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이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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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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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없음

역대 청 황제 · 역대 청 황태자 · 역대 청의 황녀
※ 기록이 있는 인물만 기재





愛新覺羅 奕訢
애신각라 혁흔


파일:Prince_Gong.jpg

시호
화석공충친왕(和碩恭忠親王)
별호
악도당주인(岳道堂主人)
지위
화석공친왕(和碩恭親王) / 육왕야(六王爺) ⇒ 의정섭정왕 (議政攝政王)

애신각라 혁흔
아이신기오로 이힌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ᡳ ᡥᡳᠨ[1]
愛新覺羅 奕訢
생몰 기간
1833년 1월 11일 ~ 1898년 5월 29일
(65세)
섭정왕
재위 기간

1861년 12월 15일 ~ 1863년 3월 3일 [2]
부친
청 선종 도광제
모친
귀비 보르지기트씨
자녀
영수고륜공주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함풍 연간 : 형이 도망간 자리에서 국치를 감당해내다
2.5. 광서 연간 : 동태후의 사망, 그리고 실각
3. 평가
4. 여담
5. 가족 관계
5.1. 부인
5.2. 자녀들
6. 대중매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세기 청나라 황제 도광제의 황6자이자 양무운동을 구상하고 기획한 정치인. 명청교체기 청조의 산해관 돌파와 중원 정복을 이끈 황부섭정왕 도르곤 이래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린 황숙이자, 서태후아치에너미였다. 본명은 만주어로는 이힌,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는 혁흔이며, 흔히 공친왕(恭親王, Prince Gong)[3][4]으로 불리지만, 서태후와 결탁한 소위 '청류파'라고들 불리는 수구보수 세력으로부터의 정치적 공세에 시달리고 민간에서도 조롱받으며 6귀자[5]로도 불렸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833년 도광제몽골 출신 후궁정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혁저가 모친인 효전성황후를 잃은 후 정귀비의 손에 자랐기에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청소년기에는 차기 대권 다툼으로 인해 라이벌 의식이 다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혁흔은 어릴 때부터 제1차 아편전쟁으로 아버지 도광제가 수모를 겪는 일에 울분을 쌓아 자라면서도 청나라가 서양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져 있음을 냉정히 인식하며 각종 서양의 신문물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제왕학의 근본인 유학이나 무술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이며 일찍부터 차기 황제감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혁저는 스승의 조언으로나 스스로 느끼기로나 동생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임종을 앞둔 도광제에게 혁흔이 청나라의 국정 현안에 대해 물 흐르듯 읊은 것과 달리 아버지가 아프신 것은 자식의 죄라며 일종의 감성팔이(?)를 시전하여 덕치, 인치를 실현할 황제감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결국 도광제 승하 후 건청궁에서 유조를 확인한 결과, 혁흔은 친왕에 봉하고 혁저를 황태자로 봉한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6] 그렇게, 도광제의 후계자로 혁흔이 아닌 혁저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함풍제였다.


2.2. 함풍 연간 : 형이 도망간 자리에서 국치를 감당해내다[편집]


형에게 제위를 내줬지만 "선황께서 물려준 백홍도를 차고 다녀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을 정도로 능력은 높이 평가받아 함풍제 즉위 초부터 군기처에 들어갔고 몽고도통[7]을 겸직하며 종친 관련 업무까지 도맡았지만, 사실상 옹정제 시절의 황8자 염친왕 윤사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즉, 언제라도 트집을 잡혀 자살당할 수 있는 불안한 처지였다.

그나마 정태비에게 친모 부럽지 않은 사랑을 받고 자라 효성도 지극했던 함풍제[8] 덕에 함풍제의 치세 전반기에는 그럭저럭 지냈지만, 모친상 때문에 경황이 없었던걸 잘 알면서도 함풍제가 어머니 장례 때문에 근무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군기대신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아무래도 잠재적 역적 1순위로서 견제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9]

하지만 제2차 아편전쟁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혔는데도 톈진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자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다이렉트로 두들기는 대사건이 터져 함풍제가 열하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간 서양 오랑캐라면서 서양인들을 멸시하던 대신들은 열하로 황제를 따라 도망갔고 공친왕이 베이징에서 남은 외교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베이징 조약이 그 결과로, 그는 영시위내대신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내각대학사 숙순 등의 권신들이 다 망쳐놓은 판이 원명원이 박살나는 것을 넘어 망국으로까지 이어지는 참화를 막기 위해 굴욕적이기만 한 화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정은 공친왕의 북경 잔류파와 열하 몽진을 따라간 열하파로 쪼개지게 되었는데, 공친왕은 스스로 청나라판 토목의 변을 꾀한다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용퇴를 청했으나 형이 스스로 동생보다 못하다고 걷잡을 수 없는 질투에 빠졌는지 열하에서 정무를 뒷전으로 밀어놓고 주색잡기에 몰두하며 현실도피에 빠진지라 자연히 조정의 실권은 내각대학사 숙순이 아닌 공친왕이 차지하게 되었다. 공친왕은 이 기회에 국가 개혁을 시도하려 예부나 이번원과는 별개로 서양 열강과의 근대적 외교와 외국어, 과학기술 등의 신식 교육을 추진하는 신설기관을 제창했으니, 그것이 바로 총리각국사무아문, 일명 총리아문이었다. 이것이 양무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던 중, 술로 세월을 보내던 형이 해를 넘겨도 열하에서 돌아오지 않다 끝내 사망했다.


2.3. 신유정변[편집]


함풍제는 죽기 직전 숙순을 비롯한 8대신에게 보정대신 지위를 주고 동도당과 어상이라는 도장을 만들어 각각 동태후와 동치제[10]에게 주었다. 이는 실질적인 정무는 보정대신들이 돌보되 최종 결정은 황제와 태후가 하라는 것이었지만 이 결정은 숙순과 서태후 모두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숙순 측은 "대청제국의 천하를 어찌 여자가 다스릴 수 있느냐?"는 논리였고 권력욕이 강했던 서태후는 "역대 왕조의 전례가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었다.

양측의 투쟁이 이어지던 중 함풍제의 영구를 북경으로 옮겨야 했는데, 일단 동치제와 두 태후가 먼저 북경으로 돌아갔고, 보정대신들은 영구와 함께 돌아와야 했으므로 그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 서태후와 공친왕이 북경에서 계략을 꾸며 숙순 일당을 제거하는데 성공, 권력을 잡게 된다.


