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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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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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보덕왕
[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1. 개요
2. 신대왕장남? 高拔奇
3. 신대왕3남 高發岐
3.1. 개요
3.2. 생애
3.2.1. 왕위를 놓치다
3.2.2. 복수를 꾀하다
3.2.3. 죽음


1. 개요[편집]


고구려의 왕족. 제8대 신대왕의 다섯 아들들 중 첫째(高拔奇)와 셋째(高發岐). 첫째 발기의 기록상 모순 때문에 두 발기는 동일인물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2. 신대왕장남? 高拔奇[편집]


高拔奇
(? ~ 184?)

삼국지》와 《삼국사기》 등에는 음독이 같은 이름을 지닌 첫째 고발기가 등장한다. 첫째 고발기는 제8대 신대왕의 맏아들로, 제9대 고국천왕과 셋째 발기 그리고 제10대 산상왕의 형이었다. 아버지인 신대왕이 죽었을 때, 불초하다는 이유로 고국천왕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이에 원한을 품고 한나라(요동)의 공손강에게로 달아났다가, 헌제 건안 연간에 돌아와 비류수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시기상으로 너무 이르다. 공손강이 공손도의 뒤를 이어서 요동을 다스리게 되는 것은 204년 공손도가 죽은 이후의 일이고, 요동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는 공손도의 요동 태수 취임은 189년의 일이다. 게다가 《삼국지》에서도 이 사건이 건안 연간(196~220)에 있었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첫째 고발기가 (179년에 즉위한) 고국천왕의 형일 수가 없다.

게다가 《삼국사기》의 고국천왕 즉위년 왕위계승분쟁 기사는 《삼국사기》 내의 다른 기록과도 충돌한다. 고국천왕 남무가 이미 176년(신대왕 12년) 3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월에는 신하들이 태자 책봉을 건의하는 기사까지 있다. 이미 신대왕 때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국인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것부터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사실 제4대 민중왕과 제5대 모본왕이라는 선례가 있긴 했지만, 이 경우는 모본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추대된 특수사례다.

삼국지》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발기와 관련된 기록이 세부적으로 상당히 다르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산상왕 측이 정통성을 위해 기록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수의 《삼국지》에 따르면 신대왕을 계승한 건 산상왕이고, 《삼국사기》에서는 고국천왕의 다른 이름이 이이모(伊夷模), 산상왕의 다른 이름이 위궁(位宮)이라고 하나 《삼국지》에서는 이이모는 산상왕, 위궁은 동천왕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진수가 고국천왕을 누락한 것을 김부식이 고려의 기록(아마도 《신집》)을 참조해 이이모는 백고를 이었으니 고국천왕, 위궁은 이이모를 이었으니 산상왕일 것이라 여겨 원래 산상왕 대에만 등장해야 할 고발기가 두 명이 되어 고국천왕산상왕 대에 각각 나타난 것처럼 기술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참고로 《삼국지》에는 차대왕도 누락되어 있다.


3. 신대왕3남 高發岐[편집]


高發岐
(? ~ 197)


3.1. 개요[편집]


고발기(發岐)는 제8대 신대왕 고백고의 셋째 아들이었으며, 제9대 고국천왕 고남무의 동생이자 제10대 산상왕 고연우와 고계수의 형이었다.[1]

형인 고국천왕이 후사를 얻지 못한 채 죽었을 때 고국천왕의 아내였던 왕후 우씨에게 속아 동생인 산상왕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이에 원한을 품고 요동으로 달아났다. 이후 동연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고구려를 침략하여 복수하려고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이때 동생 계수가 나라를 배신했던 발기를 꾸짖었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복수귀인 동시에 매국노가 된 특이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3.2. 생애[편집]



3.2.1. 왕위를 놓치다[편집]


197년 5월, 형인 고국천왕이 후사를 이을 자식을 얻지 못한 채 죽자 왕후 우씨형사취수의 관습에 따라 왕의 동생 발기와 연우(延優) 중 한 명과 혼인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해야 했다.[2]

우씨는 왕이 죽은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발기에게 찾아가

"왕에게 후손이 없으니 님이 왕위를 이어야지요?"

라고 물었다. 그러나 아직 왕이 죽은 것을 몰랐던 발기는 왕후 우씨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되려

"왕의 부인이 밤에 다니는 것을 어찌 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꾸짖었다. 이에 우씨는 부끄러위하며 연우에게 가게 된 것인데 당연히 발기의 입장에서 보면 한밤중에 형수이자 왕후라는 사람이 찾아와 그런 불순한 말을 한다면 분명 좋은 의도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뭣보다 역모 작당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니,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오히려 정상적인 개념인, 상식인이었다고 봐야 한다. 계수 또한 왕이 된 연우가 의롭지 못했다고 했으니, 원래였다면 다음 왕으로 추대되었을 것이다.

