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장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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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황제 한 소열제 유비(劉備)의 최측근 장수인 관우와 장비의 용맹(勇猛)을 이르는 말로 매우 용맹한 장수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중국 청나라 시대 역사학자 조익(趙翼, 1727~1812)의 저서 22사차기(二十二史箚記) 제96장에 나오는 얘기로 조익은 24사를 검증하다가 한나라 이후 용맹한 장수의 활약상에 관우와 장비의 이름에 빗대는 것을 보고 문득 흥미를 느꼈는지 이런 사례를 모아 설명하였다.
2. 원문[편집]
한나라 이후로 용맹하다고 칭하는 자는 반드시 관우와 장비를 든다. 그런 용맹이 두 사람의 열전에 보이는 게 있다.
원소가 안량을 보내 백마에서 유연을 공격하게 하자,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유연을 구하게 했고, 관우는 안량의 깃발과 수레를 바라보고는 바로 말을 채찍질하여 만인 가운데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돌아왔는데, 원소의 장수 가운데 관우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1]
당양의 싸움에서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도망가면서 장비에게 기병 20명을 통솔하여 뒤를 막도록 하였는데, 장비가 물에 의지해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뜬 채 창을 비껴들고 "이 몸은 장익덕이다. 와서 함께 생사를 가름지을텐가!" 라고 외치니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2]
두 사람의 용맹함이 전기에 드러난 것은 이에 그치지만, 당시 그 위명에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위나라의 정욱은 "유비는 영웅의 명성이 있고,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을 대적할 수 있다"고 말했다.[3]
유엽은 조조에게 한중을 취한 기세를 타고 나아가 촉을 취하도록 권하며 "만약 조금이라도 늦추면, 제갈량은 치국에 밝아 재상이 되고, 관우와 장비는 용맹하게 3군을 거느려 장수가 될 터이니, 곧 범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4]
이는 위나라 사람이 그 용맹에 감복한 것이다.
주유는 은밀히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유비는 효웅의 풍채이며 관우와 장비라는 곰·호랑이같은 장수가 있으니, 반드시 오래도록 굽혀 남에게 쓰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5]
[6]이는 오나라 사람들이 그 용맹에 감복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진(晉)의 유하가 매번 적을 공격할 때마다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고 날카로운 공격을 꺾으니, 기주[7]
에서는 그를 관우·장비와 비교하였다.[8]부진[9]
에서 염부·양수를 장현정에게 사신으로 보내 본국 장수를 자랑하면서 왕 비[10] ·등강이라는 자들이 있는데 관우·장비와 같은 사람들로서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다고 했다.[11]독발녹단[12]
이 송창에게 인재를 구하자, 송창이 "양숭·조창은 무예가 관우·장비와 같다"고 말했다.[13]이상은 근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조흠이 그를 중히 여겨 "이현서는 오늘날의 관우·장비이다"라고 말했다.[14]
는 모두 용맹과 힘을 가지고 있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관우·장비에 견주었다.[16]노상[17]
이 반란을 일으키자. 심경지는 설안도에게 그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설안도가 노상을 바라보다 곧장 말을 달려 크게 소리지르며 바로 그를 찌르니, 노상이 응수하였으나 거꾸러졌으며, 당시 사람들은 관우가 안량을 벤 것도 이거보단 덜 지릴 듯이라고 하였다.[18]제의 원력생은 주먹과 용기가 유달리 뛰어났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관우·장비에 견주었다.[19]
북위의 양대안은 용맹하고 과감하여, 세상에서 관우·장비가 그보다 낫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20]
최연백이 막절념생을 토벌하여 이기고 나자, 소보인이 "최공은 옛날의 관우·장비이로다" 하였다.[21]
를 정벌하자 위파호 등 십만의 무리가 와서 맞섰는데, 어떤 서역사람이 있어 화살을 헛되이 쏘는 법이 없었다. 오명철이 소마가에게 이르기를 "만약 저 호인을 죽이면 적군은 기가 꺾일 것이다. 자네는 관우·장비의 명성이 있으니 안량을 벨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소마가는 바로 진영을 나가서 작은 창을 던져 그를 죽였다.[23]
이상은 모두 각 사서에 보이는 것이다.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의 이름은 단지 같은 시대 사람들만 보고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후 수백 년 동안에도 역시 두려워하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위세와 명성이 드리워진 바가 지금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으니, 하늘이 낳은 신묘한 용맹이 진실로 헛되지 않다.
3. 관우·장비에 비견된 장수들[편집]
이십이사차기에서 조익이 언급한 관우와 장비에 견주는 무인은 총 13인이다.
- 동진(晉)의 유하(劉遐, ?~326)
- 성한(成漢)의 이상(李庠, 247~301)[24]
- 전진(前秦)의 부비(苻飛, ?~?), 등강(鄧羌, ?~?)
- 남량(南凉)의 양숭(梁崧), 조창(趙昌, ?~?)
- 송(宋)의 설동(薛彤), 고진지(高進之, ?~436), 설안도(薛安都, 410~469)
- 남제(南齊)의 원력생(垣曆生)
- 북위의 양대안(楊大眼, ?~518), 최연백(崔延伯, ?~525)
- 진(陳)의 소마하(蕭摩訶)
마이너하게 감녕과 장료에 비교되기도 한다. 이존효가 감녕과 장료와 비교된 장수.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혼다 타다카츠의 용맹을 보고 그를 장비에 비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