2.4. 동치중흥 : 삼두정치 속의 양무운동[편집]


혁흔은 의정왕(議政王)으로 군기대신에 복귀하여 조카 동치제의 섭정으로 군림하였다. 또한 증국번 · 이홍장 등의 한족 관료를 기용하여 양무운동을 지지하였고, 동치중흥(東治中興)이라 불리는 청조 세력의 일시적 부흥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 입장을 위협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특히 서태후가 믿고 황제를 맡긴 사부 우키거리 워신(오제격리 왜인, 烏齊格里 倭仁)은 정통 보수파 유학자[11]였는데, 동치제의 양육과 교육에 있어 구시대적 제왕교육에만 골몰하고 양무에 힘쓰는 혁흔과 그 밑에서 일하는 총리아문 관리들을 까내리며 매국노로 매도하는 인물이었고, 서태후는 그런 인물을 갈아치우기는커녕 혁흔을 제어하기에 좋은 도구처럼 쏠쏠하게 써먹었다. 동치 4년(1865년)에 서태후에게 참언했다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의정왕의 지위를 박탈당해 실각하지만, 머지 않아 복귀. 동치 12년(1873년)에 동치제가 원명원의 복원 공사를 발안하자 반대했기 때문에 다음해 동치 13년(1874년)에 동치제에 의해 작위가 강등당할 뻔했지만, 서태후의 주선으로 철회되었다.


2.5. 광서 연간 : 동태후의 사망, 그리고 실각[편집]


광서 원년(1875년)에 동치제가 승하하고 조카 광서제가 즉위할 때도 정권에 머물렀으나, 1881년 서태후와 함께 권력의 한축이던 동태후가 사망하고, 광서 10년(1884년)에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서전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서태후에 의해 군기대신·총리아문대신에서 파면되었다. 후임으로는 각각 순친왕과 사촌동생인 경친왕이 취임했다. 그러나 광서 20년(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리아문과 총리해군의 명을 받아 외교와 군무를 통괄하고 군기대신으로 복직하여 국난을 당하였으나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맞이하였고, 4년 후인 광서 24년(1898년) 6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일본에게 패전한 후 더욱 급진적인 변법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광서제에게 간언하여 황제가 밀어주던 옹동화 등의 급진개혁파를 견제[12]하면서도 보수파를 등에 업은 서태후에게 퇴위를 요구하던 광서제의 대립을 중재하고 빡친 서태후를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나이가 많고 몸도 성치 않던 혁흔의 죽음으로 양파의 대립은 결국 표면화, 무술정변이 일어났다. 양계초는 "공친왕의 죽음이 양측 모두에게 큰 관건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작위는 손자 부위가 계승했다. 장자 재징은 혁흔보다 앞서 1885년 사망했고, 차남 재형의 아들 부위가 재징의 양자로 입적되어 1898년 작위를 잇는다.


3. 평가[편집]


도광제함풍제의 보정8대신을 비롯한 청나라 황족들이 시대에 뒤쳐진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동안 청조의 명운을 멱살잡고 끌어올리려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당대에는 공친왕이 양이[13]라는 말을 과감히 포기하며 제창한 양무라는 말조차도 "오랑캐를 뭐하러 본받느냐?!"며 "저런 미친 소리를 하는 공친왕은 황자가 아니라 귀자이다."라는 패드립이 나왔을만큼 중화사상에 취한 중국인들에게 평생까임권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형 대신 혁흔이 제위를 이어받아야 했다"는 한탄이나 가정이 나올만큼 평가가 후해졌다.

특히 중국에서는 시간이 지나서야 평가가 오른 반면, 청나라를 건드리던 제국주의 서양 열강들의 영향으로 외국에서의 평가는 원래부터 높았다. 서양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오랑캐로 업신여기지 않는 유일한 황족이었으니 충분히 그럴만도 하다. 귀자라는 말도 서양에서는 공친왕을 까는 게 아니라, 공친왕을 업신여기는 중국인들에 대한 조소 내지는 공친왕에 대한 동정의 의미로 주로 쓰는 편이다. 그러나 서태후의 권력욕을 과소평가하고 첫 발을 잘못 디딤으로써 권력유지를 위해 그 무슨 짓도 자행할 수 있는 서태후와 서태후를 중심으로 뭉친 보수파와의 세력다툼에서 열세에 밀린 점, 그리고 청나라가 정체된 사이 급변하던 국제 정세가 너무 안 좋게 흘러갔던 점 등 여러 악재로 인해, 양무운동으로 대표되는 그의 개혁 의지는 미완에 그쳤다.

또한 신문물을 도입하고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며 어린 유학생을 뽑아 서양에 보내는 등 개혁에 열성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청조의 황숙이라는 한계가 분명했기에, 전제군주정이라는 국체와 중화사상으로 뭉친 동아시아의 화이 질서를 포기하는 데엔 소극적이어서 자신의 대표 이력이라 할 수 있는 총리아문과 예부의 공존이라는 이중적인 체제로 가장 대표적인 호구인 조선이 안 그래도 지도자들이 국제정세에 어두운데 더욱 오랫동안 중화사상에 취하며 종국에는 (중국도 일단은 모면한) 외세에 의한 국권침탈이라는 수모를 겪는 간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14]

오죽하면 고종은 총리아문을 불신하다 "서태후가 밀어주는 이홍장이라는 한족 관리가 뜨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친왕과 손절하고 그에게 연줄을 댔을 정도. 불안정한 이런 이중 외교체제는 고종이 주목한 이홍장에 의해서도 고쳐지지 않아 한나라삼국시대 이래 잃지 않았던 베트남에의 종주권을 잃었으며 류큐 왕국이 일본에 병탄되는 것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15], 훗날 대만마저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혁흔이 제위를 이어받았어도 20세기 중반 이후로까지 더 오래 제국을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힘을 얻기도 한다. 대체로는 국제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별개로 실무에 있어서는 급진적인 개혁 의지를 관철하기에 부족한 정치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평가.

서태후와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지만, 대체로는 애증이되 '애'보다는 '증'에 가까운 관계였다. 그가 정권을 잡는데엔 서태후의 권유가 결정적이었으며, 섭정 자리를 반납당한 것 또한 서태후의 견제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서태후에 의해 아이들이 동치제와 함께 양육[16]되고 서태후의 동생인 계상(桂祥, 예허나라 구이샹)이 혁흔을 사부로 모셨을만큼 개인적으로도 여러모로 얽혀있는 관계였다.