발기에게 망신을 당한 우씨는 곧장 자리를 떠나 발기의 아우인 연우의 집에 찾아갔는데, 연우는 왕후 우씨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의관을 차려입고 술자리를 열어 우씨를 환대해주었다. 우씨는 무뚝뚝한 발기보다는 부드러운 태도의 연우에게 더욱 마음이 끌렸는지

"왕이 후손없이 죽어 발기가 맏이라 왕이 돼야 하는데, 나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이르고 무례하며 오만하게 예절없이 대해서 아주버니에게 온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결국 그날 밤에 우씨는 연우를 궁궐로 데려갔고, 다음날 아침에 고국천왕유언에 따른다면서 연우와 혼인함과 동시에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니 그가 바로 산상왕이었다. 단순히 발기가 거절해서, 연우에게 우씨가 찾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보면 "상당한 정치적 계산과 왕후 우씨의 개인적 욕망"이 들어갔음을 유추할 수 있다.

  • 발기에겐 고국천왕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이러니 당연히 발기 입장에선 차기 왕에 대한 언급 자체가 자기 목숨을 거는 행위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왕의 후계자에 대한 말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왕조 시절엔 왕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자기 목숨뿐 아니라, 자기 집안 전체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역모 사건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왕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쿠데타고, 후계자 문제도 매우 민감했었다. 우씨는 거절당할 것을 알고도 일단 찾아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차기 왕으로 가장 유력한 것이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인 고발기였기에 명분 쌓기용으로 찾아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둘째로 발기에겐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 기혼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연우는 뒤에 우씨를 왕후로 맞이하고, 그 외에 다른 여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3] 자기 자신이 왕비로 계속 있기 위해선 발기보다 연우를 택하는 편이 더 나았다.[4] 덕분에 고국천왕의 왕비로 들어와서 대략 50여 년 간이나 고구려 왕실 내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사망한다. 동천왕도 우씨의 눈치를 상당히 살펴야 했을 정도. 동천왕의 매우 착한 성격은 유순한 천성이 기본으로 깔려 있더라도, 우씨의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럽게 행동한 측면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5]

  • 연우를 데리고 궁궐로 들어간 뒤, 고국천왕이 사망할 때 후계자를 연우에게 주기로 했다고 알린다. 당연히 거짓이다.[6] 발기도 그런 거짓말에 누가 속느냐며 군사들을 이끌고 국내성에 쳐들어 온다. 문제는 신하들이다. 우씨가 고국천왕의 유언을 알렸을 때, 의구심을 표하거나 반발하는 신하들이 한 명도 없다. 물론 산상왕 측이 역사의 승자라서 후대의 윤색과 편집에 의해 기록에서 빠졌을 수도 있지만, 단순히 《삼국사기》 기록만을 본다면 반발하는 신하들이 안 보인다. 미리 우씨가 신하들과 정치적으로 합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 "가장 중요한 건 연우에겐 고국천왕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것." 그것도 어느 정도 얘기를 진행하면서 이 사람이 차기 왕으로 삼아야겠다고 판단된 시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집에 찾아가자마자 바로 알렸다는 것이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연장자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ㅡ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다시 말해서 이미 연우와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합의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후에 발기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이 호응해주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문제도 충분히 계산되었으리라 판단할 수 있다.

발기는 왕위 계승 순서로는 제1순위였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밀려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발기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도 호응해주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아 민심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일 발기가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면 차마 우씨도 연우를 선택하지 못하거나 선택해도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3.2.2. 복수를 꾀하다[편집]


아우인 연우가 자신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발기는 그제서야 우씨에게 속았음을 직감하고는 분노했다. 발기는 곧장 군대를 이끌고 왕궁을 포위한 후에

"왕위는 마땅히 형이 잇는 것이 예이다."

라고 외치며 왕위를 넘기지 않는다면 왕과 그 처자를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산상왕이 별 반응을 보이질 않자 산상왕의 처자식을 몽땅 잡아 몰살시켜버렸다. 이 때문에 산상왕은 동천왕이 태어날 때까지 무려 12년 동안이나 후계자 걱정을 해야 했다. 정작 고발기의 아들인 고박위거는 연좌당하기는커녕 이후에 고구려에 돌아와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발기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산상왕은 궁궐 문을 굳게 닫은 채로 3일 동안이나 버티며 뜻을 꺾지 않았다. 게다가 주위의 여론도 산상왕의 편을 드는 쪽으로 기울어 발기를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7] 결국 발기는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달아나서 당시 한나라의 태수이자 동연의 우두머리로 사실상 군림하고 있던 공손도에게 몸을 맡겼다.

