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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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원갑
병음 : Huò Yuánjiǎ (훠위안자)
霍元甲 | Huo Yuanji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Liuhopafa.jpg
출생
1868년 1월 18일
청나라 톈진시 징하이구 난허진
사망
1910년 8월 9일 (향년 42세)
청나라 상하이시
직업
무술가
배우자
왕씨 (? ~ 1910년?)[1]
자녀
5명

1. 개요
2. 생애
2.1. 타살설
3. 대중매체에서의 곽원갑



1. 개요[편집]


중국의 무술인. 자는 준경(俊卿). 연청권(燕靑拳)의 달인이자 연청권을 전파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사망한 지 10년 뒤에 손문이 그를 중국 무술계의 선구자로 추도하였다. 그 일환으로 곽원갑이 태어난 고향인 '난허진'이 '징우(精武)'진으로 개명되었는데 곽원갑이 창시한 정무체육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톈진시는 곽원갑의 생가를 복원해 개방하고 묘소도 새로 단장하는 한편 '곽원갑 무술학교'도 세웠다. 중국의 국부인 손문은 정무체육회 창시를 높이 평가하여 '상무정신(尙武精神)'이란 친필 휘호를 내리고 정무체육회 역사를 서술한 '정무본기(精武本紀)'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톈진시는 곽원갑의 출생지를 동시대의 유명 무술가 황비홍(黃飛鴻)의 고향 광둥(廣東)성 불산(佛山)처럼 중국 전통무술의 '메카'로 조성할 계획이다.


2. 생애[편집]


직례성(直隷省) 정해현(静海県)(현 톈진시 징하이구)의 무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한 탓에 병약한 아들이 가문의 이름에 오점을 남길까 우려하여 부친이 무술을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가족의 무술 연습을 몰래 훔쳐보며 독학했다고 한다. 1891년(24세)에 형을 쓰러뜨린 무도가에게 대신 리벤지하여, 비로소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미종권을 전수받았다.

이후 도장깨기를 하고 다니다가 호위 등 일을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비적 떼를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1895년에는 깡패들과 자릿세 문제로 시비가 걸려 해고를 당하지만, 96년에 절친 농경손의 도움으로 회경의 약국에서 수위로 일했다.

1901년에는 중국인들을 '동아병부'라고 모욕한 러시아인 레슬러가 곽원갑 때문에 모욕 발언을 철회/사과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가 있으나, 이에 대해선 레슬러를 때려눕힌 것인지 곽원갑이 결투를 신청하자 레슬러 쪽에서 지레 겁먹고 사과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1909년에는 영국의 복서 헤르큘레스 오브라이언에게 '허리 아래로는 가격이 불가능한 복싱 룰'로 도전을 받지만, 곽원갑은 종합격투기에 가까운 승부방식인 '뢰태(擂台) 룰로 싸우자.' 제안했다. 하지만 오브라이언이 이를 거절하여 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진공철, 진철생 등이 곽원갑을 정무체조회(훗날 정무체육회)의 무술사범으로 초청했다.

1910년 상하이에서 친구 농경손과 함께 손문의 후원으로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를 공동으로 창립했다. 하지만 정무 체육회를 만든 지 3개월 만인 1910년 9월 14일 급사했다.

공개 무술 시합에서 제자인 유진생이 일본인 무술가에게 연달아 이기는 바람에 원한을 사서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만 속설일 뿐이고, 가족 및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로는 지병인 폐경변으로 사망하였다.[2]


2.1. 타살설[편집]


곽원갑은 정무체육회를 창립한 시기에 황달이 재발하고 결핵에까지 감염되어 고생하였다. 일본인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았는데, 그 의사는 상해에 지부를 둔 일본 유도 협회의 소속으로 곽원갑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진료를 받기 시작한 후부터 곽원갑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곽원갑은 1910년 9월 14일, 43세 나이로 정무체육회를 만든 지 불과 3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곽원갑과 부인의 무덤은 1989년에 이장되었는데, 사망 당시에 시신을 검시한 결과 골반 뼈에서 검은 반점이 발견되었다. 톈진 경찰 조사 결과 독극물의 일종인 '비소'가 검출되어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일반적으로 비소는 독극물의 일종이지만 240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전통의약의 일종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독살을 했는지, 아니면 치료차 비소가 포함된 약을 먹었다가 부작용으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곽원갑의 제자이자 역사학자인 천궁저는 스승이 독살되었다고 굳게 믿었는데, 일본 유도 협회의 소개로 찾아온 일본인 의사가 스승의 진료를 맡은 뒤로 오히려 건강이 악화된 점을 근거로 지적했다. 곽원갑은 나중에 상해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곳에서 불과 2주 만에 사망하였다. 현재도 정무체육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곽원갑이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고 추측한다.

이 때문에 현재도 대중매체에선 곽원갑이 독살당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3. 대중매체에서의 곽원갑[편집]


이런 저런 이유로 정무문의 주인공이 되었고 드라마로도 몇번 제작되었다. 1981년에 홍콩에서 제작된 드라마의 주제곡 만리장성영부도는 홍콩에서 유명해졌고, 노래를 부른 엽진당(葉振棠)의 인지도도 급상승했다.