동치 연간에는 원명원 복원을 반대하면서도 개인 계좌에서 2만냥을 인출하여 헌납하며 "국고만은 쓰지 말라"고 충언을 했지만, 어머니에게 효도 좀 해보려던 조카 동치제에게 차라리 황위를 내놓을까 하며 역적 대접이나 받고 세습망체 친왕작이 군왕작으로 강등되었다가 서태후가 신하들의 술렁이는 반응에 못 이기는 척 복권을 권해서 친왕작을 회복하기도 했다. 특히 동태후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던 점이 서태후에게는 굉장히 눈엣가시였다. 이는 혁흔의 둘째아들 재형(載瀅)이 동치제 사망 후 방계승통을 이어갈 종법상의 적절한 황제감임에도 신유정변 때 행동대장 노릇을 했던 순친왕 혁현의 꼬맹이 외아들 재첨(載湉)을 뺏어다 황제 겸 인질로 삼아 순친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공친왕을 견제하고 동태후의 석연찮은 사망 이후 승전보도 전해오면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그런대로 분전하던 청불전쟁에서 이홍장을 시켜 강화를 한 후 공친왕에게 복건함대 전멸의 책임을 묻는 서태후의 노련한 술수로 이어졌다.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러시아에게 뺏긴 점, 양무운동을 계기로 한족들이 본격적인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면서 만주족의 민족 정체성이 흐려져갔다는 점 등을 아쉽게 여길 수 있지만, 사실 이는 만주족이 지난 백여년간 정체성을 재고하는 데에 무관심한데다 청나라 국정의 무능으로 쌓이고 쌓여왔던 적폐가 크게 폭발한 것이기에 어릴 때부터 만주의 기상을 가르치는 청조 제왕교육에서 우수한 실력을 뽐냈던 공친왕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할 수 있다. 설령 만주족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청말의 황족 한 사람에게만 묻더라도 공친왕보다는 꼭두각시 황제들의 제왕교육에 무관심한 채 권력의 단맛에 취했던 서태후에게 묻는 것이 적절할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서태후보다도 마카오에서 예수회 수도자들이 끊임없이 들여오며 소개하던 서구의 신문물을 사적인 유희거리로만 여기며 중화사상에만 취한 채 근본적인 개혁을 방임한 강건성세 이래의 역대 황제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라의 명운이 달린 시기에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킨 이들이 받는 충(忠)자를 붙인 공충친왕(恭忠親王)으로 추봉되고 태묘에 배향된 데에서 알 수 있듯[17], 여러모로 현실에 냉정히 대처하며 청 황조를 구해내려 분투한 마지막 황족 명신으로 꼽히며 오늘날 중국에서도 "변법파를 견제하며 전제군주정의 유지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등의 이런저런 비판은 받을지언정 서태후보다 심하게 욕을 먹지는 않는다.

다른 청말민초 황족들과 비교해서도 공친왕만큼 주도적으로 국정에서 목소리를 내고 성과를 낸 인물은 거의 없다. 혁광은 청나라를 팔아먹은 만청제일탐관이라는 소리를 들을 지경이고, 동생인 순현친왕 혁현은 서태후로부터 아들을 지키는데에 급급했으며, 조카 광서제는 그 비참했던 삶에서도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100일 천하로 끝나 유폐되었다가 독살당했고, 다른 조카 재풍도 꼬맹이 황제를 가슴에 안고 중흥을 꾀하기엔 이미 나라가 다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복벽운동을 한다며 일본에도 손을 벌렸다가 훗날 딸내미남장여자 만주국 간첩으로 성장하게 만든 숙충친왕(肅忠親王) 선기 같은 다른 인물들도 그리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실질적으로 망해가는 청조의 종친 중에는 식견, 능력, 성과 등 여러 면에서 가장 우수한 인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매체에서도 비슷한 시기 조선을 이끌던 흥선대원군에 비해 훨씬 좋은 대접을 받는다. 청나라의 중원 정복을 이끈 공로로 같은 시호를 받은 옛 개국공신 섭정왕 도르곤과 여러모로 비슷한 포지션이지만, 태후와 궁합이 잘 맞아 명청교체기의 국정 운영에서도 탄력을 받았던 도르곤과 달리 서태후의 권력욕에 밀려나며 고생을 해야 했던 비운의 황숙이었다. 어찌 보면 실패한 도르곤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도 볼 수 있다.


4. 여담[편집]


건륭제의 부패한 총신 니오후루 허션가경제에게 숙청당하면서, 화신의 가산이 국고가 아닌 내탕금으로 몰수되며 화신이 살던 북경의 대저택도 황실 자산으로 귀속되었다. 이후 이 저택은 건륭제의 막내아들이자 가경제의 동복 아우인 황17자 경의친왕 영린에게 하사되었으나, 30여년이 지나 3대 경군왕인 혁채가 부패 혐의로 작위를 박탈당해[18] 가산이 몰수되며 저택 역시 다시 황실에 귀속되었는데, 함풍제가 즉위한 후 이 저택을 혁흔이 물려받아 오늘날에는 공왕부(恭王府)로 남아있다.

아예 부지에 칭화대학이 들어서버린 돈왕부나, 건륭제가 직접 지시하여 티베트 불교 이 된 옹왕부 등 여러 왕부들이 헐리거나 개조당한 것과 달리, 공왕부는 오늘날에도 북경에서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왕부로 꼽히며 많은 중국 드라마 세트장의 원형이 되었다. 중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면 이 곳이 처음 왔어도 낯익어보일 정도로 예전에는 공왕부에서의 직접 촬영도 흔했지만, 문화재 보존 의식 함양으로 지금은 영상물 촬영은 전보다는 드물어졌다.

"젊은 강희제가 중병에 걸린 할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목욕재계한 후 친필로 쓴 복()자 앞에서 3일 밤낮으로 기도하자, 할머니가 쾌차하여 그 후로도 십수년을 더 장수하였는데, 훗날 건륭제가 강희제의 친필 자가 새겨진 비석을 화신에게 하사하며 화신의 인생이 활짝 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복자비[19]를 비롯해 많은 유적이 남아있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되었다. 가보면 사진은 물론 실물 인형까지 전시되어 있는 혁흔만큼의 체감은 아니지만, 화신이 남긴 흔적도 상당히 많다. 또한 홍루몽의 공간적 배경이 된 부잣집이 현실에서는 화신의 저택이었다는 설도 전해지는지라, 홍루몽을 읽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한편 서태후의 수양딸이었던 영수고륜공주가 바로 공친왕의 장녀였다. 처음엔 서태후를 닮아 포악한 성품이었다지만 부찰 지단(富察 志端)[20]이 요절한 후 성격이 차츰 부드러워졌고, 이후 폭주하는 서태후에게 제동을 걸었다. 특히 무술변법 전후로 광서제를 폐위시키려 했던 서태후를 극구 말렸다.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여 한 대를 건너뛰고 공친왕작을 계승한 손자 부위[21]는 순친왕가의 자신보다 어린 해외유학파 출신 황숙들이 안전한 퇴위와 황실의 안위 보장에 골몰할 때, 당장 있는 군대 싹 긁어모아 원세개와 혁명군 토벌에 나서야 한다고 우겨댔을 정도의 열혈 복벽파였다. 심지어 혁흔 시절부터 모았던 문화유산을 일본 상인에게 전부 팔아넘겨서 미국 뉴욕에서 공왕부 문화재들만으로 대규모 경매가 열렸을 정도. 그렇게 가산을 있는대로 털어 만몽독립운동을 추진하여 만주국 수립의 결실을 보고 사망하여 공현친왕으로 추봉되나, 3대 공친왕이자 혁흔의 증손자인 육첨은 이 집안 내력이 문제가 되어 중년의 나이에 문화대혁명에서 큰 고초를 겪는다. 그래도 2016년까지 93세의 나이로 장수하였다.