이후에 발기는 공손도와 만나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고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리고는 왕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군사를 빌려줄 것을 청하였다.[8] 공손도는 이를 받아들여 발기에게 30,000명의 군사를 내주었고 이에 그는 공손도 휘하의 군대를 거느린 채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3.2.3. 죽음[편집]


발기가 요동 공손씨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오자 산상왕은 동생인 고계수로 하여금 군사를 주어 이를 막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계수는 한나라 군대를 격파해 대승을 거두었고 크게 패한 발기는 그대로 도주했다. 이에 계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발기를 추격하였다.

계수는 달아나는 발기를 따라잡아서 거의 잡기 직전에 이르었는데, 이때 발기가 계수에게

"동생이 늙은 형을 해치려드느냐?"

라고 묻자 형제간의 정이 떠올라 차마 발기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계수는 발기의 잘못을 큰 소리로 꾸짖으며 폭풍간지의 명언을 남겼다.

“연우(산상왕) 형님이 나라를 넘겨주지 않은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한 것이지만 발기 형님은 겨우 한 때의 분함을 가지고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보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발기는 그제서야 자신이 복수심 때문에 자기 나라를 버리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괴로워하다가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그 곳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계수는 죽은 발기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준 후에 돌아갔다가, 반역자를 놓아주는 것도 모자라 장사까지 치러주었다는 이유로 산상왕이 크게 화를 냈다. 그래서 계수는 비록 잘못했지만 형제라서 그랬다고 해서 이번에는 왕의 잘못을 꾸짖었다.[9] 동생의 말을 들은 산상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왕의 예로 장례를 치루어주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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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의 발기와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에서는 고국천왕의 동생이자 산상왕의 형이지만 김부식이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견해에 따르면 발기는 신대왕의 차남이 된다.[2]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왕위는 형제간에 계승하는 경우가 무척 잦았다.[3] 후사가 없어서 한참 뒤에 후녀라는 여자를, 그것도 우씨 눈치를 보면서 겨우 들인다. 후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동천왕. 이마저도 동천왕의 재위 초기에는 우씨가 동천왕의 애마의 갈기를 자르거나, 시녀를 시켜 동천왕에게 뜨거운 찻잔을 쏟게 만드는 등 오질나게 괴롭혔는데, 동천왕은 그 배후에 우씨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우씨를 태후의 예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4] 물론 연우도 아내와 아들이 있긴 했지만 우씨로서는 다행히(?) 발기에게 다 죽었다.[5] 하지만 우씨의 유언을 받아들여 아버지 곁에 묻어준 걸 보면, 일단 기본적으로 착한 성격인 듯하다. 동천왕은 후처의 자식인 반면 이쪽은 전처의 자식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계모의 묘비를 청계천에 거꾸로 처박아서 복수한 후대의 조선 태종 이방원을 보아도 비교가 된다.[6] 원래 왕위 계승권은 맏이가 먼저고, 없으면 그 아래 아들들이, 아들이 없으면 바로 아래 동생이 받는다. 첫째 동생인 발기가 완전히 부적격자로 찍히지 않은 이상, 고국천왕이 둘째 동생인 연우에게 물려줄 리가 없다.[7] 아마 동생의 처자식을 다 잡아 몰살시킨 일이 이미지 악화의 결정타로 작용한 듯하다.[8] 분명 무엇인가 대가가 따랐겠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일절 전해오는 게 없다. 거의 같은 시기에 위구태왕이 공손도의 딸과 혼인하게 되는데 관련이 있는지는 불명.[9] 다만 산상왕도 화가 날 만했던 것이 가뜩이나 형이 동생의 아내와 자식들을 살해한 패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나라를 배신하고 외국의 군대로 침략하는 반역까지 저질렀다. 그래서 발기를 잡으면 반드시 반역죄로 처벌해야 했는데 자살해서 못하게 되어서 분한데 동생이 허가도 없이 장례까지 치루어주니 화가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산상왕도 대단한 것이 동생을 처벌할 수도 있었지만 화를 내는 수준으로 그쳤고 반역자이자 범죄자인 형의 장례까지 왕의 예로 치루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