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필성

덤프버전 :


}}} ||

[ 펼치기 · 접기 ]
#000000,#e5e5e5
||<table 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color=#AF917B> '''74 [[전형도|{{{#315288,#7697CE 전형도}}}]] · 75 [[진종길|{{{#315288,#7697CE 진종길}}}]] · 76 [[전민수|{{{#315288,#7697CE 전민수}}}]] · 77 [[송지만|{{{#315288,#7697CE 송지만}}}]][br]· 82 [[강인권|{{{#315288,#7697CE 강인권}}}]] [[감독#s-1.1|{{{#!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315288; font-size: .8em"
{{{#white '''★'''}}}}}}]] · 88 [[윤수강|{{{#315288,#7697CE 윤수강}}}]] · 89 [[박석진|{{{#315288,#7697CE 박석진}}}]] · 93 [[이종욱|{{{#315288,#7697CE 이종욱}}}]][br]· 98 [[김수경(야구)|{{{#315288,#7697CE 김수경}}}]] · # [[전상렬|{{{#315288,#7697CE 전상렬}}}]]'''
----
'''78 [[최건용|{{{#315288,#7697CE 최건용}}}]] · 79 [[조영훈|{{{#315288,#7697CE 조영훈}}}]] · 80 [[지석훈|{{{#315288,#7697CE 지석훈}}}]] · 81 [[김건태(야구선수)|{{{#315288,#7697CE 김건태}}}]][br] · 83 [[윤병호(야구)|{{{#315288,#7697CE 윤병호}}}]] · 84 [[손용석|{{{#315288,#7697CE 손용석}}}]] · 86 [[김종민(야구선수)|{{{#315288,#7697CE 김종민}}}]] · 87 [[손정욱|{{{#315288,#7697CE 손정욱}}}]][br]· 90 [[공필성|{{{#315288,#7697CE 공필성}}}]] · 99 [[이용훈(야구)|{{{#315288,#7697CE 이용훈}}}]] · # [[김종호(야구선수)|{{{#315288,#7697CE 김종호}}}]]''' ||
||<bgcolor=#AF917B> {{{#00275A [[틀:NC 다이노스/간략(코칭스태프)|{{{#00275A 코칭스태프}}}]] | [[틀:NC 다이노스/간략(투수)|{{{#00275A 투수}}}]] | [[틀:NC 다이노스/간략(포수)|{{{#00275A 포수}}}]] | [[틀:NC 다이노스/간략(내야수)|{{{#00275A 내야수}}}]] | [[틀:NC 다이노스/간략(외야수)|{{{#00275A 외야수}}}]] | [[틀:NC 다이노스/간략(군입대선수)|{{{#00275A 군입대선수}}}]] | [[틀:NC 다이노스/간략(등록선수)|{{{#00275A 등록선수}}}]]}}} ||
||<height=30><bgcolor=#FFFFFF,#191919> {{{-1 [[틀:KBO 리그 구단별 명단 둘러보기 틀|{{{#315288,#7697CE 다른 KBO 리그 팀 명단 보기}}}]]}}} ||



공필성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공필성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75~1992).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2










공필성의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3번
김응국
(1988~1989)

공필성
(1990~1991)


조성환
(1999)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0번
김성철
(1991)

공필성
(1992~2000)


이승화
(2001~200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0번
차명주
(1996~1997)

공필성
(2002~2004)


이종우
(2005)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8번
조성옥
(1996~1997)

공필성
(2005)


양용모
(2008~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0번
이종우
(2005)

공필성
(2006~2014)


구승민
(2015)
두산 베어스 등번호 70번
가득염
(2013~2015)

공필성
(2016~2018)


김원형
(2019~202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0번
박주언
(2018)

공필성
(2019)


서튼
(2020~2023)
두산 베어스 등번호 89번
정경배
(2019)

공필성
(2020~2021)


고토
(2023~)
NC 다이노스 등번호 90번
이종준
(2021)

공필성
(2022~)


