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r20210301판)

문서 조회수 확인중...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단어에 대한 내용은 조선(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고조선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조선
朝鮮
[1][2]
[ No.473995 ] 이미지 준비중
고조선의 문화권[3]
기원전 ?년[4] ~ 기원전 108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성읍국가[5]
한사군
고구려
원삼국시대
옥저
동예
수도
아사달장당경 → 왕검성(王儉城)[6]
정치 체제
군장국가 → 연맹왕국
국가 원수
단군(檀君)(?)[7], 왕검(?)[8] // (侯) → (王)[9]
국성
불명[10]
언어
알 수 없음
종교
토착 종교
종족
예맥, 한(漢)[11], 진번
주요 군주
단군조선[12]
초대 단군왕검
□대 조선후
□대 조선왕#s-2
□대 부왕
말대 준왕
위만조선
초대 위만왕
3대 우거왕
주요 사건
기원전 4세기 조선후 칭왕
기원전 3세기 고조선-연 전쟁[13]
기원전 195년 위만, 고조선 망명
기원전 194년 위만 반란·위만조선 건국
기원전 109~108년 왕검성 전투
(전한에 의해 조선 합병)
현재 국가
중국[14], 북한[15], 대한민국[16]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출현
3.1.1. 문헌에서의 단군 신화
3.1.2.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상황에 대한 고고학에서의 시각
3.1.3. 기원전 10세기~8세기, 요서 조양설
3.1.4. 기원전 6세기~4세기, 선양설
3.1.4.1. 평양 팽이형 토기 문화
3.2. 단군조선
3.3. 기자조선설
3.6. · 교체기와 위만의 찬탈
3.7. 위만조선의 운영과 멸망
3.8. 준왕의 남하
3.9. 멸망이 미친 영향
4. 위치와 강역
4.1. 평양 중심설
4.2. 요동 중심설
4.3. 중심지 이동설
4.4. 기타
5. 문화
5.1. 문자
5.2. 청동기와 철기
5.3. 신화
5.4. 정치 체계
5.5. 법률
5.6. 음악
5.7. 의복 및 금속 문화
6.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6.1. 현대
6.1.1. 남북한
6.1.1.1. 남한
6.1.1.2. 북한
6.1.2. 중국
6.1.2.1. 바이두 백과의 고조선 내용
6.1.2.2. 현 중국 관점의 문제점
6.2. 현대 이전
6.2.1. 한국
6.2.1.1. 고구려
6.2.1.2. 백제
6.2.1.3. 신라
6.2.1.4. 고려
6.2.1.5. 조선
6.3. 중국
6.3.1. 당나라
6.3.2. 당나라 이후
7. 후대의 조선과 국명 구분
8. 고조선의 인물 목록
8.1. 군주
8.2. 신하
9. 대중매체에서의 고조선
10. 관련 문서



1. 개요


고조선(古朝鮮)은 지금의 한반도 북부중국랴오닝성 등에 걸쳐 존재한 국가다.

2. 상세


초기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주로 요서에서 요동에 이르는 현재의 랴오닝성 일대와 지린성, 그리고 북한의 평안도 일대로 추정하고 있고, 멸망할 때의 위치는 현대의 평양직할시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로, 이는 기원전 4세기 이전의 영향권보다 요동 방면의 영역이 축소되었고 대신 일부 영토가 남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지는 않으나 조선이란 국호만 한 차례 등장하며[17],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세운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등장한다. 중국의 사서 가운데 《사기》와 정사 삼국지, 《한서》, 《후한서》 등에 조선 기사가 수록되어 있으나 단편적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을 다룰 때 이들 중국 사서를 인용하고 있다.
본래 국호는 '고(古)'자가 없이 조선(朝鮮)이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기 이전 대의 기록에서 혹 조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것은 고조선이거나, 또는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평양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의 기록인《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단군조선을 고조선으로, 위만조선을 조선으로 일컬었다. 현대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을 부정하고 위만조선을 기존의 고조선과 연속된 실체로 파악하려는 취지와, 14세기 말에 옛 조선의 국명을 가져다가 새로운 나라 이름으로 삼았던 이성계조선왕조와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조선을 쓰는 용법이 정착되었다.
조선(朝鮮)이라는 국호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병도가《삼국유사》에 실린 단군 신화에서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전해지는 아사달(阿斯達)의 '아사(阿斯)'가 한국어의 '아침' 또는 그와 같은 뜻이 있는 일본어의 '아스(朝, あす)'와 대응하는 것[18]이며, 달(達)은 고구려어로 '땅'이나 '들'을 가리키는 'tara'와 통하는 글자로 쓰인 것을 들어 '아사달'은 '아침의 땅', 또는 '해가 뜨는 땅'이란 의미이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바로 '조선(朝鮮)'이었을 거라고 보기도 하였지만, 고대 한국어에 대해 기초적으로 검증할 자료가 부족한 상태로 각종 가설이 난립하는 현재로서는 확언하기는 어렵다. 한편 남북조시대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후한 말~조위 초의 인물로 추정되는 장안(張晏)이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선수(汕水)가 있으며 세 강물이 합쳐져서 열수(洌水)가 되니 낙랑(樂浪)·조선(朝鮮)이 이 이름을 딴 것이다(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라고 한 것을 들어 선수(汕水)의 이름에서 조선(朝鮮)의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낙랑'을 언급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평양직할시에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되었고 그곳의 대동강을 열수(列水)라고 부르던 한 대 이후의 시각이 투영된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기원전 4세기에는 분명히 조선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는 상황에서 중심지 이동설까지 나올 정도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확실하지 않은 현재로서는 대동강의 지류였을 '선수'와 '조선'을 연결 지어 말하기에 확실하지 않은 점이 많다.
과거에는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미송리식 토기를 고조선의 영향력과 문화권을 추측할 수 있는 유물로 보았다. 이 견해는 수십 년 동안 다수설이었으며 국정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현재는 폐기된 학설이지만 여전히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단편적 유물보다는 유적군의 분포 및 사서와의 교차 검증 등을 이용해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현재는 평안도 일대 및 랴오둥 내륙 지역이 주목 받는다. 남한에 있는 마니산 참성단은 종교적으로 후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유적지로 추정되는 북한 지역에 대한 탐방이 불가능하고 북한 학계에 대한 신용도도 높지 않아서[19] 한반도 지역 고조선 문화에 관련한 내용은 대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랴오닝 성과 그 근처 지방에서 초중기 시대의 고조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기는 하나, 비교 검증할 만한 중국 사서에 남은 문자 기록이 단편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제나라#s-1 등 중국 동부 국가들과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걸 확인할 수준은 되기는 하다.
기록상으로 등장하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지만 고려 이전의 사서들의 내용이 부실하기 때문에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고, 그나마 남아있는 문헌은 중국 측 기록이지만 타자에 의한 것인 데다가 연대와 시각이 모두 제각각이어서 교차 검증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게 다 연나라와 제나라 사서를 분서갱유로 불태운 진시황 때문이다 진시황을 까자 일단 역사학에서는 다른 문헌과 비교했을 때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 문헌끼리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확인되는 이른바 '교차 검증'을 중요한 사료 검증의 방법으로 여기는데, 교차 검증을 진행하기에는 고조선 관련 기록을 모두 적어도 A4지 몇장 분량에 불과하다. 문헌의 부족을 메워줄 설화와 전설도 고려 시대 이후의 것이 확인되며 단군의 탄생과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신화와 전설이 전승되어 왔고 그 특성상 후대의 시각이 적잖이 반영되어 있으며,[20] 그 이후의 고조선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는 설화나 전설은 별로 전승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고조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기원전 5세기 이전의 고조선의 상황에 대해 연구하려면 중국의 문헌에 남은 단편적인 기록을 비판적이되 합리적인 방법으로 분석하고, 고고학적인 유적발굴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3. 역사



3.1. 출현


고조선의 멸망은 기원전 108년이라는데 이견이 없지만,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강역 논란과 함께 고조선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논란이다. 이것에 따라 한국사의 길이 자체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21] 전통 시대에는 기원전 2333년 무렵 건국되었다고 전하는 단군조선과 기원전 12세기 무렵 동래한 기자조선을 모두 조상으로 인식하고 제사를 지냈다.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의 나이가 1800년인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서거정이 '나이가 아니라 연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등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학설은 없었다. 이는 고고학이란 학문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역사서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에야 비로소 현대 역사학적으로 고조선 연구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고, 지금도 고조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고조선은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시기이므로 사실상 고고학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3.1.1. 문헌에서의 단군 신화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조선 건국년은 연도는 기원전 2333년(요임금 재위 25년, 당요 무진년)이지만 이는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며 사서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
일단 조선 건국 이전의 기록을 보자면 고려사 백문보전, 제왕운기삼국유사가 있다. 이들은 각각 건국년도를 기원전 2361년, 기원전 2333년(무진년), 기원전 2308년 또는 2284년(경인년 또는 정사년)이라고 언급한다.
문헌간 편차가 적어 사실성을 더해주는 듯 싶지만, 사실 이런 주장들은 별다른 근거없이 전부 중국의 요 임금 즉위년을 기준으로 더하기 빼기를 한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중국에서도 요 임금 즉위년을 두고 이런저런 주장이 많았다는 것. 삼국유사에서는 심지어 요와 비교해 60갑자 연도조차 안 맞는다며 불평하고 있다.[22]
성종 15년(1484)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송나라 소강절이 지은 '황극경세력'에 나오는 상원갑자법(上元甲子法)에 근거하여 단군기원(단기)의 시작점을 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단군기원 문서에 나오듯, 이는 조선의 건국이 과거에는 당요 즉위 25년 뒤요, 지금(조선)의 건국은 홍무제 25년 뒤라는 주장에 근거한 듯 하다.일단 근세에도 요 임금의 즉위년은 확실한 정설이 없었는데, 크게는 갑진년 또는 무진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유력했다. 이중 임의로 갑진년을 요 임금 원년으로 보고 25년 뒤인 무진년이라고 서술한 것은 분명 의도가 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요 임금의 즉위년은 어느 쪽으로 보아도 이상하다. 당요의 다음 다음 왕인 하나라의 건국자 우 임금은 기원전 2070년에 즉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요순은 둘이 합쳐서 300년간 다스렸다는 말이 되기 때문. 요 임금은 기록상에서 90년 이상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고 순 임금도 30여 년 재위한다고는 하지만, 300년은 인간의 수명과는 거리가 멀다.

3.1.2.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상황에 대한 고고학에서의 시각


일부 학계와 재야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연원에 대해 신석기 문화인 홍산 문화 등을 근거로 삼는다. 일부 재야사학계에서는 흥륭와 문화와 홍산 문화 등을 비롯한 츠펑 일대의 일련된 신석기 문화들을 모두 고조선의 전신 유적으로 보고 이를 "고조선문명"이라 칭하나, 고고학적으로 이들 문화는 이후 요하 유역 문화와 별다른 접점이 없다. 미국 국립과학원에 발표된 내몽골 동부 사구지대 퇴적물 분석에 따르면, 기존에 100만 년 동안 사막지대였을 것으로 여겨진 츠펑 지역은 12,000년 전쯤부터 4,000년 전 무렵까지 수자원이 풍부하고 깊은 호수와 숲이 존재했으나 약 4,200년 전 무렵(대략 기원전 2200년 경)부터 시작된 기후 변화에 의해 사막화했다는 것이다.[23] 이에 따라 그 무렵부터 홍산 문화를 영위하던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훗날 중국 문화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24] 이후 기원전 2200년 경을 전후하여 요하 일대에 유입된 사람들[26]은 이전 문화들을 토대로 샤자덴(하가점) 하층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그 이전 문화들과의 직접적인 승습관계는 없다. 후술하듯 고조선은 홍산문화와 그 이전 문화보다는 하가점 하층문화와 더 관련있다는 것을 볼 때, 홍산문화와 고조선은 연관성이 있더라도 매우 적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홍산 문화 문서 참조.
다음으로 기원전 10세기 이전 건국설의 근거로서 제시된 것은 근래 연대가 조금 올라간 요서 지방의 초기 청동기 문화이자 농경 문화인 하가점(사자뎬) 하층 문화(기원전 22세기[27][28] ~ 기원전 14세기[29])가 있다. 하가점 하층 문화는 구전되는 고조선의 설립 연대에 대한 기록과 시기적으로 유사하여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필두로 많은 관심을 받은 청동기 문화이다. 대표적으로 서영수 교수는 2008년 하가점 하층 문화의 큰 특징인 산성 유적의 형태가 마치 고구려 산성과 흡사하기 때문에 고조선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하가점 하층 문화는 이후 위영자 문화(기원전 13세기 ~ 10세기)로 연속되는데[30][31], 이후 요서 지방을 남북으로 가르는 큰 산인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북쪽은 유목민의 문화(동호의 조상인 산융족)로 추정되고 농경의 흔적이 없는 하가점 상층 문화(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7세기[32])가 자리잡고[33][34] 남쪽 조양시 지역에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는 농경 문화인 조양시 십이대영자 문화(기원전 9세기 ~ 기원전 8세기)가 자리잡는다. 십이대영자 문화는 같은 조양시 지역의 위영자 문화를 승습하여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매우 강한데, 분포지역이 완전히 합치하며, 연대 측면에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될 뿐 아니라 문화의 내포 방면에서 유사한 요소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35] 따라서 이러한 요서지역 청동기 문화의 승습관계를 따라서 분석한다면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위영자 문화를 거쳐 십이대영자 문화로 연결되며 발전한 문화를 고조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가와자와 같은 고조선 중기 유적에서는 성과 관련된 것이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서영수 교수도 언급하였듯 이 때문에 두 시대의 산성 유적 사이에는 천여 년의 공백이 발생한다. 이것이 주요 학설로 인정받으려면 이 긴 시간의 연결 고리를 이어줄 더 확실한 유적과 연구 성과가 축적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학설의 종착역인 십이대영자 문화는 고조선의 문화적 시류로 최근 주장되기는 하나, 후대의 정가와자, 평양 지역의 조선 문화권과 어떠한 유관 관계에 있는지 역시 의문점이 많다. 또한 공간적으로도 사쟈뎬 문화 자체는 내몽골을 중심으로 하며 십이대영자 문화는 후기에나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1500년 수준의 공백을 어찌 메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 가능한 사람이 없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 오랜 기간을 두고 상당히 다른 형태의 문화가 나타나는데 이를 하나의 나라로 볼 수 있을지의 문제가 남는다.
만약 위의 설을 따를 경우, 요사의 일부 기록이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사에는 다음과 같은 고조선과 관련한 기록들이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요(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기자팔조지교의 유풍을 간직하고 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49(遼史 卷49)#}}}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 周武王釋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동경요양부(지금의 선양)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었고,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38 지리지2(遼史卷38地理志2)#}}}

여기서 요나라(거란족)의 발원지가 요서 지역이고, 중심지인 상경 임황부가 츠펑 지역의 바린 좌기(위치)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같은 츠펑 지역에서 발달한 하가점 하층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 혹은 츠펑과 가까운 차오양에서 발달한 위영자문화 및 십이대영자 문화를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 내지는 세력 범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해당 지역(요서)에서 발원한 십이대영자 문화가 이후 기원전 6세기경에 고조선의 중기 문화권으로 여겨지는 선양시 지역[36]의 정가와자 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점도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십이대영자 문화가 정가와자 유형과 남동구 유형으로 분화된 이후로도[A] 중원 계열보다는 예맥계열(내지는 북방계) 문화권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요서 지역이 기원전 4세기 이후로는 전국시대 계열 문화가 서서히 유입되는 경향을 보이다가[37] 고조선-연 전쟁 이후 중원문화에 완전히 편입되는 점으로 보아, 위 문헌을 근거로 한다면 기원전 4세기 이전에 츠펑 및 요서 지역을 향유하던, 선양 정가와자 문화 형성에 일조한 일련의 승습되는 문화들(하가점 하층문화, 위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문화)을 고조선과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3.1.3. 기원전 10세기~8세기, 요서 조양설