5. 가족 관계[편집]



5.1. 부인[편집]


  • 적복진 과이가씨(瓜爾佳氏 1834~1880): 군기대신 계량(桂良 1785~1862)의 딸

  • 측복진 설가씨(薛佳氏): 문회(文匯)의 딸

  • 측복진 왕가씨(王佳氏 ?~1879): 복경(福慶)의 딸

  • 측복진 유가씨(劉佳氏): 경춘(慶春)의 딸

  • 측복진 장가씨(張佳氏 ?~1883)

  • 측복진 수씨(壽氏)

  • 측복진 최씨(崔氏)

  • 측복진 유씨(劉氏)


5.2. 자녀들[편집]



  • 적1자 다라과민군왕 재징(多羅果敏郡王 載澂 1858~1885): 적복진 과이가씨 生

  • 적2녀(1860~1864): 적복진 과이가씨 生 / 요절

  • 서2남 이혁공군왕 재형(已革恭郡王 載瀅 1861~1909): 측복진 설가씨 生 / 다라종단군왕 혁합(多羅鐘端郡王 奕詥 1843~1869)에게 출계

  • 적3남 보국공 재준(輔國公 載濬 1864~1866): 적복진 과이가씨 生 / 요절

  • 서3녀(1879~1880): 측복진 유가씨 生 / 요절

  • 서4남 보국공 재황(輔國公 載潢 1880~1885): 측복진 유가씨 生 / 요절

  • 서4녀(1881~1882): 측복진 장가씨 生 / 요절

  • 서5녀(1884~1884): 측복진 유가씨 生 / 요절


6. 대중매체[편집]


일생위노, 제국의 눈물(원제: 홍장녹와) 등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진보국, 참고로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역은 왕강이 맡았다. 조선 사극에서 수양대군 때문에 역의 배우가 중 장년으로 묘사되는 현상이 여기서도 빚어진다. 쿠데타 직전인 베이징 조약 시기의 사진을 보면 수염도 별로 없는 평범한 20대 후반 남성의 외모였지만, 베이징 조약에 나서는 배우는 거의 아버지뻘. 호사가들의 what if 놀음에 의해 그가 황제로 즉위했다면 청나라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상상하는 대체역사물은 의외로 적은 편이지만, 홍콩이나 대만 등지에서는 서태후와 공친왕의 불륜을 그려내는 창작물도 나왔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아 서태후를 아주 보내버리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홍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조선의 중재로 만주에 신설된 동삼성의 총독으로 임명됐다. 사실상 좌천된 것이지만, 천명이 아이신기오로를 떠났을 때 "중원에서 쫓겨날 동포들의 터전을 미리 가꾼다"는 생각으로 정무에 열중하여 다방면에서 본인도 놀랄 정도의 성과를 보았다. 그래서 "대청 부흥이니 뭐니 집어치우고 아예 이대로 독립하여 칸 노릇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도 했지만, 조카 광서제의 고군분투를 보고 결국 청나라의 충신으로 남아 실제 역사처럼 공충친왕(恭忠親王)으로 추봉된다. 여기서는 서태후랑도 손절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아서 실제 역사보다 오래 사는 등 상당히 버프 받았다.

하지만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어째 실제 역사에서보다도 더 불쌍하게 그려진다. 불곰국과 폭군 고종대왕 치세의 조선, 태평천국으로 모자라 서태후, 이홍장, 셍게린첸 등의 깽판으로 인해 딸을 고종에게 시집보내면서 도르곤과 의순공주간 국혼이 거꾸로 그려지고 조선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공친왕(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항목 참조. 그래도 원역사에 비하면 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펄벅 여사의 작품인 <연인 서태후>에서도 상당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후궁 시절의 서태후에게 국제정세와 정치를 가르치며 특히 유약하고 일이 잘못되면 아편을 삼키겠다고 울부짖는 함풍제와 달리 침착하게 서양의 침략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치제 즉위 이후로는 때때로 서태후에 대한 견제에 나서 서태후의 뒷배만 믿고 횡포를 부리던 환관 안덕해를 동태후의 명을 받아 참수당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서태후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하면서 비중이 줄어든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경친왕 혁광이 공친왕의 아들로 묘사되는데 이는 엄연히 틀린 사실이다. 아마 혁 자 돌림을 성으로 오해한 것 같다.[22]

1995년 홍콩에서 개봉한 '외전혜옥란'(원제: 慈禧秘密生活(자희비밀생활))[23]에서는 배우 양가휘가 공친왕 역할을 맡았다.[24][25] 위험에 처한 자희를 구한 인연으로 청혼까지 하지만 그녀가 입궁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조금 받았어도, 황제의 승은을 입고도 마음이 약해지는 그녀를 안아주기는 커녕 되려 모질게 대한다.[26] 그녀는 결국 자신을 이용해 조정을 장악하지만 얼마 안 가 공친왕이 토사구팽을 당한다. 구숙정이 서태후로 출연하는지라 단순 19금 영화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권력을 탐하다 나중엔 권력의 화신이 되어가는 서태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된 영화다. 특히 이 영화에서 양가휘는 섹시하면서도 비정한 공친왕을 매력적으로 연기했다.[27]


7. 둘러보기[편집]


청사고(淸史稿)

[ 본기(本紀) ]

