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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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도입 배경
3. 조세와 수조권이란?
4. 영향
5. 폐지


1. 개요[편집]


과전법()은 전 국토 중 일부를 떼어내 중앙 관료들에게 수조권(收租權)을 주고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나눠줘 자영농을 키우는 제도로, 1391년(공양왕 3) 조준이성계를 등에 업고 만든 제도이다. 아직 공양왕이 왕위에 있었기에 역사책에는 공양왕 때의 일로 기록되었으나 당시 고려 왕실은 토지개혁에 미온적이거나 회의적이었고, 이듬해에 망한다. 과전법은 고려 왕조 내내 강력한 가문들이 독점하고 종교 집단이 특권을 갖던 토지 제도를 깨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초까지 관리에게 토지를 줬고 이를 과전(科田)이라 불렀다. 이는 경기도 내의 토지로 한정됐으며, 나머지 조선 8도의 호족들의 토지는 뺏어서 백성들에게 분배했다.[1] 이를 통해 세금이 중앙 정부로 제대로 들어와 재정도 건실해지고 조선임진왜란 전까지 국난을 피함은 물론 강한 국력으로 영토도 확장한다.

다만 이 과전법도 마치 고려 말 전시과처럼 공급이 수요를 이겨내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조 12년에 현직 관료에 한정하여 과전을 부여하는 직전법이 시행되나 근본적 해결은 무리였고, 결국 성종 1년에 나라가 직접 세금을 거두어 관료에게 배분하는 관수관급제가 시행되면서 과전 및 수조권은 소멸한다.

여말선초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반드시 나오는 토지개혁으로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등에서 과전법 실시 과정이 주요 시나리오로 다뤄진다.


2. 도입 배경[편집]


과전법 이전에는 고려 건국부터 전시과를 시행해 문무반은 물론 향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땅을 대상으로 생산된 것을 갖게 했다(수조권). 대신 나라에서 부르면 수조권을 보유한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들여 나랏일을 감당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소집 동원된 집단들은 말도 안 되는 비전문성으로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고, 공공 서비스 동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피되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사람이 바보였다. 결국 고려의 국력은 말그대로 허약 그 자체가 됐다.

물론 고려에도 과거 제도가 있었지만 유명무실했고, 결국 유력 호족들이 관직을 나눠갖는 구조로 고려 말이 되면 어떤 세력이냐의 문제일 뿐 서로 땅을 뺏고 뺏는 복마전이 된다. 심지어 국교였던 불교 사찰들까지 토지 경쟁에 나섰을 정도. 한 땅에 동시에 여러 사람이 등기를 하고, 정부는 이를 눈감아주면서 결국 소작을 부쳐먹는 농민들만 여러 사람에게 번갈아가며 털리고 심하면 노비가 되거나 야반도주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겸병이라 한다.

정도전이성계를 등에 업고 기득권의 토지를 몰수하고 무상으로 백성들에게 토지를 균등 분배하는 계민수전을 하고자 생각했으나,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던 이색 등의 고려파 사대부와 왕실 인척 등 귀족들의 방해에 실현 가능성이 전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준이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과전법을 제시하였고,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일파는 조준을 지지하였는데, 이색권근을 비롯한 이들은 일전일주론을 제시하며 대립하였다.[2] 하지만 김저 사건으로 인해 이숭인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의 이색 일파가 정계에서 몰락하고, 창왕이 폐위당하면서 과전법이 시행된다.

과전법은 전시과와 달리 현직 및 전직 관료들에게 모두 수조권을 지급했다. 원래 전시과도 전현직 모두에게 줬었지만 1076년 문종 때 현직으로 한정했었다(경정전시과). 관료들에게 줄 토지는 경기 지역에 국한시키고, 시지(산림)는 따로 안 줬다.


3. 조세와 수조권이란?[편집]


가질 권리를 '조', 국가에 낼 의무를 '세'라고 해서 조세다. 이 중 조에 대한 권리를 수조권이라 한다. 다시 말해 해당 토지에서 나는 과실을 가질 권리이다. 과전법으로 수조자는 과전에서 나오는 소출의 1/10을 '조'로 받을 수 있었다. 조준이 책정한 당시의 1결은 300두로, 공법 상 수조율에 의거해 최대 30두까지 관리가 가져갈 수 있었다. 이는 추후 정치가 안정되면서 세종의 공법으로 1결이 400두, 그리고 수조량을 1/20으로 변경(최대 20두)해 한층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자세한 건 공법 항목을 참조하자.

