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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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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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정벌
우군세력
교전세력
황산진구 전투
,77,
-
가야
마두성 전투
,94,
-
가야
황산하 전투
,115,
-
가야
포상팔국 전쟁
,209,
안라국
포상팔국 연맹
신라-왜 전쟁
,(신라의 일본침공사례),
,364 ~ 404
(291 ~ 720)
,
고구려
가야, 백제, 왜국
신라-우산국 전투
,512,
-
우산국
이와이의 난
,527,
규슈
긴키
독산성 전투
,548,
백제
고구려, 동예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551,
백제, 가야
고구려
관산성 전투
,554,
-
백제, 가야, 왜국
가야멸망전
,562,
-
가야, 백제, 왜국
아막성 전투
,602,
-
백제
북한산성 전투
,603,
-
고구려
가잠성 전투
,611,
-
백제
가잠성 전투
,618,
-
백제
가잠성 전투
,628,
-
백제
칠중성 전투
,638,
-
고구려
대야성 전투
,642,
-
백제
황산벌 전투
,660,
-
백제
백제멸망전
,660,
당나라
백제
칠중성 전투
,660,
-
고구려
북한산성 전투
,661,
-
고구려, 말갈
과천 전투
,662,
-
고구려
백강 전투
,663,
당나라
백제 부흥군, 왜국
사천 전투
,668,
-
고구려
평양성 전투
,668,
당나라
고구려
석문 전투
,673,
고구려 부흥군
당나라
호로와 왕봉 전투
,673,
-
당나라
칠중성 전투
,675,
-
당나라
매소성 전투
,675,
-
당나라
기벌포 전투
,676,
-
당나라
발해-당 전쟁
,732~733,
당나라
발해
김헌창의 난
,822,
-
장안국
달벌대전
,839,
-
청해진, 김우징
신라구의 일본 침입
,811 ~ 936,
-
일본
원종ㆍ애노의 난
,889,
-
원종애노
대야성 전투
,901,
-
후백제
대야성 전투
,916,
-
후백제
대야성 전투
,920,
-
후백제
서라벌 기습
,927,
고려
후백제
고창전투
,930,
후백제
고려
운주성 전투
,934,
고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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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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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회의



관산성 전투
管山城 戰鬪

파일:백제 성왕 수정본.jpg

포로가 된 성왕과 칼을 든 고간 도도.
시기
554년 7월 혹은 12월경[1]
장소

신라, 관산성(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및 주변 지역[2]
원인
나제동맹의 파탄으로 유발된 한강 유역 영유권 분쟁.
교전 세력
백제·가야·왜
(공격자)


신라
(수비자)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백제 군기.svg 성왕 (백제 국왕)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창 (백제 왕세자)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진흥왕 (신라 국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무력 (대장군)
참가자}}}
파일:백제 군기.svg 모노노베노 마가무[3]
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4]
파일:가야의상징이라고칩시다심볼할게없네.png 고전해
참가자}}}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우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탐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도도[5]
병력
연합군 30,000여 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최고 지휘관 성왕 전사
좌평 4명 전사
연합군 29,600명 전사[6]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백제 연합군 대패, 성왕 전사.
영향
나제동맹 해체, 백제의 침체, 가야 멸망, 신라의 굴기,倔起,
1. 개요
2. 배경
2.1. 나제동맹의 결성
2.2.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다
2.3. 신라 내부의 혼란과 백제의 기습
3. 전개
3.1. 백제의 진격과 김무력의 역습
3.2. 건길지의 목이 노비의 손에 베이다
3.3. 신라의 완승
4. 영향
5. 의문점
5.1. 성왕과 50명의 병사들
5.2. 왕을 죽인 자의 정체는?
5.3. 관산성의 위치
6. 창작물에서
7. 기록



1. 개요[편집]


백제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기록상으로 삼국시대 전투 중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전투다. 흔히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잘 알려졌다. 4세기 후반 때처럼 백제, 가야, VS 고구려, 신라의 연합 구도가 다시 부활하였고,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후기 삼국 시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전투다.


