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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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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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편찬 역사
3. 특징
3.1. 편찬 시기
3.2. 객관성
3.3. 보관
3.4. 분량
4. 관련 서적들
4.1. 박영규가 쓴 책
4.2. 백지원이 쓴 저서


1. 개요[편집]



高麗實錄

고려왕조 대에 작성된 실록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정식 명칭이 조선'왕조'실록인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고려실록의 정식 명칭은 그냥 고려실록이다.

고려 왕조에서 남긴 이 실록은 고려 멸망 후 조선시대에도 계속 춘추관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 화재가 선조가 피난간 직후 한양의 난민들이 장례원에 소장된 공사 노비의 문적을 소각했는데 이 불이 바람을 타고 궁궐, 춘추관으로 번져갔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선조실록에는 해당 부분에 대한 기록이 없이 일본군이 불을 지른 것처럼 묘사하고 있고 선조수정실록간민과 난민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련 내용 다만 어차피 전란중이고 제대로 된 기록이 남기 힘들었을테니 방화의 정확한 주체는 파악하기 요원하다. 어쩌면 두 주체에 의한 화재가 모두 일어났을 수도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때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서 도운 순왜 조선인들도 일부 있었다. 아니면 방화가 아닌 실화(失火)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고려실록이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고려의 역사에 대한 국가적 기록은 이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김종서를 중심으로 편집한 고려사와 여기에 주석을 달아 요점만 뽑은 고려사절요밖에 없다. 고려도 실록을 남겼고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전범(典範)이 되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아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고려사에 그 내용이 일부 전하기라도 하니 완전히 소실된 고대사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적은 편이다.[1] 다만 고려사도 앞에 나열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사료 한 글자 한 글자가 절실한 사정임을 고려하면 실전은 안타까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2. 편찬 역사[편집]


고려실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의 8대 왕이었던 현종이 2차 여요전쟁 당시 날려먹은 역대의 기록을 다시 쓰라고 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후 조선이 편찬한 고려사를 보면, 마찬가지로 여요전쟁 이전은 그 이후보다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고려사 편찬 당시, 조선 세종이 계속해서 중립적인 시각에서 찬술할 것을 지시한게 기록으로 남아있고, 조선왕조 개창과 관련된 고려 말기 기록과 달리 고려 초반의 기록은 곡필의 당위성도 적기 때문에 의도적인 축약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고려실록도 당대 기록이 전쟁으로 소실되어 내용이 부실했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실록은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기록을 현종 4년(1013년)에 편찬을 시작해 이후 20여 년이 지난 덕종 3년(1034년)에 완성을 봤는데 이것이 최초의 고려실록으로 일명 7대 실록이라 한다. 총 36권으로 완성되었으나 후세에 전하지는 않는다. 이후 예종실록은 전문적인 실록 편수관이 실록을 편찬한 첫번째 사례가 되었다.

고려의 실록 제작체계는 중국과는 다른 구조로,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수찬관, 직사관의 5대 편제였으며, 사관은 시정을 기록하는 관리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이후 덕종실록(선대 현종은 실록 편찬 여부에 대한 당대 기록이 없음)이 편찬되었으며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 공양왕의 실록이 추가로 편찬되었다. 고려사 기록에서 실록이 편찬된 왕은 상기 21왕이 전부라서 나머지 왕들은 실록을 편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국사에 보면 고려 역대 왕의 실록은 모두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양 또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총 185책으로, 75책인 고려사의 두세배 정도 분량이었다.

무신정변과 이후 몽골의 침략으로 정세가 혼란하여 원래 다음왕 재위 기간에 작성되어야 할 실록이 제대로 작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대의 실록은 충목왕 재위시에 비로소 편찬되었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실록은 조선 왕조 시기인 1398년에 작성되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쓰는데 사용된 이후 춘추관에서 보관되다가 소실되었다.


3. 특징[편집]


후대에 저술된 조선왕조실록과 구별되는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3.1. 편찬 시기[편집]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 사망하면 바로 후대 왕이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하고 빛의 속도로 실록 편찬을 시작했던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제17대 왕인 인종 이전까지는 이러한 기준이 없었다.

