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고현 남부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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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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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생한 주요 지진
국외지진 (파일:미크로네시아 연방 국기.svg 미크로네시아 연방)
발생 시각 (UTC+10:00)
규모
진원
최대 진도
2024년 02월 14일
21시 40분 21초
M 6.0
미크로네시아 콜로니아 북북동쪽 172km 해역


쓰나미 여부
쓰나미 미발령
예상 최고높이: m
실측 최고높이: m


일본 대지진
(최대진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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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연월일
명칭
진앙
규모(M)
진도7 관측지역
최대 계측 진도
1995년 1월 17일
효고현 남부 지진
(고베 대지진)
일본 효고현 아와지 섬 북부
M 7.3
효고현
6.6
2004년 10월 23일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
일본 니가타현 오지야시 부근
M 6.8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6.5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동일본 대지진)
일본 산리쿠 해역
M 9.1
미야기현 쿠리하라시
6.6
2016년 4월 14일
2016년 구마모토 지진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M 6.5
구마모토현 마시키마치
6.64
2016년 4월 16일
M 7.3
구마모토현 마시키마치
구마모토현 니시하라무라
6.78
2018년 9월 6일
2018년 홋카이도
이부리 동부 지진

일본 홋카이도
이부리지방 중동부
M 6.7
홋카이도 아츠마초
6.5
일본진도(JMA)7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움직일 수 없고, 건물의 30% 이상이 파괴되는 진동이다.
자세한 내용은 진도문서 참조



平成7年兵庫県南部地震
헤이세이 7년 효고현 남부 지진

파일:downloadfile-34.png
발생
(GMT+9)

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 46분 51.8초
진앙
일본 효고현 아와지 섬 북쪽 해역
(현 아와지시)
진원 깊이
16km
규모
Mw 6.9 / Mj 7.3[1]
최대 진도
7[2][3]
효고현 고베시, 아시야시, 니시노미야시, 다카라즈카시, 아와지시[4]

MMI 진도 XI# ~ XII#
해일여부
미발령[5]
여진
최대 여진 : M 6.3, 진도 6약
진도 1 이상 최소 300회
사상자
사망자 6,434명
실종자 3명
부상자 43,792명
재산 피해
10조 엔(1995년 환율)
각 도도부현의 최대진도 목록
7
효고
5
시가, 교토
4
후쿠이, 기후, 미에, 오사카, 나라, 와카야마, 돗토리, 오카야마, 히로시마, 도쿠시마, 카가와, 고치
3
도야마, 이시카와, 나가노, 아이치, 시마네, 에히메, 야마구치, 오이타
2
가나가와, 니가타, 야마나시, 시즈오카, 사가, 구마모토, 미야자키
1
후쿠시마, 이바라키, 도치기, 군마, 사이타마, 치바, 도쿄, 후쿠오카, 나가사키, 가고시마

파일:attachment/고베 대지진/info.jpg

파일:external/www.fhwa.dot.gov/p96au18.jpg

파일:external/www.2000gt.net/1995Kobe01.jpg

1. 개요
2. 피해
2.1. 전통주택과 신축주택
3. 지진 발생 후
4. 현재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고베_대지진_진도.png
당시 NHK에 방영되었던 진도 정보

지진 당일 NHK 뉴스 보도[6]

아사히 방송에 방영되었던 1월 17일 고베 및 주변 지역의 지진 피해 상황.[7][8]

고화질 녹화본

1995년 1월 17일 일본 긴키 지방 일대에서 일어난 대지진.

일본 기상청에서 공식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헤이세이 7년 효고현 남부 지진(平成7年兵庫県南部地震)>이다. 이는 지진현상 그 자체를 일컫는 명칭이며, 이 지진에 따른 재난(피해 등)에 대해 언론에서는 "한신-아와지 대진재(阪神・淡路大震災)"라는 표현을 쓴다. 대한민국에는 고베 대지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미국 지질조사국 기준 MMI 진도 XI, 국제지진센터(ISC) 보고서 기준 MMI 진도 XII라는 파멸적인 진동을 가한 지진이었다.