2. 배경[편집]



2.1. 나제동맹의 결성[편집]


}}}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구려보다 작은 나라였던 백제신라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평양 천도로 인해 고구려의 전선이 남쪽으로 옮겨지면서 압박 받고 있었다. 백제신라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고자 나제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협력함으로써 강대국 고구려를 한동안 막아내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장수왕이 사망하고 고구려의 공세가 약해지자 서로 도울일이 많이 없어져 나제동맹도 다소 느슨해졌고, 양국이 후방에 있는 가야의 영유권에 대해 신경전을 벌이거나[7] 서로를 믿지 못해 국경에 방어 태세를 갖추는 일도 벌어졌다. 이렇듯 동맹이 위태로워지던 541년, 백제의 성왕이 먼저 동맹을 제의하여 제3차 나제동맹이 체결됐다. 하지만 그 해 성왕은 바로 제1차 사비회의를 열어 왜와 가야를 끌여들여 신라를 견제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547년 제2차 사비회의에서는 아예 신라와 가야의 국경 지역에 백제군을 주둔시켜 신라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외부적으로는 동맹관계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양국 간 갈등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548년 독성산성 전투 때까지만 해도 위기에 빠진 백제군을 돕기 위해 신라가 장군 주진(朱珍)을 필두로 한 3,000명의 원군을 파병하여 고구려군을 참패시키는 등 동맹이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참패시킨 전과는 나제동맹에게 더욱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파일:관산성.png }}}
5세기 한반도 중부지방의 세력도
550년 1월, 백제 성왕은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10,000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도살성(현 충청북도 제천시)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나 두 달 후 고구려가 탈환을 위해 침공하자 백제는 금현성을 함락당하고 도살성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 원군이 왔고, 고구려군이 피로해진 틈을 노린 신라군의 활약으로 고구려군은 패퇴했다. 신라군은 고구려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도살성과 금현성에 방어병력 1,000명을 주둔시켰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성을 증축했다.

이후 고구려가 도살성을 되찾기 위해 재침해왔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를 패퇴시킨 후 퇴각하는 고구려를 따라 북쪽 고구려 본토를 침공했다. 이어 백제 역시 경기도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격했다. 551년 때마침 고구려는 북쪽에서 돌궐이 잇따라 침입하여[8]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비록 침임한 돌궐군을 고흘 장군이 활약하여 격퇴했지만 고구려의 관심이 북쪽에 쏠리자 남쪽 방비는 허술해졌다. 이 틈에 신라와 백제는 각각 한반도 중부의 10성과 6성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백제는 개로왕 때 잃어버렸던 한강 하류의 고토를 회복하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2.2.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다[편집]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다.

삼국사기성왕 31년(553년)조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진흥왕


553년, 한강 상류를 차지했던 신라의 진흥왕이 역으로 하류로 내려와 백제 측이 점령했던 한강 유역을 단독으로 모두 차지했다. 이에 관해 진흥왕이 백제를 기습적으로 무력점령했다는 것으로 다큐멘터리나 교양 서적에 적혀 있는 경우가 있지만[9] 《일본서기》를 근거로 '백제가 방어나 관리를 할 능력이 없어서 한강 유역에서 일단 철수했고, 신라가 이 틈을 타서 무력충돌 없이 접수했다.'는 설이 현재는 다수설이다. 일본서기뿐 아니라 국내 사서 삼국사기에서도 직접적으로 설명되진 않지만 한강 하류 영토를 신라가 차지했다는 부분에서 가질 취() 한자를 쓰고 있는데 공격을 해서 빼앗았다면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처럼 '공취(取)', '침()' 한자를 쓰는 게 자연스럽다는 근거도 있다.

고대사 전공이 아닌 임용한이 제기한 주장이었다지만 노태돈, 송호정, 주보돈 등이 2019년 공동집필한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에도 '백제가 포기한 후 신라 무혈입성'설이 실려, 임용한 교수만의 주장으로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성왕 문서로.

하지만 성왕은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지 석 달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다시 굳건히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후의 흐름을 봤을 때 백제 성왕이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딸 하나를 희생하는 전략을 쓴 듯하다. 또한 이는 당시 급변하는 신라 왕실의 상황을 염탐하려는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백제가 상부 덕솔(上部德率) 시나노 차주(科野 次酒)[10]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했고, 왜는 6월에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내주었으며, 554년 초에도 왜가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 문물을 가진 도래인들을 왜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신라와의 결혼동맹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뿐 은밀히 전쟁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일본서기》에서는 왜에 원군을 요청하고 왜가 병력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었지만, 백제 성왕도 이 시기 전쟁 준비로 연합군 편성을 진행했을 것이다.

