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전한)/생애

최근 편집일시 : 2024-02-13 01: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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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현의 백수건달
2. 반(反) 진 전쟁 참전
2.1. 수배된 근무이탈자
2.2. 시골 반란군의 수령
2.3. 항가군의 객장
2.4. 부활한 초나라의 신진제후
2.5. 진나라 정복의 주인공
2.6. 홍문연(鴻門宴)
3.1. 한왕 즉위와 반격준비
3.2. 3진 평정과 팽성대전
3.3. 형양 함락과 성고 함락
3.5. 해하의 결전
4. 제국의 황제
4.1. 나는 세 사람보다 못하지만, 세 사람을 부릴 줄은 안다
4.2. 태공과의 일화
4.3. 이제야 황제가 귀한 것임을 알겠다
4.5. 경포의 반란
4.6. 대풍가(大風歌)
4.7. 그 다음은 당신이 알 것 없소
5. 사후


1. 패현의 백수건달[편집]


고제 유방의 출신지는 패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방은 자신이 태어난 곳은 위나라이고, 나중에 패현으로 이주한 것이라고 했다.[1] 패현 일대는 수시로 소속된 국가가 변하던 지역이었고 오랜 기간 송나라의 영토였다가 유방이 활동할 시기는 초나라 영토였다. 위나라나 제나라의 영토였던 적도 있었다.

그의 집안은 전국시대 말기 위나라의 대부(大夫)인 유청(劉淸)의 아들 유인의 후손들로 유인은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의 아버지이다. 또 형제들 가운데 유학을 공부한 정통 유학자도 있었고 본인도 가벼운 시험이긴 하지만 엄연히 시험을 쳐서 하급 공무원인 정장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아주 가난한 집은 아니고 원래는 대부 집안이였다가 가세가 몰락해 평민이 되어 패현으로 이주한 집안 출신이라고 할 순 있겠다. 실제로 유방은 글도 쓸 줄 알고, 말년에는 황제가 되어서 학문을 익히며 독서도 즐겼다. 즉 그 시절에는 '지역 유지 출신+ 글 읽을줄 앎' 이것만 해도 평민들 가운데선 꽤 드문 상위 계층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변변찮은 일도 하지 않는 시정잡배였다. 그냥 백수도 아니고 굉장한 하류인생이었다. 집안 막내 아들이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툭하면 패싸움하고 술집 들락거리고 쥐뿔도 없는데 옆구리에 여자 끼고 히히덕대던 날건달 날백수였으니 부모님 대성통곡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사기》 <고조 본기>에는 대놓고 유방이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돈도 못 벌면서 틈만 나면 술판을 벌이고 여자를 끼려는 사람이었단 말이다. 게다가 연구자 중에는 유방과 번쾌 등 패현 출신 동향 그룹들을 일컬어 '의협 세계에 살았다'라고도 서술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 좋아 의협이지 동네 건달 무리였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2] 소하(패현 주리연, 군청 서기관)[3]조참(패현 옥연, 형사/교정직) 정도가 학문이나 지위가 좀 있는 편이었던걸 뺀 나머지는 개백정(번쾌), 상갓집 소리꾼(주발), 현청 마굿간지기(하후영) 등 나머지는 한미한 출신이고 노관은 아예 무직 백수로 기록돼 있으니, 다들 패싸움이라면 한가닥 했으나 행정적 실무 능력이라고는 눈씻고 찾을 수 없었다고 하겠다. 유방은 또 베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가진 건 없더라도 한 턱 낼 때는 화끈하게 내는 남자들의 행동과 비슷한 듯.

유방이 황제가 되고 나서 아버지 태공의 장수를 비는 잔치에서 "저보고는 생업도 못 꾸리고 작은 형처럼 노력도 안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면 어떻습니까?"하고 농담하니 태공을 비롯해서 좌우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를 보면 당시 유방이 집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 어른이 되어서 놀고먹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 짓인데, 얼마 안 되는 집안 가산까지 탕진해가며 동네 친구들을 모아 건달 놀이나 하고, 툭하면 싸움박질에, 칼 갖고 똥폼 잡다가 실수로 사고를 쳐 관아에 잡혀가는 등[4] 사고만 치고 다녔다.

이런 한량 시절 때문에 체면 구기던 일이 하나 있었는데 젊을 적 유방이 동네 한량들하고 밥먹겠다고 집에 오면 큰형수가 국솥을 박박 긁어 손님들을 무안하게 하여 내쫒기 일쑤였다. 유방은 이걸 기억해뒀다가 천자가 되어 일족을 각지의 왕후로 봉하는 와중에도 큰형수네 일가는 아무 작위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부친(태상황) 유태공이 하도 부탁을 하니 마지못해서 큰형수의 아들 유신(劉信)을 제후에 봉하긴 했는데, 작위 명이 갱갈후(羹頡侯), 즉 '국 갱'자에 '마찰하는 소리 갈' 자로 국물 긁는 제후였다. 안그래도 의리를 중시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유방같은 성격인 입장에선 옛 시절 큰형수의 행동에 어지간히 심사가 뒤틀렸던 듯. 아무리 장량의 조언대로 한거라지만 옹치조차 용서한 그 유방이 이정도로 뒤끝을 보여준 거면 어지간히 원한이 있었던듯 하다.

물론 당시 형수 입장에서 보면 시동생이 장래에 한 나라의 창업군주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백수 주제에 나가서 뭔가 일이라도 해서 집안 생계에 도움을 주긴 커녕 사고만 치고 다니고(수습은 거의 대부분 집안 사람들 몫이었을 거다), 그러면서 허구한 날 집에다 친구 불러다 술이나 퍼먹고 놀면서 그 친구들 술상 차리고 밥상 차리는 것까지 형수가 맡아서 하게 된 판에 집안의 맏며느리로 집안 생계를 책임지던 형수로서는 그런 시동생이 결코 곱게 보일 수가 없다.

다만 갱갈후가 형수에 대한 뒤끝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기의 기록에 대해, 조선 초기의 유학자 성현(1439~1504)이나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임성주(1711~1788)는 각자 '봉갱갈후변'과 '갱갈후론'이라는 글을 써서 옹치나 계포처럼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람도 기꺼이 용서하고 항우나 전횡처럼 자신의 최대 적수였던 사람에 대해서도 마지막에는 예의를 갖춰 장례했던 유방이 형수가 자기를 섭섭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대놓고 그것도 죄 없는 아들한테까지 그런 치졸한 방식으로 복수하는 식으로 후세에까지 비웃음을 살 얄팍한 짓을 대놓고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고, 형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엄연히 유방 자신에게는 친조카이고 또 아버지가 나서서 "쟤 자리 하나만 해 줘라. 그래도 네 조카잖니?"라고 달래는데 형수에 대한 앙심만 내세워 굳이 '갱갈후'라는 모욕적인 이름이 들어간 봉호를 딱히 죄가 없는 조카에게 붙여 준다는 것도 유방을 두고 "도량이 넓다"고 평한 사서의 기록이나 유방이 옹치나 계포 또는 항우나 전횡에게 했던 다른 행적과는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임성주는 유방이 유신을 '갱갈후'에 봉한 것은 형수에 대한 뒤끝이 아니라 마침 유신이 봉해진 지역의 지명이 갱갈이었기 때문에 갱갈후가 되었을 뿐이며, 유방이 형수에게 뒤끝이 있었다고 해도 평소 유방 성격상 아버지 태공에게 했던 것처럼 본인이 즉위하자마자 형수의 아들부터 가장 먼저 불러다 벼슬을 주면서 형수에게 "전에 형수님 나 집에 사람 데려온다고 국도 안 주고 싫어하셨죠? 지금도 싫으세요?"라고 과시하는 식으로 형수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썼을 것이고 저런 식으로 아무 죄없는 조카한테 형수의 죄를 묻는 식으로 굳이 후세에 비웃음을 살 얄팍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갱갈후라는 지명에 쓰인 글자를 가지고 후세 사람들이 짜맞춰 지어낸 썰을 사마천이 사실인 것처럼 주워서 기록했을 뿐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갱갈후의 경우 《사기》의 주석서인 색은(索隱)과 정의(正義)에서 '갱갈'이 지명이 아닌 작호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에 제후의 봉호(封號)는 일반적으로 봉토의 이름에서 따오고, 유신의 봉토는 구강군 서현(舒縣) 일대였으므로, 유신은 마땅히 '서후(舒侯)'로 불러야 했다. 유방은 유신을 책봉하면서 고의적으로 '갱갈(羹頡)'이라 명명하여 유신에게 망신을 준 것이다. 후일 삼국시대에 서현이 위나라와 오나라의 국경지대가 되면서 폐지되었다가 서진 때 복구되었는데, 이때 그 치소를 옛 갱갈후의 탕목읍이었던 '갱갈후읍(羹頡侯邑)'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즉, 앞서 살펴본 유학자들의 견해와는 별개로 '갱갈후' 자체는 악의로 명명한 작위가 맞다.

아무튼 그 당시 유방은 가진 건 쥐뿔도 없었지만 패기는 실로 남달라서, 왕온(王媼)과 무부(武負)라는 사람들의 술집에서 매일매일 외상술을 얻어마시고 졸리면 아무데서나 널부러져 잠을 잤다. 유방이 술 퍼마시고 잠을 자면 그 몸 위에 용의 기운이 서리고 술집에서 매상이 몇 배가 더 나가서 술집에서는 외상 장부를 찢어 외상값을 없애버렸다고 하는데, 용의 기운이 서렸다는 기록은 유방이 술집에 가면 분위기를 주도하여 매상이 더 올랐다는 식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술집 주인 입장에선 아무리 외상이나 퍼먹고 툭하면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는 인간이라 해도 그 인간 덕분에 평소보다 매출이 눈에 띄게 올랐다면 미워하진 않았다.

비록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진 못했지만, 사실은 그저 놀고 먹기밖에 모르는 등골 브레이커는 아니고, 당시엔 거의 귀족들의 소양이었던 검술과 학문에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것을 보면 '싸나이 장부로 태어났으면 사대부들처럼 폼나게 책도 좀 읽고, 칼도 휘두르고, 벼슬 한자리 꿰차고, 부하들 거느리고 전쟁도 해보고, 미녀들 끼고 화끈하게 즐기며 살아야지,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밭 갈고 나무 패는 게 웬말이냐!'라는 마인드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당대의 유명한 호걸들과 교류하기도 했는데 개중에는 이미 거물급이었던 장이도 있었고 유방은 장이가 잠적하기 전에 그 밑에서 문객생활도 했다. 사실 신릉군의 문객이었던 장이가 동네 날건달 출신인 유방을 초빙하려고 패현까지는 갔을리는 없으니 유방이 호걸들과 교류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면서 떠돌아다닌 적도 있었다고 봐야 하는데 이 부분은 사서에도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유방이 어디까지 천하를 주유하고 다녔는지 알 순 없다.

그러다 어느 날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서 요역을 하고 있었는데, 시황제(秦始皇)의 위풍당당한 행차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오호라! 대장부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5]


당시 유방이 사수의 정장이 되어 무리들을 여산으로 압송하게 되었는데 유방은 도중에 자신과 면식이 있었던 일부 무리들을 풀어주었다. 이에 무리들은 감사 표시로 술 두 병, 사슴 뱃살, 소 간 각 하나씩을 고조에게 선물하였다고 한다. 유방은 그래도 떠나지 않고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을 함께 (앞서 받은) 술과 음식을 먹은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훗날 유방은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도 수라상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언제나 이 두 가지 구운 고기와 술 두 병씩을 함께 마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6] 황제가 되어 온갖 산해진미를 접해도 추억의 그 맛만은 잊을 수 없었던 듯 하다. 이렇듯 하는 일도 없는 백수였던 유방은 사수정(泗水亭)의 장(長)[7]이라는 벼슬자리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소하(蕭何)가 자리를 추천하여 만들어주었다는 것인데, 유방이 소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시험을 쳐서 획득한 자리다.[8] 정장이라는 이름의 벼슬을 얻었다고 해도 현대 한국과 비교해 말하면 동대장이나 파출소장 정도이지만, 유방의 패기가 워낙 대단해서 현청(군청)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아랫사람처럼 같잖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유방은 조(曹)씨라는 여자의 기둥서방을 하고 있었다. 조씨는 이 관계에서 훗날 제도혜왕(齊悼惠王)이 되는 유비(劉肥)를 낳았다. 조씨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거의 없어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마 나중에 소개할 유방의 정처 여치보다 먼저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싶다. 유비의 생년은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그의 아들 성양경왕 유장이 기원전 200년생이고 여치의 장남 혜제 유영은 기원전 210년생으로 단순히 유비가 혜제의 형일 뿐만 아니라 나이차이도 상당히 났을 것이며, 따라서 여치와 결혼하기도 전에 유비를 낳았으리라고 추론해도 많이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끝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 날 선보(單父)[9] 출신인 여공(呂公)이라는 인물이 패현으로 이주하는 일이 생겼다. 본래 거주하던 곳에서 원수를 피해 도망쳐 온 것인데, 이 사람이 패현의 현령과 안면이 있어 손님으로 지내다가 아예 모든 가족을 이끌고 이주하여 집들이를 하던 참에, 현령이 돌봐주는 거물이니 패현의 여러 호걸들이나 관리들도 이 여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잔치에 와서 하례금(축의금)을 바쳤는데, 이 사람들의 숫자가 꽤 되어 현에서 서기로 일하던 소하가 나서 하례금을 걷는 일을 맡게 되었다. 소하는 사례금의 액수가 1,000전(錢) 미만인 사람들은 대청 아랫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재산이라곤 땡전 한 푼 없던 유방이 나타났다. 유방은 돈도 없었지만 당당하게 하례금 일만 전[10]이라 쓰고 들어왔다. 이것을 본 여공이 깜짝 놀라 직접 나와서 유방을 맞이했는데, 본래 관상을 즐겨 보던 여공이 한번 유방을 보고서는 그에게서 꽤 그럴 듯한 면모를 감지했는지, 유방을 극진히 대접하며 귀빈석에 앉게 했다. 소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다.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큰소리만 잘 치지 일을 이루는 건 드뭅니다.