2. 피해[편집]



어느 개인이 지진 이후 캠코더로 직접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

고베뿐만 아니라 오사카[9]교토[10]까지도 피해가 번졌기 때문에 한신-아와지 대지진이라고도 하며 일본 지진 사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두 번째로 강력했던 규모 7.3, 진도 7[11]의 대지진이자 사망자 6,300여 명, 총 피해액 1,970억 달러[12]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큰 피해를 입힌 지진 중 하나다. 이 지진으로 인해 잘 나가던 항구 고베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부채를 안고 가는 도시로 몰락하고 말았다. 당시까지 고베는 홍콩과 함께 동아시아 해운의 양대 허브항으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시설 포화와 이용료 상승의 와중에 대지진까지 터지면서 고베항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허브항의 지위를 한국의 부산항에 넘겨주고 말았다. 부산항이 세계 3위 물동량의 항구로 성장한 것도 이 지진 직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진 이후 늑장 대응 문제가 불거졌다고는 하더라도 일본은 애초에 지진이 빈번한 나라라서 다른 개발도상국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지진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위아래로 흔들리는 직하형 지진[13] 특성상 진앙지가 도심에서 비교적 가까웠다는 점이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날 밤 몇 차례의 미진이 관측되기는 했지만 예측하지는 못했는데 진앙지가 고베 남서쪽에 있는 아와지 섬의 활성 단층이었고 아와지 섬의 단층과 고베의 단층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아와지 섬에서 일어난 지진이 단층을 타고 고베로 전달되어 대지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거기다 고베는 400년 동안 지진이 없었던 곳이었다.[14]

내진 기준의 강화 이전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한신고속도로 고베선 고가가 옆으로 쓰러진 이유는 내진기준이 강화되기 전의 구조물이었기 때문이다. 한신고속도로의 고베 구간은 1969년 8월 1일에 완공되었는데 이때의 내진설계 기준은 고베 대지진과 같은 큰 규모의 지진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것 때문에 고가도로를 지탱하는 기둥의 철근이 지면에서 1.5m 높이까지만 올라와 있었고 지진 때 이 철근이 끝나는 부분이 부러지듯이 꺾여서 무너졌다.

당시 간사이 지방은 재일 한국-조선인만 35만 명에 달할 정도로 한국인 수가 많은 지역이었으며 특히 고베에는 8만 7천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 피해자도 많아 유학생, 재일동포 등이 100여 명 이상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당해 한국 입장에서도 큰 사건 중 하나였고 언론에서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였다.

당시 방송 보도를 보려면 KBSMBC 방송분을 참고할 것. MBC의 경우 해당 보도에는 안 나오지만 당시 주말 MBC 뉴스데스크 앵커였던 정동영이 고베 현지로 급파되어 소식을 전했고 당시 도쿄 특파원이 훗날 MBC 사장이 되는 김재철이었다. KBS 측에선 유균[15] 도쿄특파원, 박영환 기자 등이 현지 소식을 전했다.

2.1. 전통주택과 신축주택[편집]


파일:gobe.jpg

사진 출처: 박문재, 「목조건축은 지진에 가장 안전한 건축물」

당시 사망자의 80%인 5,000여 명이 전통 목조주택에 깔려 사망했으며 여기에 지진 발생 후 정전 복구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명피해가 더욱 늘어났는데 화재로 인해 사망한 시체가 너무 많아 한 보따리에 60여 명의 유골이 수습되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전통 방식으로 지은 노후 목조주택과 달리 새로 지은 미국식 목조주택이나 복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 등은 무사한 등 피해 양상이 대조적이었다. 안국진이 펴낸 <일본 목조주택>의 139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1990년대 <목수 부족, 고베 지진 이후 목조주택 불신>

1995년에 발생한 한신 고베 대지진 직후, 재래목조주택의 붕괴로 인명 피해가 많았다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지진에 약했던 목조주택, 강한, 프리패브, 투바이포 주택」으로 보도되었다. 또한 일부 프리패브나 2x4주택메이커회사는 미디어, 광고전단, 책의 출판을 통해 주택메이커의 PR과 아울러 목수의 직감에 의지하여 건립되고 있는 재래목조주택의 시공을 비난했다. 이로 인해 재래목조주택의 불신이 확대되었으며, 재래목조주택 대부분을 건립하고 있는 공무점의 수주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지적한다. 이를 크게 나누면 첫째 측부의 보강자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16], 둘째 그 연결 부위를 보강해 주는 연결철물이 부족하다는 점, 셋째 하중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지 구조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되지 못한 점, 넷째 그런데도 지붕에 흙과 기와를 올려 하중이 높다는 점, 다섯째 지붕의 흙이나 벽체의 흙벽미장이 목재 뼈대에 스며들어 목재의 부식을 유도한다는 점 등이다. 흙벽구조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튀어 다치는 것은 덤이다.