당시 신라 조정은 정권 교체기였다. 진흥왕이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이 즉위했을 당시 나이는 7살에 불과했고, 지소태후와 대신들의 섭정이 있었다. 진흥왕의 유년기 동안 신라 조정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중에는 지증왕대부터 활약해온 명장 이사부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일찌기 우산국(울릉도)을 정복(512)하는 성과를 올린 이사부는 529년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 합병을 이끌었다. 540년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후 이사부는 군부 최고의 직위인 병부령직에 올라 군권을 장악했다. 이후 이사부는 548년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 550년 도살성, 금현성 전투의 승리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2.3. 신라 내부의 혼란과 백제의 기습[편집]


551년 마침내 성년이 된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 18세 청년 군주 진흥왕에게 노장으로 섭정 시절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이사부는 걸림돌로 여겨졌을 것이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진흥왕은 곧바로 이사부를 권력에서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552년 이후 사서에서 이사부의 이름이 사라짐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사부는 약 10년 후 진흥왕의 권력이 공고해진 후 다시 중용되었다. 어쨌거나 친정을 시작한 직후 진흥왕은 이사부 등 원로들을 배제한 채 군부를 재편하고 김무력 등 젊은 장수들을 중용했다. 김무력은 이사부의 부장이었지만, 사실 다소 껄끄러운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아들로 원래 가야 왕자였는데,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인물이 바로 이사부였던 것. 552년 이후 김무력은 신라군의 주력을 자주 지휘하게 된다. 553년 진흥왕의 명을 받아 한강 유역을 접수하고 신주를 설치한 장수 역시 김무력이었다.

이처럼 신라군의 정국이 급변함은 백제 성왕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전장에서 거의 50년을 활동한 불패의 명장 이사부가 사라진 것은 백제로서는 놓칠 수 없는 찬스였다. 신중하고 현명한 지소태후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이사부를 대신하여 신라를 이끌게 된 것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진흥왕과 용맹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장수 김무력이었다. 진흥왕은 성왕의 아들인 태자 부여창(훗날 위덕왕)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밖에서 볼 때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왕이 혈기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당대 최고의 명장을 좌천시킴은 거의 자멸에 가까운 행동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게다가 이사부를 대신하여 신라군을 이끌게 된 인물은 신라에게 반감을 품었을지도 모르는 가야 왕자 출신 김무력이었다.[11]

결국 결혼 동맹 직후인 554년 1월,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신라를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규모 미상의 대가야군과 왜군 1천 명도 합세했다. 마치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4세기 후반 무렵의 구도와 비슷했지만 신라는 그때의 약소국이 아니었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직전인 553년 12월에는 왕자 부여창이 세 나라의 연합군을 이끌고 백합야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400년ㆍ404년 때처럼 광개토대왕에게 당했던 것과는 다르다.


3. 전개[편집]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3.1. 백제의 진격과 김무력의 역습[편집]


파일:관산성전투_백제신라전황도.png }}}
붉은 색은 백제군 진격로
푸른 색은 김무력의 한강 점령군 진격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초기에 백제군은 신라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시키고, 불태우는 데까지 성공해 일차적으로 우세를 보였다. 한편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9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진성(珎城)을 공격해 남녀 3만 9천 명과 군마 8천 필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관산성 전투가 한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면 진성 전투는 9월에, 관산성 함락은 12월에 벌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윽고 백제군을 이끄는 태자 부여창은 신라 영역으로 더 진격해 들어가려 했고, 이를 백제의 늙은 대신이 반대했지만 부여창은 그 대신을 늙었다고 꾸짖은 뒤 공격을 강행해 신라 땅 안쪽의 구타모라(久陀牟羅)라는 곳까지 들어가 보루를 쌓았다.

그러나 김무력이 북쪽 한강 유역(신주, 新州) 점령군을 이끌고 내려와(한마디로 밀약을 맺은 고구려를 믿고 올인한 것이었다.) 전장에 도착하자 전세가 백제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의 군대를 지금의 충청도 지역으로 데리고 내려오면 당연히 북쪽의 고구려가 빈집털이를 할 것이므로 성왕은 한강 유역의 병력이 내려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고구려는 당시 나라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도 하고, 북방 돌궐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신라와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으며, 무엇보다 백제와 달리 고구려는 한강에 대한 비실효적 집착이 없었으므로[12] 김무력은 안심하고 북쪽을 비운 채 대군을 관산성 전역에 투입할 수 있었다.[13]


3.2. 건길지의 목이 노비의 손에 베이다[편집]


파일:attachment/gwansansung123.png}}}
현재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위성 사진
이에 성왕은 본인이 없는 전방에서 태자가 분전하는 상황을 만회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14]을 이끌고 밤을 틈타 신라군을 야습하려 한다. 신라는 사전에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온 나라의 군대를 모아서[15] 구천(狗川) 혹은 고리산(古利山)[16]에서 성왕 일행을 기습해 살해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일본서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의 긴메이 덴노 15년(554)조에 따르면 태자 여창[17]은 관산성에서 승리한 후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멋대로 신라령에 더욱 깊숙히 쳐들어갔다. 아무튼 여창이 직접 참전한 1차 관산성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성왕은 태자의 건강을 염려하여[18]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고 있었다. 즉 한국 사서의 기록에서 성왕이 신라군을 기습하고자 움직였다고 쓴 것과 달리, 일본서기는 성왕가 태자가 있는 본군에 합류하고자 움직였다고 하였다.