||<-2><tablewidth=100%><tablebgcolor=#00386a><width=33%> 1권 「태조기(太祖紀)」 ||<-2><width=33%> 2·3권 「태종기(太宗紀)」 ||<-2><width=33%> 4·5권 「세조기(世祖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노이합제 ||<-2> 애신각라 황태극 ||<-2> 애신각라 복림 ||
||<-2> 6·7·8권 「성조기(聖祖紀)」 ||<-2> 9권 세종기(世宗紀)」 ||<-2> 10·11·12·13·14·15권 「고종기(高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현엽 ||<-2> 애신각라 윤진 ||<-2> 애신각라 홍력 ||
||<-2> 16권 「인종기(仁宗紀)」 ||<-2>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2> 20권 「문종기(文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옹염 ||<-2> 애신각라 민녕 ||<-2> 애신각라 혁저 ||
||<-2> 21·22권 「목종기(穆宗紀)」 ||<-2> 23·24권 덕종기(德宗紀)」 ||<-2> 20권 「선통제기(宣統帝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재순 ||<-2> 애신각라 재첨 ||<-2> 애신각라 부의 ||
||<-6><width=1000> 214권 「후비전(后妃傳)」 ||
||<-6><bgcolor=#fff,#191919> 태목황후 · 문덕황후 · 서혜 · 무조 · 왕폐후 · 화사황후 · 위황후 · 상관소용 · 숙명황후 · 소성황후 · 왕폐후 · 정순황후 · 원헌황후 · 양귀비
장황후 · 장경황후 · 정의황후 · 예진황후 · 소덕황후 · 위씨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선의황후 · 곽귀비 · 왕현비 · 효정경황후 · 정강귀비 · 각순귀비 · 효각민황후 · 액이덕특씨 ||
※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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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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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노이합제 ||<-2> 애신각라 황태극 ||<-2> 애신각라 복림 ||
||<-2> 6·7·8권 「성조기(聖祖紀)」 ||<-2> 9권 세종기(世宗紀)」 ||<-2> 10·11·12·13·14·15권 「고종기(高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현엽 ||<-2> 애신각라 윤진 ||<-2> 애신각라 홍력 ||
||<-2> 16권 「인종기(仁宗紀)」 ||<-2>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2> 20권 「문종기(文宗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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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22권 「목종기(穆宗紀)」 ||<-2> 23·24권 덕종기(德宗紀)」 ||<-2> 20권 「선통제기(宣統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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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215·216·217·218·219·220·221권 「제왕전(諸王傳)」
애신각라 예돈 · 애신각라 액이곤 · 애신각라 재감 · 애신각라 탑찰편고 · 애신각라 막이합제 · 애신각라 서이합제 · 애신각라 아이합제 · 애신각라 파아랍 · 애신각라 저영 · 애신각라 대선 · 애신각라 아배 · 애신각라 탕고대 · 애신각라 망이고태 · 애신각라 탑배 · 애신각라 아파태 · 애신각라 파포태 · 애신각라 덕격류 · 애신각라 파포해 · 애신각라 아제격 · 애신각라 뇌모포 · 애신각라 다이곤 · 애신각라 다탁 · 애신각라 비양과 · 애신각라 호격 · 애신각라 엽포서 · 애신각라 석새 · 애신각라 고새 · 애신각라 상서 · 애신각라 도새 · 애신각라 박목박과이 · 애신각라 복전 · 영친왕 · 애신각라 상녕 · 애신각라 융희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잉 · 애신각라 윤지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우 · 애신각라 윤사 · 애신각라 윤당 · 애신각라 윤아 · 애신각라 윤도 · 애신각라 윤상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파 · 애신각라 윤례 · 애신각라 윤의 · 애신각라 윤희 · 애신각라 윤호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비 · 애신각라 홍주 · 애신각라 홍휘 · 애신각라 영황 · 애신각라 영련 · 애신각라 영장 · 애신각라 영기(永琪) · 애신각라 영종 · 애신각라 영선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기(永璂)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린 · 애신각라 면개 · 애신각라 면흔 · 애신각라 면유 · 애신각라 혁위 · 애신각라 혁강 · 애신각라 혁계 · 애신각라 혁흔 · 애신각라 혁환 · 애신각라 혁합 · 애신각라 혁혜 · 민군왕
222권 「아합출등전(阿哈出等傳)」
아합출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호이간 맹가포록 대산 오이고대, · 청길노 · 양길노 ,납림포록 금태석 포한 포양고 포이항고, 포점태 · 배음달리
224권 「장황언등전(張煌言等傳)」
225권 「액역도등전(額亦都等傳)」
장황언 ,나륜 장명진 왕익, · 정성공 ,정금 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삭해 왜흑, · 하화례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83권 「제제공주전(諸帝公主傳)」
동안공주 · 장사공주 · 양양공주 · 평양소공주 · 고밀공주 · 장광공주 · 장사공주 · 방릉공주 · 구강공주 · 노릉공주 · 남창공주 · 안평공주 · 회남공주 · 진정공주 · 형양공주 · 단양공주 · 임해공주 · 관도공주 · 안정공주 · 상락공주 · 양성공주 · 여남공주 · 남평공주 · 수안공주 · 장락공주 · 예장공주 · 북경공주 · 보안공주 · 동양공주 · 임천공주 · 청하공주 · 난릉공주 · 진안공주 · 안강공주 · 신흥공주 · 성양공주 · 합포공주 · 금산공주 · 진양공주 · 상산공주 · 신성공주 · 의양공주 · 고안공주 · 태평공주 · 신도공주 · 의성공주 · 정안공주 · 장녕공주 · 영태공주 · 안락공주 · 성안공주 · 수창공주 · 안흥소회공주 · 형산공주 · 회양공주 · 대국공주 · 양국공주 · 설국공주 · 식국공주 · 금선공주 · 옥진공주 · 곽국공주 · 영흥공주 · 천장공주 · 영국공주 · 흥당공주 · 서평공주 · 낭령공주 · 광화공주 · 창락공주 · 수춘공주 · 장녕공주 · 연경공주 · 정락공주 · 낙온공주 · 영청공주 · 위국문의공주 · 안화공주 · 보강공주 · 창원공주 · 창녕공주 · 금화공주 · 인수공주 · 영수공주 · 당흥공주 · 영평공주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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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268권 「미사한등전(米思翰等傳)」