과거가 알려져서 개망신당하기 전에 적당히 눈치보다 조용히 꺼지라는 암시였지만, 유방은 그런 말은 다 무시해버리고 계속 귀빈석에 앉았다. 앉아있는 것도 일인데, 태도가 너무 당당하고 접대를 사양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슬쩍 유방을 자리에 남겨놓더니 자신의 딸인 훗날의 여후(呂后)를 "데려가서 청소나 하는 첩으로 삼으라."면서 주었다.[11] 이에 여공의 부인이 "아니, 현령이 혼맥을 맺자 할 때도 내키지 않았거늘 저런 놈팽이에게 딸을 주다니요?" 하고 노발대발했지만,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아!" 하면서 무시하고 기어코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고 말았다. 둘째 딸인 여수까지 유방 패밀리의 행동대장이자 동네 개백정인 번쾌에게 시집보낸 것으로 보아 여공 자신도 그러한 협객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이미 사내가 제 한 몸 지킬 줄 아느냐가 가장 중요해지는 난세가 다가오고있었던 만큼 여공의 통찰력은 실로 대단했다고 볼 수있다.

그렇게 여후와 결혼한 유방은 훗날의 혜제(惠帝)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 등의 자식을 얻었다. 유방과 조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당초에 둘이 제대로 살림을 차리고 산것도 아니라서 그리 문제는 없었거나 혹은 유방이 유력자인 여공과 관계를 맺기 위해 조씨와의 인연을 정리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12]

그러던 어느 날, 여후가 아이들을 데리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 어떤 노인이 물을 좀 달라고 부탁했고 여후가 물을 주자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더니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되실 겁니다." 고 대답했다. 여후가 두 아이의 관상도 봐달라고 부탁을 하자, 노인은 혜제를 보고는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원공주의 관상도 칭찬을 한 노인이 자리를 떠나자, 마침 사랑채에서 나온 유방에게 여후가 이 말을 전하자 유방은 노인을 찾아가 자신의 관상도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런 대답을 했다.

"조금 전의 부인과 아이들이 모두 당신의 상을 닮았습니다. 당신의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이에 유방은 감사하면서 "혹시 그 말대로 된다면,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대답했다. 하지만 유방이 어느 정도 세력자가 되고 난 후에는 노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뒤에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사마천이 이 이야기의 허구성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여후가 내 남편은 일찍부터 될 사람이었다! 하고 소문내려고 퍼포먼스를 했다는 식의 의견도 있다. 실제 연대를 계산하자면 여후가 혜제를 낳은 시기가 기원전 210년경이다. 유방이 망탕산에 숨어 있다 거병한 시기가 209년이니 정말 관상을 보았다면 한 살도 안 된 갓난아이의 관상을 보았다는 것이다.[13]

2. 반(反) 진 전쟁 참전[편집]



2.1. 수배된 근무이탈자[편집]


이때 진나라의 여산(驪山)에서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고통스럽게 노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정장이었던 유방은 패현의 죄수들을 호송해서 여산으로 끌고 가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14] 하지만 현시창의 상황이었던 여산에 끌려가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죄수들은 하나, 둘씩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여산에 도착할 즈음이면 모두 도망치고 한 명도 남지 않을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책임자인 유방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유방은 아예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속 편하게 을 진탕 마시고는, 밤이 되자 "가고 싶은 대로 가라. 나도 도망칠 테니까." 라고 말하면서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무리 중 10명 정도가 유방을 따르기를 원했다. 유방은 그들과 술을 더 마신 후, 한밤중에 이동을 하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 앞 길을 살펴보게 했다. 앞서가던 사람은 이내 돌아오더니 "앞에 큰 이 길을 막고 있으니 되돌아가는 게 좋다." 고 권했다. 그러자 유방은 술김에 "장사가 길을 가는데 그깟 뱀이 뭐라고!" 라며 소리치고 앞으로 가더니 칼로 뱀을 베어서 죽여버렸다.[15] 그런 다음 몇 리를 더 가다가 기어코 술에 취해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유방을 따르던 사람들이 이를 쫓아서 와보자, 뱀이 죽은 자리에서 한명의 노파가 통곡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노파는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여서 그렇다." 고 대답했고, 자신의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 있다가 방금 적제(赤帝)에게 참살당했다고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노인네가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두들겨 패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 때, 노파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술에서 깬 유방은 그 이야기를 듣자 비범한 이야기라고 여겨 내심 좋아하게 되었고, 따르던 사람들도 유방이 뭔가 특이한 인물이라고 여겨서 더욱 그를 경외하게 되었다.[16][17]

그 무렵 진시황제는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는 것 같다." 고 여기며 동쪽으로 순행해 그 기운을 억누르려 했는데, 여러가지 묘한 일도 있고 해서 스스로 특이한 사람이 아닐까 여긴 유방은 "혹시 나 잡으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서 망탕산의 연못가 근처 암석 사이에 은둔하면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여후가 유방을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가 어디에 숨어있든 항상 귀신같이 그를 찾아내었다. 이에 유방이 신기해서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어보자, 여후는 "당신이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서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패현의 많은 자제들은 더욱 유방을 대단히 여겨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2. 시골 반란군의 수령[편집]


유방이 숨어 다닐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2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 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패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은 진나라 관리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 같으니, 마침 숨어 지내던 유방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면 적절하다고 여겨 번쾌(樊噲)를 불러 유방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유방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曹參)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 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 유방은 거부하고 소하와 조참이 더 어울리지 않느냐 내뺐지만, 소하와 조참의 거듭된 만류와 설득으로 포기하고 현령 자리를 받아들인다.

일설에 따르면 유방은 그저 거부하는 척을 했을 뿐이라고 한다. 내심 좋으면서도 몇 번 사양하다가 수락했다는 것. 한편 사기에 적혀 있기로는, 소하나 조참이 생각했을 때 유방의 지지도가 높아 굳이 대세를 거스를 이유도 없는 데다가, 만약 반란이 실패했을 경우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한사코 유방에게 양보했다는 이야기.[18] 정확한 진실이야 알 수 없지만, 오랜 도피 생활에 지친 유방에게는 갑자기 현령이 되어달라는 부탁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에 거부한 것일 수 있다. 소하와 조참 역시 모두를 이끌 우두머리로는 유방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여 추대한 것일 수 있다. 하여간 유방은 그렇게 해서 패현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패현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에서 패공(沛公)으로 불리게 된다.

추대된 유방은 패현의 관청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짐승을 죽여 피를 북에 바르고 깃발을 모두 붉은색으로 했다.[19] 이에 소하와 조참, 번쾌 등과 젊은 관리들이 패현의 젊은이 2~3,000명을 모았고, 호릉(胡陵)[20]과 방여(方輿)[21]을 공격한 후 다시 돌아와 풍읍(豊邑)을 지켰다.

이렇게 유방이 거병을 한 기원전 208년, 천하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장초군의 장수 주장(周章)[22]은 수십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 수도 함양에서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위치까지 진군했으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장한(章邯)이 대반격을 가하자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또한 장초의 장수들은 각각 연나라(燕), 조나라(趙), 위나라(魏) 등을 세워 독립했고, 제나라(齊) 역시 전(田) 씨 형제들이 거병하여 나라를 세웠다. 또한 오나라 땅에서는 항량(項梁)이 봉기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진나라의 사천군감(泗川郡監)[23] 평(平)이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유방은 이틀 후 출진하여 그들을 쳐부쉈다. 이제 수비가 아니라 공세에 나서기로 결정한 유방은 옹치(雍齒)에게 풍읍의 수비를 맡기고는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설현으로 진격, 사수군을 지키는 장(壯)을 격파했다. 장은 도망쳤지만 유방군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이를 추격하여 장을 잡아 죽였다. 이후 유방은 군대를 돌려 항보(亢父)를 거쳐 방여(方輿)에 이르기까지 진군했다.

2.3. 항가군의 객장[편집]


그런데 이 무렵 장초의 진승은 수하의 장수 주불(周巿)을 시켜 위나라 땅을 공격했는데, 주불은 이에 풍읍으로 사자를 보내 "풍읍은 본래 위나라가 천도한 곳이었으니[24] 항복해라. 항복하면 후로 삼아 맡기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모두 도륙할 것이다." 라고 협박을 했다.

헌데 당시 유방은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이 연략을 받은 사람은 옹치였다. 본래부터 유방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옹치는 이에 넘어가 풍읍 관내를 홀라당 바쳐버렸고,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유방이 귀환해 풍읍을 공격했지만 함락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병이 난 유방은 일단 패현 중양리로 물러났다.

옹치와 풍읍의 배반에 원통하고 분노한 유방은 마침 동양(東陽)[25] 출신 사람인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라는 사람을 임시 초왕으로 삼아 유(留)[26]에 있다는 사실을 듣자 경구를 만나 의탁하여 군사를 빌렸고 다시 풍읍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무렵 장한이 진승의 세력을 완전히 격파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장한의 부장이었던 사마이(司馬夷)는 북쪽으로 초나라 땅을 평정하고 상현(相縣)[27]을 도륙하며, 탕(碭)[28]에 이르렀다. 이에 유방은 영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소(蕭)[29]로 진군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 유 땅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그 후 재차 공격을 감행, 3일간의 싸움 끝에 사마이에게 함락된 탕성을 재함락하고 탕성의 장정을 거두어 대략 5,000명 가량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방은 이 부대를 가지고 하읍(下邑)[30]을 함락시키고 풍읍 부근에 주둔했다. 그리고 이때 경구에게 의탁하려고 찾아왔던 장량과 대면하게 되는데, 장량은 자신의 계책을 척척 알아듣는 유방에게 흥미를 느껴서 경구에게 가지 않고 그대로 유방 옆에 눌러앉았으며, 유방도 장량을 눈여겨보고 수시로 자문을 구했다. 다만 이 당시 장량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조국인 한(韓)나라 부흥이었기에 정식으로 유방의 신하가 될 수는 없었다보니 높지 않은 구장 벼슬로 구색만 맞추었다. 직책을 아예 안 줄 수는 없고, 떠날 때도 서로 부담 느낄 필요가 없도록 하는 조치였을 듯.

이때 유방의 지상 과제는 물론 풍읍의 배신자 옹치를 박살내는 일이었겠지만, 유독 풍읍 탈환 시도만은 잘 되지 않았다. 탕이나 하읍 등을 수월하게 함락시켰고, 진승이 박살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위나라 측도 풍읍을 지원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부하들이 하나같이 풍·패 출신인 유방으로선 이들에게 고향 이웃들을 도륙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는 곤란했던 점이 문제가 되었을 듯하다. 그런 와중에 봉기군 중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항량이 초왕 경구를 죽이고 설(薛) 땅에 주둔하자 기회라고 여긴 유방은 직접 100여 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항량을 방문했다. 유방과 이야기를 나눈 항량은 5,000여 명의 병사와 오대부(五大夫)에 해당하는 장수 10여 명을 빌려주었고 유방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풍읍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옹치는 위나라로 도주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 양성(襄城)을 함락하고 대학살을 자행한 항우는 항량의 본군으로 귀환했고, 이에 맞추어 항량이 각지를 공격하고 있는 장수들을 소집하였기에 유방도 돌아갔다. 진승이 살해된 것이 확실해졌기에 항량은 이에 맞추어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새로운 초 회왕으로 추대하고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고, 유방도 일단은 초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2.4. 부활한 초나라의 신진제후[편집]


그 무렵 진나라의 장한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공격 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항량은 곧바로 동아로 진군하여 장한을 물리쳤다. 유방 또한 항보에서 진군을 격파한 뒤 조참과 함께 북상하여 이 전투에 참가했으며, 장한이 패주하자 항량은 별동대를 조직하여 항우와 유방에게 이를 이끌게 하고 장한을 추격하게 했다. 성양(城陽)을 함락하고 성 내의 사람들을 학살한 별동대는[31] 이윽고 복양(濮陽)으로 진군하면서 저항하는 장한의 진군을 재차 격파하고, 다시 성에 공격을 가해 복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추격이 정도(定陶)에 이르렀을 즈음엔 장한도 군세를 수습하여 쉽지 않았고, 장한은 서서히 후퇴하면서 시간을 끄는 한편으로 진나라 본국에 추가적인 군사를 요청했다. 이를 호해는 승낙했다. 이러는 와중에 항량은 갑자기 눈앞의 장한은 내버려두고 유방과 항우를 서쪽으로 파견해서 곁에서 떼어놓았다. 유방과 항우는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군을 격파하고,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李由)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별동대는 외황(外黃)을 향해 진군했다.