최초의 실록인 태조 ~ 목종의 7대 실록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만월대의 연경궁이 전소된 후 현종 대에 왕명을 받은 황주량(黃周亮)이 전고(典故)를 알고 있는 노인들을 찾아 자료를 수집한 후 덕종 대에 세트로 저술된 것이고, 현종, 덕종, 정종의 실록은 문종 때 세트로 제작되었다. 문종의 실록은 2대 후인 선종 때 제작되었고, 순종, 선종, 헌종의 실록은 숙종 때 세트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7대 왕인 인종 때 수국사 한안인(韓安仁)이 실록 편수관을 별도로 임명해 편찬하게 하는 송나라의 편찬 방식을 따르자고 건의하고 이에 인종이 동의,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김부식(金富軾)을 편수관에 임명하면서 이후 다음대 왕이 바로 전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아서 19대 왕인 명종실록은 4대 후인 고종 대에 가서야 제작되었고, 신종, 희종, 강종의 실록 또한 24대 왕인 원종 대에 가서야 세트로 제작된다. 원종실록 또한 4대가 지난 후인 충혜왕 때 제작되었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은 29대 왕인 충목왕 때에 제작,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은 우왕 대에 세트로 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의 실록은 다음 왕조인 조선 시대에 와서야 제작되었다. (1398년, 조선 태조 7년) 이 때는 왕조 말기라 혼란스러웠던 것도 있고, 사실 조선왕조실록도 마지막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2] 일제강점기에 제작되었고, 청나라의 실록인 청실록도 광서제의 실록인 덕종실록은 청나라가 망한 후 민국시대에 제작되었으므로 이들과 사정이 비슷하다.


3.2. 객관성[편집]


조선왕조실록도 사관의 평이나 세도정치와 구한말 시대에는 내용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비판받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왕조 내내 왕조차도 실록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편찬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실록 또한 고려 건국 초기에는 자율성이 보장되었으나 예종인종 대 이후의 고려실록은 중국의 실록들과 비슷하게 왕이나 세력가들의 제재와 간섭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종실록은 원래 한안인 일파가 제작하고 있었으나 권신 이자겸(李資謙)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고 이후 이자겸 일파가 예종 대의 실록을 좌지우지했다. 다음대 왕인 의종 부터는 아예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무신정권에 의해 실록 편수관이 잠식되고 말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무신 최세보(崔世輔)가 동수국사에 임명되어 실록 편찬을 감시했고 이후 무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무신 세력이 실록을 일일이 감찰했다. 또한 고종 대에 제작을 시작한 명종실록부터는 사관(史官)만이 실록을 편찬해야 한다는 규칙이 깨져버리고 이규보(李奎報), 권경중(權敬中) 같이 사관이 아닌 사람들이 실록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때문에 막장이었던 무신정권 시기와 원 간섭기 시기의 실록들, 더 이전으로는 예종, 인종 대 이후의 고려실록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비판을 많이 받았고, 객관적인 실록 편찬에 있어서의 반면교사로 삼았다.

3.3. 보관[편집]


고려사 卷三十. 世家 卷第三十. 忠烈王 18年. 1월. 실록을 선원사로 옮기다

1292년 1월 24일(음) 정사(丁巳) ,

1292년 2월 13일(양)

실록을 강도 선원사로 옮기다. 丁巳 移置先代實錄于禪源寺.


총 5부를 두었던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1227년에 외사고를 짓기 이전까지는 오직 1부만 있었으며, 이 때문에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7대 실록 부터가 거란의 침입으로 사료를 몽땅 날려먹어 덕종 때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탈 때에도 실록이 유실될뻔했지만 직사관 김수자(金守雌)가 노력해서 실록이 보존될 수 있었다.

1227년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드디어 해인사에 외사고를 지어 이때부터 2부를 보관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내사고 실록은 1232년(고종 19년) 여몽전쟁 때 강화도에 옮겨질 당시 피해를 입었고, 1286년(충렬왕 12년)에는 몽땅 원나라에 보내져 뜯겨 본후, 1290년에 반환되었다. 이후에도 강화도 선원사, 개경 등을 옮겨다니다가 결국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내사고본은 소실되었다.

해인사의 외사고본은 여몽전쟁 때 남해군의 창선도(昌善島)에 옮겼고, 이후 우왕 대에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하면서 진도군, 선산 득익사(得益寺), 예천 보문사, 충주의 개천사(開天寺), 죽산(안성)의 칠장사(七長寺) 등으로 계속 옮겨다녔다. 이후 떠돌아다니던 걸 조선 초기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할 때 한양의 춘추관 사고에 옮기고, 이후 이곳에 보존하였으나 조선왕조 기준 이미 지난 왕조의 실록인데다 고려사로 내용을 간추리는 작업도 완료했으니 굳이 사본을 만들지는 않았고, 결국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졌다. 계속 해인사에 있었다면 팔만대장경과 같이 남았을텐데[3]


3.4. 분량[편집]


