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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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노원구 갑에서 16년 만에 배출[1] 된 재선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을 지냈다.[2]
2. 생애[편집]
1964년 8월 9일,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高因厚)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이후 서울종암초등학교, 종암중학교, 대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3. 정치 활동[편집]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정치권 인사 중에서는 다소 이례적일 수 있을 정도로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다.[3] 석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석사장교로 복무한 후, 정치권에 투신하게 되었는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몰래 과외하던[4] 학생의 아버지였던 국회부의장 조윤형이 언론계로 들어가려던 자신에게 강력하게 권유하여 정치권으로 들어와 일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조윤형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처음 정계에 들어갔고, 이어 민주당 전문위원 공채에 합격하면서 완전히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다시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시의원으로 출마할 것을 제안받아 노원 지역에 출마하면서 본격적인 선거 출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2년까지 관운은 대단히 좋은 편으로 1995년 당시 31세로 시의원에 당선된 것에 이어 1998년에도 재선에 성공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2002년에 노원구청장 후보로 올라갔지만, 이 때는 현역 구청장이었던 이기재에 밀려서 패배하면서 정치적인 부침을 경험하기 시작했다.[5]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청와대 정무수석실 비서관으로 재직했다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사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공천 과정에서 노원구 을 지역구에서 우원식 후보에게 밀리면서 공천을 받지 못했고[6] , 그 뒤로는 공기업인 환경자원재생공사의 이사로 일하다가, 2007년 대선에서는 자신의 민주당 전문위원 공채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해찬의 캠프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노원구청장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김성환 후보에게 경선에서 패하면서 결국 김성환 후보가 구청장이 되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2012년 총선에서는 노원 갑 지역에 출마를 선언하였으나, 이 당시 정봉주와의 관계를 고려한 민주통합당 지도부에서 김용민을 전략공천해버리면서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7] 그리고 2012년 대선 정국에서는 2007년과 달리 손학규의 캠프에 합류하면서 활동했다.
그리고 총선 패배 후 붕 떠버린 노원 갑 지역의 지역위원장[8] 에 선출되면서 정치적인 활동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노원 갑 경선에서 청년 비례대표로 인지도가 높던 장하나를 상대로 지역 관리의 힘을 보여주면서 경선에서 승리하며 2002년 서울시의원에서 물러난 이후 무려 14년 만에 공천장을 확보했고, 이어 총선 본선에서도 국민의당 후보에게 꽤 많은 표를 내주기는 했지만, 상대인 서울 동북권역[9] 에서 유일한 새누리당 현역 의원이던 이노근[10] 을 상대로 2천여 표 차로 신승,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1][12]
19대 대선 정국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당 대변인 자격으로 박경미 의원과 함께 더문캠에 합류해 문재인 후보의 대변인을 맡았다. 원래 손학규계 인사로 분류되었지만 지금은 어르신께서 다른 살림을 차리셨으므로 이제는 옛말.[13] 위에서 언급하였듯 친노계 이해찬 대표와도 연줄이 있으며, 민주당 초선의원[14] 중에서는 드물게 친문이든 비문이든 계파 색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의원...이었으나, 소위 '부엉이 모임'[15] 의 멤버였던 것으로 나중에 알려지기는 했다. 고 의원이 야당 의원들과 언쟁을 드러내놓고 많이 벌이는 타입이 아니라서 그렇다.[16] 21대 총선에서 이낙연 전 총리가 후원회장을 맡아줬고, 송영길 체제에서 당 수석대변인을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계파색이 옅다.
이후 2019년 이인영 원내지도부에서 기획부대표[17] 자리를 맡았다.
북한 김정은이 나와있는 국정홍보 브로셔를 청와대에 초청한 보훈가족에게 무분별하게 주었던 것와 김원봉 관련된 논란으로 6월 초 정국이 시끄러운 가운데, (헤럴드경제 190607)독립운동가들의 행적에 대해서 1945년 8월 15일 이전까지만 보자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의견을 냈다. (조선일보 190503) 5월에도 당정청 회의에서 같은 의견을 냈었다고 한다.[18]
21대 총선 민주당 경선에서 유송화 전 청와대 춘추관장을 꺾고 공천장을 다시 따냈고, 미래통합당 공천을 다시 받은 이노근 전 의원과 리턴매치를 치른다. 지난 총선과는 다르게 약 18%, 1만 7천여 표차로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노원구 갑 지역구에서 '현역 재선불가 징크스'[19] 를 16년 만에 징크스를 깨고 재선에 성공한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이후 21대 전반기 원구성에서 기획재정위원회의 여당 간사[20] 및 당내 코로나19 국난극복위원회 경제본부장[21] 을 맡게 되었으며, 지역구 사무실도 기존의 광운대역 앞에 위치한 건물에서 공릉역 근처로 옮겼다.