현역




파일:공필성2023프로필.png

NC 다이노스 No.90
공필성
孔弼聖 | Kong Pil-Sung

출생
1967년 11월 11일[1] (56세)
경상남도 창원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제황초 - 진해남중 - 마산상고 - 경성대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0~2000)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02)
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주루코치 (2003)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04~2011)
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코치 (2012)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13~2014)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5)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16~2017)[2]
두산 베어스 1군 수비코치 (2017)[3]
두산 베어스 1군 작전코치 (2018)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19)[4]
롯데 자이언츠 감독대행 (2019)[5]
두산 베어스 2군 야수총괄코치 (2020)
두산 베어스 1군 수비코치 (2021)
NC 다이노스 2군 감독 (2022~)
본관
곡부 공씨

1. 개요
2. 선수 경력
4. 여담
5. 연도별 주요 성적
5.1. 선수 시절
5.2. 감독 시절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NC 다이노스 2군의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3루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04.jpg
파일:external/dimg.donga.com/43347692.7.jpg
진해남중학교, 마산상고경성대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조만간 롯데의 확고부동한 주전 유격수감이라는 큰 기대를 받으며 입단했지만 타격도 최악, 수비도 최악.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대형 실책을 저질러 "움직이는 화약고"라는 별명도 붙었다. 과거 파울볼을 잡다가 앞구르기를 두 번이나 하면서 공을 놓쳐버린 일화도 있다. 3루수로 전업한 이후의 상황과 비교할 때 아무래도 수비부담+조급함이 있었던 모양.

결국 3년차부터 주전 유격수는 신인 박계원에게 넘겨주게 되고 3루수로 전업하게 된다. 다행히 3루수로 전업하고부터는 특유의 근성 넘치는 플레이가 보통 '핫코너'로 불릴 만큼 강한 타구를 많이 상대해야 하는 3루 수비의 특성과 잘 맞았고, 그때부터 움직이는 화약고 이미지는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덕분에 그동안 롯데 3루를 지켜온 선배 한영준의 후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1992년부터 3루수로 전업해 좋은 활약을 보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롯데는 주전타선 9명중 5명이 3할타율을 기록하는 공포의 소총부대였는데, 주로 하위타순에 기용되었던 공필성이 .286, 포수 강성우는 무려 .303의 타율[6]을 기록하면서 그야말로 쉬어갈 수가 없는 타선을 자랑했다. 수비에서도 수비부담이 줄어든 3루수를 맡으면서 번뜩이는 플레이를 보여줘 주목을 받았다. 특히 해태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최종 5차전에서 위기 순간에 기록한 동물적인 다이빙 캐치 (20분 5초)는 그야말로 백미.

1994년부터 1995년까지가 그의 전성기로 평가된다. 이들 두 시즌을 연속으로 전 경기 출전 기록을 세웠다. 1994년은 시즌 초부터 맹타를 휘두르고 홈런을 작렬했는데,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전반기를 마감할 때까지 .308의 타율로 당당한 3할 타자였고 올스타에 선발되었다. 데뷔 후 첫 3할 타율을 달성하나 싶었지만 당시 주전 선수들의 대거 방위복무로 인해 내야진이 크게 얕아져 3루수 외에 유격수까지 병행해서 출전한 탓에 후반기에는 체력이 저하된 탓인지 타율도 많이 떨어졌다. 1994년 시즌 최종 성적은 .271의 타율에 12홈런 57타점.

이듬해인 1995년에도 맹활약하였다. 개인 성적은 .264의 타율과 4홈런 50타점으로 전년도에 비해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2년 연속 전 경기 출전을 기록하며 롯데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역대 최고급의 3루수 수비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해당 시즌에는 22개의 사구를 맞아 당시 한 시즌 최다 사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타격감이 좋지 않을 때는 어떻게든 맞아서라도 출루하려 했고 그 근성이야말로 롯데 팬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공필성의 선수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 한국시리즈 7차전 첫 타석에서까지 몸쪽 커브를 일부러 사구로 맞고 출루하자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KBS의 정도영 아나운서가 감탄사처럼 내뱉었던 '맞기 전문 공필성~!' 은 지금 시대였다면 가히 플짤감이었다.

타율만 보면 전성기라도 별거 없네하고 저평가하게 되는데 이 2년간 wRC+가 128.0, 119.5. sWAR*이 4.55, 4.13으로 전성기 2년 만큼은 한대화 다음가는 리그 No.2 3루수였다.