진군을 몇 차례 더 물리치면서 대승이 이어지자 완전히 교만해진 항량은 동아 전투 후 겨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장한의 야간을 틈탄 기습에 결국 정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항우와 유방의 별동대는 외황을 버리고 진류를 공략 중이었지만, 항량이 정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의 사기가 염려되어 여신(呂臣) 등과 함께 퇴각을 했다. 그 당시 초나라의 기둥이었던 항량을 참살한 장한은 이제 초나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조나라를 박살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반진전쟁의 핵심인 항가군을 포함한 초나라 잔존세력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어있었던 웅심은 항량이 죽었으므로 장한의 공격을 대비하여 도읍을 팽성으로 옮기는 한편 항우를 장안후에 봉하는 등의 인사조치를 단행할 때 유방을 무안후에 봉하고 탕(碭)군의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대륙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천하가 혼란할 때 시골구석에서 현령을 죽이고 공작을 자칭하던 일개 평민이 공식적으로 제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32]

2.5. 진나라 정복의 주인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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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과 항우의 진격로

장한은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부장 왕리(王離)[33]를 파견해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이 몸을 피한 거록(巨鹿)을 공격 중이었다. 조나라마저 무너지면 진나라의 세력이 다시 천하를 뒤덮을 것이 자명했기에, 이를 구원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초 회왕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그 지역의 왕이 되리라

라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켜야만 항량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가길 원했지만, 회왕의 주변에 있는 노장들이 잔혹한 항우를 서쪽으로 보내는 일을 꺼려 이 일은 관대한 유방이 맡게 되었고, 항우는 송의(宋義)와 함께 북쪽으로 진군해 거록의 진군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유방은 독자적으로 군단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유방은 강리(杠里)[34]의 진군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나아가다, 창읍(昌邑)[35]에 이르렀다. 바로 이때 팽월(彭越)을 만나 양 군대는 힘을 합쳐 창읍을 공략했으나, 창읍의 수비가 완강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잠시 율현(栗縣)으로 후퇴하였다가 강무후(剛武侯)[36]의 군사 4,000여 명을 빼앗아 위나라 장군 황흔(皇欣), 신도(申徒), 무포(武蒲) 등과 함께 창읍을 재차 공격했지만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 무렵 항우가 거록대전에서 놀랄 만한 대승리를 거둔 참이라, 유방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창읍을 내버려 두고 서쪽으로 진군하며 고양(高陽)을 지나갔다. 바로 이때 역이기(酈食其)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양다리를 떡 벌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무례한 행위였는데, 그 모습을 본 역이기는 절을 하지 않고 길게 읍만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족하께서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역이기에게 욕을 퍼부었다.[37]

"이 비루한 유자 놈아! 지금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은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한다고 하느냐?"


그러나 역이기는 기가 꺾이지 않고 말하길,

"무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무도한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장자(長子)를 거만한 태도로 맞이하심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따지자[38] 유방은 그 즉시 발씻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역이기를 윗자리에 모셔 조언을 구했다.[39] 유방은 역이기의 조언에 따라 진류(陳留)를 습격해 진나라가 비축한 양식을 얻어 군량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그 후 역상(酈商)[40]을 장수로 삼고 개봉(開封)을 쳤지만 여기도 쉽게 함락이 되지 않자 그대로 서쪽으로 나아가 백마진(白馬津)[41]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을 쳐부수고 이를 추격하여 곡우(曲遇)에서 대파했다.

이후 유방은 남쪽으로 나아가 영양(穎陽)을 함락시켰고, 장량과 다시 재회하여 그 도움을 바탕으로 환원(轘轅)[42]을 점령했다.

그런데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卬)이 관중으로 진입해 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수를 남하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진입하려고 하자, 유방은 평음(平陰)[43]을 공략하여 나룻터를 끊어버렸다.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낙양 동쪽에서 전투를 치루었으나 유리하지 못해 양성(陽城)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추스린 후, 남양현(南陽縣) 동쪽에서 남양 태수 여의(呂齮)를 무찔러 남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여의는 완성(宛城)으로 도망쳤고, 유방은 여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서쪽으로 진군할 요량이었지만 장량이 "후방에 적을 남기는건 좋지 않다." 고 충고하여 한밤을 틈타 이동하여 완성을 세 방향에서 포위했다. 항복해봤자 학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절망한 여의는 자살하고자 했으나 진회(陳恢)가 우선 여의를 말린 뒤 성 밖으로 나와 유방에게

"완현의 성은 수십 개가 넘는데 그곳의 관리와 백성들은 항복해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내버려 둔다면 우환이 될 것이며, 싸워서 이기려면 피해가 크고 시간을 낭비하다가 공께서도 관중왕의 약속을 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항복을 받아준다면 다른 성들 또한 앞다투어 당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유방이 이에 응하며 서쪽으로 향하니 과연 성주들이 앞다투어 항복했다. 개중에는 왕릉(王陵)도 있었다.[44] 유방의 세력은 이 무렵에는 무시못할 정도로 강력해져서 그는 파양호 근처에서 할거하는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별장 매현(梅鋗)과 함께 석현(析縣)과 역현(酈縣)을 함락시켰다. 이때는 장한이 은허에서 항우에게 항복을 했고, 유방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이때 유방은 뜻밖의 인물과 접선을 취한다. 바로 그 악명이 자자한 간신 조고가 유방과 접촉한 것이다.[45] <진시황 본기>에서는 유방이 조고에게 사사로이 항복을 권유했는데, 이게 호해에게 적발되어 겁을 집어먹은 조고가 호해를 망이궁에서 포위해 시해했지만 유방이 시치미를 떼면서 조고와의 관계를 끊었고, <고조 본기>에선 조고가 이미 호해를 죽이고 유방에게 항복을 청했는데 유방이 이것을 속임수라고 여기고 그대로 진군했다고 한다. 아마도 조합해보면 유방, 혹은 장량이 그간 생긴 항복에 관대한 이미지를 이용해 조고를 꼬드겼고, 이에 낚인 조고가 호해를 죽여서 스스로 뒷배를 없애자 악명만 가져올 조고와의 관계를 끊으며 모르쇠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조고를 무시하고 진군한 유방은 무관(武關)을 돌파한 후 남전(藍田)에서 진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이어서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07년 10월. 마침내 유방의 병사들은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천하의 그 어떤 제후들보다 가장 먼저 함양 근방에 도달한 것이다.


2.6. 홍문연(鴻門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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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함양은 이세황제까지 시해하고 국정을 농단하던 환관 조고를 황족 영자영(子嬰)이 처단한 후였다. 하지만 자영이 세기의 기재도 아니었을뿐더러 여태까지 조고에게 아첨하며 겨우 살아남은 신하들에게 진 황실을 위해 목숨바쳐 싸울 충성심이 있을 리도 없었다. 장량의 책략 등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난 끝에 단 45일의 저항을 끝으로 단념한 진왕 자영[46]은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목에는 밧줄을 메고서, 황제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봉해 가지고 나와 지도(軹道)[47]정으로 나와 유방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멸망했다. 유방의 휘하 장수들 중에 자영을 처형하여 진시황의 폭정에 대한 울분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방은 딱 잘라서 거부했다.

"앞서 회왕께서 나를 관중으로 보낸 것은 원래 내가 관대하고 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또한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인다면 앞일이 상서롭지 않을 것이오."


이에 자영은 관리에게 맡기고, 본인은 풍류남아답게 호화로운 진 황실의 금은보화와 궁녀들을 취해서 신나게 놀려고 하였다. 하지만 번쾌(樊噲)와 장량의 설득으로 결국 그만두고, 진나라의 보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으며 군대는 패상으로 철수시켜 함양 백성들이 폭행이나 약탈을 당하지 않게끔 배려하였다. 그리고 여러 현의 호걸들과 노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시는 나이든 어른들께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이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멸족을 당해왔고, 서로 모여 말을 나눈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여 거리에 내던져졌습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제후들은 나와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된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대로 나는 마땅히 이곳의 왕이 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여러분들과 살인범은 사형, 폭행범은 태형, 절도범은 징역.이라는 내용의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합니다.[48]

나머지 진나라의 모든 법은 폐지하겠습니다.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예전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부로들을 위해 나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대로 당신들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내가 휘하의 군사들을 패상으로 물리쳐 주둔하는 이유는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려 그들과 함께 규약을 제정하기 위함에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각 현(縣), 진(鎭), 향(鄕), 촌(村) 등에 이 소식을 전하니 진나라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을 잡고 을 가져와 대접하려고 했지만, 유방은 이미 가진 음식이 많으니 필요가 없다면서 모두 사양하였다. 모든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기뻐하였고, 그저 유방이 진나라 왕이 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지금 항우가 진격하고 있는데, 서둘러 함곡관을 막아 관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책에 솔깃해진 유방은 이대로 행했지만, 이는 항우의 어그로만 잔뜩 끌게 하는 행위였다. 11월 무렵, 항우는 유방이 함곡관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분노해 경포(黥布) 등을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게 했다.[49]

이렇게 되자, 유방의 부하였던 조무상은 '이럴 바에야 항우에게 항복해서 녹봉이나 받자.' 는 생각으로 "유방이 관중에서 왕 노릇 할 생각으로 금은보화를 챙기고 있습니다." 라고 모함을 했고,[50][51] 범증(范增) 역시 지금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권하자 항우는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다음 날 아침 유방을 박살내버릴 생각을 하였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을 살펴보면 유방이 10만명의 군사를 20만명이라고 부풀린 형국이었고, 항우는 40만명의 병사를 100만명이라고 부풀린 상황이었다. 전력으로는 전혀 상대도 되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항백(項伯)은 친분이 있던 장량을 살리고 싶어 몰래 진영을 빠져나와 장량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52]

이에 장량은 "나 혼자 도망치면 의(義)가 아니다." 라면서, 유방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방은 경악했으며, 열이 뻗친 장량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함곡관을 막은 겁니까?"고 화를 내자 유방은 민망해서 "내가 간신배한테 속았소."라고 변명했지만 장량은 "그럼 공께서 항우를 이길 것 같았단 말입니까?" 는 장량의 물음에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물었다. 이에 장량은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했고, 둘의 자식들이 혼인하도록 약속을 한 뒤 항백을 돌려보냈다.

환대를 받고 돌아온 항백은 "아, 패공은 자네에게 개기려고 그런게 아니라, 도적들 막으려고 함곡관을 잠근 것뿐이야. 개길 생각은 전혀 없던걸?" 이라고 변명을 해주었고, 유방은 홍문에서 항우를 만나 사죄했다. 그러나 범증은 이 자리에서 유방을 죽여버릴 심산이었으나,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방은 돌아오자마자 조무상을 죽였다.[53]

이후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영성 조씨 황족을 포함해 대학살을 단행하고 함양궁과 여산릉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3. 초한대전[편집]



3.1. 한왕 즉위와 반격준비[편집]


천하의 지배자가 된 서초패왕 항우는 각지의 제후왕을 분봉했는데, 가장 위협이 되는 유방은 파·촉(巴蜀)의 벽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관중은 6국을 제외하고 통일 이전의 진나라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으므로, 파·촉의 왕이 되는 것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관중의 왕'이라는 선언을 지키는 선에 들어가기는 했다. [54]

파·촉 지역은 절벽수준의 높은 산맥으로 가로막혀서 잔도가 없으면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감옥같은 지형인 데다 당시에는 아예 개발도 안 되어 있어서[55] 사람이 사는 마을도 통행할 길도 없는 그야말로 야만의 오지로 당시에는 정치범들을 유배보내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56] 이건 그냥 갇혀서 늙어 죽을 때까지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것이었다. 한반도로 치면 서울을 접수하면 서울과 경기도 지부장 자리를 준다는 약속을 배도 없이 연평도나 백령도에 비할 곳을 던져주고 약속은 지켰다는 식의 태도는 당연히 돌아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더 열받는 사실은 함양에서 바로 촉으로 들어가게 되어 고향 땅인 풍·패는 커녕 가족 얼굴조차 못보고 들어가야 했다. 때문에 유방 뿐만이 아니라 주발(周勃), 관영(灌嬰), 번쾌 등 부하장수에 병사들도 대부분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려야 했으니[57] 크게 분노했다. 유방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항우랑 싸워볼까?" 라는 생각까지 품었고 분노한 장수들도 동의했지만, 소하는 "이렇게 되긴 했어도 죽는 것보단 낫다"고 설득했다. 네가 먼저 죽어볼 테냐고 소하에게 화를 내던 유방이었지만, 소하가 "지금 감정에 휩쓸려 항우와 싸운다면 개죽음이나 다름없지만 뒷날을 기약하며 인내한다면 분명 기회가 올 것입니다."라고 달래자 결국 그 의견에 동의하고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58]

유방 입장에서 더 열받는 일은, 본래 유방의 군단은 10만명에 육박했는데 항우는 그중 30,000명만 유방을 따를 수 있게 하였다.()[59] 이래서 차라리 한 판 뜰까 했던 것. 그 정도로 항우는 아직 유방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량은 잔도(棧道)를 불태우라고 충고해서 항우의 의심을 덜게 하였다.[60]

그러나 유방을 따라 한중 지역으로 들어가는 대다수의 병사와 장수들은 중국 동쪽 사수군 패현 출신으로서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데다 이런 밀림 구석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까 두려워하며 그 길이 너무나도 험하여[61] 도망치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러제꼈다. 유방으로서는 괴로운 나날이었는데, 어느 날 소하마저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어이쿠, 이제 난 망했구나!" 했지만 소하는 달아난 게 아니었다. 유방은 돌아온 소하를 보자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론 화가 나서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도망갔던 것인가?"

소하가 답했다. "신은 감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도망친 자를 쫓았을 뿐입니다."

유방이 물었다. "그대가 뒤쫓아 갔던 사람이 누구인가?"

다시 소하가 답했다. "치속도위 한신을 뒤쫓았습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꾸짖으며 말했다. "내가 관중에서 남정으로 오기까지 그렇게 많은 장졸들이 도망쳤는데 여지껏 한 명도 뒤쫓지 않다가 어찌하여 한신만을 뒤쫓아 갔다는 말인가? 한신을 쫓아갔다는 것은 거짓이로다."


그러자 소하는 자신이 한신을 뒤쫓은 이유를 유방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다른 장수들이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한신과 같은 인물은 걸출해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왕께서 만약 한중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하시려면 한신을 쓸 바 없거니와, 만일 천하를 취하고자 하신다면 한신 말고는 그 일을 상의할 인물이 없습니다. 다만 왕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 이때 소하의 설명 중 '至如信者 國士無雙'[62]으로부터 나온 말이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고사성어를 만들어냈다. 즉, 한신이 없으면 우린 여기 박혀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은[63] 유방은 한신과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었고, 몇 달 동안 세력을 정비해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3.2. 3진 평정과 팽성대전[편집]


마침내 기원전 206년 8월 파·촉에 들어간 지 겨우 4개월 만에 한왕 유방과 한나라 군대가 관중의 3진 가운데 장한의 옹나라를 공격했다.[64] 당시 한군은 파·촉에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린 상황이었고, 때문에 항우와 3진의 왕들은 유방이 다시 공격할 때까지 적어도 몇년의 시간은 벌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방의 군대는 수창정후 조연이 제보한 우회로를 통해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다(이때의 우회 기동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암도진창 항목 참조).

