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징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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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 추존 황제
世宗 文襄帝 | 세종 문양제

묘호
세종(世宗)
시호
문양황제(文襄皇帝)
생몰 기간
521년 ~ 549년 (28세)
능묘
준성릉(峻成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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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

징(澄)

자혜(子惠)
부모
부황 고조 신무제 고환
모후 신무명황후 누소군
황후
문양경황후 원씨


1. 개요
2. 고환의 후계자가 되다
3. 고환의 뒤를 잇다
4. 황제를 모욕하다
5. 서위와의 전쟁
6. 암살당하다
7. 고양의 사후 처리
8. 둘러보기



1. 개요


고징의 는 자혜(子惠)로 고환과 누씨[1]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고환이 평성과 낙양 사이의 공문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을 때 고징이 태어났다. 525년 두낙주(杜洛周)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환은 여기에 합류했으나, 두낙주가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위경(尉景), 단영(段榮), 채준(蔡雋) 등과 함께 떠났는데 이때 누씨와 고징은 를 타고 떠났다. 도망칠 때 고징이 계속 소에서 떨어져 고환이 화살을 쏘아 죽일까 생각했지만 단영이 그의 목숨을 여러 번 살려주었다. 531년 고환은 이주영 일족의 신하로 있었는데 이주영 사후 이주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대항했다. 이때 고환의 먼 친척 뻘인 고오조(高敖曹)가 반대했는데 고환은 고징을 보내 그를 설득했다.


2. 고환의 후계자가 되다


532년, 고환이 효무제(孝武帝)를 옹립하자 고징은 11살이어서 비록 실질적인 권한은 없다고 해도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534년 고환과 효무제가 파워 게임을 했는데 효무제가 열세였기 때문에 장안우문태에게로 도망가버렸다. 고환은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무시당하자 효무제의 사촌인 효정제(孝靜帝)를 세웠고 북위는 둘로 나눠졌다. 즉, 장안을 중심으로 우문태가 효무제를 옹립하여 장악한 서위와 낙양을 중심으로 고환이 효정제를 옹립하여 장악한 동위로 나눠졌고 곧 고환은 동위의 수도를 낙양에서 성으로 옮겼다.

535년, 고징이 고환의 첩 정씨(鄭氏)[2]간통하자 화가 난 고환은 고징을 폐위시키려 했지만 사마자여가 부인 누씨를 생각해 참으라고 했고 폐위는 없던 일이 됐다. 536년 15살이 된 고징은 고환의 군사적 본거지인 진양에 머물러 있었는데 고환에게 수도인 업성으로 가서 정부의 일을 맡아보겠다고 청했다. 고환은 처음에 거부했지만 손건(孫搴)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징을 업성에 보냈다. 고징은 난폭하긴 했지만, 유능한 통치자였는데 법을 엄격히 적용하며, 고환보다 유연한 정책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경력으로 승진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부패의 원인이 된다 하여 능력있는 자들을 우선 승진시켰다. 540년 고징이 효정제의 누이 풍익공주(馮翊公主)[3]와 결혼하자 효정제가 친히 고징의 집에 가서 축하를 해주었고 모든 관료들이 축하선물을 주었다.

543년 고징과 그의 심복인 최섬(崔暹) 때문에 장수 고중밀(高仲密)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중밀은 처음에 최섬의 누이와 결혼을 했지만 그녀를 버렸고, 그로 인해 고중밀과 최섬의 관계가 벌어졌다. 최섬은 고중밀의 잘못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켰는데 그러던 와중, 고중밀의 새로운 아내 이창의(李昌儀)가 너무 이뻤기 때문에 고징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 이창의는 도망갔고 고중밀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중밀은 북예주(北豫州)자사를 맡게 되었는데 북예주의 주도 호뢰(虎牢)를 서위로 넘기면서 투항했다. 빡친 고환은 최섬을 죽이려고 했지만 후에는 용서하고 태형에 처했다. 고징도 진원달(陳元達)을 통해 최섬을 처벌하면 자신의 권한이 약해지기 때문에 그를 벌하지 말라고 청했고 고환도 최섬을 벌하지 않았다. 호뢰, 낙양에서 동위와 서위 군대가 맞붙었고, 우문태와 고환 모두 거의 죽을 뻔 했다. 이후에 동위가 호뢰를 함락했고 이창의는 업성으로 보내져 고징의 첩이 되었다.


