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살로 데 코르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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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 y Enríquez de Aguilar
1453년 9월 1일 ~ 1515년 12월 2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편집]


스페인의 군인이자, 귀족.

정식 명칭은 산탄젤로, 테라노바, 안드리아, 몬탈토와 세사 공작 돈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이 엔리케스 데 아길라르(Duque de Santangelo, Terranova, Andría, Montalto y Sessa, Don 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 y Enríquez de Aguilar)이지만 이렇게 긴 걸 외울 필요는 없으므로 곤살로 데 코르도바로 훨씬 널리 불린다. 스페인 사람들이나 이 시대 유럽사에 대해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위대한 장군'이란 뜻인 엘 그란 카피탄(El Gran Capitán)이라 부른다.


2. 생애[편집]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공동으로 재위하고 있는 에스파냐 중흥기의 명장으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때 이사벨 측에서 종군하여 군공을 세웠다. 이때의 커리어를 시작해서 레콘키스타 말기에 당시 무어인들의 마지막 남은 거점인 그라나다를 공략하는데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엘 그란 카피탄(El Gran Capitán)이라는 칭호도 수여 받았다.[1] 이후에도 1499년에 에게 해의 패권을 두고 베네치아 공화국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스페인 지원군의 사령관으로 참전해 오스만 제국의 에게해 해안 요새였던 세팔로니아를 기습 공격하여 탈취하여 이미 전쟁에서 크게 지고 있었던 베네치아가 그나마 남아 있는 발칸 반도 서부의 거점들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 남자의 본격 리즈 시절은 바로 1494년 부터 1559년 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를 두고 터진 합스부르크 가문발루아 왕조이탈리아 전쟁 중 1503년에 일어난 체리뇰라 전투이다.[2]

체리뇰라 전투는 근대 유럽 전쟁사의 패러다임 변화를 제시한 중요한 전투였다. 파비아 전투가 밀집 창병대와 총병대가 적절히 조합된 부대가 중세의 끝판왕 중갑기병대를 박살 낼 수 있단 걸 입증해주고 총의 가치를 유럽 전역에 널리 알린 의의가 있다면, 그보다 20년 전에 스페인은 체리뇰라 전투를 비롯한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의 전장에서의 경험으로 적의 군대 자체를 격파하는것 보다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하여 군세를 흔들어 놓는 전략적 게릴라전, 화약무기 중심의 군 편제 개혁, 참호나 터널을 비롯한 야전 축성과 전투 공병의 전술적인 기용, 그리고 보병, 총병, 포병, 기병의 유기적 연계를 성립했으며, 아직 대규모 기사단 중심의 중세적 전술을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유럽 군대보다 한층 더 세련 되고 복합적인 전술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테르시오가 탄생하게 되었다. 1502년,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은 남부 이탈리아라는 거대한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폴리 왕국을 같이 침공하여 분할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 분할 약속이 당연하단 듯이 깨지면서 당시 실제로 현지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일한 스페인 야전군의 사령관이었던 곤살로 데 코르도바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고 본국에서 지원군이 도착 할 때 까지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 1502년에서 다음 해 봄 까지 이탈리아 반도 동남부의 바를레타 성에서 농성을 벌였다. 가을과 겨울 내내 스페인군을 성 밖으로 끌어 내어 야전에서 궤멸 시키기 위해 프랑스군은 코르도바를 도발하였고, 자신의 병사들도 성 안에만 처 박혀 불만에 차 있었으나 코르도바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성 밖에 나가지 않는 대신 레콘키스타 당시 이베리아 반도나 동유럽의 발칸 전역에서는 흔했으나 나머지 유럽에서는 생소한 전략이었던 소수의 경보병이나 경기병만 데리고 번개 같이 야습을 걸어 보급 물자를 훔치거나 파괴한 뒤 다시 요새로 튀는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가볍고 경쾌한 기동성을 지닌 병력을 중심으로 대규모 회전보다 지속된 기습, 약탈, 방화, 농지나 물자 파괴를 통해 전략적 차원에서 적의 전쟁 지속 능력을 뒤 흔드는 유격전이 이베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에서 나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두 지방 모두 유럽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세력과 직접적인 땅을 맞대고 있어 적대적인 현지 무슬림 주민들과 기독교 유럽인 주민들 사이에 본격적인 전면전이 아니라도 이런 식으로 끝임없이 서로의 마을을 습격하고, 농작물을 약탈하다가 기회가 되면 순식간에 쳐들어가 싹 다 죽이거나 불태운 뒤 돌아 오는 식으로 전쟁과 일상이 깊게 연결 되어 있으며 현지 사회상은 일종의 영구 전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식의 상대편의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사보타주 하는 식의 전술이 크게 발달했다.[3]