최근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기원전 9세기 ~ 8세기경, 발호)를 고조선 문화로 보자는 견해가 고고학계를 중심으로 일고있다. 비파형동검의 발상지라는 것과 선진적인 문화 그리고 비파형동검, 청동거울(다뉴기하학문경), 부채꼴형도끼가 나오고 이것은 요동지역의 문화와 상통하는 면이 있으며, 또 이후 등장하는 요동 심양지역의 정가와자 문화와 연결된다는 것을 근거로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를 이 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거기에 비파형동검문화가 요서에서 먼저 발전하여 후대로 갈수록 동쪽으로 그 중심지역이 이동하는 양상을 보이는 점 또한 그 근거가 된다. 초기 1960년대에는 하가점 문화라 하여 (앞의 기원전 10세기 이전 설 참고) 내몽골 ~ 요서 지방의 문화권은 하나로 묶어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저 동호족의 유적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최근 하가점 상층문화와 십이대영자 문화를 별개의 문화로 주장하며 고조선의 뿌리가 되는 집단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또한 십이대영자 유적은 동검, 청동거울, 장신구 등 정치적 엘리트 내지는 위계가 뚜렷한 지배자의 존재를 보여주며, 요서 및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괄목할 만한 계급제 사회의 흔적과 이로 인한 군장국가의 성립을 가정할 수 있는 점이 있어 신진 학자들을 중심으로 국가로서의 고조선의 원류로 해석되어오고 있다. 다만 소위 십이대영자 문화는 그 분포범위가 매우 좁고 유적간 분포 밀도도 조밀하지 못한 데다가 질적으로 우수한 유적군이 특정지역에 한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경주 일대만을 점유한 초기의 사로국이나 위례성과 그 근교를 차지하는데 그친 백제국 등과 비슷한 수준의 도시국가(chiefdom) 단계일 것이다.
한편 요동반도 남단에서도 기원전 7세기 ~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상 무덤 및 누상 무덤에 100명 ~ 200명이 순장되었다는 과거 북한 고고학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국가 출현에 대한 희망적 시각이 두드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운데 무덤 주위의 무덤을 순장묘로 생각하던 정황과 달리, 최근에는 순장묘가 아닌 시기차에 따른 무덤 배치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또한 요동반도 지역의 경우 조양이나 선양 지역의 기존의 고조선으로 생각되는 유적과는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며 연 진개 경략이 추정되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도 나름의 독자적 문화권을 이루며 서서히 중국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문제가 있다. 이 경우 해당 지역은 고조선에 속한 속국과 같은 존재였으며 연나라의 공격 이후 종주국을 바꾼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는 하다.
이에 대해 랴오닝성 일대의 청동기 문화의 변화를 중심으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 지역의 후기 청동기 문화는 각 지역 물질 문화 전반에 적용 가능한 시대성이 분명한 유물 등을 기준으로 전기·중기·후기의 3개 단계로 획기 된다.[38] 전기는 기원전 10~9세기의 기간 동안으로, 이 기간 동안 각 지역 물질 문화의 초기 유형이 형성된다. 중기는 기원전 8~7세기의 기간 동안으로 이 기간 동안 각 지역 물질 문화의 전형이 갖추어진다. 후기는 기원전 6~4세기의 기간 동안으로, 이 기간 동안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기술적으로 더욱 성숙된다. 기원전 4세기를 따로 떼어 말기를 설정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지역에 따라 후기 청동기 문화가 다시 한 번 새로운 지역 유형으로 변동된다. 요령 지역 후기 청동기 문화의 전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에 요령 지역이 지속적인 문화-간·지역-간 상호 작용을 통해 동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요령 지역이 동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변화이다. 왜냐하면 전기 청동기 시대와 위영자 유형기 까지만 해도 요서와 요동 지역은 전혀 다른 문화와 상호 작용권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동 지역 또한 전기 청동기 시대에는 작은 지역 범위 내에서의 상호 작용 관계망만이 형성되었을 뿐, 요동 전역이 단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요령 지역이 후기 청동기 시대 동질적인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된 것은 십이대영자 문화의 기술적 우위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십이대영자 문화는 왕팔개자 단계[기원전 9세기], 십이대영자 단계[기원전 8~7세기], 남동구-정가와자 단계[기원전 6~4세기]로 획기 되고 있다. 앞의 두 단계는 십이 대영자 유형(十二臺營子類型)·마지막 단계는 요서 지역의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선양시 중심의 정가와자 유형(鄭家窪子類型)이 형성되어 있었다. 십이대영자유형기부터 요동·길림성 중부·한반도 지역이 십이대영자 문화의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를 모방하여 지역 형식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호 작용 관계는 기원전 6세기 심양시 일대에 후술할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혹은 정가와자 문화)이 형성되면서 더욱 긴밀해진다.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 자유형의 형성을 계기로 요동 지역에 정가와 자유형을 상위로·기타 요동의 토착 유형을 하위로 하는 상호 작용 관계망이 형성된 것이다. 이 상호 작용 관계망을 통해 요동 지역의 비파형 동검 등이 십이대영자 문화 양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졌다. 묘제 또한 십이대영자 문화류의 석곽묘와 토광묘가 각 지역의 토착 묘제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요동 지역 토착 문화의 지형 또한 변모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쌍방 유형권(雙房類型圈)의 축소와 붕괴이다.[39]
이러한 점에서 한민족 문화에서 십이대영자 문화가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십이대영자 문화에 대해서는 십이대영자 유형, 정가와자 유형, 송산리 유형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계보가 고조선을 상징하는 것으로 봄과 동시에, 기원전 6~3세기 초 요서 지역에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으로 대표되는 요서고조선 연맹체(古朝鮮聯盟體)와 요동 지역에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으로 대표되는 요동 고조선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다가, 요서고조선 연맹체와 전국연(戰國燕)이 전쟁을 하게 되면서 요동 고조선 연맹체까지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요동 고조선 연맹체의 핵심 주도 집단 일부가 평양(平壤)에 새로운 중심지를 건설하게 되면서 준왕(準王)의 고조선이 형성된 것으로 보은 견해가 제기되어 있기도 하다.[40]
요서 조양설은 '고죽국'이 '조선'이 되었다는 견해와 유사하다. 1973년, 랴오닝성(지금의 요서지방) 카줘현[喀左縣]의 구산[孤山]에서는 ‘고죽(孤竹)’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상 시대의 청동기가 발굴되어 고죽국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도 발굴되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와 위치를 둘러싸고 학계의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수서(隋書)>의 ‘배구전(裵矩傳)’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여 조선(朝鮮)으로 삼았다. 한(漢)이 이를 다시 나누어 세 군을 설치하여 낙랑, 현도, 대방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상(商)이 멸망한 뒤 기자(箕子)가 정착한 곳이 고죽국이고, 이 고죽국이 기자조선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카줘현에서 발굴되었던 '기후'명 청동기는 해당 지역에서만 단독으로 여러 개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다른 국명이 쓰인 복수의 청동 기물들과 함께 1건만이 발견되었고 중국 내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기후'명 청동기가 주변에 '기'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이나 이주 등으로 인해 우연히 '기후'명 청동기가 입수되었을 가능성을 던져준다. 이에 대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 또한 <수서> 배구전은 고죽국이 멸망(기원전 664년)한 이후 1200년이 넘는 시간 뒤에 쓰인 서술이며, 또 고죽국을 고조선에 대응시키는 기록은 이 기록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당시 요서 지역 일부를 점거하고 있던 고구려의 영역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 땅은 원래 중국 땅이었다'는 논리를 날조하려 했던 수나라 지배층의 사고 방식일 수 있으며,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이후 무려라 등 요서의 고구려 영토를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 당 초에는 고죽국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고 한의 군현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리만이 고구려 정벌론의 근거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는 뚜렷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후대에 위조되었던 논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3.1.4. 기원전 6세기~4세기, 선양설


기원전 7세기까지는 요동지방에 여러 유형의 문화권이 상존해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가 되면서 정가와자(鄭家窪子)(위치) 유형이라는 새로운 문화권이 요동에 나타나 요동을 하나로 아우르기 시작한다. 원래 요동은 이질성이 강한 문화 집단이 여럿 존재했으나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200년에 걸쳐 정가와자 유형으로 통합되는 모습을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4세기가 되면 요동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면, 십이대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유형은 기원전 6세기를 기점으로 객라심좌익몽고족 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심양시를 중심으로 요하 양안에 걸쳐 있던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으로 분화된다.[A] 그런데 기원전 6~4세기 요령 지역은 정가와자 유형을 매개로 하여 요서 지역의 남동구 유형과 요동 지역의 소규모 지역 문화가 동일한 상호 작용 관계망을 형성하게 된다. 요동 지역에 정가와자 유형을 상위로, 기타 토착 문화를 하위로 하는 정가와자 유형 중심의 요동 지역 교류망이 형성되고, 이러한 교류망이 다시 정가와자 유형을 매개로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요령성, 길림성 중부, 한반도 지역이 완전한 예맥 청동기 문화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점은 이 시기에 요령 지역의 청동기 양식이 완전히 일체화됨과 동시에 동일한 기술적 속성의 청동기가 유통되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를 비파형 동검의 확산을 중심으로 설명하자면, 비파형 동검은 처음 요서 지역 십이대영자 문화권의 무기류로 제작되었다가 기원전 8세기 요동 지역의 이도하자 유형(二道河子類型)의 주요 집단이 십이대영자형 비파형 동검을 모방하여 이도하자형 비파형 동검을 제작하였고, 그 직후 요동과 길림성 중부 및 한반도 지역으로 이·삼차적인 교류 관계 속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를 기점으로 요동 북부의 이도하자 유형, 요동 남부의 쌍방 유형(雙房類型), 요동 반도 남단의 강상유형(崗上類型), 길림성 중부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 서북한의 신흥동 유형(新興洞類型) 등의 비파형 동검이 십이대영자형 정가와자식으로 일체화되기 시작한다.이러한 문화 현상은 기원전 6세기 십이대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유형이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요동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鄭家窪子類型)으로 분화되고, 이러한 문화적 파동 속에서 요동 지역에 정가와자 유형을 상위로 하고 기존의 토착 문화를 하위로 하는 상호 작용 체계가 형성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정가와자 유형은 고고학적으로 선양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것이 고조선의 문화라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으로 위의 기원전 10세기 이전 설에서 인용한 요사의 일부 기록을 재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 周武王釋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동경요양부(지금의 선양)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었고,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38 지리지2(遼史卷38地理志2)#}}}

이렇게 볼 때 정가와자 유형이 바로 준왕 이전의 고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위략』에는 『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조선후(朝鮮侯) 관련 기사가 있다. 『위략』의 기사는 어환(魚豢)이 임의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 동한(東漢) 당대(當代)의 정사서(正史書)인 『동관한기(東觀漢記)』 지리지(地理志)를 저본으로 한 것으로, 그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 고조선과 연나라가 주변 정세 변화[주(周)나라의 쇠퇴와 연나라의 칭왕(稱王)]와 맞물려 갈등을 빚다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공이 있게 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연나라와 갈등을 빚은 조선후의 고조선은 연나라는 물론 중국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대부(大夫)를 관직명으로 쓰는 등 중국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요령~서북한의 물질 문화 가운데 『위략』 조선후 기사와 가장 부합하는 것은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 외에는 없다. 따라서 『위략』 조선후 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한다면 조선후의 고조선은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산리 유형(고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화)의 직접적인 계통적인 기원은 남동구 유형이 아닌 정가와자 유형이다. 이러한 현상이 빚어지게 된 배경은 십이 대영자 문화권이 기원전 6~4세기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을 중심으로 하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서쪽의 요서 지역[남동구 유형]과 심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요하 유역[정가와자 유형]의 2개 연맹체로 재편된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기원전 4세기 연나라가 종전까지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 일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하북성 북부 연산산지(燕山山地)의 동남구(東南溝)-옥황묘문화(玉皇廟文化) 집단을 완전히 복속시켜 이 일대를 내지화(內地化)한 후, 바로 동쪽에 인접하게 된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 중심의 요서 고조선 연맹체(편의상 표현)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3세기 초 진개가 요서고조선 연맹체를 침공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 요하 유역의 요동 고조선 연맹체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어 이마저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사회 체제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진개 침공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하기만 하였고, 『위략』의 저본에서는 최초 공격 대상인 요서고조선 연맹체의 고조선만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41][42]
이런 고고학적 성과를 문헌과 비교해 보자. 고조선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7세기의 관중(생몰기간 : 기원전 725년 ~ 기원전 645년)의 언행을 기록한 『관자』라는 책이다. 그럼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부터 존재했던 것이 확인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관자』라는 책 자체가 후대에 쓰여진 책이고, 비록 여러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늦어도 기원전 4세기경에는 쓰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은 늦어도 기원전 4세기에 확실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고조선을 언급한 쓸 만한 기록은 『전국책(戰國策)』[43]인데,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蘇秦將爲從 北說燕 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沱·易水, … (생략) …。

소진이 합종책을 위해서 북으로 가 연나라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는 조선 · 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 · 누번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 · 구원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와 역수가 있습니다. … (중략. 조나라와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설득함) …" 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전국책』 연책편}}}

연나라 문후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361년~333년이며,[44] 현재 하북성 근처에 위치한 연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조선의 위치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서다. 다만 본문의 '燕東有朝鮮·遼東(연동유조선요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논란이 많다. 다른 방위의 서술을 따져볼 때 조선과 요동을 별도로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이 높지만, 조선은 국체이고 요동은 지명인데 둘이 병렬되어 있는 것이 이례적이라 해석을 놓고 논란이 많다. 이를 놓고 '조선의 요동'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요동 지역에 별개의 공동체가 존재했으리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연의 가시권에 들어올 정도로 조선이 분명히 인식되었고 연의 동쪽에 있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고조선이 확실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시기를 전하는 문헌상의 확실한 기록이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학설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학설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고조선에 대해 가장 의고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아래에서 언급하는 전국시대 고조선의 칭왕(기원전 4세기) 이후로 본격적인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보기도 한다.[45]

3.1.4.1. 평양 팽이형 토기 문화

다만 첨언하자면, 과연 요동 지방의 이러한 나라가 단군 신화와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단군에 대해서는 별도로 평양 지역의 팽이형 토기 문화(신흥동 유형, 기원전 10~3세기, 청천강~강화도 지역)라는 별도의 한반도 고유 문화권과 연관이 있으며, 요동 지방에서 유입된 세력과의 대립 공존을 통해 어느 순간 조선과 융합되어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46] 기원전 281년 이후 평안도~황해도로 건너온 조선은 단순히 요동/요서 지방의 조선을 이식한 것이 아니라 토착 문화권과의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같은 평양 대동강 유역의 고산리 유형이 앞서 설명한 이 지역 재래의 청동기 문화인 신흥동 유형[新興洞類型, 팽이형 토기 문화]이 아닌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을 직접적인 계보로 하고 있기 때문에[47], 신흥동 유형이 평양 지역의 토착 물질문화 형성과 상기한 정가와자 유형과의 화학결합 양상 외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지에 대해선 미지수이다. 대체로 평양지역의 신흥동 유형 이후 시기 물질 문화 양상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정가와자유형의 문화양상을 계승하는 고산리 유형이 바로 준왕(準王)고조선[고산리 유형 고산리류(孤山里類)]과 위만 조선(衛滿朝鮮)[고산리 유형 송산리류(松山里類)]의 문화라는 것을 시사한다.[48]

3.2. 단군조선


檀君朝鮮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다.[49] 동국통감의 기록을 따른다면 기원전 2333년이 건국년이지만, 현대 한국 역사학계는 건국년을 두고 여러 설을 말한다. 단군 조선이 건국된 해를 기준으로 잡아 단기를 사용한 적도 있었다.
건국자는 단군왕검으로 환인의 아들 환웅웅녀와의 관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주류인 예족(濊族), 맥족(貊族), 한족(韓族)과 연관성이 있는데,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인 한족(韓族)[50]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맥족(貊族),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예족(濊族)과의 고조선 건국 내용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신화(神話)라고 여겨지고 있다. 삼국유사 등 기록에 따르면 단군 왕검은 천 년 동안 재위하다가 신이 되어서 올라갔다고 한다. 보통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직책 이름으로 보며 뜻은 제정일치로 해석한다.
고문헌에 따르면 단군조선이 망하고 기자조선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현대에는 기자 자서여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설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므로 다음 시대를 위만조선으로 본다.