성왕은 신라군에게 사로잡혔고, 신라의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19] 도도(都刀)라는 자에게 살해당했는데, 《일본서기》에는 해당 장면이 좀더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등장 인물의 이름도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얼마 후 고도(苦都)[20]

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21]【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22]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일본서기》

요약하자면, 《삼국사기》는 성왕이 관산성 전투를 지휘하다가 신라군에게 습격 당해 살해됐다고 기록했지만, 《일본서기》는 관산성 전투는 태자가 이끌었고, 성왕은 태자의 승리를 격려하며 전후 수습을 하기 위해 호위병력 소수만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사로잡혔다고 서술했다. 신라군의 습격으로 포로로 잡혔을 거란 설을 지지하는 정황증거는 신라군이 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왕을 구원하러 백제군이 언제 들여닥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백제군을 물리는 조건만으로도 백제 왕권에 손상을 주고 성왕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기에 석방하겠지만 당장에 승리가 고픈 신라는 성왕을 죽임으로 전투는 이겼지만 이로 인해서 백제 지배층은 신라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다.[23]


3.3. 신라의 완승[편집]


성왕이 참수당하자[24] 잘나가던 백제 진영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틈을 타 신라군이 총반격을 시작하여 백제군을 대파하고 승리를 거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서는 백제가 좌평 4명과 2만 9600명의 전사자를 내는 대패를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삼국사기》<김유신 열전> 에서는 장수 4명을 포함해 1만명의 목을 벴다고 쓰여있다.[25] 보통 관산성 전투의 결과를 거론할 때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29,600명의 전사자를 냈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백제가 큰 패배를 당한 건 맞지만 백제군 전사자의 숫자가 일정 부분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여럿 있다. 부여창이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서, 백제의 동맹이던 대가야를 돕기 위해서 계속 병력을 동원한 것이 그 근거. 그러나 이런 후속 공격은 한국과 일본 기록을 종합해봐도 관산성 전투 때만큼 매섭지는 못했는데, 신라가 한강 유역을 영토로 굳히는 것을 막지 못했고, 대가야아라가야 같이 수백년을 이어온 가야 국가들이 관산성 이후 10년도 안 지나서 모조리 신라한테 흡수되었다. 이 말은 관산성 이후에 위덕왕이 동원한 병력이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며, 귀족들이 협조를 했을 리도 만무하니 국왕 직속의 중앙군이 관산성에서 적잖은 손실을 입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는 관산성 전투에서 태자 부여창도 포위당했다가 왜 지원군의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26]이 뛰어난 궁술로 분전해 신라군의 포위를 간신히 뚫고, 태자가 이 샛길로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이후 위덕왕은 탈출한 뒤 자신을 살린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를 칭찬해 '쿠라지노키미(鞍橋君)'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부여창이 아버지 성왕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받들기 위해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승려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일본서기에만 있는 내용으로, 일본서기는 백제군의 주체를 태자 부여창으로 보고 있으니 부여창이 반대하는 신하들을 비난하면서 출전을 강행했다가 아버지가 죽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자 신하들은 예전에 자신들의 말을 들었다면 성왕이 전사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이번에는 제발 말 좀 들으라고 부여창을 설득한다. 말이 좋아 설득이지, 귀족들의 협박이나 마찬가지다.[27] 관산성 전투의 참패로 백제 왕가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 결국 부여창은 귀족들의 뜻을 물리지 못한 채 즉위하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켰다.

4. 영향[편집]


관산성 전투와 후속 전투를 통해 신라는 한반도 중부 지방, 특히 한강 유역을 확고하게 차지했고, 이후 삼국 구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반대로 백제는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이때 입은 피해는 임진왜란 당시의 칠천량 해전에 비견될 정도.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남은 역량을 쥐어짜 계속 신라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이후 백제는 무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단 한번도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나제동맹은 관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파탄났으며 이후 약 100여년 간의 분쟁이 지속되면서 백제와 신라는 다시는 우호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다.[28]

또한 태자 부여창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출가 해프닝이 일어나는 등 왕가의 권위 또한 크게 떨어졌다. 이 권위 하락은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위례성을 빼앗긴 뒤 한동안 위태롭던 백제의 부여씨 왕권을 성왕이 다시 세워 놨으나, 이 패배로 인해 왕권 강화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대성팔족을 비롯한 귀족 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가와 귀족들의 대립은 계속되었으며, 이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못하며 간접적으로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기까지 했다.

