려로 항해할 경우 역풍에 해당하는 북서풍이 불어서 대한해협을 건너기에 많은 위험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겨울이 시작되어 바람이 바뀌기 시작하는 10월(양력 11월)과 한겨울인 1월(양력 2월)에는 26년 동안 단 한 번도 왜구가 침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19] 그리고 환절기의 기온 급락과 매 겨울마다 오는 한파는 비교적 따뜻한 일본에서 온 왜구들에겐 버티기 힘든 것도 있었을 것이다.


3. 발단과 배경[편집]


고려를 노린 왜구의 최초 침공은 고종(高宗) 10년인 1223년에 벌어졌다. 이 '13세기의 왜구' 들은 몇차례 산발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국가 전체의 규모에서 보자면 단순한 소란에 불과했다. 또한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 이후 이 얼마 되지 않던 13세기의 왜구들도 자취를 감춰, 향후 85년 동안 왜구의 발생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사》의 1350년에 대한 기록에는 이후 40여 년에 걸쳐 고려의 운명을 뒤흔들 하나의 사건이 언급되고 있다.

왜적이 고성(固城)[20]

·죽림(竹林)·거제(巨濟)를 침구하자 합포(合浦)의 천호(千戶) 최선(崔禪)과 도령(都領) 양관(梁琯) 등이 전투를 벌여 격퇴하고 적 3백여 명을 죽였는데[21], 왜적의 침구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사》 충정왕 2년

헬게이트 오픈 운명적인 언급 이후, 고려와 왜구의 관계는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이 기록이 언급하고 있는 1350년부터 고려 왕조가 역사상에서 사라진 1392년까지, 장장 40여 년 동안 총 394건이나 되는 왜구의 침공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이 왜구에 대한 공격은 이 43년 동안 1353년, 1356년, 1368년, 1386년의 단 4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발생하였다.

또한 이 왜구들은 과거 13세기의 왜구들이 남해안 지역을 약탈하고 곧 물러갔던 것에 비하여, 약탈 이후에도 곧바로 철수하기는커녕 연안 도시에 체재하거나 대륙 깊숙히 진공, 사람을 납치하고 고려의 지방 행정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이제 고려는 왜구를 근절하지 않고서는 국가로서의 존립 그 자체까지 위협받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심지어는 해로의 중요 거점에 주둔하면서 조운선을 기다리다가 털어먹기도 했다. 이로 인해 관료들의 녹봉이 9개월째 밀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6개월에 한 번 주는 것이라지만 파업하지 않은 것이 용하다.


3.1. 고려[편집]


당시의 고려는 무신정권(武臣政權)과 대몽항쟁 이후 이어진 원 간섭기로 국운이 크게 쇠한 상황이었고, 북으로는 홍건적(紅巾賊)과 몽골의 잔당들이 공격해 오고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고려 수군은 원나라의 간섭 이후로 와해된 기강, 무능한 장군들의 활약으로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구를 압도하는 함선 숫자에도 불구하고 수군 전술에서 처발린 이작도 해전이 대표적인 예시. 심지어 우현보가 수군 양성을 주장할 때 반박했던 "왜구에게 해상에서 덤벼봐야 발리기만 하니까 수군 필요없음." 이라는 극단적인 말이 나오는 상황까지 이어졌다.[22] 이러한 상황에서 왜구의 공격은 국가에 최악의 피해를 안겨줄 수 밖에 없었다.


3.2. 일본[편집]


당시 일본은 남북조 시대의 내전 상태라 규슈 일대의 통제 자체가 불가능했고, 오히려 규슈 일대의 호족과 도적들이 합세한 왜구들이 수도 교토 인근인 키나이(畿内)까지 약탈할 정도였다. 고려 정부에서는 왜구를 근절하기 위한 일본과 외교 교섭과 무력 압박을 동시에 했다.기사 이 중 규슈탄다이 였던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은 고려 사신과 우호를 나누고 왜구를 토벌했으며 포로가 된 고려인들을 송환해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왜구는 중앙 정부 자체가 없어져버려 고삐가 풀려버린 지방 세력들 그 자체였기 때문에 직접 토벌하지 않고서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실제로 이들 중에는 호족들의 사략집단이 다수 섞여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더 거창한 추측중에는 특히나 황산대첩 까지는 아예 남조가 한반도 남부로 피난가려고 정규군 끌고 처들어왔던거고 그 군세가 괴멸당하고서 북조에 백기든거 아니냐는 추측(그후에 작게 처들어오던 해적들은 그냥 지방 호족들이 털려고 처들어온 수준이고)까지 있을 판.

4. 1350년대의 왜구 침공[편집]


이하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서 제시된 모든 연도와 날짜 등은 음력 기준이다.


4.1. 1350~1351년, 충정왕 시기의 왜구 공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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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충정왕 시기부터 왜구는 최초의 대공세를 가하였다. 1350년 2월, 왜구는 현재의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인 고성을 통해 들어와 죽림, 현재의 거제시(巨濟市)인 거제를 연이어 공격하였다. 이에 합포(合浦)의 천호(千戶) 최선(崔禪), 도령(都領)이었던 양관(梁琯)이라는 인물은 왜구와 전투를 벌여 3백여명의 왜구를 죽였는데, 죽인 숫자의 왜구만 이 정도라고 한다면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십여 년 만에 왜구의 대규모 공세를 받은 조정에서는 이 일을 꽤 크게 받아들인 듯 싶은데, 왜구를 상대로 승전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조정에서는 왜적기양법석(倭賊祈禳法席)이라는 불교 관련 행사를 열며 이를 기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이들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권(李權)[24]을 경상ㆍ전라도 도지휘사로, 유탁(柳濯)을 전라ㆍ양광도 도순문사로 삼아 혹시 모를 왜구의 다음 공격을 대비토록 했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직 승전의 기쁨이 사라지기도 전인 불과 얼마 뒤, 여름 4월에 현재의 순천 지역인 전라남도 순천부(順天府) 앞바다에서는 무려 100여 척의 왜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나타났다. 이 100척의 왜선들은 순천을 공격한 뒤 남원(南原)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남원은 전라북도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왜선들은 섬진강을 타고 내륙 깊숙히 진군하여 조운선(漕運船)을 모조리 약탈한 것이다. 물론 남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공격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구례(求禮)처럼 남원을 공격하는 길목에 있었던 곳도 있었지만, 배를 타고 남해안을 거슬러 가야 하는 장흥(長興), 심지어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영광(靈光)까지 약탈당하고 만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서남해 전체가 단 한 번의 공격에 털렸다는 것.

한번 물꼬를 튼 왜구는 바로 다음 달에 66척의 함선으로 또다시 순천부를 공격했다. 이때 고려군은 왜구를 공격했는데, 한 척을 나포하고 13명을 죽이는 데 그쳤다. 한 척을 나포했다고 해서 나머지 65척이 모두 가라앉았을 리는 없었으므로, 이 함선들은 고스린히 다른 지역을 공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달인 6월 왜구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인 합포(合浦)에 20여 척의 규모로 나타나 합포를 유린하고, 몇 달 전 왜구의 공격을 받은 고성을 다시 한번 공격하여 불 질렀다. 또한 이 왜구들은 단순히 약탈이 아닌, 고려군의 군영을 불지르기까지 하였다.

이 시점까지의 왜구는 그래도 한 방향으로 공격을 한 하나의 세력이었다. 따라서 그쪽 방향에만 신경을 쓰면 어떻게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발동이 걸린 왜구는 이제부터 전방위적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왜구의 일부 세력이 경상남도를 유린하고 있었을 때, 정반대인 전라도 장흥의 안양향(安壤鄕)은 또 다른 왜구의 공격을 받았다. 이 왜구가 다시 나타난 또 다른 무리들인지, 아니면 순천 등에서 막히자 나뉘어 합포와 장흥을 공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바로 이 시점부터 왜구는 여러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는 확실하다.

이후에도 왜구는 11월 동래군(東萊郡)을 공격했다. 그래도 이 공격을 끝으로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뜸해지나 했더니……

충정왕 3년인 1351년 8월 경, 왜선 130여 척이 서남해를 거슬러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 대규모 왜선이 공격한 지역은 자연도(紫燕島)와 삼목도(三木島)로, 현재의 인천광역시 관할 구역에 해당한다. 즉 수도권 지역이 순식간에 왜구의 공격에 노출된 것이다. 이 왜구들은 각 지역을 초토화시켰고, 이후 남양부(南陽府)의 쌍부현(雙阜縣), 즉 현재의 수원까지 공격해 왔다.

놀란 조정에서는 만호(萬戶) 인당(印璫)과 전 밀직(密直) 이권으로 하여금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왜구를 막게 하고, 나가서 싸우라고 독려하였으나 이권은 "저, 사실 전 장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시는 못 따르겠습니다."개드립을 치면서 자리보전에만 급급했다.


4.2. 1352년~1359년, 공민왕의 즉위와 왜구의 공세[편집]


이런 상황에서 충정왕이 물러나고 고려 최후의 명군이라 불리는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했다. 그러나 공민왕 즉위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현재의 경상남도 남해군인 남해현(南海縣)이 왜구의 공격을 받았다.

이듬해인 1352년, 공민왕은 자신의 개혁 의지를 담은 유지(宥旨)를 전국으로 반포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한 경고도 있다. 이 무렵에는 왜구가 국가에 심대한 타격을 미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무슨 덕이 있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느냐마는, 현재 국가의 상황은 쇠퇴의 길을 밟고 있고 풍속은 타락했으며 조정에는 부적절한 인사가 횡행하고 나라 재정은 고갈 상태이다. 또한 이웃의 왜적들이 우리 강토를 침구하고 하늘에 재변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제 내가 스스로를 가다듬고 정신을 쏟아 하루도 빠짐없이 근신하여 사악한 자들과 간특한 소인배들을 제거하는 한편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관후한 정치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천자의 덕에 보답하며 선조가 남긴 왕업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모친의 마음을 위로하고 국가원로들의 기대에 부응하겠는가?

고려사》 공민왕 2년 2월 병자일 13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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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헌데 이런 경고도 무색하게 다음 달인 3월, 또다시 왜구의 공격이 닥쳐왔다. 이 왜구들은 경기도 주변을 노리고 있었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포왜사(捕倭使) 김휘남(金暉南)은 25척의 함선을 이끌고 나섰으나, 왜구가 20여척의 함선을 가지고 있자 싸우지도 않고 교동(喬桐), 현재의 인천으로 달아났다. 그 동안 왜구들은 강화도로 몰려와 그 지역을 도륙했다. 왜구들이 게속해서 증원되었는지, 김휘남은 중과부적을 느끼고 서강(西江)으로 물러서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도성에서 지원병을 보내 수비하게 하자 수도 개경의 사람들은 왜구의 침입이 여기까지 닥친것을 알고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이 왜구들은 교동(喬桐) 갑산창(甲山倉)에서 최원(崔原)이 격전을 치르고 2척을 나포하자, 이 지역을 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는지 물러난 듯 보인다.

이후 몇달간은 소규모의 침입만 있었는지 전라도 등지에서 몇몇 포로를 잡았다는 기록이 다지만, 그해 9월에는 다시 합포에 50여척의 왜선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25]

그 다음해인 1353년은 정말로 드물게 왜구의 침공이 없었던 해였다. 이때의 왜구에 대한 기록은 경상도 지역에서 8명 ~ 10명에 이르는 소규모의 왜구를 포로로 잡았다는 보고만 올라왔을 뿐이니, 설사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대단한 수준은 못 되는 해였다. 허나 이런 평화로운 시기는 그렇게 길지 못했다.

1354년 4월, 왜구는 전라도의 조운선 40여척을 노략질 했다. 허나 이런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볼 수 없는데, 고려 장수들의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승전했다는 기록은 없고 그저 몇몇 포로를 바쳤다는 식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상황은 계속 심해져서, 다음 해 1355년 4월에 이르면 왜구는 전라도의 조운선 2백여척을 약탈하는 수준에 이른다. 조운선이 2백여척이나 약탈 당할 정도면 사실상 조운을 이용한 세미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

그 다음 해인 1356년은 드물게도 왜구의 침입이 전혀 없었던 해였다. 지방에서 왜구 포로를 잡았다는 보고조차 없었던 것을 보면 소규모 교전조차 없었던듯. 그게 아니면 당하고도 보고를 안 했거나.

물론 다음 해인 1357년 5월 왜구는 다시 나타나 교동(喬桐)을 공격했으며, 이 때문에 수도 개경은 다시 경계령이 내렸다. 그런데 8월경, 왜구는 승천부(昇天府)[26]에 침입해 사찰인 흥천사(興天寺)를 공격했고, 충선왕(忠宣王)과 한국공주(韓國公主)의 영정을 탈취해 갔다. 왕조의 선왕들을 모신 영정마저 왜구에게 탈취당하는 막장스러운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9월 상장군 이운목(李云牧), 장군 이뭉쿠다이(李蒙古大)를 파견하여 왜구를 추격하게 했는데, 왜구가 교동까지 쳐들어오자 정작 이운목 등은 겁을 먹고 도망쳐서 이들을 감옥에 가두는 사태도 발생했다.

1358년에는 왜구의 침공이 더욱 거세졌다. 이 해 3월 왜구는 각산수(角山戍)[27]에 침입하여 선박 3백여척을 불태웠다. 이 무렵 정주부사(定州副使) 주영세(朱永世)라는 인물과 전라도 만호 강중상(姜仲祥)이라는 인물이 왕의 허락도 없이 임지를 불쑥 떠나 공민왕을 알현하겠다고 찾아왔는데, 계속되는 왜구의 침공으로 스트레스가 막심했던 공민왕은 격노하여 "왜 부른 적도 없는데 근무지 이탈하고 오냐!"라며 그들을 감옥에 쳐넣기까지 한다.

참을 만큼 참은 공민왕은 4월 합포진변사(合浦鎭邊使) 유인우(柳仁雨)가 왜구를 막지 못하자 감옥에 쳐넣는 한편, 대장군 최영(崔瑩)을 양광도와 전라도의 체복사[28]로 삼아 왜구를 막지 못하는 자들을 군법으로 처단하도록 하는 강경한 대책을 내세웠다. 또한 왜구가 충청남도 지역의 창고를 계속해서 노략질하자 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 고용현(高用賢)의 대책을 받아들여 바닷가의 창고를 내지로 옮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공은 끝이 없었다. 5월 왜구는 면주(沔州)[29]를 공격하고, 현재의 경기도 평택인 용성(龍城)을 공격했다. 왜구의 교동 침공 역시 이어져서 개경은 또 비상 준비 태세를 갖추고 추가적으로 병력을 징발해야 했다. 심지어 당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왜구의 침공이 너무나 극심해서 요새 관리들에게 녹봉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국가가 백성은 구휼하지 못하더라도 중앙의 관리들은 먹이는 게 보통일텐데, 그것마저 원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구가 심심하면 강화도와 인천 주변에 나타날 정도로 서해안이 완전히 왜구에게 장악되어 있으니 조운으로 세미를 걷을 방도가 없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중국인 장인보(張仁甫) 등을 책임자로 하여 150여명의 호위 병력을 붙여 전라도에서 세미를 걷게 했는데, 호송 병력이 있음에도 왜구가 불화살을 날리며 공격하자 모조리 패배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8월 경에는 수원과 인천이 계속해서 왜구에게 공격을 당했다.

다음 해인 1359년 역시 왜구의 침공은 여전했다. 왜구는 해남장흥을 유린했고, 5월에는 예성강(禮成江)에도 나타났다. 결국 공민왕은 왜구의 침입을 막게 해달라고 태묘(太廟)에서 기도까지 올렸는데, 전혀 소득도 없이 며칠 뒤에 왜구는 옹진현(瓮津縣)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옹진현은 황해남도 옹진군이다. 한반도의 북방 역시 왜구의 장난감이 된 것이다.

그러던 와중 현재의 전라남도 무안에서 전라도 추포부사(追捕副使) 김횡(金鋐)이 왜구를 상대로 소규모 승리를 거두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5. 1360년대, 유린 당하는 고려[편집]



5.1. 1361년~1362년, 북로남왜[편집]


이제 1360년대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중국을 뒤흔든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로 몰려오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왜구는 그런 사정은 전혀 봐주지 않고 고려를 유린했다.

