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고려 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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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0대 대왕
정종 | 靖宗

파일:고려 10대 정종 주릉.jpg
주릉 전경
출생
1018년 8월 31일
고려 개경 연경궁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즉위
1034년 10월 31일
고려 개경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사망
1046년 6월 24일 (향년 27세)
고려 개경 정궁 법운사[1]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능묘
주릉(周陵)
재위기간
고려 평양군
1022년 7월 3일 ~ 1034년 10월 31일 (12년)
제10대 대왕
1034년 10월 31일 ~ 1046년 6월 24일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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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형(亨)
부모
부왕 현종
모후 원성왕후
형제자매
6남 8녀 중 3남
배우자
용신왕후, 용의왕후, 용목왕후
자녀
4남 1녀
종교
불교

신조(申照)
묘호
정종(靖宗)
시호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
(弘孝安毅康獻容惠大王)[1]
봉호
평양군(平壤君)
절일
장령절(長齡節)


1. 소개
2. 칭호
3. 생애
3.1. 즉위 전
3.2. 즉위 후
3.2.1. 외치
3.2.2. 내치
3.3. 최후
4. 가족관계
5. 평가
6. 태묘 악장
7. 기타



1. 소개[편집]


고려의 제10대 대왕.

묘호는 정종(靖宗), 시호는 용혜대왕(容惠大王). 휘는 형(亨), 자는 신조(申照). 제8대 현종의 둘째 아들이자 제9대 덕종의 친동생이었다.

17세에 즉위해 29세에 요절한 청년 군주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고려 최고의 황금기라 볼 수 있는 동생 문종(제11대) 시기를 완성하는 주요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준비되었다. 일반적인 내치에 전념한 시기이고, 안정된 시기였기 때문에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 편이다.


2. 칭호[편집]


묘호는 정종(靖宗)으로 고려 제3대 임금인 정종(定宗)과 발음이 같다.

시호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전해지는데 다른 고려 군주들도 비슷비슷하지만 조금 심한 편이다.

《고려사》 <정종 세가> -총서-:
  •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弘孝安毅康獻容惠大王)

《고려사》 <정종 세가> 마지막 조:
  • 문경영렬홍효용혜대왕(文敬英烈弘孝容惠大王)

제17대 인종의 책문[2]:
  • 정종(靖宗) 영렬홍효안의헌경명양환원용혜대왕(英烈弘孝安義獻敬明襄桓元容惠大王)

《동문선》에는 고려 당시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책문이 남아 있는데 제목이 <제4실 책문>이라 누가 올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도(西都)의 난을 제압했다고 하니 인종이 올린 것이 거의 확실하다.[3]

이렇듯 여러 가지의 시호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후계자가 올린 첫 시호다. 그래서 시호를 줄여 부르면 다음 왕 문종이 올린 '정종 용혜대왕'(靖宗 容惠大王), 더 줄이면 '정종 용혜왕'(靖宗 容惠王)이 된다.

정종 재위기인 1044년에 세워진 '보현사 석탑'의 비문에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 명문에는 “고려 황제폐하(정종)의 덕은 하늘과 땅과 같고 밝기는 해와 달과 같아서 백성이 불길처럼 번성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4]


3. 생애[편집]



3.1. 즉위 전[편집]


1018년 8월생으로 연경궁의 주인인 원성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1018년은 현화사가 완공된 해이기도 하다.

정종의 탄생으로 연경'원'(院)은 연경'궁'(宮)으로 격이 올라갔다. 형 덕종이 있어 어머니의 관저를 분봉받지 못했지만 제2수도인 평양을 분봉받았다. 《고려사》 -총서-에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다고 하며, 만 4세가 된 1022년에 내사령 평양군에 책봉되었고, 만 9세가 된 1027년에는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봉호
평양군
서경 지역에 책봉된 왕자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
종 1품 품계로 가장 높은 품계
검교직
검교태사
직위에 이름만 올리는 명예직
직위
내사령
내사령[5]은 내사성[6]의 장관이다. 고위 왕족에게 임명한 명예직이며 실권은 없다.


3.2. 즉위 후[편집]


덕종이 붕어하자 그의 유언을 받들어 본궐 편전 중광전[7]에서 즉위했다. 형에게 '경강대왕'이라는 시호와 '덕종' 묘호를 바쳤다. 덕종은 《고려사》에서 '강단(剛斷)이 있었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강경한 군주였고, 정종은 그런 형의 정책을 이어나갔다.


