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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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수 전쟁 (여수전쟁)
高句麗・隋戰爭 | GoguryeoSui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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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차 598년 음력 6월
2~4차 612년 음력 3월 - 614년 음력 10월
장소
하북성[1], 요서, 요동 일대, 만주한반도 북부
원인
수나라고구려 견제
양제의 고구려 침공, 고구려와 돌궐의 연대
교전국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수나라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지휘관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문제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양제
양량
왕세적
우중문
우문술
내호아
파일:고구려 군기.svg 영양태왕
고건무
고대양
을지문덕
강이식
연태조
병력
제1차 고구려-수 전쟁 (598)
수・육군 약 300,000명
병력 불명
제2차 고구려-수 전쟁 (612)
1,133,800명[2]
병력 불명
제3차 고구려-수 전쟁 (613)
병력 불명
(수십만 명)
병력 불명
제4차 고구려-수 전쟁 (614)
병력 불명
병력 불명
결과
고구려의 승리
영향
수나라의 국력 쇠퇴와 내전과 멸망

1. 개요
2.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운
3. 제1차 고구려 - 수 전쟁
4. 제2차 고구려 - 수 전쟁
4.1. 수양제의 야욕
4.2. 유례 없는 준비
4.2.1. 관련 사료의 기록
4.2.2. 병력 추정치
4.2.2.1. 100만 병력 긍정론
4.2.2.2. 100만 병력 회의론
4.2.3. 시체로 이뤄낸 전쟁 준비
4.3. 전쟁의 시작 - 요하 도하 전투
4.4. 요동성 전투
4.5. 별동대 편성
4.5.1. 실패한 보급지원
4.6. 을지문덕의 방문과 그의 전술에 넘어가다
4.7. 하나 둘씩 격파되기 시작하다
4.9. 수나라 군대의 철군
5. 3차 전쟁
6. 4차 전쟁
7. 결과
7.1. 수나라: 막대한 국력 손실, 결국 멸망
7.2. 고구려: 대승, 이후 소극적인 대외 정책으로 선회
8. 명칭에 대한 문제
9. 참전 장수
10. 대중매체에서
11. 여담
12. 관련 목록



1. 개요[편집]


수나라당나라가 흥하고 망한 것은 모두 이 고구려와 관계가 된다. 수문제가 새로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그 당시에 돌궐은 이미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였다. 양제가 순시하다가 친히 돌궐의 장막에 이르러서 우연히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배구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드디어 이 화를 일으켰다. 배구는 천하의 대세가 이미 합해진 것을 보고는 역시 고구려에서도 조공을 바치게 하여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천하 대란의 단서가 여기에서 발단될 것은 알지 못하였다.

《도서편》(圖書篇)[3]

한국의 고구려중국 수(隋) 왕조 사이에 벌어졌던 대전쟁.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때, 수나라문제양제와의 2대에 걸친 긴 전쟁으로 각각 598년, 612년, 613년, 614년 등 4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통일 중국이 총력전을 벌여 패배한 유일한 전쟁이다.[4][5] 고구려-수 전쟁은 베트남전같은 단순 패전이 아니라 초강대국이 총력전끝에 인력과 국력을 갈아넣고 멸망한것이므로 단순한 패전과 그 의미가 다르다.[6]

제2차 원정은 양국 모두 국가의 모든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의 양상을 띤 전쟁이었으며, 한국에선 을지문덕살수대첩이 일어났던 전쟁으로 매우 유명하다. 일각에선 삼국통일전쟁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단순 기록상으로는 전(前)근대 역사상 두 번째로 큰 단일 전쟁이다. 참고로 첫 번째로 큰 전쟁은 헤로도토스가 적군의 수를 500만이라 기록한[7] 페르시아 전쟁이다.

전쟁 전 정치상황과 전비규모, 원정의 규모와 결말까지 하나같이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중국 왕조의 기록에는 대대손손 반면교사로 등장하는 큰 교훈을 준 전쟁이며, 외부의 시선에서 보더라도 중국 통일왕조가 얼마나 엄청난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와 함께 그 엄청난 힘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등 많은 시사점이 존재한다.

중국 통일제국이라는 전근대 사상 깨진 바가 없는 최대의 생산량과 인구를 자랑하는 국가와 그에 맞서는 한때 동아시아 최강의 기마 농경 연립 국가[8], 그리고 후자와 연립하여 독립을 지키려 했던 유목 제국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계 최대의 문명 규모를 자랑하던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강대한 세력들이 뒤엉킨 대전쟁이었다.


2.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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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수나라수문제는 589년, 남조 시대 마지막 왕조인 진(陳)나라를 멸망시켜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하였다. 중국을 통일시키고 내치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킨(개황성세) 문제는 장성 이북에 있던 돌궐고구려를 장차 중국을 위협할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여 이들을 주시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

시간을 6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607년 8월 북방 초원에 가을이 왔을 때, 양제는 선물을 가지고 돌궐 계민 칸(可汗)의 천막 궁정으로 찾아갔다. 이것은 일종의 답방이었는데, 그해 초 유림(楡林)에서 변경전략가 배구(背矩)가 포섭한 동돌궐의 계민 칸으로부터 양제가 충성의 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9][10][11]

첫 만남에서 계민 칸을 애타게 기다리던 이야기는 양제의 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도 나온다.

"借問長城候(차문장성후) 單于[12]

入朝謁(선우입조알) 濁氣靜天山(탁기정천산) 晨光照高闕(신광조고궐)[13]

"장성의 병사에게 물으니 선우(계민 칸)가 들어왔다고 한다. 탁한 기운은 천산에 가라앉고 새벽의 빛은 고궐(오르도스)을 비춘다."

계민 칸을 곧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은 양제에게는 탁한 공기가 금방 맑아진 것만 같고, 새벽빛이 땅을 비추는 것처럼 기쁜 일이었다. 양제로서는 북변이 안정되니 이제야 안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계민 칸의 궁정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고구려의 사신이 먼저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고구려는 수나라의 영토를 유린해왔고, 북방 초원에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는 고구려는 양제에게 치욕감을 주는 존재였다. 수 제국을 능멸하고도 무사한 나라는 고구려밖에 없었다. 이 고구려 사신은 평양성에서 1,500km나 떨어진 이곳에 자신보다 먼저 와서 계민 칸과 사사로이 통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과거 돌궐은 수 왕조의 목을 쥐고 있던 무서운 존재였다. 수나라의 모체였던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통합하기 이전부터 그러했다.초원을 통일한 돌궐은 북주의 북제 공격을 지원하기도 했다. 돌궐 목간 칸 치세에 북주는 매년 10만 필의 비단을 상납했다. 북제 역시 그러했다. 양국은 돌궐이 상대 국가를 지원할까 봐 항상 두려워했다. 돌궐의 칸은 두 나라로부터 갈취한 비단을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양제가 초원에 행차한 시기는 계민 칸이 수나라의 원조를 받아 그의 동포들을 제압하고 초원을 어느 정도 장악한 때였다. 그런데 수나라가 힘들게 복속시킨 칸에게 고구려 사신이 찾아와 이간질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수나라의 배구는 양제의 말을 고구려측에 전했다.

"돌아가거든 너희 고구려 왕에게 직접 수 조정에 와서 신하의 예의를 표하라고 전하라. 그렇지 않으면, 돌궐 기병을 동원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609년 계민 칸이 죽고 그의 아들 시필 칸이 즉위했다. 수나라의 침공이 확실해진 시기에 고구려에게 기회가 왔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수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다. 고구려는 젊은 시필 칸에게 사절을 보냈고, 과거 수나라가 자행한 돌궐 분열정책에 대해 충분히 상기시켰다. 고구려 사신은 시필 칸에게 결정적인 충고도 하는데, 바로 시필 칸의 동생을 또다른 칸으로 세워 경쟁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적의를 갖게 된 시필 칸은 곧바로 수나라와의 의례적 관계를 청산한다.

양제는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나며 보급을 자급자족하는 동돌궐의 유목민 기병을 고구려 침공에 동원하려 했으나, 이는 고구려의 공작으로 무산되었다. 고구려에 대한 징벌은 오직 수나라 혼자만이 걸머지는 운명이 되어갔으며, 이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


2.1. 평원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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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의 평복[14]
수나라가 중국 대륙 통일로 모은 내부의 엄청한 힘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당장 개피를 보는 것은 물론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제25대 평원왕(平原王) 시절부터 수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보 탐색과 돌아가는 모양새도 어느 정도 파악은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581년부터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는데, 584년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7차에 걸친 조공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던 와중, 마침내 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하여, 기어코 수문제가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졌다.

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守之䇿

32년(590년)에 왕이 진(陳)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것으로 막고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수나라의 중국 통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평원왕은 크게 두려워했고, 서둘러 병기를 수선하며 곡식을 모으고, 대처 방법을 생각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이 시기 평원왕은 수나라에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내 수나라의 무기 장인들을 빼내오기도 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수 문제 초기에 고구려 사신들이 자주 왔는데,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한 후에는 고구려가 크게 두려워하며 곡식을 저축하고 방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점이 당시 수 문제에게 꽤나 거슬리게 보였는지, 수 문제는 옥새를 찍은 조서인 새서(璽書)를 보내 평원왕을 질책했다.

隋 髙祖 賜王璽書責以雖稱藩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狹人少今若黜王不可虚置終湏 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洒心易行率由憲章即是朕之良臣何勞别遣才彦王謂 遼水 之廣何如 長江 髙句麗之人多少 陳 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未許王自新耳王得書惶恐將奉表陳謝而未果

수 고조(高祖)가 왕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질책하기를 비록 번부(藩附)라고는 하나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지방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고 할지라도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비워둘 수 없으므로 마침내 관청의 아전과 하인을 다시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새롭게 하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장강도 건넜는데 요하를 못 건널 것 같냐?'''" 양자강은 강의 길이가 6300km에 유역 면적은 180만 8500km²이고, 요하(길이 1,345km에 유역 면적 232,000㎢)보다 여섯 배쯤 길고 넓다.][15]

짐이 만일 포용하고 기르려함이 없고, 이전의 잘못을 질책하려고만 한다면 장군에게 명할 것이지 어찌 많은 힘을 필요로 하겠는가?[16] 하여 은근히 타이르고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할 뿐이다. 왕이 글을 받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또한 《수서》에 기록된 수문제고구려에 보낸 글을 보면 평원왕이 사람을 은밀히 보내 수나라 무기 장인들을 빼돌렸다는 사실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평원왕이 단순히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와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실 제16대 고국원왕 이후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베껴 온 모양새라, 평원왕의 약해보이는 모습도 의도적인 폄하를 그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나에게) 주문(奏聞)하면 될 것인데, 몇 해 전에는 몰래 와서 재화로써 이익으로 소인(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弩手)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달아났소.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 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소?

{{{#!wiki style="text-align: right"

《수서》 권81, 열전46 <동이열전> -고려-}}}
또한 평원왕은 전쟁 준비와 함께 이 당시 쇠퇴 일로를 걷던 고구려를 안정시키는데 큰 노력을 하는 모습이 기록을 통해 보인다. 당시 고구려는 제23대 안원왕(安原王) 이래로 점점 쇠퇴하던 중이었다. 일본 측 기록을 보면 내전반란도 여러 번 있었고, 특히 제24대 양원왕은 급부상한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 영토를 거의 다 빼앗겼고[17] 심지어 북제 쪽 기록에서는 양원왕이 북제의 사신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런 말이 나돈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 고구려의 위상이나 파워가 예전만 못하다는 식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이면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도 못했을 테니. 이러한 때 고구려 국왕으로 즉위하며, 스스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무리한 궁궐 수리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립의 불씨가 보이는 와중에, 평원왕은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제26대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게 된다.