수조자(관리)는 조로 받은 이익 중 일부를 떼어 '세'를 냈다. 과전법 초창기 토지 소유자는 백미를 1결당 최대 30두까지 가져가고 그중에 2두는 나라에 다시 냈다. 다만 능침(왕릉 비용충당용), 궁사(궁궐 비용충당용), 공해(公廨, 공공기관 충당용), 그리고 공신전은 면세였다.

과전법은 현직, 퇴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수조권을 줬다. 그래도 조선 초기는 관료의 수가 워낙 부족했고, 재산을 뺏겨 삐친 유력 집안들 역시 조정에 출사를 할 일이 없다보니 국유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유교적 법도상 혼자가 된 귀부인의 재혼이 힘들어 수신전[3]과 휼양전[4] 등을 내려주면서 조금씩 잠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문제는 바로 공신전[5]이었다. 역적들의 땅과 재산을 뺏어 공신에게 주고, 심지어는 그 가족까지 노비로 만들어 공신에게 줬지만 그래도 점점 줄 땅이 부족해졌다. 무엇보다 공신전은 완전 면세였다. 왕은 감사의 의미로 더 얹어주기 십상이었고, 똑같은 사람이 여러 번 공신에 오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공신 지정은 조선 조정에 큰 부담을 안겼으며 과전법이 더는 유지될 수 없게 만들었다.


4. 영향[편집]


고려 말 유력 호족들 밑에 소유됐던 다수 농민들이 국가세금을 낼 자영농이 되면서 국가 재정이 크게 확대됐다. 면세 범위가 엄청나게 줄어들고 삼국 시대부터 내려온 개별수조권을 국고수조지로 편입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조세를 직접 거둬 국가 재정이 더욱 탄탄해졌고 호족들에게 뺏은 사병을 중앙군에 두고 부릴 수 있었다.

고려 시대 수조권 개념에서 조선의 소유권 패러다임으로 전환 운운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토지소유권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그중에서도 수조권 개념은 국유지에서 나는 소출을 개인에게 수조권만 분리해 내려준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고려 때 토지 역시 민전 등 사유지가 대부분이었고 소유자는 매매와 상속이 자유로웠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토지 제도의 차이를 수조권과 소유권 개념으로 단순화해 생각할 수 없다.

고려 때도 사전은 유력 집안의 소유로 무신정권 때 나눠주던 녹과전도 말만 수조권이지 소유권이 인정됐었고 공민왕 사후 심화된 토지 겸병 역시 토지 소유의 양극화에서 오는 병폐였다. 과전법을 행하면서 태웠던 고려 토지 문서는 물론, 염흥방조반을 때리고 토지를 뺏은 것도 다 소유권 다툼이었다.


5. 폐지[편집]


16세기 직전법의 소멸과 함께 수조권에 입각한 전주·전객제인 과전법 체계는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전호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라고 돼있는데 쉽게 말하면, 수조권 위주를 전주전객제, 그냥 평범한 소유관계를 지주전호제라 한다. 지주전호제는 이것이 법제화된 제도라기보다는 지주소작농이 있고 일한 5할을 지주에게 바치는 일종의 관행을 통칭한다. 고려 말 수취제도의 혼란 역시 이 때문에 일어났는데, 지주전호제가 발달한다는 말은 사실상 국가가 행정관료들의 녹봉을 책임질 수 없어 관료들에게 어떤 수를 써서든 알아서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살라고 권장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양극화를 막지 못한 조선은 세도정치삼정의 문란 속에 안으로부터 무너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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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로써 서민들도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고, 이것이 아직도 쌀밥을 '이씨(李氏) 밥'이라는 뜻의 '이팝'이라 부르는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는 민간어원으로, '입쌀밥'이 줄어 이밥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2] 기록에 따르면 정몽주는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이후 과전법을 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3] 관료인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가를 하지 않고 혼자 살면 50%를 물려 받았다. 미성년인 자식이 있으면 100%를 물려 받았다.[4] 부친이 관료인데 부모 모두가 죽으면, 아들이 20세가 될 때까지 100%를 물려받았다. 만일 20세 이전에 관리가 되었다고 해도 부친이 관직에 있던 과전보다 적은 양이면 휼양전이 그대로 적용되었다.[5] 국가가 인정한 공신의 경우 과전 세습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