고려실록의 총 분량을 확인할 길이 없으나 충렬왕이 실록을 반출하려고 했을때의 기록을 본다면 태조에서부터 강종대까지의 실록은 185책이 편찬 되었다고 나오고 있고, 이후에 나온 실록들까지 합해도 비슷한 기간동안 저술된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뺀 분량)의 888책보다 훨씬 적을 것이 확실한데, 이미 유실된 상태라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선 당대 시대상을 감안해서 추정해본다면 고려 초기를 다룬 실록인 7대 실록은 원 사료인 사초같은 기록물의 대다수가 손상된 상태라 개인이 사적으로 써낸 일기나 서적들을 참고해나가면서 써낸지라 기록이 그다지 상세하지 않은것으로 보이고, 고려 후기에는 무신정권과 원나라 간섭시기, 고려말의 혼란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대의 권세가들이 실록편찬에 관여하면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들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왜곡시켜 기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고려사의 세배 이상의 분량으로 추정되니 결코 적은 분량은 아니다.[4]


4. 관련 서적들[편집]



4.1. 박영규가 쓴 책[편집]


박영규가 지은 실록 시리즈 중 하나. 원래 명칭은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1996년 초판이 나왔으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판이 발간되었다.

아래 문단에서 언급되는 백지원이 쓴 것보다 훨씬 질이 좋으며 만화로도 나왔다.

사실 박영규는 환빠스러운 대륙사관이 드러난 삼국 관련 실록 시리즈(고구려, 백제, 신라)가 문제로 화랑세기 인용을 꼽기도 한다. 문서 참고. 하지만 고려, 조선 쪽은 내용이 괜찮아서 평판이 좋다.


4.2. 백지원이 쓴 저서[편집]


왕을 참하라조일전쟁을 낸 재미교포 작가인 백지원이 낸 사실상 마지막 사이비 역사 서적. 2010년 4월에 상, 하 두 권으로 나뉘어 발간되었다. 전작들에서 드러났던 극렬 조선까 시각은 그대로인 데다가, 저자 특유의 욕설과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거친 필체는 여전하다.

조선은 망해야 할 나라라고 극도로 저주했던 저자가 이상하게도 고려에 대해서는 "자유롭고 활기찬 사회였다"라고 정 반대의 시각을 들이대는 바람에 이번에도 무수한 역덕후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5]. 아마도 조선을 까기 위해, 그 매개체로 고려를 긍정적으로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들에 비해서 그다지 상업적인 성과는 적었는데, 이는 전작들보다 전반적으로 책의 흥미가 떨어졌다는 평가들 때문이다.

편향된 작가의 시각과 지나치게 거친 필체, 전작에 이어 계속되는 고증 오류 때문에 이 책을 참고서로 삼기엔 무리가 너무 많다. 해서 그렇게 추천할 서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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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고대사의 기록은 고려실록처럼 현존하는 사서가 없을 뿐이지 완전히 소실된 건 아니다. 삼국사기가 그랬듯이 불완전할지라도 계속 옮겨적히면서 내용이 전해져 내려왔다. 고조선, 부여, 가야, 탐라사의 경우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날라가긴 했지만(혹은 아예 당사자들조차도 기록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메이저 삼국이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은 아예 스스로 직접 적었던 내용들이 상당히 전해져서 삼국사기에 그대로 옮겨질 수 있었다. 발해의 경우는 비교적 후대라 스스로도 열심히 기록을 하긴 했지만 전쟁통에 모두 날라가버렸는데 그래도 당시 교류하던 나라들이 기록을 꽤 남겨줘서 후에 발해고가 저술될 수 있었다. 가야의 경우는 교류가 많고 가까웠던 일본의 사서에 관련 기록이 상당히 남았다.[2] 다만 이 두 실록은 일제가 편찬에 관여했고, 일제에 불리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유리하게 곡해했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일단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는 이 두 실록의 국역본도 제공하고 있다.[3] 허나 조선 입장에서는 그럴 수는 없는 입장이긴 했다. 팔만대장경이야 불경인 만큼 조선 입장에선 있으나마나의 하찮은 물건이라 해인사에 있건말건 알 바 아니었으나 고려실록은 전 왕조의 역사서라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이런 중요한 물건을 나라에서 관리하려고 하는건 당연할 일이다.[4] 물론 고려사의 분양이 좀 적인 하다. 세가를 기준으로 치면 고려사 1년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1달치 분량 수준.[5] 사실 이것도 엄밀히 분석하면 틀린 발언인데, 조선까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노비 문제에서 고려가 더 지독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려 말엽, 원나라 관리인 활리길사가 고려의 노비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려고 했는데 고려 귀족들이 강하게 반대하여 수포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정작 조선이 1894년 갑오개혁 때 노비 제도를 법적으로 폐지한 일에 비하면 고려가 노비 제도에서 조선보다 더 보수적이어서 비판받을 구석도 있는데, 조선까들은 그런 점에 대해서는 외면한다는 것이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