269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미사한 · 고팔대 · 마이한 · 전육선 · 두진 · 살목하
삭액도 · 명주 ,여국주 불륜,
270권 「학욕등전(郝浴等傳)」
271권 「서건학등전(徐乾學等傳)」
272권 「탕약망등전(湯若望等傳)」
학욕 · 양소온 · 곽수
서건학 ,옹숙원, · 왕홍서 · 고사기
탕약망 · 양광선 · 남회인
106권 「두이최고곽조최양노이유이유손형전(杜二崔高郭趙崔楊盧二劉李劉孫邢傳)」
두정륜 · 최지온 · 고지주 · 곽정일 · 조홍지 · 최돈례 · 양홍례 · 노승경 · 유상도 · 이경현 · 유덕위 · 손처약 · 형문위
107권 「부여진전(傅呂陳傳)」
108권 「유배루전(劉裴婁傳)」
부혁 · 여재 · 진자앙
유인궤 · 배행검 · 누사덕
109권 「최양두종축왕전(崔楊竇宗祝王傳)」
최의현 · 양재사 · 두회정 · 종초객 · 축흠명 · 산운 · 왕여(王璵)
110권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
사대내 · 풍앙 · 아사나사이 · 아사나충 · 집실사력 · 글필하력 · 흑치상지 · 이근행 · 천남생 · 이다조 · 논궁인 · 손유정 · 울지승 · 상가고 · 배분
111권 「곽이장삼왕소설정당전(郭二張三王蘇薛程唐傳)」
곽효각 · 장검 · 왕방익 · 소열 · 설인귀 · 정무정 · 왕효걸 · 당예 · 장인원 · 왕준
112권 「왕한소설왕류풍장전(王韓蘇薛王柳馮蔣傳)」
왕의방 · 한사언 · 소안항 · 설등 · 왕구례 · 유택 · 풍원상 · 장흠서
116권 「이왕위육이이두전(二王韋陸二李杜傳)」
117권 「배유위이길전(裴劉魏李吉傳)」
왕침 · 위사겸 · 육원방 · 왕급선 · 이일지 · 두경전 · 이회원
배염 · 유의지 · 위현동 · 이소덕 · 길욱
118권 「장위한송신이이배전(張韋韓宋辛二李裴傳)」
119권 「무이가백전(武李賈白傳)」
장정규 · 위주 · 한사복 · 송무광 · 신체부 · 이발 · 배린 · 이중민 · 이감
무평일 · 이예(李乂) · 가증 · 백거이
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123권 「이소로위조화전(李蕭盧韋趙和傳)」
124권 「요송전(姚宋傳)」
이교 · 소지충 · 노장용 · 위거원 · 조언소 · 화봉요
요숭 · 송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131권 「종실재상전(宗室宰相傳)」
132권 「유오위장류침전(劉吳韋蔣柳沈傳)」
이적지 · 이현(李峴) · 이면 · 이이간 · 이정(李程) · 이석 · 이회
유자현 · 오긍 · 위술 · 장예 · 유방 · 심기제
133권 「이곽양왕장우전(二郭兩王張牛傳)」
134권 「우문위양왕전(宇文韋楊王傳)」
곽건관 · 곽지운 · 왕군착 · 장수규 · 왕충사 · 우선객
우문융 · 위견 · 양신긍 · 왕홍
135권 「가서고봉전(哥舒高封傳)」
136권 「이광필전(李光弼傳)」
137권 「곽자의전(郭子儀傳)」
가서한 · 고선지 · 봉상청
이광필
곽자의
138권 「이이마로전(二李馬路傳)」
139권 「방장이전(房張李傳)」
140권 「최묘이배려전(崔苗李裴呂傳)」
이사업 · 마린 · 이포옥 · 노사공
방관 · 장호 · 이필
최원 · 묘진경 · 배면 · 배준경 · 여인
141권 「최등위위이한노고전(崔鄧魏衛李韓盧高傳)」
최광원 · 등경산 · 최관 · 위소유 · 위백옥 · 이징(李澄) · 한전의 · 노종사 · 고하우
142권 「이양최류위로전(李楊崔柳韋路傳)」
이린(李麟) · 양관 · 최우보 · 유혼 · 위처후 · 노수
143권 「고원이위설최대왕서치신전(高元李韋薛崔戴王徐郗辛傳)」
고적 · 원결 · 이승 · 위륜 · 설각 · 최한형 · 대숙륜 · 왕굉 · 서신 · 치사미 · 신비
144권 「내전후최엄전(來田侯崔嚴傳)」
내진 · 전신공 · 후희일 · 최녕 · 엄여
145권 「원반여양엄두전(元王黎楊嚴竇傳)」
146권 「이이전(二李傳)」
원재 · 왕진 · 여간 · 양염 · 엄정 · 두참
이서균 · 이용(李鄘)
147권 「삼왕노신풍삼이곡이로전(三王魯辛馮三李曲二盧傳)」
왕사례 · 노경 · 왕난득 · 신운경 · 풍하청 · 이봉(李芃) · 이숙명 · 곡환 · 왕건휴 · 노군 · 이원소 · 노사매
148권 「영호장강이유전왕우사전(令狐張康李劉田王牛史傳)」
영호창 · 장효충 · 강일지 · 이유(李洧) · 유옹 · 전홍정 · 왕승원 · 우원익 · 사효장
149권 「유제오반왕이전(劉第五班王李傳)」
150권 「이상조최제로전(李常趙崔齊盧傳)」
유안 · 제오기 · 반굉 · 왕소 · 이손(李巽)
이계 · 상곤 · 조경 · 최조 · 제앙 · 노매
151권 「관동원조두전(關董袁趙竇傳)」
152권 「장강무이송전(張姜武李宋傳)」
관파 · 동진 · 원자 · 조종유 · 두역직
장일 · 강공보 · 무원형 · 이강(李絳) · 송신창
153권 「단안전(段顏傳)」
154권 「이성전(李晟傳)」
155권 「마혼전(馬渾傳)」
단수실 · 안진경
이성
마수 · 혼감
156권 「양대양이이한두형전(楊戴陽二李韓杜邢傳)」
양조성 · 대휴안 · 양혜원 · 이원량 · 이관(李觀) · 한유괴 · 두희전 · 형군아
157권 「육지전(陸贄傳)」
158권 「위장엄한전(韋張嚴韓傳)」
육지
위고 · 장건봉 · 엄진 · 한홍
159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포방 · 이자량 · 소흔 · 설파 · 번택 · 왕위 · 오주 · 정권 · 육긍 · 노탄 · 유성 · 최융 · 장정보
160권 「서여맹유양반최위전(徐呂孟劉楊潘崔韋傳)」
161권 「장초이정서왕풍유전(張趙李鄭徐王馮庾傳)」
서호 · 여위 · 맹간 · 유백추 · 양풍 · 반맹양 · 최원략 · 위수
장천 · 조연 · 이서 · 정운달 · 서대 · 왕중서 · 풍항 · 유경휴
162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요남중 · 독고급 · 고소련 · 위하경 · 단평중 · 여원응 · 허맹용 · 설존성 · 이손
163권 「공목최유양마전(孟簡等傳)」
공소부 · 목녕 · 최빈 · 유공작 · 양어릉 · 마총
164권 「설해삼최노이설위호정이왕은전(歸奚三崔盧二薛衛胡丁二王殷傳)」
귀숭경 · 해척 · 최연 · 노경량 · 설빈 · 위차공 · 설융 · 호증 · 우공저 · 왕질 · 은유 · 왕언위
165권 「삼정고권최전(三鄭高權崔傳)」
166권 「가두영호전(賈杜令狐傳)」
정여경 · 정순유 · 고영 · 정인 · 권덕여 · 최군
가탐 · 두우 · 영호초
167권 「백배최위이이황보왕전(白裴崔韋二李皇甫王傳)」
백지정 · 배연령 · 최손 · 위거모 · 이제운 · 이실 · 황보박 · 왕파
168권 「위왕육유류정전(韋王陸劉柳程傳)」
169권 「두배이위전(杜裴李韋傳)」
위집의 · 왕숙문 · 육질 · 이우석 · 유종원 · 정이
두황상 · 배기 · 이번 · 위관지 · 풍숙 · 봉오
