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양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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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대전
昆陽之戰

시기
23년
장소
중국 허난 성 핑딩산 시 애 현
원인
왕망의 폭정과 유수의 한(漢)복원 운동
교전세력
현한(玄漢)
신(新)
지휘관
유수
종조
이질
왕봉
왕상
부준
왕읍
왕심†
엄우
진무
거무패
병력
10,000 명
430,00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토벌군 궤멸
결과
현한의 대승
영향
신(新)의 몰락, 유수의 입지 상승

1. 개요
2. 신나라군의 곤양 파견
3. 곤양성의 위기
5. 영향



1. 개요[편집]


중국 한나라 시기의 전투로, 10,000명의 병력이 430,000명의 적을 물리친 희대의 대첩.

고대 전쟁사에서 소수가 다수를 이긴 전투들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나, 이때 승리한 소수의 군대의 기병 전력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기병은 기동력과 충격을 활용한 집단공격에 용이했고 보병보다 무장이나 숙련도가 우수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병종이었다. 단순 병력의 인원 차가 아닌 기병의 전투력을 고려한 전력 상으로 비교해보면 승리한 소수군의 열세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곤양대전의 경우 보병만으로 이루어져 병종의 측면에서도 불리한 쪽이 압도적인 숫적 전력차까지도 뒤집고 승리를 거둔 매우 드문 사례이다.[1]

2. 신나라군의 곤양 파견[편집]


기원후 23년 경시제 유현을 중심으로, 유인, 훗날의 광무제 유수는 한나라의 재건을 선포했다.[2] 왕망은 3월에 태상편장군 유수, 성국상공 왕봉 등이 곤양, 정릉, 언릉 등을 함락하자 한나라 재건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사공 왕읍, 사도 왕심 등을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보낸다.

이때 신나라의 군대는 기록에 따라 분분한데 42만이라는 설[3], 100만이란 설, 60만이란 설이 있다. 100만 대군설은 전투병만 42만 명이고, 나머지는 보급군과 참모 63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종합군이라는 것이고, 60만설에서는 순수 전투병 40여만 명에 서역의 맹수 군단을 앞세우고 초장부터 기선 제압을 위한 휘황찬란한 종합 병력이었다고 한다.

왕망이 천하에 영을 내려 병법 63가에 밝은 사람을 찾아 수백 명을 불러들여 군대의 관리로 임명하면서 무위를 뽑아 훈련시켰다. 용맹한 군사를 모집해 정기, 치중이 천 리를 끊이지 않았으며, 키가 아주 컸던 거무패[4]라는 장사가 호랑이, 표범, 물소, 코끼리 등 여러 맹수들을 몰았다.

5월에 왕읍, 왕심 등은 영천에서 납언장군 엄우(嚴尤), 질종장군 진무(陳茂) 등이 이끄는 군대와 합쳤고[5] 현한에서 곤양성을 지키는 병력은 8, 9천 명 정도인데, 그 중 태반은 창칼이라곤 잡아본 적 없는 농민군이었다. 즉 공성군이 수비 병력의 최소 40배 이상인데 수비측의 병력의 질이 좋은 것도 아닌 상황이었던 것이다. 중앙의 주력군, 최소 43만을 상대로 농성 8, 9천은 승부가 안 되는 싸움인지라 모두가 겁에 질려있었으며, 모두가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고 신나라의 군사들은 곤양성 북쪽에 이르렀다.