3. 고환의 뒤를 잇다


546년 고환은 병이 들자 고징을 진양으로 불렀고 자신의 업무를 맡겼다. 고징은 이때 황하 이남을 다스리고 있는 후경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에 고환은 자신이 믿는 신하들의 명단을 주면서 특히 후경과 싸울 때는 모용소종에게 사령관을 맡기라고 했다. 547년 고환이 죽자 유언대로 고징은 부친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업성으로 돌아가 고환이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547년 후경은 처음에 고환이 죽었는지 아닌지 헷갈렸지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후경은 하남 13주를 가지고 서위로 넘어갔다가 이후에 양나라로 갔다. 고징은 처음에 한궤(韓軌)를 보내 후경을 막게 했다. 한궤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듯 했으나, 후경은 4개 주를 서위에 떼어주며 도움을 요청했고, 서위군이 도착하자 한궤의 부대는 철수했다. 하지만 후경과 서위는 갑자기 틀어졌고 서위군이 철수해 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양무제 소연은 자신의 조카소연명을 시켜 후경을 도와주게 하여 군사를 파견했다. 고징은 고환의 죽음을 공표하고 모용소종을 사령관으로 삼았다. 후경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한다면 그대로 하남의 통치를 맡기겠다고 했으나, 후경은 거절했다.


4. 황제를 모욕하다


고징의 재능이 뛰어났으나, 확실히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 고환이 살아있을 때 첩과 정을 통하기도 했고 아버지 사후에는 아버지의 첩들과 또 정을 통했다. 고환은 효무제와 마찰 끝에 효무제가 도망친 것을 안 이후에는 효정제를 존중하여 정사를 먼저 효정제에게 상주하고 연회가 있을 때에는 땅에 절을 한 뒤에 술을 올렸다. 하지만 고징은 전혀 달랐는데 한족 출신의 선비들을 등용하여 지지를 얻었지만 효정제를 완전히 무시했다. 우선 심복 최계서를 시켜 효정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어리석은 사람이 다시 어떠할 것 같은가? 어리석은 기색이 조금 차이가 있는가? 응당 마음을 써 자세히 조사하라.


최계서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아예 어리석은 자라고 표현할 정도로 효정제를 우습게 봤다. 하루는 효정제가 사냥을 나섰다가 흥이 올라 나는듯이 말을 몰았다. 그러자 그의 수행원이 큰 소리로 만류했다.

폐하, 그렇게 빨리 달리다가는 대장군께서 화내십니다.


효정제는 하다못해 말 달리는 속도마저도 고징의 간섭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자기가 한 짓이 있어서 효무제처럼 효정제도 달아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징은 자주 황제의 연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한번은 시종에게 가장 큰 술잔을 가져오게 하여 술을 가득 채우더니 효정제에게 말했다.

폐하, 건배하시지요!


이는 도저히 대신이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말투라고는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친구와 술잔을 주고받는 듯 했다. 그러자 하도 어이가 없던 효정제는 한탄했다.

효정제: 이 이렇게 살아 뭣하겠는가?

고징: 뭐? 짐? 짐? 무슨 다리짐이냐?


고징은 최계서를 시켜 효정제를 주먹으로 3번 구타하게한 후 옷을 떨치며 나갔다. 다음 날 고징은 효정제에게 사죄했으나, 효정제는 괜찮다며 비단 100필을 주고 무마시켰다. 하지만 효정제는 서럽고 분해서 시강(侍講) 순제(荀濟)[4], 사부랑중(祠部郞中)[5] 원근(元瑾)[6], 화산왕(華山王) 원대기(元大器)[10][11] 등과 모의하여 고징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하였고 고징이 화가 나 효정제에게 따졌다.

고징: 폐하는 어찌 반역할 뜻을 가지셨습니까? 신 부자의 공으로 사직이 있게 되었는데 폐하에게 무슨 죄를 지었던 말입니까? 이는 필시 좌우의 비빈(妃嬪)들이 한 짓일 것입니다.

효정제: 옛날부터 오직 신하가 군주를 배반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군주가 신하를 배반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고징)[12]

이 스스로 배반하고자 하면서 어찌 나[13]에게 책임을 지우는가? 내가 왕을 살해하면 사직이 안정되고 살해하지 않으면 망해 없어지는 것이 며칠 없으니 내 몸도 아낄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비빈의 경우에야! 반드시 시역하고자 한다면 늦추든가, 빨리 하든가 하는 건 왕에게 달려 있다.


고징은 효정제를 함장당에 유폐하고 순제 등 관련된 신하들을 죽였다.[14]


5. 서위와의 전쟁


548년 모용소종은 한산(寒山)에서 소연명의 양군을 격파하고 소연명을 사로잡았다. 고징은 소연명을 극진히 대접해 주었고 그를 이용해서 후경과 대결하려고 했다. 모용소종이 후경의 부대를 격파하자 후경은 이에 양나라로 달아나 수양(壽陽)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후경은 결국 대란을 일으켜 양의 수도인 건강을 점령하였고, 무제 소연이 아사하자 후계자로 간문제를 세우고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이때 후경은 고징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했지만 이번엔 고징이 무응답이었다. 549년 고징은 서위가 후경으로부터 가져간 지역을 회복하려고 고악과 모용소종을 보내 장사(長社)를 포위했다. 장사는 서위의 장수 왕사정(王思政)이 지키고 있었는데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이 전투에서 서위군이 모용소종과 유풍생(劉豐生)을 죽이자 고징이 친정을 해서 장사로 갔다. 공성전 끝에 장사를 함락시키고 사로잡힌 왕사정을 잘 대우해주었다. 이후에 서위군은 다른 3개 주에서도 철수했고 결국 후경에게서 받았던 영토를 모두 동위에게 뱉어냈다.


