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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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47호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
公州 儀堂 金銅菩薩立像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동)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보살상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89년 4월 10일
제작시기
백제시대(7세기 초)

파일:국보247호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jpg

1. 개요
2. 내용
3. 국립공주박물관 도난사건
4. 외부 링크
5. 국보 제247호


1. 개요[편집]


公州 儀堂 金銅菩薩立像.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구리로 주조하여 으로 도금한 금속제 보살상이다.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은 1974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에 위치한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송정리 절터에 관해서는 현재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본래의 이름조차 알 수 없으며, 절터가 위치한 지명을 따서 송정리 사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1]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에 남아 있는 명문과 같은 정보가 딱히 없어서 추정이긴 하지만, 발견된 지역이나 제작 기법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7세기 초엽 경 백제의 불상으로 보이며 아주 오래된 금속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도금이 벗겨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은 1989년에 국보 제247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편집]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은 높이 25cm의 금동불상으로, 연꽃형 대좌 위에 올라선 보살이 머리를 살짝 우측으로 기울이고는 오른손에는 연꽃봉오리와 왼손에는 법구중 하나인 정병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파일:external/www.cha.go.kr/2047445.jpg

본 불상이 보살이라는 것은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寶冠)을 통해서 확인이 되는데, 보관의 정면에는 아미타불의 화불(化佛)로 추정되는 작은 부처가 장식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 불상이 보살상이며 보살 가운데서도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2] 본래는 보관의 정면 이외에도 좌우면에도 화불이 붙어 있어서 삼면(三面)보관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우편에 붙어 있던 화불은 아예 사라지고 없고 좌편은 붙어 있던 흔적만 남아 있다.

본 관음보살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있으며, 엄숙한 표정이지만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얼굴형은 전반적으로 약간 살이 오른듯 통통해 보인다. 얼굴 전면의 눈, 눈썹, 코, 입 등 뿐만 아니라 땋아서 꼬인 채로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까지도 뚜렷하게 잘 남아 있다.

관음보살이 입고 있는 옷도 뚜렷하게 잘 나타나는데, 어깨에서부터 시작해 배꼽을 지나서까지 쭉 늘어지는 천이 아랫배 부근에서 서로 X자로 교차하고는 더 이어져서 양팔에 걸쳐지고도 모자라 대좌에까지 흘러내리며 이 천에는 주름이 가득 잡혀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불상 착의법은 삼국시대의 불상, 보살상 등에서 자주 발견되는 의복 표현법이라고 한다.[3] 옷 위에는 불상에 장식하는 구슬 장식인 영락(瓔珞)이 표현되어 있는데,[4] 보살의 목에 걸린 목걸이와 영락이 연결되어 배 앞으로 내려오다가 배꼽 부근에서 갈라져서 다리 아래로까지 늘어져 있다. 또한 이 영락 장식은 보살의 뒤에도 같은 형태로 장식되어 있다. 뒷편에 달린 영락은 허리 부근에서 갈라져서 엉덩이의 좌우로 흘러내려온다. 다만 아쉬운 부분으로는 영락 장식이 부식되어서 자세한 세부 묘사를 확인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관음보살의 양손에는 모두 물건을 들고 있는데, 가슴팍까지 들어올린 오른손은 여원인[5]수인을 취하면서 연꽃봉오리를 쥐고 있고, 왼손은 손가락이 아래를 향하게 하여 전면을 향해 펼쳐서 시무외인[6]을 취하면서 정병[7]을 들고 있다.

파일:국보247호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뒷부분.jpg

관음보살의 뒷편은 앞과 전체적으로 유사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옷의 뒷면 자락이 어깨는 덮었지만 엄청나게 파인 U자형을 이루면서 등을 드러내며 엉덩이 부근까지 흘러내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패션은 2017년 경 일본에서 유행했던 소위 동정을 죽이는 스웨터를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또한 뒷머리 부분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머리 부분에 본래는 광배가 달려 있었으며 구멍은 이를 끼워 연결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8]

관음보살이 서 있는 둥근 연꽃 대좌는 2단으로 되어서 아랫 단에는 8잎의 연꽃잎이 장식되어 있고 그 윗 단에 관음보살이 올라가 있다. 이러한 대좌의 양식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한다.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의 제작 연대나 제작 국가는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보살상에서 나타나는 표현 기법 가운데 영락 장식의 경우 배꼽 부근에서 교차하는 것과 같은 표현 양식이 중국 남북조시대북제 말에서 수나라 초의 보살상에서 주로 나타나던 방식이라는 점을 토대로 짐작해보면 본 보살상의 제작 연대를 대략 7세기 초엽으로 추정할 수 있다.[9] 또한 본 보살상이 발견된 장소가 충남 공주시인데, 7세기 초엽에는 이 지역이 백제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본 보살상을 백제의 불상으로 볼 수 있다.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은 출토지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하고, 그 형태도 뛰어나며 표현 기법 등으로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백제의 불상이라는 점 등의 여러 가치를 인정받아 1989년 4월 10일에 국보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3. 국립공주박물관 도난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립공주박물관 도난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3년 5월에는 도난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고.


4. 외부 링크[편집]




5. 국보 제247호[편집]



1974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5㎝이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데, 가운데에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어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마는 머리카락이 반쯤 내려와 덮고 있으며, 양 옆으로 땋은 머리는 귀를 덮고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다. 4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눈·코·입을 큼직하고 시원스럽게 표현했으며,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긴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그 목걸이에 연결된 구슬띠가 가슴 아래로 내려오다가 두 갈래로 갈라져 양쪽 무릎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체에 밀착된 얇은 옷은 넓은 양 어깨로부터 내려와 배 아래부근에서 X자로 교차되었다. 팔에 걸친 옷자락은 양 옆으로 내려와 대좌(臺座)를 덮으면서 돌출되었다. 옷자락에 표현된 주름은 조각이 깊고 힘차게 되어있어 평온한 얼굴 표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 손에는 팔찌를 끼고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부분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연꽃봉오리를 잡고 있으며, 아래로 내린 왼손에는 보병(寶甁)을 쥐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는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는 엎어놓은 8장의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튀어나온 부분의 도금이 일부 벗겨졌을 뿐 금색이 우수하고 출토된 곳이 확실한 보살상으로 안정된 표현기법과 배꼽부분에서 교차된 구슬장식, 둥근 연꽃무늬 대좌 양식 등에서 7세기 백제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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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송정리 사지[2] 참조: 미술대사전(용어편) - 화불[3]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백제금동대향로) - 공주 의당 금동관음보살입상[4]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영락[5] 與願印 : 손바닥을 편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이 위를 향하도록 하여 밖으로 향하는 자세[6] 施無畏印 : 손바닥을 펴고 밖으로 향하여 물건을 전하는 듯한 자세[7] 또는 보병(寶甁)으로 보기도 한다.[8]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