1996년부터 김용희 감독이 박현승을 주전 3루수로 전업시켜 기용하면서 바로 전 해에 전 경기를 출전했던 주전에서 한순간에 백업으로 강등되었다. 자존심이 상했을 법도 하지만 묵묵히 백업의 역할을 수행하며 눈에 띄진 않지만 없으면 아쉬운 수준의 활약을 해 줬다. 박현승이 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는 다시 주전을 맡았으며, 특히 1999년은 백업임에도 무려 124경기를 뛰며 존재감을 보였다. 특히 1999년 한국시리즈 당시 부상으로 결장한 박현승을 대신하여 출장했던 3, 4, 5차전에서 모두 멀티히트를 기록할 정도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8회말 3루타를 치고 나가 추가 득점 찬스를 만들었지만, 뒤이은 희생플라이에서 주루사를 범해 롯데 팬들을 좌절시켰고,[7] 끝내 롯데는 한화에게 9회 역전을 허용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백업으로 112경기를 소화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총평을 하자면 1995년 22개의 사구를 기록한 것[8] 정도가 특기할만한 기록이었고, 그 외의 선수시절 성적은 평범했다. 그럼에도 그가 선수생활을 10년 정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리몸과는 거리가 멀었고 맞아서라도 나가겠다는 투지와 함께 그라운드에서 열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살이 지난 선수 생활 후반기에도 백업으로서 다른 선수들의 공백을 잘 메꿔주었다.

마지막 해가 된 2000년까지 열 한 번의 시즌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3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1994년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리지도 못했고, 반대로 다섯 시즌을 두 자리 수의 실책을 기록했다. 롯데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인 1992년이나, 1994-1995 시즌엔 공격 면에서 그럭저럭 활약했지만 그 외엔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었다. 상술했던 대로 전성기 2년간은 세이버로 보면 리그 2위의 3루수라고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의 선수시절인 1990년대에는 그런 질적 분석지표가 없어서 무의미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공필성퓨처스올스타전220715.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공필성/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여담[편집]


  • 공필성을 상징하는 등번호는 0번. 선수단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0번이나 3자릿수 등번호도 볼 수 있게 된 2010년대 프로야구에서는 가끔씩 보이는 번호이지만 90년대 당시엔 드문 등번호였다. 은퇴 이후 일구회 자선시합에도 이 0번을 달고 나오는 등 0번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선수 중 하나. 마침 성이 '공' 씨였기에 그런 점도 있다. 그래서 이름풀이가 "공(0)을 달면 필히 성공할 것" 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0번을 달게 된 동기는 원래 등번호였던 43번을 뺏기고 나서 달 번호가 없어서. 이유야 어찌 되었건 공필성에게는 굉장히 잘 어울리는 등번호였다.

  • 나름 큰 경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 유명한 1999 시즌 플레이오프 7차전의 기적도 공필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9회 공필성이 안타로 출루했고, 이후 임수혁이 동점 홈런을 때렸다.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3_90091_1360015206834751.jpg [9]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41103.22021201919i1.jpg
파일:external/ph.spotvnews.co.kr/39765_57295_2658.jpg
  • 한국판 주제 무리뉴.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외모가 매우 잘생긴 선수 중 하나. 나이들며 역변하는 경우도 많은데 공필성의 경우에는 오히려 나이를 먹으며 중후한 멋이 생긴 케이스.

  • 다만 저 잘생긴 외모는 모자를 썼을 때만 잘생겼다. 이목구비는 확실히 잘생겼는데, 남자의 주적인 그것이 30대부터 찾아오는 바람에...50대가 된 지금은 정수리와 앞머리가 둘 다 휑해서 슬픈 분.

  • 롯데 코치 시절인 2006년 8월 5일 SK와의 경기에서 SK 투수 신승현펠릭스 호세를 맞춰 양 팀 사이에 벌어진 벤치클리어링 도중 호세를 말리기 위해 나서다가 그만 호세가 휘두른 주먹에 대신 맞고 떨어져나가 그의 살신성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10]

파일:external/pbs.twimg.com/B069GkDCQAAslxo.jpg
  • 2007년 5월 19일, 롯데의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15주년을 기념해 올드 유니폼을 입고 당시 윤형배 2군 투수코치와 시구-시타로 나섰는데, 현역 시절 근성의 사나이라는 별명답게 여기서도 데드볼을 맞는 황당한 장면을 연출했다.영상(제일 첫 부분) 당시 기사 여담으로 당시 공필성이 맞은 데드볼이 두 코치 간 서로 사전모의한 게 아니라 우연의 결과라고 한다. 공필성은 이 사구에 대해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난 현역 시절에도 그러지 않았다" 라고 답했다.