이 해 4월에 왜구는 현 경상남도 사천시인 사천(泗川)을 공격하고, 5월 경에는 전라북도 군산을 공격했는데,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는 큰 가뭄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굶어죽고 하던 시기라,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왜구의 침입은 더욱 힘들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구가 평택을 향해 공격해오자 개경은 또 비상 체제로 돌아갔으며, 여러 장수를 새로운 자리에 임명하여 왜구와의 싸움에 대비할 채비를 했다. 그런데, 이때의 인사 조치에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겸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로 임명된 사람이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었다. 이제 슬슬 왜구와의 싸움을 계기로 새로운 세력들이 존재감을 어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책도 거의 소득은 없었는지, 왜구는 강화도를 공격해 3백여 명의 백성을 죽이고 미곡 4만 석을 노략했다. 이때 심몽룡(沈夢龍)이라는 사람이 왜구와 치열하게 싸워 13명을 죽이는 무쌍을 찍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살해되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동은 또 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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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 해에 고려를 철저하게 털었던 왜구는 다음 해인 1361년에도 역시 쳐들어왔다. 이때 전라양광도방어사(全羅楊廣道防禦使)였던 김횡(金鋐)은 목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의 배 다섯 척을 나포하고 3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등 당시 왜구를 상대한 고려군 중에서는 꽤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물론 대세에는 역시 별 영향을 못 주어서 3월에는 현 남해군이, 4월에는 고성과 울산이 연이어 왜구에 털렸다. 이후 8월에는 부산이, 그 이후에는 현 경상남도 양산시인 양주(梁州)가, 김해시인 김해부(金海府)가, 또 사천, 밀성 등이 끝도 없이 털렸다.

그런데 그 사이에 홍건적의 침입은 절정에 올라, 공민왕이 개경을 탈출해 몽진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1362년 1월, 고려 조정은 간신히 개경에서 홍건적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에 2월 경, 현 경상남도 하동군인 악양현(岳陽縣)이 왜구에게 공격을 당했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된 6월이 되자, 공민왕은 수원에 궁궐을 지을 생각을 했으나, 조정에선 이를 반대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걸작인데, 보통 궁궐 공사를 반대한다면 예산에 관한 문제일 텐데 이때 반대 의견은 왜구의 침공이 염려되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디 왕이 경상도나 전라도 가는 것도 아니고 수원에 간다는데, 왜구 때문에 못 간다는 것이다![30]

또한 이 해에는 나하추(納哈出)가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이성계가 무쌍을 찍으며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고려는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판이었다. 바다와 대륙 모두에서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5.2. 1363년, 수안현 침략[편집]


1363년 역시 왜구는 교동에 나타났는데, 이때의 규모는 무려 213척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에 개경은 또다시 비상 계엄령이 내려지고 안우경(安遇慶)이 왜적방어사(倭賊防禦使)로 임명되어 적에 대비하게 했다. 왜구는 개경을 치진 않았으나, 대신 현재의 경기도 김포시인 수안현(守安縣)을 공격했다.


5.3. 1364년, 갈도침략과 이작도 전투[편집]


1364년에서는 고려의 북방에서 큰 일이 벌어졌는데, 기황후(奇皇后)의 후원을 받은 덕흥군(德興君)과 최유(崔濡)가 1만여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 온것. 이에 최영과 이성계 등의 장수들은 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데, 고려의 시선이 북방을 향해 있는 동안 왜구는 엄청난 기세로 침공해 오기 시작했다. 3월, 왜구는 200여척이라는 대규모 함선을 현재의 경상남도 하동군인 갈도(葛島)에 정박 시켰다. 이후 하동, 고성, 사천, 김해, 밀성, 양주 등을 약탈한 것이다. 한편 경상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도 왜구의 압력을 받아 조운선이 출발을 하지 못할 정도였고, 이에 공민왕은 경기우도병마사(京畿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左都兵馬使) 이선(李善)이라는 두 명의 인물에게 현지로 가서 조운선을 호위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변광수와 이선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받은 전력은 교동(喬桐)·강화(江華)·동강(東江)·서강(西江)의 80여척. 먹고 살기도 바쁜 당시 고려의 실상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준의 전력으로, 후대의 진포해전 등에서도 고려가 동원한 함선은 백여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었다.

이 대규모 군대를 지휘한 변광수와 이선은 대도(代島) 지역에 진입했다. 그때, 왜구의 포로가 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친 내포(內浦) 출신 사람은 왜구가 이작도(伊昨島)[31] 부근에 숨어 있으니 함부로 진격하면 큰일 난다는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선 등은 이를 무시하고 군사를 움직였다.

요란하게 북을 치며 달려드는 고려 수군을 본 왜구는 함선 두어척으로 교전을 하다가, 짐짓 퇴각하는 연출을 보였다. 이에 고려 수군은 제대로 낚였는데, 곧 왜구는 함선 50여척을 동원하여 숫적으로 우위에 있는 고려 수군을 포위했다. 그러자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얼마 안되는 장교들로는 사태 수습을 하지 못했다. 그 이후 일방적으로 공세를 퍼붓자 병마판관(兵馬判官) 이분손(李芬孫), 중랑장(中郞將) 이화상(李和尙) 등은 속절없이 전사하고 말았다. 장교들까지 이렇게 당하자, 그 모습을 보고 멘붕한 병사들이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는 막장 이라는 말조차 부족한 일까지 벌어지는 판이었다.[32]

그런데 이런 혼란을 수습해야 할 최고 지휘관 변광수와 이선은 이를 구경만 하다 도망치기 시작했고, 사령관이 병사들을 버리고 도주하자 병사들은 "병마사께서 어찌해 군사를 버리고 퇴각하십니까? 그대로 머물러 나라를 위해 적을 쳐부숩시다!" 하고 절규했으나 변광수와 이선은 이를 무시하고 달아났고, 남은 병사들은 그대로 왜구의 칼날에 유린되었다.

이런 개막장 사태 속에 부사(副使) 박성룡(朴成龍)은 혼자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워 배를 노획 당하지 않고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는데, 워낙 미친듯이 싸운지라 박성룡은 몸의 여러 곳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또한 병마판관(兵馬判官) 전승원(全承遠)과 판관(判官) 김현(金鉉), 산원(散員) 이천생(李天生) 등도 미친듯이 싸워, 왜구는 도주하는 함선을 추격하면서도 함부로 달려들지를 못했는데 그때 도주하는 고려군의 선박을 서쪽에서 나타난 왜선 2척이 막아세웠다. 이 절망적인 사태에 치열하게 싸우던 병사들마저 바다에 몸을 던졌으며, 전승원은 혼자서 싸우다가 창을 여러 번 맞고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간신히 헤엄을 쳐 밤에 작은 배에 다시 올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도 간신히 살아난 전승원은 마찬가지로 헤엄을 쳐 허우적대는 고려 병사가 뱃전을 잡고 있는것을 보았는데, 이 병사는 화살을 맞은데다 너무 지쳐 도저히 배에 올라가지를 못했다. 그러자 전승원은 이 병사를 직접 끄집어 배에 태운 후, 역시 직접 노를 지어 3일 간 바다를 헤맨 끝에 남양부(南陽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물겨운 사투가 벌어지는 동안 변광수와 이선이 이끈 20석의 함선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으나, 나머지 함선들은 대부분 왜구에 당해 물귀신이 되었다. 이에 교동, 강화, 동강, 서강 등지에서 통곡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이런 대패를 당한 변광수, 이선 등은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33]

이 처참한 패배는 당시 고려군의 막장스런 시스템이 원인이 있는데, 각 지방은 따로 놀고 이를 제어할 중앙은 완전히 망가졌으니 중앙에서 지방에 뭐라해도 중앙의 것을 뺏아먹지 못할망정 자기건 내어주기 싫은 지방은 들은 척만 척했고 가진 게 없으니 군대도 마찬가지로 약체화가 된 것이다. 각 지방의 토호에서 출발한 당시 문관들도 자신들의 것을 내놓기 싫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원래 지방 토호였든, 원에게 붙어서 출세한 뒤에 지방의 토호가 되었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똑같았다.

게다가 군을 지휘하는 총책임자는 주로 조정의 문관들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무관이 아니라 군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군대는 자기맘대로 지휘하고 싶었으니 더더욱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휘할 병마사는 비상시 출동이 필요할때 임명되는 임시직이다. 그러나 전투는 오랜 시간 경험을 쌓은 지휘관이 필요한데 임시 지휘관이 내려와 싸우게 되었으니…… 막말로 왜구에게 수군 전술로 농락당한 셈.

그런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일전에 왜구를 상대로 꽤 활약을 보여준 김횡을 전라도 도순어사로 삼아 왜구를 막으라고 시켰는데, 왜구를 막으라 시킨 김횡이 군량미 절반을 착복하고 여러 조운선의 세미를 자기 재산으로 빼돌리며, 과부를 겁탈하는 막장 짓만 저질렀다.

그런던 김횡은 내포(內浦)[34]에 조운선을 가지고 갔는데, 마침 거기서 왜구를 만나 병력 절반을 잃었다. 그래놓고는 조정에는 뇌물을 주고 되려 승전했다고 보고를 올렸고, 이에 공민왕은 김횡에게 궁궐의 술을 선물했다.[35]

즉, 밑의 말단 병사부터 위의 지휘관들까지 제대로 된 전투의지가 없었고 능력도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주위 환경이 맞지 않아 아무 의미도 없었다.


5.4. 1364년, 김속명의 진해 전투[편집]


이런 일이 있은 후 5월, 고려는 뜻밖의 대승을 거두었다.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나가있던 김속명(金續命)이 진해현(鎭海縣)에서 3천여명의 왜구를 격파한 것. 이때 왜구는 김속명의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해 재빨리 배에 타서 도주하지 못하고 산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고, 산에서 목책을 쌓고[36] 버티려 했지만 김속명이 밀어붙여 공격을 퍼붓자 왜구는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 김속명의 승리는 당시까지 왜구에 당하던 고려가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왜구를 상대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 황산대첩 역시 1만 ~ 2만 사이의 왜구를 물리친 전투였으니, 3천명을 물리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김속명이 승리를 거둔 후 노획한 무기들을 바치니 공민왕은 중사(中使)를 보내어 옷과 술과 금띠를 하사했으며 군사들에게는 전공에 따라 관작을 주었다고 한다.[37]


5.5. 1365년, 창릉 침략[편집]


하지만 진해전투 정도의 승리로는 왜구의 횡포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후 6월에는 왜구가 해풍군을 공격했고, 또한 강화도를 건너올 기세를 보이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열(邊安烈),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석문성(石文成)을 보내 방어하게 했다. 다음 해인 1365년 3월에도 왜구가 강화도 주변에서 계속해서 출몰함으로 최영이 군사를 가지고 나서 동강을 지켰는데, 이 왜구들은 창릉(昌陵)에 침입하여 고려의 세조 왕륭(王隆)의 영정을 빼돌렸다. 이에 공민왕은 최영이 이런 지경이 일어났는데 사냥하고 놀았다면서 꾸짖고 계림윤(鷄林尹)으로 삼았는데[38], 최영은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왕이 나를 계림윤으로 인명했으니 이도 왕의 은혜이다." 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5.6. 1366년, 심악현 침략[편집]


1366년에는 3월 무렵에는 왜구가 심악현(深嶽縣)[39]을 공격했다. 또 왜구가 조운선 3척을 공격해서 많은 사람들을 참살하는 일이 있었고, 교동에 침입한 왜구가 약탈 이후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주둔하고 있자 또다시 개경이 비상 사태가 되는 일도 벌어졌다. 9월에는 양천현(陽川縣)의 조운선이 약탈 당했다.


5.7. 1367년, 제주도 목호들의 분란[편집]


한편 당시의 제주도 지역은 훗날 목호의 난(牧胡─亂)이 벌어지는 지역이었던 만큼, 목호(牧胡)[40]들과 고려 조정의 대립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1367년 제주의 목호들이 조정에서 파견한 목사(牧使)와 만호(萬戶)를 살해하자 공민왕은 김유(金庾)를 파견해 목호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목호들은 원나라 황제 원혜종(元惠宗)에게 "(원나라의) 만호부를 설치해 달라." 고 요구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김유는 목호들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왜구들을 토벌하려다가 제주도까지 간 것 뿐인데, 쟤들이 괜히 오버하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시라." 며 왜구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에 원나라 황제는 공민왕의 말에 따랐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지만 3월 경에는 다시 왜구들이 강화도를 공격했다.

이때 원나라에서도 왜구 문제를 꽤 크게 보고 있었는지, 마치 훗날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려했던 것처럼 왜구들이 고려를 찍고 한반도를 통과하여 중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 는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에 왔던 원나라 사신 걸철(乞徹)은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고려에서 왜구들을 체포하여 토벌해야 한다." 는 말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5.8. 잠잠해지는 왜구와 회유 작전[편집]


거의 절정으로 치닿는 듯 했던 왜구의 공격은 이 무렵부터 1371년 즈음까지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조금 소강 상태가 되었다.

1368년은 간만에 왜구의 침입이 없었던 해였다. 다만 왜구 방지 대책 문제로 고려가 일본에 보낸 사신 김일(金逸)은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와야만 했다.

한편 왜구의 침입이 너무 잦다 보니 고려 조정에서는 이들을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 뿐만 아니라 회유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뜻을 가진 왜구들을 거제현(巨濟縣)과 남해현(南海縣) 등지에 살게 해 주었으나 1369년 7월 이 왜구들은 다시 돌아가 버렸고, 11월에는 다시 영주(寧州)·온수(溫水)·예산(禮山)·면주(沔州)의 조운선을 공격해왔다.


6. 1370년대, 더 강력해진 왜구들[편집]



6.1. 1370년, 제1차 요동정벌 무렵의 왜구 공세[편집]


1370년, 공민왕은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1차 요동 원정에 나선다. 1월 경 원정군은 이인임(李仁任)을 필두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왜구는 2월 경 내포에 친입하여 병선 30여 척을 파괴하고 여러 주의 조세를 모조리 약탈하였다. 또한 왜구가 선주(宣州)[41]를 침공하자 양백연(楊伯淵)이 나가 싸워 왜구를 격파하고 50여 명을 죽이기도 했다.


6.2. 고려의 왜구에 대한 명나라 홍무제의 반응[편집]


이때 명나라로 갔던 사신 성준득(成准得)은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이 전하는 말을 가지고 고려에 돌아왔다. 이 서한은 공민왕이 불교에 빠져 있다고 디스하는 서한인데, 개중에 왜구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왜구에 대해 다루는 부분만 옮겨보자면 이러하다.

"근자에 귀국한 우리 사신에게 고려 국왕이 어떻게 정치를 행하는가 물었더니, 왕은 불교에만 힘을 기울이며 해안으로부터 50리 혹은 30리 ~ 40리 떨어진 지역이라야 백성들이 그나마 안정되게 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짐이 까닭을 묻자 왜놈들이 소란을 피우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성곽의 상황을 물었더니 백성은 있어도 성은 없다고 말했다. 또한 군대의 방비 태세를 질문하자 군기가 제대로 서 있지 않더라는 대답을 들었으며, 궁궐이 어떠하더냐고 질문했더니 궁궐은 있어도 정무를 보는 장소가 없더라고 말했다. 정말 상황이 그러하다면 짐이 국왕을 위해 심각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오랑캐 원나라의 국운은 이미 끝났으나 변방사막의 백성들은 아직 한꺼번에 통치할 수가 없는 형편이며 짐의 군대가 아직 요동과 심양 지역으로 출동하지 않았기에 그 틈을 타 광포한 자들이 가끔 나타날 것이 예상된다. 그놈들이 중국의 근심거리는 되지 않겠지만 고려를 소란하게 만들까 우려된다. 하물며 왜놈들이 십년 넘게 바닷섬을 휘젓고 다녀 고려 왕국의 모든 사정을 세세히 알고 있으리니 이것 또한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국왕이 그들을 물리치려 할 경우, 깊은 해자와 높은 보루 및 충분한 비축 물자가 없으면 사방에서 원병이 오더라도 적들의 예봉(銳鋒)을 꺾고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고려사》 공민왕 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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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洪武帝)
명나라도 왜구 문제에 이후 골머리를 앓긴 하지만, 명사(明史) 일본전(日本傳)을 보면 왜구가 본격적으로 명나라를 괴롭히기 시작한것은 1369년이고, 명사 태조 본기에서도 1369년에 왜구가 산동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주원장이 왜구 문제로 고려에 대해 걱정하는 뜻을 보였을 당시에는 명나라에서는 왜구가 아직까지는 아주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하간 고려를 침공하는 왜구는 명나라에서까지 유명세를 떨칠 정도였다.


