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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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연호는 개국(開國),[5] 건양(建陽),[6] 광무(光武).[7] 절일은 만수성절(萬壽聖節).[8]
2. 이름[편집]
이름이 4개이다. 아명 '명복(命福)'과 초명 '재황(載晃)', 휘인 '형(㷗)'과 '희(熙)'이다.
'명복(命福)'은 임금이 되기 전에 썼던 어릴 적 이름으로, 철종 승하 이후 차기 임금으로 정해진 후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더 어릴 때에는 '개똥'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귀한 자식일수록[9] 천한 이름으로 불러야 액운을 막아 오래 산다하여 아버지인 흥선군 이하응에 의해 불린 이름이다.[10]
'재황(載晃)'은 즉위하기 직전에 잠깐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졌을 때 임시로 개명한 이름이다. 철종이 승하한 직후인 1864년 1월 16일부터 즉위식을 거행한 같은 달 21일까지[11] 단 6일 동안만 사용했다.[출처1] '명복'은 아명이었고 정식 이름이 아니었기에, 원래대로라면 15세 정도에 관례를 치르면서 본가의 항렬자에 맞춰 정식 이름을 지어야 했다. 그런데 고종이 12세에 왕위를 이으면서 익종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더 나이들어서 흥선군의 아들로서 받아야 했던 이름을 정식 즉위 직전에 형식적으로 받은 것이다. 흥선군 일가에서 고종 세대의 항렬자는 '재(載)O' 자였고 여기에 맞춘 이름이 '재황'이다. [12]
'형(㷗)'은 조선국 국왕, 대한제국 황제 및 태황제일 때 사용했던 정식 이름이다. 상술했듯, 고종은 문조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명목상 헌종의 동생이 되었고, 따라서 헌종의 휘 '환(烉)'의 '火' 발을 따라 '형(㷗)'으로 개명한 것이다. '㷗'의 독음은 '희', '형' 2개로 알려져 있으나 고종 이름의 발음은 '형'이 맞다. 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형'으로 적혀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逈(멀 형)'을 써두었다. 조선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고종의 이름을 '형'으로 발음한다고 적은 이상, '희'보다는 '형'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경술국치 이후 '희(熙)'로 개명하여 죽기 전까지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고종이 정식으로 이름을 '희'로 바꾼적은 없으며 1931년과 1940년에 이왕직에서 편찬한 《이태왕왕족보(李太王王族譜)》 및 《왕공족보(王公族譜)》에 고종의 이름이 '㷗'으로 적힌 것을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희(熙)'로 쓴 용례는 많이 보인다. 이것은 '㷗' 자 자체가 잘 안 쓰는 글자이기 때문에 대체자인 '熙'로 쓴 경우가 많아서일 뿐이다.[13]
이런 벽자를 쓴 이유는 피휘 관습도 있거니와, 항렬 규칙 때문이다. 장조의 현손(4대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烉)'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㷗)'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晃)'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悳)', 청안군은 '재순(載純)'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과 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元)', 완순군은 '재완(載完)', 완영군은 '재긍(載兢)', 흥친왕은 '재면(載冕)', 완은군은 '재선(載先)', 인양군은 '재근(載覲)', 의양군은 '재각(載覺)', 예양정은 '재규(載規)'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現)'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3. 즉위 배경[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즉위 배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청과의 영토 분쟁[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가족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황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사진과 어진, 기타 그림[편집]
근대의 황제답게 사진과 어진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다른 조선의 군주와는 다르게 신문 삽화나 포스터 같은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8.1. 사진[편집]
8.2. 어진[편집]
8.3. 기타 그림[편집]
한국의 군주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어진을 제외하고도 신문의 삽화나 포스터같은 그림이 남아 있는 황제다. 그전에는 감히 함부로 그릴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신문의 만평이라는 것이 풍자적이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안타까운 그림이 많다.
9. 고종과 서양문물[편집]
근대 개화기에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적극적으로 애용했다. 사실 이것은 청나라의 광서제[24] 나 일본의 메이지 등 다른 군주들도 비슷한 형편이었다. 다만, 한중일에서 제일 국가 재정이 빈곤하고 서양 국가들과의 교류 시점이 늦은 것을 볼 때 구한말에 급속도로 서양문물이 빨리 쏟아진건 고종의 영향이 크다.
고종의 서양문물에 대한 얼리어답터 기질이 워낙 유명해지면서 이런식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9.1. 사진[편집]
사진 문단에 많은 사진들이 남아 있는 것처럼, 그 시절의 보통 조선 사람들이 기피했던 사진 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특히 초기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 시간도 조금의 불평 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25]
9.2. 악기[편집]
대한제국 시절 관립한성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독일제 피아노를 하사했다. 해당 피아노는 현재도 경기고등학교 음악실에서 보관 중이다.
9.3. 자동차[편집]
고종은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 때 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군주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탔으며, 순종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이어서 탔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 문화재 제318호, 제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지하1층에 보관돼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 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고 하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면서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26]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 보수했고,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겼다.