170권 「이고이주이유범이왕맹조이임장전(二高伊朱二劉范二王孟趙李任張傳)」
고숭문 · 이신(伊愼) · 주충량 · 유창예 · 범조희 · 왕악 · 맹원양 · 왕서요 · 유창 · 조창 · 이경략 · 임적간 · 장만복
171권 「이오왕양조고유석전(李烏王楊曹高劉石傳)」
이광진 · 오중윤 · 왕패 · 양원경 · 조화 · 고우 · 유면 · 석웅 · 고원유 · 봉오 · 정훈 · 경회 · 위박
172권 「우왕이두범전(于王二杜范傳)」
173권 「배도전(裵度傳)」
174권 「이이원우양전(二李元牛楊傳)」
우적 · 왕지흥 · 두겸 · 두아 · 범정전
배도
이봉길 · 원진 · 우승유 · 이종민 · 양사복
175권 「두유이장양웅백전(竇劉二張楊熊柏傳)」
176권 「한유전(韓愈傳)」
두군 · 유서초 · 장우신 · 양우경 · 장숙 · 웅망 · 백기
한유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서린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5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6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410권 「팽옥린등전(彭玉麟等傳)」
411권 「이홍장전(李鴻章傳)」
팽옥린 · 양악빈 · 왕명산 · 손창개 · 양명해 · 사준여
이홍장
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414권 「이신전등전(李臣典等傳)」
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416권 「정학계등전(程學啟等傳)」
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이조의 · 단기 · 정수창 · 증기봉 · 저유립 · 서철산 · 계중행 · 유함방 · 진횡거 · 유지개 · 이용청 · 이금용 · 김복증 ,웅기영 사복가, · 동조용
452권 「홍여규등전(洪汝奎等傳)」
홍여규 · 양종렴 · 사박 · 사극관 · 심보정 · 주기앙 ,주기조, · 종원한 · 서경장 · 서진 · 괴광전 · 진휼성 · 반민표 · 엄작림 · 당석진 · 누춘번
457권 「장동재등전(蔣東才等傳)」
장동재 · 이남화 · 동리고 · 동전승 · 우사한 · 조덕경 · 마복진 · 정문병 · 방요 · 등안방
458권 「서연욱등전(徐延旭等傳)」
서연욱 · 당형 · 하경 · 장조동
459권 「풍자재등전(馮子材等傳)」
풍자재 · 왕효기 · 진가 · 장종한 · 소원춘 · 마성치 · 왕덕방 · 장춘발 · 소득룡 · 마유기 · 오영안 · 손개화 · 소득승 · 장고원 · 구양이견
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좌보귀 · 원영산 · 등세창 · 유보첨 · 대종건
송경 · 여본원 · 서방도 · 마옥곤 · 의극당아 · 장순
462권 「정여창등전(丁汝昌等傳)」
463권 「당경숭등전(唐景崧等傳)」
정여창 · 위여귀 · 엽지초
당경숭 · 유영복
464권 「이단분등전(李端棻等傳)」
이단분 · 서치정 · 진보함 · 황준헌 · 증화 · 양심수 · 양예 · 유광제 · 담사동 · 임욱 · 강광인
465권 「서동등전(徐桐等傳)」
466권 「서용의등전(徐用儀等傳)」
서동 · 강의 · 조서교 · 고아랍계수 · 하영년 · 희탑랍유록 · 육현
서용의 · 허경징 · 원창 · 토묵특입산 · 최가연원
471권 「성선회등전(盛宣懷等傳)」
472권 「육윤상등전(陸潤庠等傳)」
성선회 · 서징
육윤상 · 세속 · 이극탄 · 양정분 · 서방 ·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진시림, · 요문섭 ,황정린, · 낙종린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장극억 가박, · 소사요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유후, · 장기 ,석가소, · 유형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 성유 · 소의진 · 고염무 · 장이기 · 만사대 · 호위 · 모기령 · 염약거 · 혜주역 · 진후요 · 장림 · 임계운 · 전조망 · 심융 · 강영 · 저인량 · 노문서 · 전대흔 · 왕명성 · 대진 · 단옥재 · 손지조 · 유대공 · 공광삼 · 소진함 · 왕염손 · 왕중 · 무억 · 장술조 · 척학표 · 정걸 · 손성연 · 왕빙진 · 능정감 · 계복 · 강성 · 전대소 · 허강좌 · 공음식 · 육기 · 광계
484·485·486권 「문원전(文苑傳)」
원랑 · 하덕인 · 채윤공 · 사언 · 최신명 · 유연우 · 장창령 · 최행공 · 두심언 · 왕발 · 원만경 · 이적(李適) · 위원단 · 유윤제 · 심전기 · 송지문 · 염조은 · 윤원개 · 유헌 · 이옹(李邕) · 여향 · 왕한 · 손적 · 이백 · 왕유 · 정건 · 소영사 · 소원명 · 이화 · 맹호연 · 유태진 · 소설 · 우소 · 최원한 · 우공이 · 이익 · 노륜 · 구양첨 · 이하(李賀) · 오무릉 · 이상은(李商隱) · 설봉 · 이빈(李頻) · 오융
487·488·499·490·491·492·493·494·495·496권 「충의전(忠義傳)」
하후단 · 유감 · 상달 · 경군홍 · 여자장 · 왕행민 · 나사신 · 장도원 · 이육덕 · 고예 · 안금장 · 왕동교 · 오보안 · 이징(李憕) · 노혁 · 장개연 · 최무피 · 안고경 · 가순 · 장순 · 허원 · 남제운 · 뇌만춘 · 요은 · 정천리 · 방견 · 장흥 · 채정옥 · 부령기 · 유내 · 맹화 · 장비 · 주증 · 장명진 · 석연분 · 오서 · 고목 · 가직언 · 신당 · 황갈
497·498·499권 「효의전(孝義傳)」
이지본 · 장지관 · 유군량 · 왕소현 · 임경신 · 지숙재 · 정원사 · 무홍도 · 정잠요 · 원양 · 배경이 · 양문정 · 심계전 · 허백회 · 진집원 · 장수 · 서원경 · 여상안 · 양열 · 목종세 · 후지도 · 정구라 · 하징수
500·501권 「유일전(遺逸傳)」
왕적 · 손사막 · 전유암 · 맹선 · 왕우정 · 왕희이 · 이원개 · 위대경 · 무유서 · 백이충 · 오경 · 노홍 · 오균 · 반사정 · 사마승정 · 하지장 · 진계 · 장지화 · 공술예 · 육우 · 최근 · 육구몽
502·503·504·505권 「예술전(藝術傳)」
왕적 · 손사막 · 전유암 · 맹선 · 왕우정 · 왕희이 · 이원개 · 위대경 · 무유서 · 백이충 · 오경 · 노홍 · 오균 · 반사정 · 사마승정 · 하지장 · 진계 · 장지화 · 공술예 · 육우 · 최근 · 육구몽
506 · 507권 「주인전(疇人傳)」
설봉조 · 공사연 · 왕석천 · 방중통 · 매문정 · 명안도 · 유상규 · 왕문계 · 주홍 · 박계 · 허여란 · 이황 · 왕래 · 진걸 · 시왈순 · 이예 · 낙등봉 · 항명달 · 정취충 · 사가화 · 오가선 · 나사림 · 고관광 · 좌잠 · 증기홍 · 하란상 · 추백기 · 이선란 · 화형방
508·509·510·511권 「열녀전(列女傳)」
배숙영 · 왕난영 · 경상자 · 위무기 · 하후쇄금 · 왕아족 · 왕옥영 · 요아 · 두백랑 · 두중랑 · 이묘법 · 왕화자 · 사소아 · 봉순
222권 「남만전(南蠻傳)」
남조 · 임읍 · 파리국 · 반반국 · 정랍 · 수진랍국 · 타원국 · 가릉국 · 타화라국 · 타파등국 · 동사만 · 서조만 · 장가만 · 동여국 · 표국
518·519·520·521·522·523·524·525권 「번부전(藩部傳)」