2.2. 영양왕[편집]


590년에 즉위한 영양왕평원왕의 장자로, 풍채와 정신이 뛰어나고 호쾌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수나라가 강대해지고 수나라의 포섭이 이어지자, 일부 속말말갈의 무리가 고구려를 뒤로 하고 수나라에 합류했다. 이때 추장인 돌지계(突地稽)의 아들이 고구려-당 전쟁나당전쟁 때 나타나는 당군 지휘관 이근행(李謹行)이다. 또한 거란의 한 부족인 출복부도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나라에 내부(內附)해 버렸다. 또한 첩보를 통해 수나라가 고구려와 다른 나라들을 정벌할 군대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는 계속 수나라의 팽창과 영향력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앞의 위협적인 국서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 통일로 기세등등해진 수 문제는 돌궐과 토욕혼은 물론 베트남, 백제, 신라 등 주변국들로부터 동등한 위치가 아닌 왕과 신하의 관계로써 조공을 받는 등 주변국들은 스스로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수 문제는 만족하지 못했다. 바로 동북아시아 북방의 맹주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변국들은 수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 뜻으로 조공도 바쳐 일찌감치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오직 고구려만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뿐더러 조공도 거부하고 있었다.[18]

이상한 점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위에게는 그렇게 매년 수차례씩 조공을 하던 고구려가 왜 더 강대한 통일제국인 수나라에게는 조공을 거부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북위고구려의 관계가 《삼국사기》나 《위서》의 내용과 달리 일반적인 조공관계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19]

이에 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수륙군 30만 명을 은밀히 준비하는 한편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수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하라는 것과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함은 물론 만약 조공을 거역할 시에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양씨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앉히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할 시 친필 내용대로 수륙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파일:영양왕 수나라 침공.png
그런데 정작 영양왕의 고구려군이 598년에 수를 향해 선제 공격을 날렸다. 수나라의 반응을 한번 보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요서(遼西)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한 것. 이때 영양왕은 말갈/거란의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했는데, 정황상 대규모 침공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형태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0] 당시 임유관에는 위충이란 장수가 지키고 있었는데 위충은 이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임유관 초토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시 그 시작점은 임유관인데 이 임유관이 초토화된 덕에 수는 어쩔 수 없이 임유관 후방에서 출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도발에 무척 진노한 문제는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기로 결심한다.


3. 제1차 고구려 - 수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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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의 갑옷


토크멘터리 전쟁사 - 고수전쟁

598년 수문제는 다섯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원수로 삼고, 장군 왕세적(王世積)에게 30만 대군을 통솔하게 한 후, 그들로 하여금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진격하여 요동을 공격하도록 했다. 동시에 수 문제는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제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장마와 태풍 등으로 30만 중 8~9할이 전멸하여 교전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진다.

혹자는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을 암시하는듯한 기록들을 근거로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은폐했다고 보기도 한다.[21]

《진주 강씨 족보》에는 진주 강씨의 시조 강이식이라는 장수의 전승이 있는데 신채호는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 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 주장했다.[22]

수나라 기록을 신뢰한다면 영양왕이 스스로를 요동 분토(糞土)의 신하로 칭하는 표문을 올렸다고 한다.[23] 표문을 받은 수문제도 원정을 제대로 망쳤지만 체면만은 그럭저럭 차리고 퇴각하였다.[24]


4. 제2차 고구려 - 수 전쟁[편집]



4.1. 수양제의 야욕[편집]


파일:수양제어진.jpg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패전에 큰 충격을 받은 문제는 고구려에 대한 원정 계획을 일체 중단시켰다. 고구려에 대한 대우를 전쟁 이전에 하듯이 했고,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도 해마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25] 수문제는 아들 수양제와 달리 대운하 공사도 백성들이 힘들다고 하자 필요한 건 알지만 중단하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세율을 낮추며, 평시 근검절약한 보기 드문 성군이었다. 전쟁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 데 실패해서 피만 본지라 나중에 또 공격할 생각이었을지 몰라도 한동안은 지출로 소모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기르는 데 신경쓴 것 같다. 또한 얼마후인 602년에 베트남 원정을 단행했는데 전 리 왕조 제2대 국왕인 리펏뜨를 붙잡아 참수형에 처함으로써 베트남을 다시금 중국의 통치영역에 포함시키며,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로 인한 후폭풍을 그럭저럭 수습할 수 있었다.[26]

그러나 604년에 수나라에서 크나큰 변고가 일어나게 된다. 명군 수 문제가 사망하고, 모략으로 형을 몰아내고 태자가 된 양광[27] 뒤를 이어 새로운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수 양제다. 아버지와는 달리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허영심이 참으로 남달랐던 수 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수했고, 대운하를 다시 건설한다.[28] 그리고 주변국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활동이 시작된다.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이렇게 정복 사업에 성공한 양제가 선황 시절부터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고구려를 그냥 놔둘 리 만무하였다.

  • 수나라의 국력은 아버지 문제의 노력으로 아주 막강했는데, 애초에 수 양제가 그렇게 해처먹을 수 있었던 것도 나라의 저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당태종 시기나 심지어 당고종(唐高宗)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수나라 최전성기 시절의 호구 수를 뛰어넘지 못했다[29]. 역으로 말하면 수 양제는 그렇게 수 문제가 고생하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든 수나라를 나락에 떨어뜨렸다는 것이다.[30] 결국 수 문제 시절을 따라잡은 건 몇 세대 뒤인 당현종 초기였다.

한편 고구려는 양광의 과시욕과 통일된 초강대국이 출현하자 극도로 긴장했다.[31] 양광의 정복 사업이 한창 성과를 보일 때, 고창국(高昌國)의 왕과 동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모두 친히 입조해 공물을 바쳤다. 사치와 허세를 좋아하는 수 양제는 영양왕에게도 입조(入朝)하라고 말했지만, 영양왕은 두려움을 느껴 《수서》의 표현대로라면 번국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 쉽게 말하면 "오라고 했는데 영양왕이 안 왔다. 그리고 제대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수 양제 입장에서 불경하게 입조를 거절한 것도 모자라 전쟁 대비에 착수하기까지 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동돌궐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607년에 사신을 보내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수 양제가 계민가한을 직접 만나러 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계민가한은 고창국과 함께 수나라 조정에 입조를 했던 적이 있었고, 수나라의 국력을 몹시 두려워했기에 차마 숨길 수가 없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수 양제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수 양제에게 이렇게 간언한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漢)·(晉) 때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선황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 바른 지역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고구려의 사신은 계민(啓民)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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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이에 양제는 우홍(牛弘)을 통해 고구려 사신에게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든 까닭에 친히 그 장막에 왔소.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의 왕에게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들어와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시오. 보존과 양육하는 예절은 마땅히 계민(啓民)과 같이 할 것이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그대들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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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이것은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4.2. 유례 없는 준비[편집]


토론 합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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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병사의 복원도[32][33]
대업(大業) 7년(611년) 2월. 양제는 양주 땅에서 백관을 초대해 큰 연회를 베푼 다음, 원정을 위해 북상했다. 양제는 화려한 용주(龍舟)를 타고 장강에서 운하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 황하로 나간 다음, 영제거(永濟渠)라는 새로운 운하로 들어가 하북의 탁군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발된 사람 3,000여 명이 걸어서 배를 따랐는데,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로 열에 한둘은 죽었다고 한다. 수 양제는 입조를 하지 않으면 탁군에 가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켰으며, 이는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4.2.1. 관련 사료의 기록[편집]


모두 1,133,800명인데 2,000,000명이라고도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남쪽 상건수(桑乾水) 가에서는 토지의 신[社]에게 의제[宜]를 지냈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는 상제(上帝)에게 유제[類]를 지냈으며, 계성(薊城) 북쪽에서는 마조(馬祖)에게 제사를 지냈다. 황제가 친히 지휘관을 임명하였는데, 각 군마다 상장(上將)·아장(亞將) 1인을 두었다. 기병은 40대(隊)였는데, 대마다 100명이 있었고, 10대는 1단(團)이 되었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었으며,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인이 있었다. 그 갑옷투구영불(纓拂) 깃발은 단마다 색깔을 달리 하였다. 매일 1군씩 보냈고, 서로 간의 거리는 40리였으며, 진영을 잇달아 점진적으로 나아가니, 마침내 40일 만에 출발하는 것이 다하였다. 선두와 후미가 계속 이어져 북과 호각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어영(御營) 안은 12위(衛) 3대(臺) 5성(省) 9시(寺)를 합하여 내(內)외(外)전(前)후(後)좌(좌)우(右) 6군에 나누어 배속시켜 차례로 출발하니 다시 80리에 뻗어 있었다. 과히 멀지 않은 즈음에 군대 출정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적은 없었다.

<삼국사기 권 20 영양왕 본기 23년>#



4.2.2. 병력 추정치[편집]



4.2.2.1. 100만 병력 긍정론[편집]

淺見直一郞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34]

1. 수서 권4 양제의 1차 고구려 원정 때 장문의 조서를 내건 뒤 그 병력의 수에 대하여 총 113만 3800명인데 200만이라 불렀으며, 식량을 운반하는 자는 그의 배라고 한 문장이 있다. 수서와 자치통감에는 이 원정군의 총병력을 추정할 수 있는 사료가 몇가지 남아 있다. 이 사료를 바탕으로 원정군의 총병력을 산출하고 그 결과 현저한 차이가 발견되면 113만이라는 수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반대로 큰 차이가 없다면 수서, 자치통감을 의심하지 않는 한 이 병력 수를 의문으로 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2. 수서 이혼의 기사에는 615년 3월에 모반 혐의로 일족과 함께 이민의 처가 이혼이 이민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한 것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만일 다시 요하를 건너게 된다면 나와 너는 반드시 대장이 된다. 1군당 2만여명이니까 그것만으로 5만이 된다.... 그때 우리 집안 자제들은 병마를 호령하여 틈을 보아 어전을 습격하고 각 군 대장을 죽이면 천하는 정해진다.'

뒤늦게 이 근언은 허위이며 사건 자체도 날조된 것을 알았지만 이 내용이 당시 사람들이 모반으로 믿게 할 만한 것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리고 여기서 1군당 병사 수가 2만 수천, 2군을 합해서 5만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면 4차 원정군 중 1개 군의 병력은 약 25,000명이 된다.

3. 4차 원정군을 1차 원정군과 결부시키는 것은 위험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원정군의 24군과 같다고 생각해도 좋다고 본다. 여기에 서술된 원정군 편제는 1차 원정군과 일치하며 한 군의 위치도 24군과 같기 때문이다. 이 4차 원정군에는 어영과 여러 군이 있는데 1차 원정군의 24군과 마찬가지로 대장이 한 사람씩 놓여 있었고 이혼과 이민이 임명될 예정이었는데 그들은 우희위대장군과 승작감이며, 이것은 1차 원정군의 24군 대장들과 동격인 것이다.