이소룡영화 정무문에서 가공 인물인 제자 '진진'[3]이 곽원갑의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그렸다. 그 밖의 많은 정무문 시리즈에서 사망자(…)로 출연. 예외로 견자단이 주연한 TV 시리즈에선 중반까지 메이저급 출연을 하면서 후덜덜한 무술 실력을 뽐냈다. 명실공히 극중 최강자였지만[4] 독살당하는 건 똑같다. 곽또죽 어찌보면 애국 마케팅의 피해자

이연걸이 할리우드 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이쪽으로 컴백해서 찍은 영화가 '무인 곽원갑'. 역시나 일본인에게 독살 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는 결말. 전기 영화로 치기엔 과장된 면이 꽤 있다.[5] 특이한 점은 이연걸이 정무문에서 곽원갑의 제자인 진진의 역할도 맡았고, 그 스승인 곽원갑도 연기했으니. 스승과 제자 역할을 둘 다 한 셈이다.[6] 영화 '무인 곽원갑'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극초반부의 대결에서 20세기의 진짜배기 펜싱 하난 제대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흔히 펜싱이라고 하면 가느다란 협봉검을 가지고 찌르기 한 번 성공하면 경기중지, 이후에 다시 한 판... 을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죽을 때까지 검을 나누는 경기였는데 영화에서는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브레이서라고 하는 손목 방어구를 제대로 활용하는 모습도 눈여겨 볼 만 하다.

덤으로 곽원갑이 독살당하는 내용의 영화/드라마가 여럿인데 거기 나오는 상대편 무사도 선역과 악역이 갈리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연걸의 정무문에서는 진진이 상대를 발라버리고 너 같은게 우리 스승님을 이겼을 리 없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고 마침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다. 모멸감을 느끼고 사건의 흑막이자 최종 보스인 일본 군인을 찾아가 따지다가 끔살당하고 이를 진진이 원수를 갚으려고 살해한 것으로 뒤집어 씌운다.

무인 곽원갑에서는 최종 대결은 나카무라 시도(극중 이름 타나카 안도)와 함께 연기했다. 대결 전 화기애애하게 차를 함께 마시며 서로의 무술관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등 무술가로서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타나카는 4:1로 불리한 승부를 주선했던 일본 상인에게 반감을 갖고 연달은 대결에 지친 곽원갑에게 지금은 미루고 나중에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뤄보자고 했지만 곽원갑이 거부하면서 시합을 속행한다. 무기대결이 무승부로 끝나자[7] 잠시 휴식을 가지고 맨손 시합을 속행하는데, 휴식시간에 마신 차에 독이 들어있어서[8] 곽원갑이 중독되자 시합 중지를 요구하며 배려했으나, 오히려 곽원갑이 속행을 원하여 승부를 펼쳤다.

곽원갑은 시합 중 건드리기만 해도 피를 토하는 등,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타나카 역시 그런 곽원갑의 모습을 보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최선을 다해 대결한다. 곽원갑은 각혈하는 도중에도 틈을 노려 회심의 일격을 날렸으나 살생을 피하고자 주먹을 거두었고[9] 기운을 다한 나머지 홀가분한 미소와 함께 쓰러진다. 타나카는 타나카의 승리를 선언하려는 심판을 막고 곽원갑을 추켜세워주며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면서 내려간다. 시합 후 흑막이었던 일본 상인이 무슨 짓이냐며 따지자 역으로 "너야말로 일본인의 수치다!"라고 일갈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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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0년 이전에 결혼했다는 것만 사실.[2] 당시 열렸던 공개 무술 시합은 국가간의 충돌같은 험악한 분위기보단 순수하게 무를 겨루는 친선 시합이었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어느 쪽이 이겼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3] 모티브는 곽원갑의 제자인 진공철(陳公哲)이라고 한다.[4] 어느 정도냐면 진진과 동급의 무술가를 시종일관 여유있게 가지고 놀다가 독이 발작한 상태에서도 두들겨패서 이긴 뒤에 서서 죽었다.[5] 제자가 라이벌 진사부에게 맞고 오자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에 진사부를 대결 중에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 후 진사부의 양아들에게 가족이 살해당하자 보복을 하는 내용이 있지만(곽원갑이 죽인 건 아니고 양아들이 자신이 죽인 게 맞으니 대가를 치루겠다며 양모의붓동생에게 건강하란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을 베어버린다.) 실제 곽원갑의 가족에게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아서 대가 끊긴 것도 아니고, 곽원갑은 영화에서의 모습처럼 극악무도한 인간도 아니었기 때문에, 영화가 개봉되자 후손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6] 마찬가지로 이연걸은 영화 의천도룡기태극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인 장무기장삼풍 역을 둘 다 맡기도 했다.[7] 사실 곽원갑이 유리한 상태에서 끝났다. 곽원갑은 삼절곤, 안도는 일본도로 싸웠는데 대결이 치열해지다 우연하게 서로 무기가 바뀌게 된다. 곽원갑은 일본도로도 중국 검술을 그런대로 시전했지만 안도는 한번도 안써본 삼절곤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다 자기가 맞는 망신을 겪었고 곽원갑은 안도의 체면을 위해 다시 무기를 바꾸고 대련한다. 그리고 서로 무기가 파손되면서 무승부 처리.[8] 일본 상인 측이 차에 독을 탔다[9] 젊었을 적 오만했을 때 별것 아닌 자존심으로 라이벌인 진 사부를 살해한 살인기였다. 인간으로서 무술가로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장치[10] 엽문(영화)에서 나오는 미우라 장군과 함께 항일 영화에 나오는 올곧은 일본인 최종보스이지만 결국 두들겨 맞고 리타이어하는 미우라보다는 취급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