이때 《초한지》의 표현이나 파·촉이라는 위치 때문에 마치 유방이 삼국시대의 유비처럼 파·촉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서 최소 1년 이상 물자와 병력을 모으며 장기적으로 초한전쟁을 준비했다고 여길 수 있는데, 실제로는 아니다. 1년도 안 돼서 뛰쳐나올 거면서 소하를 죽이니 마니 하면서 쌩난리를 피운 거야? 물론 이후 초한전쟁 때 파·촉 지역이 구 진나라 본토인 관중 지역과 함께 유방의 기반이 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3진 평정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유방은 유비처럼 파·촉 중심지까지 들어가지도 않았고, 한중의 남정에만 머물렀다. 나라 이름도 한(漢)이고, 수도도 한중군 남정현인 등 어디까지나 중심 거점은 한중이었지 파·촉이 아니었다. 머물렀던 기간도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항우가 유방을 비롯해 제후들을 분봉해서 유방이 파·촉으로 떠난 게 기원전 206년 2월 무렵이고, 이후 유방이 장한을 비롯한 3진을 공격한 것이 같은 해 8월이었다. 유방이 관중에서 남정까지 이동한 시간 등을 제외하면 유방이 전쟁을 준비한 시간은 길어야 4~5개월 남짓이었고, 여기에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이 유방이 남정에 도착한 뒤 시간이 지나서라는 걸 감안하면 그 기간은 더욱 짧아진다. 한신은 유방 세력에 들어온 지 한 달 남짓 만에 대장군에 임명된 것으로 한신이 얼마나 파격적인 인사였는지 알 수 있다. 즉 유방은 남정에 도착하자마자 깃발만 꽂고, 한신이 대장군이 되자마자 몇 달 준비하고 바로 3진을 공격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짧은 준비 기간은 사실 3진왕 쪽에 더 악조건이었다. 그나마 30,000명이나마 받고 가는 유방과는 달리, 3진은 항우의 신안대학살로 인해 휘하 병력 0명에서부터 새로 시작한 처지였다. 항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옛 진의 관중 수비군을 넘겨받았겠지만 3진왕의 지휘를 받아본 적도 없고 실전경험도 없으니 그들에게는 사실상 새로 뽑은 군대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이미 관중 평정 당시 항우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행적으로 인해 관중과 파·촉의 민심을 확보한 유방과는 달리 이들은 관중의 민심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항우에 의해 초토화된 관중에서 당장 어떤 생산력을 기대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 기원전 206년 그해의 관중에는 대기근이 돌아서 오히려 파·촉 땅이 관중을 먹여살릴 지경이었고, 징병할 장정도 모자라서 청소년과 노인들까지 병사로 만들어야 했다. 관중이 생산력을 회복해서 유방에게 제 기능을 해준 것은 유방이 3진을 점령해서 파·촉과 연계를 이룬 뒤의 일이었다[65].

장한은 여러 차례 한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겨우 4개월 만에 군대를 복구할 수는 없었다. 유방의 한군은 장한을 연달아 격파했고, 장한은 폐구(廢丘)에서 포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으며, 이후 한군은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에게 항복을 받아내, 곧 관중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제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장량은 '유방은 관중 땅만 가지고 싶을 뿐'이라는 거짓말로 항우를 속였고, 이에 속은 항우는 제나라를 먼저 처리하고자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관중 주변의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한왕(韓王) 정창(鄭昌) 등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간단하게 제압한 후 봄이 되자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진군한 유방은 가로막는 항타와 용저 등을 간단하게 물리치고 위왕(魏王) 위표, 은왕(殷王) 사마앙도 항복시키게 된다. 진여의 기습으로 떠도는 신세가 된 조왕 장이가 유방의 세를 보고 몸을 의탁했고, 또한 사마앙이 유방에게 항복한 일로 인해 도망쳐온 진평(陳平)을 위무지의 천거로 수하로 삼았다. 주발과 관영 등은 들리는 풍문이 좋지 않은 데다 항우를 섬기다가 온 인물이 총애를 받고 자신을 감독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나, 유방은 오히려 진평을 더욱 아꼈다.

당시 항우는 제나라에서 전영(田榮)과 교전을 치른 후 완전히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던 판이라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마음껏 세력을 키우고 제후들을 끌어들인 유방은 죽은 의제(義帝)를 위해 3일장을 치른 후, 제후군을 집결시켜 56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모아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으로 진격했다. 항우가 없는 팽성은 당연히 이런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유방은 손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단 30,000명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밟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심지어 과장을 고려해 한군의 전력을 10분의 1로 줄여도 초나라군의 숫자 열세는 변함이 없다. 제후 연합군은 숫적으로 압도했지만 여러 제후들의 군대가 모여 통일된 체계가 아니었고, 그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모랄빵을 먹자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 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66]

워낙 엄청난 패배라 유방 본인도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겪었지만, 한 번은 모래 폭풍 때문에 목숨을 구했고, 다른 한 번은 정공(丁公)을 설득해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패현(沛縣)에서 가족들을 챙기려고 했는데,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기 위해 패현에 사람을 보냈고 가족들도 난리를 피해 도망친 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달아나는데, 도중에 유방의 아들인 유영과 장녀인 노원공주가 길거리에 버려져있는 것을 보고 이들을 자기가 타고 있는 수레에 태웠다.

그런데 저 멀리서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하고 지친 유방은 수레의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자기 아이들을 수레 밖으로 던져 버렸다.[67] 그러자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夏侯嬰)은 수레를 멈추고 아이들을 다시 태운 뒤에야 수레를 몰았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아이들을 목에 매달고 일부러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진정하고 난 후에야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헌데 이러고도 유방은 이 짓거리를 세 차례나 했고, 그럴 때마다 하후영 역시 아이들을 계속 수습하길 반복했다. 그러자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친 유방은 열 번이나 하후영을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68] 하후영도 기어이 화가 치밀었는지, 참다 못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하찮은 짐승도 제 새끼 귀한 줄은 아는 법인데, 폐하께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아버지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아니면 하후영에게 겁을 먹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유방은 아이들을 던지려 드는 것을 그만두었고, 이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유방과 두 아이들은 간신히 초군의 추격을 피하여 무사히 풍읍(豊邑)으로 올 수 있었다. 즉 수레를 세 번이나 멈춘 것으로 모자라 주군이라는 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찌르려 하는데도 하후영은 끝내 잡히지 않고 탈출했다는 것이다. 베스트 드라이버 그 후 유방은 고마워서인지 미안해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하후영에게 기양(祁陽) 땅을 식읍으로 준다.[69]

그러나 유방과 두 자식과는 달리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과 아내 여치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가 이들을 호위하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초군을 먼저 만나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고 초군은 태공과 여후를 항우에게 바쳤다.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두며 데리고 다녔다.

이렇게 팽성 전투에서 엄청난 패배를 겪었지만, 유방은 소하의 보급 등을 바탕으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초군을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격파한(경색 전투) 유방은 형양(滎陽)을 중심으로 항우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3.3. 형양 함락과 성고 함락[편집]


팽성 대전에서의 참혹한 패배 이후, 매제인 주여후 여택[70]의 군사와 합류하고 하읍에 도착한 유방은 난리판 와중에 무사히 도망친 장량과 재회하자 말에 기댄 채로 물었다.

"내가 함곡관 동쪽의 땅[71]

을 떼어서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오. 누가 능히 나와 함께 통일천하를 건립하여 대공을 세울 수 있겠소?"


자식까지 던지던 양반이,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서 고작 며칠 사이에 태연하게 항우를 이길 생각을 내비친 것. 이에 장량은 '한신, 팽월, 경포가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방은 부하인 수하(隨何)를 통해서 영포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영포가 다음 달인 5월에 반기를 들어 반년 가량 구강 땅에서 초나라 군대를 붙들고 있는 사이 경색 전투에서 관영의 활약으로 초나라 추격대를 쫒아내고 후방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간 유방은 사방으로 군사력을 투사하며 조참과 한신을 시켜 도망친 위표를 물리치게 하고, 근흡, 번쾌로 하여금 왕무와 정처, 장한을 제거하여 배신자 중 상당수를 분쇄했다. 이후 한신에게 하북으로 진군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하게 지시한 뒤 자신은 형양에서 항우를 상대했다.[72] 팽성 대전 당시의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셔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고 한군은 반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73]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게 되자 한계에 봉착했고 기원전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 때문에 심하게 우려스러워하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범증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항우는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한편, 위나라에서 등용되었던 진평은 다시 한나라 쪽에 합류했지만 여전히 불만을 품은 여러 장수들이 진평이 형수간통을 한 색마이며[74], 뇌물만 받아먹는 데다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작자라고 욕을 퍼붓자 유방 또한 찜찜해졌는지 위무지와 진평을 불러 뇌물 수수 혐의와 간통 의혹을 지적하고, '네가 벌써 주인을 몇번이나 갈아치웠는데, 너한테 충성심이란 게 있긴 하냐?'라고 질책하자 둘은 헛된 명예를 쫓으려거든 행실을 따져서 진평을 쫓아내고, 천하를 얻으려거든 그 능력을 보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유방은 즉시 진평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호군 중위의 벼슬에 임명했다. 유방의 신뢰를 되찾은 이 위기 상황에서 하나의 계책을 내놓았는데, 이간책을 사용해 항우와 휘하 제장들과의 사이를 악화시켜 서로 죽이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우선 유방이 준 돈을 닥치는 대로 쏟아부어 '범증, 계포, 종리말, 용저는 항우를 죽 따라다니면서 세운 공이 한둘이 아닌데도 포상은 인색하니 항우에게 불만이 아주 많아서 유방과 붙어먹고 왕이 되려고 한다더라'라는 유언비어를 좍 뿌렸고, 찔리는 게 있는 항우는 이 네 사람이 정말 그럴까하고 불안해하며 은근히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우의 사자가 한군의 진영에 오자, 진평은 일부러 으리으리하게 상을 차려놨다가 정작 사자를 만나자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는()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준 것이다.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범증은 곧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어도 당장 형양성을 에워싼 포위망이 어디로 사라질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유방에게 속았다는 분노로 공격이 더 거세어지고, 식량이 부족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장군이었던 기신(紀信)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계책을 내놓았는데 유방과 닮은 자신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하여 거짓으로 항복한 후 초나라의 군사들이 몰려 포위가 느슨해지는 틈을 타 반대편 성문으로 빠져나가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진평이 2,000여명의 여자들을 무장시켜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는 계책을 냈다.[75] 그리하여 밤중에 기신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한 채 2,000여 명의 무장한 여자들과 함께 형양성의 동문으로 나가 초군에게 항복했다. 초군은 진짜 유방이 항복한 줄 알고 기뻐하며 방심한 사이 진짜 유방은 수십 기와 함께 서문으로 탈출했고, 속임수에 당한 것을 깨달은 항우는 분노하며 기신에게 유방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지만 기신은 항우에게 "우리 대왕은 진작에 달아나셨다. 이 멍청아!" 라고 답했고 대노한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원래 욕을 잘하고 말이 거칠었던 이런 부분까지 유방을 닮을 것까지야 기신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항우를 향해 욕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유방은 탈출하여 우선 관중으로 들어가 세력을 다시 추스린 후 항우와 재결전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원생(袁生)이라는 인물이 유방에게 충고를 했다.

"한과 초 두 나라는 형양성을 사이에 두고 몇 해를 대치해 왔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에 몰렸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무관(武關)으로 나가시면 항우는 필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왕께서는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올려 지키신다면 형양과 성고 일대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한신 등에게 명하여 하북의 조(趙), 그리고 연(燕)과 제(齊)를 평정하도록 하게 하십시오. 그때 형양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초군은 우리의 양동작전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며 그 전력은 분산되어 그 틈에 한나라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번 겨룬다면 틀림없이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방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형양에 대한 압박을 풀고, 그 사이에 한신은 북방을 평정하게 하자는 것. 이에 따라 유방은 완성(宛城)과 섭(葉)에서 경포와 주둔하며 항우의 주의를 끌었다. 항우는 이에 유방과 결전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유방은 도전에 응하지 않았고, 그 사이 팽월은 뒤치기를 시전해 항성(項聲) 및 설공(薛公) 등의 장수를 격파해서 항우를 성가시게 했다. 항우의 주의가 팽월에 쏠리는 사이 유방은 성고에 입성했다.

그런데 항우는 순식간에 팽월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다시 형양으로 나아가 주가(周苛)와 종공을 모두 죽이고 한왕 신은 사로잡았으며, 성고를 포위했다. 성고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이자 유방은 성고를 방어하는 척 하면서[76] 하후영과 함께 둘만 간신히 빠져나와 한신의 군단으로 향했다.

정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뒤 왠지 찜찜한 행보를 보이던 한신은[77] 장이와 함께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일부러 잠시 눈을 붙여 새벽에 한신의 군영으로 찾아가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온 유방은 한신의 침소로 침입해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 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놓으며 한신의 주변을 조참, 관영, 주설, 부관 등 자신의 최측근으로 갈아치웠다. 이때 한신은 잠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한신의 군대의 지휘권을 회수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은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보통 역사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고, 역으로 군주가 군사력이 전무하다면, 결국 그 장수의 파워에 휘둘리다가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인데, 이때 유방은 식은 죽 먹듯 순식간에 한신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가져왔고, 잠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 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이상할 정도로 유방에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78]


3.4. 광무 대치[편집]


이후 유방은 장이에게 조나라에서 병사를 모아 한신의 군사를 보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동시에 한신과 찢어놓고[79][80] 한신을 한나라의 좌승상에서 조나라의 상국으로 강등시켜버린 뒤 조참, 부관, 주설, 관영 등을 북쪽 방면으로 이동시켜 각각 군사를 맡으며 한신에게 '협조'하여 제나라를 평정하게 했고, 본인은 새롭게 충원한 군단을 거느리고 항우와 교전하기 위해 나섰다. 낭중(郎中) 정충(鄭忠)은 "항우와 싸워봐야 이길 수가 없으니, 보루를 높이하고, 참호를 깊이 파서 굳게 지키기만 하자." 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유방은 그 대신 노관과 유가(劉賈)에게 기병 500, 보병 20,000명을 주어 백마진을 통한 우회기동으로 초나라 후방으로 침투시켜 그곳에 있는 팽월과 합류하게 했다. 원군까지 받자 기세등등해진 팽월은 작정하고 초나라 수비군에 싸움을 걸며 무려 성 17개를 함락시켜버린다. 한번 항우가 회군했을 때의 상황이 더 심하게 반복된 것.