3.2.1. 외치[편집]


왕위에 오른 정종은 임기 초에는 선대 왕인 덕종의 대 거란 강경 외교를 계승해나간다. 1035년 5월 거란이 3가지 요구를 해왔는데

1. 너희 형이 우리랑 단교한거 다시 시작해라.
2. 장성 쌓지 마라. (덕종이 쌓기 시작한 성으로 원문은 석성(石城)이라고 지칭했다. 거란 입장에서는 저런 기다란 석성이 쌓여지면 위협적이니 싫어했다.)
3. 이상 조건 안지키면 전쟁이다.

이에 대해 1035년 6월 정종이 답변했고 내용은:
1. 사신 보낼거 다 보내고 있는데 뭘 더 보내냐.
2. 성은 우리 일이니 참견하지 말고 우리가 보낸 사신 6명 억류한거나 돌려 보내라.
3. 협박하냐?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8]

거란의 전쟁 협박에 정종은 물러서지 않았고,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1035년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 실제 1037년 10월 거란이 수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하여 공격했지만 고려 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의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측에서 장성에 대한 언급을 포기하자 1037년 12월 정종도 외교력을 발휘해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하고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다만 국방정책은 유지해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힘을 기울였다.

당대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거란의 요나라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강국으로 고려가 인식되자 이후 고려는 신봉루(神鳳樓)에서 사면령을 내렸다. 신봉루는 고려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 다음의 문이다. 신봉문은 이중루였으며 위 누각을 신봉루라 하였다. 《고려사》나 《고려도경》이 기록한 가장 화려한 누각이었으며 누각 남쪽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고려 국왕이 사열식, 팔관회, 사면령, 과거 등을 실시했다. 신봉루의 간판은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글자를 새겨 천자국으로서의 위용을 펼쳤다.

그리고 동·서번 여진 제국(諸國) 및 탐라, 등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막강한 위상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이런 고려의 관례가 정종때부터 시작되었다.


3.2.2. 내치[편집]


외교 문제를 정리한 뒤 내정에 힘을 쏟은 그는 노비종모법을 제정했다. 요는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는데 조선의 세종, 영조도 노비종모법을 실시했고 유지했다.[9]

다만 고려 때는 통상적으로 '일천즉천'(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의 원칙이 적용되었기에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실 노비 소유권(일명 '천자수모법')이나 자식의 신분 문제는 조선 때까지도 갑론을박과 수정이 쭉 이어졌을 만큼 복잡한 문제였다.

1036년에는 한 집안에 아들이 넷 있을 경우, 그 중 한 명은 출가하여 중이 될 수 있도록 했다. 1045년, 악공과 각 관아의 말단 이속에 속하는 잡류, 그리고 5역과 5천, 불충, 불효한 자와 향과 부곡인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여기서 '5역'은 부모를 죽인 자, 파계하였거나 수행하는 사람을 죽인 자, 출가하여 몸에 피를 묻히는 자 등을 말한다.

1046년에는 장자 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또한 도량형의 규격을 새로 마련하여 세금 수취의 폐단을 막도록 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시중 최제안에게 명령해 구정에 배향하고, 개경 길가에 승려들이 불경을 암송하여 백성들의 복을 비는 행사를 열도록 하기도 했다. 이를 경행이라 하는데 그 뒤로 해마다 연례 행사처럼 열렸다.


3.3. 최후[편집]


정종의 재위 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진에 관한 기록을 보면 1035년 6월에 개경에 지진이 있었고, 8~9월에는 개경과 동경 지방 19개 주에 지진이 일어났다. 1036년 6월에는 개경, 동경, 상주, 광주, 안변부 관내 주현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가옥이 훼손되었고, 동경에서는 3일이 지나서야 멎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농업국가의 근간이었던 고려인데 비가 잘 내리지 않아 가뭄이 들어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 기도했고, 본인의 반찬 수를 줄이며 이같은 천재지변이 자신의 부덕 탓이라고 자책하여 죄수들을 석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나라를 이끄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재위 12년만에 29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이전에 정종은 자신이 붕어할 것을 예상하고, 형인 선군(先君)이 그랬듯이 동생인 낙랑군 휘를 부른 뒤 유조를 통해 왕위를 넘겼고, 다음 날인 1046년 5월 18일에 붕어했다. 정종이 형인 덕종과 다르게 후사가 있었음에도 동생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태조의 유훈을 따르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문종이 그냥 왕족으로 두기 아까울 정도로 성군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형제의 형제애가 각별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고려를 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10] 정종은 문종에게 선위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朕)은 선군(先君)의 마지막 명령(末命)을 받들어 누성(累聖)의 비도(丕圖)를 이었으니 12재(載)가 지났다.