3.3. 기자조선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기자조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기원전 11세기경에 기자가 조선 지역에 와서 법과 예절을 가르치고 다스렸다는 기자조선설이 있어 한때 보편화되었으나 현대에는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다. 관련 내용은 기자조선 문서 참고.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한국사 역대 왕조는 기자조선설을 긍정하고 각자 기자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도 있지만, 이건 근현대에 고고학이 전래되기 전까지는 기자조선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야 한다. 가장 이른 시기인 고구려 기준으로도 기자가 살던 시절이나 당시 고조선은 이미 수백 년 전이란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며 문헌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기자동래설 기록을 고구려가 받아들여서 자기들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 지금으로 따지면 국제연합에 가맹하는 것과 같은 위상을 지니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기자와 같은 현인이 조선에 도래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세계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는 점도 한 몫 했다. 또한, 한나라 시대 중국의 요동 낙랑 정권과 접하며 중국 문물을 수입하던 과정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3.4. 춘추시대


고조선이 직접 언급된 것으로는 기원전 7세기의 인물 관중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관자》가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단 저자가 관중이라고 전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관자'는 관중 본인이 쓴 것이 아니라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수정되었다.
다만 2000년대 이후에는 이 문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기본적으로 현재의 판본은 한나라 시대의 유향이 정리한 것이며 일부 내용에서는 전국시대 이후 '선현(先賢) 제환공의 어록'으로서 가공된 흔적이 보이기에, 연대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의문은 계속해서 제시되는 상태였다. 그에 더해 제나라#s-1가 산둥 반도 동북쪽의 내이(萊夷)를 정복하고 해당 지역을 차지하여 조선과 직접적으로 교역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원전 567년 이후로, 이 점을 고려하면 제환공 대에 제나라와 고조선이 직접 교역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학설에 따라서는 이 단락 전체를 날릴 수도 있다. 다만 이를 긍정하는 설에서는 춘추시대 보배조개를 매개체로 랴오둥 반도 ~ 묘도 열도 ~ 산둥 반도에 이르는 교역이 수행된 것에 주목하며, 제나라와 고조선이 간접적으로 교역했더라도 중국의 사서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아래 서술에서도 고조선은 직접 활발히 교역한 대상보다는 '8000리'나 되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 거의 지상세계의 끝에 있는 외지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추론이 꼭 무리한 것만도 아니다. 이러한 추론엔 사실상 전혀 무리가 따르지않는다.

桓公問管子曰:「吾聞海內玉幣有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陰山之礝䃉, 一筴也, 燕之紫山白金, 一筴也, 發·朝鮮之文皮, 一筴也, … (중략) … 此謂以寡爲多, 以狹爲廣. 天下之數, 盡於輕重矣.」

(제나라) 환공이 관중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해내(海內)에 옥폐(玉幣)를 얻는 데 7가지 길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관자에 대답해 말하기를 "음산의 옥돌이 한 가지요, 연나라 자산(紫山)의 백금이 한 가지요, 발과 조선의 무늬 있는 가죽이 한 가지요, … (중략) … 이것들(7가지의 옥폐)을 일컬어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당한다고 하고, 좁은 (곳에서 나는) 것으로 넓은 (곳에서 나는) 것을 당한다고 합니다. 천하를 셈하는 법이 경중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관자』 규도편}}}

桓公曰 四夷不服 恐其逆政 游於天下 而傷寡人 寡人之行 爲此有道乎。 管子對曰 吳越不朝 珠象而以爲幣乎。發·朝鮮不朝 請文皮毤【他臥切 落毛也。】服而以爲幣乎。 … (중략) …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 (중략) … 故物無主 事無接 遠近無以相因 則四夷不得而朝矣。

(제나라) 환공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아, 천하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여 과인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 과인의 행함에 길이 있는가?" 관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오나라월나라가 입조하지 않으면, (그들의) 구슬과 상아를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발과 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무늬있는 털가죽【발음은 타(他)와 와(臥)의 반절이다. 낙모(落毛)를 말한다.】과 옷을 청하여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 (중략) …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8000리 밖의 발과 조선에게서 입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중략) … 물건에 주재하는 바가 없고, 일에 접하는 바가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이 서로 관계하는 바가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관자』 경중 갑 편}}}
이때 조선은 무늬있는 가죽이라는 특산물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편 조선의 앞에 꼭 '발(發)'이라는 글자가 붙어 등장하는데, 다른 문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方五千里 至于荒服南摭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 羌 北山戎息愼東長鳥夷 四海之內 咸戴帝舜之功。

사방 5000리를 정복하여, 황복(荒服)에 이르러 남쪽으로 교지와 북발을, 서쪽으로 융과 석지와 거수와 강과 저를, 북쪽으로 산융과 과 식신을, 동쪽으로 장이와 오이를 위무하였다. 사해의 안에 모두 제순의 공이 미쳤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사기》 오제본기}}}
위에서 황복(荒服)이란 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바깥 지역. 중국은 공간적으로 오복(五服)의 세계관을 설정하였다. 왕기(王畿)와 함께 전복(甸服)이 존재하고, 그 밖에 제후국인 후복(侯服)과 빈복(賓服)이 존재하며, 그 밖에는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의 땅인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이 존재하는데, 순임금의 덕이 그까지 미쳤다고 찬양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기록은 직접 조선이 등장하는 기록은 아니지만, 앞서 『관자』에서 등장한 발(發)이 산융과 식신의 사이에 등장하고 있다. 다만 『사기』 오제본기는 역사서로서 가치가 다소 떨어지지만, 적어도 연원이 제법 오래된 세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발(發)이 고조선을 구성하거나 인근에 위치하던 집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김한규 등은 이를 과 통한다고 보기도 한다.[51]

稷慎大麈, 穢人前兒, 前兒若獮猴立行, 聲似小兒. … 解隃冠, 發人麃, 麃者, 若鹿迅走, 俞人雖馬. 青丘狐九尾. 周頭煇羝, 煇羝者, 羊也. … 孤竹距虛. 不令支玄獏. 不屠何青熊. 東胡黃羆. 山戎戎菽.

직신은 주(麈, 큰 사슴)을 바쳤다. 예인은 전아를 바쳤는데, 전아는 원숭이처럼 서서 움직이고 목소리가 어린아이와 비슷했다. (중략) 해는 유관을 바쳤다. 발인은 포(麃)[52]

를 바쳤는데, 포란 사슴처럼 빨리 달린다. 수인은 수마를 바쳤다. 청구는 구미호를 바쳤다. 주두는 휘저를 바쳤는데, 휘저란 양이다. (중략) 고죽은 거허를 바쳤다. 불령지는 검은 여우를 바쳤다. 부도하는 푸른 곰을 바쳤다. 동호는 누런 곰을 바쳤다. 산융은 융숙을 바쳤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일주서』 왕회해 편}}}
이와 같이 발은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사기』의 기록과 합하면 중국의 동쪽 혹은 북쪽에 위치하므로, 우리가 짐작하는 고조선의 위치(요서 ~ 요동)와도 대략 합치한다. 더불어 가죽이 특산물인 것이나 사슴류의 사냥감을 잡아 바쳤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수렵 민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발과 조선을 별개라고 주장하지만 발이라는 국가에 대한 실체도 없고 제대로된 기록 조차 없다. 그냥 주장만 있을 뿐 이런 부분에 대한 규명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

3.5. 전국시대


고조선의 흔적이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고조선이 연나라#s-1와 접하기 시작한 기원전 4세기경의 기록이다. 서한 말의 유향이 정리한 《전국책》에서 유세객 소진연나라#s-1 주변의 여러 국가들을 열거하는데, 여기서 고조선이 등장한다. 이 무렵 연은 에게 크게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는데, 이를 틈타 조선도 대부 등의 관직을 두고 왕을 칭하는 등, 연과 맞섰다. 특히 이라는 칭호는 본래 주나라 천자의 칭호로, 전국시대 당시에는 참칭하는 왕조가 늘어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는 칭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가 크다.[53] 이 당시 고조선은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요녕성과 길림성 일부 지역의 부족국가들을 복속시키며 통일시키고 이후로도 한반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영역까지 복속시키며 칭왕을 할 무렵인 기원전 323년 경에는 요녕성 전역과 길림성 일부지역 및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까지 아우르는 현대의 남북한을 합친것과 비슷한 수준의 상당히 넓은 국토와 강대한 국력을 지니고 있던것으로 보인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기자의 후예 조선후주나라#s-1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을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을 설득하게 하여, 연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위략》}}}
그러나 기원전 4세기말에 이루어진 연 소왕의 개혁으로 연나라는 반전에 성공한다. 기원전 300년~282년 무렵 연은 제나라와 함께 진개의 활약으로 동호, 조선에게서 각각 패수(국경)로부터 1천 리, 2천 리 땅을 얻었다고 한다. (고조선-연 전쟁 항목을 볼 것) 대체로 동호 원정과 조선 원정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져 두 세력에게서 탈취한 지역에 5군을 설치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조선이 잃었다는 이 2천 리가 정말 사실 그대로의 서술인지는 논란이 많으나, 어쨌건 고조선에게 막대한 타격을 안겼음은 분명하다. 근데 하나같이 1000 단위로 끊김을 보아 대충 어림잡은 것 같다.[54]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 燕亦築長城自 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그 뒤에 연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 동호)에 인질로 갔는데 호가 그를 지극히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깨뜨려, 동호가 1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을 찔러 죽이려 한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다. 연은 또 장성을 쌓아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렀으며,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고 동호를 막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사기》 흉노 열전}}}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이후에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졌고, 연은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조선이 마침내 약해졌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위략》}}}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연의 전성기 때부터 일찍이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사기》 조선 열전}}}
이후 조선은 청천강 이남으로 영토가 줄어들어들었고 고고학적인 자료를 볼때 연나라에 복속되지 않은 지역도 고조선의 지배영역에서 이탈하여 본래의 거점을 잃고 한 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일부지역을 아우르는 정도의 영역만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즉, 후발주자인 부여보다도 영토가 훨씬 작은 소국이 되어버린 셈이다.[55] 이렇게 고조선이 강대한 군사력을 지녔던것과는 별개로 요동지역을 한번에 다 내주고 연나라의 전성기가 지났을 무렵에도 영토를 회복하지 못한데에는 연맹왕국 체제의 한계가 작용한것으로도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며[56]연나라는 요동까지 군현 지배를 확립한 것으로 보이며, 요동 반도 곳곳에 연대가 기원전 2세기 ~ 3세기까지 올라가는, 연나라의 것으로 보이는 연화보-세죽리 청동기 문화 유적이 이를 뒷받침해준다.[57] 이 시기부터 명도전 등 중국계 화폐를 매개로 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확인이 되고 후대에도 화폐로 계승된다.
고고학적으로도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세기 초를 기점으로 획기적으로 변동된다. 이 시점 이후 요서 지역은 토착 문화 전통의 물질 문화가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그 자리에 전국연(戰國燕)의 지방 문화인 미안구 유형(眉眼溝類型)이 형성된다. 요동 지역은 요서 지역보다는 덜하였지만, 과거 정가와자 유형의 분포권과 요동 남부의 연해 지역이 전국연의 미안구 유형 분포권으로 변모된다. 이 시기 요령 지역의 전국 연 문화 분포 지역은 대부분 기존의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십이 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옛 쌍방 유형·강상 유형과 정확하게 일치된다. 이와 동시에 요동 지역의 미안구 유형 외곽 지역에는 철령시(鐵嶺市)와 서풍현(西豊縣) 일대로부터 길림성 서남부의 동요하(東遼河) 유역에 걸친 지역에 사가가 유형(謝家街類型)이, 청원만족자치현(淸原滿族自治縣) 중북부에 임가보 유형(任家堡類型)이, 대련(大連) 시구를 중심으로 한 요동 반도 남부에 전국 연 문화와 공존하고 있던 윤가촌 유형(尹家村類型)이, 태자하 중상류역 본계 시현(市縣) 일대에 유가초 유형(劉家哨類型)이, 혼강 중상류역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 동부 산간 지역에 대전자 유형(大甸子類型)이, 평양(平壤) 중심의 대동강(大同江)~재령강(載寧江) 유역에 고산리 유형(孤山里類型)과 같은 소규모 지역 문화가 형성된다.
기원전 3세기 요령과 서 북한 지역에 걸친 지역에서 확인되는 전국 연 문화와 기타 토착계 물질 문화 가운데 요령 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요한 유물 요소 가운데 하나인 동검이 중심적인 유물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윤가촌 유형·유가초 유형·대전자 유형·고산리 유형이다. 이 가운데 윤가촌 유형은 전국 연 문화권 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국연에 점령당한 지역 내 토착 집단의 문화로 볼 수 있다. 유가초 유형에는 조형병식(鳥形柄式) 동검 등 북방계 동검의 속성이 복합된 동검 또한 포함되어 있다. 또한 다뉴 기하문 경(多鈕幾何文鏡)의 제작이 사실상 중단된다. 이에 반해 요동 동부의 대전자 유형과 고산리 유형은 비파형 동검의 후계 형식인 중세형 동검(中細形銅劍)과 세형 동검(細形銅劍) 뿐만 아니라 다뉴 기하문 경 등의 청동기가 유물 복합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요동과 서 북한 지역의 물질 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를 기점으로 새로운 유형으로 다시 한 번 변동되는데, 대전자 유형은 부여계(夫餘系) 동병 철검(銅柄鐵劍)과 적석묘(積石墓)로 상징되는 망강루 유형(望江樓類型)으로 전환되는 반면, 고산리 유형은 세형동검·목곽묘로 상징되는 정백동 유형(貞柏洞類型)으로 변모된다.
이 가운데 대동강~재령강 유역이 단연 주목된다. 그 이유는 고산리 유형이 이 지역 재래의 청동기 문화인 신흥동 유형[新興洞類型, 팽이형 토기 문화]이 아닌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을 직접적인 계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식(漢式)묘제 및 유물과 공반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의 중심이 형성되어 있던 심양 지구에는 정가와자 유형의 유물 복합이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그 자리에 전국 연 문화 관련의 성지· 취락지· 매납 유구 등이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물질 문화 양상은 고산리 유형이 바로 준왕(準王)고조선[고산리 유형 고산리류(孤山里類)]과 위만 조선(衛滿朝鮮)[고산리 유형 송산리류(松山里類)]의 문화라는 것을 시사한다.[58]

3.6. · 교체기와 위만의 찬탈


조선이 연에게 패퇴한 뒤 반 세기 정도가 지난 뒤에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그 크기만으로도 압박이었을 중국의 통일 국가는 요동에 무언의 군사적 압력을 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은 이에 스스로 '복속'하는 길을 택했다. 조공을 바친다 해놓고 찾아가지도 않은 걸 보아 눈치를 보고 있던 것 같다. 『염철론』에서는 조선을 멸했다고 말한다. 두 나라 사이에는 안전이 보장된 근거인 공지(空地)가 있었다. 그러나 진에서 발생한 대혼란으로 오히려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는 등 이 시기에 조선이 힘을 비축해 나가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否死 其子準立。

진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몽염을 보내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가 즉위했는데 진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자, 그 아들 이 즉위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위략》}}}

秦旣幷天下 東絶沛水 幷滅朝鮮 南取陸梁 北卻胡 狄 西略氐 羌 立帝號 朝四夷。

진이 이미 천하를 병탄한 뒤에, 동쪽으로 패수를 끊어 조선을 병탄하여 멸망시키고, 남쪽으로 육량(백월 세력)을 취하고, 북쪽으로 호와 적을 물리쳤으며, 서쪽으로 강과 저를 약취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세우고, 사방의 오랑캐에게 조공을 받았습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염철론》 주진편}}}
그러다가 · 교체기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틈을 타 조선이 중흥에 성공했다. 이 시기 고조선은 공백이 생긴 서북쪽의 패수까지 다시 영토를 회복한 듯하다(다만 이러한 기사들은 이민족의 침탈을 강조하는 기사로서 고조선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정확한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패수 위치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요동군이 있는 요하 인근은 한이 장악하고 있었고, 청천강이 조선이 위축되었을 당시의 경계로 비정된다고 보면 압록강 설이 유력해진다. 단 이 경우를 떠나면 패수는 고대 한반도 북부 관련 기록에서 원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강 이름이 패수라기보다는 아예 '패'가 강을 뜻하는 일반 명사가 아니냐는 설도 있다. [59]

大夫曰 往者 四夷俱强 幷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東越越東海 略浙江之南 南越內侵 滑服令 … (후략) …。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 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wiki style="text-align: right"