항우의 가장 큰 문제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유방과 결전을 벌이고 싶어도 팽월 때문에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방과 팽월은 기각지세를 이루어 협공을 취했는데, 항우는 팽월을 막기 위해서 군사를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다.[81] 유방이 기존 대전략대로 방어선을 재구축하려고 할 때 역이기는 하늘(백성)위의 하늘(곡식)을 손에 넣어야만 왕업을 이룰 수 있다. 이 틈에 성고와 형양을 수복하고 오창의 곡창지대를 다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유방은 항우가 팽월을 공격하려고 간 틈을 타 성고에 주둔중이던 대사마 조구를 죽여버리고 성고를 다시 수복했으며, 곧 형양으로 돌진해 동문으로 도망친 종리말을 포위했다가 항우가 돌아오자 광무(廣武)[82]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83]

그리고 아직 한신의 군단이 제나라로 진입하기 이전, 역이기는 자신이 나서면 싸움 한번 없이 제나라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에 유방은 역이기를 제나라로 보냈는데, 과연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제나라를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괴철(蒯徹)의 꼬드김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침공함으로서, 역이기는 삶겨서 죽게 되었고, 한나라는 손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던 제나라에 항우가 죽은 후로도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신은 항우가 파견한 용저의 구원군을 유수 전투에서 격파하긴 했으나 제나라의 혼란을 구실로 "나를 가왕으로 삼아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라는 말만을 전했고, 유방은 분통이 터졌지만 장량과 진평의 만류로 한신을 아예 제왕으로 임명했다. 다만 역시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팽월을 쫓아낸 항우는 다시 돌아와 수개월 동안 광무에서 주둔했지만, 산 위에 틀어박힌 유방을 어쩌기엔 초군이 이미 심각하게 피폐해진데다 또다시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팽월 때문에 항우는 대단히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항우는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올려 놓은 후, "항복하지 않으면 삶아서 죽이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상당히 막무가내식의 작전인데, 당시 항우가 얼마나 초조해져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유방은 이런 충격과 공포급 제안에 "우리가 천자 앞에서 의형제가 되었으니 내 아버님이 곧 네 아버님이니라. 그러니 네가 네 애비를 삶아 만든 국물이라면 나와도 같이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응수, 항우는 격분하여 정말 태공을 죽이려고 하다가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84] 사실 극단적인 발언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과 아버지 모두 살 수 있는 노림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유방이 항복한다고 항우가 유방의 가족을 살려줄거라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린다면 부하들이 실망해 들고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항우가 아무리 사람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인물이라지만 항우의 부하들까지 모두 항우 같은 사람은 아니니 유태공을 진짜로 죽이면 항우에게 실망해 이반하는 장졸들이 진작에 생겨났을 거다.(물론 이미 항우에게 실망해 유방에게 전향한 항우의 부하들이 있었지만 그게 더욱 크게 가속화된다는 의미다.) 물론 자기 주군의 부친을 공개적으로 끔살시킨 항우를 본 유방의 장졸들은 더욱 단결하여 악착같이 싸울 테고.

하지만 항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천하가 혼란한건 우리 둘 때문인데, 차라리 우리가 맞짱 한번 떠서 이 싸움을 끝내자."되도않는 제안을 했다. 물론 항우와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던 유방은 "난 힘이 아니라 지혜로서 싸우려고 한다" 고 거절했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일기토를 신청하며 도발하도록 시켰는데 이러는 게 세 번이 넘어가자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이 나서서 하라는 일기토는 안 하고 다짜고짜 초나라의 장수를 쏘아 죽였다[85].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완전 무장을 하고 누번에게 달려들었고, 누번은 항우에게 활을 쏘려고 하다가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소리에 식겁하고 그대로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유방은 튀어나온 장수가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86]

항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가 유방에게 말을 걸었고, 유방 역시 항우와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방은 항우가 지금까지 저지른 10가지의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비난했다.

"하나, 팽성에서의 약속을 위반했다. 당초에 초 회왕과 제후들이 먼저 관중에 입성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스스로의 욕심으로 이러한 제후들과 회왕의 맹약을 묵살하고 최초로 관중에 진입한 자신을 협박하여 파·촉으로 쫓아버렸다."

"둘, 주군인 초 회왕이 직접 임명한 송의를 왕명을 사칭하여 살해함으로서 상전에 칼을 들이밀었고 초 회왕과 그의 군신들의 위엄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이 이를 갈게 만들었다."

"셋, 초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살로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고 아방궁을 불살라 파괴만을 일삼으며 시황의 능묘를 파헤쳐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고 죽은 자마저 모독했다."

"넷, 대의에 따라 명을 받고 조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마땅히 그 결과를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제후들을 협박해 관내로 들어갔다."

"다섯, 진왕 자영이 이미 투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멋대로 죽여버렸다."

"여섯, 투항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 경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유례없는 대학살을 벌이고 그들의 장수인 장한과 사마흔을 보란듯이 왕에 봉하니 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자아내게 했다."

"일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사로이 좋은 땅을 주고 왕에 봉하며, 공이 있음에도 아랫사람들을 농락하며 유배지를 주었다. 원래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버리고 그들의 장수들은 중요한 땅의 왕으로 삼아버리니 군신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지역의 신하들이 앞 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덟, 진의 도읍을 불태운 후 자신의 마음대로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에 초 회왕을 의제로 지칭하며 끌고와 감금하였다. 한왕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와 초나라 땅을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아홉, 의로서 우리 모두가 초 회왕을 섬기기로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성품으로 결국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해버리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다."

"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를 함에 공정함이 없고, 약속을 초개처럼 버렸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리니 이야말로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모두 틀린 게 아니었으니 팩트 폭력 항우는 본전도 못 찾고 악명만 잔뜩 높이는 꼴이 되었지만, 유방은 이걸로도 속이 덜 풀렸는지 여기서 또 추가타를 날린다.

"나는 정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제후들과 함께 도적놈을 토벌하려는 것뿐이니, 너같은 작자는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죄를 지어 군역을 하는 천한 자들만 보내도 충분하다!"


결국 항우는 격분하여 미리 숨겨놓은 쇠뇌를 쏘아 유방을 맞혀버렸다. 하지만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또다시 한술 더 떠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히네!" 라고 하며 달아났다. 물론 정통으로 가슴에 화살, 그것도 쇠뇌를 맞은 유방은 상태가 몹시 위중했으나 한군의 사기를 걱정해서 멀쩡한 척을 한 것이다. 장량은 유방을 억지로 일으켜서 군사들을 돌보게 했고, 덕분에 사기가 떨어져서 함락당하는 상황은 피했지만 상처가 더 도진 유방은 몰래 성고로 실려간 다음 다시 관중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87]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괴상한 제안과 기습은, 역으로 당시 항우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88]전황은 이제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었다.


3.5. 해하의 결전[편집]


한신은 북방의 패자가 되었고, 팽월은 징그러울 정도로 초나라의 후방을 만지작만지작 후벼파며 보급을 말아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앞에는 유방이 있고 경포마저도 유방의 편이 되었기에, 항우는 싸움 한번 져본 적도 없으면서 패전 직전에 놓이는 괴이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보급 때문에 항우는 전진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팽월을 물리치러 갈 수도 없었다. 항우가 주력을 이끌고 팽월을 물리치러 갈 때마다 유방이 초나라 군을 박살내고 기껏 빼앗은 성을 탈환하기 일쑤였기에 자리를 비우기도 곤란했지만, 그렇다고 팽월을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항우로서는 승리는 고사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에 항우와 유방은 협상을 해서 홍구(鴻溝)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자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항우는 한왕의 부모와 처자를 한나라에 보내주었다. 한나라 진영의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으며, 항우의 군사들은 초나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협악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진평이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 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는 데 이른다. 그런데 함께 항우를 치기로 한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약속한 장소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항우가 자기들끼리만 멀뚱하니 있는(...) 한군을 공격하여 고릉(固陵)[89]에서 그런 유방의 군대를 무찔렀다.

허겁지겁 돌아가서 다시 참호를 파고 버티기에 들어간 유방은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넓혀주기로 약속하고[90],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했으며,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 영포)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팽성을 함락시킨 뒤 곧바로 유방쪽으로 내달려서 진성을 친 관영과의 합공으로 항우가 물러나자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써,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 모두 집결했다. 기원전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결국 이 최후의 해하 전투에서 유방은 승리했고, 항우는 몰락하여 오강에서 자결했다. 초나라군은 10만의 군대 중 8만 명이 목 없는 귀신이 되었으며,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현(魯縣) 지방도 항우의 목을 보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91] 아직 항우가 세운 18명의 제후왕 중 유일하게 한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2대 임강왕(臨江王) 공환(共驩)[92]이 있었지만, 사실상 전쟁은 종결되었고, 천하의 주인은 이제 유방이 되었다.

혹여 이 시점에서 천하의 주인으로 다른 적절한 후보가 있다면 그 인물은 바로 한신이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정도(定陶)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게 된다. 유방은 한신을 제나라 왕에서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郫)에 정하게 했다. 실제로 이 때문에 한신이 군대는 잘 다루지만 머리는 나쁜 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이후 여후의 손에 처형당하는 것도 그렇고, 용병술에 비하면 처세술은 거의 0점에 가까운 건 사실이지만 꼭 머리가 나쁘다기보다는 괴철과 무섭이 한신을 설득할 때에도 한신이 은원을 내세우고[93] 군신간의 의리를 드는 것으로 보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 특히 은혜를 베푼 윗사람의 앞에서는 순종적이고 약했던 것 같다.[94] 여후에 의해 죽을 때에도 결국 자신을 천거했던 소하가 불러들였다. 다만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또 다르다. 예를 들면 제나라 왕 시절. 그리고 한신이 원래 군대를 얻은 기반이 한고조 덕분인데, 한신의 군대가 정말 한신만의 군대라고 볼 수 있었을까? 사실 한신은 제왕과 같은 기질로 사람의 마음을 잘 얻었다고는 보기는 힘든 유형의 인물이며, 그의 군대가 한고조가 한신을 사로잡는 강수를 두었어도 그게 통했고 딱히 반발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정말 반역을 했다가는 오히려 한고조에게 충성하는 부하들에게 머리가 잘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명백한 한고조의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구원 요청을 구경이나 하거나 조건을 터무니없이 건 것일 수도 있다. 한고조가 죽으면 자동으로 그의 유산을 흡수할 기회가 생기니까.[95]


4. 제국의 황제[편집]



4.1. 나는 세 사람보다 못하지만, 세 사람을 부릴 줄은 안다[편집]


당시 한왕이었던 유방은 이후 정도(定陶)현 북쪽 범수(氾水) 북안에서 형식적인 겸양을 표시한 뒤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군국제(郡國制)의 방식으로서 이성왕(異姓王)들을 배치한 유방은 낙양(洛陽)에 수도를 정했으며[96] 적절하게 부역을 면제하고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전후 복구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승리자가 되어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남궁(南宮)에서 여러 군신들과 주연을 베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유방은 "내가 어떻게 항우를 이긴 것 같나? 계급장 떼고 편하게 이야기해 봐."라고 권했고, 이에 고기(高起)와 왕릉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오만무례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시나 항우는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폐하께서는 휘하의 장수를 부리시어 성을 함락하고 그 땅을 점령한 다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봉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그 이익을 같이 누리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그러자 유방은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경들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도다! 무릇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보다 못하다. 또한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호걸 중의 호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방은 여생을 각지의 반란 평정에 전력을 다하였다. 위에서도 말한 임강왕 공환을 노관과 유가, 또 별도로 근흡을 시켜 토벌케 하고, 연왕 장도(臧荼)의 반란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서 격파하며 친구인 노관을 새로운 연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또한 이기(利幾)의 반란도 직접 격파했다.


4.2. 태공과의 일화[편집]


유방은 황제가 되고 나서 여느 가정집의 예법처럼 5일에 한 번씩 아버지인 태공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다. 어느 날 태공의 집사장이 태공에게 이야기했다.

하늘에는 태양이 둘이 없으며, 땅위에는 두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황제께서는 비록 태공님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임금이십니다. 또한 태공께서는 비록 황제 폐하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또한 그 신하도 됩니다. 어찌 그 임금되는 사람이 그 신하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하신다면 황제께서 위엄을 세우지 못하실 것입니다.


태공은 네 말이 맞다고 하고 그 후 유방을 만났을 때 빗자루를 잡고 대문 앞에 나와 뒷걸음치며 맞이했다. 유방은 깜짝 놀라서 어가에서 내려 태공을 부축하자 태공은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천하 만백성의 임금되시는 분이라! 제가 어찌 천하의 법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유방은 원래 하던대로 문안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였다. 정확히는 태공을 황제의 아버지에 걸맞는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태공이 더이상 황제에게 허리를 굽혀서 인사하지 않을 만한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의 가장 큰 의의는 태공이 고제의 아버지이고 고제는 태공에게 효도를 다했는 데도 정작 평민이라는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모순을 해소했다는 점이다.[97] 또한 유방은 태공에게 충고를 한 집사장을 칭찬하고 금 500냥을 상으로 내렸다.