6.3. 왜구의 공세와 수군 양성 계획[편집]


조금 잠잠했던 왜구는 이제 또다시 막강한 세력으로 고려를 공격했다. 왜구는 1371년에도 극성을 떨쳐, 3월에는 황해남도 해주(海州)를 공격하여 관아에 불을 지른 후 해주 목사의 부인을 납치해서 도주했다. 7월에는 왜구가 예성강(禮成江)으로 진입하여 고려 전함 40여척을 불태워 병마사 김입견(金立堅)을 장형에 처한 후 안산(安山)으로 유배보내는 일이 있었으며, 8월에는 왜구가 봉주(鳳州)를 공격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동강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로 양백연을, 서강도지휘사(西江都指揮使)로 이성계를 임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로 여진족, 홍건적, 몽골 군벌 등과 싸우던 이성계는 1372년에는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어 본격적으로 왜구와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1372년에는 간관(諫官)들이 전라도의 조운은 항상 왜구에게 약탈 당하므로 차라리 육로를 통해 세미를 걷어야 한다는 제안을 올렸다. 이 해 2월에는 왜구가 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인 백주(白州)를 공격했으며, 3월에는 순천, 장흥과 현재의 강진, 영암 등을 공격하며 전라도 지역을 들쑤셔 놓았다. 또한 4월에는 원산에 설치해놓았던 조창(漕倉)인 진명창(鎭溟倉)이 약탈 당했으며, 6월에는 강릉, 영덕, 덕원이 왜구에 당하고 말았다. 이때 고려군은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소리만 듣고도 달아났다. 헌데 당시 이옥(李沃)이라는 인물이 그 지역에서 관의 노비로 있었는데, 이옥은 신돈의 일파였던 이춘부(李春富)의 아들로 신돈이 척결되고 이춘부가 처형되자 노비로 끌려온 처지였다. 그런데 본래 용맹으로는 이름이 있어, 급한 김에 지방의 부사와 안렴사가 이옥에게 군사를 주어 왜구를 치게 하자 절호의 기회를 잡은 이옥은 용맹하게 싸워 왜구를 물리쳤고, 이 때문에 해방될 수 있었다.

또 이 무렵에는 안변(安邊)과 함주(咸州) 역시 공격 당했는데 안변부사 장백안(張伯安)은 제대로 수비하지 못해 곤장 87대를 맞기도 했다. 또 안변으로 다시 몰려온 왜구들은 부녀자를 납치하고 미곡 1만석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함주와 북청주(北靑州)를 침공하다가 만호 조인벽(趙仁壁)의 매복에 걸려 70여명이 죽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홍주(洪州)를 침공하는 6월 달에만 무려 5번의 왜구 침공이 있었다.

또한 7월에는 왜구가 양광도(楊廣道)를 쳐들어 왔으며, 9월에는 양광도 순문사 조천보(趙天輔)가 용성(龍城)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패해 전사하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 명나라의 홍무제는 제주도의 목호들과 왜구와의 연계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여 공민왕에게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전 너희 나라에서 탐라의 목자(牧子)에 관한 일을 아뢰기 위해 표문을 가지고 왔다. 내가 생각해보니 탐라의 목자들은 원나라 몽고인으로 당초 가축 기르는 일을 가업으로 삼을 뿐 농사 지을 줄도 모를 것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 동안 탐라에서 나고 자라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면서 살아온 무리들이다. 그놈들은 지난번 너희 나라에서 목사로 파견한 윤재상(尹宰相)을 살해했다. 하지만 너희들의 국왕은 만약 그놈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면 그들이 자신의 호의를 알지 못한 채 딴 마음을 품고 공연한 사단을 저지를까 우려한 나머지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놈들이 어찌 이 같은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내가 지금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국왕에게 상세히 나의 말을 전하라. 절대로 그놈들을 얕보지 말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해 깡그리 소탕하라!"

"듣건대 너희들 나라에서는 왜적들이 마구 날뛰며 바닷가 고을들을 약탈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피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적들을 막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 해적들이 바다를 건너와 우리 땅까지 노략질하기에 나는 바닷가 고을의 수어관(守御官)에게 명령을 내려 왜적의 배 13척을 나포하게 했다. 만일 탐라의 목자들이 이 왜적 무리들과 합세한다면 토벌하기가 다소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사》 공민왕 21년


한편 과거 이작도 해전에서 두 눈뜨고 보기 힘든 추태를 보였던 고려의 수군은 이 무렵에도 또다시 망신을 당했는데, 10월 왜구가 양천을 공격해 오자 고려군은 이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으나 수전에 익숙치 못했던 고려군은 그야말로 떡실신을 당했고, 고려군 원수의 깃발과 북 등을 탈취한 왜구는 강화도까지 가서 강화도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넘겨주는 굴욕을 안겨주었다.

왜구의 공세가 최근 몇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세지는 와중에서도 고려군, 특히 수군이 개막장 상황을 이어가고 있자 공민왕 역시 뭔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듯 보인다. 양천의 대패가 있은 직후 공민왕은 즉시 5군을 이끌고 승천부(昇天府)로 향했으며, 이후 인월곶(仁月串)으로 가면서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인물이나 교량 등의 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인물들을 모두 강경하게 처벌했으며, 이후에 수군 사열을 실시했다.

을미일. 왕이 경포봉(經浦峰)에 올라 함선을 살펴본 후 용천사봉(龍泉寺峰)에 유숙했는데 호위 태세가 느슨하다는 이유로 제조관(提調官)들을 장형에 처했다.

《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고려사》의 기록들 중에 왕이 군대를 사열하는 기록들이 없지는 않지만, 특별히 수군을 사열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왜구의 침입이 강력해지는 와중에서 막장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수군에 대해 공민왕이 이를 강화 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수군에 대한 고려 내의 일부 여론은 우현보전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적은 선박의 운항에 능하니 해전으로는 안 된다. 만약 함선을 건조한다면 백성들을 더욱 곤궁에 빠뜨릴 뿐이다.’라고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다의 도적들이 육지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사실입니다. 또한 적을 물리쳐 포악한 행위를 못하게 하는 것은 당초 백성을 위한 일인데도, 백성들에게 끼치는 작은 폐해를 염려하여 나라 전체에 큰 근심을 끼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지금 동·서강(東西江)에 모두 방어군을 배치했으나 적이 바다를 통해 의기양양하게 침범해 오면 아군은 해안에서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따름이니 아무리 백만의 정예군이 있다한들 바다에서야 어찌하겠습니까? 전함을 건조하고 병기를 착실히 준비한 다음 조류를 따라 멀리까지 적을 몰아내고 요충을 막아버리면 적이 아무리 물에 익숙한들 어찌 날아 건널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된다면 놈들을 사로잡고 소탕하는 일도 반드시 가능할 것입니다."

《고려사》 우현보전


어차피 왜구하고 해전으로 맞짱 떠도 발리기만 하니, 함선 건조는 백성들 귀찮은 일만 만드니까 하면 안된다 는 여론이 있었던 것. 대한민국 해군 높으신 분들이 보면 피거솟 할듯. 물론 당시 상황을 보자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고, 이후 진포해전 등에서 증명되었듯 강력한 해군력이야 말로 왜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찌되었건 대략 이 무렵부터 수군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우현보의 경우는 왜구를 막는 방법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개중에서도 수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여 설명했다.

또한 1374년에는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이희(李禧)가 '수군으로 왜구를 막아야 한다.' 는 대책을 올리자 공민왕은 이를 칭찬했으며, 정지(鄭地) 역시 수군 양성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하자 즉시 전라도 안무사(安撫使)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 외에 최신길(崔臣吉)과 박덕무(朴德茂) 등도 이렇게 해서 경기왜인추포부사(京畿倭人追捕副使)가 되었다. 여러모로 공민왕이 수군 육성에 관심이 많이 생긴 듯. 이후 공민왕은 최영과 더불어 수군 양성을 논의하였는데, 최영 역시 이에 동의한 것처럼 보인다. 이때 최영은 기왕 키우는 거 왕창 키우자 는 심리인지 전선 2,000척 건조 계획이라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고려 말 왜구의 최대 규모인 진포해전 당시 왜선의 숫자가 500척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가히 어마어마한 계획. 그러나 당연하게도 백성들의 반발이 너무나 심해서 결국 그 정도 수준의 선박 건조 계획은 철폐되었다.[42] 어찌되었건 고려군은 왜구 침입을 계기로 수군 전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6.4. 1373년, 삼일포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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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공민왕은 왜구를 막기 위해 양백연(楊伯淵)을 서북면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이성림(李成林)을 서해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했다.

2월에는 정말 간만에 고려군의 입장에선 시원한 승전 소식이 들려왔다. 왜구가 구산현(龜山縣)의 삼일포(三日浦)로 대거 몰려오자,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였던 홍사우(洪師禹)가 군사를 끌고 가서 왜구를 대파한 것이다. 이후 왜구는 산으로 도주했는데, 홍사우는 이를 추격하여 사면으로 포위하여 적을 압박하고 밀어붙여 2백이나 되는 왜구의 목을 베었고, 물에 빠져 죽은 왜구가 무려 1,000명이 넘었으며, 노획한 무기가 셀 수조차 없었다. 희대의 졸전만을 거듭하던 당시 고려군으로서는 상당한 대승을 거둔 것. 홍사우는 본래부터 청렴하고 강직하여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에는 안타까운 뒷이야기가 있는데, 홍사우의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홍륜이었던 것. 삼일포에서 홍사우가 대승을 거둔 바로 그 다음 해, 홍륜은 공민왕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고 당연히 홍씨 집안 역시 반역자의 집안이 되어 초토화되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전라도에서 도순무사로 있던 홍사우는 그대로 잡혀 아들 홍이(洪彛)와 함께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애시당초 홍사우는 홍륜의 행동들이 질이 안 좋아 공민왕에게 "홍륜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니 궁중에 두지 마시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심지어 홍륜을 죽이려고도 생각했으나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부자가 처형될 때 홍이는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니 나를 죽이고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고 홍사우는 "나는 늙었으니 나를 죽이고 제발 우리 아들만은 살려 달라."고 울었다. 그리고 처형 직전까지 아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으며 "내가 그렇게 왜구를 많이 죽였건만, 이제 그 공들은 다 어디에 있단 말이냐?"고 소리쳤다. 부자가 그렇게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 중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홍사우의 대승이 있던 2월이 지나고 3월 경 왜구는 하동군을 공격했다. 4월 경 왜구가 개경 근처의 섬까지 다가오자 조정에서는 평리(評理) 유연(柳淵)을 동강으로 보내 이를 수비하게 했다. 왜구는 이 때문인지 두어달 정도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6월에는 갑자기 동강과 서강으로 공격을 와 한양부까지 침입 해 민가를 초토화 시키자 인근 수백여리가 두려움에 떨었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환관 손내시(孫內侍)가 난데없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홍무제는 "내가 조사해보니까 자살했다는 건 구라고 너희들이 폭행하고 독살했다면서? 그 환관은 사실 나랑 10년 넘게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라면서 "내가 너희들을 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자꾸 나댄다면 5년 내에는 장담 못해도 10년 내로 아작을 내버리겠다." 는 발언을 했다. 이때의 말에 왜구 문제가 또 언급되어 있다.

"왜구들이 항상 너희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너희들은 응당 3백 혹은 5백 척의 배를 준비해 군인들로 하여금 왜구를 잡게 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 될 것이다. 여기는 그 곳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으나 왜구들이 침구했을 때 우리는 군사를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왜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명주위(明州衛)의 대지휘(戴指揮)와 태창위(太倉衛)의 서지휘(徐指揮)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이에 다시 어지휘(於指揮)를 보내 그들을 체포하게 했는데, 체포한 왜구 가운데 젊은 왜인의 입을 찢고 불알을 깠더니 마침내 바닷가가 평온하게 되었다."

"듣자하니 왜적들이 2백리 ~ 3백리를 횡행하며 그대 나라를 노략질해도 그대들은 아예 관심이 없는지 파괴되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성곽도 보수하지 않고 성의 해자(垓字)도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의심만 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고려사》 공민왕 22년


내용을 보자면 우리들은 왜구 발랐는데 너희들은 뭐하고 있냐 는 이야기다. 출신답게 말에서 패기가 넘친다. 그러나 사실 명사 일본전을 보면 홍무제의 서신과 달리 이 무렵에 명도 고려처럼 왜구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다만 1380년대 초반에 장군 탕화(湯和)가 해안 지역을 방비하고 6만에 가까운 병력과 300여척의 함선으로 방비하여 왜구를 막기는 했다.

7월에는 왜구가 교동을 공격했으며, 8월에는 해주(海州)를 침입해 목사 엄익겸(嚴益謙)을 살해했다. 또 서해도 만호(萬戶) 허자린(許子麟)이 왜구를 막아내지 못하자 감찰관인 체복사(體覆使)로 임명된 삼사좌윤(三司左尹) 정단봉(鄭丹鳳)을 보내 벌을 주게 했는데, 이 정단봉이라는 작자가 순전히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허자린을 목 졸라 죽이고, 허자린의 동생이 억울함을 표하자 정단봉이 달아나는 막장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왜구를 막지 못한 벌로 이성림, 지심(池深) 등이 참형에 처해지고 도흥(都興) 등이 파직되기도 했다. 한편 고려 내에서는 이 무렵부터 왜구를 막으려면 화약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고려는 아직 화약을 자체 생산 하지 못했으므로 명나라 중서성(中書省)에 "화약 좀 쓰게 해주세요."라며 화약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왜적이 소란을 일으키며 출몰한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본국 연해 주군의 요해처에는 군사를 배치해 방어만 하게 했을 뿐 바다까지 나가 추격해 체포하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적들이 너무 기세등등한지라 이제는 바다에 나가 추격 체포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근심을 근절하기 위해 관원을 파견해 왜적을 체포할 함선을 건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선에서 사용할 병기·화약·유황·염소(焰焇) 등 물품을 조달할 길이 없어 의논한 끝에 상국 조정에 부탁하게 되었으니 상기 물품들을 보내 주셔서 왜적을 격퇴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려사》 공민왕 22년



6.5. 1374년, 합포 전투등과 공민왕의 죽음[편집]


이 해 공민왕은 앞서 설명한 대로 이회와 정지 등을 기용했다. 이 해 3월에는 안주(安州)로 쳐들어오자, 목사 박수경(朴修敬)[43]은 이를 물리쳤다. 하지만 왜구는 며칠 뒤에 다시 공격을 가했으며, 비슷한 시기 경상도에서 함선 40여척을 날려버려 고려군은 많은 전사자가 생겼다.

한편 4월 경 당시까지 고려군은 왜구와 맞서 싸운 동안 가장 거대한 타격을 입는다. 무려 350여척의 왜구는 합포(合浦)의 고려군 군영을 공격하여 병선을 불지르고 박살을 내었고, 이에 죽은 고려군의 숫자는 무려 5,000명을 넘었다.[44]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피해인데, 당시의 고려는 1388년 2차 요동 정벌 당시에도 잔뜩 끌어모은 병력이 5만, 전투병은 3만 8천이었던 나라였다. 요동 원정군 외에 지방에서 왜구를 막던 병력 등을 넉넉하게 잡아 1만이었다고 쳐도 전 병력이 6만 정도인데, 6만 중에서도 5,000명이라면 나라에서 가용할 수 있는 전 병력의 12분의 1이 한번에 녹아버린 수준이다. 야전군 1개가 사라진다고 가정해보자. 하물며 1388년 당시는 비교적 한숨 돌린,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으므로 이 시기에는 그보다도 못했을 터이다. 하물며 중세의 전투에서는 살상률이 경이적일 정도로 높지 않기에[45], 1만이나 2만이 궤멸 했다고 해도 그 모두가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사망자만 5천여명 이라면 추가적인 피해는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더구나 제대로 전투라도 치른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군영이 공격을 받아 박살이 났는데, 이는 왜구의 전력이 그만큼 엄청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죽은 고려군들도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한 셈이다.

이 당시 합포의 책임자는 일전에 내포에서 왜구에게 떡실신을 당하고도 뇌물 잘 바쳐 벌을 안 받은 김횡이었다. 김횡은 김흥경(金興慶), 김사행(金師幸)에게 빌붙어 경상도 도순무사가 된 다음, 전라도에 있을 때처럼 합포에서도 재물만 모으며 탐욕스럽고 못된 짓은 다 골라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안렴사 유구(柳玽)라는 인물이 김횡을 탄핵하자, 김횡은 역으로 유구의 뒷조사를 해서 허물을 찾아 조정에 보고하며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알랑방귀 끼며 합포를 관할하게 된 것이 김횡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난데없이 나타난 350여척의 왜구에 5,000여명이 손도 못써보고 전사했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사태에서는 당연히 책임자가 처벌받기 마련이었다. 공민왕은 바로 조림(趙琳)을 보내어 김횡을 처형했고, 그 시체를 찢어 각 도에 조리돌림 하여 경고의 상징으로 삼았다. 인과응보라고 할만 하지만 이런 개쌍놈 때문에 죽은 5,000여명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이 합포의 역대급 패전이 있은 직후 평안북도의 목미도(木尾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막던 서해도만호(西海道萬戶) 이성(李成)과 부사(副使) 한방도(韓方道), 최사정(崔思正) 등은 모두 전사했다. 또 왜구는 인천을 공격 했다.

5월에는 왜구가 강릉, 경주, 울주, 삼척을 연이어 털며 기세를 올렸다. 6월에는 양주(襄州)에서 전투가 벌어져 고려군이 왜구 백여명을 참살하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8월에는 회양(淮陽)이 공격 당했다. 9월에는 도성 근처까지 진군한 왜구 때문에 수도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으며, 안주(安州)가 공격 당했고 12월에는 밀성(密城)이 공격 당해 관청이 불타고 사람들이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갔으며 재물들이 약탈 되었다.