이러다가 1503년 봄, 오트란토 해협에서 스페인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 사이의 해로를 확보하여 바를레타의 그란 카피탄에게 2,000명의 독일산 란츠크네히트 지원군이 도착하자, 농성 내내 게릴라전에 시달렸던 프랑스군이 군세를 못 추스리고 있을 사이 재빠르게 전 병력을 이끌고 튀어 나와 인근의 체리뇰라 마을을 점령했다. 당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이 죄다 튀었다는 걸 알고 추격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군대를 배치하기 위해 그란 카피탄은 기병들에게 모두 보병들을 가능한 한 많이 같이 말에 태워 이동하라고 명령했는데, 기마전이라는 항목 자체를 여전히 귀족의 전유물로 여기는 기사도가 전장의 문화를 지배했던 당시 군대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모욕적인 주문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꽁무니 빠지도록 움직여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도 모자랄 판에 병사들이 개기는 꼴까지 감당한 여유가 도저히 안 되었던 그란 카피탄은 아예 본인이 말 없이 솔선수범하여 걸어 가던 보병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자기 말 위에 같이 태운 뒤 행군을 계속 하자 나머지 병사들도 군말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단순한 전술적인 차원을 넘어 전쟁 기계로서의 군대와 이를 지배하는 군사 문화의 차원에서 시대를 앞서나간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쨋든 발에 불 붙게 움직여 프랑스군을 따돌리고 체리뇰라 마을 앞에 도달하자마자 그란 카피탄은 전선 중앙에 긴 참호를 파고 여기에 뾰족한 나무 꼬챙이를 박아 대기병 야전 진지를 구축한 뒤 군대의 주력이었던 총병들을 집어 넣었고, 스페인군이 자리 잡은 고지의 정상에 페드로 나바로의 대포들을 배치한 다음, 파이크로 무장한 란츠크네히트와 스페인 보병들은 참호 뒤의 예비대로 깔고, 본인은 중기병을 이끌고 후방에 자리를 잡은 뒤 마지막으로 경쾌한 기동력과 끈질김, 투지로 이름 높았던 히네테 투창 경기병을 미끼로 본진 앞에서 적을 유인하게 했다.

그란 카피탄이 가까스로 방어진을 다 구축하기가 무섭게 프랑스 군은 헐레벌떡 쫒아 와 스위스 용병장다름 기사대[4]를 중심으로 스페인군에게 정면 공격을 가했다. 육중한 갑옷에 랜스를 끼고 돌격을 준비하던 프랑스 기사들은 갑자기 땅 아래에서 스페인 총병들이 튀어나와 언덕 위의 대포들과 함께 일제 사격을 퍼부어버리자 당황하여 퇴각하였고, 다시 스페인군의 우익, 중앙, 우익을 이리 저리 찔러 보았으나 프랑스 기병들이 접근 할 때 마다 스페인군은 사격을 퍼 부은 후 뒤에 있던 파이크와 검으로 무장한 보병대를 전방으로 내세워 프랑스 기사들의 공격을 완전히 튕겨냈고, 이 과정에 프랑스군의 지휘관이었던 네무르 공작 루이 달마냑이 총격을 맞고 전사하여 현존하는 기록 중 최초로 화약 무기를 맞고 전사한 유럽의 고급 지휘관이 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기사단의 공격이 모두 좌초되고 사령관 마저 죽어버려 군대 자체가 와해 될 위기에 처하자 스위스 용병대장이 지휘권을 잡아 당장의 모랄빵을 방지하기 위해서 스위스 장창병과 남아 있는 가스코뉴 보병대의 일제 진격을 명했는데, 스페인군의 대포 20문 보다 두배 많은 40문의 대포를 비롯, 잘 무장된 프랑스군 후방 예비대가 미쳐 도착하기 전에 공격에 나서버린 것이 되어서 일이 제대로 틀어졌다. 스위스 장창병들이 요새화 된 스페인 군 중앙에 쇄도하자, 그란 카피탄은 총병대를 모두 빼내고 스페인 보병과 란츠크네히트 창병들을 전면에 보내 스위스 용병들과 교전하는 사이, 참호에서 나온 총병대들을 스위스 보병 양 측면으로 보내고 다시 일제 사격을 가하며 포위하고, 마무리로 본인이 직접 이끌던 스페인 기사단으로 남은 프랑스군을 덮치자 전의가 완전히 무너진 프랑스군은 그나마 정예병의 뚝심으로 어느 정도 질서정연하고도 신속하게 퇴각한 스위스 용병대를 제외하고는 무질서하게 전장을 이탈하다가 뒤따라온 히네테 경기병들에게 도륙되었다. 그 와중에 저 뒤늦게 도착한 나머지 프랑스군의 후방 부대도 목전에서 혼비백산하게 도망치는 아군과 쇄도하는 스페인 추격대 사이에 섞여 알아서 와해 돼 버렸다.