송영길 당대표에 의해 2021년 5월 4일자로 당 수석대변인에 임명되었다. 대변인직을 내려놓은 지 근 4년 만에 당 대변인을 다시 맡은 것.[22] 결과적으로는 두 번의 대선에서 당 대변인을 맡는 진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20대 대선 패배로 송영길 지도부가 무너지고, 8회 지선 패배로 윤호중-박지현 비대위까지 무너진 뒤에도 수석대변인직을 유지하다 이재명 대표가 당선된 뒤 수석대변인직에서 물러난다.[23]
4. 선거 이력[편집]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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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대 총선 이후, 고 의원이 재선에 성공한 21대 총선 전까지는 이 지역구 현역의원이 재선에 성공한 예가 없었다.[2] 후술하겠지만 대변인으로서도 재선(再選)이다.[3] 대개 고학생들이 이랬다. 우골탑이라 하여 시골 출신 부모님이 겨우 마련한 등록금과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도 못 가고 일하게 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대학에 다닌 학생들은 대학 생활이 자기만의 일이 아니라 가족의 미래와 직결된 사항이었기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운동권과 거리를 둔 경우가 많다.[4] 당시에는 과외금지법으로 과외가 불법이었다.[5] 이기재는 다음 선거에서 같은 당의 이노근에게 공천에서 패배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역시나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다.[6] 우원식은 이후 민주당의 침체기였던 18대 총선을 낙선한 걸 제외하고 21대 총선 까지 무려 4선을 기록했다.[7] 그러나 김용민은 막말 논란으로 막판에 표가 뒤집혀지며 패배했고, 나아가 민주통합당의 19대 총선 패배 원흉으로 지목당하게 된다.[8] 김용민이 총선 낙선 이후에도 좀 더 재직했지만 결국 탈당한다. 사실 무엇보다 애초부터 김용민은 용인시에 살았고, 노원에는 연고가 없었다.[9] 종로구-중구-용산구 라인 동쪽 전체. 즉,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 광진구, 중랑구,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8개 자치구/17개 지역구 전체. 노원구만 지역구가 셋이고 나머지 7개 구는 지역구가 둘로 나뉜다.[10] 그래서인지 새누리당에서는 이노근 의원을 4년 내내 국토교통위원회에 배정시켜 주는 파격적인 배려를 해 줬다. 지역구에 예산 많이 끌어가라는 뜻. 정작 이노근은 이 걸 활용하지 못 했다.[11] 자신을 5회 지방선거 노원구청장 경선에서 주저앉힌 김성환 구청장이 했던 것처럼 재선에 도전하던 이노근을 쓰러뜨리고 당선된 것.[12] 이 후보의 낙선 원인은 당시 같은 자치구 내 이웃 지역구인 병 지역구의 현역 안철수와 그가 소속된 광역단체인 서울특별시의 수장인 박원순 시장에 대한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며 거친 막말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면서 지역의 민심과 철저히 척을 졌던 것과 공릉동 행복주택과 관련해서도 지역구 주민들을 무시한 결정이 큰 원인이다.[13] 전현희, 김병욱 의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14] 유독 20대 국회 민주당 초선들 중에는 선명한 컬러로 유명세를 떨치는 의원들이 많다. 박주민, 표창원, 이철희, 이재정, 박용진 의원 등.[15] 전해철로 대표되는 진문(眞文)계 의원들의 모임.[16] 다만 2019년 12월 공수처법 제정 국면에서는 원내지도부의 일원으로 총대를 메고 본회의장에서 자유한국당에 강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17] 원내대표, 원내수석부대표에 이은 원내 서열 3위. 원내수석이 없을 경우 기획부대표가 원내수석부대표직을 대행한다. 홍영표 원내대표 시절 서영교 의원이 불미스런 일로 원내수석에서 물러나자 이철희 당시 기획부대표가 원내수석부대표 권한대행을 한 것이 그 예시.[18] 단 저 때는 5월 완전 초(3일)라서 패스트 트랙과 관련 몸싸움으로 정치이슈가 거의 덮였었기 때문에 작성시점인 6월 초보다 논란이 덜 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 노원 갑 지역구는 2000년 16대 총선 이후 21대 총선까지 현역의원이 재선에 성공한 예가 없었다. 16대 현역이었던 함승희 의원, 17대 현역이었던 정봉주 의원, 19대 현역이었던 이노근 의원까지 모두 다음 선거에서 낙선했고, 18대 현역이었던 현경병 의원은 아예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여 재선도전 자체가 불가능했다.[20] 당 수석대변인이 되면서 간사직은 내려놓았다.[21] 예결특위, 기재위, 정무위 소관[22] 추미애 당대표 당선 직후부터 19대 대선 끝까지 박경미 현 청와대 대변인과 함께 당 대변인을 지냈다. 이 당시 수석대변인은 현 사무총장인 윤관석.[23] 반대로 역시 윤-박 비대위에서 임명된 노원의 김성환 정책위의장과 노웅래 전 민주연구원장은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도 유임됐다.[24] 서울지역 더민주 당선자 중 2번째로 작은 표차이며, 한강 이북 서울에선 최소 표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