4. 병력 수를 알 수 있는 사료가 하나 더 있는데 수서 권8 예의에 따르면 1군에는 대장·아장 각 1명, 기병은 40대, 대는 100인으로 한 군으로 배치. 보졸은 80대. 그 외에도 대장 주변에 200기, 신락이 500기 및 보중병, 산병, 종자, 군악대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병과 기병의 합이 1만 2천명이 되는데, 이는 기병과 보병의 비율이 1대2가 된다. 보졸은 각군 80대만 기록되어 있을 뿐 1대가 몇명인지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1대를 200명으로 가정하면 전부 1만6천명이 되고 기보 비율은 1대4가 되는데 이는 불확실한 요소가 많기에 기병과 마찬가지로 1대 100명이었을 것이다.

5. 해로군은 육군과는 별도로 배가 300척이었고, 이들이 평양으로 처들어가려고 할 때 4만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수부 1만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5만 이상의 병력이었다.

6. 수서 요동의 역에서는 우둔위로군 이하 어관 내 3만인의 노병 기록이 있는데 천자 6군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내외전후좌우의 6군으로 이뤄졌다. 이 6군은 24군의 1군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24군의 60만과 6군의 15만, 해로군 5만을 합쳐 도합 80만이 된다.

7. 이 80만과 113만의 수치에는 간격이 있지만 검토가 극히 대략적이었다는 점, 간격이 있을 경우 적은 수를 가정한 것, 일부 다른 해로군과 이민족 군, 경장 유군 등이 산입되지 않은 것을 가정하면 113만이라는 숫자를 의심할 정도로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현존하는 사료 중에 원정군이 더 존재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더 좁을 가능성이 크다.


김선민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35]

1. 양제는 중국의 1군도 안되는 인구를 가진 고구려를 치는데 무려 113만을 동원하였고, 또 3차 원정만으로도 모자라 4차 원정을 준비하였으며 그것도 반란봉기가 동부를 위협할정도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였다.

2. 대업 7년 4월의 징병을 일러 '사람을 모집했다(募人)'고 했는데, 이때의 '募'는 지원에 의한 모병이 아닌 징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募人이 일반의 민정이 아니라 특별히 효용한 자를 징발했다는 것은 두건덕과 손안조의 예를 보아 알 수 있다. 양제는 부병만이 아니라 민간의 효용자들을 대거 징발했던 것이다.

3. 별도로 4월 배 300척을 만들게 하고 동시에 장강 이남의 수수 1만, 노수 3만, 배찬수 3만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다시 5월에는 군수 5만승을 만들어 고군으로 보내되 옷과, 갑옷, 천막, 군막을 실어 병사로 하여금 직접 끌도록 하고, 7월에는 장강 이남의 민부와 배를 징발하여 탁군으로 운반하도록 하였다.

4. 1차 원정의 병력은 공식적으로 200만 실제로는 113만 8천명이라고 한다. 그 중 반수가 부병이라는 추산도 있지만 설사 나머지 반이 모인이라 하더라도 절대수로 보아 대단한 규모임에는 틀림없다.

5.별동대는 우문술과 우중문 등 30만5천명의 9개군 병력이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으나 결과는 9군 30만5천명 중 2700명만이 살아 돌아가는 대패를 기록했을 뿐이다.

6. 대업11년 우희위대장군 이혼과 승작감 이민의 모반 시나리오는 당시 관중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우문술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지만, 당시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상황을 소재로 했기에 양제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우문술이 꾸며낸 반역 모의는 다음과 같다.

"양제가 다시 고구려로 출정하면 너와 나는 필히 대장을 맡을 터인데 1군이 2만여명이므로 둘이 합하면 5만의 병사가 된다. 또 가문의 자손들과 내외의 인척들을 모두 동원하여 참전토록 하고...그렇게 하면 하루만에 천하는 평정될 것이다."라는 각본이었다.

7. 이와 같이 황제가 친정하여 100만이 넘는 대군의 진퇴를 일일이 챙기려는 태도는 전국에서 불러들인 병사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 황제의 일원적 명령체계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함으로써 명문출신의 장군으로 부터 사병적 성향의 병사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정재훈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36]

1. 기존에는 양제 개인의 실패에 대한 평가와 함께 수의 단명이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직접 관계되었다는 점에서 수당왕조가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기울인 지속적인 노력이 주목되었다. 이와 관련해 수당 통일체제의 성립 과정을 내지 순행(巡行)과 연결지어 살펴보려고 한다.

2. 607년 4월 북순(北巡)에 나선 양제는 약 5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수도를 출발해 북상했는데, 이런 대규모 행렬은 군사적 시위를 통해 돌궐을 제압하려는 陳兵耀武(군사퍼레이드)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양제는 이러한 북순을 통해 이들을 위압케 하여 장성 밖으로 몰아내려 하였다. 또한 7월부터 장정 백여만을 징발해 위린 동쪽에 장성을 쌓았고, 609년 3월에는 서순(西巡)에 나서 북순 때와 동일하게 50만 군대를 동원해 토욕혼의 잔여 세력 10만을 포위해 투항하게 만들었다.

3. 607년 북순 당시 돌궐 천막에서 고구려 사신과 조우 후 동순을 준비하였고, 이 고구려 원정 준비는 611년 산동과 하남에 발생한 대규모 수해로 일시 정지되었다가 612년 정월 전국에서 소집된 1,133,800명의 대규모 원정군이 탁군에 집결함에 따라 본격화되었다. 이제까지의 순행에서 늘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던 양제는 이번에도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원정을 지휘했다. 그와 동시에 고구려 왕이 언제든지 자신에게 와 사죄를 하고 조공을 할 경우 용서를 하겠다는 명령했다. 이것은 과거 순행과 마찬가지로 무력 시위를 통해 그를 항복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

4. 이후 평양을 직접 공격했던 水軍이 실패하고 우문술이 이끄는 30만의 별동대마저 을지문덕의 유인술에 말려들어 패퇴하면서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홍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37]

제2차 침공은 612년(영양왕 23) 양제가 113만 3천 8백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것인데, 2만 4천여 명의 기병을 앞세워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지향하였다.


김창석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38]

1. 113만 3800명의 숫자 중 해로군은 제외된다.

2. 수서 예의의 기병의 1단이 10대인 반면 보병의 1단이 그 2배인 20대가 되는 기록을 참고했을 때 보병의 1대는 200인이고 1군에 4단 80대 16,000명 정도가 된다. 그 외 대장과 아장의 친위대나 직속부대의 700기, 고취대, 치중융거산병이 있다.

3. 치중융거산병은 글자의 뜻을 볼때 전투용 중장비와 군수품 운송, 예비병으로 편성된 것으로 보이며 치중융거산병 역시 4단이었으므로 1대 200인, 20대 1단으로 계산하면 16,000명이 된다. 따라서 1군의 병력은 기병 47,00명, 보병 16,000명, 치중융거산병 16,000명, 기타 인원을 합하여 약 37,000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좌우24군은 약 88만 8000명이 된다.

4. 황제 직속의 어영군이 6군으로 편성되었으므로 약 222,000명(37,000x6)이다. 이들만 추산하면 약 111만 명이 되는데 이는 1,113,800명과 근사한 수치이다. 약간의 오차는 1대의 병력이 기병, 보병, 치중융거산병, 어영군 사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산둥에서 별도로 출항한 해로군은 최소 5만이었다. 해로군의 총 병력을 알순 없지만 1백만을 훨씬 넘는 대군이 고구려 원정을 위해 동원된 것은 사실로 볼 수 있다.


정동민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39]

1. 탁군에서 매일 한 군이 출발하여 40일이 되어서야 출발을 마쳤다는 기록을 참고해 볼 때, 수나라 육군은 34군 + 天子 6軍 등 모두 40군으로 편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제의 조서에 나온 24군+천자 6군의 30개 군 외에 자치통감과 범안귀(范安貴) 묘지명, 수서 열전 권36, 권37, 권73을 통해 遂城道軍, 增地道軍, 險瀆道軍, 蓋牟道軍, 新城道軍, 盧龍道軍 6개군을 합해 36개의 군명(軍名)을 확인할 수 있다.

2. 수서 권37 열전 제2 이혼전(李渾傳)에는 이혼(李渾)와 이민(李敏)이 반역자로 몰리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민의 처인 우문씨(宇文氏)는 이혼이 이민에게 만약 요수(遼水)를 다시 넘으면 너와 나는 반드시 대장(大將)이 되고 각 군 2만여명을 합쳐서 5만명을 이끌 수 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거짓 진술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토대로 육군 한 군의 병력수를 파악해 본다면 약 25,000명이 된다.

3. 자치통감은 육군만 113만 3800명이라 하였지만 수서는 육해군을 합쳐 113만 3800명이라 한 것으로 보았을 때 113만 3800명은 수군을 포함한 숫자이다. 水軍의 병력수와 관련하여 내호아(來護兒)가 수군(水軍) 40,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퇴각하였고 쫓아오는 고구려군에 대해 주법상(周法尙)이 진을 정돈하여 물리쳤다는 기록을 볼 때, 4만명보다는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나라는 611년 4월에 수부(水手) 1만명과 노수(弩手) 3만명, 그리고 배찬수(排鑹手) 3만명을 징발한 바 있는 이들은 수군이며, 육군은 1,133,800명에서 水軍 70,000명을 뺀 1,063,8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4. 수서에 따르면 보병은 4단(團)이 있었고 각 단(團)에는 20대(隊)로 구성되어 있고, 기병과 마찬가지로 1대를 100명으로 본다면 각 군의 보병 수는 약 8,000명, 기병은 4,000명에 보급을 담당하는 치중융거산병은 13,000명으로 추정된다.

5. 수서 권68, 열전 제 33 하에 따르면 천자 6군의 경우 노병만 3만으로 천자 1군은 창병 5천과 노병 5천, 기병 5천에 치중융거산병 2만으로 35,000명이다.

6. 별동대의 경우 자치통감에 기록된 9개군 외 수서 권63, 열전 제28 양의신(楊義臣)의 기록을 통해 肅愼道軍, 수서 권64, 열전 제29 麥의 기록을 통해 蹋頓道軍, 『隋書』 권71, 列傳 제36 遊元의 기록을 통해 蓋牟道軍 등 3개군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며 도합 12개군이 참여하였다.


김성규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40]

수 말기, 현재의 산동성 일대에서 각종의 반란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황하의 범람으로 큰 피해가 발생한(611년) 데다 같은 해 말부터 고구려 원정을 위한 병사 징집이 이곳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해(612년)에 무려 100만 이상의 군대가 투입된 이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 후 두 차례나 더 이어진 무리한 감행에서 수 양제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민심만 급속히 이반되어갔다.



4.2.2.2. 100만 병력 회의론[편집]

데이비드 A 그라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41]

1. 각군의 병력은 약 20,000명이었고, 총 60만 명이다. 해군을 더하면 총 67만 명이 된다.

2. 609년의 수나라의 인구는 46,019,956명으로 수서에 기록된 수치는 너무 높기 때문에 의심된다.

3. 농업 사회에서 너무 많은 농부들을 동원하면 농업생산량의 감소로 인해 그런 대규모의 군을 유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로마제국 말기에 군대참여율이 대략 1:100 정도, 1298년 잉글랜드는 1:139, 1710년 잉글랜드는 1:150, 프랑스는 1:66이었다.