한편, 화약을 요구한 고려의 요청에 명나라 중서성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전했다.

"홍무(洪武) 7년 5월 초나흘날 왜적을 체포하기 위한 함선의 건조에 사용할 병기·화약·유황·염초(焰炒) 등의 물품을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접수했습니다. 그 공문에 의거해 조사해 본 즉 고려국에서 왜적을 체포하기 위해 건조하는 함선이 정말 바다로 나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적절한지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중국에서 사용하는 화약·염초·유황의 예비분이 많기는 하나 쓰임새 또한 많으니 중국을 놔두고 외국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홍무 7년 5월 초여드레 중서성 대도독부(大都督府) 어사대(御史臺)의 관리가 봉천전(奉天殿)에서 다음과 같은 황제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고려에서 공문을 보내 왜적을 체포할 함선에 소용되는 병기와 화약을 요청해 왔다하니, 내 생각에는 매우 좋은 일인 것 같다. 예전처럼 백성들의 고통을 그냥 좌시하지 않고 이제는 백성을 구원할 마음이 생겼기에 저렇게 중국에 공문을 보내 온 것이다. 왕전(王顓: 공민왕)이 정말 내 명령을 따를 의사가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이러한 명령들을 내려보내라. 그러면 그는 반드시 따를 것이다. 빨리 문서를 발송해 그 곳에서 초(硝) 50만 근을 수집해 모으고 유황 10만 근을 구해서 가져오게 하라. 그러면 여기에서 그것에 섞어 쓸 다른 약을 배합해서 고려로 보낼 줄 것이다. 또한 왜적을 체포할 함선을 새로 건조하면 유능한 장관(將官)으로 하여금 함선을 인솔해 와서 나에게 보이도록 하라. 이를 잘 시행하라.'

이에 중서성의 어사대관(御史臺官)이, 그 나라에는 그런 물건들이 없을 지도 모른다고 아뢰자 황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같은 하늘과 해 아래 있는 나라인데, 여기에는 있는 것이 거기에는 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한 물품은 아무 데나 다 있는 법인데 다만 그곳에서는 배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너희 재상들은 나의 이런 명령을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고려사》 공민왕 23년


즉 명나라 중서성에서 홍무제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홍무제는 "고려가 왜구를 막으려고 한다니, 정말 좋은 일이지." 라고 하면서도 "좋아, 그럼 화약 재료들 여기로 보내봐. 그럼 만들어서 줄테니까." 라고 말하고 있다. 중서성에서는 그런 재료가 고려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으나 홍무제는 "그럴 리가 있나." 라며 무시했다. 물론 화약 제조법을 안다면 어떻게든 고려 내에서도 만들 수야 있겠지만 화약을 만드는 재료들 자체가 귀한 편인데, 홍무제는 고려를 칭찬하면서도 재료는 대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노련하게 표현했다. 또 새로 함선을 만들면 나한테 와서 한번 보여주어라. 라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묘한 언급까지 했다.

그런데 그 해 9월, 공민왕이 시해되고 만다. 이로써 고려는 우왕(禑王)의 시대에 접어들었다.[46]


6.6. 1375년, 우왕의 즉위와 왜구의 공세[편집]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한 우왕은 즉위와 동시에 왜구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당했다. 즉위한 바로 그 해인 1374년 12월에 밀양이 공격 당한 후 즉위 원년인 1375년 1월에도 밀양이 재차 공격을 당한 것이다. 시간 순서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12월부터 1월까지 계속 공격이 이어지던 것인데, 이에 지방의 만호들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장군 최인철(崔仁哲)이 파견되었다.

그 이후 2월에 동지밀직(同知密直) 한방언(韓邦彦)을 양광도 부원수(副元帥) 겸 순문사(巡問使)로 임명했는데, 임명하기가 무섭게 3월, 왜구가 경양현(慶陽縣)[47]에 쳐들어와 한방언이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고 말았다.

그런데 5월 경, 왜인 중에 등경광(藤經光)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부하들을 이끌고 장차 공격해 올것이라고 하며 공갈을 치며 양식 등을 얻어내려 했고, 고려 조정에서 이를 주는 명목으로 투항 비스무리하게 순천(順天)ㆍ연기(燕岐) 등에 머물면서 관아에서 양식을 공급 받았다. 이때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였던 김선치(金先致)[48]는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세우(金世祐)의 말을 듣고 술자리를 열어 등경광 등을 초대한 다음, 이후 급습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였지만 작전이 누설되어 등경광 등은 도주했으며, 겨우 세 명만 잡아 죽였지만 김선치는 벌을 두려워해 70명을 죽였다고 구라를 치다가 걸려 유배되어 수졸(戍卒)이 되었다. 그런데 고려사 김선치 전이나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 전까지 왜구가 침략을 해와도 가축이나 사람은 죽이지 않았지만 이 일로 앙심을 품어 부녀자나 어린 아이까지도 모두 죽였다고 서술되었는데, 이 항목에도 구구절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듯 왜구가 사람을 죽이고 포로로 잡은 기록이 많은데 갑자기 나타난 엉뚱한 소리다. 아마도 김선치에 대해 기록하면서, 김선치 최대의 병크를 부각하다보니 들어간 서술로 보인다.

이후 8월에는 낙안(樂安)에도 쳐들어왔다. 9월에는 왜구가 덕적도자연도 등지에 모여 개경이 위급했는데, 당시 김의(金義) 등이 심왕(瀋王) 모자(母子)를 데리고 고려 북방 가까이 왔다는 소문이 있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임견미(林堅味) 등을 서경상원수(西京上元帥)로 삼아 대비하던 참이었다.# 그런 무렵에 갑자기 측면에서 왜구가 몰려오자 당황스러운 판국이었는데, 급하게 양광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이성계최영을 모두 파견해 동강과 서강에서 위세를 보임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왜구는 현재의 충청남도천안시, 서산시, 홍성군 등을 공격해 왔다. 또한 12월에는 왜구가 양광도로 몰려왔기에,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김사보(金仕寶)를 병마사로 보내 이를 방어하게 했다.


6.7. 1376년, 홍산대첩[편집]



6.7.1. 3월~7월[편집]


1376년 3월에는 왜구가 진주(晉州)로 왔는데, 조민수(曺敏修)가 이들과 소규모 교전을 벌여 13급을 베었다. 6월에는 임주(林州)에서 병마사 유실(柳實), 지익주사(知益州事) 김밀(金密) 등이 20여척의 함선으로 침공한 왜군과 싸워 이겼으며 고성현도 노략질을 당했다.

7월에는 더욱 대담해진 왜구가 20여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원수의 군영을 공격했고, 나주로 이동하며 고려군의 함선을 불태웠다. 마침 이 지역을 방어해야 할 사람은 전라도 원수 겸 도순무사였던 하을지(河乙沚)였었는데, 이 하을지는 탄핵을 당했기에 이를 대신하여 유영(柳濚)[49]이라는 인물이 원수로 임명된 상태였다. 설사 자리가 교체된다고 하여도 인수 교대를 할때까지는 방어 임무를 맡아야 했는데, 하을지는 진주에 있는 자기 땅으로 돌아가버려 피해가 커진 판이었다. 우왕은 하을지를 잡아다 곤장 백대를 때렸다.[50]

이후 왜구들은 현재의 부여군인 부여(扶餘)에 왔는데, 이 왜구들이 나주를 공격하고 북상한 왜구들인지 새로 등장한 왜구들인지는 불분명하나 그 기세가 상당히 강력했다. 이에 목사 김사혁(金斯革)은 정현(鼎峴)[51]에서 왜구를 막아세웠으나, 패배하였고 공주 역시 왜구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양광도 원수였던 박인계(朴仁桂)는 회덕현(懷德縣)의 서천부(徐天富)라는 자가 정현 전투를 돕기 위해 출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아 처형하고는 자신이 왜구를 막기 위해 나서 현재의 논산시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박인계는 말에서 떨어져서 적에게 죽고 말았는데, 평소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판이 좋던 사람이었다.


6.7.2. 홍산대첩, 최영의 승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산대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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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

고려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왜구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한 최영은 자신이 나서 왜구를 토벌하겠다고 우왕에게 허락을 구했다.

"보잘것없는 왜구들이 이처럼 방자하고 난폭하니, 지금 제압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꼭 이길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으며, 군사들도 평소에 훈련되지 않은지라 전투에 투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뜻은 결코 쇠하지 않았으니, 빨리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놈들을 격퇴하게 허락하여 주소서."

《고려사》 최영전

당초에 우왕은 최영이 연로하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52] 최영이 계속해서 출병을 요구하자 결국 승낙했고, 최영은 그 즉시 잠도 자지 않고 출병했다. 당시 왜구의 기세가 대단히 흉흉하여 "왜구가 곧 도성에 오려고 한다." 는 출처 불명의 헛소문까지 퍼져 개경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조정에서도 군사를 풀어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왜구가 송악산으로 온다는 소문에 송악산의 승려들을 징발하여 병사로 삼아 대비하기까지 했다.

파일:dTDGOOn.jpg이제 홍산(鴻山)[53]에 이른 왜구는 기세가 상당히 강력했는데, 양광도 도순무사 최공철과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兵馬使)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홍산에 도착하자 왜구는 험한 요지에 자리 잡고 있고, 삼면이 모두 절벽에 길이라고는 한 길뿐이라 그 길로 진군하는 것은 어그로 맞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이에 최영이 직접 사졸들의 선봉에 서서 정예병을 이끌고 앞장서 돌격을 하자, 적들이 바람 앞의 풀처럼 쓰러졌다.[54] 이렇게 앞장서서 돌격하다보니 당연히 최영 본인도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풀 속에 숨어 있던 왜구 한 명이 벌떡 일어나 화살을 쏘자 최영은 입술을 맞았다. 그런데 이후 태연하게 적을 쏘아 넘어뜨린 다음 입술에 박힌 화살을 뽑아버렸다. 최영은 피를 흘리면서도 더욱 분발해 싸워 적을 완전히 무찔렀다.

이후 최영이 판사(判事) 박승길(朴承吉)을 보내 이를 보고하자 우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소식을 전한 박승길에게도 백금을 주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 등을 보내 최영에게 재물을 주고는 의원 어백평(魚伯評) 등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최영을 치료하게 했다. 이후 최영이 개선하자 우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를 맞이했는데, 마치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는 듯했다고 한다.

이 홍산대첩의 정확한 전과는 애매한데, 우왕은 술을 따라주면서 최영에게 "왜구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느냐." 고 물었지만 최영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고 대답했다. 이에 재상들이 다시 한 번 물어보았지만 최영은 또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적이 많았다면 이 늙은이가 살아 올 수 있었겠느냐." 고 대답했다.[55]


6.7.3. 9월~10월[편집]


홍산대첩 이후 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은 그 해 9월이었는데, 왜구는 현 전라북도 고부군, 정읍시, 고창군, 김제군 지역을 연이어 공격했고, 이에 조운선 이동이 불가능해지자 기왕 이렇게 된거 전라도와 경상도 연해 주군(州郡)의 요역과 세금을 차등을 두어 면제 해 주는 정책이 실시되기도 했다.

또한 전주를 침략한 왜구와 싸운 유실은 처음에 패배하여 위급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후 김제 귀신사(歸信寺)[56]에 주둔한 왜구를 급습하여 진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 후 왜구가 현 군산 지역인 임피현(臨陂縣)를 공격하여 다리를 끊어버려 수비하고 있자, 유실은 몰래 다리를 만들어 적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도지휘사(都指揮使) 변안열(邊安烈)이 안렴사였던 이사영(李士穎)을 시켜 매복하게 했는데 이 작전이 어설퍼 왜구에게 들켰고, 곧바로 왜구가 반격을 가하자, 패배하여 유실은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10월에는 왜구가 진포(鎭浦)를 공격했고, 강화부를 침공하여 고려군의 병선을 불태웠다. 이때 한주(韓州)에서 최공철이 왜구 100여명을 죽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50여척의 왜구 함대가 현 전라남도 부안군인 부령현(扶寧縣)을 노략질 하면서 다리를 부셔버리고 고려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자, 변안열, 나세(羅世), 조사민(趙思敏) 등은 밤 중에 다리를 놓고 기습하여 왜구를 공격했다. 그러자 무려 천여명이 넘는 왜구의 보병과 기병은 근처의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 버텼는데, 고려군은 사방에서 이를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11월에는 왜구가 경남 거제로 공격해 오고, 함안(咸安)ㆍ동래(東萊)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고성(固城)ㆍ영성(永善) 등을 모두 노략질 했다. 또한 진주가 공격 당했고, 밀성이 공격 당했다.

12월에는 합포의 고려 군영이 공격 당했으며, 의창(義昌)ㆍ회원(會原)[57]ㆍ함안ㆍ진해ㆍ고성ㆍ반성(班城)ㆍ동평(東平)ㆍ동래ㆍ기장 등 동남쪽 지역의 현들이 모두 노략질 당하고 백성들이 학살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원수로 있던 사람은 김진(金縝)이라는 인물이었는데, 이 사람은 김횡 같은 막장으로 막으라는 왜구는 안 막고 기생 중에 얼굴 예쁜 사람들을 모아다 날마다 군중에서 부하들과 놀기만 했다. 이에 사람들은 김진이 소주를 좋아한다 해서 김진의 무리들을 소주패라고 불렀다.

이 소주패의 김진은 군졸과 부장들을 때리고 욕하며 똥군기를 잡았는데, 이후 왜적이 오자 김진이 싸우려고 해도 지휘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병사들은 "우리를 보내지 말고 소주패를 불러서 싸워봐라."라는 태도로 나왔기에 대패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김진은 패배한 죄명으로 평민이 되어 가덕도(嘉德島)에 유배되었다.


6.8. 1377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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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경 고려 말 왜구의 대규모 침입 피해 상황

바로 전 해에 벌어진 홍산전투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기세는 눈꼽만큼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1377년은 대 왜구 전쟁에서 고려가 이전까지 겪었던 시련들 중에서도 너무나 심대한 시련을 당했던 시기였다. 끝을 모를 정도로 불 붙었던 왜구의 기세는 이제 하늘을 찌를 수준이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측의 사진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1377년에는 아예 연해주 지역과 요동반도산둥반도 일대를 왜구가 대규모로 공격하여 악탈하고 수탈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여진과 거란지역을 침략하여 악탈하였고 울릉도에서도 왜구의 침략이 이어졌다. 이미 남쪽의 경상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은 더 이상의 설명조차 필요 없을정도로 심각하였다. 탐라와 제주에서 보내던 공물조차 왜구가 악탈하여 개경으로 조운선이 올라가지 못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이때 제주도는 스스로 방어하여 제주도 해안가 일대의 환해장성을 다시 쌓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1월, 왜구는 합포의 회원창(會原倉)을 공격하여 고려군의 군량까지 약탈했다. 당시는 고려군 역시 극도의 군량 부족 사태를 겪고 있었는데, 여러 주군에서 거둔 쌀을 품미(品米)라 하여 보관했는데 이것이 약탈 당한 것이다. 고려군은 왜구에게 군량까지 삥 뜯기는 판이었다.

2월에는 왜구가 신평현(新平縣)[58]을 공격했는데, 양광도 도순무사 홍인계(洪仁桂)가 이를 무찔렀다. 그러나 이후 왜구가 현재의 천안시인 경양(慶陽)을 공격하고 평택현을 공격하자, 양광도 부원수 인해(印海)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3월에는 왜구가 착량(窄梁-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일대로 조선시대에는 손돌목이라 불림)을 공격해서 군함 50여척을 모두 불태워 고려군의 함선들이 불타는 빛 때문에 밤이 낮 같을 지경이었고, 죽은 병사만 1,000여명을 넘었다. 이때 책임자였던 만호(萬戶) 손광유(孫光裕)는 화살을 맞았으나 간신히 도주에 성공했다. 최영은 일전에 손광유에게 "착량 강어귀에서 군대 위세만 보일 뿐, 절대로 바다로 나가서는 안 된다." 고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손광유가 잠시 군대를 이끌고 착량을 벗어났는데, 그렇다면 재빨리 복귀해야 함에도 술에 잔뜩 취하여 곯아떨어진 사이에 왜구의 기습을 받아 군대가 개박살이 나버렸던 것이다. 여기도 원균, 저기도 원균 물론 패전은 손광유의 잘못된 지휘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최영의 당부에서 보이듯이 고려 수군은 왜구에게 완전히 제해권을 빼앗겨, 마음대로 바다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 착량 전투는 고려 입장에서도 아찔한 상황이었는데, 김포시 대곶면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인 강화해협의 입구로 조선시대에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온갖 포대로 도배했던 곳이다. 그러한 착량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개경과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향하는 수로가 그대로 열리는 것을 뜻했다. 아래의 강화도 침공 또한 착량 전투의 여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해주(海州)의 수미사(須彌寺)라는 절이 풍수지리상 일본의 맥이 된다라는 논리로 문수도량(文殊道場)이라는 행사를 열고 수미사에서 액막이를 함으로써 왜구를 막으려고 했다. 어찌보면 참 눈물겹기까지 하다.