3. 곤양성의 위기[편집]


이때 곤양성에 있던 광무제 유수가 성국상공 왕봉, 정위 대장군 왕상 등을 성에 남기고 자신은 지원군을 데려오겠다면서 밤에 몰래 표기 대장군 종조, 오위 장군 이질 등 13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남문으로 나가기로 한다. 13명만으로 곤양성을 둘러싸고 있는 43만명을 피해 정릉과 언성에서 지원군을 데리고 오겠다는 미친 계획(...)을 실행하려 한 것이다. 유수가 말하니 지금 우리는 군사와 식량이 매우 부족하다. 그러나 밖에 있는 도적은 강하고 크며, 힘을 합쳐서 이를 방어하면 공로를 거의 세울 것이다. 만약 흩어지면 안전할 수 없고 아직 완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서로 구원해줄 수 없는 상황이다. 곤양이 함락되면 하루 사이에 여러 부대는 멸망할 것이며 지금 마음과 담력을 함께해 공명을 떨치지 않고 처자와 재물을 지키려 한단 말인가?라고 했다. 12명의 결사대와 유수가 합쳐 13명이 43만명의 신나라 포위를 정면으로 뚫고서 빠져나갔다고 한다.

신나라의 장수 왕심, 왕읍 등이 곤양을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군영 수백 개를 세우면서 십여 장 높이의 운거를 놓아 성 안을 내려다 보았으며, 엄우가 왕읍에게 저들을 항복시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왕읍은 7년에 적의를 포위했을 때 산채로 잡지 못한 죄에 연루된 일이 있으므로 이를 거부했다. 신나라군은 땅굴을 파거나 충차, 팽차, 화살 등을 이용해 공격하고 왕봉 등은 항복을 요청했지만 신나라군이 이를 거부했다.

또한 엄우가 왕읍에게 포위하는 곳 중에 한 곳을 비워둬 일부러 도망가게 해서 완성을 공포로 몰아넣게 하자고 했으나 왕읍은 또 그 제안을 거부했다. 왕심, 왕읍 등은 스스로 공을 세울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여겨 흐트러진 태도를 보였으며, 밤에 유성이 진영 가운데에 떨어지고 낮에는 구름이 무너진 산처럼 군영으로 떨어져 내려 땅 가까이에 이르러 흩어지자 신나라의 관리, 병사들은 놀라서 모두 엎드렸다.

유수가 정릉과 언성을 돌다가 장수들이 재물을 욕심내고 아까워해 병사를 나누어 지키려고 하자 유수는 "적을 깨뜨리면 진귀한 보배는 만 배가 되고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며, 진다면 목숨이 남아나지 않는데 어떻게 재물을 가질 것이냐?"라고 말하면서 병사들을 징발했다.


4. 진 유수무쌍[편집]


이렇게 유수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징발한 군사는 고작 3천 명으로 6월 1일에 유수가 스스로 보병,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신나라군과 4,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진을 쳤으며, 왕심, 왕읍 등이 이에 맞서 군사 수천 명을 보내자 유수가 이들을 달아나게 하며 수십 여 명의 목을 베었다. 여러 부대가 기뻐하면서 "유 장군(유수)께서 평소에 작은 적을 겁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큰 적 앞에서 용감한 걸 보니 기이한 일이라며, 또 다시 선봉에 선다면 장군을 돕게 해달라."고 말했다.

유수가 다시 진격하자 왕심, 왕읍이 군사를 물렸고, 모든 부대가 기세를 타서 신나라의 군사가 수백 또는 수천이 참수되었는데, 당시 유연이 완현을 빼앗은 지 사흘이 지난 때였다. 유수는 이를 알지 못했지만 가짜로 사자를 보내 성 안에 완현의 군사들이 곧 도착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일부러 떨어뜨렸다. 왕심, 왕읍 등이 그 편지를 얻자 기쁘지 않았으며, 유수는 3천 명의 병력으로 43만 명의 왕읍, 왕심의 신나라군을 향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놀랍게도 이 어이없는 돌파에 신나라군은 성의 서쪽에 물 있는 곳부터 중앙까지 뚫렸으며, 왕심, 왕읍은 이들을 쉽게 대적할 수 있다고 여겨 스스로 1만여 명을 인솔해 각 진영을 돌아보면서 여러 군영에 부대를 장악하되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이때문에 홀로 현한의 병사들과 싸워 불리하게 되었음에도 많은 신나라 군사들은 함부로 구원을 보낼 수 없었다.[6]