9.4. 음식[편집]
2017년, 창덕궁에서 '와플 틀'이 발굴되었다. 이와 동시에 '카스텔라 틀'도 발견되어, 와플과 카스텔라를 곁들여 우아한 커피 타임을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27] 음료로는 커피와 사이다, 식혜를 주로 마셨다고 한다.
특히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 이 당시 커피는 포루투갈어의 영향으로 고히, 또는 고히차라고 불렀기 때문에 '고종께서는 고히차를 즐기셨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냄새나 조금 맛을 보고도 특징과 형태를 알 정도의 커피 애호가였다. 커피 맛에도 굉장히 민감했는데, 김홍륙 독차 사건 당시 아편을 탄 커피 맛이 이상한 것을 알고 바로 뱉어내 위험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순종은 커피가 처음이다보니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지 못하고 다량을 들이켜 구토와 피설사를 반복하다 기절하고 이가 모두 빠지는 등 주변에서 흔히들 바보천치가 될 정도로 크게 몸이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식혜 또한 정말 많이 먹었다고 한다. 특별히 소나무 사이사이 돌틈에서 나오는 좋은 석간수(石間水)라는 물을 받아다가 쌀을 삭혀서 식혜로 만들어서 먹었다는데, 너무너무 즐겨 아침새벽(새벽 4~6시)에도 먹고 저녁 밤참(저녁 9~11시)에도 먹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고 한다. 외국 문물이 마구 들어오던 시대에 왕으로서 모든 것을 첫 번째로 접했기 때문에 다양한 식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28] 게다가 그 당시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냉장고의 영향으로 사시사철 즐길 수 있게 된 냉면 역시 매니아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이 먹었다고 한다.
출처
9.5. 에스페란토[편집]
한국에서 에스페란토(인공어)를 공부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궁중 의사의 권유로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고 한다. 한편으로 당시에 에스페란토가 얼마나 국제적으로 촉망받던 대상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단재 신채호도 에스페란토를 배우기도 했다.
9.6. 미터법[편집]
도량형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1894년(고종 31년), 국제미터원기와 국제킬로그램원기를 도입해 왔다. 국제적으로 미터협약이 체결된 지 19년만이라는 이른 시기이다.
10. 여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대중매체[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관련 문서[편집]
- 갑신정변
- 고종실록
- 김홍륙
- 남연군
- 대전회통
- 명성태황후
- 아관파천
- 왕공족(이왕가)
- 융서촬요
- 이왕
- 조선, 대한제국
- 조선 왕조
- 대한제국 황실
- 덕수궁(경운궁)
- 덕혜옹주
- 순명효황후
- 순정효황후
- 순종황제
- 순종실록
- 순헌황귀비 엄씨
- 신정익황후
- 여흥부대부인(여흥순목대원비)
- 영친왕(의민황태자 영왕)
- 완친왕(완효헌친왕)
- 운현궁
- 윤치호
- 의친왕
- 의친왕비 김씨
- 이방자 여사(자행황태자비 이씨)
- 조선왕 독살설
- 창덕궁
- 창덕궁 낙선재
- 창덕궁 대조전
- 창덕궁 선정전
- 창덕궁 인정전
- 홍유릉
- 효명세자(익종대왕, 문조익황제)
- 흥선대원군(헌의흥선대원왕)
- 흥친왕
- 흥친왕비
13. 둘러보기[편집]
[1] 세는나이 12세.[2] 세는나이 67세. 고종실록 총서에는 고종의 사망 당시 나이를 67세[春秋六十七\]로 적고 있다. 이때는 태양력 도입 이후이기 때문에 원래대로 1919년 기준이라면 고종의 나이는 만 나이로 66세, 세는나이라면 68세여야 한다. 하지만 고종실록은 고종의 나이를 이전의 왕들과 같이 음력과 세는나이 기준으로 기록하고 태양력 시행 이후 시점에 대해서도 개인사와 관련된 모든 일자에 음력을 병기했다. 이는 순종의 경우도 같다.[3] 을미개혁으로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하여, 1896년부터 공식적으로 태양력 도입.[4] 한일병합조약 무효에 따른 명목상 재위 기간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5] 조선 왕조가 개창된 1392년을 원년(元年)으로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연호가 아니라 기년법(紀年法)의 일종이다. 1894년(개국 503년) 갑오개혁 때부터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때의 조치는 '국내외 모든 공문서·사문서에 개국 기년을 사용토록' 한 것이며, 실제로는 1876년(개국 485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청나라를 제외한 외국과의 조약에는 개국 기년을 사용해 왔다. 1896년, 건양 연호 사용 이후에도 칙령 등에서 개국 기년이 혼용된 예가 있다.[6] 1896년(건양 원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7] 1897년(광무 원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 이 때문에 고종을 '연호+(황)제'의 호칭으로 부를 경우 '광무황제(光武皇帝)' 혹은 '광무제(光武帝)'가 되나 실록에서도 용례가 나오지 않으며 현대 학계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냥 대한제국 고종시기 때의 연호는 光武(광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8] 이 외에도 흥경절(興慶節),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등 절일이 있다.[9] 철종 즉위에 얽힌 비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는 후기로 갈수록 점점 손이 귀해졌다.[10] 《맹꽁이 서당》에도 '장쇠' '마당쇠' 같은 이름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11] 음력 계해년(1863년, 철종 14년) 12월 8일 ~ 12월 13일.[출처1] 《이태왕왕족보(李太王王族譜)》.[12] 원래는 인평대군 8대손의 항렬자로, 원래 인평대군파 직계 출신인 고종 일가는 남연군(고종의 할아버지)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한 후에도 인평대군파의 항렬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1868년(고종 5년)부터는 흥선대원군이 아예 인평대군 7대손 '응(應)' 자 부터 그 아래 항렬자 전부를 덕흥대원군의 모든 후손들이 통일/사용하게 했다.('응'자 항렬은 덕흥대원군 기준 11대손이고, 고종의 '재' 항렬은 12대손이다.) 