《염철론》 비호편}}}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이 일어나자, 먼 곳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고쳐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짓고, (조선을) 연에 속하게 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위략》}}}

二十餘年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20여 년 뒤 진승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사기》 조선 열전}}}
이 무렵 고조선은 연 · 제 · 조 등의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국력을 키워나가며 위상을 높여나가고있었다 그런데 고조 시기 연왕 노관의 난을 틈타 조선에 망명해온 연나라 사람 이 중국 유망민 세력을 결집했다. 위만은 사기에는 만이라고만 하고, 위략에서는 위만이라고 한다. 위(衛)는 성씨가 아니라 관직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남해군위(南海郡尉)였다가 남월을 건국자가 된 조타가 위타(尉陀)로도 불린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위만이 망명할 당시 상투를 트는 조선식 복색을 하고 있어서, 이병도 등은 위만이 처음부터 조선인이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현대에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학설이 강세. 어차피 당시에는 국적이나 명확하게 선그어지는 영토 및 국경도 없고, 특히 요동반도 같은 경우 진개의 요동경략 이후 연나라가 선양 등 중심지를 제외하고는 재지세력과 연나라 사람들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그냥 국가적 정체성이 모호한 변경 사람일 수도 있다. 너무 괘념치 말자.
위만이 유망민 세력을 결집한 것은 조선이 대륙의 혼란기에 획득한 옛 공지(空地)에 만을 책봉하고 중국 유망민을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신흥 세력의 결집이 쉬웠던 것이 작용했던 듯하다. 만은 한이 쳐들어온다는 거짓말로 준을 속인 후 준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수도를 왕험(검)성으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3.7. 위만조선의 운영과 멸망


위만은 앞서 언급했듯 고조선 중심 계층의 입장에서는 외래인이었고, 위만조선기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운영은 중국계 유이민을 포함한 위만 세력과 토착 세력인 상(相) 세력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아래에서 서술하듯, 위만조선 정권 내부에 문제가 있을 때는 상(相) 세력이 자신들의 산하 세력을 온존하면서 위만조선에서 이탈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위만조선 단계까지도 고조선에서 군현제와 같은 직접 통치에 입각해 제어한 지역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60]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다. 위만조선은 그것을 대외 무역으로부터 찾았다.
위만은 즉위 직후 한과 외신(外臣)의 약조(約)를 맺고 중국에서 철제 농기구 및 무기, 가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적인 유물은 나오지 않아 철기가 아주 널리 쓰이거나 직접 제작되지는 못한 듯하다. 당시 한나라의 집권자 여후시대는 흉노에 시달려 외부확장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으므로 위만조선은 안전을 보장받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한나라 방면 안정과 선진문화의 전수를 바탕으로 위만은 진번, 임둔까지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였고, 손자 대인 우거왕 대에는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진국, 중국으로 표현)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막고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였다.

會孝惠 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이때는 효혜제와 여후의 때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어, 요동 태수가 곧 만과 외신의 약조를 맺어 요새 밖의 오랑캐를 지켜 국경을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듣고 허락하였다. 약조를 통해 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고 그 방면의 소읍을 침략해 항복시켜, 진번·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지나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인 것이 많았고,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방향의 여러 나라가 상서를 올려 천자를 뵈려고 해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사기》 조선 열전}}}
이렇게 주변을 복속시켰다고 하였으나, 아래의 마한 왕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마한과는 마찰이 있었고, 후에 전쟁을 할 때도 주변국의 원조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남부 한반도에 대한 복속은 위기 상황에서 도움이 될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국가들도 초기에는 그랬듯이 일종의 연맹적인 성격을 가졌던 조선은 변방 세력이나 유력자들의 이탈이 때때로 일어나곤 했다. 기원전 128년 의 군장 남려가 이끄는 창해군이 이탈을 시도했고, 준왕의 몰락시에는 토착 군장 세력으로 추정되는 상(相)들 중에서도 이탈하는 사람이 있었다(역계경).
그러나 가장 큰 위협은 단연코 동북아의 패자로 떠오르는 전한이었다. 한무제 유철이 제위에 오르면서 중국 대륙 주변국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흉노 제국 원정으로 시작하여 남월이 원정 대상이 되었고, 조선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더불어 『사기』 위현전에서는

東伐朝鮮 起玄菟 樂浪 以斷匈奴之左臂。西伐大宛 並三十六國 結烏孫 起敦煌 酒泉 張掖 以鬲婼羌 裂匈奴之右肩。 單于孤特 遠遁于幕北。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 · 주천(酒泉) · 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흉노와 조선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서술이 남아 있다.[61]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도록 해 주는 다른 기록은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한무제가 조선 원정을 밀어붙인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이 흉노를 견제한다는 명분에서였음은 분명할 것이다.
한나라와의 전쟁의 계기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섭하가 교섭에 실패하자 조선의 비왕(裨王)을 살해하고 도망간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 정부는 처벌은 커녕 도리어 섭하를 요동 도위에 부임시켜 공을 치하했다. 이는 조선과의 전쟁을 유인하는 미끼 작전으로 평가되는데, 과연 고조선이 군사를 파견해 섭하를 살해하면서 한과 고조선 사이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수군과 육군의 양동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수군이 지지부진하고 고조선은 장기 항전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지연되자 한의 장군 측에서는 평화 관계를 제안해 왔으나, 한나라가 고조선의 태자에게 호위 무장 없이 국경선인 패수를 넘으라고 요구한 것을 고조선이 거부하여 전쟁이 다시 개시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1년간의 항전에 나섰으나, 장기화된 전쟁으로 조선 상(相) 세력이 이반하여 니계상 혹은 참(參)에 의해 우거왕이 살해당했다. 이후 성기에 의해 항전 세력이 수습되었으나, 끝내 한군에 의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평양의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며, 산하에 존재했을 읍락국가들이 대두되면서 한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3.8. 준왕의 남하


한편 준왕은 삼한 지역으로 망명하여 왕위를 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이후의 대표적인 기록인 삼국지 등에 따르면 그 대가 끊어져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경 '마한 왕'이 백제신라에 압박을 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온조왕이 이를 멸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를 재야사학 등에서는 준왕의 왕계로 추정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백제 기록은 고고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마한은 한번에 멸망하지도 않았고 한 나라도 아니다. 이에 더해서, 만일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내려와서 마한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후에도 마한왕 작위가 이어진다고 한들, 온조왕 시대인 200년 후까지 그 왕가가 보존되었으리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내용은 전설적 내용으로서 비슷한 시기의 해모수신화나 삼국의 건국신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맞다. 삼국사기의 초기의 국가 이름 역시 믿을 게 못 되는데, 주변 소국들을 대략 뭉뚱그려서 말갈/마한/왜 등으로 후대에 윤색한 흔적이 보읻다. 삼국지 동이전만 해도 삼한 지역에 최소 80개의 소국이 등장하는데, 삼국사기 초기의 등장국가들은 다 백제, 신라, 낙랑, 말갈, 가야계 국가들, 왜 뿐이라는 것부터가...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 及 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준왕은) 그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략에서 이르기를, 기자와 그 친족들이 나라에 있으면서 한씨를 사칭하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그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韓)인들 중에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재위 38년(기원전 20)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워,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 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박혁거세 본기}}}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서기전 19)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박혁거세 본기}}}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王慙遂壞其柵。

재위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온조왕 본기}}}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唇14)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 錦峴二城 固守不下。

재위 26년(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온조왕 본기}}}

3.9. 멸망이 미친 영향


고조선 후기와 멸망 시기에 걸쳐 많은 고조선 유이민들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반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4. 위치와 강역