당시에는 철근 콘크리트 건축의 경우 철근과 콘크리트가 모두 하나로 연결된 일체형 구조였기 때문에 건물이 분해되거나 붕괴되어 사람이 압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이는 부재간 연결철물의 사용이 많았던 미국식 목조주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못이나 철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장부에 홈을 파서 짜맞춤 방식으로 구성된 전통가옥의 경우 큰 지진에 못이나 철물없이 연결된 부재가 분리되어 통째로 무너지거나 압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같은 전통 방식이더라도 일본 건축기준법이 개정된 1981~1982년 이후 지어진 주택은 피해가 적고 이전에 지어진 주택은 피해가 많았다. 개정된 건축기준법의 내진 기준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법률불소급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법이 개정 혹은 시행될 때에는 시행 이후부터 효력을 가지므로 법 시행 전에 지어진 건축물들, 특히 수백 년이 넘은 에도 시대 건물들까지는 규제가 불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내진설계나 건축 기준이 더욱 강화되었고 철저하게 구조적으로 안전성을 확인하면서 설계가 이루어졌으며 목재간 연결부위 철물 사용빈도가 극도로 높아지고#1#2 지붕에 기와시공을 위한 흙미장이 폐기되었으며 방수지를 이용한 건식 시공이 대세를 이루었다. 게다가 전통 주택 붕괴의 주요 원인으로 기와와 지붕 위의 흙미장의 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점이 유력하게 지적되면서 최소한 고베 지역만은 지붕에 기와를 얹는 일이 극도로 줄어들었다.


3. 지진 발생 후[편집]


육상자위대 인원과 장비가 대거 투입돼 구조 및 복구를 지원하고 전투식량도 이재민들에게 불출했다. 해상자위대 또한 호위함들을 보내 고베항에 입항시켜 차출된 승조원들이 육자대를 지원하고 호위함의 조수기와 취사 시설, 보일러, 목욕 시설을 활용한 구조대 및 이재민에 대한 지원을 했다. 함내 목욕 시설은 위생 문제 해결 외에 전투식량을 데우는 것에도 요긴하게 쓰였다고 한다.

세계 구호 단체들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한국 정부와 민간 단체는 공식적으로 막대한 지원을 하였으며 김영삼 대통령이 당시 일본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위로전을 보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해당 재난을 추모하는 뜻에서 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인 1월 18일 수요일에 '수요집회'를 중단했다.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 아즈마 신이치로가 1995년 초등학교 졸업문집에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때문에 지진의 초동 대응이 늦어진 것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17]

나카무라 에이치 일본 참의원 의원은 사건 이후 일어난 화재가 재일 한국인의 방화일 수도 있다고 망언해 물의를 빚었으며 이로 인해 민단과 한국특파원 회견에까지 나가 사죄를 표해야 했다. (KBS, MBC) 이후 2016년 구마모토 지진 직후에도 관동대학살 당시처럼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다시 나돌았다.[18]

고베 대지진 직후 닛케이 지수는 급락했는데 여기에 연동된 닛케이 225 지수 선물 매수포지션에 옵션 양매도를 취한 닉 리슨도 이 대지진으로 인해 망하고 230년 역사를 지닌 영국의 베어링 은행을 파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대지진이 엔화 가치를 급등시켰는데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한 엔화 매입과 재건작업을 위한 엔화수요 급증 등이 원인으로써 미국 달러에 대해 20% 급등, 즉 80엔~70엔대로 진입하였으며 이후 일본 정부가 개입하여 서서히 장기적으로 엔화 약세로 진입하였다. 문제는, 플라자합의 이후 지속적으로 엔고가 유지되어 1995년까지 슈퍼 엔고상태였던 아시아 무역시장에 고베 대지진이 터지자, 일본은 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에게 엔저 전환을 위한 외환시장 개입 허용 요청을 하고 마침 금리인상기였던 미국이 이를 들어주면서, 이미 이전부터 자국 대출금리보다 낮은 저금리 엔화,달러화 채권을 엔고만 믿고 잔뜩 투자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10년만에 끝난 엔고에서 엔저 전환으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 폭탄을 얻어맞고, 금융시장이 개방되어있던 태국은 그 혼란을 노린 조지 소로스등 환투기 세력들이 달러 페그 고정환율제로 묶여있던 바트화를 공격해 어마어마한 이득을 취하고, 태국 정부는 결국 IMF행을 선택하게 된다.

당연히 태국의 붕괴는 동남아시아 전체의 단기외채 위기로 이어졌고 월가는 아시아에서 도망쳐야한다는 레포트를 계속 내고 있었다. 문제는 똑같이 장기 엔고를 낙관하고 있었으며, 태국과는 달리 금융시장이 폐쇄되어 있어 해외 헤지펀드들의 환치기공격을 받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던 한국 또한 알고보니 약달러,엔고시절 미국,일본의 저금리를 믿고 종금사들이 달러,엔화 단기 차입후 원화로 환전해 국내 기업에 대출하는 돈놀이를 하고 있었고, 이 종금사들이 고금리 전환과 엔저전환으로 모두 무너지면서 어마어마한 경상수지 적자가 들이닥쳤고, 한보부터 시작해 기아자동차까지 줄줄이 무너지면서 위기가 현실화되었으며, 당시 한국의 고정환율제를 조정하기 어려울 만큼 미국와 외교마찰이 심각했던[19] 상황에서 일본도 지원을 거절해 일본 자금까지 빠져나가면서 한국도 결국 1997년 외환 위기가 현실화 되고 만다. 결국 고베 대지진은 닛케이 폭락으로 인한 베어링 은행 파산은 물론이고, 2년뒤 아시아 전체의 금융위기를 일으킨 트리거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 지진으로 고베항의 기반시설이 무너지면서 환적하물들이 대거 이탈하여 부산항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20]