4.3. 이제야 황제가 귀한 것임을 알겠다[편집]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본래 개백정이나 도적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공신들은 규율이나 예절같은 것이 전혀 없던 판국이었고, 웬만한 공신들은 모두가 "내가 제일 공을 많이 세웠다!" 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판국이었다. <유경, 숙손통 열전>의 언급을 보면, 이 당시 공신들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군신들이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고제가 보고 매우 근심했다.

이때, 보다못한 유방은 자신이 직접 소하를 찬후(酇侯)에 봉하고, 공신들 중 최고의 대우를 하여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난리는 멈추지 않아 유방은 난감해했는데, 이 때 유학자였던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간언을 올렸다.

"무릇 유자들과는 앞으로 달려가 무엇을 빼앗아 오는 일은 못하지만 수성은 할 수 있습니다. 신에게는 노나라에서 데려온 유생들이 있습니다.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일으켜보고 싶습니다."

본래 유학자들을 보면 관을 벗겨 오줌을 눌 정도로[98] 오만불손하고 유학자를 싫어하던 유방이었지만, 이 이야기를 듣자 솔깃했다. 다만 유방의 걱정은 이게 내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어렵지 않겠느냐는 점이었다. 이에 숙손통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황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합니다. 고로 (夏殷周) 삼대(三代)의 예는 빼기도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99]

그러자 유방은 "한번 해보시오, 대신 짐이 이해할 수 있게 쉽게 만들어야 하오."라 말했다. 이 부분을 보고 천하를 통일한 사람도 어려운 예법은 싫어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유방은 시험삼아 한번 숙손통이 만든 의례를 보고 "이 정도라면 짐도 할 수 있겠다." 며 다행스러워 했다.

이렇게 만든 예법이 시행되어 그 동안 난리를 치던 공신들이 얌전해지자, 유방은 그때서야 "아, 이제야 황제가 귀한 줄 알겠다!" 며 좋아했다. 황제나 신하들이나 예법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었으니 벌어진 촌극이다.

4.4. 백등산 포위전토사구팽[편집]


이후 유방은 여전히 영향력이 강한 한신을 견제하고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초나라 왕으로 있었던 한신이 모반을 하려고 한다는 고발을 듣고, 진평의 계책을 이용해서 한신을 사로잡은 후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 한신도 같이 풀어주면서, 그를 회음후로 낮추어 버렸다. 그 후 전긍(田肯)이라는 인물의 충고를 들은 유방은 유가(劉賈)를 형왕(荊王)에 봉하여 회수 동쪽을 다스리게 하고,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에 봉하고 회수 이서의 땅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아들 유비를 제나라 왕으로 삼아 70여 성을 다스리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유씨 성을 가진 인물들을 왕으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유방은 형인 유중(劉仲)을 대나라 지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 무렵, 북방의 흉노(匈奴)는 중국이 초한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묵돌(冒頓)의 지휘 아래 절정의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유방은 한왕 신을 전방에 파견하여 흉노를 막게 했지만, 오히려 그는 묵돌에게 항복해버렸고 흉노의 편이 되어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격분한 유방은 한왕 신을 격파하기 위하여 직접 출진했고 유방의 군단에게 한왕의 부장들이 패배함에 따라 겁을 먹은 한왕 신은 흉노의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사태는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이 끼어든 데다 이들 모두 흉노의 지원을 받는지라 묘하게 커지고 말았다. 당초에 한왕 신을 무찌르기 위한 싸움에서 종래에는 갑자기 묵돌과의 대전으로 전개되었는데, 나름대로 주의깊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묵돌의 유인책에 당해버린 유방은[100] 결국 평성 부근 백등산에서 대패를 당하고 묵돌에게 싹싹 빌어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이후에도 유방은 한왕 신의 잔병들을 토벌하면서 계속 군사를 움직였는데, 기원전 198년 8월 조나라 상국 진희(秦豨)가 모반을 일으키자 유방은 이때 역시 직접 출진하여[101]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궁중에서는 여후가 진희의 모반을 이용해 음모를 꾸며 소하를 통해 한신을 끌어들인 후 장락궁에서 한신을 참살했다. 조나라의 반란을 모두 격파한 유방은 유항(劉恒)을 대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전 왕 유중은 흉노가 쳐들어오자 나라를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102]

2월에는 조세가 정확하게 정해져있지 않아 관리들이 부세 납부를 핑계로 마음대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제후왕들은 그보다 더하다면서 조정에 조공하는 건 한해에 한 번으로, 징수하는 금액은 1인당 63전으로 제한했다. 이후 여름 무렵에는 팽월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참살했고, 아들인 유회(劉恢)를 양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진희의 군대에서 잡힌 포로의 진술로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이용해서 이상한 짓을 꾸미던 것이 발각되자 노관은 자신도 팽월처럼 될까봐 겁이 나서 소환령을 거부하며 버텼다.

이 무렵 유방은 고령에다 건강도 좋지못하여 죽음이 멀지 않은 자신의 후사로 그가 총애하는 척(戚)부인의 아들인 유여의를 태자로 세우려는 문제로 여후(呂后)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엄한 적장자를 폐하고 서자를 태자로 삼는다는 하극상을 일으키는 짓이었기에, 여후는 반발했고 대부분의 공신들도 비판적이었지만 유방의 결심이 너무 확고해서 아무도 함부로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애가 탄 여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했다.[103]

하지만 여후가 장량의 조언을 바탕으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초청해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고 조정의 신하들 전원이 태자를 폐하는 것을 반대하자, 유방도 어쩔수가 없어 결국 유방의 태자 교체는 실패로 돌아간다. 유방은 방법이 없음을 느끼고는 절망하여[104] 척부인[105]을 찾아와서는 그녀에게 한탄했다.

"내가 태자를 바꾸고 싶으나, 저 네 사람이 태자를 보좌하고 있으니, 그것은 이미 태자의 날개가 자라버렸음이라!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여후는 당신의 주인이로다!"


척부인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자, 유방은 "그대는 나를 위해 초나라의 춤을 추시오. 나는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리다." 라고 말하고 노래를 불렀다.

鴻鵠高飛 一擧千里

고니새 높이 날아 한번에 천리를 가는도다

羽翮已就 橫絶四海

날개가 이미 자라,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네

橫絶四海 當可奈何

온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니, 이제는 어쩌겠는가?

雖有矰繳 尙安所施

비록 화살이 있다 해도 어찌 쏠 수 있으리오


노래를 들은 척부인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106] 유방은 그날 척부인의 처소에서 잠을 잔다. 척부인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보니 유방은 죽은 순간까지 척부인을 항상 그의 곁에 두었다.

4.5. 경포의 반란[편집]


7월 무렵에는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친구라는 이유로 왕까지 시켜준 노관까지 진희의 반란에 한몫 거들었다는 사실, 이왕이면 살리려고 했던 한신마저 살해당하는 걸 보자 자신의 사후를 예감하며 병까지 겹친 유방은 심신이 완전히 꺾여서 잠시나마 의욕을 잃어버렸다. 팽월까지 주살한 후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는데, 경포는 '황상은 늙어서 싸움을 싫어하니 반드시 올 수 없을 것이다. 여러 장수들을 보내겠지만, 그 여러 장수들 가운데 오직 회음후와 팽월만이 걱정거리였는데, 이제 모두 이미 죽었으니, 나머지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장담했고 실제로 이때의 유방은 진희 때 주설이 울면서 매달려도 친정을 감행하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올 정도로 쇠약해졌다. 유방은 처음엔 혜제가 되는 황태자 유영에게 사령관을 맡길 생각이었으나, 유영의 안위를 우려한 상산사호가 유영의 능력만 따져도 힘든 일이며, 어리고 억세지 못한 유영을 거친 장수들이 잘 따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후를 통해서 유방에게 간했다.[107]

처음에 유영을 총사령관으로 세우라고 하는 건 여후가 나서서 반대하며 번복시켰고, 신하들도 태자에게 군사를 맡기는 것은 무리라며 반대하여 결국 이 계획도 실패한다. 그 다음에는 방 안에 틀어박혀서 관영이건 주발이건 아무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10여 일이 지나자, 번쾌가 궁중의 작은 문을 열어젖히고 곧바로 들어갔고 대신들이 뒤를 따랐다. 번쾌는 신하들과 함게 무릎을 꾾고 유방에게 제발 정사를 돌봐달라고 울면서 간청했다. 환관의 무릎베개를 받으며 누워있던 유방은 허허 웃으면서 그제서야 몸을 일으킨다. 그러는 사이에 유가(劉賈)와 형나라 수비군은 영포에게 탈탈 털렸고, 초나라 군세는 어설프게 기각지세 전법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쪼개진 군사를 경포가 통으로 흡수하는 바람에 대승을 거두고 세력까지 불린 반란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

드디어 서쪽으로 나아가 유방의 군대와 기(蘄)의 서쪽 회추(會甀)에서 만났다. 영포의 군대는 매우 정예군이었다. 유방이 용성(庸城)에 성벽을 쌓고 경포의 군대를 바라보니 진을 친 것이 항우의 군대와 같았다. 유방은 그가 미워졌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경포는 유방을 향해 그 유명한 "황제가 되고 싶었다!"를 선언한다.

이미 크게 이겨서 사기가 드높았으며 현지를 장악하였고, 사령관 또한 용맹과 용병으로 알아주던 경포의 반란군. 덤으로 병사 또한 힘좋기로 유명했던 초나라 사람들. 한편 수비군이 대패한 후에 도착한데다 원정을 나왔고. 군사는 비교적 약졸인데다, 결정적으로 총사령관이 당초에 병들어 상태가 좋지 않았던 유방. 경포가 당당했던 것도 이해할 만큼 상황이 좋았다. 그러나...영포 쪽이 유방에게 박살이 났다. 유방은 노여워하며 경포를 꾸짖고, 직접 무장을 한채 최전선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크게 싸움을 벌였다. 당연히 장수들이 경악하며 만류했지만 유방은 듣지 않았다. 황제가 최전선에서 직접 싸운만큼 관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 경포의 군사가 패해 달아나 회하를 건넜고, 여러 번 멈추어 싸웠으나 불리해지자 경포는 부하 100여 명과 함께 강남(江南)으로 달아났다. 경포는 도망가다가 처남인 오신에게 붙잡혀 처형당하면서 반란은 진압된다.

유방의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와 당시 제나라 상국을 지내는 조참이 제나라에서 12만 군대를 이끌고 와서 경포의 난에서 공적을 세웠다 하니 이들의 도움도 있었다. 경포를 토벌하고 아들인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임명하여 일단의 정리를 끝냈는데, 문제는 유방이 아파서 마차에 있기는 커녕 장수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최전방에서 날뛰었던 이 전투에서 유시流矢(눈 먼 화살)에 맞아버린 것이다. 화살은 수술로 제거했지만 이로 인해 유방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유방은 치료해야 된다는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며 현지에서 치료를 하지 않고 수도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4.6. 대풍가(大風歌)[편집]


유방은 부상을 입어 귀환하는 와중에 고향인 패현을 들렀다. 이때 고향 사람들이 유방을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유태공의 친구들인 노인들과 여러 집안의 자제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과 신명나게 먹고 놀면서 즐겼는데, 유방은 패현의 어린이 120명에게 직접 노래를 가르치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서 흥이 오르자 축(筑)을 타면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

大風起兮雲飛揚

큰 바람(大風) 일어 구름이 날아오르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천하(海內 : 해내=천하)에 위세를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거늘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디서 용맹한 선비(猛士)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꼬?


유방은 이 노래를 아이들이 따라 부르게 했는데,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자 흥이 나서 한참을 일어나서 직접 춤을 추다가 문득 강개(慷慨)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유방은 패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는 고향 생각이 나면 슬퍼하는 법인즉, 내 비록 관중에 도읍하고 있지만 만년 뒤에라도 나의 혼백은 여전히 패현을 좋아하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패공일 적부터 포악한 반역자들을 정벌해 마침내 천하를 얻게 되었는데, 패현을 내 사유지로 삼아 이 곳 백성들에게 대대로 납세와 부역을 면제시킬 것입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황제를 칭송했고, 패현의 어른들과 형제들, 부녀들, 옛 친구들은 날마다 흥겹게 술을 마시고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즐겁게 지냈다. 열흘 남짓 지나 유방이 떠나려 하자, 패현의 사람들이 나서서 유방이 더 머물기를 원했지만 유방은 "내 수행원이 너무 많아 어르신네들이 비용을 다 감당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떠났지만, 패현의 사람들이 예물을 바치면서 전부 황제를 환송하러 나오자 발걸음이 안 떨어져 3일간 더 머물면서 술을 마셨다.

이 틈을 타서 패현 사람들이 풍읍(豊邑)은 아직 부역을 면제받지 못했다고 하자, 유방은 "풍읍은 내가 자란 곳이라 잊을 수가 없지만, 옹치를 따라 나를 배신한 사람들이 아닌가?"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패현의 어른들이 계속해서 권하자 유방은 못이기는 척 풍읍도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후 유방은 패현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며 장안으로 귀환했다. 곧 이어 노관의 배신 소식이 들려왔다. 유방이 번쾌를 대장으로 삼아 노관을 칠 것을 명하자 노관은 사람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오더니 유방의 병이 나으면 입궐해서 사죄하겠다고 했는데, 번쾌와 유방 중 어느 쪽의 결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말이 받아들여진 듯 노관은 압송되지 않았다.


4.7. 그 다음은 당신이 알 것 없소[편집]


유방은 장안으로 왔지만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돌아오는 중에 더욱 심해졌고, 여후와 신하들이 유명한 의원을 불러 이를 고치게 했지만 상처는 이미 악화된터라 의원이 치료했음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유방은 한바탕 욕을 퍼부으면서 치료를 거부했다.