[1] 정식 명칭은 朝鮮(조선)이지만 위만조선과 앞선 조선들을구분하기 위하여 를 붙인다. 참고로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의 국명이 '조선'인 이유 역시 옛 고조선계승한다는 의미다.[2] 상고한어 발음은 벡스터-사가르의 재구에 따르면 t<r>aw [s\][a\]r, 정장상팡의 재구에 따르면 ʔr'ew sen[3] 고조선의 동북쪽에 있던 부여(포자연 문화)의 전신인 서단산 문화는 요령식 비파형 동검 문화권 안에서 속했는데, 이들은 요동 지역의 미송리형 토기와 유사한 서단산형 토기를 사용했다. 서단산 문화는 지역적인 특색을 띠며 성장하였는데, 이후 접변하고 있던 초원계 문화가 혼입되어 이질적으로 변모했다. 참고로 해당 지도는 전성기인 기원전 5~4세기 경의 강역을 나타낸 것으로 당대 국가치고는 꽤 큰 영역을 확보했지만 연맹왕국 특성상 상당수의 영역은 간접통치하는 형태였을것이다 [4]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라 기원전 2333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기원후 1430년대에 발간된데다가(당시 조선) 증명 불가능하고 교차가능한 기록이 없다. 기원전 2000년대 부근으로 잡는 움직임은 이미 이전 고려시대 때에도 있었으나 이에 대해 문헌학적인 논란이 적지 않다. 단군기원 참조. 해당 시기의 관련 문화로 여겨지는 청동기 문화인 샤자디엔 하층 문화(기원전 22세기경부터 발달)와의 연관성은 현재 연구중이며, 아직까지는 고고학적으로 유의미한 성과가 부족하다. 실증적으로는 기원전 9세기경의 십이대영자 문화를 고조선의 연원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시기를 국가의 초기형태를 다지기 시작한 연대로 보고 있다.[5] 성립 이전이라는 말은 학문적으로는 옳지 않다. 성읍국가라는 현상 자체는 고조선보다 앞선 시대에 나타나 이들과 공존하였으며 삼국시대 초중기까지 혼재. 단순히 선후관계로 파악할 수는 없다.[6] 기존 단군신화에서는 이를 두고 아사달과 장당경이 평양, 오녀산성, 구월산 등으로 비정되곤 했지만 현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고조선은 요서에서 출발하여 요하, 평양 순으로 중심지를 옮겼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르면 아사달은 차오양, 장당경은 선양에 위치한것으로 비정되는 셈이다.[7] 고조선의 군주가 단군이라고 불렸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단군 신화를 통해 유추한다. 그러나 이는 이병도를 위시한 현대 사학 극초기의 연구자들이 언급한 정도이며, 최근 연구에서는 단군 신화에 대해 청동기시대의 시대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는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8] 단군신화에도 언급되는 명칭이지만 왕검성(왕험성)이라는 지명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9] 조선의 지도자를 중국에서 후로 불렀다고 한다. 물론 주나라#s-1.1 왕실이 직접적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전국시대 각국의 지배자인 제후들과 동등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王)의 경우는 중국의 전국칠웅에 속하던 연나라#s-1를 따라 고조선의 군주(조선후)가 후(侯)에서 왕(王)을 칭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연이 칭왕한 것이 기원전 323년 연역왕 대이므로 그 근처의 어느 시점 이전에는 후(侯)로, 그 이후에는 왕(王)으로 불린 것이 된다.[10] 부왕, 준왕의 경우, 그 성씨가 한씨 족보 등을 통해 전해지나, 실제로 해당 시대에 성씨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당시의 사서나 금석문 등의 증거는 없다. 고구려 초기까지도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의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준왕을 축출하고 왕이 된 위만조차도, 처음으로 언급되는 사마천사기에서는 만(滿)이라는 이름으로만 기록(朝鮮王滿, 故燕人也.)되어 있으며, 배송지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위략이라는 역사서에서 최초로 위만(衛滿)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11] 춘추전국시대진한교체기, 위만조선기에 다수의 피난민이 유입되었고, 춘추전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한 청동기가 발굴되었다.[12] 현대 한국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단군조선 다음은 위만조선으로 본다.[13] 연소왕이 진개를 보내 조선을 침공한다.[14] 랴오닝성지린성 일대[15] 평안도황해도 일대[16] 경기도 북부와 강화도 일대[17] 신라본기 시조혁거세본기에 '신라 6촌의 주민들은 본래 조선의 유민이다.'라는 기록으로써 조선이 한 번 언급된다.[18] 인명, 지명 등에서 아침 조朝를 '아사'라고 읽는 경우가 더 많다. e.g. 아사히(朝日, 조일) 신문 등[19] 북한에서도 고조선 유적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어 1960년대에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1960년대 중후반에 고고학계에 한 차례 숙청 바람이 분 이후에 여러 문제로 신뢰성이 낮아졌다.[20] 예컨대 환인이라는 신의 이름은 불교의 인드라가 투영된 것으로 여겨지며, 단군이 단군이 1908세를 살았다는것은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다보니 조선에서 이를 단군 수십명의 재위기간을 합산한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을 정도.[21] 다만 이런 관점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애초에 역사는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데, 사실 자료도 부족하고 시대적 한계도 있는 고대국가의 강역이나 길이 문제는 답없는 논쟁이라 잘못하면 맹목적인 국수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 사실 미국만 봐도 알 수 있듯 한 나라 역사의 길고 짧음은 그 나라의 번영과는 크게 관련없다.[22] 삼국유사에는 주석으로 "고조선이 요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건국되었으나...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다." 하고 서술하였다[23] Xiaoping Yang, Louis A. Scuderi 외, 2015, "Groundwater sapping as the cause of irreversible desertification of Hunshandake Sandy Lands, Inner Mongolia, northern China"[24] "New Thoughts on the Impact of Climate Change in Neolithic China", 미 Archaeology 학술지 해설기사 참조 #[25] 이 때문에 송호정 교수의 경우 지석묘나 석관묘를 주로 만든 예맥·한반도의 문화와 다르므로 하가점하층문화를 중원문화로 보고 고조선과는 연관이 없는 문화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다만 후술할 고조선 문화권의 연원 분석을 보면 관련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어 현재로서는 어떠한 문화권에 속한다는 단정보다는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흐름을 좀 더 이해하고 후속 연구결과를 계속 살펴봐야 할 것이다.[26] 일반적으로 기후 하강으로 인해 해체된 문화이므로 중앙아시아 및 몽골 고원 등 북부에서 유입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실상은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일단 하가점 하층문화의 문화적 특성 자체를 보면 나무 판재로 무덤곽을 짜서 매장하는 등 룽산 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25] 요서지역 인골의 체질인류학적 분석에서도 하가점하층문화 이전 고동북 유형 인골이 일관되게 발굴되다가 하가점하층문화 이후 고화북 유형과 고동북 유형의 인골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요서지구 선진시기 거주민의 체질인류학과 분자고고학연구』, 2009, 지린대학교) 종합하자면 요서의 토착문화였던 소하연(샤오허옌) 문화의 요소에 문화 소멸로 인한 인구 유출과 황허 문명권으로부터의 유입이 겹쳐 룽산 문화의 요소가 일부 가미되어 형성된 것이 하가점 하층 문화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27] Shelach, Gideon, 1999, "Leadership Strategies, Economic Activity, and Interregional Interaction: Social Complexity in Northeast China", Springer[28] 김재윤, 2005,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의 전환기 연구[29] 烏恩岳斯圖, 2007,『北方草原考古學文化硏究-靑銅時代至早期鐵器時代』, 科學出版社, 본 문헌에서 샤자덴 하층문화와 상층문화의 지층구조와 연대를 분석하며 하층문화의 하한 연대를 상대 중기인 기원전 14세기로 분석한 바 있다.[30] 궈다순(郭大順), 1987, 「試論魏營子類型」, 위영자문화는 샤자덴 하층문화 만기의 문화와 도기의 문식(紋飾)과 기형(器型), 홍도의 비례적 증가 경향이 매우 유사하며, 청동기 제조방식의 분석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여 승습관계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궈다순은 "시간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문화 관계에서 변화가 비교적 크더라도, 두 문화 간의 승습 맥락을 찾을 수 있다"라 한 바 있다.[31] 그러나 위영자문화는 앞서 얘기한 하가점 하층문화와 연속되는 문화는 아니다. 기존의 하가점 하층문화가 소멸한 후 약 1~2세기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재결합 과정을 거친 문화이며, 따라서 공간적으로도 산맥 하나를 경계로 미묘하게 다른 위치에 있다.(하가점하층문화는 내몽골 츠펑, 위영자문화는 랴오닝성 차오양)[32] 烏恩岳斯圖, 2007,『北方草原考古學文化硏究-靑銅時代至早期鐵器時代』, 科學出版社[33] 농경보다 유목적 문화인 산융족으로 추정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 하가점 상층문화는 하층문화와 연속되는 문화가 아니다. 이 역시 기후변화가 원인인데, 기원전 14세기경 기후조건이 한랭 건조해지며 온난한 기후의 지역이 저위도로 남하하며 하층문화를 영위하던 민족은 상나라 및 요서 조양지역으로 이민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앙아시아에 있던 유목계열 부족이 성립시킨 문화가 상층문화라는 것이 중론이다.(배진영, 2012, "기후변화와 동북아시아 고고문화의 변천 - 燕山 南北 지역을 중심으로 -")[34] 일부 유사역사학계에서는 하가점 일대의 상/하층 문화를 모두 고조선의 문화로 판단하기도 하나 상층문화는 유목적인 성격이 강해 농경문화로 여겨지는 고조선의 문화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하가점 상층문화에는 고조선의 표지유적이라 볼 수 있는 비파형동검이 굉장히 많고 조밀하게 발견되어 단순히 관련성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35] 烏恩岳斯圖, 2007,『北方草原考古學文化硏究-靑銅時代至早期鐵器時代』, 科學出版社[36] 요사 지리지 기록에서의 "동경요양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여담으로 요사의 해당 부분은 선양의 정가와자 유형이 고조선 계열 문화라는 점 또한 증빙한다.[A] A B 십이대영자 문화는 기원전 6~4세기 허베이성 북부의 동남구(東南溝)~옥황묘 문화 옥황묘 유형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후기 북방계 유물 요소를 수용하게 되었고, 이러한 교류 과정에 십이대영자 문화의 중심이 십이대영자 유형기(기원전 8세기~7세기 경) 십이대영자 문화의 중심 지역이었던 조양(朝陽) 일대에서 요령성 서부의 객라심좌익 몽고족 자치 현 일대로 옮겨지며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십이대영자 유형의 유물 전통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던 주민 집단이 요령 동부 쪽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랴오허 동쪽 심양(선양시) 일대에 중심을 둔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한편 연구자에 따라 남동구 석곽묘를 비롯한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을 정가와자 유형을 중심으로 랴오허 양안에 형성되어 있던 고조선 연맹체에 대비된 또 하나의 고조선 연맹체로 보고, 이 고조선 연맹체가 『위략』에 언급되어 있는 조선후(朝鮮侯)의 고조선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 #)[37] 십이대영자문화 남동구 유형 말기의 건창 동대장자 유적군이 이러한 전국연문화 동화 경향을 보여준다.[38] 오강원, 『비파형 동검 문화와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청계, 2006)[39] 위 내용출처 : #[40] 출처 : #[41] 오강원, 『비파형 동검 문화와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청계, 2006)[42] 김정배, 『한국 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고려대학교 출판부, 1986)[43] 중국 전국시대 각국의 역사 중 귀감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놓은 책.[44] 문제는 소진의 활동 연대 또한 후대의 착오 내지 의도적인 재배치로 인해 끌어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45] 2016년 심재훈 단국대학교 교수에 대한 기사 참조. 심재훈은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을 비롯해 기자조선설 등 중국 측의 역사적 공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고조선에 대해서도 기원전 4세기 이전을 '국가' 단계로 설정하는 데 비판적인 입장이며, 이러한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국가가 아니라 지역 이름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위의 기사에서 나타나는 '요동'이라는 말 또한 '요동'이라는 지역이 있었음을 말해줄 뿐, '요동'이라는 국가가 있었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는 학계 내에서 건전하게 논의되는 수준에서 가장 비판적인 입장 중의 하나이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이전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 단계로 발돋움했다고 보고는 있다.[46] 다만 조선의 국호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요동 지방의 선대 고조선 문화는 오히려 한반도 남부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반도 북부는 고유의 문화적 양상이 비교적 보존된다는 점은 아직까지는 미스터리이다.[47] 고산리 유형은 이뿐만 아니라 고조선 멸망기인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식(漢式)묘제 및 유물과 공반하는 경향을 보여 고조선 말기의 유적으로 유력하다.[48] 위 내용출처 : #[49] 정확하게는 단군조선이 아니라 왕검조선으로 기록하긴 했으나 둘의 차이는 없다.[50] 새를 토템으로 하는 조이족(鳥夷族)이라는 주장이 있다. ##[51] '발'과 '맥'이 서로 통한다는 근거라면 후대의 고구려를 토번에서는 무쿠리, 돌궐에서는 뵈클리라고 표기했는데 무쿠리와 뵈클리 모두 '맥고려'의 음차일 것이라고 언어학계에서 추정하는 데 있다.[52] 상고한어 발음은 (정장팡상 재구 기준) /*braːw/나 /*pʰrawʔ/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어떤 동물 이름의 음차로 보인다. 머리는 뿔 달린 사슴과 닮고 다리(灬)는 말(馬)에 가까운 어떤 동물을 형상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동역사에서는 발음은 같으나 자형이 다른 麅(포)라는 동물이 조선에 많다고 쓰고 있는데,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서식이 확인된 바 있는 노루(많은 옥편에서 이렇게 서술한다)나 사불상, 와피티사슴 등으로 추정하는 의견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 부분을 끊어읽기를 잘못해서 麃麃로 생각해 '씩씩하다'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으나 오역이다.[53] 당시에는 '황제' 칭호는 없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제를 처음 자칭한 것은 진시황이며, 왕은 주 천자의 칭호에서 유래한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칭호였다. 다만 전국시대에는 이른바 '전국 7웅'이 모두 칭왕하는 등 호칭의 인플레이션이 이미 진행된 이후였기 때문에, 이를 후대 중국 통일 왕조의 황제와 비견하는 것은 무리하고 '연나라에 밀리지 않는 독자적인 군주'라는 의미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이미 10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던 전국시대 국가들의 체급을 고려하면 그것도 만만치 않은 선언이었다. 물론 선언이 곧 국력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당장 원술이 황제를 자칭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황제 취급 해 주던가(...). 물론 당시의 고조선이 상당히 강대한 국력을 지니고 있는것은 맞기는 하다.[54] 중국 기록, 특히 고대에 가까워지는 기록일수록 1,000 혹은 10,000이라는 숫자는 상상할수 없을 만큼 "크다!" 혹은 "강하다!"라는 개념이지 실제로 정확한 수치를 기록해 기술한 것이 아니다. 또한 영토의 경우에도 자신들이 어림 잡아 판단한 근거로 기술한 경우가 많다. 위략이 쓰여진 시기로 부터 수백년이 흐른 뒤 저술뒨 신당서에는 신라의 영토를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橫千里, 縱三千里)원문)"라고 기록해 놓기도 했다.[55] 후에 백제가 본래의 거점인 위례성과 한강 일대를 상실하고 한 동안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만을 지배하는 국가로 영토가 크게 축소된것과 모양새가 비슷하다.[56] 물론 중앙집권 국가였다는 제나라도 성 두개만 빼놓고 죄다 연나라에게 내주었기는 했다. 하지만 연소왕 사후에 죄다 탈환하기는 했다.[57] 요동 반도 전체를 연나라가 점령했다는 것이 과거 학계의 중론이었지만, 최근에는 고고학의 성과로 인해 요동 반도 곳곳에 아직도 상당수의 연문화와 결합한 토착 문화가 남아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즉, 연나라가 요동 반도의 중요 거점만 장악하고 나머지 지역은 토착세력과 연대를 강화해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다.[58] 위 내용출처 : #[59] 춘추전국시대 당시 하(河)는 황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 강(江)은 장강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였으며 대개 일반적인 강은 낙수, 역수, 회수, 분수 등 수(水)로 끝나는 경향을 보이기에 다른 문명권이었던 조선에서 패라는 고유명사로 하천을 지칭했던 것은 큰 무리가 있는 가설은 아닌 것이다. [60] 이는 이후 고조선의 영역이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개 군으로 나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낙랑군을 제외한 군현들은 고조선에 대한 정복 전쟁 이후에도 아직까지 세력이 꺾이지 않은 현지인의 반발로 폐지되거나 축소, 후퇴, 통폐합되기도 하였다.[61] 이에 대해 조선의 관직으로 나타나는 비왕(裨王)이 흉노의 관직 중 하나인 비소왕(裨小王)과 유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먼 훗날 백제 개로왕 대에도 흉노의 좌현왕·우현왕 제도를 수입하는 것이 확인되는 등, 설령 이러한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흉노와 직접적인 정치적 관계가 있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어서 급진적인 설 중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과거 제 5-7차 국정 국사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고조선의 세력 범위.
현재는 '동이족의 분포'와 같은 정의는 사용하지 않으며, 탁자식 고인돌도 한반도 남부에서 추가 발견되어 개정되었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문제 또한 사학계의 꾸준한 떡밥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고대사가들에게는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 탁자식 고인돌, 거친 무늬 거울 등의 출토 지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영역을 파악하는 태도가 있어 왔고 다수설을 차지하였으나 현재는 폐기되었다. 왜냐하면 탁자식 고인돌과 미송리식 토기의 발견 위치가 서로 상이하고 이들을 같은 문화라고 보기에는 이질성이 매우 강해서 고조선이라는 한 집단의 표지로 삼기는 힘들기 떄문이다. 또한 비파형 동검 자체가 하나의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양식이 아니었으며, 토기 양식 또한 특정 문화의 파급 정도는 알 수 있어도, 국가의 영역을 파악하는 척도로 활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애당초 비파형 동검 자체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세 가지 이상의 양식으로 나뉘어져 있다. 때문에 어느 문화권을 고조선의 문화권이라고 특정 짓기가 매우 힘들다.

4.1. 평양 중심설


기존의 사서 기록 및 평양 지역에 남은 다수의 설화, 그리고 일제강점기 본격화된 발굴 작업으로 인해 평양에 고조선의 수도가 존재했다는 평양 중심설이 주류설이었다.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해석은 한 대 이후 다수의 중국 문헌과 <삼국사기> 이후 확인할 수 있는 한국의 다양한 전통 문헌 속에서 누차 확인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다수의 실학자들 또한 동의한 것이다. 또한 낙랑군의 치소가 '조선현'이기 때문에, 군현의 이름이 대체로 현지의 지명에서 비롯하므로 상식적으로 조선현이 있는 낙랑군이 고조선의 중심지일 것이라는 추론이 일반적이다. 또한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대인 전한, 후한 대의 기록 대다수도 낙랑군이 고조선의 옛 지역에 설치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만 일찍이 신채호는 '삼조선설'을 제시하여 고조선의 범주를 확장했으나, 삼조선설 자체가 사료의 오독에서 비롯되었고 고고학적 근거보다는 본인의 추측에 의거하여 설을 전개하는 경향이 커 현재는 사장된 상태이다.
현재 앞서 언급하였듯 정가와자 문화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요동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이 주목을 받고, 현대적인 중심지 이동설이 제시된 현재에는 대체로 진개의 원정으로 인한 중심지 이동 이후에 평양이 수도로 자리 잡았다는 설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대 국내 고조선 연구를 대표하던 인물 중의 한 명인 한국교원대학교 송호정 교수[62]는 요동 지역의 정치적 중심성이 생각보다 미약하며, 한반도 서북부의 비파형 동검 문화와 세형 동검 문화의 연속성이 강하다는 입장에서 평양 중심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2012년의 논문 또한 한국사의 초기 국가 형성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온 고려대학교 박대재 교수 또한 진개의 원정 당시 점령된 지역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아니라고 보면서, 중심지 이동설에 대해 사료적 해석이 과잉되었을 수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친 바 있다. 2017년의 논문(클릭 시 다운로드)
다만 이와 같은 해석에는 정가와자 문화와 팽이형 토기 문화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며 팽이형 토기 문화가 정가와자 문화보다 후진적이라는 점이 있어, '어떻게 팽이형 토기 문화에서 기원한 고조선이 정가와자 문화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복속시킬 수 있었나'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물론 송호정 교수 등의 인물도 세형 동검 문화의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한반도 서북부가 후진적인 문화권이 아니었다는 입장에서 여러 반론을 펴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1950년대부터 요동 중심설을 주장하였지만, 일각에서는 중심지 이동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동시에 단군릉 개건 등 민족주의적인 정치 사업을 벌이면서 의도적으로 평양 중심설을 정부의 공식 주장으로 내세웠다. 때문에 1980년대 이후 북한학계의 학설은 비학술적인 정치적 주장으로서, 학문적인 가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4.2. 요동 중심설


요동에 고조선의 중심지가 있다는 주장은 조선 후기에도 드문드문 제시된 것으로 보이고(위에서 링크한 박대재 교수의 논문 참조), 1950년대 이후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 등이 종합되면서 북한 학계에서 요령 인근설이 제시되었다. 이후 한국 사학계도 이를 받아들였으나, 평양 중심설 또한 부정하기에는 많은 사료가 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혼란상을 보였다. 고조선의 가설상의 위치를 요령 인근으로 옮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료 중의 하나가 기원전 4세기 『전국책』 연 조에 등장하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 기록에서 소진은 "연의 동쪽에는 조선 ·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해석에 여러 문제가 있지만, 문면 그대로 해석하면 조선은 요동에 위치했거나 그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것이다.
한편 앞서 인용한 『사기』 오제본기에서도 약간의 단서가 주어진다. 조선의 구성원으로 추정되는 발(發)은 중국 기준의 북방에 존재했으며 산융과 식신 사이에 나타나는데, 산융이 요서 인근에서, 식신(숙신)이 동만주 일대에서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대략 그 사이에 존재했을 것이다. 대략 중국의 동북방이므로, 이는 발을 동이로 파악한 『일주서』의 기록과도 어느 정도 합치한다.
그렇지만 위의 경우, 모두 한반도 서북부에 조선이 존재했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는 자료는 아니다. 어쨌거나 요동 근처에 있고, 산융과 식신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둘 다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심지 이동설의 등장 이후에는 정가와자 문화 등의 고고학적 문화 또한 전기 고조선에 한정하여 설명할 수 있고, 평양에 관련된 자료 또한 후기 고조선에 한정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일한 요동 중심설의 세가 많이 위축된 모양새이다.
이외에 고조선이 요하 인근(요서 ~ 요동)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로는 연대 미상의 『산해경』이 있다. 다만 『산해경』은 굉장히 판타지한 서술 때문에 사료의 신뢰성이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은 알아두어야 한다. 또한, 『산해경』의 특성상 이 구절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제 만들어져 삽입된 것인지 알기 어렵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산해경』 해내북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어 이름을 조선 천독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물에 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산해경』 해내경}}}
각주에는 '지금의 낙랑현이며 기자가 책봉을 받은 곳'이라고 하고 있으나, 평양에 고조선이 위치했을 경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라는 서술과 어긋나게 된다. 이 때문에 보하이 해 인근(요서~요동)에 고조선이 위치했으리라고 보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가 된다. 해내경에서는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라고 해 확인사살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동해', '북해'라고 하는 것이 꼭 '동쪽의 바다', '북쪽의 바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중국의 주변이 '사해(동해, 서해, 남해, 북해)'로 둘러싸여 있다고 보는 고대 중국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표현이므로, 그냥 일반적인 '동방', '북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천독(天毒)은 해석에 논란이 많다.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은, 독(毒)은 갑골문에서 어미 모(母)와 어원이 같으며 따로 구별하지 않고 혼용해서 썼는데, '어미 모(母)'에 비녀를 꽂은 상형이 독(毒)에 해당하며 결혼해서 머리를 올린 유부녀를 뜻하기 때문에, 천모(天母)로 해석하는 것이다. "(조선은) 어머니를 하늘로 여기며[63], 물에서 살고 다른 사람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며 아낀다."로 해석된다. 또 다른 해석은 한(漢)나라 시기에 천독은 'Sindu'으로 음차되며 인도를 나타내는 '천축(天竺)' 또는 '신독(身毒)'과 유사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조선'까지만이 본래 여기 있던 본문이며, '천독' 이하의 구절은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후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창료현(昌遼, 교려, 창려), 옛 천료(天遼)이며 요서(遼西)에 속했다.(昌遼, 故天遼, 屬遼西)라는 대목이 나오는 데다, 선비족이었던 모용황이 이곳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선공에 임명되는 일도 있었다. 아래에서 인용한는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조의 '험독'과 연관지어 보기도 한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오강원은 2015년의 '현도(玄兎)'를 의미하는 구절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 어쨌든 이러한 재해석에 따르면 중국 동북쪽의 조선과 인접한 지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이때의 중국 중심지인 중원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서북부 또한 동북쪽 해안 지역이 맞으므로, 평양 중심설에 대해 완전히 반론이 되는 자료는 아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도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자료 중에는 의외로 위만조선 대의 유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확실히 보고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고조선의 왕험성 유적지 또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기존에 주목받아 왔던 대동강 남쪽의 낙랑토성에서도 주를 이루는 것은 낙랑군 설치 이후의 유물이고, 낙랑군 설치 이전의 유물은 확실하지 않다.[64]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찍이 고조선의 후기 수도를 대동강 북쪽에서 찾았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전한의 군대가 고조선의 왕험성을 포위할 때의 서술은 왕험성의 서북쪽에서 육군이, 왕험성의 남쪽에서 수군이 왕험성을 포위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 서술은 수군이 남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대동강 북쪽을 말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강 북쪽에서도 국가 단계의 왕성이라고 할 만한 유적이 확실하지 않다. 때문에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아예 평양 일대에서 벗어나서 고조선의 수도 유적을 찾아야 한다는 입론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2017년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낙랑군치와 왕험성이 무조건 일치해야한다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대동강 북안설을 고고학적 시선으로 검증해보려는 시도로써 왕험성을 요동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
또한 문헌학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듯 북한학계에서 1950년대부터 아래의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조에 달린 응소의 주석 등을 근거로 요동 중심설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중심지 이동설이 제창된 이후에도, 2000년대에 조법종과 김남중 등이 통설에 이의를 제시한 바 있다. 조법종은 <한서> 지리지 등에서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이 기원전 108년 설치된 것과 달리 현도군은 1년 늦은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고, 공신제후표에서도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이 완료된 것이 기원전 107년으로 나타남에 주목했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현도군이었기 때문에 군현이 가장 늦게 설치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2000년의 논문 2006년 출간한 책에 대한 2007년의 기사 김남중 또한 험독현이 전한 후기에는 흥경에 존재하다가 후한 대에는 요동속국 자리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고조선의 왕성이 있던 지역을 요동군 험독현이 위치했던 지역으로 보았다. 2006년의 논문
위에서 몇 차례 언급했던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조는 다음과 같다.