4. 612년 수 양제의 군 병력이 과장될 이유가 있는데, 수 양제를 나쁘게 묘사하는 사관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으로, 113만 3800명은 징병으로 소집한 총 인원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 인원은 이보다 적었을 것이며, 이는 588년 진나라 원정에 동원한 수나라군의 규모와 일치한다.


마이클 세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42]

수 양제의 원정에서 1,130,000명의 동원병력과 30만명의 별동대 중 2700명만 살아남았다는 기록은 당의 사가들에 의해 전임 수 황제의 위신을 떨어뜨리기 위한 수치로 기록되었다.



4.2.3. 시체로 이뤄낸 전쟁 준비[편집]


그런 수나라 군대가 북방의 탁군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또한 산동성 동래에 병선 300여 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이 내려갔다. 그래서 원정에 늦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다. 일꾼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일하느라 전체의 3·4할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하도 오랫동안 물속에 있어서 하반신이 썩고 구더기가 슬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43] 천하에 명령이 떨어져 탁군으로 병력이 모였고, 7월에는 드디어 군량을 수송했다. 여양(黎陽)과 낙구(洛口)에 큰 식량 창고군이 있어 그곳에서 배를 이용해 탁군으로 실어 날랐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배가 1,000리였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소동이었다. 육로로 가는 병대들은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었다. 밤에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다.

이때의 상황을 사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고, 썩은 내가 거리에 진동하여 천하가 소동했다.

군대만이 아니었다. 611년 기록에는 인부와 차부가 60만 명이나 징용되었는데 길은 멀고 험했으며, 두 사람이 쌀 석 섬을 날랐는데 그것은 자기들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장거리 원정의 최대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보급, 수송 부대도 이동하면서 보급품(식량, 사료, 석유 등)을 소모하기 때문에 실제 최전선의 전투 부대가 요구하는 분량의 몇배를 실어날라야 한다. 전근대 시대 원정에서 강이나 바다 등 수운의 중요도가 큰 것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선박은 육로 운송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보급품을 소모하면서 많은 양의 분량을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44]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받기 때문에 징용된 사람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도망치면 불법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천하에 쫓기는 자가 넘쳐났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떼를 지어 비적이 되었다. 심지어 민가에서는 "요동에 끌려가서 헛되이 죽지 마라"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611년경 나온 것으로 《자치통감》에 기록된 당대의 반전가요 제목은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로, '요동에 가서 떠돌다 죽지 말자는 노래'이다. 산동 지역 장백산에 은거하는 지세랑(知世郎)[45]을 자처하는 왕부(王薄)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長白山頭知世郎 純著紅羅錦背襠

장백산 아래에서 나(왕부)는 비단옷 대신에 농부의 옷을 입었다.

橫槊侵天半, 輪刀耀日光。

긴 창이 하늘의 반을 가리우고, 전쟁무기를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네.

上山吃獐鹿, 下山食牛羊。

산 위에서 노루와 사슴을 잡고, 들에서는 소와 양을 잡으며 평화롭게 지냈는데.

忽聞官軍至, 提劍向前蕩。

문득 들으니 관군이 도착하여 칼을 들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다 하네.

譬如遼東豕, 斬頭何所傷。

사람들아, 요동 개죽음을 깨달아라. 참혹하게 머리가 잘리며 부상당한 모습을.


이렇듯 천하가 어지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612년 음력 1월, 수 양제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총공격을 명령했다. 아래는 수 양제가 직접 작성한 선전포고이다.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漢)과 (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채우고 개척하여 경비초소를 괴롭히니, 관문의 딱따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고,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의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고,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요역이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고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46]

)·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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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4.3. 전쟁의 시작 - 요하 도하 전투[편집]


이처럼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건 대제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성은 촘촘히 연결돼서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과거 여러 성의 집합이었던 만리장성이나 훗날 고려에서 축조한 천리장성 등 성들의 집합인 일종의 마지노선과 같은 방어선이었다. 한 군데를 뚫어도 주변의 성에서 응원군이 와서 역포위하거나 후방을 교란해서 보급로를 차단하고, 설사 성을 함락하더라도 주변의 방어선 자체는 건재하기 때문에 항상 주변의 성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100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방어선에 투입하면 야전에서 일단 밀리니 함부로 전투도 못 하고 다른 성들에서 응원군도 오기 힘들며, 설사 오더라도 역포위 위험도 적다. 거기다 그 많은 병력이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각 성은 자기 방어하는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예비대 투입도 곤란하므로 고구려의 방어선은 일시적으로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수 양제는 우중문우문술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하여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진입할 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612년 음력 2월, 수 양제가 이끄는 부대는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러 군대가 다 모여 대단한 숫자를 이루었지만, 고구려군은 우선 강을 막고 지켜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수나라의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공병 작업은 차질을 빚는데, 첫 번째 시도 때는 부교를 세 개 만들었으나 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가 딱 어른 한 명 키 남짓하게 모자랐고[47] 이로 인해 1차 도강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강 중인 수나라군을 고구려 군대가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공격하자 큰 피해를 받았다. 수나라군은 맥철장(麥鐵杖) 등의 장수가 용감하게 부교로 뛰어올라와 싸워보려 했으나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수 양제는 잠시 물러났다가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부교를 만들게 했고, 하조가 2일 만에 이를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무려 10,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확실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형세가 되었다.


4.4. 요동성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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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이를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기록을 보면 요동성 내의 군사들이 가끔씩 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48] 그러다가 다시 불리해지면 들어와서 성문을 닫고 버티기로 나갔고, 수나라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부터 세웠던 전역의 그림이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다. 도하에 성공한 양제는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하며, 100만이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의 병력은 상당히 강한 저항을 했고 전쟁 내내 3개월간 수 양제의 공격을 버텨냈다.

흔히들 요동성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라고 생각하지만 요동성은 평야성이다. 성벽의 흔적이 남지 않아 정확한 성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요동성 무덤의 벽화를 보면 이중성이었음은 확인이 된다. 만약 요동성이 평야에 지어진 게 사실이고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면[49] 요동 성주와 요동성 장병들은 더더욱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인데, 평지성은 아무래도 방어가 힘들뿐더러 성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성벽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방어 측에게 불리해지기 때문이다.[50]

당장 고구려만 해도 이런 이유로 평지의 평시 수도와 산지의 전시 수도로 이루어진 이중 수도를 두었던 역사가 있으며, 여요전쟁여몽전쟁 당시의 고려, 임진왜란병자호란 당시의 조선 등이 적군의 침략 앞에서 수도를 버리고 나주강화도, 의주남한산성 등으로 가서 맞설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 또한 바로 이것이다.

근데 이 요동성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아무리 양제가 덜떨어지게 굴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고려시대, 조선시대와는 비교조차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이었음에도 끝끝내 양제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수양제 항목에 나오듯이 고구려에서도 중요 지역이라서 화강암을 통으로 깎아 성벽을 떡하니 올리는 식으로 방어력을 높이기는 했지만,[51] 당태종이 요동성을 뚫은 데서 볼 수 있듯 절대적인 이점도 아니었다.[52] 결국 이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하나의 기적이었던 셈.

이들의 눈물나는 분전 덕분에 이후 여수전쟁의 승패가 갈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후에 벌어지는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는 당태종이 침착하게 두들겨대는 통에 무너지는데 여기서 수당군 지휘부의 삽질 여부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뭐 당태종은 하늘이 내린 장수('천책상장')라 불릴 정도로 능력 차이가 크기도 했지만. 아무튼 요동성은 구조적으로 여러 불리한 조건이 있어서, 사실 평양성의 조정에서도 요동성이 저리 오래 버티리라고는 생각못했을 것이다.

다만 요동성은 지금의 심양 언저리에 있는데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으며, 삼국시대동연이 차지하고 있다가 조위에게 멸망한 뒤 위진남북조시대 때 혼란기를 노린 광개토대왕이 요동으로 진격하면서 빼앗은 성이다. 동연이 멸망할 때 사마의가 요동을 정벌했는데 이때 사마의가 요수와 양평(요동성)을 정벌하는 데만 100일이 걸린다고 했으니 이렇게 본다면 100일 정도인 3개월을 버틴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사마의의 요동 정벌군은 불과 40,000명에 불과했던 데 반해 수나라의 군세는 100만이라 자칭할 정도로 막강한 군세라는 점에서 비교를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수나라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추산하기 어렵지만 전투병이 113만이고 보급대는 그 배라고 했다. 그러나 보급대는 상시 전투병과 함께하진 않으므로 저 두 배라는 보급대를 연인원으로 보면 지속적인 원정 인원은 200만 정도로 잡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수나라 군대 200만 정도면 당시 중국 인구의 5% ~ 7.7%에 해당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청년층의 남자라는 것이다. 그들만으로 전 인구의 5% ~ 7.7%를 동원했으니 전쟁을 오래 지속할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위에서 나온 사마의의 요동 정벌군도 40,000명을 동원했을 뿐인데도 원정 거리가 길어서 조정에서 실행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정도였는데 하물며 100만 대군이라면... 이것이 원인이 되어 후에 그 유명한 우중문 별동대가 구성되는 것이다. 요동성이 끈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다급해진 수 양제는 평양 직공을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위시한 35만 명의 별동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고구려가 방비도 철저했던 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고구려의 계략이 제대로 먹혀 들었던 전투가 바로 요동성 공방전이다. 고구려군은 농성하는 도중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수나라군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했는데, 최고 통수권자인 양제가 친정을 와있는 상황이란 것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연히 일선 부대 지휘관에서 황제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데는 시간이 소요, 또 황제가 신료들과 의논하는데 시간 소요,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하든지, 아님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든지 등의 결정이 내려져서 다시 일선 부대 지휘관까지 명령이 전달되는데 여기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등 매번 시간이 깨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은 휴전이 불가피했고, 고구려 군은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요동성의 피해를 복구하고 수비군의 손실을 메우는 데 총력을 쏟았다.

이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수 양제. 그는 장수들에게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

라고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 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급기야 요동성이 함락될 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가 올 때, 성 내에서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장수들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항복한다는 요동성의 의견을 성 내에 알렸고, 황제의 말을 듣고 다시 나서려 할 때면 이미 요동성은 다시 수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짓을 세 번 연속으로 했다.

수나라 군대가 병신 집단이 아닌 이상 고구려군이 장난질 하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인데도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저항을 중지하고 항복하는 적군은 대국의 아량으로 받아 줘야 한다라는 대국다운 논리로 이 장난질을 받아줬던 것이다. 물론 그 허세질의 대가는 고스란히 자기들이 뒤집어 썼다.

이쯤 되면 양제 입장에서도 분노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정복 사업이 쉬웠던 탓도 있었다. 이동식 궁궐을 짓는다든지 하는 위엄찬 방식으로 여러 국가들의 항복을 받아왔던 것. 그에 비하면 고구려 정벌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고구려의 완전한 멸망인지, 국왕의 입조인지, 아니면 단순한 복종인지도 불분명했다. 여름이 되었으나 여전히 수나라 113만 대군은 요동성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기만 할 뿐이었고, 단 한 명의 군사도 요동성 성벽을 넘어가지 못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 양제는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였다.