"나는 평민의 신분으로 일어나 삼척의 칼을 들고 천하를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천명(天命)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비록 편작(扁鵲)이 온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유방은 50근의 황금을 의원에게 주고 그냥 물러가게 했는데 유방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임종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후 유방은 최고 공신인 소하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해 잠시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이내 풀어주고 소하를 불러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얼마 후에 여후는 병상의 유방에게 "폐하가 돌아가신 후 소하가 죽게 된다면 후임을 누구로 맡겨야 하느냐." 고 물었고, 이에 유방은 이런 방안을 내려주었다.

"조참이 좋소."


여후는 조참 사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재차 물었고, 유방은 다시 대답해 주었다.

"왕릉(王陵)으로 하시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하므로 진평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시오. 진평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맡기지는 마시오. 또한 주발(周勃)은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오. 비록 배운 바는 부족하지만 장차 유씨 왕조를 지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주발일 것이오. 그를 태위(太尉)로 삼으시오."


하지만 여후는 계속해서 그 뒤를 물어보았고, 유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다음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108]


유방의 마지막 명령은 번쾌에 대한 부분이었다. 황제가 사망하면 번쾌가 군사를 동원하여 척부인 일행을 몰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대노하여 진평과 주발에게 번쾌를 제거하란 밀령을 내렸다.[109] 그러나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유방은 장락궁(長樂宮)에서 숨을 거두면서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5. 사후[편집]


여후는 4일 동안 유방의 죽음을 숨기며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장수들이 황제와 같이 다 평민들이었지만 지금 북면하여 신하가 되었으나, 여후는 늘 불만이었고 지금 어린 군주를 섬겨야 할 판이니 (그들을) 다 없애지 않으면 천하가 불안하다고 했다. 여후에게 공신들을 숙청할 의도가 있음을 눈치 챈 역상은 여후의 측근인 심이기(審食其)를 찾아가

"내가 듣기에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나흘이 지나도록 발상하지 않고 장수들을 죽이려 한다고 하니 정말 그렇다면 천하가 위태롭소이다. 진평과 관영은 10만을 거느리고 형양을 지키고 있고, 번쾌와 주발은 20만으로 연과 대를 평정했소. 이들이 황제가 세상을 떠났고 장수들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군대를 합쳐 돌아와 관중을 공격할 것이오. 대신들은 안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제후들은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가 아니겠소?"