險瀆【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 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瓚説是也浿音普大反。】

험독【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의 왕 (위)만이 도읍한 곳으로, 물이 험하여서 '험독'이라고 했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이곳이 마땅히 험독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맞다. 패는 '보'와 '대'의 반절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조 주석}}}
전통적인 시각에서는 명백히 왕성이 아닌 곳에 왕성이라는 서술이 붙어 있어서, 새로운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료로 많은 주목을 받은 자료이다.
다만 이러한 설은 누차 언급했듯 정설은 명백히 아니며, 학계에서의 지지자는 극소수이다. 먼저 평양 지역의 경우, 늦어도 1980년대 이후에는 북한학계의 정치 논리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정상적인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문헌자료가 매우 빈약하여, 평양 지역의 고조선의 유적일 가능성이 있는 유적조차도 정확히 편년이 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때문에 아직은 정밀한 발굴을 기다려 볼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또 고조선과 낙랑군이 위치한 것으로 주류 설에서 보는 평양 지역(특히 대동강 북쪽의 평양성 터)은 고구려,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와 현 북한에서 유수의 대도시로 자리잡으며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무덤은 깎여 없어지고 부장품은 도출 내지 유출되어 모조리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없는 것 자체가 논리의 근거가 되지는 않지만, 실제로 경주 시내의 유적이나 가야의 초기 고분군, 서울(현대 이전에는 하남)의 석촌동 고분군의 일부 고분 등 도심지에 위치한 유적, 특히 평지에 위치한 유적들은 이런 이유로 고고학자들의 손길이 닿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거칠게 말해, 요동 지역에도 고조선의 수도라고 할 만한 명백한 유적이 있느냐고 하면 확답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65] 다시 말해 대안 가설이지만, 대안이 확실하지는 않다.
현도군이 분명히 낙랑군 등보다 1년 늦게 설치된 것은 사실인데, 주류 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고조선의 중심지여서 그렇다고 설명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가령 그 지역이 고조선의 변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최우선 작전 지역이었던 고조선의 중심지 점령에 비해 복속이 늦어졌다고 보아도 설명이 충분히 가능하다. 공신표에서의 기록이 1년 늦는 것에 대해서는, 왕험성 함락 자체가 아니라 공훈의 보고와 포상 결정 절차가 1년 더 걸렸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신선한 지적이기는 했지만 다른 설명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또한, 후기 고조선의 수도가 될 평양의 대안 지역으로 요동 지역을 제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다. 당장 이러한 설에서 왕험성이 위치했을 대안 지역으로 언급하는 지역은 한의 요동군의 지척에 위치하는 지역이며, 진개 점령 이후 고조선의 세력 회복에 대해서도 조금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러한 가설에서 위만조선의 중심지라고 보는 지역은 후기 고조선이 주도한 문화로 비정되는 세형 동검 문화권의 중심지와도 괴리되어 있다. 여러 모로 기존 설을 뒤엎기 위해서는 여러 보강 설명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위험성 때문에 주류 설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험독현조의 주석을 살펴보면, 응소의 주석만이 아니라 신찬의 주석도 달려 있다. 신찬의 주석은 왕험성=대동강 남쪽이라는 주장이고, 신찬이 말한 이곳 또한 평양직할시 낙랑구역에 대응하는 낙랑군 조선현을 의미한다. 당 대의 안사고 또한 응소보다는 신찬의 설명이 설득력이 높다고 보았다. 이처럼 응소의 주석은 전근대에도 설득력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음은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중심지 이동설의 입장에서는 이 주석이 고조선이 요동에 수도를 두었던 기원전 4세기 이전의 상황이라고 하여 설명하는 자료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쩌다 보니 주류 설보다도 설명이 길어졌는데, 하여튼 결론만 다시 말하자면 현재로서는 주류 설은 아니다. 다만 어쨌든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은 학계에서 정식으로 논문으로 공표되는, 일정한 내적 논리를 인정받은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조선이 평양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매장당한다'는 식의 이덕일류의 주장은 위와 같이 학계에서 고조선의 평양 중심설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는 데서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입장에서 보는 경우에도 고조선이 하북 지역에 위치했다느니 하는 이덕일류의 설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사짜이다. 하북 지역의 경우 고조선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중국 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지역이며, 그것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가 발전하는 기초 토양이기 때문이다. 그냥 이덕일류의 주장이 거시적인 맥락에서 볼 때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굳이 첨언하면, 하북이 조선의 영역이라는 주장은 대부분 ① 사료의 잘못된 해석이나 ② 낙랑군이 요서 지역으로 후퇴한 이후의 자료, 또는 ③ 기자조선설과 관련된 잘못된 자료를 가지고 아득바득 우기는 모습을 보인다. 이 항목에 덧붙여진 다음과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동방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서 간다.

회남자(淮南子)

먼저 ①의 대표적인 사료이다. 회남자에서는 (중국적 세계관의) 동쪽 끝은 갈석과 조선을 지나서라고 되어 있다. 갈석(산)은 하북성(河北省) 창려현에 있으며 노룡현(盧龍縣)과 같은 부근의 지역이라고 해서 조선이 하북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독해 자체가 잘못되었다. 갈석산에는 '~부터(自)'라는 표현이 붙어 있으므로 여기서 출발해서 조선을 지나가는(過) 동방 행로를 나타낸 것이다. 조선에 갈석산이 속해 있다는 주장이 아니며, 그런 류의 주장은 7세기에 『진서』를 편찬하면서 수집된 잘못된 자료에서 비롯한다.

盧龍縣 : 朝鮮城,即殷箕子受封之地,今有廢城。

노룡현 : 조선성, 즉 은나라 기자가 봉함을 받은 영지이다. 지금은 폐성廢城 이 있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노룡현(盧龍縣)

송나라 역사 지리서인 태평환우기에 하북성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③의 유형으로 기자조선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보인다. 하북 지역에서 조선과 관련된 자료는 대개 이처럼 기자 전승을 설명하기 위해 나타나는데, 그것은 서주~춘추시대에 중국의 동북방 강역이 하북 지역을 끝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 전승도 그 근처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기자 전승이 조선과 관련된 것으로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이후로, 진개의 조선 정벌 이후이고 특히 진나라의 성립 이후에 유행하여 조선의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승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당대 자료로서 이용하기 어려운 것이다.[66]
이처럼 하북설의 나름대로 근거랍시고 제시되는 자료부터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학계에 있는 사람이면 왜 요동설을 주장하는 주장하는 학자라도 하북설은 따르지 않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4.3. 중심지 이동설


고조선을 요령에 비정할 경우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지목하던 기존의 사료들이 붕 떠버리게 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0년대 이후부터 제시된 것이 일종의 절충설인 중심지 이동설이었다. 이동설에 따르면 이렇게 요령 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이 평양을 중심으로 옮겨가게 된 계기는 앞서 말한 연과의 충돌이었다. 이는 후대에 나온 설이니만큼 양측 설과 고고학 유물에 따른 세력권에 대한 포괄이 가능해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학설 내에서도 연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쳤는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동설은 연이 조선을 쳐 강역 2천 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에 의거하며 이는 청천강 이남으로 제한된 세형 동검의 출토 범위, 한반도 북부까지 진출한 연의 흔적(연화보 - 세죽리 문화권)과도 대강 합치한다. 이는 연이 최종적으로 획득했다는 '만번한'을 평안북도 박천에 비정한 이병도 이래 통설이었다. 다시 말해 청천강 이남 지역을 고조선의 후퇴한 영역으로, 청천강 이북~요동 지역을 고조선에게서 연이 빼앗은 지역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정밀한 고고 자료가 다수 보강되면서 청천강 이북~천산산맥 지역을 일종의 점이 지대로 보는 경우도 늘어났다. 비판의 핵심은 해당 지역의 일부 거점에서만 중국계 유물이 확인되고, 그나마도 토착 세력의 유물과 혼재되어 나타나므로, 연의 군현이 설치된 지역이라고 보기 어려운 일종의 교역 거점 지역이나 군현이 명목상 설치되었으나 실제로는 토착 세력과 협력하여 운영되었을 지역이 많다는 것이다.
[62] 이후 설명하는 서울대학교 노태돈 교수의 제자인데, 입장을 서로 완전히 달리한다. 환빠들의 주장과 달리 학계에서 새롭고 타당성이 있는 학설이라면, 지도교수라 해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학계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63] 天을 동사로 생각하면 母는 명사가 되면서 목적어가 되기 때문에 '어머니를 하늘로 생각하다'는 뜻이 되며, 母를 동사로 생각하면 天이 명사가 되어 주어가 되기 때문에(앞에 있으므로) '하늘이 어머니 같아서'or '하늘은 어머니 다워서'라는 뜻이 된다. 후자는 차라리 母天이라고 해야지 '하늘을 어머니로 여겨서'로 해석 가능하다. 또한 天과 母 둘 다 명사로 본다면 '하늘이 어머니이다'or '(조선은)하늘의 어머니이다' 라고 단정짓는 듯한 말도 될 수 있지만, 문맥상 이상할 뿐더러 단군신화에 따르면 하늘은 아버지이다. 이렇게 하늘을 주어로 둔 해석은 문맥상 역사상 맥락으로 볼 때 이상하므로 母를 목적어로 둔 제일 처음의 해석을 따른다. 그러므로 '조선은 어머니를 하늘로 여기며'가 가장 바른 해석이다.[64] 북한학계에서는 일부 유물을 고조선 대까지 소급시켜 보기도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북한학계는 1980년대 이후 정치의 노예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런 자료가 있다'는 것 이외에 주관적인 해석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고조선 시대의 제단이나 청동기, 철기 유물이 발굴되었기는 했지만 걸리적 거리는것이 있으니 인정하기에는 뭐하다는 얘기이다. 물론 한국학계에서 '거기 위만조선 때 자료가 나올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판단을 보류해 두는 것이다.[65] 조법종 교수의 2016년 발표에서도 낙랑토성이 왕험성이 아닐 수 있다는 본인의 논지는 전개하면서도, 요령 지역에서 왕험성에 비정할 뚜렷한 유적이 없다는 것은 인정한 바 있다.[66] 한국사학계에서는 1970년대 이후에 이와 같은 기자조선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체로 기자조선설에 부정적인 입장에 있다. 만일 이런 사료를 다 인정하면 고조선은 기자가 세운 전형적인 중국계 왕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약점을 묻기 위해 유사역사학자들이 내놓은 것이 은나라 동이설인데, 거짓말을 덮기 위해 눈덩이 굴리듯 거짓말이 커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번한은 문현과 번한현을 연칭한 것이 만번한으로 보인 것입니다. 문현의 위치는 지금의 계주 지역으로 보는데 이론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번한현이 어디있냐 했을 때 문현과 번한현은 소위 인접한 지역으로 상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번한현의 위치도 청천강 유역에서 찾기 보다는 오히려 요동 반도 쪽에서 찾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번한현은 성경통지에 의하면 대체로 지금 해성 지역으로 보입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서울대 노태돈 교수}}}
현재에도 이러한 입장은 적지 않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2017년 이후석 숭실대 교수는 고조선의 강역과 만번한, 패수의 위치 문제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하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만번하는 천산 산맥 서변의 자연계선이고, 패수는 압록강이라고 주장한다. 고고학적으로 물질 문화를 살펴보면, 천산 산맥이라는 자연 경계를 기점으로 연의 물질 문화와 고조선의 물질 문화가 구분되어 나타난다. 또한 압록강을 기점으로 한의 물질 문화 분포와 위만 조선의 물질 문화 분포가 구분된다. 관련정보
2010년대 들어서 연군현에 해당하는 요서 ~ 요동 일부의 일대의 미안구유형 유적과 주변의 연군현에 해당하지 않는 요동 지역 중앙 지역의 유적 / 유물 간 비교 조사를 통해 요하 일대의 고조선과 연의 국경을 최대한 확실하게 알아보고자 하는 연구가 이루어져, 기존의 문헌과 추측에 의존한 연구에 비해 정확한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67] 위 논문을 기초로 만들어진 지도 링크. 연나라의 영역이 청천강 근처까지 뻗어있지만, 동시에 요동 지역 상당수를 토착 집단이 지배하고 있다.
오히려 2010년대 들어 중심지 이동설의 새로운 해석은 후기 고조선 시기가 아니라, 전기 고조선의 성립을 논해야 할 기원전 6세기 이전의 시기와 관련하여 나오고 있다. 맨 위에서 언급했듯 요서 지역, 대릉하 유역 십이대영자 문화가 정가와자 문화와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이에 대해 문화적 영향력이 미친 것으로만 보고 이들 집단이 직접적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으나, 2010년대 이후 등장하는 요서 → 요동 → 평양으로의 2차에 걸친 중심지 이동설에서는 기원전 6세기 이전의 십이대영자 문화가 기원전 6세기 이후 정가와자 문화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었다고 본다. 그 경우, 앞에서 난해하다고 했던 『산해경』 해내북경도 '산의 남쪽, 바다의 북쪽'을 '산의 서남쪽, 바다의 동북쪽' 식으로 의역하는 것을 넘어 문구 그대로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다만 안 그래도 고조선 관련 문헌이 부족한 와중에 요서 → 요동으로의 이동은 문헌에서 뒷받침해 주는 것이 더욱 적기 때문에 아직은 주목받는 신설로 남아 있다.