6월 기미(己未)에 수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잘못을 따져 꾸짖어 말하기를 공(公)들은 자신이 관직의 높음을 가지고 또 집안의 지체를 믿고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나를 대우하려 하느냐? 도읍에 있을 때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병패(病敗)를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의 목을 베려함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 내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느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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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얼굴 빛을 잃었다고 한다. 그렇게 수 양제의 무능과 고구려군의 분전이 이어지며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근처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도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답답했던 양제는 요동성과 방어선을 구축한 인근의 다른 성들을 건드려보지만 요동성과 같은 전술을 썼는지 어쨌는지 효과가 신통치 않아서 한 개의 성도 점령하지 못했다.


4.5. 별동대 편성[편집]


수 양제는 요동 일대 고구려 요새들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본래의 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음을 알고 육군 대장 좌우익대장군인 우문술(宇文述), 별동군 총사령관인 우중문(于仲文)으로 하여금 9개 군 35만 병력을 차출해 평양 직공을 명령한다. 각지의 방어선을 우회하고 평양 일대에서 수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공략하여 일격에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는 고구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으나, 이미 요동에서의 장기간의 공방전으로 인해 요동성 앞에 단순히 모여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나라 육군 역시 어느 정도 피로한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진군과 보급이 문제였다.


4.5.1. 실패한 보급지원[편집]


수 양제는 방패, 갑옷, 옷감, 무기, 화막(火幕, 땔감) 등을 지급하여 별동대를 꾸렸다. 문제는 앞서 말한 보급 체계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한 100일분의 추가 식량을 병사 개개인이 짊어지게 함으로써 병사들의 피로가 더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추가 식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길을 가다가 이를 버리는 병사들이 다수 존재했다. 문제를 알아차린 지휘부가 버리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자 이번에는 을 파고 그곳에 보급품들을 묻어버렸다.

하지만 버리면 또 굶게 되니, 별동대는 길의 절반 정도 온 상태에서 식량이 떨어질 판이 되어 대강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방패, 갑옷, 옷감, 무기, 화막에 식량까지 모조리 챙길 정도면 완전 군장 그 이상의 수준이다. 그 정도 먼 거리의 원정을 떠난다면 오래 주둔해야 하니 당연하긴 하지만... 그런 물자들을 보급부대에게 운송하게 하는 게 아니라 병사들이 짊어지라는 건 가히 미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게 말도 안되는 원인은 바로 무게다. 현대 국군에서 군장을 쌀 때, FM대로 꾸릴 경우 20kg에 육박하는 무게 때문에 엄청나게 힘들어진다. 여기에 한 달 쌀 10kg 정도에 인간 1명이 석 달 좀 넘게 버텨야 하니 30kg 짊어진다고 가정하고, 총 50kg이나 되는 짐을 짊어지고 요동성부터 평양성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행군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와중에 고구려군이 게릴라를 펼치게 되면 행군의 난이도는 인간이 수행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올라간다. 더군다나 길도 평지가 아니라 곳곳에 산길이 있다.[53] 당시의 병사들보다 훨씬 영양 상태가 좋고 신체 조건이 좋은 현대의 군대조차도 특전사 같은 최정예병이 아니면 도저히 그 무게를 감당할수 없다. 거기에 평지라고 해도 요즘처럼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며 좋은 신발도 없고 차량 따위도 없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자. 나중에 굶어죽을 걸 알면서도 당장 무거운 군량을 파묻어 버린 수나라 병사들의 고충도 이해가 갈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때처럼 전차철도,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준비한 물자가 군수공장을 기반으로 한 물량전과 달리 기본 물자가 넉넉한 것도 아니며 지리적으로도 물자수송망이 불리하고[54] 보급부대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파견하려 하지 않은 채 저따위 발상을 했으니 이기지 못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사실 별동대 전술의 성격상 보급선의 유지는 불가능하다. 별동대는 곳곳에 설치된 고구려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않고 모조리 우회하면서 평양성으로 직행했는데, 이는 별동대의 후방에 고구려군을 고스란히 놔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투부대보다 전투력이 취약한 보급부대의 안정적인 지원을 생각할 엄두조차 못 할 작전인 셈.[55][56] 따라서 좋든 싫든 별동대는 자기 보급품은 모조리 자신이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평양성 공격의 전체적 그림을 볼 때, 애초에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5천 대군은 평양성 인근에 정박해있는 내호아의 수군의 병참 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7]그 내호아가 해로를 통해 실어온 군수물자와 공성용 무기들을 지원받아 왕도인 평양성과 요동 방어선을 분단시키는게 주전략이었으며, 요동성을 함락시켜 국경 밖과 국경 안으로부터 고구려의 왕도권을 완전 포위하는 전략적 그림을 그렸으나, 공명심에 눈이 멀은 내호아가 독단으로 작전을 수행하다 수군이 궤멸되면서 보급이 완전히 끊긴 채 적진 한가운데서 고립되어버린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별동대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4.6. 을지문덕의 방문과 그의 전술에 넘어가다[편집]


이때 고구려의 재상인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영양왕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을 하게 하고, 을지문덕은 적중에 들어가 직접 염탐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의 재상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정탐이나 하러 적진으로 들어갔던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서로 의사가 타진되었던 상태로 보인다. 수 양제가 을지문덕이나 영양왕 둘 중 하나라도 오면 무조건 잡아두라고 한 것을 보면 둘 중의 한 명이 수의 진영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요동성에서 하도 속다 보니 진짜 항복할 생각이 있으면 왕이나 재상 을지문덕이 직접 찾아 오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을지문덕이 찾아간 것은 정탐이라기보다는 협상을 핑계로 한 시간 끌기 용도로 보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고, 정탐이라는 것은 중국 측의 면피에 가까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을지문덕의 행동은 청나라와의 병자호란 당시 지천 최명길청태종과 만나 남한산성 대피까지 시간벌이를 한 것과 같은 행동이지만, 그렇다 할지언정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다.

항복 의사를 밝힐 듯 말 듯 하면서 협상을 시도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기라면 을지문덕과 같은 고위층 인사가 방문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협상 과정은 마음만 먹으면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작용한다.[58] 우중문은 명령대로 을지문덕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상서우승 유사룡이 사신을 잡아두는 법은 없다며 반대했다. 유사룡은 이 일로 전쟁 후에 처형된다.

아무튼 을지문덕이 항복 의사를 밝히고 돌아간 후에 전혀 소식을 전해오지 않자 우중문은 그제서야 속은 것을 눈치채고 평양을 향해 진격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반면 우문술은 이미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갔으니 싸워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 반대하며 급기야 철군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중문은 정예 병력으로 공격하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문술이 그래도 신중론을 펴며 반대하자, 우중문은 벌컥 화를 내며 우문술을 꾸짖었다. 이때 우문술은 우중문의 지휘를 받는 처지라 별 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결국 추격전이 벌어졌다.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고,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챈 을지문덕은 이들을 피곤하게 만드려고 싸울 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을 모두 지는 일도 있었다. 여기서 지휘한 것은 우문술로 보이는데, 퇴각을 주장하던 그도 계속되는 승리에 생각이 적잖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우문술도 지금은 보급 문제니 뭐니 문제가 많지만 어떻게든 평양성에 도착하면 보급 물자를 충분하게 가진 수군과 합류할 수 있을거고, 그럼 이 문제들도 다 해결될 거라고 믿게 된 모양이다. 결국 페이크에 넘어간 셈. 문제는 이 지연 전술의 효과다. 이 지연 전술 끝에 먼저 평양 인근에 도착한 수의 수군이 조급해진 것이다. 30만의 육군이 도착하지 않자 5만의 전투 병력을 가진 수군이 독자적으로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4.7. 하나 둘씩 격파되기 시작하다[편집]


수의 수군은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상륙했다. 물론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그곳에는 고구려의 친위대와 수도의 대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의 군주 고원이 경내의 군사들로 맞서 진을 펼쳤는데 그 길이가 수십리에 달하였다. 장수들이 두려워하였다.

내호아가 웃으면서 부장 주법상과 군리들에게 말하였다. 본래 고려에서는 청야전술로 우리를 맞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죽기를 자처하다니, 마땅히 저들을 물리치고 아침밥을 먹으리라

고원의 아우 고건무는 용맹과 무공이 절륜하였는데 결사대 수백을 이끌고 맞섰다..(중략).. 내호아가 크게 승리하여 평양성 외곽에 이르렀는데 참획한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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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 내호아 열전}}}
수군은 여기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승리를 거머쥐고 기세가 오른 채로 평양성 앞에 접근한다. 다른 군대의 합류를 기다려야 한다는 부장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만의 병력을 가려뽑아 평양성 직공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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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에 병력을 숨겨두고, 다른 병력을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였다.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와서, 병력을 풀어놓아 약탈을 하게 하면서 다시 대오를 갖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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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이제 고구려군의 낚시가 시작됐다. 평양성은 외성 - 중성 - 내성 - 북성의 4중 구조인데 군대를 숨긴 채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적을 외성 안으로 유인했다. 내호아가 약탈을 허용하자 수나라 병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그 때부터 고구려군이 미끼를 문 수나라군을 낚아올리기 시작했다. 이 타이밍을 노려 왕제 건무는 500명의 결사대로 적진을 휩쓸었고 매복했던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도륙하였다.[59]

고원의 아우 건무가 결사대 500명을 뽑아 공격하였다. 내호아는 이로 인해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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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내호아 열전}}}

숨은 병력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 사졸로서 돌아간 자는 수천에 불과하였다. 아군이 추격하여 배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 주법상(周法尙)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아군이 후퇴하였다. 내호아가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 바닷가 포구에 주둔하였으며, 머무르면서 다시는 감히 여러 군대에 호응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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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중국 측에서도 절륜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건무의 무공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장료를 연상케 하는 그의 돌격에 평양을 직공하려는 수나라의 회심의 일격은 무력화되었다. 또한 육로로 평양을 향하던 30만 육군과의 연계 역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수군이 30만 육군 별동대와 평양성 근교에서 합류, 보급 문제를 덜어주게 된다면 좀 더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우중문의 별동대는 평양성까지는 어떻게든 도착했지만 적의 도읍을 코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였다.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던 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군사를 보내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을지문덕은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를 보낸다. 언뜻 글만 보면 적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글로 보이지만 전황을 파악 못하는 바보가 아닌 이상 글에 담긴 뜻은 명백했다. "너희는 이미 졌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만 퇴각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 도발에 우문술도 우중문도 분노했지만,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바보들이 아니었던 그들은 더이상 작전속행이 불가하다고 판단, 퇴각을 명령했다.

수군은 방진을 치면서 후퇴했는데, 이는 물론 고구려의 공격을 염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60]


4.8. 살수대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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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수나라 군대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는데,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갑자기 고구려 군대가 뒤에서 공격해오자 후위를 맡은 신세웅의 부대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하며 전 부대가 모랄빵이 나기 시작했다. 전투고 뭐고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은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450여 리를 달아났으며, 수나라 지휘관 신세웅은 전사하고 왕인공(王仁恭), 설세웅만이 최후의 부대로 남아 고구려군을 물리쳐 다른 부대가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30만 5,000명에 육박하던[61] 별동대 9군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겨우 2,700명이었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한마디로 30만 5,000명 중에서 30만명이 넘게 죽는 몰살이나 다름없는 참패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살수대첩이 얼마나 큰 승리냐면, 한국사에서 야전으로 거둔 가장 큰 승리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62]

4.9. 수나라 군대의 철군[편집]


살수대첩의 참패를 접하여 크게 진노한 수양제는 우선 패전하여 돌아온 우문술, 우중문, 내호아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조리 삭탈 관직한 후에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죄수 취급을 하며 수나라로 압송한 뒤 먼저 유사룡을 을지문덕의 염탐을 위한 거짓 항복에 속아 그냥 살려 보내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했고, 내호아와 우문술은 지위가 박탈되어 서민으로 떨어진다. [63] 우중문 역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하옥되었으며, 이 때문에 홧병이 발생해 석방되었다가 결국 병사했다. 다만 우문술의 부장이었던 설세웅만큼은 살수대첩 후에 뒤를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싸워 이긴 공으로 패전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고 오히려 승진하였다.