이 지진 이후 소니가 비상충전기능이 있는 라디오인 ICF-B200[21](2016년 기준 ICF-B09의 전신격)을 1995년에 발매했다는 후문이 있다.


4. 현재[편집]


파일:external/assets0.japan-guide.com/kobe_meriken_park_3552_02.jpg
사진은 고베 대지진 당시의 피해 상태를 그대로 남겨 놓은 고베 항 지진 메모리얼 파크(神戸港震災メモリアルパーク).

고베 대지진이 이후 재산을 잃은 주민들은 몇 년 동안 수많은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며 피해 보상금을 완전히 받지 못한 주민들도 있다.

파일:external/www.hyogo-tourism.jp/11_disasterreduction.jpg
마찬가지로 고베에 인간과 방재미래센터[22][23]라는 건물도 있는데 당시 피해 상황을 보려면 위의 장소보다는 이곳이 좀 볼 만하다. 근처에 나다역, 이와야역, 한신 카스나노미치역이 있지만 거리는 조금 된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E4%BA%BA%E3%81%A8%E9%98%B2%E7%81%BD%E6%9C%AA%E6%9D%A5%E3%82%BB%E3%83%B3%E3%82%BF%E3%83%BC%E5%86%85%E8%A6%B3.jpg
당시 지진의 규모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체험관과 지진 이후 폐허가 된 고베 시내를 재현한 것이 있으며 지진 당시 상황과 복구 과정 등을 20여 분의 다큐멘터리로 상영하고 있다. 다큐의 경우 자막은 자국어(일본어)지만 한국어 음성을 지원한다.[24]

지진에서 살아남기를 집필한 작가와 만화를 그린 문정후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 실제로 해당 책에도 이 지진 당시 촬영한 사진이 있다.


5. 기타[편집]


  • 이후에 일어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1997년 외환 위기와 함께 버블 붕괴로 골골거리던 일본을 확실하게 끝장내 버린 지진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5년까지 일본은 꽤나 안정적이었고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결정타를 입었다. 지진이 일어난 장소가 어디 외딴 섬도 아니고 동아시아 해운의 양대 허브항 중 한곳인 고베항 근처였고 대도시 한복판이었으니, 일본 정부에게 이걸 복구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당시 기준 약 10조 가량의 손실이 일어났다.[25] 여기에 2개월 후 옴진리교가 일본의 정부기관을 마비시키기 위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키며 더 충격이 컸다.

  • 이 일을 겪고 재건하기 위해 고베의 상가에서 철인 28호 실물 크기 로봇을 세워 화제가 된 바 있다.[26]

  • 당시 고베를 연고지로 삼았던 일본프로야구오릭스 블루웨이브(現 오릭스 버팔로즈)는 이 해의 대지진으로 인해 상처 입은 고베 시민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팀워크를 튼튼하게 다짐과 동시에 힘내라 고베(がんばろうKOBE)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1995년 시즌을 맞이했고 그 결과는 이 해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함[27]에 이어 이듬해엔 리그 연패에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이뤄냈다.

  • 1995년 12월에 시작돼 매년 12월에 열리는 전구를 이용하는 조명 건축물 축제인 고베 루미나리에는 이 지진으로 피해를 겪은 고베시에 부흥의 등을 켜자는 의미의 축제다.


  • 한신 전기철도한신 본선이 큰 피해를 입어서[28] 경영위기까지 몰렸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산하 야구단인 한신 타이거스는 모기업의 경영 악화+구단 내부 갈등+외국인 선수들의 연속 먹튀가 콤보를 이루면서 2002년까지 4466566664라는 최악의 비밀번호를 기록하게 됐다.[29]

  • 영국의 200년 전통의 베어링 은행이 파산하고 단돈 1달러에 팔려 나가게 된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바로 이 대지진이다. 그 사건의 주범인 닉 리슨옵션(금융) 문서 참고 바람.

  •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참사에 충격을 받아 소설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집필했다.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하던 초기 작풍이 사회적 문제에 중점을 둔 작풍으로 변한 데도 이 사건이 크게 작용했다.