4.4. 기타


이외에 조선이 '요하' 인근에 위치했다는 추정에서 시작해, 『산해경』 해내경에서 '요수가 위고의 동쪽으로부터 나서, 동남으로 흘러 발해 방향으로 흘러 요양으로 들어간다(潦水出衛皋東, 東南注渤海, 入潦陽)'라고 한 것을 근거로 조선이 '동남쪽으로 흐르는' 대릉하 인근에 위치한다는 재야사학의 주장이 있으나, 이는 요하가 어떻게 흐르는지 찾아보지도 않은 주장이다. 요하의 상류는 내몽골 지역에서 발원해서, 현재의 랴오둥 성 권역에 들어오기 전까지 정말 동쪽으로 흘러간다. 지도 참조. 발원지를 기준으로 하면 요하는 발원지의 동남쪽에서 발해로 들어가는 것이 맞다.
한편 3세기 무렵 저술된 『수경』의 패수조를 들어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가 요동~서북한 지역이 아니라고 보기도 하는데, 척 보기에도 황당한 가설이지만, 일단 그 원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고,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6세기, 북위의 역사가인 역도원(酈道元)은 위와 같이 읽고 자신이 들은 내용을 주석으로 달았는데 이것이 수록된 책이 『수경주』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이 패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패수는 난하나 대릉하다'라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許慎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十三州志》曰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 … (중략) …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討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高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 以朝鮮為遠 (循)'脩'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허신이 말하기를 '패수가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일설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도 한다.'고 하였다.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의 동북쪽에 있고, 누방현은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남쪽에서 나와 누방을 지나는 것이다. … (중략) … 우거왕 대에 이르러 한 무제 원봉 2년에 누선 장군 양복과 좌 장군 순체를 파견하여 우거를 토벌하였는데, 패수에서 우거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땅이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는데, 내가 번국의 사신에게 물어보니 성이 패수의 남쪽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 물이 서쪽으로 흘러 낙랑의 조선현을 지나가므로 낙랑군의 치소가 있던 곳이며 한 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패수는) 서북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한서》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패수가 서쪽에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했던 것이다. 또 한이 흥할 때 조선이 멀었다고 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지금과 옛 것을 고증해보면 차이가 있고 그릇된 것은, 아마 《수경》의 틀린 증명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참고}}}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본 결과 《수경》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미 6세기부터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고구려의 수도인 대동강 유역에 비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낙랑군과 직접 싸웠던 고구려가 틀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부의 주장으로는 동쪽으로 흐르면 모순이 생기고 서쪽으로 흐르면 모순이 안생기냐면서 역도원을 비난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일단 허신이나 십삼주지에서 말하고 있는 패수는 명백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역도원 당시에는 이미 패수는 다른 하천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아예 패수란 명칭을 가지는 하천 자체가 없어졌다.) 역도원 당시의 패수는 한반도 부근의 강을 지칭했던 것 같다. 따라서 한반도의 강이 동쪽으로 흘러가면, 굳이 강을 건너가지 않아도 되고, 서쪽으로 흘러야만 강을 건너서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을 고구려 사람들에게 확인했고 그래서 『수경』이 틀렸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끊어 읽기를 다르게 하여 해석을 달리 했다.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東 入於海。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의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띄어쓰기의 중요성 어렵지 않게 풀린다.
이외에도, 패수조가 수록된 『수경주』 권 14에서는 이 앞에 대릉하에 대응하는 유수와 요하, 혼하에 대응하는 대요수, 소요수 등을 먼저 제시하고 있는데, 그 순서는 하북 지역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다. 패수는 대요수, 소요수의 뒤에 나오며, 대요수, 소요수는 명백히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감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요하 인근 지역임이 분명한 대요수, 소요수 뒤에 있는 패수가 갑자기 하북 지역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책의 체제와도 맞지 않는 설명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인용하면서 고조선의 강역을 조선, 동부여, 북부여, 남·북 옥저, 예맥, 고구려, 신라까지도 포괄하는 강역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 《단군고기(檀君古記)》

이외의 설이나 이 부분의 내용은 이쪽을 참고. 대동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부분을 입해지로 보기도 한다.
남만주 및 한반도 북부를 요충지로 삼았던 것,몽골계 유목제국과 동맹이었던 것,중화권 국가와 투쟁했다는 것, 쿠데타 및 내분을 거쳐 통일 중화제국에게 멸망했다는 점에서는 여러모로 고구려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

5. 문화



5.1. 문자


고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남겨진 기록은 현존하지 않으며 단지 고조선 멸망 직후에 적힌 사기나 후대의 염철론, 삼국지 같은 서적에서 고조선에 대해 나오기는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적힌 데다가 그다지 상세하게 적히지 않아 이것만으로 고조선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에 한계점이 분명하다. 그리고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의 화폐와 에서 수입된 진과(秦戈)의 명문 등 극소수의 한자 유물을 제외하면 고조선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고조선 후기에 중원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문자의 사용이 시작될 수도 있지만 문자 사용이 보편화되었을지는 의문이기에 현재까지 고조선에 대한 연구에 크나큰 장애물로 남고 있다. 물론 음성언어나 기타 타국 언어로라도 기록된 자체적 기록물 역시 남아있는 것이 없다.

5.2. 청동기와 철기


과거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탁자식 고인돌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권 전체를 고조선의 실질적인 영역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고조선 및 관련 문화권 전체로 보아야 마땅하다. 어쨌거나 고조선은 요서 지역, 요동 반도, 남만주부터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는 문화권을 기반으로 한다. 기원전 어느 시점부터 중국의 철기 문화를 수입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세기경에는 한과의 약조를 통해 철기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반도 전체로 철기의 제작이 확대되는 것은 원삼국시대 중후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5.3. 신화


건국 신화로는 단군 신화가 존재하나, 그것이 고조선 시대부터 전하던 것인지 아니면 고조선 이후 어느 시점에 만들어져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 및 『위서(魏書)』라는 출처를 명시했으나, 고기의 정체는 불분명하고 『위서』 또한 어느 위나라의 문서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위서』의 '위'가 위(魏)로 적힌 것과 삼국유사에서 '위만'이 '魏滿'(반면 위략에서는 衛滿)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대에 위만 조선에 대한 역사 의식을 표방한 독립적인 사서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잠부론』 등에서도 '魏滿'이라고 했으므로 근거는 빈약한 편. 한편 동명왕편을 지으며 이규보는 『위서』와 『통전』의 기록을 읽어보았으나 중국의 기록이라 그런지 기록이 자세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 『위서』가 일연이 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현재 단군 신화가 기록된 문헌들도 삼국유사제왕운기, 묘향산지 등의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또한 평안남도의 점제현 신사비가 고조선 계통의 신앙 구조를 반영한 것이라면, 산신(山神)에 대한 숭배가 존재했을 수 있다. 삼국사기 동천왕 본기 21년 조에서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려 중기 김부식이 덧단 기록일 가능성이 크나 후에 고조선이 신선 사상과 관련하여 연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5.4. 정치 체계


미흡하나마 왕, 장군, 대부, 상, 비왕 등의 관직 제도가 확인되기 때문에, 중국식의 관료제에 관한 문화를 수입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혹은 토착 세력을 중앙 관료화 시킨 이후 중국 측에서 이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중국 관직 제도가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조선에서 10월에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을 행했다'

7세기 경의 '둔황문서'중 하나인 『토원책부』에 인용된 『위략』의 내용이 발굴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흔히 동예의 제천 행사로 알려진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우제점(牛蹄占)은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東夷傳) 부여조에도 동일하게 나오며, 장초금(張楚金)이 지은 『한원(翰苑)』 권30 고려[68]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에 의하면 고구려에도 이와 같은 관습이 있었다고 하며, 한편 경상남도 창원시 웅천패총(熊川貝塚)에서 6점의 복골(卜骨)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삼한사회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관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비교하자면, 중국은 은나라시대부터 갑골(거북이 등껍질)로 점을 쳤었고, 고조선 영역에서는 우제점(소뼈로 점을 침)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5.5. 법률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한의 법률은 시행 흔적만 보이고, 독자적인 8조법이 유지되었다. 초보적인 법률의 모습을 보이며, 강한 강도의 처벌법으로 평가된다. 노비제의 출현이니 인명의 존중이니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규교육 과정의 한국사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니 여기서는 생략. 기자에 의해 8조법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료의 오독으로 전하게 된 것이다.
한서』의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전잠, 직조를 가르쳤다. 낙랑 조선 백성의 범금 8조는…)를 『후한서』 등에서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 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전잠, 직조를 가르쳤으며, 낙랑 조선민에게 범금 8조를 가르쳤다.)로 오독하였고, 이것이 후대의 사서에 답습되면서 벌어진 오해다.
다만 후에는 한의 상인 등이 유입되면서 사회 생활이 복잡해지고 60여 개의 법 조항으로 늘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거 낙랑군에는 한의 법률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나, 최근 한의 법률이 담긴 목간의 발굴로 재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함몰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69]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70]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고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전하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과 노비의 존재, 그리고 사유재산 보호조치를 볼 수 있다. 청동기 후기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되었다. 여담으로 '백성들이 집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 외래인들이 이를 노리고 도둑질을 서슴치않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 본래 고조선 백성들 사이에선 강도질이 거의 없고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치 제주도의 정낭과 같다.

5.6. 음악


공무도하가(공후인)가 고조선의 음악이라고 한다. 다만 문헌을 읽기에 따라 고조선인 백수광부의 아내가 지었다는 설, 지나가던 뱃사람 곽리자고가 지었다는 설,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었다는 설로 나뉠 수 있다.

5.7. 의복 및 금속 문화


파일:11111111_by_glimja-dbc7oi7.png
고조선 갑옷은 위만 조선 이전 대에는 옷에 청동 단추를 잔뜩 단 형태였다. 위만 조선 시대에 철기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작 고고학적 근거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는 석기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제기를 중심으로 청동이 일부 쓰인 듯하다.
『한서』 지리지를 통해 고조선의 풍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며, 위만의 입국 기록을 볼 때 상투를 틀었으며 중국과는 다른 복식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6.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6.1. 현대



6.1.1. 남북한



6.1.1.1. 남한

한국은 고조선을 한국사 최고(最古)의 국가로 규정하고 있으며 한국사 국가들중 최고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신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20세기 들어서 한국 민족주의의 핵심이 되기도 하였으며, 민족 사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유적도 사료도 별로 없는데다가 지역도 북한이랑 중국 요동인지라 특정 지역에서 내세우진 않는다. 대신 고조선과 관련한 남한 유적으로는 강화도 마니산에 첨성단 유적 및 고인돌 유적이 존재한다.
기존에 있던 한국 측 사료가 빈약하고 문헌이 거의 없어서 사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 위/아래에 기록된 십이대영자 문화나 정가와자 문화를 고조선의 영향권과 관련짓는 시도는 21세기 한국고대사학계에서 고조선이 차지하는 시공간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 하나의 큰 이정표가 되고 있다.

6.1.1.2. 북한

북한의 정식 국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북한은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그래서 북방왕조의 시작인 고조선을 매우 중요시 하여 고조선에 대한 강한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평양중심설을 강조하며 대동강 문명설과 같은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으며 단군릉을 역사적 고증없이 개건하는등 정권의 정통성에 이용하고 있다.

6.1.2. 중국


중국은 고조선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6.1.2.1. 바이두 백과의 고조선 내용

다음 내용은 바이두 백과의 고조선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바이두 백과 고조선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 한반도 북부의 초기 국가의 명칭이며 주로 중국 역사에 기록된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2개 왕조는 제후국이자, 번속국이다. 이들 조선은 남한이나 북한의 역사에 속하지 않는, 중국 고대의 지방정권이다. 문화와 혈통 모두 남한이나 북한의 역사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북한과 남한은 후세에 지어낸 전설에 나오는 단군조선이 고조선이라고 주장한다.
* 개요
고조선을 다루는 개념은, 기타 국가(타국)의 학자와 남, 북한학자들의 이해가 다르다. 기타 국가의 학자들의 주요 핵심 단어는 신사(信史: 기자, 위만 그리고 한사군) 생성 이전, 한반도 지역의 고대 문명이다. 그리고 북한과 한국이 말하는 고조선, 대부분 합쳐 부르길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이고, 기자조선의 존재는 승인하지 않는다. 13세기 말 고려 왕조 사기 삼국유사엔 기자 조선, 위만 조선을 말하고 있다. 근거로 한사지리지에 적힌 현만, 낙랑, 한 무제 시기에 선립, 이름 조선, 예초(더러운 담비), 구려만이(구려 오랑캐)등 이곳을 조선과 고려로 합쳐 불렀다. 고조선과 고구려 당시를 두 곳을 별개의 부족 군체로 설명하고 있다. 후한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고구려 남부와 조선은 상접해있다. 고구려 당시 고조선을 영유하지 않다고 설명하며, 고조선은 고구려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 전설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집필한 사서인 삼국유사와 이승휴가 집필한 제왕운기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제석환인(환인즉제석, 제석천, 별도의 명칭으론 환인)의 얼자환웅이 인류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했다. 환인의 동의를 얻은 후, 환웅은 약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강림, 신시를 건립한다. 데리고온 풍백, 우사, 운사 등을 제외하고도, 환웅은 법률과 불규, 그리고 강종각양의 예술과 의학, 그리고 농업 기술을 인류에게 알려준다.
이를 근거로, 당시 산동(중국의 산동 지방)중의 호랑이와 곰이 한 마리씩 와 환웅에게 인간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환웅은 그들에게 쑥과 마늘 20편을 건네주고 백일 동안 이것을 먹으며 태양을 보지 말고 살라고 일러준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곰은 21일째 되는 날 여자로 변한다. 하지만 남편 될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웅녀는 신단수 아래에서 재차 환웅에게 자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환웅은 웅녀의 기도를 받아들여 웅녀를 처로 받아들인다. 후에 웅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단군 왕검이다. 단군은 신화 전설 중에 산신이 된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서,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전설을 북한과 한국 교과서에 적어두었다. 단군은 중국 역사 교과서를 근거로 하면, 단군 조선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과 한국학자들이 말하길, 단군 조선 전설 중 조선 정권이 존재함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이를 이를 들어 말하자면, Willian T. Sanders와Barbara J. Price이 제안하는 4단계인 유단, 부락, 족장제(酋邦), 국가, 그리고 국가 형성에 필요한 2개의 논술인 (1)혈연 관계의 국가 조직상 피지록관계와 그 치환, (2)합법적 무력을 가짐, 등 단군 조선 문화는 부락 혹은 족장제 문화일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국가가 아니다. 일단 발전된 농업과 초보적인 수공예,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민족 문자가 없거니와 한자(汉字: 동시에 한자는 이미 발전이 성국해져있다.)의 사용 등이 있다. 그러나 중국 동북 지역에 출토도는 많은 수의 상, 은, 주 초기 시대 청동기와 아후(亚侯: 제후국), 기후아실(其侯亚矢), 연나라 제후국(匽侯 즉 연후燕侯)등이 새겨져 있다.
북경 대학 동북아 연구소 소장, 세계사 연국소 소장, 원북대 역사계 부계 주임, 역사학자 송성유 교수가 소개한, "한국 역사가가 강조한 국사, 한국 역사가 가지는 5천 년에 대해, 고조선 건국 신화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가?"의 신화 중 천신 단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 산정의 신단수 아래에 건립한 하나의 신지 세계이며, 그(환웅)와 웅녀가 낳은 아이 단군, 즉 인간이 창건한 고조선, 조선의 시조 왕의 탄생이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삼킨 후,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에 망명하였고, 침략에 반항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으며, 그 역사학자들은 힘을 흡수하여(합치며) 한국의 독립성을 강조, 후에 이르러 한국 역사계 중 민족 사학이 유파가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성립 후, 민족 사학들은 한국 교단 사학의 삼대 유파 중 하나가 된다. 또한 환빠라 불리는 비학자민간 인사들, 신화 이야기를 좋아하고 민간 전설과 평서 강의와 진실의 역사를 혼란에 빠뜨리게되어, 사회 안에서 크게 유효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불교 용어 중 환인은 제석환인으로 약칭되어 제석천으로 이르며 그 때문에 제석환인은 약칭 제석 혹은 석제 등으로 불릴 수 있다. 환인은 즉 제석의 관념에서 나온 불교 사상이며, 원천은 법화경, 그 이야기는 관불삼미해겨으 화엄경 등 불교 경전 중 자주 등장하는 우두 전환(소머리 괴물이다.) 또한 등장하는 천왕과 부인 등은 종교 용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본기에 의거하면 372년 전주후진이 보낸 견사(사신)및 부도(사탑 혹은 승려)가 불상, 경문 등을 보냈다, 374년 승아도래(승려가 오다), 375년 소수림왕: 소문사를 창립이 매우 순조롭다. 이불람사를 역시 도달해 해동의 불법이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불교는 372년부터 시작, 단군 왕검 신화는 적어도 4세기 이전엔 불가능했을 것이다.
* 단군 신화 중 태백산에 대하여
고려 승려인 일연(1206년 ~ 1289년) 삼국유사의 설명에 따르면 태백은 곧 소향산이라고 한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선 소향성, 부동 130리, 일명태백산이라고 하며, 후세 학자 역시 대부분 태백산을 초기엔 소향산으로 생각했으나, 대략 18세기 말 조선인의 시작을 태백산 정립을 백두산 혹은 장백산이라고 했다. 그 대표 인물은 안정복(1712년 ~ 1791년)의 동사강목 태백산고에서 신라 문인 최치원의 상태사시중태의 고구려의 남은 사람끼리 끼리끼리 모여 있여(残孽类聚), 북은 태백산 아래에서 국호를 발해라고 설명함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 사람이 해설하기를 태백산은 백두산 혹은 장백산, 그 후 줏대없는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다(附和者渐众) 현재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그르치고 있는데, 단군 신화의 태백산은 장백산과 동일함으로 오늘날의 중국 동북 시각에선 고조선은 중국의 강역(지배지)에 속한다.