라며 협박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여후는 계획을 취소하고 유방의 죽음을 천하에 알린 후 국상을 선포했으며 유방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바로 정미일에 발상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역상은 진평이 관영과 함께 행동중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듯 한데, 진평과 주발 두 사람에겐 번쾌를 처형하라는 밀명을 내려놓고, 겉으로는 각각 관영과 번쾌를 돕게 하기 위해 파견한 것이라는 핑계를 댄 것에 여후가 속은 덕분에 전혀 엉뚱한 곳에서 견제효과가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번쾌 제거 명령이 여후한테 장기적으로 준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조고의 선례가 보여줬듯 유방의 시체를 숨기기만 하면 가능했던 무궁무진한 전횡을 저지했고 이 일 때문에 여수가 진평을 괴롭힌 탓에 진평에게 원한을 사 여씨와 척을 지게 되었다. 한편 노관은 유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흉노로 도망쳤다.
[1] 개인적으로도 위나라의 신릉군을 매우 흠모했다고 한다.[2] 다만 후한 말과 마찬가지로, 난세에 양아치라는 건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긴 하다. 법과 질서가 무너진 상태라서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하고, 필요하면 패거리를 꾸려 자경단 노릇을 해야할 일도 많은 시기다. 먼 훗날의 후손도 나라가 어지러워 고향을 지킬 공권력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자 자경단을 꾸려 스스로 치안을 유지했다.[3] 다만 소하는 워낙 법률에 밝아 상급 관청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던 인물이다. 나름 이때부터도 명재상의 싹이 보였던 셈.[4] 당시 친했던 하후영과 칼싸움 놀이를 하던 중 실수로 하후영에게 상처를 내고 말았는데, 하후영은 쿨하게 넘겼지만 유방을 싫어하던 어떤 사람이 관에 유방을 상해죄로 고발했다. 하후영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증언해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나중에 위증을 했다는 게 밝혀져 두 사람 다 옥살이를 했다.[5] 항우는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 라고 말했다.[6] 《서경잡기》에 나오는 내용.[7] 진나라 때 가장 작은 지방 행정 단위로 매 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 관리를 정장이라고 했다. 매 10정(亭)을 1향(鄕)이라고 하고 그 위에 현(縣), 그리고 군(郡)이 있었다.[8] <고조 본기>에서의 원문은 試為吏,為泗水亭長. 과거(科擧) 제도가 없던 시대이니 시험이라고 해도 간략한 통과 의례 등이나 혹은 돈을 내서 자리를 얻는 일을 말할 수는 있지만, 여하간 유방 본인이 글과 검을 익혀 얻은 자리다. 소하는 자리를 얻게 도와준 것이 아니라, 유방이 백수였던 시절부터 몇가지 일을 도와주다가 유방이 말단의 자리를 얻자 업무를 도와준 정도다.[9] 지금의 산동성 선현(單縣)[10]문정후 초한지》에서는 유방이 축의금 일만 전을 어음(...)으로 지불한다고 말을 한 후 들어가려는데 이를 보고 어이가 없어진 소하가 크게 화를 내며 유방의 멱살을 잡고 여기가 무슨 동네 술집인 줄 아느냐고 일갈한다.[11] 《예기》(禮記)에 따르면 혼인을 청할 때 여자의 집에서 남자의 집에 겸사로 하는 말이다.[12]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후자의 경우로 나온다. 이렇게 서자가 된 유비는 훗날 제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배다른 동생인 혜제 유영은 유비를 깍듯하게 대접했지만, 여후는 그 모습을 보고 열불이 나 유비를 독주로 암살하려고 했는데 혜제가 다짜고짜 그걸 대신 마시려고 한 덕에 여후가 술잔을 엎어서 구사일생했고, 유비는 제나라의 성양군(城陽郡)을 여후의 딸인 노원 공주의 탕목읍(湯沐邑)으로 바쳐 여후의 심기를 풀어주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비의 자식들에 의해 여씨가 몰살당한다.[13]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에서 그냥 길 가던 노인이 여씨의 친절에 감사하고 그녀와 아이들의 관상을 칭찬했을 개연성은 높다고 했는데, 사실 붙임성 좋은 행인이 시골 아줌마한테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복 받으실겁니다"라고 칭찬하고, "어이구, 아기도 잘 생겼네요. 부모님이 되려 아기 덕을 보겠는걸"이라고 요란을 떨고, 그런 아첨에 기분이 좋아진 시골 아줌마가 남편을 부르자 "나리가 제일 훤칠하고 좋은 관상이십니다."하고 너스레를 떠는 이야기의 흐름은 사실 잘 따져보면 현대의 농촌에서도 그렇게 어색하지만은 않다. 시바 료타로는 이 설화를 유방 편이 각색해 퍼뜨린 프로파간다의 일종으로 보았다.[14] 이때 다른 사람들은 노잣돈으로 300전을 보탰는데, 소하만 500전을 주었다.[15] 이때 유방이 흰 뱀을 베었을 때 쓴 청동검은 적소(赤霄)라 불리며 한나라 대대로 내려지는 보물이 되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 나오는 참사검과 동일한 물건.[16] 이는 오행(五行) 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데, 백제는 서쪽을 방위하고 있으니 진나라를 의미힌다.[17] 신기하게도 이 '백제(白帝)'는 마치 한나라 유씨의 운명의 전환기마다 등장한다. 신나라 시절 공손술은 자신을 '백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백제성(白帝城)'을 건설했으나 후한의 건국자 광무제 유수에게 격멸되었다. 그리고 촉한의 건국자 소열제 유비는 이릉대전의 참패 후 바로 이 백제성에 머물다 죽었다.[18] 사실 소하와 조참은 현령과 마찬가지로 진나라 관리였으므로 그들 본인보다는 유방을 내세우는게 훨씬 더 인심을 모으는 것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원래 인망만큼은 동네 건달들을 죄다 모을 수 있었던 유방 쪽이 소하보다도 더 낫기도 했고.[19] 앞서 말한 적제의 일 때문에 붉은색을 상징색으로 내세운 것이다.[20]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동남[21] 어대현 서남[22] 다른 기록에서는 주문(周文)으로 나온다.[23] 사천군은 진나라가 설치한 사수군(泗水郡)을 가리킨다. 남으로는 회수(淮水), 동으로는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서로는 하남성, 북으로는 산동성과 접한 회수 이북의 안휘성 대부분을 관할했다. 치소는 지금의 회북시(淮北市)인 상현(相縣)에 두었으며 고조의 출신지 패현은 사수군 관하의 고을이었다. 군감(郡監)은 진나라 조정이 군의 관리를 감찰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다.[24] 기원전 225년 진나라에 의해 위(魏)나라의 도성 대량(大梁)이 함락당하자 양혜왕(梁惠王)의 손자 위왕 가(假)는 도망쳐 풍(豊)으로 들어가 망명 정부를 세웠다.[25] 지금의 안휘성 천장현(天長縣) 서북[26] 지금의 강소성 패현 동남[27] 지금의 안휘성 회북시(淮北市) 서쪽[28] 지금의 하남성 하읍(夏邑) 동남[29] 지금의 안휘성 소현(蕭縣) 서북[30]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碭山縣)[31] 학살을 한 주체가 항우인지 유방인지는 명확치 않다.[32] 유방은 훗날 항우가 태공을 인질로 삼고 협박할 때, "나와 항우는 회왕을 북면하여 명을 받을 때 결의 형제를 맺었다. 지금 항우가 내 아버지를 죽이면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셈이다."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로 유추하자면 당시 항우와 유방은 의형제 비슷한 것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33] 진의 명장 왕전의 손자이자, 왕분의 아들이다.[34] 지금의 산둥성 허쩌시 동북에 있던 성양(城陽)의 서쪽.[35] 지금의 산동성 금향현(金鄕縣) 서북[36] 초 회왕의 부하 장수 혹은 위왕 위구(魏咎)의 장령(將領)이라는 설 및 한고조의 공신 강후(剛侯) 진무(陳武)라는 설도 있다.[37] 욕을 하는 부분은 <고조 본기>에는 없고, <역생 육가 열전>에서 언급된다.[38] 즉 "천하통일을 꿈꾸는 사람이 그 따위 막돼먹은 태도로 사람을 대할거면 때려쳐라"를 굉장히 완곡하게,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수준으로 일갈한 것이다.[39] 후일 영포가 귀순해 왔을 때도 시녀들에게 발을 씻기며 맞이해서, 영포가 자살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40] 역이기의 동생이다.[41]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동쪽[42]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동남쪽[43]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孟津縣) 동북으로 중국 고대 때 황하를 건너는 중요한 나루터가 있었다.[44] 이때 왕릉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장창(張蒼)이라는 사람이 어쩌다가 처형당하게 생긴 걸 지나가다가 보더니 장창의 너무나도 뽀얗고 예쁜 피부에 감탄해서 유방에게 저 사람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청탁했다고 한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장창은 여후 때쯤에는 좌천당한 왕릉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만 왕릉을 아버지처럼 대했다고 한다.[45] 유방이 관중으로 밀고 들어오는 가운데 반진제후들을 막을만 한 유일한 인물인 장한은 조고가 안일하게 견제했다가 20만 군대와 함께 항우한테 항복했으며 조고가 눈과 귀를 가려온 호해 역시 현재 진나라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자신을 추궁해오자 이판사판으로 호해를 죽인 후 유방에게 진나라를 내어주고 조고 자신은 출신지인 조나라 왕이 되려는 계획이었다.[46] 자영은 즉위하고 나서 스스로 황제 칭호를 버리고 진왕을 칭했다.[47] 지금의 서안시(西安市) 동북[48] 정확한 말은 다음과 같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 타인을 상하게 한 자는 중죄로 처벌한다. 타인의 물건을 훔친 자는 감옥에 가둔다. 이 세 가지 법만 제대로 지키면 당신들의 생활은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겠다.[49] 《초한춘추》에 따르면 항우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격분한 범증이 함곡관을 불살라버리려고 했고, 겁에 질린 병사들이 알아서 문을 열었다고 한다. 홍문연 당시의 항우의 태도를 보면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 듯.[50] 물론 유방은 금은보화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 새빨간 거짓말이고, 들은 쪽에도 빤히 보였던 듯. 범증은 다음 장면에서 '탐욕스러운 유방이 재물을 챙기지 않았다니?'라고 발언하고, 항우는 조무상을 그대로 유방에게 내주어버린다.[51] 사실 이미 초 의제가 가장 먼저 함양을 점령하는 이를 관중왕으로 삼겠다고 했으니 원래대로라면 유방에게는 이미 명분이 있었다. 당장 항우가 유방을 직접 죽이지 않고 홍문연에서 겁만 준 것도 따지고보면 이런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다.[52] 이건 명백한 군사 기밀 누설이고, 군인에게 있어 가장 큰 죄다.[53] 어처구니 없게도 항우가 조무상이 고자질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사실, 항우로서도 유방을 죽이는데 실패한 만큼 자기 체면을 세우려면 누군가 자신 대신 책임질 자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조무상은 만만한 데다가 자기 부하도 아니고, 어차피 배신자에 불과한 놈이니 팔아넘기는 데도 거부감 따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항우 입장이고, 범증 입장에선 가뜩이나 유방을 죽이지도 못했는데 자기 편 들어주던 사람까지 팔아넘기니 황망했을 것이다.[54] 물론 이는 항우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초나라 회왕이 이 명령을 하면서 "관중왕의 자리는 사실은 파·촉의 왕을 말하는 거다."라고 할 리가 없으므로 당연히 하극상이자 심각한 왕명 위반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후 유방은 거병의 명분으로 회왕이 살해되었다는 것과 함께 이 사실 또한 두고두고 잘 써먹는다.[55] 파·촉이 제대로 개발되기 시작하는 것은 후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이야기이다.[56] 대표적으로 몇 십 년 전에는 노애의 일족과 여불위가, 초한전쟁 몇 년 뒤에는 팽월 등이 여기로 유배되었고, 이중 여불위는 자결했으며, 팽월은 여후에게 애걸하다가 살해당할 정도로 당대 중국에서 오지 중의 오지로 손꼽히던 지역이었다.[57] 유방과 부하들은 당시 진나라 동쪽 끝인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 지역인 패현 출신들이었고, 부임해야하는 파·촉은 지금의 쓰촨성으로 진나라 서쪽 끝 지역이었다.[58] 《한서》 <소하전>의 기록.[59] 다만 개별적으로 유방을 따르는 사람들도 몇만명이나 되었다.[60] 터널이 없던 시절 산악 행군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참고로 저 당시 유방이 갔던 길은 오늘날 시퀸링(서진령) 터널이라고 해서 중국이 온갖 토목 기술을 다 들이부어서 뚫은 장대 터널로 사천 지방과 시안 시를 잇는 교통로를 현대화했고, 그전에는 재래식 열차로도 19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잔도를 복구하는 게 또 보통 일은 아닌지라[61]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은 <촉도난>이라는 시에서 파촉으로 통하는 길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로 향하는 길보다 더 어렵다." 심지어 이태백은 촉이 고향이다! 현지민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대체...[62] "한신은 국사로서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라 안의 인재(선비) 중 한신에 비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등으로 해석이 갈린다. '국사(國士)'의 해석에서 갈리는 것.[63] 당시 한신이 아무런 활약도 하지 않았음을 생각해보자. 아니, 그 이전에 한신은 그에게 시비를 걸던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간 일로 인해 굉장히 폄하를 당하던 인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무엇보다 한신은 유방의 수하로 들어온지 길게 잡아도 체 세 달도 되지않는 신입 중의 신입이었다. 실제로 한군의 많은 장수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대장군이 될 것이라고 여기다가 한신이 대장군이 되자 엄청나게 놀라워했다.[64] 3진이란, 옛 진나라 본토인 관중 지역을 장한, 사마흔, 동예에게 셋으로 나누어 분봉한 것을 말한다.[65] 전한의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한, 옹, 새, 적 네 나라의 인구를 대략 추정하면 한은 약 200만(전한의 파군+촉군+한중군+광한군), 옹은 170만(전한의 우부풍+농서+천수+무도+안정+북지), 새는 160만(전한의 경조윤+좌빙익), 적은 30만(상) 정도였다. 전한 대에는 관중이 많이 안정화되고, 정부에서 부흥책도 많이 썼으니 진·한 교체기에 비해 관중이 더 많이 부유해졌겠지만, 의외로 이 인구수만 보면 왜 항우가 3진을 저렇게 쪼개놨는지도 좀 이해가 되고, 3진 중 적나라는 좀 많이 약하지만 옹나라와 새나라는 해볼 만한데? 싶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옹나라와 새나라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 인구를 국력으로 환산할 수 있을 만한 처지가 못 된다는 게 문제였다.[66]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이 아예 수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해서 피해가 더욱 컸다. 수수는 한군의 시체 때문에 물이 흐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67] <하후영 열전>에선 내리라고 발로 차며 짜증을 부렸다고 하는데, 이 역시 막장이긴 오십보백보.[68] 재밌게도, 이 때 진짜로 하후영을 찌르려고 했던 유방은 결국 한 번도 찌르지 못했는데, 건달로 지낼 시절 하후영과 장난치다가 실수로 찔러버린 적은 있었다. 하후영은 원래 유방 휘하 패현의 건달 출신들 중 가장 마차를 모는데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만약 하후영을 죽였다가는 마차 속도가 늦어져서 항우군에게 잡힐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며 이렇게 되면 아이들을 버린 이유도 없게 된다.[69] 참고로 이때 구해진 유영과 어머니 여후는 이 일을 매우 고마워하여,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혜제로 집권했을 때에도 하후영을 9경중의 하나인 태복으로 삼았으며, 하후영에게 궁궐 북쪽에 제일 훌륭한 저택을 지어주는 특혜를 주면서 하후영에게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하고, 그를 각별히 존중하여 여후가 죽을 때까지도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여후가 죽은 이후에는 주발, 진평 등과 함께 여씨 일당을 제거하는 데 일조하고, 태종 효문황제까지 섬겼으니 이 일은 하후영 자신에게 있어선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70] 여후의 오빠다.[71] 함곡관은 관중의 관문으로 이보다 서쪽은 유방의 지배지인 관중과 파·촉 땅이다. 즉 함곡관 동쪽의 땅이란 자신이 아직 가지지 못한 모든 천하를 의미한다.[72] 정형 전투 직전에 근흡과 함께 조나라 땅에 가서 싸웠던 듯한 기록도 있다.[73] 이때 역이기가 6국 부활을 권했다가 장량의 젓가락 설교에 망신당하고, 각하당하기도 했다. 역이기와 장량 문서 참조.[74] 실제로는 형님 집에서 얹혀살다 형수가 진평을 구박하자 형이 화가 나서 아내를 쫓아냈다. 모르는 사람들이 형수가 집 나온 원인을 억측하여 떠돌게 된 헛소문.[75] 초나라 군대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사방에서 공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살해당했을 듯.[76] 유방이 빠져나가자 곧 다른 장수들도 하나 둘씩 빠져나왔다.[77] 이때가 진여를 격파한 후 제나라와 눈싸움을 한 것이 반년쯤 되었던 시기였다.[78] 사실 한신은 군략에서는 두말할 나위없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얼간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군사들도 유방을 따르니까 한신도 따른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괴철이 한신에게 자립을 권했을 때 한신이 이를 사양한 것도 본인의 인망만 가지고는 도저히 병사들을 따르게 할 자신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닌 게 한신은 과거 시비걸던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던 놈으로 웃음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었던 인물이다. 당장 유방의 인력풀이 꽉꽉 차다 못해 미어터질 정도로 인재가 많았지만 한신은 그가 직접 등용한 인물이 제대로 없을 정도로 인사에 둔감했다. 그나마 인재로 알려진 이좌거를 모셔오긴 했지만 그게 다였고 그나마 그 이좌거도 곧 고제의 명령으로 한신의 품에서 떠나게 된다. 한신이 정말로 이좌거를 쓸 생각이 있었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떠나게 했을까 싶을 정도의 모습이다.[79]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시점에서 이좌거도 유방의 명령으로 둔전 개척으로 빠져서 한신에게서 떠난 듯.[80] 그리고 장이는 에전부터 현자로 이름높았던 데다가 이미 제후였던 적도 있었으니, 일단 한신에게 붙여주긴 했지만 사실상 급수로는 한신과 동급 이상이었다. 굳이 한신에게 붙여준 것도 어디까지나 진여와의 남은 일을 마무리지으라는 고제의 배려라고도 할 수 있었다. 즉, 일부러 갈라놓았다기보다는 언젠가 이렇게 될 예정이었던 셈.[81] 사실상 동쪽의 팽월, 서쪽의 유방, 북쪽의 한신, 남쪽의 영포에 의해 포위된 형국이었다.[82]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 동북의 광무산(廣武山)[83] 원래 유방이 베이스로 삼던 성고와 형양은 항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성벽이 제구실을 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상해 있어서 산세가 험해 함부로 올라오기 힘들고(제아무리 용맹한 병사들이 공격하더라도 위에서 던진 돌멩이 하나에 무력화된다고.) 오창을 끼고 있어서 식량 문제가 없는 광무에 진을 친 것. 사실상 자연이 성벽을 대신해 준 셈이다.[84] 워낙 충격적인 발언이라 조선 효종의 경우, 《행장》(行狀)을 보면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85] 누번이 본명이 아니라 누번족이라 불린 소수민족 출신 장수라는 이야기도 있다.[86] 항우와 수년을 한때는 동료였고, 지금은 서로 천하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유방이 항우를 못 알아볼 수 있냐는 의견이 있지만 고작 이름없는 장수 하나에 분노해 항우가 완전무장하고 직접 나타나 싸움을 걸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수 있다. 누번 역시 설마 항우가 몸소 나타날까 예상하지 못하다 진짜 항우가 나타나자 당황해 도망갔을 것이다.[87] 쇠뇌를 숨겨놓았다가 불시에 저격을 시도한 걸 보면 항우는 처음부터 대화 결과와 무관하게 틈을 봐서 유방을 직접 죽이고 전황을 뒤집을 의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유방에게 단 둘이서 맞짱을 뜨자고 제안했을 때부터 작정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88] 이때까지 항우는 문제가 발생하면 그냥 힘으로 뭉개는 단순무식한 방법을 고집했다. 정치적 감각이 전무한 항우조차 이럴 정도로 초의 상황이 안 좋다는 것.[89] 하남성 태강현(太康縣) 남쪽[90] 결과적으로 나중에 보복은 철저하게 했다. 둘 다 처형했으니까. 단 유방은 죽일 생각까진 없었고, 이 둘이 진짜로 죽게된 건 여후의 뜻에 의해서였다.[91] 노현 땅의 사람들은 한때 항우의 봉토였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하려 했는데, 처음엔 군대로 몰살시키려 했던 유방은 정작 초나라 땅들은 앞다투어 항복하는 상황에서 저러는 이들에게서 뭔가 느낀 바가 있었던 듯, 항우의 목을 보여주면서 그를 노공으로 봉하고 정중히 장례를 치를 것을 약속했다. 장례식에 참석해서는 울기도 했다고. 다만 찢어진 시체를 다 따로 묻기라도 했는지 무덤이 묘하게 많고, 항우를 왕 취급하면 출세시켜주지 않는 등 그 뒤로도 사소한 데서 뒤끝을 부리기는 했다.(...)[92] 공위(共尉)라고도 한다. 초대 임강왕 공오의 아들.[93] 실제 초왕으로 고향에 돌아가서 표모에게 일반천금(一飯千金)을 주고, 과하지욕(袴下之辱)의 치욕을 준 백정에게 정장직을 주었다.[94] 군신간의 의리를 드는 인간이 역이기의 모가지는 떨어지게 냅둔 것이라거나 가왕을 시켜 달라며 고의 트롤링을 시도하는 것을 보면 그건 명분에 불과하고 본심은 그냥 날 버린 항우놈 엿먹으라는 심산이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순종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싸움이 아닌 문제가 닥치면 어버버하는 타입이라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95] 다만 이 역시 그 정치에는 어리숙한 한신이나 원래 도적 출신인 팽월이 거기까지 생각했다기 보다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때 딜 걸어도 괜찮겠지 싶어서 한 짓일 가능성이 더 높다.[96] 이후 유경(劉敬)의 제안에 따라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다. 여담으로 유경의 본명은 누경인데 제나라 평민이다. 유방에게 "댁은 덕도 없고 한거라곤 쌈박질만 한 주제에 주나라 흉내내서 낙양에 도성을 정한 거 같은데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낙양보다 수비하기 쉬운 장안이 낫습니다."라는 무례한 이야기를 했음에도 유방이 껄껄 웃으며 당일 장안으로 천도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성씨를 하사한 건 덤. 훗날 흉노와의 전투에서 유경 말 안 듣고 패배를 당하자 유경에게 직접 사과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97] 이로 인해 충효와 공사의 모순이 이로 인해 해결되었다. 태공의 집사장의 의도도 아마 이쪽이었을 듯하다.[98] 여기서 나온 유방의 별명이 바로 '한수'(漢溲)이다. 직역하자면 '한나라 오줌싸개'라는 뜻(...)#[99] 요컨대 어차피 예악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니 우리도 우리 시대에 맞게 새로 만들자는 소리다. 다만 이래서 북송의 사마광 같은 이는 숙손통을 비판하기도 했다.[100] 유방은 사신을 파견해 흉노군을 염탐했지만, 묵돌은 일부러 허약한 병사와 가축만 보여주면서 자신들의 전력을 과소 평가하게 만들었다.[101] 주설이란 신하는 진시황이 스스로 출정한 적이 있었냐면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못미더우면 자꾸 직접 나가는 것이냐며 울면서 말렸다. 하지만 유방은 충성심이 기특하다면서 상만 주고 충고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102] 때문에 유중은 후작으로 격하됐고, 나중에 아들 유비가 오왕이 돼서야 대나라 왕으로서 시호를 받았다.[103]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가 황제가 되면 여후랑 자식들을 해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104] 유여의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조치가 애초부터 그가 총애하는 척부인과 유여의가 편안하게 살려고 한것이다. 그런데 실패로 돌아가니 유방만 죽으면 여후가 척부인과 유여의를 살해할것이 분명했고 이는 유방 사후 그대로 실현되었다.[105] 《서경잡기》에 나오는데 소매 흔들고 허리 꺾는 춤(교수절요지무, 翹袖折腰之舞)을 척부인이 잘 추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덕분에 음주가무를 좋아한 유방에게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106] 태자가 이미 자라 자신이 손쓸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 노래를 <홍곡가>(鴻鵠歌)라고 부른다. 사실 태자가 자랐다기보다는 신하들이 아무도 척부인과 유여의를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원하는대로 되지 않아서 서러움을 표현한것이다.[107] 사실 장량도 중간까지 따라갔지만 몸이 상해 돌아가야했고, 가면서 유방에게 마지막으로 경포의 군사들은 용맹하고 매서우니 앞서서 싸우지는 말라고 조언했지만 유방은 어째서인지 하필 이때만은 장량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108] 여씨 천하의 멸망에 대한 예언, 혹은 여후의 욕심에 대한 황망함으로도 2가지 해석이 가능하다.[109] 같은 토사구팽의 사례로 묶여도 번쾌의 경우는 한신, 팽월 등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다. 전자가 이성왕들을 견제하는 목적이었다면 번쾌의 경우 여씨를 견제하는 측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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