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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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국제공항에 대한 내용은 간사이 국제공항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후한 말의 인물. 유비 휘하의 무장. 자는 운장(雲長), 본래 자는 장생(長生). 하동군 해현 사람.
삼국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지금도 역대 왕조를 비롯하여 민간에서도 굉장히 높은 인기와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무(武)와 충(忠), 의리(義理)와 재물(財物)의 화신(化神)으로 인지되며 오늘날까지도 신으로서 숭앙을 받는다. 그 명성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남다른 무용, 충의와 의리는 시대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의 장례는 일개 적군의 무장임에도 제후의 예로서 삼국시대의 주역인 조조, 손권에 의해 치러졌다. 또한 후대 왕조의 제왕들이 공자의 문묘와 함께 그의 무덤인 무묘에 그의 신위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기렸으며[2]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될 정도로 깊은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청나라 시기 관성대제(關聖大帝)로 추존되었으며 세간에는 삼계해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三界解魔大帝神位 願趁天尊 關聖帝君), 통칭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추존되었다.
2. 생애(정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관우/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연의[편집]
자세한 내용은 관우/삼국지연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역대 봉호[편집]
4.1. 중화왕조[편집]
4.2. 조선[편집]
기자[3] 와 함께 조선의 해외인물 추존 국왕이었는데, 왕이었던 적 조차 없는 인물로 꽤 이례적인 경우이다.
5. 가족 관계[편집]
- 정사에 기록된 인물
- 야사나 민간전승에 기록된 인물
6.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관우/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어느 나라 못지않게 중국 역시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고전 역사들에 바탕한 민족주의가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관우는 신격화될 만큼 오랫동안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유명한 위인이다. 물론 여기서의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창안되어 통용되는 서양식의 민족 개념이라기보다는 진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전한 때 정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또는 한족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관공'이라고 높히며 매우 존경한다. 사후 약 2천 년인 오늘날에도 관우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며,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국가를 따지지 않고 각종 게임, 영화, 드라마, 그리고 만화 등 여러 창작물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종교적으로 신봉할 정도다. 더불어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작품 곳곳에서 관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4]
평생에 걸쳐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천하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5] 믿었던 아군과 동맹에게 배신당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만 관우의 이름은 오히려 이천 년이 넘도록 생생히 살아남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추앙은 높아져 후대에는 공(公)에서 왕(王)을 넘어 주군 유비와 동급인 황제(帝)까지 추존되었고 급기야 신으로 모셔지기까지 했다. 보통 추존은 군주가 자신의 직계 조상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가문이 왕가가 아님에도 이렇게 후대에 격상된 경우는 굉장히 예외적이었다.[6] 이는 단지 충(忠)을 강요하고자 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 때문은 아니었다.
애당초 관우는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었다. 출생년도와 출신성분부터가 불명확했고, 전장에서는 종종 패배하는 한편 적에게 항복하기도 했었고, 협잡에 가까운 기만책도 썼었다. 오만한 성품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는 화목하지 못했고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것이 빌미가 되어 끝내 패망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든 결점을 뛰어넘을 영웅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주군 유비에 대한 그 끝 모를 의리와 이미 손아귀에 넣은 부귀영화를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내던지고 적수공권인 유비에게 돌아가는 관우의 모습은 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유비가 모든 인재와 병력을 뽑아간 이후에도 얼마 안 되는 남은 병력만으로 사력을 다해 형주를 지켜내는 모습은 실로 처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이었으며, 신념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였다.