거기다 성왕와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진행했던 가야에 대한 포섭도 이 전투 한방으로 물거품 되었다. 2차례의 사비회의안라회의가야백제의 영향력에 완벽히 들어오게 할 뻔 했으나, 성왕이 죽고 백제의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가야를 지켜줄수 있는 역량 자체가 되지 못했고 그 결과 신라는 관산성 전투 이후 주도권을 잡아서 백제의 후원으로 근근히 버티던 가야를 562년에 완전히 합병했다.[29] 곧이어 북쪽으로 진출해 오늘날의 함경도까지 북진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 차지한 황해 연안의 항구도시를 통해 백제나 고구려의 방해 없이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이런 구도가 이어졌다. 어떻게 보면 삼국시대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다.

성왕을 붙잡아 죽인 전공을 세운 장군 김무력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551년 단양 신라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했다. 거의 약 2년 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전공을 인정받은 듯하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교과서나 각종 시험 레벨에서는 555년 건립설이 정답이지만 학계에서는 555년설과 561년설, 568년설이 대립한다.[30] 관련 논쟁은 해당 문서로. 아무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창녕 척경비의 561년에도 잡찬이므로 8년 만에 3관등 승진라고 쳐도 상당히 빠른 승진임은 분명하다.


5. 의문점[편집]



5.1. 성왕과 50명의 병사들[편집]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이 보병과 기병 50기를 이끌고 기습을 하려다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전장에 국왕이 단 50명의 결사대를 직접 이끌고 나서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상식적으로 왕이 단 50의 병력으로 적진을 기습한다는 발상은 엄청난 리스크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오죽하면 조선시대에도 "김부식이 오천(五千)을 쓰려다가 실수로 오십(五十)이라고 쓴게 아닐까?"라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걸 다르게 해석해 백제군이 승리하자 승세를 타고 잔적을 소탕하려다 운 나쁘게도 김무력이 이끌고 온 신라 원군과 마주쳤다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의 군주인 성왕이, 그것도 3만여 명을 거느린 상황에서 고작 50여 명의 군사로 공격에 나섰다는 기록은 믿기 힘들다. 그래서 정황상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부여창이 승리를 거두자 성왕이 태자의 주력군에 급히 합류하기 위해 50명의 경호병력만 데리고 이동하다가 재수없게 신라군에게 걸려서 전사했다는 설이 더 신빙성있다 여겨진다. 밀착경호병력이라면 최정예 무사 50명 정도면 적당하다고 판단된다.

5.2. 왕을 죽인 자의 정체는?[편집]


성왕을 죽인 도도는 《삼국사기》에는 비장이자 고간이라고 나오지만 《일본서기》에는 자신을 천한 종이라고 지칭하며 이름 있는 왕을 죽여 이름을 높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두고 신라군에서 백제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일부러 노비 신분인 도도를 시켜 성왕을 참수했다는 말이 나오곤 하는데 신빙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여기서 도도가 자신을 노비라고 말함은 진짜로 신분이 노비란 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혈통이 고귀한 군주인 성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천한 신분임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 같다. 다른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도도의 신분이 비장, 즉 노비는 아니라고 기록했다. 일단 성왕이 죽자 백제 전체가 충격을 받았음은 사실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사마노(飼馬奴)' 고도라고 나오는데, '사마노'에는 '우마카이얏코(ウマカイヤッコ)'라는 훈이 달려있으며 '말을 관리하는 하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록상 적어도 장교쯤은 되는 계급으로 나오기 때문에 고도가 진짜로 천민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국왕임에도 적군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명예에 흠집이 난 성왕의 체면치레를 해주고자 본인을 일부러 낮춰서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본다면 《삼국사기》 기록과 동일해진다.

실제로 주보돈 교수는 『일본서기』에서 고간 도도에 대하여 "좌지촌의 사마노" 운운한 것에 대하여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고간 도도는 비교적 최근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변방 지역인 좌지촌에 속하는 지방 유력자이며, 그를 "사마노"라 일컬은 것은 좌지촌의 주민들이 국가에서 사용할 말을 양육하는 국역(國役)을 부담했던 이른바 집단적 예속민에 속하는 계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추정에 의거한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분명 곱씹어볼만한 가설이라 생각된다.