  • 1923년의 관동대지진과 1995년의 고베 대지진 둘 다 겪은 할머니가 있다.

  • 규모가 차이가 있기는 해도 비슷한 직하형 지진이 지진에 대한 방비가 전혀 없는 곳에서 일어났을 때 어떤 헬게이트가 열리는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해 본 사람들이 안다고, 당시 일본인들이 상당히 안타깝게 봤다고 한다.

  • M 7.3, 최대진도 7의 지진은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는 일본에서도 전례가 거의 없는 격진이었기 때문에 이 지진을 능가하는 지진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그러나 16년 뒤인 2011년에 이 지진을 완벽히 압도하는 M 9.1, 최대진도 7도호쿠 대지진이 일본을 강타했다. 지진 피해의 성격은 고베 때와는 다른데 고베 대지진은 지진 자체가 직접 도시를 강타해서 피해가 생겼다면 도호쿠 대지진은 1차 천재지변인 지진동보다는 그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2차 천재지변인 쓰나미로 인해 막대한 피해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이 쓰나미로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생겨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의 초대형 재해가 되고 말았다.

  • 1995년 1월 26일자 KBS 뉴스광장에서 특보를 보도하던 중 한 리포트에서 오디오가 빨리감기되는 방송사고가 났다.#

  • 2016년에는 비슷한 규모의 구마모토 대지진이 규슈 지역을 강타했다. 그러나 이 지진과 도호쿠 대지진을 당한 후 대비를 더욱 철저하게 했는지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 한큐 전철 고베산노미야역도 이 지진으로 인해 이 역에 딸려있는 상업시설인 고베한큐빌딩이 심각한 피해를 겪고 1층 빼고 철거됐다.

  • 간사이 지방에 위치한 여러 게임 회사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코나미의 명작 메탈기어 솔리드는 원래 3DO 플랫폼에서 '메탈기어 3'라는 이름으로 출시될 예정이었다.[30] 하지만 이를 준비하다가 이 지진으로 인해 코나미 본사가 큰 피해를 보게 되었고 결국 발매일을 늦췄다고 했다.

  • 고베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교토에 위치한 닌텐도는 울트라 64의 발매를 한참 미루고 말았고[31] 그 과정에서 울트라 64로 발매 예정이었던 여러 게임들의 발매 여부에 변동이 생기거나 내용이 수정되기도 했다.

  • 캡콤의 경우 스트리트 파이터 3의 그래픽을 원래 EX와 같이 3D로 제작할 예정이었으나 지진으로 인한 3D 데이터 유실 때문에 2D 게임으로 다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 SNK의 경우 지진으로 인한 개발 차질은 없었으나 아랑전설 3의 마스터업 당일에 지진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 고베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 야마구치구미가 조직원들을 풀어서 구호를 도왔다.


  •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지 소로스가 엔저에 배팅했다가 멕시코 도산 위기와 고베 대지진 때문에 미국이 저금리 정책으로 선회하였고 재해복구를 위해 일본으로 다시 돈이 쏠리면서 손해를 봤다.

  • 지진으로 인해 일본 경마 전반기 그랑프리인 G1 다카라즈카 기념이 한신 경마장의 지진 피해로 인해 정상 개최가 어려워지자 교토경마장에서 개최됐다. 거기서 인기투표 1위인 라이스 샤워는 사실상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됐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버블 붕괴(1990년) 이전에 비해 극도로 음침해진 90년대 일본의 사회 분위기를 설명할 때 옴진리교 사건과 함께 빠지지 않는 사건.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자유롭지 않다. 한국으로 치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급의 트라우마였다고 보면 된다.