526·527·528·529권 「속국전(屬國傳)」
조선 · 류구 · 월남 · 면전 · 섬라 · 남장 · 소록 · 구르카 · 호한 · 보노특 · 합살극 · 안집연 · 마이갈랑 · 나목간 · 탑십간 · 바다흐샨 · 박라이 · 아부한 · 감거시


[1] 청말민초 및 20세기부터 관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구개음화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는 이41으로 표기하고 발음한다. [2] 함풍제 11년 ~ 동치제 2년 섭정[3] 공친왕작은 원래 청나라 역사에서 이전에도 임명된 바 있는 작위였다. 순치제의 5남이자 강희제의 이복동생인 상녕이 공친왕으로 임명된 바 있었는데, 상녕이 갈단 칸과의 결전에 나섰다가 참패하자 강희제가 격노하여 작위를 박탈해버렸다. [4] 이 Prince Gong이라는 영어 표기는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에 제정된 한어병음에 따른 것으로, 19세기 근고한어 시대에 작성된 북경조약 등의 공문서 영문본을 비롯한 서양측 문서에서는 Prince Kung으로 표기된 경우가 더 많다.[5] 귀자(鬼子)란, 즉 저놈은 황자도 아니고 귀신의 아들이라는 모욕이다. 영어로는 Guizi #6, Devil #6, 6th Devil 정도로 번역된다.[6] 후계자를 지명하는 공문서인 건청궁 유조에서 다른 황자를 일부러 황제 다음가는 친왕에 봉하는 예는 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예는 강희제가 황4자 윤진에게 자신이 유폐시킨 황태자 윤잉에 대한 죄책감으로 윤잉의 가족들을 잘 챙겨주라 당부하고 옹정제가 유언대로 윤잉의 가족들도 잘 챙겨준 것밖에 없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아비의 허물을 황족 자녀들에게까지 연좌하지는 말라는 (누르하치와 슈르하치 시절부터 이어진 집안 전통에 따른) 뜻이었을 뿐 황8자 윤사나 티베트에 나가있던 황14자 윤정에 대한 조치까지 강희제가 일부러 못박은 것은 아니었다.[7] 어머니가 보르지기트씨이니만큼 몽골 왕공들과도 인맥이 있었다. 이 시기 떠오른 대표적인 몽골 인맥이 보르지기트 셍게린첸.[8] 임종 직전에는 아예 정태비를 황태후로 높였고 효정황후라는 시호까지 올렸다. 청나라에서 황제의 대복진도 아니고 차기 황제의 생모도 아닌데 황후로 대우받은 보기드문 사례. 다만 아무래도 약간 애매한 지위 탓에 효정'성'황후라는 도광제의 시호를 붙이는데에는 이르지 못했는데, 이 '성'자는 동치 연간에 공친왕의 버프로 붙어 '효정성황후'라는 정식 시호가 나왔다. [9] 어머니 임종 직전에 황후가 되지 못한게 아쉽다는 어머니의 넋두리를 듣고 황태후로 높여달라며 공친왕이 형 앞에 찾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 설도 있다. 함풍제는 스스로도 자신을 키워준 양어머니가 눈을 감기 전에 황태후로 모시려 했으나 그걸 공친왕이 먼저 요청한터라 단단히 삐졌고 결국 함풍제가 양어머니를 황태후로 존숭하기는 했으나 공친왕이 먼저 선을 넘은 책임을 지고 군기처를 나와야 했다고. [10] 사실상 서태후가 담당[11] 국구인 알루트 초치와 함께, 보기 드문 몽골 출신 진사였다. 하지만 여느 한인들보다도 훨씬 원리주의적으로 성리학을 맹종했고, 깊은 학식을 바탕으로 많은 한인 유생들에게 존경받았다. [12] 황제가 신임하던 이들 변법파에서 추진하던 개혁이 사실상 청나라의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 심지어는 외국과의 합방론(뇌가성 논문 참조)까지 나올 지경이었으니 청나라 황족으로서는 펄쩍 뛸 노릇.[13] 서양 오랑캐라는 뜻이다.[14] 병인박해로 인해 일어난 병인양요 때는 "불란서는 무서운 놈들이니 천주교고 뭐고 알아서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경고를 보냈지만,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답했다.[15]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대권 후보 시절 공친왕과 이홍장을 직접 만나며 조정을 시도하려 했지만, 미국인인 그랜트가 중국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할 리 없었고, 그는 오히려 "일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고 판단했다.[16] 큰딸 영수고륜공주는 아예 서태후의 수양딸로 입적되었고, 아들들도 자금성에서 동치제와 함께 공부하며 자랐지만, 재징과 재형은 동치제와 친하게 지내는걸 아니꼽게 여긴 서태후가 측근 환관들을 시켜 왕따를 시킨다거나 동치제가 엄마한테 혼날 때마다 아무리 어미라도 황제에게 매를 들 순 없으니 황제 대신 회초리를 맞는 등 자금성에서는 고생만 했다.[17] 충이라는 시호는 사실 공친왕의 사망으로부터 한 달도 안되어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 광서제가 실권을 행사하는 동안 받은 시호라서 광서제의 개혁의지가 엿보이지만, 무술변법이 100일 천하로 끝난 후에도 유지되었다. 개혁파에게는 서양의 침략을 저지하고 양무로 적폐를 일신했다고, 보수파에게는 나라 안팎의 적들을 막으려 힘썼다고 높이 인정받는 최고의 시호라 하겠으나, 살아있을 때 쌍방에서 매국노니 적폐니 욕먹던 걸 생각하면…[18] 다만 친척인 아이신기오로 이쾅이 다시 패자, 패륵, 군왕, 친왕으로 승급하며 경친왕작을 회복하였다.[19] 원래 자는 으로 새겨져 있었으나,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만지고 가서 금박은 다 벗겨져버렸고, 유리를 씌워 보존해놨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은 다들 유리라도 만지고 간다.[20] 기상정변 때 축출당한 부찰 경수와 수은고륜공주의 아들로, 영수고륜공주에겐 고종사촌이다.[21] 생부는 혁흔의 2자 재형인데, 재형은 도광제의 황8자 혁합의 사후 양자로 출계했다가 형 재징이 요절하는 바람에 장자인 부위를 형의 양자로 출계시켜 공왕작을 잇게 하였다. 그러나 혁흔 사후 터진 의화단의 난에서 서태후가 의화단과 연통하던 황족들을 대거 손절하며 버이러 작위를 박탈당하고 공왕부에서 말년을 보냈다.[22] 사실 실제 청나라 때의 만주족은 중원 입관을 기점으로 이름 첫글자를 한족식 한글자 성처럼 쓰는 수명성 문화가 생겨났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없는 게 이상하다.[23] 감독이 유위강으로 초기 연출작이다. 훗날 무간도 시리즈 감독을 맡았다.[24] 함풍제 역할은 배우 우영광이 연기했다.[25] 아이러니하게도 양가휘는 10여 년 전, 이한상 감독의 '화소원명원'에서 함풍제역할을 맡았고 연작 '수렴청정'에서도 함풍제 역할을 연기하여 제3회 금상장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26] 그 예로 궁중 살인사건의 목격자를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고 옷과 소지품까지 모두 우물에 버리는 등 증거까지 인멸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27] 참고로 이 당시 양가휘가 다작을 하면서 코믹한 이미지로 굳혀지는 것을 우려한 이한상 감독이 그를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게다가 '연인'으로 섹시한 이미지까지 굳혀져 그에게 들어오는 작품들 중에는 3급물(19금)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다작을 줄이고 연기에 집중하기 위해 고른 작품이 이 영화와 '수호전지 영웅본색'이다. 두 편 모두 수작이고, 양가휘의 연기력이 돋보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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