사마노라는 직책이 이름만 천하지 실제로는 상당한 지위가 있는 직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대에 군마는 중요한 군사 자산이어서 군마 관리자도 상당한 책임과 권한이 있는 직책이었다. 고대 중국의 대사마라던지, 조선 전기에 국왕을 경호하는 부대인 '겸사복'이라는 부대 이름도 말을 관리하는 하인이라는 뜻이고, 비슷하게 중세 유럽에서 국왕군 총지휘관 비슷한 지위였던 'constable'이나. 부르봉 왕조 시절 프랑스 근위군 고위직인 'Grand Écuyer de France'도 '국왕의 마굿간지기'라는 의미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인물이 사실은 고간(高干)의 지위에 있는 도도(都刀)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고우도도(高于都刀)이며 이는 《일본서기》의 고도와 같은 이름이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 《삼국사기》 판본들을 봐도 '간(干)'이 아니라 '우(于)'에 가까운 모습이다. 또한 고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일개 비장을 맡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5.3. 관산성의 위치[편집]


관산성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사기》 <잡지>와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서는 옥천군 삼성산에 있는 산성을 일반적으로 관산성으로 보지만, 근처 삼양리 토성 등 일부 성들도 관산성으로 불렀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어느 하나의 산성이 아니라 전체 산성을 통합하여 관산성이라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6. 창작물에서[편집]


  • 1997년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야마토 캠페인 동맹 지원(A Friend in Need)의 원래 버전은 야마토가 한반도에 진출해 백제를 도와 신라를 공격한다는 내용이었으며 관산성 전투를 배경으로 했다. 그러나 일본서기 원문을 가감없이 반영해 당시 임나일본부설로 큰 논란이 되었고 한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 불매운동 이야기까지 나와 결국 휴가(동음이의어)(日向)를 도와 규슈(九州)를 공격한다는 일본 국내 시나리오 내용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시나리오 내용만 바꾸었기 때문에 게임상에서는 두 세력이 여전히 조선(고조선, 즉 한국) 문명으로 등장한다. 한민족 열도진출설도 아니고...




7. 기록[편집]



7.1. 삼국사기[편집]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성왕 본기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7.2. 일본서기[편집]


15년[31]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간솔(下部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32]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33]과 아라(安羅)에 있는 왜신(倭臣)들, 미마나(任那)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34]들은 아룁니다. 시라(斯羅)가 무도(無道)하여 덴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코마(狛)[35]와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야케(彌移居)[36]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우치노오미(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시라(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덴노께서 우치노오미(有至臣)를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시라(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령(東方領)[37] 모노노베노 마가무노무라지(物部 莫哥武連)[38]를 보내 자기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카무무레노사시(函山城)[39]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우치노오미(有至臣)가 데리고 온 백성 츠쿠시노모노노베노 마가와사카(竹斯物部 莫奇委沙奇)[40]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덴노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시라(斯羅)뿐이라면 우치노오미(有至臣)가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코마(狛)가 시라(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41]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츠쿠시노시마(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국(臣國)을 돕고 또 미마나(任那)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명을 보내 미마나(任那)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毾㲪)[42] 1영, 도끼 300부, 사로잡은 성(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여창(餘昌)이 신라(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늙은 재상[43]