6.1.2.2. 현 중국 관점의 문제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국가적인 능력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베트남 또한 한자를 예전에 사용한 바 있고 일본 또한 한자를 사용하는 와중에서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일본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가 국가적인 능력이 없다 말할 수 있을까? 특히 민족 문자로 국가의 성립을 논한다면 문자가 없던 국가들은 무엇이 되는가?
게다가 고대 중국 사서들은 고조선을 중국과는 이질적인 존재이자 동쪽 오랑캐 즉 동이족의 일원으로 서술하고 있으므로 지방정권설은 이러한 기록을 모조리 정면으로 부정해야 한다.
또한 고조선은 '흉노의 왼팔'이라고 기록되었으며, 한나라에 대항해서 한나라의 적국인 흉노와 동맹을 맺었으며, 온돌처럼 흉노와 문화적으로 겹치는 면도 있었다. 이는 중국계의 지방정권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보와 특징이다.
게다가 만일 고조선이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진시황은 어째서 천하 통일 대상에 고조선을 포함시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발생한다.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초나라 등 중국의 지방정권처럼 고조선도 기자가 봉해진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진시황은 마땅히 고조선도 정벌하여 천하통일 대업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고, 고조선을 정벌하지 않은 진시황은 중국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 되는 자기모순적 논리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기자조선은 고고학적 연구와 정면 배치되므로 명백히 허구이다. 기자조선은 고고학적으로 절대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단군 신화를 부정하더라도 고조선은 부왕, 준왕, 조선후, 조선왕, 대부례 등으로 대표되는 토착계 왕조가 있었던 사실이 있다.
또한 고조선은 중국과 유물도 다르다. 고조선 영역에선 아연이 많이 함유된 비파형 동검이 발견되며 이는 중국의 청동기와 모양도 구성성분도 다르다.

6.2. 현대 이전



6.2.1. 한국


한국의 전통 놀이 문화 중 하나인 윷놀이의 기원설 중의 하나가 고조선 기원설이다.

6.2.1.1. 고구려

일단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없다는 것을 감안해서 보아야 한다.
건국설화에서 보이듯 고구려의 정통성은 고조선과 동시기에 존재한 부여에서 갈라져나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본인들을 부여의 후계국가로 여기며 부여에 대한 계승 의식을 보였으나, 단군조선이나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또한 고구려는 본인들 스스로를 천손, 즉 하늘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전 국가였던 고조선에 대한 계승 의식은 커녕 관심조차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71]
기자조선에 관련 돼서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당서에 고구려의 제사 중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고구려는 영성신, 태양신, 가한신, 기자신을 섬긴다.

구당서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고구려는 영성신, 태양신, 기자신, 가한신 등에 제사를 지낸다.

신당서

다만 고구려가 고조선을 직접적으로 계승한다고 말한 기록은 없으며, 여러 제사 지낸 신 중 하나일 뿐이고 아래 기록외에 중국이나 한국의 사서에서 또 다른 기록이 보이지는 않는것으로 보아 영성신, 태양신, 가한신 등 고구려 내에서 숭앙하는 여러 신 중 하나인 비중으로 보여 딱히 기자조선에 계승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의견이 있다. 만일 다른 증거 없이 여기서 '기자신'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고구려에 고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계승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면, 마찬가지 논리로 고구려가 가한신(可汗神)에 대해서도 제사 지냈으니 유연, 북위, 돌궐 등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졌다고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역사학계에서는 둘을 연결하려는 시각이 없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72], 굳이 무리하게 고구려에 고조선에 대한 계승 의식을 지녔다고 설명하려 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조선시대에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낸 것 또한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유교의 성인이기는 하지만 유교적 정통의 제사인 정사는 아니고 음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사는 종묘제례나 문묘제례 같은 유교적 예법에 따른 제사고 음사는 중국적 예법을 벗어난 제사를 말하며, 중국 측에서 보기에는 예법 문헌에 근거했다고 보기에 무언가 결격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각의 문제를 제하고 보면 고구려가 기자에 대해서 무언가 독특한 제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평양이라는 지역 연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대 한국사는 기자 동래설을 부정하고 있는데, 부정설 중 하나가 바로 고대 한국어로 '왕'을 뜻하는 길지를 중국 측에서 오인했다는 설이다. 만약 그렇다면 고구려의 기자 숭배는 고조선의 토착 지배자와 관련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중앙정부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고조선 계승의식을 보인 기록이 거의 없다. 하지만 보장왕이 조선왕으로 책봉된 것, 소고구려가 고려조선이라고 불린 것, 연남산 묘지의 요동 조선인을 보면 중국 측에서는 고구려에서 고조선을 연상했던 것 같고, 고구려인들 중 일부가 어느 순간 고조선을 인식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이외에도 부여,고구려,고조선은 모두 소뼈를 이용한 우제점을 사용했다.

6.2.1.2. 백제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도 대동소이하게 왕성을 부여씨로 하고 한때 국명으로 남부여를 사용하는 등 본인들을 부여의 후계국가로 여기며 부여에 대한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보였으나 고조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온조왕본기에서 백제의 상국이었다가 백제의 공격으로 멸망한[73] 마한이 바로 위만에 쫓겨 남하한 고조선 준왕의 나라라는 설이 있었고 이것이 마한정통론으로서 동사강목 등 조선시대 사서에 실리기도 했지만, 사실 준왕 왕조가 온조왕 때까지 유지되었는지도 불분명하고, 그렇다고 쳐도 백제는 마한을 멸하고 그 땅과 백성을 차지했을 뿐 마한이나 준왕, 고조선에 대해 어떠한 계승의지도 기록에 전혀 남기지 않은 것이 문제.

6.2.1.3. 신라

신라도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드물지만,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건국설화에서 고조선과의 연관성이 직접적으로 기록된 삼국 중 유일한 국가다. 건국시기에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6촌(=6부) 주민들이 고조선에서 남하한 유민들이라고 삼국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자세한 내용은 박혁거세 문서 참고. 그리고 고조선과 신라의 연관성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데, 경상도 지역에서 혈구(血溝)[74]가 여러 줄인 동검, 동모(銅矛)의 고리 등 고조선이 있던 평안도 지역의 영향을 받은 원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된 것에서 둘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 시기인 9세기에도 최치원이 중국에 보낸 기록 양위표에 의하면 신라가 고조선의 법률로 알려진 8조법(八條之敎)을 이어받는 나라라고 하고 있다.

6.2.1.4. 고려

고려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고, 고조선에 대해서는 궁궐 내에 조선궁을 두었기는 했지만 서경 일대를 제외하면 그저 과거의 국가라는 점 정도의 인식이 고작이었는데,[75] 12세기 이후에 혼란을 겪게 되기 시작하면서 백제신라의 부흥 운동을 겪기도 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몽골 침입 이후 의미가 부각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이용하였다.
한반도 최고의 국가라는 명분 외에도 고조선 세력권인 북방과 준왕이 왕위를 찬탈당한 이후 내려가 장악했다는 남방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 이후 평양에 기자 사당이 세워졌고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가 존재했다.
고려시대 만월대 내 별궁 중 하나를 조선궁(朝鮮宮)이라 명명 하였다.
문종의 왕자 왕도(王燾)가 조선후로 봉해졌다.
고려의 권신 이자겸은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봉해지고 그 부인은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
고려는 한국사의 과거 국가와 전국의 지역명으로 제후명과 만월대 내 별궁 선택했는데 조선을 그 명칭 중 하나로 선택함으로서 고조선을 한국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6.2.1.5.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새로 개창하면서 고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로 국명을 조선이라 정하였다. 이후에 고조선에 대한 의미 부각도 더욱더 강해져 이전보다 고조선을 자세히 기록한 역사서의 편찬 및 제사 의식으로 한동안 부각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기자 - 단군 - 동명왕을 한곳에서 모시는 제사를 평양에서 지냈지만, 위만은 찬탈자로 취급하여 제사를 지내주지 않았다. 한편 단군을 평양에 배향하면서 삼성사는 잠시 훼철되었으나 성종 대에 삼성사가 복원되었다. 이곳을 계승한다고 하는 곳이 바로 현재 지리산의 삼성궁이다. 한편 양반 사이에서는 기자 8조법에도 노비제가 있다고 하여 노비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인 모양이다. 안습. 이외에 8조법 중 전하지 않는 5가지는 분명히 오륜일 것이라고 억측을 하기도 했다.
조선 초에 나타난 『삼성당사적』에 따르면 9세기 초반에 세워졌다는 패엽사와의 갈등이 그려져 있어 연대를 그만큼 소급할 수 있겠으나 신빙성은 의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면서 한반도 전체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있는 대상으로 한국사 최고(最古)의 국가인 조선 계승 의식을 폈다.
조선 후기에는 소중화 의식 및 자국 의식이 높아지면서, 단군과 기자에 대한 연구 및 추숭 작업이 활발해졌다. 16세기부터는 아예 기자 조선 시대의 계보도가 작성되는 등 존숭을 위한 일종의 역사 왜곡이 행하지기도 하였고, 17세기 후반부터는 단군 조선 또한 본기(세가가 아니라 본기인 것은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화이기도 하다)에 포함되는 등 권별, 허목, 홍만종 등에 대해 역사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6.3. 중국



6.3.1. 당나라


고구려 멸망 후에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당으로부터 조선왕(朝鮮王)으로 봉작을 받았다. 한편 연남생은 당나라에 의해 현도군공(玄菟郡公)에 봉해졌는데 현도군한나라의 지방정부였던 한사군 중 하나였다. 이것을 고려해 보면 상서대전이나 사기에 이미 기자동래설이 나왔고 단군고려시대여몽전쟁기나 가야지 부각되고 그것도 한반도 내에서만 해당되는것이므로 당연히 당나라는 자신들이 멸망시키고 정복한 고구려 패주의 책봉 제후왕명을 단군조선을 의식해 조선왕으로 삼았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조선왕의 조선은 주나라 천자에게 책봉된 기자를 의식해 기자조선이란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구당서 현종본기의 태산 봉선의식의 조회하러온 내신 번국에 '고려조선왕'이 있는데 소고구려 왕을 일컫는것으로 보인다.
연남산 묘지명에는 연남산이 '요동(遼東) 조선인(朝鮮人)'으로 기록되 있다.

6.3.2. 당나라 이후


동호계의 후손인 요나라의 경우 고조선의 팔조금법을 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거란족들도 존재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요나라의 거란족은 고조선의 예맥세력과 별개의 부족이었으며, 후에 요나라가 예맥(고구려)의 정체성을 계승한 발해 등을 멸망시키고 요동을 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자기 역사 과장하기 + 지역적 정통성 만들기 수준으로 선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숙신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76] 청나라의 누르하치도 조선을 회유할 때 잠깐 고조선을 언급하기도 했다.#[77] 다만 청나라의 건륭제 시대에 지어진 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와 함께 고조선을 만주-요동사에서 홀대하는 편이었으며 동족으로 보지 않았던 편이다.[78]

7. 후대의 조선과 국명 구분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현재는 고조선(古朝鮮)이라는 명칭을 쓴다. 일부에선 더 이전에 존재한 국가에 고(古)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용법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지만 고려 시대에 지어진 삼국유사에서도 이미 위만 조선과의 구분을 위해 단군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용법의 유래가 제법 깊다.

8. 고조선의 인물 목록



8.1. 군주




사실 자료 자체도 별로 없고, 남아있는 자료들도 신빙성이 의심되는 것들이 많다.

8.2. 신하




9. 대중매체에서의 고조선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고대 시대는 고조선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선택하면 나오는 국가 지배자 이름 중에 단군이 있다.
  • 본초비담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플레이 문명 중 하나로 등장한다. 한민족의 시조 국가답게 우방 타워랜드 방어전(...)이 주 전략인 국가. 타워가 좋고 성직자 생산 비용이 저렴해서 타워로 방어와 공격을 하면서[79] 성직자들로 적의 고급 유닛들을 아군으로 바꾸는 전략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장검병 / 군단병이 보너스 체력 + 80이라는 점과, 노포가 대부분의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점 때문에 예상외로 강한 국가.
  • 엠파이어 어스 2: 한국 캠페인 초반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다룬다.
  • 천국의 신화
  •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 성룡, 김희선 주연의 영화. 고조선의 공주로 추정되는 옥수 공주(김희선)가 진나라 시황제의 후궁으로 바쳐진다.
  • 조선왕조실톡[80]
  • 칸:바람의 신화
  • 환단고기
  • 규원사화
  • 단기고사
  • 대쥬신제국사
  • 짐은 그것을 역사라 부르리라(소설 시황제)

10. 관련 문서



[67] 관련 논문: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적과 연 문화의 관계 / 오강원, 한국 상고사 학보 / 2011년[68] 高麗 : 여기에서는 고구려를 가리킴.[69] 50만 전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액수인데, 사마천이 사형 혹은 궁형을 면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돈이 50만 전이었으나 마련하지 못했다라는 점에서 한나라의 규정과 관련 있다고 본다. 이는 고조선 시기에는 없던 단서 조항을 낙랑 대 이후 삽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70] 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71] 북한 측에서는 고구려가 고조선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북한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일 뿐 실제로 고구려인들이 고조선에 대해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북방왕조의 연결고리를 강조하는데 고조선과 고구려가 따로 노는 것보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후계 국가인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가르치는 편이 그림도 예쁘고 본인들의 정통성 강화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 하지만 역사는 과거 사실 그대로를 탐구하는 학문이지 이따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되는 학문이다. 북한의 이러한 고대사에 있어서의 한심한 정치적 주장은 단군릉, 동명왕릉의 섣부른 비정이라던지 동수묘임이 확실한 안악 3호분을 멋대로 미천왕, 고국원왕릉으로, 진파리 무덤을 멋대로 온달과 평강공주묘로 뇌피셜로 못박아버리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남한으로 치면 확정적 증거없이 정황상 추측으로 황남대총을 내물왕릉, 천마총을 지증왕릉, 석촌동 3호분을 근초고왕릉으로 못박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황남대총, 천마총, 석촌동 3호분은 근거라도 꽤 탄탄하지 안악 3호분의 경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완전 근거없는 같다붙이기식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남한이었으면 이미 이름이 안악 3호분이 아닌 동수묘로 개명되어 있었을 것이다.[72] 단군신화, 혹은 단군신화의 원형이 가한이 지배하던 돌궐의 텡그리 신앙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73] 마한 잔존 세력이 전라남도 지역에 존속했다는 것은 이후 현대에 재조명된 사실이고 일단 국내 문헌기록에서는 마한을 온조왕이 멸한 것으로 되어있다.[74] 찔렀을 때 피가 빠져나오도록 칼 따위의 무기에 만든 홈.[75] 다만 후고구려를 세운 고구려계 호족들이 조선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인식 자체는 존재했을 수도 있다.[76] 다만 만주지역이 한반도보다도 세력의 이동과 유입이 잦아서 복잡하긴 하다.[77] 참고로 누르하치는 만주어와 한어를 알아서 삼국지도 읽었다고 하는 걸로 봐서 고조선도 책을 보고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78] 만주족들은 자신들의 정통성과 역사성 과장을 위해 엄연히 만주 이남의 국가였던 백제와 신라, 마한, 진한, 변한 등을 자기 역사에 스리슬쩍 연관지어 놓기는 했다. 하지만 고조선과 고구려(고려)는 자신들과 구분하거나 홀대하는 태도를 보였다.[79] 참고로 이때는 마을 회관에 전투력이 없었고,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80] 개천절 특집으로 고조선을 소재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