결국 이로 인해 신나라군이 우왕좌왕하는 찰나에 유수는 아예 사령관중 하나인 왕심의 목을 따버렸고 신나라군은 모랄빵이 떠서 흩어지게 되었으며, 크게 무너지고 도망치는 사람이 서로 올라서서 밟으니 엎어져 죽은 시체가 100여 리에 걸쳤다. 때마침 우레가 크게 울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집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비가 쏟아 붓는 것 같더니 치천의 물이 차서 넘쳤다. 신나라군을 신나게 돌파

그런데 신나라의 군사가 도망가면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어 물이 흐르지 못했다고 하며, 현한군이 획득한 치중(輜重, 군수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양이라 몇 달이 걸려도 다 실어 나르지 못하자 나머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신나라의 군사들은 도망가서 각기 출신 군으로 돌아가고 왕읍, 엄우, 진무 등은 갑옷을 벗고 말에 올라타 죽은 시체를 밟고 강을 건너 멀리 도망쳤다. 왕읍이 살아남은 병사를 이끌고 대피했을 때는 겨우 수천명이었다고 한다.


5. 영향[편집]


수천여 명으로 최소 43만 명을 정면으로 상대해 지휘관까지 죽인 이 전투로 인해 관중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으며, 수많은 자들이 주목이나 군수 등을 죽이고 한나라 재건군 경시제 유현한테 붙는 계기가 되어 신나라는 급속도로 몰락했다. 유현은 곤양 대전 이후에 유수와 유연을 경계해서 유연을 트집잡아 토사구팽에 가깝게 죽이고, 유수를 하북으로 보내 나머지 군벌을 평정하란 명목하에 제대로 된 군대도 주지 않고 사실상 죽으라는 의미로 좌천시킨다.

하지만 유수는 거기서 끝까지 살아남아 낙양에서 독립된 휘하 세력으로 후한을 세우며, 경시제의 현한과 대치하다가 적미군의 난으로 현한이 멸망하면서 유현이 참살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현한의 세력을 흡수하고 통합 후한의 황제가 되어 후한의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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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따라서 란체스터 법칙중과부적에 대한 대표적인 반례가 된다.[2] 이때의 왕조는 훗날 광무제의 후한과 구분짓기 위해 현한이라고 표기했다. 하지만 경시제란 칭호는 실제 정사로는 남지 않은 칭호이고, 유현은 훗날 황제가 된 광무제에게 무순 회양왕이라는 후한의 칭호로 남았다...[3] 후한서 광무제기에 따르면 100만 군사와 함께 갑사 42만 명을 파견했다고 나온다.[4] 봉래(蓬萊) 동남쪽 오성(五城) 서북쪽 바닷가에 살던 사람으로 한박의 추천으로 등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거무패는 "수레에 올라탈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말 세 마리가 끌어도 이기지 못하며, 누울 때는 북을 베개로 쓰고 쇠 젓가락을 먹는다"고 전해진다.[5] 이들은 육양현(淯陽縣) 소장안취(小長安聚)에서 유연에게 한 차례 격파당한 패잔병들이었다.[6] 곤양성에서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청하자 이를 거절한 것에서 보듯이 왕읍, 왕심의 목적은 군공을 최대한 많이 쌓는 것이므로 직접 본대를 이끌고 유수와 맞붙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승리가 확실한데 군공을 탐내어 일을 망친 역사는 이전에도 왕왕 일어났다. 초한대전 당시 조나라군은 이좌거의 말마따나 수비만 해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을 회전을 선택하여 대패하였고, 그 한신도 이미 역이기의 변설로 제나라를 항복시켰음에도 본인의 군공이 폄하될까 두려워 제나라를 침공하였다. 그나마 한신은 승리하였지만, 이 일로 인해 유방과 그 측근들은 한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그가 반역자로 처형되는 단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