이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44] 드디어 신라국(新羅國)에 들어가 쿠다무라노소코(久陀牟羅塞)라는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新羅)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新羅)에서 사치스키(佐知村)[45]의 우마카이얏코(飼馬奴) 고도(苦都)【 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46]에게 "고도(苦都)는 천한 노비고 명왕(明王)은 뛰어난 군주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쿠니노코키시(國王)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서는 "명왕(明王)이 호상(胡床)[47]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서는 "신라(新羅)가 명왕(明王)의 두개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明王)의 뼈(두개골)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여창(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48]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 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餘昌)이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쿠라지노키미(鞍橋君)라는 이름을 주었다.【안교(鞍橋)는 우리말로 쿠라지(矩羅膩)라 한다】[49] 이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모두 멸하려 했으나 (신라의) 한 장수가 "안된다. 야마토(日本) 덴노가 임라의 일 때문에 여러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16년(555) 봄 2월. 백제 왕자 여창(餘昌)이 왕자 (惠)【왕자 혜(惠)는 위덕왕(威德王)의 아우다】를 보내어 "성명왕(聖明王)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15년에 신라(新羅)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덴노가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권제19 긴메이 덴노 15년(554년) 12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였고 추가 구원병을 요청함, 백제의 명왕은 죽고 여창은 퇴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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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에는 관산성 전투 및 성왕의 죽음이 554년 7월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일본서기》에는 554년 12월 9일에 함산성(관산성)이 함락되었고 성왕은 그 이후 시점에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뿐만 아니라 신라 기록을 참고했을 〈신라본기〉 진흥왕조에도 성왕을 죽인 때가 554년 7월이라 하였으므로 7월에 일어난 전투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는 묘사된 전투의 규모를 고려했을 때 관산성 전투가 한 번에 한 곳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몇 달간 계속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관산성과 같은 곳의 다른 이름인지 다른 장소인지 확실치 않지만 《삼국유사》에서는 9월에 진성(珎城)이라는 곳에서 백제군이 신라군을 패퇴시켰다는 기록이 있다.[2] 《삼국사기》 열전, 《삼국유사》, 《일본서기》에서는 관산성 이외에 구타모라(久陀牟羅), 구천(狗川), 고리산(古利山), 진성(珎城)이라는 장소도 전쟁 중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정확히 현재의 어느 곳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이들은 모두 관산성과 인접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物部 麻奇牟. 왜계 백제 관료로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관등은 시덕(施德). 백제의 지방 구분인 5방 중 하나를 통솔하는 동방령(東方領)의 관직을 맡았다. 《일본서기》에는 모노노베노 마가무노 무라지(物部 莫哥武連)라는 이름으로 이름 뒤에 '카바네(姓)'가 덧대어 기록되어 있다. 왜인 남성과 한인 여성이 결혼해 낳은 아이들을 한복(韓腹)이라 하는데 백제관료이자 한복(韓腹)인 미마사(彌麻沙) 또한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 인명에 오미(臣)의 카바네를 덧 붙이고 있다. 마가무 또한 한복(韓腹)일 가능성이 있다.[4] 筑紫國造. '우지(氏)'와 '카바네(姓)'이며(츠쿠시+쿠니노미야츠코), 이름은 안 써있다. 이 사람보다 먼저 등장한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가 있었는데 이름은 이와이(磐井)였으며, 가야를 도우러 신라를 공격하려던 일본에서 신라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5] 《일본서기》에는 고도(苦都)라고 기록되어 있다.[6] 장수 4명과 병력 10,000명으로 표기된 기록도 있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7] 백제는 512년부터 513년까지 가야 소국 6개를 병합하고, 신라는 529년부터 538년까지 탁기탄, 금관국, 탁순국을 차례로 병합하는 등 각자 가야 내부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함으로써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8] 고구려는 북방 초원의 유연과 동맹관계였는데, 한창 돌궐유연을 무너트리고 초원을 차지하던 상황이었다. 돌궐은 유연과 한편인 고구려도 공격했던 것이다.[9] 심지어 국사책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만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전투기록 자체가 없다.[10] 성씨가 일본계인데 일본계 백제인으로 보인다.[11] 참으로 얄궂게도 김무력은 신라의 대표적인 충신 및 명장으로 역사에 남았으며, 손자 김유신도 실권자 김춘추가 그에게 군 지휘권을 쥐어준 채로 중국과 일본을 다녀올 정도로 무한 신뢰하는 관계였다.[12] 백제 입장에서 한성은 과거의 수도이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는 명분론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다.[13] 고구려는 나중에 오히려 신라령 한강 하류를 통과해서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14]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보기 50'이라 적혀 그 50명 중 몇이나 기병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15]삼국사기》에 언급된, 금관가야 왕족 출신인 김무력이 신주(지금의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원군을 이끌고 온 것을 말하는 듯하다.[16]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조상 김무력의 전공을 설명할 때 성왕을 사로잡은 곳으로 언급된다.[17] 부여창, 후일의 위덕왕.