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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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계획재정부장
곽범기
郭範基 | Kwak Pom Gi


파일:곽범기.jpg

출생
1939년 11월 20일 함경남도 리원군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직업
군인, 정치가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1939년 11월 20일, 함경남도 리원군에서 출생, 남한에서 파악하기로는 희천공업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발표한 약력에 따르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지방대 출신이라고 딱히 숨기진 않는 게 북한이니 희천공대 졸업 이후 김대도 다녔었던 것으로 추정. 김대 졸업 이후 계획경제사 자격을 취득하였다고 한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1964년 4월 23일, 희천공작기계공장 창고장으로 일하던 중 현지지도를 온 김일성을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 이후 직장장으로 승진하여 1971년 2월에 다시 김일성을 만났다. 1983년부터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 분공장 지배인을 지냈다. 1991년 1월 정무원 기계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1993년 2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계형순을 대신하여 정무원 기계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 최영림과 함께 애국화학증착 분공장 준공식에 동행하는 등 여러 행사를 다니다가 12월 8일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6기 21중 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5년 10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조창덕과 함께 홍성남 내각 하에서 첫 내각 부총리를 맡았다. 김정일 시대의 초기 테크노크라트 중 가장 무게감 있던 인물로 이후 3차례 부총리를 연임하게 된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하면서 박봉주 내각에서 부총리에 유임, 국가학위직수여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박봉주 내각에서 로두철, 전승훈과 함께 홍성남 내각의 7.1 경제개선조치를 이어받아 상당히 열성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7년 박봉주가 숙청당할 때도 생존했으며 김영일 내각에서도 유임되어 2009년 1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세번째로 부총리에 당선되었다.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이 대실패로 돌아가면서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 12기 3차 회의에서 김영일 내각이 숙청되고 최영림 내각으로 교체되는 와중에 그도 태종수 등 다른 부총리들과 함께 경질된다. 그가 가지고 있던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장직은 전하철이 물려받았다. 하지만 김영일과 달리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태종수의 뒤를 이어 신임 함남 책임비서로 이동하여 지방직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가 열리자 당당히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된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2년 2월에 김정일훈장을 받았다.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가 열리자 함남 책임비서를 다시 태종수에게 물려주고 중앙으로 돌아와 정치국 후보위원, 비서국 비서, 계획재정부장으로 승진했다. 계획재정부장이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장을 겸직하는 것이 관행으로 보이는데, 2012년 9월 25일, 최고인민회의 12기 6차 회의에서 최희정의 뒤를 이어 예산위원장에 보선되었다. 2012년 11월 14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가체육지도위원회가 설치됨에 따라 초대 위원이 되었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14년 4월 8일 정치국 회의에서 계획재정부장 자리를 오수용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이며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예산위원장 자리도 오수용에게 물려주었다.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한 것으로 보이며,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6-2017년 사이에 농업 행사를 많이 다닌 것을 봐서 농업 담당 부위원장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201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박태덕이 신임 농업 담당 부위원장에 임명된 것을 보면 박태덕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김정은 시대의 주요 테크노크라트로 각종 시설 준공식,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우상화 행사를 부지런하게 다녔으나 2017년 9월, 6차 핵실험을 환영하는 평양시 군민경축대회 참석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두문불출하였다. 2017년 10월 7기 2중전회 이후 주석단에 포함되지 못하고 방청석으로 내려간 것으로 봐선 이때 해임된 것으로 보이며, 2018년 8월, 김영춘 장의위원, 2018년 12월, 김철만 장의위원회에서 모두 탈락하였다. 그러다가 2018년 9월, 김정은의 대성산 혁명렬사릉, 신미리 애국렬사릉 헌화에 동행했으며 12월 28일, 제4차 전국농업부문열성자회의 참가자들과 김정은의 사진 촬영식에 동행한 것을 끝으로 동정보도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2018년에 곽범기의 호명 서열은 중앙위원회 위원들인 고인호, 리철만보다도 낮았다는 점에서 이미 정치국 위원 및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2019년 3월, 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탈락함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것이 사실상 확인되었으며,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했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연로보장의 나이로 삼는 나이가 80세이긴 한데 2019년에 곽범기가 80세가 되었으니 이를 이유로 은퇴한게 아닐까 추정된다.

한참동안 조용하다가 2023년 7월 27일, 전승 70주년 기념보고회에 초대받았다. 한달 후인 9.9절 열병식에도 노간부 자격으로 초대받았다.

3.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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