이렇게 수 양제는 고구려에 원정을 온 지 8개월 만에 참혹한 패배를 당한 후에 고국 수나라로 귀환하니 2차 전쟁 역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수나라 군대는 요수 서쪽에서 무려라(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 뿐, 그 외에 성 하나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야말로 대패였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였던 것이다.

113만 대군을 물리친 이 놀라운 기록은 한국 전쟁사 최고의 전설로 남는다.


5. 3차 전쟁[편집]


613년 3월, 수 양제는 2차 전쟁 당시에 겪었던 패전의 울분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4개월 만이었다. 2차 침략을 교훈삼은 수 양제는 3차 침공 때부터는 장수들에게 자유 재량권을 부여하여 고구려를 효율적으로 몰아붙였고, 2차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원정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은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맞이해 함락 직전까지 갔다.[64]

살수에서의 패배 당시 활약하여 주목받은 신예 장수였던 왕인공이 이끌었던 선봉대는 우선 신성을 가격하였으며 이후 요격에 나선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신성에서 타 지역 지원에 나서는 것을 봉쇄하였다. 그 다음에 본대가 요하를 도하하여 요동성을 재차 공략하면서 20여 일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초반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대 1백여만 장을 쌓아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세를 펼첬고, 이동식 망루를 통해서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2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별동대를 차출, 압록강 인근까지 접근시킨다. 113만이란 물량으로 밀어붙인 2차 때보단 덜하지만 이때 역시 고구려의 위기였다.

그러나 이때, 수 양제의 휘하에서 보급 임무를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과거의 원한과 수 양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어 친구인 포산공 이밀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수 양제는 철군을 결정한다. 이때 양제의 측근 참모이자 양현감의 오랜 친구였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는 바람에 이것이 발각되고 만다. 곡사정이 양현감과 내통을 하던 중에 수 양제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자 고구려로 망명했다는 설도 있다.

곡사정의 투항으로 수나라 군대에 대한 기밀, 특히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고구려는 이 기밀과 정보를 활용하여 늦게나마 철수하던 수나라 군대의 후미를 공격했다. 예상하지 못한 고구려의 기습에 수나라 군은 당황했고 고구려는 크게 승리하였으며 이때 수만여 명의 적군을 패사시키는 전공을 올렸다. 2차 전쟁 때보다도 더한 위기였을 수도 있으나 결국 수나라는 요동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6. 4차 전쟁[편집]


수 양제는 수나라로 귀국한 이후에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여 일단 발등의 불은 껐으나 그의 친구였던 이밀은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고 군웅의 행세를 하며 위세를 떨쳤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을 계기로 하여 수나라 내부에서 수 양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각지의 세력가들과 농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러한 와중에도 614년 수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깊은 원한과 집착으로 인하여 수군 대장 내호아로 하여금 비사성을 공격하게 하였고 이때 비사성이 함락되면서 여수 전쟁에서 최초의 성 함락이란 소득을 얻었다.[65] 그러나 수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갈수록 거세져 육군은 이를 진압한다고 움직이지도 못했으며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무척 지쳐 있었는지[66] 영양왕은 고구려로 망명했던 곡사정을 귀국시키는 형식으로 화친을 청했다. 귀국한 곡사정은 끔찍하게 처형당했다.[67] 이후의 수서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귀부하는 형태로 수나라에 화친을 제의하니[68] 수 양제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철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고구려 - 수나라의 마지막 전쟁이었다.


7. 결과[편집]



7.1. 수나라: 막대한 국력 손실, 결국 멸망[편집]


수나라는 수 문제, 수 양제의 2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다. 특히 수 양제가 고구려와 벌였던 2차 전쟁의 경우에는 살수 대첩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30만의 대군이 궤멸당하는 엄청난 대패를 겪고 말았다.[69] 그에 따라 피해도 막심하여 엄청난 군량미와 군수 물자가 소진되었으며 수나라 조정의 재정도 상당히 소모되었다.

또한 이미 수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 이전에 자신의 향락을 위한 대운하 건설과 대규모 황궁 건설 등의 잦은 토목 공사로 인한 인력 징집과 징세가 늘면서 민심을 잃었고 부황과 형제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으며 간언을 하는 신하를 처형할 만큼 성격도 잔혹하여 점차 신하와 장군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는데 대표적으로 고구려 정벌 도중 양제에게 앙심을 품어 반란을 일으킨 사례도 발생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나라는 내분에 휩싸여 멸망하였고, 당국공 이연을 세움으로써 수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수나라 멸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대운하 공사 등 수양제가 여러 대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긴 했지만, 수나라 멸망에 결정타를 준 것은 바로 고구려 원정이다. 전쟁을 하겠답시고 전쟁에 쓰일 배 건조를 위해 인력이 투입되어 하루종일 일한 결과 배에 구더기가 발생하였고 이 외에도 지상군에도 징집되었으니 국가를 부양할 청년층의 인구가 줄었다.[70] 고구려 원정의 부담으로 인해 군량미라는 강제 징수와 젊은층의 증발로 수나라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도처에 기근이 발생했다. 이는 불만이 쌓인 나머지 각지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정부의 통제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나마 굶주린 농민들에게 식량을 분배하거나 군사력으로 진압했다면 모를까, 연이은 고구려 원정은 이들 역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반란을 진압할 군사력은 고구려 원정에 묶여있었고, 식량은 이들을 먹이는데 쓰였다. 수 양제의 613년 원정 때는 급기야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고, 수 양제는 반란 진압을 위해 급히 회군해야 했다. 양현감의 반란 이후 수나라 각지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반란이 발생했다. 양쯔강 델타 지역에서는 유원진이 거대한 규모의 반란군을 조직했고, 산둥에서는 오해류가, 동해에서는 팽효재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613년 이후 수서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각지의 반란 기록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당장 전쟁을 중단하고 민심을 수습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양제는 또 다른 고구려 원정을 계획했으나, 재정파탄과 행정력 붕괴로 인해 병력을 제대로 모을 수 없었고 결국 수양제는 618년 고구려 원정 당시 육군 대장 중 하나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야말로 고구려 - 수 전쟁은 수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쟁인 것이다. 이 결과로 인해 수문제가 즉위하면서 인구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졌던 중국은 훗날 '비단과 금을 분토처럼 여긴' 당 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7.2. 고구려: 대승, 이후 소극적인 대외 정책으로 선회[편집]


(4차 침입 당시)양제가 회원진(懷遠鎭)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수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병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 나라(고구려)도 역시 지치고 쇠약한 상태였다. 수나라의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의 병사가 맞이하여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냈다.[71]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영양왕(嬰陽王) 25년 07월, 수에 항복을 청하다(614년 07월(음)) #

고구려 역시 중국 대륙의 대대적인 침공에 막대한 인적 피해와 더불어 전쟁에 따른 피로도가 쌓이고 있었다. 4차 침공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처음으로 성이 함락되었으며, 영양왕은 더 이상의 장기전을 피하기 위해 고구려에 투항한 곡사정수나라로 돌려보낸다.[72]

또한 영양왕이 승하한 후 그의 뒤를 이은 영류왕은 수나라 멸망 이후 중국 통일이 되기 전부터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 등 중원에 꽤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노선을 바꾼다. 이는 고구려-수 전쟁의 피해를 복구할 시간을 벌기 위함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나아가 서방의 세력들을 자극할 만한 북방 세력권이나 한반도 방면의 관리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선회하였다. 특히 영류왕은 태자 시절 수나라군을 격파한 영웅임에도 친당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는데 통일 왕조의 저력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다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한편 당나라에서도 같은 기조로 평화를 지향하던 당고조와 달리 당태종은 야욕을 버리지 않고 고구려 정벌을 위한 작업들을 추진한다.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반응하던 영류왕연개소문이 일으킨 정변으로 시해당하고 이후 그의 조카 보장왕이 옹립되었다. 이에 따라 동방에 대한 당나라의 행보에 제동이 걸리게 되고 고구려와 당나라 양국간의 갈등이 불거져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한다.


8. 명칭에 대한 문제[편집]


한·중·일 역사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고(구)려를 '여', 백제를 '제', 신라를 '나'로 약칭하여 왔다. 이에 따르면 7세기경 형성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은 여제 동맹, 신라와 고려의 왕조 교체기는 나말여초, 같은 시기에 형성된 신라와 당의 연합은 나당 연합이 된다. 한편 '고백 동맹'이나 '신말고초', '신당 연합' 등의 표현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73].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기도 통상 '여말선초'라고 일컫는다. 특히 고구려에서 국가 정체성이 담겨 있는 글자는 '려'이고 '고'는 '려'를 수식하는 글자라는 견해도 있다. 왕망신나라에 고구려현[74]이 복속하지 않자 고구려현을 구려현으로 낮춰 부르게 했다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역사학계에서 통용된 명명법에 따르면 고구려-수 전쟁을 여수 전쟁으로 불러야 하지만 정작 실제 용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사 전공인 노태돈 교수가 집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명칭은 여수전쟁으로 되어 있다.#

이는 역사학계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이 분쟁에 대해 합의된 명칭이 없기 때문이다. 현 한국사학계는 전쟁이라는 호칭을 근대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전근대 존재하였던 무력분쟁을 전쟁으로 호칭하는 것에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개념에 담긴 차별성이나 비하성, 또 국제정치에서의 여파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왜란이나 호란, 양요 같은 명칭을 꿋꿋이 고수하고 있다.[75]

문제는 해당 분쟁에 대한 당대의 명명이 남아 있으면 차선책이나마 그것을 차용하면 되는데(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 고려시대까지는 기록의 부실함으로 인해 그러한 명명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이런 분쟁은 대충 X의 침공이나 X의 침략, 대X항쟁 등으로 퉁치며, 여기에는 특별히 기준이 없다. 이런 과정에서 사용하는 항쟁이나 침략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개념의 가치중립성을 깨뜨리는 문제를 가져온다. 따라서 이러한 풍조는 개념의 학문적 정의를 모호하게 만들어 결론적으로는 비역사적으로 정의된다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즉, 그냥 전쟁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기 위한, 본말이 전도된 억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정확한 명명을 피한 결과 고수전쟁이나 고당전쟁처럼 역사적 맥락이 거세된 잘못된 표현이 대중들에게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풍조 때문에 현 한국 사학계에서는 그냥 수의 고구려 침공, 당(나당연합군)의 고구려 침공 정도의 일반명사로 이 분쟁을 지칭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 따라서 논문에서 중요한 키워드 설정도 안되어 있어 관련 연구사에 대한 접근성도 심각하게 떨어진다. 억지로 표제화시켜야 할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고구려의 대수(對隋)/대당(對唐) 전쟁[76], 혹은 고구려-수 전쟁/고구려-당 전쟁으로 부른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고구려-수 전쟁과 여수전쟁이라는 항목이 둘 다 있으며, 위키백과는 고수 전쟁, 고당 전쟁으로 잠시 바뀌었다가 현재는 고구려-수/고구려-당 전쟁으로 등록되어 있고 고수 전쟁, 고당 전쟁이라는 리다이렉트를 허용하되 항목 내에서는 여수 전쟁, 여당 전쟁이라는 약칭만 쓰여 있다.