  •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드라마 화려한 일족은 고베를 거점으로 한 기업가의 이야기로 당연히 고베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한신 아와지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인해 상당수 당시 건축물이 손상당한 까닭에 중국에서 로케이션 촬영했다고 한다.
  • 아즈망가 대왕오사카는 이 지진의 피해자라는 추측이 있다.
  • 투하트호시나 토모코의 과거와도 관련이 있다.
  • 알바 뛰는 마왕님!의 스즈키 리카는 이 지진을 겪었다. 중소기업 공장이 모여 있는 피해가 큰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도쿄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 고향이 고베인 것만 알면 그것밖에 화제가 없는 건가 싶을 정도로 고베 대지진에 관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기에 그게 귀찮아서 사투리를 표준어로 교정했다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같은 반 아이 둘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태연한 얼굴로 "지진 어땠어?"라고 묻는 놈들에겐 짜증이 난다고 한다. 반면 유사 에미는 본인이 고베 사람인 걸 알고도 지진에 관해 묻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좋다고. 이 내용은 2011년 2월 10일 발매된 1권에서 나온 것인데 공교롭게도 한 달 뒤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나 버렸다...[32]
  • 기시 유스케의 데뷔작인 13번째 인격 ISOLA의 시간대가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다. 13인격의 여고생인 치히로도 그 사건의 피해자.
  • 그러나 죄인은 용과 춤춘다의 작가인 아사이 라보도 당시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끔찍한 피해를 겪었다고 하며 작가 본인의 어둡디 어두운 작품관이 이 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듯하다.
  • 반딧불이의 묘에 등장했던 니테코 연못도 이 지진으로 훼손되어 지진 이후의 모습은 지진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 게임과 관련해서 KOF 96은 미완성 부분이 많으며 데이터상에만 있는 필살기들이 상당히 많다. 이를 두고 고베 대지진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루머로 밝혀졌다.
  •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지고 웃음을 잃게 되어 웃음을 되찾자는 의미에서 푸콘 가족을 제작하였다.[33]
  •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환야의 초반부에도 이 사건이 나온다.
  • 히라사와 스스무의 음악 'サイレン *Siren*'은 이 사건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들어보기
  • 22년 후의 고백에 나오는 형사의 여동생과 남자친구가 고베 대지진의 생존자다. 여동생은 간호사였는데 지진이 발생하자 무서워서 식탁 아래[34]에서 나오지 못했고 선배 간호사들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사상자들의 구조에 나서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다.
  • EZ2DJ의 수록곡인 Quake in Kyoto도 고베 대지진을 테마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술했다시피 이 지진이 교토까지 영향을 끼쳐서 이런 제목을 지었다는 추측이 있다.
  • 우자키 양은 놀고 싶어!의 작가인 타케는 고베 대지진의 생존자라고 한다. 당시 잔해 더미 밑에 깔려 있었다가 구호단체에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를 느껴 일본 적십자사와 콜라보하기도 했다.
  •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작가 타니가와 나가루효고현 니시노미야시 출신으로, 일본 쪽 문학비평에서는 당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폐쇄공간과 하루히의 심리묘사가 아닌가 하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도호쿠 대지진에 비해서 고베 대지진은 상대적으로 효고현 내부의 재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는데 특히 오사카가 지진 당일 오후 바로 시가지 기능이 복구된 것을 두고 분노한 효고현민이 많았다고. 작중 스즈미야 하루히는 군중 속의 고독감과 허무함을 느끼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 이상현상을 찾는 묘사가 많은데 하루히가 효고현민을 대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존재한다.
  • 고베신문도 당시 산노미야 본사가 지진으로 크게 피해를 입어 신문을 발행하지 못할 뻔했으나 교토신문의 지원으로 휴간 없이 고베 지역의 피해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후지 테레비에서 제작한 드라마《고베신문의 7일간》은 이 신문사의 임직원들이 보고 겪은 것을 재현한 것이다.
  • 지팡구에도 외전격으로 잠시 나오며 해자대 호위함이 인원을 보내 구조와 복구를 도울 뿐 아니라 함의 조수기와 보일러를 이용하여 육상자위대와 이재민들의 취사 및 목욕 지원 등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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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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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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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
발생일
규모
지진명

1906. 4. 18.

M8.3
샌프란시스코 지진

1909. 6. 11.

M6.2
1909년 프로방스 지진

1920. 12. 16.

M8.7
1920년 간쑤성 대지진

1921. 3. 20.

M4.2
1921년 경주 지진

1923. 9. 1.

M8.3
1923년 관동대지진

1925. 12. 9.

M4.4
1925년 홍성 지진

1936. 7. 4.

M5.3
지리산 쌍계사 지진

1939. 1. 24.

M8.3
1939년 치얀 지진

1939. 12. 26.

M7.8
에르진잔 대지진

1944. 12. 7.

M7.9
1944년 도난카이 대지진

1944. 12. 19.

M6.8
조선-중국 국경 지진

1946. 4. 1.

M8.6
1946년 알류샨 열도 지진

1946. 12. 21.

M8.0
1946년 난카이 대지진

1948. 6. 28.

M7.1
1948년 후쿠이 지진

1950. 8. 15.

M8.7
1950년 아삼 지진

1952. 3. 19.

M6.4
1952년 강서 지진

1952. 4. 24.

M5.6
1952년 은천 지진

1952. 11. 5.

M9.0
세베로쿠릴스크 지진

1959. 5. 4.

M8.3
1959년 캄차카 지진


[ 1960년대~ ]
발생일
규모
지진명

1960. 2. 29.

M5.8
1960년 아가디르 지진

1960. 5. 2.

M9.5
칠레 대지진

1960. 10. 8.

M6.8
1960년 길주 해역 지진

1963. 9. 6.