여하간 왜구는 기세를 이어 강화도를 침공했는데, 만호 김지서(金之瑞), 부사 곽언룡(郭彦龍)은 마리산(摩利山)으로 도망을 갔고 왜구는 김지서의 부인을 납치했고, 왜구에게 강간 당하지 않으려던 처녀 세 명이 강에 빠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59] 이런 상황에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나세는 출정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제가 문학으로 나라를 빛낼 수도 없으며, 고관의 후예라서 호의호식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늘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생각해 왔으니 바라옵건대 군사를 지휘해 강화에 들어가서 왜적을 격퇴하게 허락하소서."

《고려사》 나세전


우왕은 나세의 뜻을 장하게 여기고 대궐에서 기르는 말 두 필을 내려주었으며, 그 휘하 장수들에게 열 필을 나누어 주었다. 나세는 조사민, 이원계(李元桂)·강영박수년 등과 함께 왜구를 막기 위해 나섰으며, 최영은 도통사(都統使)로써 승천부에 주둔하여 방비하고 있었다. 또한 이인임, 경복흥(慶復興)의 지휘아래 이성계, 임견미, 변안열, 양백연 등을 두어 적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는 급하게 병사를 징발했다.

그러자 왜구는 강화도에서 물러나더니 수안현(守安縣), 통진현(通津縣), 동성현(童城縣)[60] 등을 침략해 지나가는 모든 곳을 황폐화시켰다. 심지어 왜구들은 이렇게 소리칠 정도였다.

"막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樂土)구나!"


이 당시 최영, 경복흥, 이인임은 모두 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부근에서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최영은 갑자기 "왜구가 이토록 마음껏 활개치니 원수된 몸으로써 면목이 없다."라고 탄식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런데 다른 원수인 석문성(石文成)은 "여기 노래 잘하는 기생이 왔나."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등, 여러가지로 개판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화도에서 수도를 위협하는 적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찰나에, 남부 지방에서 가히 절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길, "왜적이 대마도로보터 바다를 뒤덮고 와, 돛대와 돛대가 서로 이어질 지경이며, 이미 군사를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게 했으나 적의 형세가 너무나 장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 한 도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조전 원수를 보내주십시오."

고려사절요》 1377년 3월


강화도의 적을 막기 위해서만도 여러 재상들이 모두 모일 정도였는데, 저 대마도에서 동남해의 바다를 뒤덮을 듯한 왜구의 대함대가 구름 같이 몰려와 경상도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우인열(禹仁烈)은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당시 고려 수뇌부는 강화도 부근에서 개경을 노리는 왜구만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런 사태가 발생하자 우왕자왕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르며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병력의 차이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우인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계속해서 교전을 벌이며 시간을 버는 일밖에 없었다. 4월, 드디어 왜구의 군세는 현재의 울산인 울주에 도달했다. 우인열은 이곳에서 왜구와 소규모 교전을 벌였고, 이후 밀양까지 밀려나 다시 교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해 전객부령(典客副令) 최방우(崔方雨) 등이 전사했다. 황산강(黃山江)에서는 김해 부사 박위(朴葳)가 적을 쳐 소규모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현재의 경상남도 창녕군 부근인 영산(靈山)에서는 왜구가 험한 곳에 자리를 잡아 버텨 우인열과 부원수 배극렴(裵克廉)이 적과 싸웠으나 전황이 좋지 못했고, 또한 경상북도 경주시 쪽에서도 고려군과 왜군이 겨루어 양쪽 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사이 울주, 양주, 밀성 등은 모조리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서 강화도의 전역에서도 왜구의 군세가 움직여 서강 부근으로 이동했기에, 변안열과 최영이 이를 무찔러야 했다. 이 양면 공격 때문에 고려군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우인열은 3월부터 5월이 될때까지 치열하게 왜구와 소규모 교전을 계속해서 벌이며 최대한 버티고 있었다. 이는 우인열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의 전리품을 노획할 때마다 이를 항상 공평하게 공이 있는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열심히 싸운 부분이 컸다. 태산신역(太山新驛)에서는 기병을 이용해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적의 병사가 너무 강력하고 숫자가 많아 우인열도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또한 왜구가 밀성 등지에서 보리 등을 마음껏 빼앗아가고 있어 피해도 커졌는데, 안동조전원수(安東助戰元帥) 왕빈(王賓)이 이를 공격해 성과를 올렸으나 피해는 끊임없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 무렵 거의 한달이나 걸려 간신히 사태를 파악하고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고려 조정에서는[61] 드디어 우인열이 방어하던 경상도 지역에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그 부대의 사령관은 다름 아닌 화령 부윤 이성계. 이성계는 삼사우사(三司右使) 김득제(金得齊),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림(李琳), 밀직부사(密直副使) 유만수(柳曼殊) 등과 함께 조전 원수가 되어 경상도로 출진했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우인열이 끊임없이 지원 요청을 보내고 있었는데, 정찰병의 보고로는 "적의 배가 바닷섬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겠다." 라는 보고가 올라왔고, 그때까지 이성계가 도착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당시 이성계의 군사는 정예병으로 이름이 높아 각 고을에서는 가움이 비를 기다리듯 이성계의 군사를 기다렸던 것이다.

한편, 우인열의 비보(飛報) 등을 받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이성계는 지리산 부근에서 왜구가 마주쳤다. 경상도 쪽 바다를 통해 내륙으로 진군한 왜구가 지리산까지 이른 것이다. 양 군대는 불과 2백 보 정도의 거리에서 진을 쳤다. 그때 왜구 중 한 명이 엉덩이를 두들기며 도발을 일삼자 이성계는 곧 화살을 쏘아 이를 맞추어 버리고는, 경악한 왜구들에게 즉시 공세를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왜구는 산으로 도망쳐 깎아지른 듯한 지형을 이용해 칼과 창을 고슴도치 처럼 내밀고 우주방어를 취했다.[62]

이때 이성계는 정찰 목적으로 비장 한 사람을 보내 상황을 보게 했는데, 이 비장은 돌아와서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는 보고를 했다. 기병대가 많은 이성계의 군대로서는 이런 지형에서 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자 이성계는 훗날의 조선 정종(定宗)인 이방과(李芳果)를 재차 보내 다시 정찰하게 했다. 그러나 이방과 역시 돌아와서는 비장처럼 "어렵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그럼 내가 직접 가서 보겠다. 너희들은 내가 혹시 적에게 진격하면 곧바로 뒤를 따라라." 라고 말하고는, 직접 적의 진영을 살피며 지세를 한번 보고는 무슨 틈을 찾았는지 다짜고자 말도 없이 적에게 달려들었고 이성계의 군사들 역시 바로 그 뒤를 따라 달려들었다. 그러자 왜구는 탱크에 치인듯 막대한 타격을 입고 밀려나더니, 결국 산의 낭떠러지에서 밀려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수두룩 했다.

이렇게 지리산까지 몰려온 왜구들을 이성계가 무지막지한 전술로 날려버렸을때, 황산강에서는 김해 부사 박위가 왜구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당시 왜선 50여척이 김해의 남포(南浦) 부근에서 순풍을 타고 낙동강 하구를 30km 거슬러 올라가 밀성을 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정보를 얻었던 박위는 30여척의 함선으로 복병을 놓아 기습함으로써 이 왜구들을 대부분 섬멸했다.

또한 배극렴은 적의 괴수인 패가대(覇家臺) 만호(萬戶)라는 자와 싸웠는데, 패가대는 큰 쇠투구를 쓰고 손발까지 덮은 갑옷으로 무장하고는 보병을 좌, 우익으로 나눠 달려들었다. 이 왜구들은 기세 좋게 달려들다 진흙탕 때문에 말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는데[63], 그 틈에 배극렴은 공격을 가하여 패가대를 죽이고 왜구들을 몰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상도에서 간신히 사태가 진정될 무렵, 또다른 전선인 강화도 부근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의 고을들을 털어버렸는데 이에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었던 것. 당시 왜구는 22척의 함선이었으나 고려군의 함선을 노획하여 50여척을 넘었는데, 노획한 고려 함선을 앞에 세우고 다니자 왜구를 고려군으로 오인한 백성들이 피하지 않았다가 학살당하는 위장 전술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왜구들은 천안안성까지 진격했는데, 양광도 원수였던 왕안덕(王安德)은 적의 기세가 두려워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하다가 부원수 인해, 양천 원수 홍인규(洪仁圭) 등을 불러 적을 요격하려고 했으나 적은 작전을 눈치채고 이동을 했다. 이에 왕안덕은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달려들었으나 이기지 못하고 왕안덕 자신도 부상을 입고 몰았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수원 부사였던 박승직(朴承直)은 왕안덕, 인해, 홍인규 등 세명의 원수가 온다는 소식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밭을 매는 자들에게 "원수들이 온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물었고, 이에 밭 매던 사람들은 "적이 이미 물러나 원수들이 쫓고 있다." 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박승직은 안성의 관사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것이 속임수였다! 사실 밭 매던 사람들은 변장한 왜구로 이에 속은 박승직이 안성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왜구가 쏟아져 나왔고 박승직은 혼자 간신히 이를 돌파할 수 있었으나 대다수 병졸들은 왜구에게 학살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박승직의 군대는 전멸하고, 왕안덕의 군대도 패전하자 수원, 양성, 안성 부근의 고을들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만다.

그런데 왕안덕의 패배는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경황 없는 와중에 고려군은 왜구의 포로 한 사람을 잡을 수 있었는데, 왜구에게 실토를 들어보자 무시무시한 음모가 튀어나온것.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를 친 이유는 "양광도를 쳐서 최영을 양광도로 끌어내고, 그 사이에 비어있는 개경을 급습하려는 것." 이라는 경악스러운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음모가 밝혀졌다고 해도, 당장 양광도가 쑥대밭이 되고 있는데 지원군을 안 보낼 수도 없었다. 조정에서는 성사(贊成事) 양백연과 평리(評理) 변안열, 임견미 등을 파견하려고 했는데, 그때 최인철이 개경으로 와 "신이 왕안덕 등을 독려해서 왜구를 무찔렀다." 는 거짓 보고를 올려 군대의 파병은 취소되었다.[64][65] 이후 6월 달 최인철의 거짓 보고가 밝혀져 최인철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파일:sB9aJTY.jpg이러는 상황에서 백여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왜구 부대가 남양(南陽), 안성, 종덕(宗德) 등을 휩쓸었으며, 이미 왜구 소굴이 되어가고 있었던 강화도에서는 다시 50여척의 왜구 함선이 나타나 부사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경계를 서던 고려 병사 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나세가 양백연과 함께 전함 50여척을 이끌고 나서 싸워 이들을 쫓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66] 그러나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는 여전한 위협으로 봉화가 꺼질 줄 을 몰랐으며, 덩달아 개경 역시 계속해서 비상 사태가 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후 다시 왜구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했다.

6월, 왜구는 신주(信州), 옹진(甕津), 문화(文化)[67] 등을 공격했는데, 나세와 심덕부(沈德符), 조인벽(趙仁璧) 등은 열심히 싸웠지만 적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 패배하고 말았다.

같은 시기 전라남도 역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순천에서 정지는 왜구와 교전하여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이에 서해도의 안주가 왜구에게 공격 당했으며, 장택현 역시 공격 당했다. 그 사이에 제주도 역시 왜구에 공격 당했는데, 무려 함선 2백여척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영강(永康)ㆍ장연(長淵)ㆍ풍주(豊州)ㆍ안악(安岳)ㆍ함종(咸從)[68]ㆍ삼화(三和)ㆍ강서(江西) 역시 공격을 당했다.

7월 무렵이 되자 고려는 가뭄 때문에 국가 재정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왜구의 침공은 계속 이어져 풍주(豊州) 등이 공격 당했고, 상원수 박보로(朴普老) 등이 나가서 싸웠으나 조천옥(趙天玉) 등이 전사했다. 이때 우왕은 사신을 보내 각 지역의 산성을 수리하게 했다.

8월에는 왜구가 해주(海州) 등 황해남도 지역을 공격했는데, 나세 등이 전황이 불리하여 장수를 파견해 달라고 하자 이성계, 임견미, 유만수, 변안열 등과 함께 급히 파견되었다. 이 싸움에서 임견미와 변안열은 초전에 패배하여 물러났는데, 이성계는 직접 대우전(大羽箭)을 쏘며 싸움을 독려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임견미 등은 자신들이 패배한 사실은 숨기고 이 공적을 가로채려고 했다. 이성계는 그런 문제는 뒤로 하고 남은 적을 소탕하기 위해 나섰는데, 적들이 험한 지역에 몸을 숨기고 섶을 싸아 버티고 있자 이성계는 신조(神照)라는 승려와 함께 갑자기 고기를 뜯으며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서 군대를 지휘해서 화공으로 적을 공격하게 했다. 섶에 불이 붙어 연기가 오르자 버티지 못한 왜구는 결국 험한 지역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최후의 발악을 했는데, 이성계는 이를 안주 삼아 구경하면서 술을 마셨다. 불타는 왜구는 훌륭한 안주 공급원이죠. 급기야 발악으로 날린 왜구의 화살이 의자 앞에 놓인 술잔마저 깨부셨는데도 이성계는 여전히 앉아서 휘하의 김사훈(金思訓), 노현수(魯玄受), 이만중(李萬中) 등을 시켜 남은 왜구를 깡그리 소탕해 버렸다.

그러지 9월에는 전라남도 영광, 전라북도 고창, 전라남도 함평군 지역 등이 공격당했고, 황해북도 지역에도 왜구가 다시 돌아왔다. 또 경상남도 하동도 왜구에게 공격을 당했으며, 홍주(洪州)로 온 왜구들이 목사 지득청(池得淸)의 처를 죽였다. 이때 왕안덕은 노현(蘆峴)에서 왜구와 교전했으나 패배했으며, 다음날 적이 온수현(溫水縣)[69]에 들어와 군영을 불태우자 밤에 교전이 벌어졌는데 사졸들이 놀라서 달아나는 바람에 전사자가 속출했다.

10월에는 왜구가 40여척의 함선으로 하동군을 공격했으며, 충청남도 아산 부근이 왜구에게 공격을 당하자 왕안덕은 아주(牙州)에서 이를 격퇴했다. 현 전라북도 익산시인 함열현(咸悅縣) 역시 왜구에 공격을 당했다.

11월에는 왜구가 부여ㆍ정산(定山)ㆍ홍산 등으로 쳐들어왔고, 130여척의 왜선이 김해 등을 공격하자 배극렴이 나가서 싸웠으나 패전했다. 또한 현 경기도 김포시 부근등도 계속 공격을 당했다.

12월에는 마지막으로 순천에서 병마사 정지가 왜구를 격파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고려는 길고 긴 1377년의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이제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6.9. 1378년, 해풍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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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
왜구들은 1378년이 되자마자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인 연안부(延安府)를 공격했다. 2월에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부평구와 부천시인 부평(富平)과 현재의 서울 금천구인 금주(衿州)등 옛 부평부 지역이 왜구에 공격을 당했다. 또한 이 무렵에는 흉년까지 들었다.

3월에는 왜구가 다시 부평을 공격하고, 충청남도의 태안군(泰安郡)을 공격했다. 한편 수원은 완전히 왜구에 당해 불타버렸고 부사 신인도(愼仁道)는 겨우 몸만 빠져나왔으며, 원수 왕빈은 적과 싸웠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또 충남 부여군과 서천군 등이 왜구에게 침략당했다.

4월에는 현 충남 예산군당진시인 덕풍현(德豊縣)과 합덕현(合德縣)이 공격을 당했고 도순무사의 군영까지 불에 타 버렸다.

그런데 이 시기 대규모의 왜구가 다시 착량에 나타났고, 승천부에 모인 왜구들은 "장차 개경을 칠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그 전까지 개경이 비상령을 실시하여 대비를 하거나, 혹은 개경 침공에 대한 유언비어가 있던 적은 있었지만 왜구들이 직접적으로 개경 공략의 의지를 선언한 것은 이 때가 처음.

이에 당연히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고려에서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모두 두려움에 떨었으며, 있는 군사 없는 군사를 다 끌어모아 동강과 서강을 지키게 하자 성안에서는 "진짜 무슨 일이 나려나 보다." 라는 심리로 민심이 흉흉했다.

이때 최영은 양백연과 함께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고려의 전군을 해풍군(海豊郡)[70]에 배치했다. 그러자 정탐을 한 왜구들은 "최영의 군사만 깨뜨리면 개경을 바로 함락시킬 수 있다." 라고 생각하여 여타 소규모 고려군이 배치된 모든 지역을 무시하고 진격하여 곧바로 해풍에 도달했다.