[18] 아마도 태자 및 군사들을 치하하고 전후 수습을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19] 외위(外位)의 제3관등이다.[20]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간 도도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된다.[21] 주보돈에 따르면 이때 고도가 "맹세한 바를 어기면 왕이라고 해도 종놈한테 죽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신라의 국법" 운운한 부분에서 맹세한 바를 어긴다는 것에 대해, 신라에서는 법흥왕에 의한 율령 도입 이전부터 국가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뭔가 중대한 사안(강역 문제라던지)에 대해서 한 번 결정난 결과에 대해 '결정된 바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시키는 모종의 의식을 치렀는데, 그 근거로 봉평 신라비나 냉수리 신라비, 남산 신성비(새로 쌓은 성이 3년 안에 무너질 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 임신서기석(3년 안에 유교 경전을 통달하겠다는) 등을 근거로 그 '맹세'의 유효기간은 관습적으로 3년으로 통용되었을 거라고 해석했다(3년 안에 맹세를 어기면 죄를 받는다는 것). 관산성 공격 1년 전인 553년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는데, 백제야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앞서서 우호를 지속하려는 척 신라를 방심시키려는 책략이었겠지만 신라는 이걸 신라가 백제로부터 거의 빼앗다시피 한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에 대해 백제에서 더는 따지지 않을 것이고 우호도 지속하겠다는 표면상의 의미 그대로 해석했고, '어느 한 가지 맹세는 맹세한 시점으로부터 3년 동안 유효하다.'는 신라의 관습상 성왕이 계획대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한 것을 '먼저 맹세한 바를 어긴 것은 너희 백제다!'고 선언하면서 천한 노비인 고도가 한 나라의 군주인 성왕을 죽이는 합법적인 근거로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신라 입장에서 내세운 법적 근거인 셈이다.(출처: 주보돈 《백제 성왕의 죽음과 신라의 '국법'》).[22] 임용한은 저서 《전쟁과 역사》에서 여러 정황을 볼 때 이 말은 실제 성왕의 유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23] 외국의 비슷한 사례로 만치케르트 전투토목보의 변이 있는데 승전국이 상대국의 군주를 사로 잡았지만 어차피 상대방을 완전 점령할 능력이 없으니 포로로 잡은 군주를 돌려 보냄으로서 상대국의 정치적 혼란을 노렸다. 그 의도는 성공해서 동로마명나라 둘다 오랜시간동안 정치적 혼란에 빠져버렸다.[24] 일본서기에서는 신라가 성왕의 머리를 잘라 신라 궁궐 북청(北廳) 계단 밑에 묻고 머리 없는 몸만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일본서기》에서도 그냥 그런 소문을 기록한 책이 당시 일본에 있다는 정도로만 기록되었으므로 신빙성을 의심하는 학자들도 많다. 고대 사회에서 한 나라의 국왕은 매우 고귀한 사람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적국의 왕을 포로로 잡는다면 최대한 대우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일본서기》에서도 도도가 사로잡은 성왕에게 일단 절부터 했다. 죽이기 직전까지는 신라 측도 최대한 예우를 했던 사람의 시체를 죽인 이후에 모욕했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25]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 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26] 이 이름은 '우지(氏)'와 '카바네(姓)'이고(츠쿠시+쿠니노미야츠코) 이름은 안 써있다. 《일본서기》에는 이 사람 말고도 또 한 명의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인 이와이(磐井)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신라와 내통해 일본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즉 위덕왕을 살린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27] 비슷한 맥락으로 조선시대 왕들이 정치적 돌파 목적으로 하던 양위 선언과도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28] 왕을 포함한 고위귀족들이 상당수 전사함으로 백제의 지배층은 신라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고 서로 원한을 주고 받는게 반복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후대에도 뿌리박혀 후삼국시대에 백제를 자처한 견훤은 서라벌을 점령했을 때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서라벌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29] 섬진강 유역은 백제가 차지하였다.[30] 당연히 교과서와 시험에선 정답이 여러 개일 순 없으니 어지간하면 정설 하나만 제시한다. 그리고 진짜로 애매한 사례면 그냥 그 주제로 시험문제를 내지 않고, 내서 논란을 만들면 그건 좋지 않은 출제 예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북한산 순수비의 건립년도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교과서에 써 있는 555년이 정답으로 인정됐다. 그러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555년 건립으로 알고 있는 것이 좋다.[31] 554년[32] 음은 '몬시칸누'.[33] 명은 성왕의 이름인 명농의 축약.[34] 가야 소국들의 왕을 뜻하는 칭호. '칸키'라는 음이 달려있다.[35] 백제 측에서 부르던 고구려의 멸칭.[36] 가야의 왕실.[37] 백제의 지방 구분이던 5방을 통솔하던 방령 중 동방령. 치소는 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위치해 있던 득안성(得安城)이다. 모노노베노 마가무(物部 麻奇牟)의 관직.[38] 백제에 귀화한 일본계 백제인으로 추정하는 인물.[39] 함산성. 일본서기에서는 관산성(管山城)이 함산성으로 기록되었다. '카무무레노사시'라는 훈은 고대 일본어가 아니고 현지어를 옮긴 것이다.[40] 츠쿠시(筑紫, 竹斯)는 규슈의 지명으로 현 후쿠오카현(福岡県)의 일부에 해당한다. 모노노베(物部)씨의 츠쿠시 분파 출신인 듯 하다.[41]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한 것을 의미.[42] 직물의 일종.[43] 원문에는 '오키나도모(耆老)'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60세 이상의 신하를 뜻한다.[44] 일본서기의 윤색이다.[45] 현재의 충청남도 보은군.[46] 고도(苦都)에는 '코츠', 곡지(谷智)에는 '코쿠치'라는 음이 달려있다. 우마카이얏코는 말 키우는 하인이라는 뜻.[47] 걸상처럼 되어 있는 간단한 접의자.[48] 우지(氏), 카바네(姓)만 나와있고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49] 쿠라지는 존칭 접미사인 지가 붙은 어형이나 일본 측에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부연설명이 달려있는 걸로 볼 때 고대 한국어로 보인다. 쿠라지에는 '이로움을 얻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