M6.3
1963년 영덕-포항 해역 지진

1963. 9. 7.

M6.6

1964. 3. 27.

M9.2
알래스카 지진

1964. 6. 16.

M7.5
1964년 니가타 지진

1965. 8. 3.
~1970. 6. 5.

M6.4
마츠시로 군발지진

1973. 9. 29.

M7.8
1973년 나진 해역 지진

1975. 2. 4.

M7.0
1975년 하이청 지진

1975. 6. 29.

M7.3
1975년 속초 해역 지진

1976. 7. 27.

M7.8
1976년 탕산 대지진

1976. 7. 28.

M7.4

1976. 8. 16.

M8.0
1976년 필리핀 모로 만 지진

1978. 9. 16.

M5.2
속리산 지진

1978. 10. 7.

M5.0
홍성 지진

1980. 1. 8.

M5.3
의주 지진

1982. 2. 14.

M5.6
1982년 사리원 지진

1983. 5. 26.

M8.1
1983년 아키타 지진

1985. 9. 19.

M8.0
멕시코시티 대지진

1988. 12. 7.

M6.8
아르메니아 대지진

1989. 10. 17.

M7.2
샌프란시스코 지진

1990. 6. 21.

M7.4
1990년 이란 지진

1990. 7. 16.

M7.8
1990년 필리핀 루손 지진

1992. 4. 13.

M5.8
1992년 루르몬트 지진

1993. 7. 12.

M7.8
1993년 홋카이도 해역 지진

1994. 4. 22.

M5.3
1994년 울산 해역 지진

1994. 7. 26.

M5.9
1994년 홍도 해역 지진

1995. 1. 17.

M7.3
효고현 남부 지진

1996. 12. 13.

M5.6
1996년 영월 지진

1997. 6. 26.

M5.0
1997년 경주 지진

1999. 8. 17.

M7.6
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

1999. 9. 21.

M7.7
921 대지진

2000. 6. 17.
~21.

M6.5
아이슬란드 지진

2000. 6. 6.
~9. 28.

~ M6.5
이즈 제도 군발지진(2000년 7월)A

2000. 10. 6.