이 해풍과 개경의 거리는 불과 11.2킬로미터였다. 자동차라도 타고 가면 15분도 안 걸릴 정도의 거리에 불과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노련한 명장인 최영마저 긴장하여 "사직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려 있다." 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후 최영은 양백연과 함께 왜구와 교전을 벌였으나, 집중 공격을 받은 최영은 결국 당해낼 수 없어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해풍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하고, 개경으로 왜구들이 몰려오려는 판에……

갑자기 이성계가 나타났다.

이성계는 정예 기병(精騎)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타나, 아직 전장에 남아 있던 양백연과 합세하여 왜구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기병으로 구성된 정예 병력에 왜구가 혼란에 빠진 사이 전장에서 이탈했던 최영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싸움터로 복귀했고, 한참 양백연 - 이성계와 싸우던 왜구의 측면을 유린했다. 이렇게 되자 왜구는 이성계 - 양백연 - 최영의 삼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모조리 괴멸되었다.

이 싸움은 개경 바로 근처에서 벌어진 만큼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개경의 주민들과 조정 신료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는데, 전투의 초기에 최영이 피난한 사실이 밤중에 알려지자 민심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고 급기야 우왕은 백관을 이끌고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으며, 백관들 역시 행장을 모두 꾸려놓고 우왕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원수들이 보낸 전령에서 승전이 언급되자 그때서야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5월에는 다시 나라에 가뭄이 들었으며, 현 용인시 부근과 수원, 서천군 등은 또다시 왜구에 공격을 당했다.

6월에는 왜구가 청주(淸州)를 침략했는데, 그 기세가 대단해 고려군은 왜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달아났다. 또한 왜구가 천안, 아산을 공격했으며 수원, 평택 등에서의 왜구를 최공철, 왕빈, 박수경 등이 물리치기도 했다.

한편, 고려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정몽주의 노력으로 인해 고려와 일본 조정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특히 일본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원료준(源了浚)은 정몽주의 박학다식과 인품에 감화되어, 성의를 보이기 위해 그의 부하인 승려 신홍(信弘)을 시켜 자기 휘하의 군사 69인을 거느리고 고려로 건너가게 하여 왜적(倭賊)들을 체포하였다.

7월에는 아산에서 최공철, 왕빈, 박수경이 왜구를 몰아내었으며 일본 승려 신홍(信弘)도 조양포(兆陽浦)에서 왜구와 싸워 배 1척을 노획하고 적을 모두 죽였으며 포로로 잡혀있던 부녀자 20여 인을 돌려보냈다.

8월에는 경상도 원수 배극렴이 현재의 통영시 부근에서 왜구와 싸워 성과를 내었으며 장흥에서는 지용기(池湧奇)가 왜구와 소규모 교전을 치렀다. 또한 계속해서 황해남도 부근에서 왜구가 출몰하자 나세 등은 함선을 타고 여러 섬에서 왜구 수색 작전을 벌어기도 했다. 또한 왜구가 현 서울특별시 금천구강서구 부근에 출몰했다.

9월에는 왜구가 서산시 부근에 나타났으며, 현 평안북도 철산군 부근인 철주(鐵州)가 공격 당했다. 또 현 충남 논산인 연산(連山), 현 전라북도 익산과 전주인 익주(益州), 전주(全州)가 공격당했다.

10월에는 전남 진도군인 옥주(沃州), 충남 금산군인 진동(珍同, 현 대전광역시인 회덕(懷德), 충북 옥천군인 청산(靑山), 충남 부여군인 임주(林州) 등이 공격당했다. 또한 전주는 완전히 왜구에 도륙 당했다. 영광, 광주 등지에서는 지용기와 정지가 왜구를 물리쳐 말 백여 필을 노획하기도 했다.

11월에는 담양현(潭陽縣)에서 지용기와 정지가 왜구와 싸웠으며, 익주(益州)가 공격 당했다. 한편, 일본 승려 신홍(信弘)은 고성군(固城郡) 적전포(赤田浦)에서 왜구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니, 결국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12월에는 하동(河東)과 진주(晋州)가 공격당하자 배극렴이 유익환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현재의 경상남도 사천시까지 이를 추격하기도 했다. 또한 정지가 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다.


6.10. 1379년[편집]


1379년 2월에는 전라도 순문사 정지가 순천과 현 전남 보성군인 조양(兆陽), 영광 등지에서 왜구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최영은 경복흥, 황상(黃裳) 등에게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해도, 재상들이란 작자들이 걱정도 안하고 있으니 무엇을 어쩌겠는가?" 하고 질타하기도 했다.

3월에는 왜구가 도강현(道康縣)을 공격했으며, 이후 남원(南原)을 공격해서 판관을 살해하고 사흘간 머물다가 떠나 다시 순천을 공격했다. 4월에는 왜적이 안산군(安山郡)을 공격했으며, 연안부가 공격 당하자 나세 등은 전함 52척을 이끌고 이를 막으러 가기도 했다. 합포에서는 왜구의 침공이 있어 우인열이 이에 맞서 싸워 막아내긴 했는데, 아군 사상자는 80여명이나 되는데 수급을 벤 적군은 4명 뿐이었다.

5월에는 보병 2천여명에 기병이 7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왜구가 진주를 침략하자, 양백연이 우인열, 배극렴 등과 함께 나서 이를 무찌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다른 왜구들이 풍천(豊川)을 초토화시키면서 지주사(知州事) 유자(柳滋)와 안렴(按廉) 김간(金侃)을 살해하고 관아와 민가를 불사른 후 60여 명을 사로잡아갔다.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는 나세와 김유가 왜구와 수전을 벌였으며 신주(信州)가 공격 당했다. 영청현(永淸縣)에서는 주 만호 최원지(崔元沚)가 왜구와 싸워 이겼다.

또한 고려의 사신 한국주(韓國柱)가 구주(九州)에 가서 왜적을 금할 것을 청하니 백제 성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휘하의 일본해도포착군관(日本海盜捕捉軍官) 박거사(朴居士)를 그의 군사 186명과 함께 고려로 보내 왜구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 울주(蔚州)와 계림부(鷄林府)가 왜구에게 공격 당하자 박거사가 계림부에서 맞서 싸웠으나, 계림원수(雞林元帥) 하을지(河乙沚)가 지체하여 돕지 않자 박거사의 군대가 대패하고 살아남은 자는 겨우 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6월에는 청도군(淸道郡)을 공격한 왜구와 우인열이 맞서 싸웠고, 용주(龍州)와 의주(義州)를 침략한 왜구를 만호 장려(張侶)가 물리쳤으며, 울주ㆍ청도ㆍ밀성ㆍ자인(慈仁)ㆍ언양 등지도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우인열, 하을지, 배극렴이 맞서 싸워야 했다.

7월에는 왜구가 낙안군(樂安郡)을 쳤고, 현재의 울릉도인 무릉도(武陵島)에 왜구가 반 달간 머물다가 떠나기도 했다. 울주에서도 왜구가 머물며 곡식까지 거두어가서 완전히 탈탈 털어먹는 일이 있었다.

8월에는 왜구가 여미현(餘美縣)[71]을 쳤고, 이후 수주(隨州)와 곽주(郭州)를 공격했다. 사주(泗州)에서 우인열, 박수경, 배극렴, 오언이 왜구를 물리쳤다.

9월에는 단계(丹溪)ㆍ거창(居昌)ㆍ야로(冶爐)[72] 등이 공격을 받아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가 적과 싸우다 패배해서 죽고 말았다.


7. 1380년대, 고려의 반격[편집]



7.1. 1380년, 사상 최대의 왜구 결집과 대승[편집]


1380년은 단순한 침공의 횟수만 따지자면 당시의 몇 년 중에서 비교적 적은 편이었지만, 대신 고려가 치른 왜구와의 전쟁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월달에 잠잠했던 왜구들은 2월 현 경상남도 진주시인 영선현(永善縣)을 공격했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보성과 순천을 공격했다. 3월에는 순천의 사찰 송광사(松廣寺)가 왜구에 공격당했고, 광주와 화순 등이 왜구에 공격당하자 정지, 이원계, 오언 등이 나서서 이를 막기도 했다.

5월에는 왜구의 전함 백여 척이 결성(結城)과 홍주(洪州)로 쳐들어왔다. 6월에는 정읍현(井邑縣)에 왜구가 쳐들어와 지용기에 이에 맞서 싸웠으며, 7월에는 지용기가 명량향(鳴良鄕)[73]에서 왜구와 싸워 포로가 되었던 백여명을 구출하는 사건도 있었다. 또한 서주(西州)를 침공한 왜구들은 이어 부여현(扶餘縣)·정산현(定山縣)·운제현(雲梯縣)·고산현(高山縣)·유성현(儒城縣) 등지를 공격한 후에 계룡산(鷄龍山)으로 들어갔는데, 이 계룡산에는 왜구를 피해 피난을 온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 많이 있었으나, 왜구의 칼날에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이에 양광도 원수 김사혁이 나서서 이를 쳤으나 왜구는 도망치면서도 계속해서 약탈을 했다.

우왕 역시 계속되는 왜구의 침공에 답답한지 "백성과 사직이 있은 연후에 나라가 있는 법이거늘, 지금 왜적의 침구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하고 자신이 직접 왜구를 막으러 가겠다고 말했고, 이에 최영이 만류하며 자신이 나가 싸우겠다고 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앞으로 벌어질 일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7.1.1. 진포해전, 최무선의 신무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진포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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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崔茂宣)
왜구의 끝없는 침입이 계속되던 1380년 8월, 마침내 무려 500여 척의 왜선은 진포(鎭浦) 어귀로 진입해 오기 시작했다. 이는 고려 말 끝없는 왜구의 침입 가운데서도 단연 역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30명에서 40여 명 정도의 왜구가 한 배에 타고 있었다고 가정할 시, 이는 1만여 명, 최대 2만 가량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 압도적인 왜구는 현재의 충청남도 서천인 진포를 향해 쳐들어왔다.[74]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고려 역시 나세, 심덕부, 최무선(崔茂宣)에게 함선 백여 척이라는, 대 왜구와의 전쟁에서 이전까지 고려가 동원했던 수군 중 최대 규모의 수군을 맡겨 국운을 건 혈전을 벌이게 했다. 이보다 앞서, 1380년 해도 도통사를 겸임하게 된 최영은 현시창인 나라의 상황을 설명하며 "나라에 함선이 백여 척밖에 없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몇 개월 사이에 전력이 극적으로 증강이 되었을 확률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이 당시 고려군의 함선 백여 척은 고려의 모든 해상 전력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이 전력이 합포의 전투나 착량의 전투에서처럼 손도 써보지 못하고 괴멸된다면, 그 이후 최소한의 방위력마저 날아간 고려는 왜구를 막을 기력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을 터였다.

왜구의 함선과 고려군의 함선은 차이는 있겠지만, 단순 숫자로는 이 진포해전 당시 양쪽의 전력은 1 대 5의 수준이었고, 이전 몇십 년의 전투에서 고려 수군은 이작도 전투 등에서 왜구에게 처참한 꼴을 당하기만 했었다. 따라서 이 싸움은 이전까지의 양상대로라면 거의 어려운 싸움이었다.[75]

그러나 이 사상 최대의 위기에서,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꾸준히 화약 제조에 관심을 보이고 화포를 만든 최무선(崔茂宣)에 의하여 화포가 처음으로 고려 수군의 함선에 장착되었고, 신무기 화포의 힘을 빌려 500척의 왜구 함선을 거꾸로 박살내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는 이작도, 합포, 착량 등에서 30여 년에 걸쳐 졸전만을 거듭한 고려 수군이 드라마틱한 일대 반격을 가한 순간이었다.


7.1.2. 황산대첩, 이성계의 승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황산대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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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도(荒山大捷圖)

진포해전에서 함선이 거의 괴멸된 왜구들은 그 와중에서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내륙으로 이동하여 현 충북 옥천인 옥주(沃州)까지 도망쳤다. 이 진포의 패잔병들에 더해 당시 한반도 여기저기에서 고려를 치고 있던 다른 왜구들도 점차 모이기 시작했고, 이렇게 모인 왜구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지만 고려군으로서는 이를 하나의 전기로 삼아볼 수 있었다. 왜구가 한 곳으로 모였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왜구에게 궤멸적 피해를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즉시 전라도, 경상도, 양광도, 수도 부근에 있던 9명의 원수들을 한데 모아 왜구를 치려 했으며, 여기에 더해 추가적으로 당대 최강의 사병 집단이었던 가별초를 가진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3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그를 중심으로 8명의 원수를 더해 추가 파병군을 준비하였다. 이로 인하여 원수의 숫자만 도합 17명에 당대 한반도 최강의 군대를 가진 이성계를 더한 실로 어벤져스급 규모의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이후의 전역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황산대첩(荒山大捷) 항목 참조. 고려군은 9명의 원수가 모인 사근내역(沙斤乃驛) 전투에서 왜구에게 패배를 당하고 두 명의 원수가 사망하는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남원산성(南原山城)에서 왜구를 막으며 시간을 끄는 사이에 중앙에서 내려온 이성계가 사근내역 전투의 패전병들과 합류, 현 전라북도 남원인 황산 부근에서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와 엄청난 대혈전을 벌인 끝에 아기발도를 죽이는 데 성공하고 왜구를 섬멸, 지난 30여 년간의 왜구와의 전쟁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승리로 인해 당시 한반도에서 출몰하던 왜구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몇몇 왜구가 10월 경에 김해를 공격했던 일 정도를 제외하면 사상 최대의 함선이 출몰했던 1380년대에는 더 이상 왜구가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이 승리로 막강한 군사력과 동북면의 경제력, 그리고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입지가 약하던 이성계는 대번에 나라의 영웅과 같은 포지션에 서게 되며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7.2. 1381년 ~ 1382년 소강기[편집]


파일:a6NEN1n.jpg진포 전투의 승리와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움직임 역시 이에 충격을 받고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주로 서남해를 중심으로 고려의 조운선을 털어먹던 왜구는 서해안 깊숙히 올라가는데 애로사항을 느끼게 되었고, 대신 동해안을 주로 치면서 내륙으로 진군하여 양식을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동해안의 경우 서남해의 내륙보다 평야 지대가 비교적 적은 편이고, 무엇보다 왜구가 심심하면 공격해서 털던 조창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왜구는 동해안을 따라와서 내륙으로 침투하기 위해 애를 썼다.

황산대첩 이후 몇개월 정도 쥐죽은 듯 있던 왜구는 2월 무렵 경북의 영해부(寧海府)를 치는 한편 3월에는 강릉 부근에서 어슬렁거렸고 이후 송생(松生)ㆍ울진(蔚珍)ㆍ삼척(三陟)ㆍ평해(平海)ㆍ영해(寧海)ㆍ영덕(盈德)을 치더니 삼척군까지 불태웠다.

4월에는 지리산에서 도망친 왜구가 무등산으로 도망친 후 화순까지 이동했는데, 정황을 보면 이들은 황산대첩에서 패배한 후 도망친 잔당으로 보인다. 험한 지역을 이용해 버티던 왜구들은 전라도 도순무사 이을진(李乙珍)이 결사대 100여명을 이끌고 공격하자 달아났고, 이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으나 나공언(羅公彦) 등에게 추격 받아 거의 죽고 말았다.

5월에는 왜구가 이산수(伊山戍)를 침입했으나 양광도 도순무사 오언에게 격퇴당했다. 그러나 영해부(寧海府) 등이 왜구에게 공격 당했고 경상도 고령군에 큰 가뭄이 들어 여러모로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 와중에 해도만호(海道萬戶) 최칠석(崔七夕) 같은 사람은 멀쩡한 병사 30여명을 집으로 돌려 보내고 그 병사들에게 지급된 군량을 자기 집으로 빼돌리는(!) 신개념 군사 횡령을 하다 걸려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

6월에는 왜구가 비인현(庇仁縣)을 쳤고 영주(永州)를 불태웠으며, 50여척이라는 적지 않은 왜구가 김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원수 남질(南秩)이 물리쳤고 남질은 이후 영해ㆍ울주(蔚州)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 등지에서 왜구와 계속해서 소규모 교전을 벌여 승리했다. 또 울진현에서의 싸움에서는 권현용(權玄龍)이 적의 창에 맞았으나 힘이 장사였던 권현용[76]은 오히려 왜구를 격퇴하고 수급 20여개를 얻고 말 70여필을 노획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7월에는 왜구가 다시 김해를 노리고 쳐들어왔고, 고성현 역시 공격을 당했으나 이는 남질이 물리쳤다. 9월에는 남질이 지리산에 아직 남아 있던 왜구 패잔병을 찾아 네 사람을 죽였으며, 충남 서산과 경북 영천 등이 공격당했다.