관우는 결코 백전불패의 완벽한 명장이 아니었다. 때로는 패배했고, 때로는 실책도 저질렀으며, 최후의 순간에는 천하에 이름을 날리던 그도 일개 패장(敗將)에 불과했다. 하지만 평범한 대중이나 소시민들이 이상(理想)으로 생각한 삶의 태도를 그는 현실 세계에서 끝까지 지켜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끝내 굴복하지는 않았다. 강자에게는 도도했지만 약자에게는 너그러웠다. 하여 그의 비극적인 삶이 마침내 종막을 고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관우는 영원불멸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6.1. 시호 논란[편집]
관우의 시호 장목(壯繆)은 촉한이 추시한 것인데, 壯은 대체로 좋은 의미[7] 이지만 繆는 '명성과 실제가 부합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는 관우의 다음 세대 촉 인물인 진수의 풀이이며, 한서에서의 사용례, 서진에서의 사용례, 후한대 채옹의 풀이와도 일치한다. # 앞글자는 선시, 뒷글자는 악시가 섞인 케이스로서 촉한정통론 대두 이후 많은 논란이 되었다. 명나라 대 인물인 정진명(鄭振明)이 최초로 이를 穆[8] 의 통가자라 주장하였다. # 다만 진수의 풀이와 맞지 않을뿐더러, 같은 삼국지 내에서도 穆의 뜻으로 繆를 시호로 받은 다른 케이스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시호를 내린 유선이 개국공신들의 위세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을 견제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은인인 조운을 포함한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그들이 죽은지 수십년이 지나서야 내렸다. 촉한의 건국황제인 유비야 신하들과 백성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인물이라고 해도, 별 성과도 없던 2대 황제 유선 입장에선 개국공신들을 지나치게 띄워주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다른 예로 유선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신하였던 제갈량의 사당을 짓는 것을 금지한 적도 있어 오랫동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제갈량의 제사를 지난바 있다. 즉 유비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못한 유선은 제갈량이나 관우같이 존재감 큰 이들이 죽은 이후라도 백성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추앙받는 것을 견제했을 수 있다.
7. 인기[편집]
자세한 내용은 관우/인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말말말[편집]
漢末才無敵(한말재무적) 한나라 말기 그 재주 무적이니
雲長獨出群(운장독출군) 운장 홀로 무리 가운데 우뚝하네
神威能奮武(신위능분무) 신 같은 위엄 능히 무력을 떨치고
儒雅更知文(유아갱지문) 학자처럼 우아하며 학문도 뛰어나니
天日心如鏡(천일심여경) 그 마음 하늘의 태양처럼 빛나고
春秋義薄雲(춘추의박운) 춘추에 전할 충의는 높은 구름 같구나
昭然垂萬古(소연수만고) 찬란히 만고에 전할 테니
不止冠三分(부지관삼분) 그 옛날 삼분에서 으뜸일 뿐이랴
9. 미디어 믹스[편집]
자세한 내용은 관우/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관련 문서[편집]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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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우가 유비가 원소 휘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나무 그림과 시를 지어 유비에게 보냈다고 전해지는 시죽도(詩竹圖)다.[2] 따라서 문의 공자, 무의 관우를 같은 위치에서 본다는 의미로 공자의 묘역을 공림, 관우의 묘역을 관림이라 부른다.[3] 기자는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부정적 의견이 주류지만 조선시대 이전부터 기자조선의 초대 군주로 인식되어 왔다.[4] 한국에서는 관우를 군신(軍神)으로 모시는 관왕묘가 지어졌고, 숙종, 영조 등이 이에 참례했다. 숙종 때부터 민간에도 관우에 대한 숭배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관왕묘가 존재하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양 국가 모두 중국처럼 신격(神格)으로 보기보단 삼국지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인식하거나 무속의 경우 일종의 신령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5] 정확히는 북형주의 완전한 수복 이전이다. 관우가 오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위나라로부터 형주를 완전히 수복했다면 한중의 유비가 장안 방면으로 관중을, 건업의 손권이 합비 방면으로 회남을 치고 강하의 여몽과 육손은 여남으로, 최종적으로 관우 본인은 남양 방면으로 직접 중원을 쳐 4중 협공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감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6] 비슷한 케이스로 문성제로 추존된 공자나, 한국사에서는 후대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김유신이 있다.[7] 전쟁을 여러 차례 일으킴(兵甲亟作), 지혜롭고 굳세어 적을 굴복시킴(睿圍克服), 싸우다가 들판에서 죽음(死于原野), 무예가 있으면서 내세우지 않음(武而不遂) 등. 대표적으로 초장왕이 이 시호를 받았다.[8] 덕을 베풀고 의를 지킴(布德執義), 성품이 겉모습에 드러남(中情見貌) 등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