M7.3
2000년 돗토리 지진
A:해당 군발지진의 시작일은 위의 아이슬란드 지진보다 먼저이지만, 가장 큰 지진인 이 문서에 집중적으로 서술된 규모 6.5의 지진은 2000년 7월 1일에 발생함을 고려하여 2000년 7월 1일 지진을 본진으로 분류하여 위의 문서인 아이슬란드 지진 뒤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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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보 당시 M 7.2였으나 사후해석으로 상향 조정되었다.[2] 지진 발생 당시 진도 6으로 관측했으며 사후해석에서 7로 격상한 것이다. 그리고 1995년 당시에는 최대진도 5와 6의 강약 세부 등급이 없었으며 해당 세부 등급이 신설된 것은 고베 지진 이듬해인 1996년의 일이다.[3] 계측진도 6.6[4] 구 츠나군 호쿠단정, 이치노미야정, 츠나정[5] 실제로는 해일주의보급인 34cm의 해일이 관측되었다.[6] 영상의 1분 0초~1분 19초 지점, 7분 45초~8분 40초 지점에 NHK 오사카 방송국 뉴스 스튜디오에 여진(M 4.9, 진도 4의 강한 여진)이 강타하는 장면과 3분 36초~3분 46초 지점에 고베 방송국에 본진이 강타하는 장면도 나온다.[7] 영상 원출처가 아사히방송인데 2020년 1월 17일 고베 대지진 25주기를 맞아 테레비 아사히 공식 뉴스채널에 아사히 방송이 영상을 제공했다.[8] 동영상의 썸네일이기도 한 철로가 무너진 모습은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발생할 때까지 일본의 대지진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그만큼 이 지진의 임팩트는 매우 강렬했다.[9] 오사카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베만큼은 아니지만 당시 최대진도 4를 기록했다.[10] 이쪽은 오사카보다 더 강한 최대진도 5를 기록했다.[11] 1949년에 진도 7이 새로 설정된 후 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격진이다.[12] 1995년 기준. 2020년 환율 적용 시 3,298억 달러동일본 대지진 다음으로 가장 피해액이 높은 자연재해다.#[13] 판과 판끼리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 활성단층을 따라 일어나는 지진. 일본의 경우 판이 위치한 곳은 도심과 먼 바다이며(단층은 내륙) 진원지가 지표면으로부터 20km 미만의 얕은 곳에 위치한다.[14] 아무리 지진이 잦은 일본일지라도 지역별로 지진 빈도가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도쿄에 사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 두번 꼴로 경미한 지진을 느끼면서 살지만 오사카에 사는 사람은 일년에 한 번 겪을까 말까이다. 당장 수도직하지진 문서를 보면 100년 전후로 규모 7과 8짜리가 번갈아가며 간토를 뒤흔들지만 오사카는 2018년의 규모 5.5~6.1의 지진이 400여년 만에 발생한 최대 규모 지진이라고 한다. 이는 도쿄와 오사카의 판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장 두 도시는 위치한 판이 다르다.(도쿄는 태평양판, 필리핀판, 유라시아판, 오호츠크판이 위치하고 있고 오사카는 아무르판, 필리핀판이 위치해 있다) 정리하자면 일본은 전국이 지진 다발지대이자 지진 위험지대지만 지역마다 그 위험성이 또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진이 일어난 고베는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지진에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발생 시간이 오전 5시 46분, 즉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대라서 피해가 더더욱 커지는 것에 한 몫 했다.[15] 1973년 중앙일보에 입사 후 언론인 생활을 시작해 1985년부터 KBS로 옮겨 도쿄특파원 외에 보도국 외신부 차장, 정치부 차장, 해설주간, <일요진단> MC, 보도국장 등을 역임했다. 2005년부터 3년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원장을 역임했다.(중앙일보 기사)[16] 같은 목조주택의 팀버프레임에 브레이스가 존재하고 경량목 구조의 합판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17] 어느 정도였냐면 마치 무라야마 총리에게 복수를 하려는 듯한 수준의 글이었다.[18] 악플이라고 보면 된다. 범인도 사회 부적응층이었고 우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세대는 21세기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19] 원인은 김일성 사망 후 지속적으로 생겨난 북한 핵문제 압박 때문이다. 여기에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연이어 터진 로버트 김 간첩사건으로 양국의 외교 갈등이 크게 악화되었다.[20] 다만 이후 중국 항구들의 물동량 취급이 급성장하면서 부산항의 물동량 순위는 4~5위로 내려왔다.[21] FM/TV 76.0 ~ 90.0MHz/1 ~ 3CH(90 ~ 108MHz), MW 530 ~ 1602kHz 다이얼 방식 튜닝[22] 人と防災未来センター[23] 정식명칭은 "한신 • 아와지 대지진 기념 인간과 방재미래센터(阪神・淡路大震災記念 人と防災未来センター)"이다.[24] 요청하면 음성가이드 기기를 따로 갖다 준다.[25] 1995년 당시의 환율로는 1,970억 달러, 2020년의 환율을 적용시키면 3,298억 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이다.[26] 참고로 고베는 철인 28호의 작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고향이다.[27] 전신이었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1984년 퍼시픽리그 우승 이래 11년 만의 우승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시리즈에선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1승 4패로 패퇴하며 우승에 실패했다.[28] 병행하는 JR 고베선보다 한 분기 가까이 늦게 전구간이 복구되었다. 당연히 그동안 JR 서일본은 반사이익을 보게 되었다.[29] 이 지진 때문에 페이롤을 줄이기 위해 신인지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비밀번호에 영향을 줬다는 말이 있으나 오히려 이 시기 드래프트에서 이마오카 마코토, 이가와 케이, 후지카와 큐지 등 2000년대 한신의 중흥기의 주축을 이룬 선수들을 많이 배출해냈기에 이쪽은 낭설에 가깝다. 다만 이 지진 때문에 1995년과 1996년의 신인 드래프트에 소극적으로 나선 건 사실로, 둘 다 4명밖에 지명하지 못한 데다 1995년에 지명한 4명은 별다른 활약 없이 방출되어서 해당년도 드래프트는 역대 최악의 한신 드래프트 하면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언급된다. 1996년 드래프트는 이마오카 마코토, 세키모토 켄지로가 쏠쏠하게 활약해줘서 훨씬 낫다.[30] 코지마 히데오폴리스너츠 이식에 이어서 메탈기어 시리즈도 3DO로 이식하려고 했고 프로모션 영상까지 만들어 둔 상태였다.[31] 이 과정에서 닌텐도는 세가 새턴플레이스테이션에게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무려 2년이나 선점당해 의도치 않은 공백기를 가지고 말았다.[32] 도호쿠 대지진과 관련해 해당 소설의 작가가 후기에서 해당 소재를 다루지 않겠다고 한 바 있다. 지진이라는 것이 주요하게 언급되는 내용 중 하나였으나 도호쿠 대지진이 워낙 큰 사건이었던 데다 너무 최근의 사건이었던지라...[33] 이후 16년 뒤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 웃음을 되찾자는 의미에서 그 다음 해에 스마일 프리큐어!가 만들어지면서 되풀이되었다.[34] 실제 지진 대피법 중의 하나로 책상 아래로 들어가서 낙하물을 방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