6. 암살당하다


기세등등해진 고징은 이제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심복인 진원강(陳元康), 최계서(崔季舒), 양음(楊愔) 등과 어떻게 황제가 될까 의논했다. 그의 시종 중에 양나라 서주 자사 난흠(蘭欽)의 아들 난경(蘭京)이 있었는데, 전쟁 중에 사로잡은 포로였다. 그의 아버지 난흠이 몸값을 지불할테니 풀어달라는 부탁을 했지만 여러 번 거부했다. 더불어 난경을 구타하면서 욕을 해 이에 원한을 품은 난경은 몰래 아우 난아개(蘭阿改)를 포함한 6명과 고징 암살을 모의했다. 어느 날, 고징이 심복들과 의논하던 중 난경이 음식을 날랐는데 그가 밖에 나갔을 때 고징이 이렇게 말했다.

저 놈이 어제 에 나왔는데 날 죽이려 하더라고. 아무래도 죽여야겠어.


그래서 고징은 난경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난경은 안주를 담은 목판 속에 을 감추고 술을 마시던 고징에게 갔다. 고징은 들어오지 말라던 난경이 들어오자 화를 냈다.

고징: 네 이놈! 내 말을 못 들었느냐? 들어오지 말랬는데 어찌 다시 온 것이냐?

난경: 네 놈을 죽이러 왔다!


그러고는 곧장 칼을 꺼내 고징을 찔렀고, 그는 2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징의 심복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쳐 숨었다. 그의 장남 고효유(高孝瑜)는 13살로 어린 탓에 고징의 동생이자 고환의 차남이었던 고양이 뒤를 이었다. 고양이 북제를 건국한 후 고징을 세종(世宗) 문양황제(文襄皇帝)로 추존했다.


7. 고양의 사후 처리


고양은 이때 업성에 있었는데 곧바로 군사를 모아 난경과 그 공모자들을 죽였으며,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고징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처음에 효정제는 고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권력을 되찾으리라 생각했지만 고양이 호위병 200명을 데리고 왔을 때 그를 다루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550년 고양은 효정제를 협박해 북제를 건국하게 된다.

8. 둘러보기






[1] 이름은 누소군(婁昭君)으로 동생 고양에 의해 무명황후(武明皇后)로 추존되었다.[2] 이름은 정대차(鄭大車)[3] 이름은 원중화(元中華)로 훗날 정덕황후(靖德皇后)로 추존되었다.[4] 자는 자통(子通)이고 본관은 영천군이며 순황의 후손이다. 영가의 난겨레가 강남으로 피난을 가서 대대로 객가인처럼 살았으며 양무제의 벗이었으나 주이의 밀고 때문에 나중에 동위에 투항하였다.[5] 사부는 예부의 옛 이름이며 낭중은 참의에 해당한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예조참의.[6] 효정제의 11촌 황야(皇爺. 황제의 할아버지뻘 황족)이다. 계보는 세조 태무황제 - 광양간왕(廣陽簡王) 원건(元建, 선비어 이름은 탁발수락진 拓跋樹洛眞) - 광양의렬왕(廣陽懿烈王) 원가(元嘉) - 광양충무왕(廣陽忠武王) 원연(元淵) - 원근이다.[7] 선비어 이름은 탁발보락진(拓跋步洛眞)[8] 선비어 이름은 탁발가실릉(拓跋可悉陵)[9] 공작. 자는 이름과 말미있게 짓는데 이름의 뜻이 사나운 새임을 생각하면 공작이란 자는 의도한 것이다.[10] 효정제의 19촌 현조부뻘 되는 황족이다. 계보는 도무제의 종조부 고량신무왕(高涼神武王) 원고(元孤) - 고량평양왕(高涼平陽王) 원근(元斤) - 고량양왕(高涼襄王) 원낙진(元樂眞)[7] - 양읍자(襄邑子) 원능(元陵)[8] - 기주자사 원굉(元肱) - 화산무왕(華山武王) 원지(元鷙)[9] - 원대기이다.[11] 동양 사서에선 원래 황족이나 왕족은 작위명 뒤에 이름이 올 때 성을 생략하지만 현대어에선 다 있는 편이 알아보기 쉬우므로 전부 기재하였다.[12] 발해왕이었다.[13] 원문에 짐(朕)이 아니라 我(나)라고 나와 있다. 아마 고징에게 짐이라고 했다가 얻어 맞은 것 때문에 무서웠던 모양이다.[14] 자치통감에는 팽형에 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