10월에는 왜구가 임하현(臨河縣)을 공격하고 전라도 나주 지역 역시 공격을 했는데 이을진과 지용기가 이를 물리쳤다.

11월에는 보령현(保寧縣)이 공격 당하고 밀성현(密城縣)도 공격을 당했는데 지병마사(知兵馬事) 이흥부(李興富)가 이들 중에 몇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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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년 2월 왜구는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인 임주(林州)를 쳐서 고려군의 오언이 맞서 싸웠으나 이기질 못했다. 이후 왜구는 부여(扶餘)·석성(石城) 등을 침공했다. 또 평해군(平海郡)도 공격당했다.

3월에는 삼척ㆍ울진ㆍ우계(羽溪) 등의 동해안 지역이 침공을 당했다. 이후 영월ㆍ예안ㆍ영주ㆍ순흥ㆍ보주ㆍ안동 등이 공격을 당했는데 이 지역이 동부 지역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동해안을 통해 침투한 왜구들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왜구들은 죽령을 넘어서까지 공격 해 왔으나 변안열 등이 이를 물리쳤다.

여기에 더해 치안의 불안을 틈타 천민 계층이었던 양수척(楊水尺) 무리들이 왜구로 꾸며 영월군을 침공하는 일도 있었다. 5월에는 영춘현(永春縣)과 회양부(淮陽府)가 공격 당했다. 6월 무렵에 이를 경우, 왜구들은 경산(慶山)·대구(大丘)·화원(花園)·계림(鷄林) 등지를 침구하고 또 통구현(通溝縣)을 치는등 경상도 내륙으로 상당히 깊숙히 들어왔다.

즉 장수들이 싸우려고 하질 않고 자기보신만 꿈꾸며 교전을 회피하는 통에 왜구가 활개를 쳐도 제대로 교전도 치르지 못한것. 이에 우왕은 전법판서(典法判書)였던 조준(趙浚)을 보내 이를 닥달하게 했고, 조준은 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서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 등을 닥달해 왜구를 격퇴했다. 이에 고무된 우왕은 조준을 다른 곳에서 파견하려고 했으나 조준 본인이 꺼렸고, 정 일을 맡길 생각이라면 더 큰 권한을 주라고 요구해서 흐지부지 되었다.

10월에는 황산대첩이 벌어졌던 남원에 왜구가 깜짝 출현을 했으나 심우로(沈于老)가 소규모 교전을 치뤄 물리쳤고, 50여척의 왜선이라는 적지 않은 규모의 함선이 진포에 나타났으나 이를 정지가 무찔렀다. 정지는 도망치는 왜선을 추격해서 군산까지 가 왜선 4여척을 얻기도 했다.


7.3. 1383년, 관음포 전투, 정지의 승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관음포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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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鄭地)
47척 vs 120척

진포 -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기세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1381년 - 1382년 동안 왜구의 최대 함선은 50여척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해안 부근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활개를 치긴 했지만 그나마도 이전의 무능한 고려군에 비해 1380년 이후의 고려군은 왜구와 싸워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조준의 파견으로 경상도가 안정화되었던 것처럼, 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의 무능 문제만 아니면 당시의 전력으로도 왜구를 상대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을 정도였다.

헌데 1383년, 왜구는 다시 한번 거대한 전력을 일으켜 고려를 쳤다. 이렇게 하여 벌어진 전투가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으로 불리는 싸움이다.

1382년 11월을 끝으로 한동안 숨을 죽이던 왜구는 거의 반년이 지난 1383년 5월, 난데없이 120여척의 대함선을 이끌고 경상도로 침공해 온 것이다. 비록 그 숫자가 1377년이나 1380여년 정도의 가공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진포에서의 해전 이후 최대 규모의 군대가 갑작스레 침공해 온 일이라 이는 큰 충격을 주었고, 경상도 전 지역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더구나 고려사 정지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 120여척의 함선은 대선(大船)이라는 표현이 붙은 배들로 120여척이라고 해도 이전의 왜구 함선보다 더 큰 함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대선들이 120여척이나 경상도 앞바다에 출몰하니 이는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이에 곧바로 반응한 곳은 합포의 고려군이었다. 여태껏 대규모 왜선이 출몰하면 큰 피해를 입은 곳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던 합포의 고려군영이었으므로,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漫殊)는 위급함을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고려 수군은 정지가 이끄는 수군으로, 정지는 47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나주, 목포 부근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가장 가깝다고 해도 서남 해안을 타고 정 반대 방향으로 가야했고, 무엇보다 정지의 함선 숫자는 왜구의 대선들에 비해 2배, 3배의 숫자 열세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경상도의 상황이 위급했으므로, 정지는 밤낮으로 병사들을 독려해서 급하게 이동을 했다.

이때는 하필 봄 부근에서부터 전염병이 크게 번져 수군 가운데서도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따라서 병사들의 사기 문제도 크게 걱정되었는데, 정지는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있으면 늘 육지에 상륙해서 장례를 제대로 치러 주었기에 수군들이 크게 울었고, 정지를 존경해서 따랐다고 한다. 이때의 이동에서도 정지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손수 노를 젓기도 해서 노 젓는 병사들도 죽을 힘을 다해 따라 저어 너무 늦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섬진강(蟾津江) 쪽을 지나온 정지는 결전을 앞두고 서둘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면서 병력을 최대한 불리기 위해 애를 썼는데, 적은 이미 지금의 남해군인 남해(南海) 관음포(觀音浦)까지 와서 더 지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에 더해 정찰을 통해 고려 수군의 숫자가 별거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왜구는 공세로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비까지 내렸는데 이 비가 딱히 고려군에 이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정지는 지리산 신사에 사람을 보내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다! 신령은 알아서 자기 망신 살 일을 하지 말아라!" 라고 일갈하도록 했고 그러자 비가 그쳤다. 패왕색의 패기.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되자, 적의 깃발은 하늘을 가렸고, 칼과 창은 온 바다에 번쩍였으며, 적은 사방에서 에워싸고 전진해 왔다(賊旗幟蔽空, 劍戟耀海, 四圍而前). 이런 위급 상황에서 정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는지 전투에 앞서 하늘에 절을 했는데, 그러자 바람이 갑자기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야말로 신풍(神風)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바람을 타고 고려 수군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해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렀다.

그러자 왜구는 큰 배 20여척에 배마다 군사 140명을 태워 앞으로 전진하도록 했다. 즉 이 공격에 동원된 왜구의 숫자만 해도 2,800여명 가량이었던 것. 여기에 더해 뒤에 따르는 여타 함선들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전투에 앞서 여타 병력을 큰 배에 집중시켜 일반적으로 타는 숫자보다 더 태운 숫자였을 테지만 당시 왜구의 대선들이 보통 규모가 아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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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지는 왜구와 격렬한 사투를 벌여 적선 20척가량을 화포를 이용해 수장시켜버렸다. 적의 규모는 확실히 대단했지만 그보다 신 무기가 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것. 이 싸움에서 병마사(兵馬使) 윤송(尹松) 등도 화살을 맞고 전사할 정도로 고려군도 쉽지 않은 싸움을 벌였지만 그래도 전염병 + 먼 길을 급하게 온 피곤함 + 전력의 열세라는 핸디캡을 안고서도 왜구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더 많은 함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대패한 이작도 해전 등과 비교해보면 상징적인 일. 대승을 거둔 정지도 "내가 왜구와 싸우기를 참 많이 싸웠는데, 살다살다 오늘처럼 통쾌하게 이긴 적이 또 없었다."고 감탄 했을 정도의 대승이었다.[77]

여담으로 당시 일본에 왜구 방지를 촉구하기 위해 사신으로 떠났다가 귀국하던 중인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은 왜구를 만나 포로가 되어 선박에 갇혀 있었는데, 고려군과 전투가 벌어지자 왜구들로부터 "우리가 지면 일단 너부터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하지만 싸움이 끝나자 자신을 죽일 왜구가 하나도 남지 않아 목숨을 건지고 고려군에게 구출되었다.

관음포 전투의 승리는 이미 줄어들고 있던 왜구의 서남해 침공에 종지부를 찍는 수준의 타격을 주어 왜구의 서남해 침공은 이제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대신 동해안 지역으로 왜구의 침공 범위는 좁혀지게 되었다.

여러모로 대승이지만 그 이후인 6월에는 고려 천민들이 왜구를 가장해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에서 횡행하다 소탕되는 일도 있었다. 또 왜구가 길안(吉安)ㆍ안강(安康)ㆍ기계(杞溪)ㆍ영주(永州)ㆍ신녕(新寧)ㆍ장수(長守)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선주(善州) 등을 공격하는 일이 있었는데, 루트를 분석해 보면 이는 왜구가 한꺼번에 그렇게 몰려들었다기 보다는 안강, 즉 영일현에 상륙한 왜구가 갈라져서 내륙 지역으로 점점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내륙 지역 깊숙히 파고들어 식량을 얻기 위한 행보로 보이는데, 이전의 왜구들이라면 서남해에서 조정으로 올라가는 조운선을 바로바로 습격하면 그만이었지만 진포와 관음포 등지에서의 잇따른 패배로 그럴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내륙으로 침공해 오는 왜구는 심각한 문제이긴 하나,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세미가 올라오지 않아 조정을 마비시키는 사태에서는 벗어난 것이니 한 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왜구들은 7월 경 대구 부근까지 진출하고, 8월에는 비옥(比屋)ㆍ의성 등지를 침략했는데 숫자가 꽤 많아 부원수 윤가관(尹可觀)이 싸웠으나 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령(居寧)ㆍ장수(長水)를 공격하고 전주까지 공격하려던 왜구들은 황보림에게 패하였다. 우왕조준에게 감찰관으로의 파견을 다시 권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렇게 내륙 각지에서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8월에는 천 명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왜구가 춘양(春陽)ㆍ영월(寧越)ㆍ정선(旌善)을 공격했는데, 여기에 더해 동북면에서 여진족호발도(胡拔都)가 침공해 오는 일이 있어 여러모로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 천여명이 왜구들이 옥주(沃州)ㆍ보령(報令)을 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있었으나 왕안덕 등이 이를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9월과 10월 동안 강원도의 공격에 주력한 왜구들은 그야말로 무인지대를 걸어다니듯 마음껏 활보했으나 권현용 등은 소규모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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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관음포 전투 이후의 왜구들의 상황. 정유재란임진왜란을 보는 것으로 의심할 정도로 왜구가 처들어 왔음을 알 수 있다.


7.4. 1384년 ~ 1387년[편집]


전 해에 관음포로 침공한 왜구를 포함해 내륙 지역으로 끈덕지게 침입 해 왔던 왜구는 1384년에는 비교적 약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2월 경 왜구는 진포에서 잡은 부녀자 중 25명을 돌려주더니, 거진 반년이 지난 7월에나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내륙에 침공해 왔던 왜구의 일부였는지 몇몇 왜구가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부근에서 어슬렁 거리더니, 이후 황해도 주변에서 조금 깔짝거리는 정도에 머문다. 또 12월에는 몇년 전만 해도 자기 제 집 처럼 드나들던 인천 앞바다에 들락거리던 왜구가 정말 간만에 나타났는데, 개경을 벌벌 떨게 하던 포스는 어디가고 해도만호(海道萬戶) 윤지철(尹之哲)에게 당하고 잡은 포로 80여명을 토해내는 굴욕을 당했다.

이후 1385년에 몇몇 지역에서 어슬렁 거리던 왜구는 9월 경 난데없이 함경남도 함주(咸州)에 출몰했는데, 그 규모도 150여척 이나 되었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공격에 함주ㆍ홍원(洪原)ㆍ북청(北靑)ㆍ합란북(哈蘭北) 등이 휩쓸리고 백성들이 학살되었는데, 이에 심덕부, 정승가(鄭承可) 등이 싸웠지만 패배해서 여타 장수들이 모두 달아나는 판에 심덕부 혼자 적에게 달려들다가 죽을 뻔 했지만 자신의 휘하였던 유가랑합(劉訶郞哈)이 도와줘서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이성계가 출전을 자원했다. 사실 당연한 일로, 동북면은 이성계의 정치적 기반이며 경제적 기반이자 군사적 기반인 곳이다. 그런 곳에서 왜구가 분탕질을 치고 있는데 개경에서 잠이 올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자원은 자신의 기반을 지키기 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왜구는 산에 주둔하여 버티고 있었는데, 이성계 군단의 대라(大螺)[78] 소리를 듣자 그 소리만 듣고도 이성계가 왔다며 벌벌 떨었다.[79] 그렇게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성계는 백여명의 기병과 함께 앞으로 나가더니, 그대로 상에 걸터앉아 쉬었다. 즉 양 군대가 서로 대치하는 중간에서 태평하게 앉아 있었던 것.

한참을 그렇게 영문 모를 짓을 하던 이성계를 양쪽 군대가 숨죽이며 지켜보는 와중에, 이성계는 다시 일어나 슬슬 돌아가려는 듯 말에 오르려고 하다가 갑자기 확 돌아 백 보 거리에 떨어진 나무에 화살을 세 번 쏘아 세 번 다 명중시켰다. 왜구들은 이 퍼포먼스를 보고 경악하고 있는데, 이성계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시켜 적에게 이렇게 전하도록 했다.

"이성계가 여기에 왔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어서 항복해라!"

이에 왜구를 이끌던 우두머리는 일단 그 자리에서는 "명령대로 따르겠다." 고 엉겹결에 둘러대고는 자기들끼리 어떻게 해야 할지 논쟁을 벌였다. 그렇게 경계가 허술할 때 이성계는 복병을 준비하고는, 이지란(李之蘭), 조영규(趙英珪), 고여(高呂)를 시켜 적을 유인하게 했다. 이에 왜구 수백여명이 낚여 오자 이성계도 거짓으로 패배해서 도망치는 척을 하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 공격을 퍼부어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왜구를 급습했다. 이렇게 맹공을 당한 왜구는 그야말로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이성계 : "어딜 내 구역을 넘봐, 건방지게."

1386년에는 왜구가 간만에 쥐뿔도 보이지 않았고, 1387년의 경우에는 향상된 고려 수군의 전력에 자신감을 얻은 정지가 "일본의 모든 백성이 왜구인 것은 아니고, 핵심은 대마도일기(一岐) 지역이다. 이 곳을 원정해서 쳐야 한다. 지금의 수군은 과거 몽골과는 수준이 다르다."며 원정 공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대마도 정벌의 복선이 된다.

이후 10월 무렵 왜구가 충남 지역을 공격했고, 12월에 전북 지역이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거의 위협이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는데……


7.5. 1388년, 제2차 요동정벌과 왜구의 준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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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명나라와 고려의 외교적 관계가 험악해지면서, 우왕최영제2차 요동정벌 계획이라는 엄청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운 이성계는 이에 반대했는데, 그 반대 이유 중 하나가 "온 나라의 병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구가 뒤를 칠 것." 부분이었지만, 이는 요동 원정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우왕에게 묵살당했다.

다만 우왕 역시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위화도 회군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 당시 우왕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 놓았다. 다만, 왜구에 대한 걱정보다 원정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며, 왜구에 대한 나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원정을 틈타 다시 준동한 왜구들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왜구는 양광도를 휩쓸었으며,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전리(田理)는 "적을 막으려고 하지만 병력이 취약해 방법이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왜구들은 여름에서 가을 무렵에 이르기까지 기세를 떨쳤는데, 위화도 회군 이후 이러한 문제는 해결 되었다. 요동 원정군에서 돌아온 정지는 군사를 이끌고 이런 왜구를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7.6. 1389년, 박위의 제1차 대마도 정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마도 정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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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朴葳)
위화도 회군 이후 쿠데타 세력은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昌王)을 옹립하였다. 여러가지로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왜구를 완전히 소탕하자는 이야기라도 있었는지 2월 경 경상도 원수 박위제1차 대마도 정벌이 이루어졌다. 위화도 회군의 주역 중에 대마도 정벌을 주장한 정지 등도 있었으니, 쿠데타 이후 이들의 의견에 더욱 힘이 실린 것으로 보인다.

박위는 백여척이라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대마도로 이동, 왜구의 함선 3백여척과 막사들을 완전히 불에 태워 버렸다. 여기에 더해 원수 김종연(金宗衍)·최칠석(崔七夕)·박자안(朴子安) 등이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백여명을 찾아내 국내로 귀환시키기도 했다.

기록으로 보면 실로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려사 박위전과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박위는 오두막과 배를 불태웠을 뿐 실제로 포로로 잡은 왜적은 없다." 고 쑥덕거렸다는 기록을 남겨 의문을 준다. 그 말대로라면 빈집털이라는 이야기인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나 이 이야기에 대해 "그런 말도 있었지." 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진짜 그렇다, 아니다라는 별반 언급도 없다. 다만 난데없이 기습으로 함선만 불태우고 빠졌다고 해도 300여척을 불태운 수준이면 상당한 성과이긴 하다.