전투가 시작 했을 때 스페인은 6,000 명 정도, 프랑스군은 그 9,000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군의 손실은 200 정도 밖에 안 되었고, 프랑스군은 전군의 반에 가까운 4,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프랑스의 세력은 이 전투로 인하여 완전한 수세로 전환해야 했으며, 그해 말 12월의 가릴리아노 다리 전투에 다시 한번 그란 카피탄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대패를 당하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당했다. 이후로도 프랑스는 심지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계속 이탈리아에서 스페인과 충돌을 반복했으나, 1550년대 펠리페 2세에게 결정적으로 처발려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 당한 이후 18세기 까지 나폴리와 시칠리아라는 지중해 복판에 있는 부유하기 그지 없는 노른자위가 스페인에게 일방적으로 넘어 가는걸 지켜 봐야했다. 당시 유럽에 생소했던 게릴라성 유격전, 유리한 거점을 점거하여 적에게 불리한 공격을 강요하는 진지전, 화약 무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술, 참호나 대기병 바리케이드 등의 야전 축성과 전투 공사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이걸 모두 묶어 주는 기병, 보병, 총병, 포병의 유기적인 배치와 운용, 즉 중세 전장의 모습을 영원히 바꾸어 버린 근세 유럽의 군사적 혁신 중 상당수가 이 전투 하나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이 체리뇰라 전투를 두고 현대 유럽 군사학계는 이 사람을 참호전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게다가 비단 전술적인 면을 넘어 체계적인 보급 체계, 장교단 육성, 장병 복지, 야전 공병대의 중용 등 당시 유럽에서는 여전히 미비했던 전략적 차원의 군 지원 체계의 바탕을 닦아 놓아 16세기~17세기를 걸쳐 스페인이 자국의 통치령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밀라노에서도 1,000킬로나 떨어진 플랑드르 전역에 5만~8만 가량의 대규모 상비군을 항상 주둔 시켜 놓고,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라는 걸출한 적들을 상대로 삼면 전쟁을 80년 동안이나 지속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파리를 위협하거나 신생 네덜란드의 명줄 자체를 간당간당하게 만들 수 있게 한 스페인의 군사적 인프라의 초석을 놓았다.

왠만한 대규모 원정이 있을 때 마다 10만 단위는 기본으로 노는 동아시아 입장에서는 저게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감흥이 안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스페인의 최고 리즈시절이었던 펠리페 2세의 치세 때도 스페인 전체 인구가 9백만이 될락말락 했으며, 플랑드르와 스페인 사이의 해로는 스페인과 적대적이었고 강력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연합 해군이 틀어 막고 있어 사용 불가능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흔히 동시대인들이 '스페인인의 길'이라 불렸던 저 밀라노에서 현대 벨기에까지 이어지는 머나먼 육상 보급로 중 많은 구간은 당시 적성국이었던 프랑스나 팔츠 선제후국, 스위스의 제네바 등 적지에 놓여져 있었다. 사실 이 시기 스페인군은 분명히 유일무이한 단일 유럽 국가로서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지만, 종종 중요한 대규모 회전에서도 패배했기에, 전적상으로는 대단하지만 무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전성기 스페인의 진짜 대단함은 군대 유지 비용이 국가 소득을 까마득하게 추월하여 국가 경제가 파산을 선언할 정도로 파탄났으며 저런 식으로 큰 회전에서 한 다섯 자리로 전력을 상실하고 나면 적어도 몇년 동안은 정신도 못 차리고 그로기 상태에 빠지는게 일반적이었던 타 대부분 유럽 국가들과 달리, 프랑스나 오스만 제국과 비교해서 딱히 인구가 많지도 않고, 생산력이 좋지도 않았던 나라인 스페인이 개별 전투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장기적인 전략적 차원에서 위협적인 작전 능력을 계속 유지하고 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이런 전쟁 수행 능력의 근간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저급이면 저급이지 딱히 대단할 것도 없었던 무기나 다른 단기적인 전술적 요소를 넘어 기본적인 군사적 인프라 자체가 선구자적으로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5]. 단적으로, 단순히 해당 원정 때만 쓰고 버리는 임시 주둔지가 아닌 장기적인 군대의 거주를 위한 막사를 포함하여 야전 병원, 민간들이 사는 도시와 가깝게 연계된 전략적 군 기지, 전근대 군대의 행군 속도를 끔찍하게 느리게 했던 기나긴 보급 행렬을 대신해 현지 상인들에게 그때 그때 재보급을 받는 선불 지원 체계 등이 이 당시 스페인군에서 처음 개발하여 나머지 유럽 국가들에게도 퍼진 것이다.