9. 참전 장수[편집]


  • 제1차
양량, 왕세적, 원포, 울주자사 겸 행군총관 한승수, 두언, 우문필, 장윤, 주나후, 이경, 노군태수 겸 좌무위대장군 소위

  • 제2차
우문술, 우중문, 형원항, 설세웅, 신세웅, 장근, 조효재, 최홍승, 위문승, 내호아, 주법상, 왕인공, 무분낭장 음세사, 상서직방랑 겸 연왕사마 소기, 은청광록대부 곽영, 검교위좌익위대장군 양웅, 우무위장군 양달, 장작감 이민

  • 제3차
도수승, 우효인

  • 제4차


10.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사의 극적인 승전 중 하나이지만, 거대한 스케일 때문인지 사극이나 영화 등을 통해 영상화된 경우는 많지 않다.

  • SBS의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1차부터 4차까지의 모든 전쟁이 묘사되며, 사실상 1부의 클라이막스다.[77] 큰 흐름은 실제 역사를 따라가긴 하나, 드라마 특유의 발고증과 병맛력 넘치는 연출 탓에 오류가 많다. 대표적으로 살수대첩에서 수공으로 이긴다는 잘못된 통념을 그대로 채택했다. 선택과 집중을 잘 못하는 이 드라마 특성상, 4차례의 전쟁을 모두 묘사할려다 보니 갈수록 규모가 퇴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나마 4차례의 모든 전쟁을 다 묘사한 유일무이한 사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1. 여담[편집]


  • 598년에 백제 위덕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가 예의 없고 오만한 나라라며 까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길 안내, 군량 보급 등을 협력하겠다고 제의했다. 허나 수나라는 당시에 그럴 여력이 없다 판단하여 위덕왕의 제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백제가 수나라 뒤를 봐주려고 접촉했다는 사실을 안 고구려는, 바로 백제로 진격하여 보복 공격했다. 이 고구려-백제 간의 598년 전투는 기록이 소략하고, 전면전이라기보단 고구려의 보복성 제스처인데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신라의 한강 하류 영토가 존재하기 때문에 수군을 이용해 소규모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쟁 결과는 나오지 않지만 백제가 방어해낸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무왕 때도 국지모(國智牟)를 중국에 사신으로 보내서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백제가 도울 것이라고 수양제를 부추겼는데, 백제의 부추김이 고구려 침략의 유일한 원인까지는 당연히 아니지만 결국 실제로 수나라가 고구려를 대규모로 공격하자 정작 무왕은 수나라를 돕지 않는 뒤통수를 쳤다. 애초부터 백제는 두 나라 간의 싸움에 직접 끼어들 생각은 없었고 서로 싸워서 고구려가 약해지면 그것대로 좋다는 식의 이이제이가 목적이었던 것.

  • 608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자주 침범하자 진평왕이 수나라에게 걸사표를 지어 도움을 청할 것을 명하자 수나라에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요청하는 걸사표를 지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611년에 신라에서는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 걸사표로써 군사를 청했고, 이에 수나라 양제(煬帝)는 10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612년에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고 한다.

  • 인터넷 등지에서는 위의 백만 대군 관련 논란[78]을 농담조로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
합리적인 시각으로 꼬라박음을 평가하려고 하니까 안되는 거임

"100만을 어떻게 전근대 국가가 보급하냐. 나라 망한다!"

보급 했냐 → 못했음
나라가 망한다 → 망했음[79]