어찌되었건 이후 왜구의 침입 사례는 한두건이 더 있긴 하지만, 이전의 기세에 비하면 거의 괴멸되어서 정규군 수준의 침략은 사라진다. 말 그대로 해적 수준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이후 1392년에 고려 왕조가 멸망하여 조선이 건국되었고, 일본은 같은 해에 남북조시대가 종결되었다. 양국이 전환점이 될 만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자, 왜구 현상도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이종무대마도 정벌과 같은 사례가 있지만, 이후에 후기 왜구들이 부각될 때까지 사투라고 할 만한 싸움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8. 결과: 조선의 건국과 화약 무기의 발달[편집]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발흥한 전기왜구의 고려 침입은 규모만으로도 웬만한 국가는 굴복시킬만한 침략군에 가까웠고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 원나라 간섭기라는 200여년에 걸친 희대의 막장 역사가 펼쳐지고 있던 상황이라 언제 나라가 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의 고려는 2군 6위 체제를 비롯한 정규군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하여 간신히 개경 주변을 방위할 만할 군사력을 보유한 상황이었고 실질적은 군사력은 모두 사병을 보유한 지방의 가문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제 하기 위해 조정에서 이런 저런 벼슬을 주어 이들을 군대로 삼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유럽의 봉건제와 매우 흡사한 형태로서 자칫 삐끗 했다간 그대로 후삼국시대의 재판이 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외부적인 요건과 고려 정부의 필사적인 통제 정책으로 이는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왜구에게 맞서 싸운 전쟁 영웅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 와중에서 가장 탁월했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결과로 이어진다.[80]

고려와 심지어 일본에서도 집요한 공격성을 보이던 고려 말 왜구들은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는 최무선의 화약 무기 + 함대 전술이 발달하자 다시금 소강 상태에 이르게 된다. 고려와 조선은 몽골 제국에게 시달리면서 탕진한 국력과 해상 전력을 착실하게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덕분에, 전국시대에 후기 왜구들이 발호하여 명나라를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조선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국토를 지킬 수 있었다.


9.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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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가대는 인명이 아니라 하카타를 고려에서 부르는 명칭이었다.[2] <명초(홍무 ~ 영락기)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왜구>, 윤성익[3] 한양도 그렇지만 개경은 특히 조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개경보다는 입지조건이 나은 한양조차도 배후 농경지가 부족해 인구 부양을 위해서는 외부에서 곡물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는데, 개경은 그보다 조건이 더 안좋았다. 이 당시 열악한 육상교통의 특성상 주요 곡물 반입 경로는 내륙 수운 내지는 해운이었다. 이 당시 왜구들은 해적답지 않게 내륙까지 들어왔으므로 해운은 물론이고 내륙 수운도 온전할 수 없었다.[4] 고려 시대 나전칠기로 만든 작은 나무 상자가 30억원에 달한다. 물론 이건 경매이기 때문에 가격은 상당히 유동적이다. 때문에 국립 중앙 박물관과 문화재청도 한번에 몇 개씩 밖에 못 사오고 있다.[5] 이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로는 이영 교수가 있으며 그는 일본 학계가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아 남조의 과오를 축소하려고 다민족 해양 세력설을 주장한다 여기고 있다. 좀 더 정확힌 1364년 이작도 전투까지의 왜구는 북조에 더 가까운 쇼니씨, 아기발도와 같은 그 이후의 왜구는 남조의 키쿠치씨와 연관이 있고 당시 일본의 정세에 따라 왜구의 출몰 정도도 달라졌다고 주장한다.[6] 아기발도라는 단어가 일본어가 아닌 몽골어 바투르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들며 일본 학계에서 주장했던 학설이지만 아기발도라는 단어가 실제 본명이 아닌 고려군이 붙인 별명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영 교수는 당시 고려에 공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강력한 해양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만약 존재했다면 고려 조정이 무력하게 당하지 않고 이들을 조직해 왜구를 격퇴했을 것임을 들어 이러한 주장을 비판한다.[7] 출처: 잊혀진 전쟁 왜구/ 이영 지음/ 에피스테메/ 50~51쪽[8] 고려 말기 수군은 그 취약함을 노린 왜구 침공에 대응하며 화포 개발을 비롯한 힘을 점점 키워나갔고 이는 조선 수군으로 이어진다.[9] 출처: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 이영 지음[10] 나라 시대인 8세기 전반에 기록된 히젠노쿠니후토기(肥前国風土記)에는 왜구의 주요 근거지중 하나인 고토렛토(규수 서부의 여러 섬들)에 포함된 지카시마의 주민들에 대해 "그 지역에는 말과 소가 많이 있고, 그 지역 사람들은 항상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騎射)을 좋아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가마쿠라 시대의 마쓰라토 무사들의 소령 목록 중에는 말을 사육하는 마키(牧)가 포함되어 있었다. 출처: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 이영 지음[11] 아울러 왜구의 주요 근거지였던 일본 서부 대마도(쓰시마)의 말은 다이슈마(對州馬)라고 불리며 무사가 타는 말로서 중앙에 헌상되었다. 요컨대 일본 고유의 재래마의 일종이었다. 속일본기(続日本紀) 천평(天平) 11년(739년) 3월조에 대마도가 신사에 사용할 말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관인(寬仁) 3년(1019년) 여진족 해적인 도이(刀伊)가 오다우라(小田浦)에 침입해서 소와 말을 약탈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해적으로 유명한 오자카시마(小値駕島) 니시우라베(西浦部) 아오카타 촌(青方村)의 영주 아오카타(青方) 씨가 가마쿠라 말기에 소유하고 있던 영지 중에는 말을 방목하는 목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말을 바닷길을 이용해서 수송할 경우, 규슈에서 단번에 동중국해를 횡단해서 본토에 이르는 루트와 달리, 이키와 대마도를 거쳐 고려 연안을 섬에서 섬으로 옮겨 가며 건너는 단거리 루트를 이용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또 500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선단이라면 1600필의 말도 수송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남북조 내란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본 본토에서부터 대부대가 약탈을 목적으로 고려에 상륙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출처: 왜구와 고려 일본 관계사/ 이영 지음[12] 사실 원래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궁수들이었다. 그래서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사무라이들이 갖춰야 할 무예를 가리켜 '궁마(활과 말)의 도'라고 불렀다.그리고 남북조 시대 일본 무사들은 말을 타고 칼과 창 같은 무기들을 쥐고서 적을 향해 돌격하는 마상타격전을 주특기로 지녔으니, 왜구 중에서 기병이 많다고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13] 설장수는 위구르색목인 출신이다.[14] 염파이목을 말함이다.[15] 임진강과 예성강[16] 지금의 김포시 양촌면[17] 출처: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 이영 지음/ 304~305쪽[18] 이 의견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경제 체계가 해체된 상태로 방치된 소말리아의 환경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근간을 이룬다. 몽골군의 약탈행위가 워낙 잔학했기 때문에 기록을 보면 꽤 시간이 지나서도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더군다나 재차 침입했을때에 간신히 생존한 사무라이 가의 자식대까지 몰살시켜 지배권이 유명무실 했을 것이란 추측에 힘을 실어준다.[19] 출처: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 이영 지음[20]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21]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인다면 다시 봐라. 죽은 것만 300명 이상이다. 전체적인 규모는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단순한 도적떼가 300명 되는 것도 힘든데 죽은 것만 300이면 이미 단순한 도적떼로 볼 수 없다. 최소한 천 단위의 왜구가 침략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22] 하지만 정지, 최무선 같은 장수들의 노력으로 고려 수군도 점차 회복세에 들어섰다. 특히 화포 전술을 통해서 진포해전관음포 해전에서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조선 시대의 후기 왜구들을 몰아내는데도 도움을 주었다.[23] 오원은 연안군의 별칭이다.[24] 이권의 본관은 연안이며 판삼사사를 지낸 문신이자 연성군, 오원부원군이다. 충정왕 때 지도첨의사를 거쳐 경상•전라도 도지휘사가 되어 왜구를 막았다. 후에 조일신이 난을 일으켰을 때 조일신이 자신을 우정승에 제수시키고 정천기는 좌정승, 이권을 판삼사사로 삼아서 조일신의 난이 실패하였을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옥에 갇혔다가 같은 해 10월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1354년에 원나라의 요청으로 서경의 수군 300여명을 이끌고 연경으로 갔으나 힘껏 싸우다가 최원과 함께 전사하였는데 오원부원군[23]으로 봉해졌다.[25] 여담으로 네이버에서 지원하는 《고려사》에서는 당시의 기록에 대해 540여척이라는 충격적인 언급이 나오는데, 원문이 50여척인것을 보아서는 국역하여 옮겨적는 와중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40여척이면 고려 말 침공해온 왜구들 가운데 역사상 최대 규모 수준이다.[26] 지금의 개성 직할시 개풍군[27]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28] 일종의 중앙에서 내려보낸 감찰관이다.[29]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이다.[30] 당시 조정에서는 차라리 수원보다는 충청북도 청주에 궁궐을 지으라고 권했다. 이는 당시 수원의 중심지가 달랐기 때문인데 오늘날과는 달리 옛날 수원의 중심지는 해안가에 가까웠다. 즉 조정의 주장은 "위험한 해안가 말고 안전한 내륙에 궁궐을 짓는 게 좋겠습니다." 인 것. 알다시피 청주가 속한 충북은 유일하게 바다와 맞닿은 곳이 없을 정도다. 물론 충청도도 털린거 보면 안심하긴 어려웠겠지만...[31]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에 속해 있는 대이작도, 소이작도를 말한다.[32] 당시 기록으로는 열에 8명, 9명이 그렇게 죽었다고 한다.[33] 이후 정계에 등장한 신돈변광수를 탄핵하여 강원도 삼척으로 유배 보냈다.[34] 지금의 충청남도의 예산군과 당진군 일대[35] 이후에 신돈의 일당이라고 하여 탄핵 당하고, 복직한 뒤 왜구를 막지 못해 처형당하고 사지가 찢겨졌다.[36]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 왜구가 고려에서 펼친 이러한 산성전술은 몇몇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왜구=고려인설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로, 동시기 일본 기록을 보면 기사들이 서로 평지에서 활로 싸우던 고전적인 일기토에서 산을 끼고 창을 둘러 버티는 산성전술이 널리 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37] 그러나 김속명은 사람이 워낙 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라 윗 사람들에게 미움 받아 지방의 안무사(安撫使)로 떠돌았으며, 권력자들의 살해 위협에도 시달렸다.[38] 이는 최영을 제거하려는 신돈의 계획도 있었다.[39] 현재의 파주시 부근이다.[40] 원나라에 상납할 말들을 관리하던 몽골인이다. 얼핏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엄연히 군마를 조련하던 이들인 만큼 기병전에도 능했을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41] 네이버 고려사에서는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시라고 해놓았으나, 양백연전을 보면 당시 양백연은 서북면 원수 였으므로 이곳은 평안도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도 선주는 북계(北界)에 속한 지역으로 나온다. 따라서 현 평안북도 선천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42] 하지만 이후에도 최영은 여러 차례 수군 전력의 확대에 관심을 보였다.[43] 고려 개국공신 박수경하고는 당연히 다른 사람이다.[44] 이 부분은 고려사고려사절요가 완전히 다르다. 고려사에서는 피해에 대해 오천여인(五千餘人), 즉 오천명이 죽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고려사절요에서는 오십여인(五十餘人), 즉 오천여명과 오십여명으로 사망자 숫자에 대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350여척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왜구를 상대로 50여명이 죽었는데 이후 공민왕이 관련자에게 초강경하게 대했다면 공민왕은 양심도 없는 사람이므로, 앞뒤 정황을 고려하면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실수가 아닐까 싶다. 물론 고려군이 제대로 싸우지 않고 달아나는 등의 이유로 수많은 함선이 불에 타 건함 계획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이라면 공민왕의 분노도 이해될 수는 있다. 특히 아홉 원수가 모인 사근내역에서도 전사자가 오백이었는데 합포 한 곳에만 1만 ~ 2만의 병력이 모여 있었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그 정도의 병력 배치가 있었다면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물론 민간인 피해까지 합쳐서 오천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많다는 의문을 가질법하다. 일단 천과 십은 한자로 한 획 차이라서 오기일 가능성이 크기는 하다.[45] 본격적으로 전사자 비율이 폭증한 것은 화기가 등장하여 보병들의 주력 무장이 된 이후이며, 총기가 쓰인 이후에도 남북전쟁 이후에나 사람들이 경악할 만한 전사자 비율이 나온다.[46] 공민왕의 시해는 훗날 커다란 나비효과를 일으킨다.[47] 지금의 아산시에 해당한다.[48] 그의 소지품이었던 벼루로 유명한 인물이다.[49] 최영의 처조카였다.[50] 하지만 이후 하을지는 계림원수로 복직한다. 곤장 백 대를 맞고도 원수직을 수행했다는건,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긴 하다(...).[51]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정치리로 추정된다.[52] 당시 최영의 나이는 옛날에는 곧 죽을 나이라던 환갑이었다(...).[53] 충청남도 부여군[54] 원문 그대로의 표현(披靡)이다.[55] 최영의 겸손이었을 수도 있지만, 홍산대첩이 벌어진 장소를 답사한 이영 교수 등은 지형적인 여건을 볼때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기는 어려운 지형이라고 주장했다. (홍산·진포·황산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56] 신라 문무왕 때인 676년에 지어진 사찰로 지금도 남아 있다.[57] 합포성은 현재의 창원시 마산회원구의 중심지이며 회원현은 회원동 일대, 의창은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일대이다. 즉 이 세 지역은 붙어 있으며 합포는 고려 말 경상도 남부의 중심지였는데도 이렇게 자주 털린 것이다.[58] 충남 홍성군[59] 고려사 최영전에 따르면 당시 강화도에는 기병 1천여명과 전함 50여척이 있었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상황이 된 것이었다.[60] 세 지역 모두 현재의 김포시 지역이다.[61] 당시 조정에서는 개경이 너무 왜구에 노출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천도 논의까지 하고 있었다.[62] 이런 전술을 일본에서는 센본야리(천본창千本槍)라고 부르는데, 보병들이 기마병을 막아내는 전술이었다. 또한 왜구의 침입이 한창 벌어지던 14세기 일본에서는 산위에 목책 같은 방어시설을 갖추고 벌어지는 산악전이 매우 흔했는데, 고려에 침입한 왜구들도 일본 본토에서 하던 대로 산악전을 이용해 고려군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63] 이 장면이 잘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일본식 갑옷인 오오요로이(大鎧)는 완전히 갖춰 입으면 그 무게가 30kg에 이를 만큼 꽤나 무겁다. 패가대 만호라는 왜구 두목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로 진흙탕에 들어갔다가 그 무게로 인해서 진흙탕에 말의 다리가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고려군이 그 틈을 노려 공격하는 바람에 죽었던 것이다.[64] 고려사절요에서는 정반대로 최인철이 보고한 이후에 양백연 등이 출전한 것으로 나오나, 고려사 왕안덕전에서는 양백연 등의 파병이 최인철의 거짓 보고 이후에 취소된 것으로 나온다.[65] 양백연은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린 장수였으나, 워낙 품행이 좋지 않고 여인들과 사통하는 등 행실이 좋지 않았다. 고려 백성들은 "양백연보다는 차라리 왜구를 만나는게 낫다." 고 했다고 한다.[66] 승리를 거둔 나세는 강화도 땅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떤 아낙네가 적의 첩자가 숨은 집을 알려주어 이를 불태워서 왜구를 죽이기도 했다.[67] 이 지역 모두 현재의 황해남도 지역이며, 신천군과 옹진군 등이다.[68] 평안남도 지역이다.[69] 지금의 충남 온양시[70] 현 개풍군.[71] 충청남도 해미읍[72] 모두 경상남도 지역[73] 전라북도 김제[74] 전북 군산이라는 소수설도 있긴 하다.[75] 고려 말 ~ 조선 초에야 대마도 정벌 등으로 수시로 왜구들을 두들기기는 했지만,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 크게 우위를 점했던 때는 중기 이후 판옥선, 거북선 등의 대형 전함 개발과 더불어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지휘관이 나왔을 때였다.[76] 하도 힘이 세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만인지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77] 우연히도 215년 후, 바로 이 곳에서 노량 해전이 벌어졌다.[78] 소라로 만든 악기.[79] 이성계 군단의 대라 소리는 일종의 시그니쳐 사운드. 트레이드 마크로, 황산대첩 당시도 이 소라 소리로 군대를 수습했다는 기록이 있고 위화도 회군 이후 개경 전투에서도 대라 소리를 들은 개경 주민들이 이성계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80] 아이러니하게도 그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결국 일본의 침략으로 멸망했음을 감안하면, 조선 왕조는 일본인들의 침략이 원인이 되어 세워지고 일본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