3. 평가[편집]


당시에도 초일류급 장군으로 휘하 부하들과 다른 군인들에게 존경 받았지만 출신이나 배경이나 이사벨 1세 여왕이 다스리던 카스티야 출신의 귀족이었던지라 아내가 죽은 후 카스티야계 귀족들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했던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의 시샘을 받아 대충 번지르르한 명예 작위나 한가득 받고 실질적으로 강제로 군복이 벗겨진 뒤 1515년 스페인의 로하에 있는 영지에서 사망한다. 사후 스페인군의 상급 지휘관들과 군사 행정관, 참모들은 죄다 이 사람의 제자들과 그 학생들이 차지하여 그의 전법과 용병술이 근세 스페인군의 핵심적인 전투 교리가 되었으니 17세기 중반 까지 유럽 지상전의 제왕으로 군림 했던 스페인 육군의 실질적인 대부이자 화약 시대 초기의 전장 패러다임의 변화를 제시한 개혁가였다고 평할 수 있다.

[1] 여기서 카피탄(Capitán)은 영어 캡틴(Captain)과 동원어인데, 뜻도 같다. 이 지위는 근대 이전까지는 상당히 높은 지위였는데, 원래는 동로마 제국에서 고위 군사령관을 가리키는 말 중 하나였고, 중세 서유럽에서는 일정한 부대의 대장을 가리켰다. 백년전쟁프랑스 왕국이나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용병대가 탄생하면서 이들을 특별히 "Great Company"(대부대) 혹은 "Free Company"(자유부대)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여러 부대(Company)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이끄는 대장(Captain) 중에서도 상급자를 가리켜 "Grand Captain"(상대장)이나 "Captain General"(총대장) 정도로 불렀었다. 근대에 이르러 Captain의 경우 그들이 이끄는 부대인 "Company"보다 큰 "regiment"를 이끄는 "Colonel"(연대장)의 하급자 및 제대가 되었으나, Captain General의 경우 General로 축약되어 장성급 계급을 이루거나 그 형태 그대로 원수 계급이 되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군사 계급 등 관련 문서를 참고할 것.[2] 당시 대포와 야전 축성, 터널 굴착 등 전투 공병에 관해선 도가 튼 페드로 나바로가 그를 부관으로서 보좌했다. 초기 화포의 기계적 불안정과 형편 없는 명중률 때문에 아직 공성전에서 성벽 파괴용으로나 쓰였지 야전에서는 그다지 사용 되지 않았던 당시의 대포를 양익에 배치 한 뒤 사선으로 교차 포격을 가해 프랑스군을 유린했다. 여기서 큰 공을 새운 페드로 나바로는 10년 뒤 프랑스가 체리뇰라 전투의 패배를 크게 설욕한 라벤나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지휘하다가 대패하고 포로로 잡혔는데 당시 아라곤의 왕이자 세상을 떠난 아내 이사벨 여왕을 대신하여 카스티야도 섭정으로 다스렸던 가톨릭 왕 페르난도가 그란 카피탄에게 한 것 처럼 페드로 나바로도 보석금따윈 없이 살던지 죽던지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버려 버려서 그 이후로는 이전까지 계속 맞서 싸웠던 발루아 왕조 프랑스군의 장군이 되었다.[3] 다만 이베리아 반도는 레콘키스타의 확장과 종결로 이런 모습이 점차 사라졌다. 반면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헝가리, 우크라이나, 발칸 반도 일대의 평야 지방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패권이 결정적으로 약화될때까지 200년에 가까운 영구 전쟁 상태에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코사크 또한 이리하여 원래 구체적인 구심점이 있는 민족, 정치 집단이 아니라 저런 장기적 막장 속에서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상호 보호의 차원에서 반 군사화 된 유목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생겨났다.[4] 평시에는 영지에서 알아서 전시에만 모였던 일반 기사들과 달리 백년 전쟁 말기 왕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프랑스 왕가가 창설한, 주기적인 급료를 받으며 왕의 명령에 따라 항상 전쟁에 투입 될 수 있도록 상비군화 된 중기병 부대이다.[5] 그 때나 지금이나 스페인의 공업적 역량 자체는 유럽 기준에서 별로 대단할게 못 됐고, 제국 시절에도 상업이나 공업 같은 물리적인 부분은 대부분 동맹국인 제노바 공화국이나 친합스부르크계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공국들에게 아웃소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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