12. 관련 목록[편집]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혹은 산둥성[2] 병력 추정치 문단 참고[3] 명나라 때의 백과사전.[4] 분열 중국으로 범위를 넓히면 남송-몽골 전쟁도 포함된다. 북송-금 전쟁도 포함할수도 있으나 통상 남송으로 명맥이 이어진것으로 보므로 제외[5] 애초에 중국은 체급이 다르므로 총력전을 한 경우자체가 거의 없고, 대부분 내부분열로 멸망했기 때문에 왕조 말기에 외세와 총력전을 할 상황도 많지 않았다. 심지어 수나라는 침체기도 아닌 전성기 통일중국이었는데도 총력전에서 고구려가 승리한것. [6] 손익분기점에서 손털고 나간 월남전과 다르게 미국이 인력, 국력을 총력전에 다 갈아넣고 내분으로 멸망한 수준이다.[7] 다만 학계에선 과장된 수치로 보는게 일반적이다.[8] 고구려[9] 이는 수 문제와 초원 전문가 장손성(長孫晟)의 끊임없는 돌궐 분열공작의 결과였다. 서돌궐의 달두(達頭) 칸이 동돌궐의 칸과 결별하고 스스로 칸을 칭하자, 583년 수나라는 서돌궐의 달두 칸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돌궐은 동서로 분열되었고, 향후 양국은 계속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참고로 장손성은 후대 당태종의 장인이며 장손무기의 아버지다.[10] 585년에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서돌궐에 맞서 힘겹게 싸우던 사발략(沙鉢略) 칸을 지원했고, 사발략 칸을 계승한 동생 막하(莫何)가 죽고 그를 이은 도람(都藍)에게 계민 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계민 칸이 밀려나자 수 문제는 계민 칸에게 오르도스 지역에 땅을 주어 경비를 맡겼다. [11] 또한 돌궐계 유목민인 철륵에 공작을 펴 서돌궐의 달두 칸을 죽게 만들었다. 수나라는 끊임없이 돌궐의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을 떨게 했고 수나라의 수도를 위협할 만큼 강력했던 돌궐을 끊임없이 약화시켰다.[12] 선우(單于)는 돌궐이 아닌 흉노의 임금을 이르는 말이긴 하나, 북방 유목 민족들의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게 본래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중원 북방 이민족 수장'이라는 일반적 의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13] 출처[14] 왕은 상의, 바지, 외투, 머리띠와 흰 비단 모자(백라관), 비단 장식 띠, 금장 버클이 달린 가죽 벨트, 노란 가죽 구두를 했으며, 상의의 소매, 옷단, 목 깃, 끝 부분은 넓은 금 천으로 장식하였다.[15] 좀 깨는 사실은, 남진의 집계 인구는 멸망 당시 50만 호, 고구려는 70년간 전쟁을 하고도 70만 호를 찍어서 더 많았다. 수, 당과의 대전쟁에서 보여준 저력을 봐도 고구려는 남진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으니 명백한 오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게 실제로 고구려 인구>남진 인구를 의미하진 않고 정확히는 '파악된' 호구 숫자가 고구려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국내 관리를 잘한 고구려가 진나라보다 강적이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지만... 사실 호구 수가 많단 것은 절대적 인구가 많다기 보단 중앙의 지배력이 지방 곳곳에 미치고 있단 것을 나타낸다. 남조는 귀족세력이 강성하였고 황제권이 약한 국가였기에 수시로 왕조가 바뀌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앙집권이 매우 잘 돼 있던 국가였으며 이때문에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조는 강남 호족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호족 중심의 귀족사회가 형성 되었으며 북래귀족과 토착귀족간의 경쟁도 있었으므로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 방방곳곳에 미치는 것이 힘들었다.[16] 흥미있는 것은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가 불과 몇년 전 고구려에 친정갔다가 회전에서 패배한 전적이 있는데 당시 북주 무제와 수 문제는 사돈 사이였고, 나란히 화북과 중원을 통일한 기세를 몰아 고구려에 싸움을 걸다가 패배한 점도 비슷하다.[17] 교육 과정에서는 이 시기부터 신라의 전성기로 본다.[18] 이미 앞선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고구려는 주변 유목민족들을 관리하던 맹주였다. 더군다나 광개토대왕 때부터 고구려만의 천하관이 성립하여 고구려를 세상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더더욱 수나라의 중화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19]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생각보다 더 혼란스러운 시기로 북조와 남조가 서로 지속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거기다 북조국가는 선비족과 한족이 융합돼 사회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외부의 문제로 눈길을 보낼 수 없었으며 이마저도 실패해서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뉘어졌다. 그런 판국에 이제 막 국가란 것을 세워서 화북을 지배하기 시작한 선비족이 이미 후한대에 성립되어 한창 전성기에 도달한 고구려를 우습게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당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를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중국쪽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도 없었기에 상호 이해관계가 맞물려 별다른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20] 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21] 문황제 시절 천하가 강성하여 100만 대군을 일으켰음에도 오히려 고려(고구려)에 패배하였다(文皇帝時, 天下盛彊, 發百萬衆伐遼東, 猶爲所敗)-《구당서》 <두건덕전>[22] 다만 해당 전승의 원전이 되는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고, 정사 혹은 조선시대 이전까지 강이식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터라 신빙성에 의문이 간다.[23] 직역하면 인데, 진짜 똥밭일 리는 없으니 대충 황무지나 깡촌 정도로 보면 된다.[24] 다만 다르게 보면 결국 수 문제는 똥밭이나 다스리는 왕에게 패배했다고 볼 수도 있다.[25]삼국사기》에서는 600년 1월 한 해밖에 확인이 되지 않는다.[26] 다만 이때 베트남을 정복한 김에 참파도 같이 침공하면서, 참파군을 격퇴했지만 수나라군이 수나라로 되돌아오는 도중에 풍토병으로 대거 사망하면서 참파 원정은 별 실익이 없었다.[27] 양광이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기록은 《수서》 자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갖은 위선과 모략으로 형의 자리를 뺏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28] 사실 대운하문제 시절부터 시작됐지만, 워낙 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심할까 염려한 수 문제가 공사를 중단시켰지만 수 양제는 백성이 공사로 힘들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냐 식으로 공사를 재개해서 스케일이 커진 거다. 그리고 수 양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딱 대운하만 만든 게 아니고 별궁이나 가로수 등 쓸데없는 짓을 많이 병행했다.[29] 허청웨이가 쓴 《중국을 말하다》에 따르면 당시 수나라 인구는 약 4,600만 명으로 집계된다.[30] 일례로 수나라는 대규모의 중기병을 운용해 기병 전력의 중심이었지만 당나라는 그럴 만한 경제력이 없어서 중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하지 못하고 크게 축소하여 경기병을 기병 전력의 중심으로 해야 했다. 물론 원흉은 수 양제.[31] 아무리 고구려강대국이라 하더라도 통일 중국의 위험성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32] 1. 근위병 2. 보병 3. 무장해제한 갑옷을 입지 않은 보병 [33] 영어의 unarmed와 disarmed는 뉘앙스가 다르다. unarmed는 단순히 '비무장 상태'를 뜻하지만, disarmed는 '(거의 타의로) 무장해제된 상태'을 뜻한다.[34] 1985 「煬帝第一次高句麗遠征軍 -規模兵種」 『東洋史硏究』, 1985 # [35] 隋 煬帝의 軍制改革과 高句麗遠征, 2003 # [36] 隋 煬帝(604~617)의 對外政策과 天下 巡行, 2004 # [37] 高句麗의 鮮卑族戰爭과 騎兵戰術-특히 前燕·後燕·隋戰爭을 중심으로,2004 PDF 20쪽 [38] 고구려∙수 전쟁의 배경과 전개- 경제적 요인을 중심으로, 2007 # [39] 612년 고구려 원정 隋軍의 군단 편성과 兵種 구성, 2016 #, 613・614년 高句麗-隋 전쟁에 보이는 遼西 상황과 隋軍의 전략, 2019 # 612년 高句麗-隋 전쟁의 전개 양상, 2020 # [40] 2020,隋末·唐 건국기의 政情과 李世民 당 태종 이세민 연구(1), PDF 3쪽 [41]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2002 # [42]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2010 # [43] 배를 건조할 때는 처음에는 육지에서 용골과 선체를 어느 정도 조립하고, 그 다음에는 뱃고랑을 파고 물을 넣어 배를 띄운 다음 나머지를 조립하는데, 이때 물은 고여있기 때문에 물이 변질되기 쉽다. 원래라면 물이 상하기 전에 다시 물을 빼고, 새 물을 갈아넣어줘야 하지만 사람이 죽어나갈 정도로 마구 부려먹는 상황인 만큼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44] 이는 현대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실제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초반에는 쾌속 진격을 했지만, 나중에는 석유 보급 트럭이 최전선까지 가는 동안 적재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석유를 사용하는 코메디가 벌어졌다. 노르망디 항구에는 본국에서 가져온 석유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최전선에선 석유가 없어서 진격이 정지되어 버렸다. [45]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46] ⿰耳施. "수서(隋書)"에는 '暆(이)'로 되어 있다.[47] 이 원인에는 고구려수나라의 단위가 달라서 수나라 측에서 입수한 정보가 에러가 났다는 설이 있다. 고구려는 때에 따라 한나라의 척과 고구려의 척을 혼용했는데 한나라 척만 사용하던 수나라가 고구려 척을 한나라 척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척은 한나라 척보다 1척당 5cm가량 더 길다. 어쨌거나 수나라 측이 제대로 정보 파악도 하지 않고, 측량 기술도 떨어졌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48] 다만 원래 수성전은 성만 끼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전투를 하면서 적군이 후퇴한다 싶으면 성문을 나와서 패잔병들을 처리한다든가 아니면 혼란을 목적으로 공성전 도중에 성을 나와 전투를 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귀주성 전투다. 흔히 생각하는 성문을 굳게 닫고 성벽 위에서 싸우면서 버티는 전략은 농성전이다. 그리고 농성전은 수성전에 속하는 전술로 수성전은 성을 지키는 모든 전술을 총 망라하는 것이며 성을 지키기 위해 공격측의 본진을 치는 것 역시 수성전의 일종이다.[49] 아무래도 이건 사실로 보이는 것이, 얼마 후에 벌어지는 여당전쟁 중에 요동성이 함락되었을 당시 당군한테 맞서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10,000여 명, 체포된 병사가 10,000여 명, 그 밖에 주민이 남녀 40,000명(《신당서》에 의하면 40,000 가구), 성 안의 양곡이 50만 석이었다. 당장 여기 나오는 숫자만 합쳐도 최소 6만 명, 최대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성 안에 있었다는 뜻이니 어느 쪽이든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대도시였던 셈이다.[50]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평지성과 큰 성은 지키기 어렵다고 말했다.[51] 중국의 성은 판축기법으로 만든 벽돌을 쌓아올린 토성이라서 화강암 벽보다 내구도가 부실하다. 그 때문에 중국식 공성전에 특화된 공성무기로 성벽을 부수는 데 실패했다.[52] 다만 당 태종은 후대의 인물이며, 여수전쟁에서의 패배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한 채 전장에 나섰다는 차이는 있다.[53] 만주한반도 북부는 해발고도 2000미터가 넘어가는 높은 산맥들이 많다. 수백 개의 산을 넘어가는 강행군이었던 것.[54] 오만가지 산맥이 있다는 시점에서 물자수송의 난이도는 어마어마하게 올라간다. 당시에는 터널이라는 게 없다.[55] 드라마이긴 하지만 연개소문 42화에서 별동대 지원을 위한 연개소문-이세민 일행이 지휘하는 보급부대가 고구려 조의들의 기습을 받아 보급품을 모두 잃고 빈손으로 별동대 진영에 도착하였다. 후방이 안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보급부대는 매우 취약하며 안정적인 보급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56] 보급부대도 사람과 우마라 식량과 물자를 소비하는데, 강력한 보급부대를 편성한답시고 부대원 숫자를 무턱대고 증원하면 운송하던 물자를 자기들이 다 써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그렇다고 소수여도 강력한 정예부대로 편성하자니 이건 전선에서 싸워야할 정예병을 후방으로 돌리는 행위라 본말전도다. 때문에 보급부대는 필연적으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전투부대에 비해 열악할 수밖에 없어 전투력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57] 그렇더라도 요동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를 각 병사들이 50kg의 짐을 지고 행군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실제로 수나라 군사들은 짐을 땅에 묻는 등 버리는 행위를 일삼았으며, 나중에 평양성 앞까지 도달하긴 했으나 이 시점에서 수나라군의 군량은 바닥이 났거니와 병사들의 상태 역시 도저히 공성전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때 내호아는 우중문과 우문술의 30만 대군이 도착하기 전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군에게 대패해 바다 멀찍이 퇴각한 상태여서 추가적인 보급 및 지원 또한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평양성 앞까지 죽을 힘을 다해 진격한 수나라군 30만은 군량이 바닥났음에도 본대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 고구려의 성을 제쳐두고 진격한 덕분에 후방에는 아군이 아닌 고구려군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나 지원도 불가능했다. 수나라군은 계속 평양성 앞에 머물러 있다간 군량 부족으로 인한 아사자문제는 둘째치고 수나라군의 군량부족을 간파한 고구려군에게 역으로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기에 퇴각해야만 했다. 그렇게 빌빌거리는 병사들을 어르고 다그쳐서 죽을 힘을 다해 살수까지군량 없이퇴각해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근방에서 수나라군의 군량 사정을 파악한 고구려군의 대공세를 받는 바람에 사실상 전군이 전멸당했다.[58] 당장 6.25 전쟁휴전 협상은 1951년 시작됐으나 소련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의적인 명령으로 공산권 진영의 협상 조건이 고의적으로 어렵게 제시되었고, 결국 스탈린이 죽고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집권하면서 겨우 휴전 협상이 합의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사되었다.[59] 즉 전근대적인 시가전을 벌였다는 것이다.[60] 일본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때의 수군의 퇴각 모습을 1812년 나폴레옹모스크바 퇴각에 비유했다.[61]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 때는 35만이라는 말도 있다[62]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냉병기 시대에 야전에서 이렇게 많은 군대가 섬멸당한 사례가 많지 않다. 군사학에서는 전투 인원의 30%만 손실을 봐도 전멸로 판정하는데, 이 전투에서 수나라 군대는 99%의 손실을 보였다. 물론 다 죽진 않고 아마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전투 하나로 통일 제국 하나가 무너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요나라귀주에서 정예 전투병 10만이 몰살당하자 더이상 고려를 침공할 의욕을 상실하고 만다.[63] 다만 두사람은 수나라 주요 장군이라 몇 년 뒤 고구려와의 전쟁이 재발하였을 때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다.[64] 훗날 당태종은 여기에 더해 기동력을 활용한 기만 작전을 수행하여 방위력을 약화시켜 요동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65] 나중에 고구려군에 의해 탈환된다.[66] 20년 동안 대륙 통일 국가의 총 동원령을 무려 3차례나 막아낸 고구려로서도 적지 않은 피로와 손실이 있었을 터이고 대규모 전쟁에서 으레 수반되는 청야 전술 역시 고구려에 큰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호승심이 어느 정도 개입된 발언일 수도 있지만 4차 침입 때 고구려의 비사성을 점령한 내호아는 고구려가 들판에 푸른 풀을 찾기 힘들 정도로 피폐하니 하루도 안 돼서 이길 수 있다며 종전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67] 금광문 밖으로 끌어내 결박한 다음 모든 관료들로 하여금 곡사정을 과녁 삼아 화살을 쏘게 했다. 그리고 죽은 곡사정의 시신에서 살을 떠내어 그 고기를 푹 삶아 수육으로 만들어 관료들에게 먹이고 남은 뼈는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재로 흩날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건 다른 책도 아니고 정사인 <수서>에 그대로 실려 있는 내용이다.[68] 여담으로 삼국유사에는 이때 사신의 행렬에 섞여 온 사람 하나가 쇠뇌를 수양제의 가슴에 쏘고 달아났다는 내용이 있다.[69] 그냥 패배한게 아니라 3천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고구려군에게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훗날 같은 30만 대군을 동원했던 고려가 통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지휘관이 사로잡히긴 했어도 결과적으로는 병력의 10분의 1만 소실된 반면 수나라는 사실상 대군 전체가 없어져서 전쟁을 지속할 역량 자체가 사라졌다.[70] 이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까지 30년 가까이 걸리는데 이 30년을 인구 회복 기간이라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1차 대전의 프랑스, 2차 대전의 소련이 그랬듯이 수나라도 대운하 공사와 고구려 원정으로 청년층이 갈려나갔다고 보면 된다.[71] 다만 동년 10월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은 끝내 입조하지 않았다.[72] 참고로 삼국유사에는 이때 일화가 하나 실려 있는데 고구려 사신단 사이에 있던 어떤 이가 품속에 숨겨놨던 쇠뇌를 꺼내 수양제에게 쏘았다. 갑작스런 사태에 모두가 우왕좌왕하던 사이 그 사람은 튀었다. 그 사람의 단독 행동이든 아니면 고구려에서 그런 뜻이 있었든 간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수양제가 날뛸만도 하지만 워낙 나라꼴이 개판이 된 나머지 수양제는 아무 문제삼지 않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그것도 남의 사신들 일행들에게 암살당할 뻔 했는데도 그냥 넘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수나라가 개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73] '고백 동맹' 같은 경우 구글로 검색하면 단 7건이 나올 뿐이다.[74] 이전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와 고구려현을 완전히 같은 실체로 보았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다르지는 않되 후대의 고구려 본체는 아니고 일종의 원형(프로토타입) 정도로 보는 견해가 많다.[75] 일례로 '왜'나 '호'가 갖고 있는 차별성 때문에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이를 '조일전쟁' 또는 '조청전쟁' 등으로 수정하려고 한 적이 있다. 당연히 역사학계에서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타협안으로 제시한 것이 '임진전쟁'이나 '병자전쟁'이었으나 이마저도 필자들에 의해 기각되었다. 따라서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며, 관계사적으로 양란의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동아시아사 교과서만 제한적으로 임진전쟁, 병자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76] 이나마도 과거에는 항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77] 특히 살수대첩이 있는 2차 전쟁은 37회부터 46회까지 무려 10회에 걸쳐 묘사했는데, 드라마가 100부작이니 비율상 10%를 2차 전쟁에 투자한 셈이다.[78] 당시의 중국의 국력이 아무리 세계 최강급이라도 실제 백만 대군을 동원할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논란을 뜻한다[79] 감당이 안 되는 걸 억지로 동원했고 그로 인해 보급도 아작나고 나라도 망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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