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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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 시대 역사적 인물
2.1. 대중매체


1. 전라남도 고흥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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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 시대 역사적 인물[편집]


高興
(생몰년도 미상)

백제 근초고왕 때의 학자, 관료. 알려진 관직은 박사(博士).

375년 백제 역사문자로 기록한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 이 기록을 제외한 고흥의 행적은 지극히 짧고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백제 역사를 정리한 서기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서기의 편찬은 고대 국가의 완성 및 백제 국력과 왕권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서기는 후대의 기록인 일본서기에서 인용하는 백제삼서백제기의 원형을 제시한 역사서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2]

고흥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없어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출신에 대해서는 한사군계의 인물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이는 낙랑 유적에서 발굴된 전돌 등의 유물에 고씨, 왕씨, 장씨 등의 성씨가 보이기 때문인데 한사군 몰락 전후로 상당수 인재들이 백제 등지로 망명해서 백제 문한기구에 인재들로 기용되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근초고왕 시기 이들은 교육보다는 왕의 정치 자문단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2.1. 대중매체[편집]


KBS 대하사극 근초고왕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안석환 역사적 기록과는 조금 다른 출생을갖고 있는데 바로 부여인이자 부여 출신 유학자로 나온다.[3] 부여출신 유학자이기 때문에 현왕의 신하로 나오며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예맥의 상징적 부여의 옥쇄를 들고 주인을 찾아 떠나며 결국 근초고왕에게 그것을 넘기게 된다. 작중에서 말버릇으로는..

그러니 네가 유학을 잘 못 배웠다밖에..


이다. 매번 아지카이(아직기)를 타박할때 항시 쓰는 멘트이다. 요서시절에는 군사 역할을 백제로 귀환하고는 역사대로 박사로 인재양성을 해간다.

[1] 고흥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서도 기록이 적어 알 수 없다고 자인할 정도.[2] 이도학은 書記를 한자 그대로 해석해 고흥의 기사에 서기가 사서가 아니고 역사를 기술했다라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했다. 고흥이 백제 역사 정리 과업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3] 덕분에 아지카이가 그의 문하에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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