하늘의 돌봄 덕분에 국내(國內)가 편안했으나, 이번 계절에 들어 몸과 마음이 아프고 약석(藥石)이 무효(無效)하니 결국 대참(漸)에 이르렀다.

바라는 것은 신기(神器)를 유덕(有德)한 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내사령(內史令) 낙랑군(樂浪君) 휘(徽)는 짐(朕)이 사랑하는 아우이니라. 지극한 효성과 어진 성품에 검소하고 공손해 인국(隣國)에까지 알려졌으니 마땅히 대보(大寶)를 맡아 성덕의 빛을 나타내라.

《고려사》 <정종 세가> 중 정종의 유조.


동문선》 28권에 <정왕 애책>(靖王 哀冊)[11]과 <정왕 시책문>(靖王 諡冊文)[12]이 남아있다. 정종의 묘호시호로 강등된 이유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며 원나라가 '고려 천자의 묘호가 참람하다'는 이유로 시호를 낮추어버렸기 때문이다.

파일:고려 10대 정종 주릉.jpg}}}
주릉 전경
정종의 무덤인 '주릉'은 2016년 형인 덕종의 숙릉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4. 가족관계[편집]


경주(慶州) 사람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김원충의 딸이다. 생전에 연흥궁주(延興宮主)로 불렸다. 숙종 7년인 1102년 3월 25일에 사망하자 덕비(德妃)로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용절(容節)이라 하였다. 문종의 후궁 인목덕비(仁穆德妃) 김씨와 자매지간이다.
  • 후궁: 연창궁주(延昌宮主) 노씨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문종 2년인 1048년 3월 16일에 사망했다.
  • 후궁: 궁인 한씨(宮人 韓氏)
  • 후궁: 궁인 한씨(宮人 韓氏)[13]
  • 후궁: 궁인 위씨(宮人 韋氏)
현종 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한 위수여(韋壽餘)의 딸로 추정된다.

궁인 한씨와 또 다른 한씨, 위씨 등은 《고려사》 후비열전에 입전되지 못하고, 《고려사》 세가 문종 13년인 1059년 6월 23일 기록에서 짧게 등장한다.


5. 평가[편집]


고려 말 유학자 이제현이 정종을 평하길:

"현종은 어려운 시기에 반정(反正)을 일으킨지라 외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덕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지라 전쟁을 경계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왕가도[14]

가 거란과 관계를 단절하자고 한 주장은, 화친을 유지함으로써 평화를 지키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15]의 주장보다 한 수 낮은 것이었다.

정종이 보위를 계승한지 3년만에 우리의 대부(大夫)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에 갔고, 이듬해 거란의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우리나라에 옴으로써 다시 외교가 회복되었다.

(거란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기묘한 책략으로 움직인 것이다. 군자가 말한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함으로써 나라를 보전했다.'인 것이다."

- 《고려사》 <정종 세가> 논평 중.


라 하며 거란과의 전후 외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를 칭찬했다. 여요전쟁 이후 거란은 노골적으로 고려를 경계했고, 고려 또한 현종흥료국 사건이 터지자 참지정사 곽원의 북벌이 시도되는 등 양국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평장사 왕가도유소와 함께 거란의 성을 부수자고 주장하는 등 덕종 대에도 긴장감이 계속 이어졌고, 이는 정종 대에도 천리장성 문제로 마찰이 이어진다. 이 불편한 기류를 그나마 진정시킨 것은 정종으로 이제현의 말마따나 진심으로 거란을 따르지 않되 화친을 이루었다.

정종은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가 확고해지게 한 군주신봉루 하례 행사를 계획 및 제도화한 인물이다. 천자국은 궁궐의 정전으로 가는 문을 5개로 만들 수 있는데 고려는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문으로 5문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3번째 대문이자 가장 화려한 누각인 신봉루에서 송나라 상인, 여진, 탐라, 고려 각지에서 조공받고 천하에 사면령을 선포했다. 이것을 고려시대에는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했는데 이 행사가 아예 왕실 공식 행사로 박히게 되었으며 《고려사》 <예지> -의봉문선사서의조-에 이 행사의 준비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고려는 승전국으로서의 국격을 크게 선전하며 자국 내에서 천자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6. 태묘 악장[편집]


고려 제6대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제16대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정종 왕형의 찬가 제목은 <원화>(元和)였다. 네 글자 운구이다.

이성을 잇고 성공을 받으시니 나라가 그로인해 창성했습니다.

성스런 효성과 신령한 계획이 바다와 같이 넘칩니다.

저 오성(五城)[16]

을 건축하시니 변경이 그로 인해 안정됐습니다.