  • 1992년, 1995년, 1999년 총 3번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 총 두 개의 홈런을 때렸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통산 홈런 1위 기록이다. 여담으로 두 개 친 선수가 공필성 한 명뿐이라 한 개만 친 이종운도 2위다. 또한 한국시리즈를 세 번이나 나가서 그런지 롯데 자이언츠 통산 한국시리즈 경기, 안타, 3루타, 홈런, 타점, 30타석 이상 들어선 선수 중 타율[11] 1위다. 이 기록들이 갱신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롯데가 2000년부터 한국시리즈를 못 가고 있기 때문이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5.1. 선수 시절[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롯데
78
177
.232
41
8
1
1
15
20
6
22
.305
.315
1991
81
158
.215
34
6
1
3
16
20
3
15
.323
.280
1992
100
280
.286
80
17
3
6
40
30
2
28
.432
.347
1993
124
379
.240
91
23
(5위)
3
1
38
36
6
33
.325
.299
1994
126
420
.271
114
23
(8위)
5
(3위)
12
57
55
25
(6위)
58
(7위)
.436
.355
1995
126
390
.264
103
14
6
(3위)
4
50
60
22
74
(3위)
.362
.378
(8위)
1996
114
299
.251
75
18
1
4
34
37
8
31
.358
.315
1997
79
207
.246
51
13
1
1
20
19
9
19
.333
.307
1998
120
364
.245
89
12
2
6
42
42
12
47
.338
.327
1999
124
238
.214
51
13
2
2
21
28
9
27
.311
.292
2000
112
149
.208
31
4
1
1
13
16
4
17
.268
.287
KBO 통산
(11시즌)

1184
3061
.248
760
151
26
41
346
363
106
371
.355
.326


5.2. 감독 시절[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9
롯데 자이언츠
50
14
35
1
10위[12]

통산
50
14
35
1


6. 관련 문서[편집]


[1] 음력 10월 10일[2] ~4월 17일[3] 4월 18일~[4] ~7월 18일[5] 7월 19일~[6] 규정타석에는 미달이었다. 이 해의 강성우는 사실상 김선일의 백업이었다.[7] 희생플라이를 틈타 홈으로 들어오려다가 한화 우익수 송지만의 홈송구에 놀라 도로 3루로 돌아가던 중, 오히러 3루에서 아웃당하고 말았다.[8]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타격을 하는 자세, 치지 못한다면 맞아서라도 나가겠다라는 본인의 성격으로 인해 당시 사구를 가장 많이 맞는 선수 중 하나였다. 이 기록은 당시 1982년 김인식이 기록했던 18개의 기록을 갱신하였으며 1999년 31개의 사구를 기록한 박종호에 의해 깨졌다.[9] 이 사진은 1994년 8월 20일 삼성과 롯데의 경기가 벌어진 대구구장 사진기자실에서 훈련을 마친 후 사진기자실 계단에 걸터앉아 햄버거와 콜라로 저녁식사를 때우는 것을 찍은 것이다. 참고로 이 사진에 대해서는 90년대 프로야구의 그늘이 드러나 있는데, 당시 선수들은 아무래도 경기 전이다 보니 위에 부담이 덜 되는 간단한 식사를 하는 게 좋았지만 그때는 원정팀에 대한 배려가 깊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끼니를 때워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팀의 코칭스탭들이나 몇몇 고참급 선수들은 아예 중국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반대로 홈팀 선수들은 번듯한 샤워실에서 훈련으로 찌든 땀을 깨끗이 씻어낸 후 맛난 호텔식 뷔페로 식사를 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다행히 지금은 야구단 환경이 많이 좋아져 제대로 된 식사에 과일과 건강음료까지 챙겨 먹을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원정팀에 대한 시설보완에 대해선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이 많은 현실이다.[10] 당시 호세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넘어지면서 호세에게 깔린 채로 엉덩방아를 찧은 SK의 최태원 코치도 같이 화제가 되었다.[11] 0.308[12] 감독 대행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3 12:47:51에 나무위키 공필성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