고종 시기 기록을 보다가 '이재O'이란 왕족이 나오면 고종의 형제 또는 형제뻘 종친으로 생각하면 된다.[13] 고종의 친형인 흥친왕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14]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정실 의친왕비 김씨,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단 이 사진은 후대에 조작 및 합성되었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촬영 시기가 불확실한데다가 인물의 비율과 광원의 위치가 어색해 사실상 조작 및 합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딱 봐도 의친왕과 영친왕의 모습은 빛과 그림자가 주변과 괴리가 큰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 및 영친왕의 일시 귀국 시점 등 시기적으로도 저 사진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 기사 참고.[15] 1918년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덕혜옹주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황실 가족이 단독 사진이 아니라 여러 황족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오른쪽 사진과 같이 서열이 제일 높은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유사한 서열을 갖는 사람을 배치하며 각각의 인물들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사진과 같은 서열 배치 및 거리 차이를 감안한다면 왼쪽 사진은 원래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비 김씨만 찍힌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6] 이전 왕들의 어진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용보와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17] 사실 오른쪽은 제대로 된 컬러 복원이 아니라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바닥도 다르고 얼굴(특히 순종의 얼굴)이나 복장도 묘하게 다르다.[18]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광무 9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듯하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보도자료.[19] 전통적인 어진과 달리 인물의 배경에 휘장을 드리운 것 때문에 일본의 화풍이 가미된 어진으로 추정된다.[20] '일본이 한황(韓皇, 한국 황제)을 위협ᄒᆞ야 됴약을 륵뎡(늑정, 억지로 정함)'이라고 쓰여 있다. 가운데 황뎨(황제)라고 쓰인 옥좌에 앉아 식은 땀을 흘리며 분노하고 있는 고종 황제와 왼편의 을사오적 뒤편에서 일본도를 들고 협박하는 일본군과 오른편에서 비웃고 있는 일본인들이 그려져 있다.[21] 메이지 덴노와 니콜라이 2세 사이에 끼인 고종황제의 난처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중간에 끼어 있는 고종황제의 모자 형태가 익선관이 아닌 사모이긴 하나 중간에 엉뚱한 도승지나 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그려 넣었을 리는 없고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사무라이나 불곰같은 상징이 아닌 각각의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구한국 역시도 동물이나 대표적 일반사람의 모습이 아닌 관모를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고종 황제로 보인다. 서양인의 무지이기도 할 테고 정밀묘사화가 아닌 풍자만평이기 때문에 중요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묘사한 풍자이다. 물론 세 명을 개인으로서 짚어서 그린 그림은 아니고 각국 정부, 더 나아가 국가를 세 인물로 묘사한 것이다. 현대의 정치인 만평에 그려질 만한 수위의 그림. 과거 군주들 같으면 상상도 못할 그림으로 의금부에서 관계자를 색출할 만한 그림이다. 또한 이 그림은 다른 방면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고종황제가 한국 역사상 최고지도자이자 정치인이자 공인이자 특정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적 시사만평에 풍자된 사례 중 하나라는 것이다.[22] 구석에 그의 사인이 있다.[23] 가운데 서있는 16번이 메이지 덴노이고 13번이 고종 황제다. 메이지 덴노 옆에는 한자로 '日本國皇帝'(일본국 황제)라고 적혀있는 반면 고종 옆에는 '高麗國王'(고려 국왕)이라고 적혀있다. 당시 정식 칭호인 '황제'라고 불러주기는커녕 국호조차 제대로 쓰지 않았으니 일부러 깎아내린 것이다.[24] 단, 광서제는 서태후의 바지사장이었기 때문에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실패했다. 중국의 잠재적 국력에도 불구하고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면서 이 현상은 심해졌다.[25]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 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 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 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 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물론 1800년대(19세기)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 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 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26] 1910년대 초에 10대밖에 만들지 않아 보관된 과거 조지 5세가 타던 차량 1대 외에 나머지는 모두 유실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 또 있었던 것이다.[27] 이 때문에 경복궁 내부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카페에서 와플을 팔면서 '고종이 즐겼던 와플'이라는 홍보문구를 적극적으로 걸고 있다.[28] 사실 이상한 것이 없는 게 서양 문물에 대해 그리 탐탁치 않았던 메이지 덴노 역시 매일 1끼 이상은 양식과 양과자를 즐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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