아! 덕이 더해지시니 들려오는 좋은 소문이 영원합니다.

공손하시고 양보하시니, 준수한 인물을 많이 얻었습니다.[17]

강토를 계몽하시고 봉하시고 넓히시니, 공덕이 만세토록 영원합니다.

그리하여 악장을 짜서 종묘에 고하니, 이것으로 흠향하시고 제 효도를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덕종이 시작하고, 유소가 진행하며 정종이 끝낸 천리장성 건축을 칭찬하고, 천자로서 강토를 봉하고 계몽시킨 업적을 찬양했다.


7. 기타[편집]


  • 덕종과 정종의 할아버지이자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 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신주에 올랐다. 이후 덕종 사후 덕종을 신주에 올리느냐라는 문제에서 바로 한국사 사상 예송논쟁이 벌어지는데, 이미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대종으로 5묘가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18]

  • 제4대 광종 이후 처음으로 왕실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왕이다. 용신왕후용의왕후는 자매로 한조(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한언공의 아들)의 딸들이고 용목왕후는 공부시랑을 지낸 이품언의 딸이다.

  • 고려는 연등회가 시작되면 '치황의'(梔黃衣)[19]를 입은 국왕이 봉은사 효사관[20]에 가서 참배하는 의례가 있었는데 이를 확정한 군주가 바로 정종이다.(《고려사》 <정종 세가> 재위 4년 2월 기록.)

  • 황성 동쪽에 있던 큰 호수 동지(東池)는 고려 국왕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정종은 이 곳에서 기르던 진귀한 동물을 모두 풀어줘 비용을 줄이고 사치를 멀리 하고자 했다.

  • 유난히 추운 겨울이 오자 '몰번회토'(沒蕃懷土), 즉 고려의 제후국 땅에서 잡혀온 사람 80여 명에게 의복을 제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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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 원문엔 '대내법운사'(大內法雲寺)라고 했다. 즉 법운사는 궁 내에 있었다는 뜻이다.[2] 추정. 《동문선》 28권 기록.[3] 다만 명종 시기 일어났던 조위총의 난 또한 서경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기에 명종이 올린 책문일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향산」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898[5] 직명은 내의령 → 내사령 → 중서령 순으로 바뀌었다.[6] 부서명은 내의성 → 내사성 → 중서문하성 순으로 바뀌었다.[7] 정전을 제외한 궁궐의 전각 중 가장 많이 활용된 편전이다. 아버지 현종이 붕어한 곳이기도 하다.[8] 원문은 '사보희언'(似涉戱言). "마치 흘러가는듯한 우스운 발언"이란 뜻이다.[9] 고려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의 인권이 하락함에 따라 남성 양민이 힘없는 여성 노비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았던 조선시대에는 노비를 증식시키는 악법이었다며 지적되기도 한다.[10] 실제로 후대 임금들 중 문종의 아들인 숙종은 형인 선종의 뒤를 이은 헌종을 사실상 힘으로 억눌러 퇴위시키고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나마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명군이었다는 게 다행.[11] <정왕 애책>은 후왕 문종이 형 정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다. 《고려사》와 비슷하게 5월 18일 정유시에 정종 용혜대왕(靖宗 容惠大王)이 대내(大內)에서 훙했다고 한다.[12] <정왕 시책문>은 애사왕(哀嗣王)이 대행대왕(大行大王)의 묘호와 시호를 '정종 용혜대왕'으로 정했다고 고하는 글이다.[13] 위의 궁인 한씨와는 다른 인물로, 《고려사》 세가에는 "작은 한씨(小韓氏)"로 언급된다.[14] 만월대나성을 완성시킨 인물로 거란의 성을 쳐부수자고 선공을 원했던 매파 관료이다.[15] 목종과 현종의 신하로, 말로 풀자는 비둘기파였다.[16]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천리장성.[17] 실제로도 정종의 배향공신을 보면 해동공자 최충, 《7대 실록》 편찬자 황주량, 이천 서씨 출신 재상 서눌, 경주 김씨의 대표 김원충 같은 쟁쟁한 인물만 뽑혀 있다.[18] 이 문제는 천자식과 제후식 제도를 절충한 5묘 9실제 제도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후에 제18대 의종이 7묘 9실제라는 완전한 천자식 제도를 도입하면서 해결된다.[19] 황금색 의복. 고려 국왕이 입던 황포(黃袍) 중 하나다.[20] 만월대 나성 안에 있었던 사찰. 광종이 지은 곳으로 효사관이라는 건물을 추가로 지어 태조의 어진을 안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