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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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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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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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시조 논란
3. 인물
4.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광주광역시를 관향으로 하는 대한민국 성씨이다.

광산(光山)은 광주(光州)의 다른 이름이다. 이 때문인지 일부에서는 광주 이씨(光州 李氏)라고 하기도 한다.[1] 경기도 광주시를 본향으로 하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가 따로 있다.

순백(珣白), 숙백(淑白), 승백(升白) 세 형제를 중시조로 하여 상서공파(尙書公派), 한림공파(翰林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2]로 크게 나뉜다.

송강 정철에게 워낙 크게 당해서인지, 아직도 광산 이씨 출신들은 제사 음식을 준비하며 고기를 칼로 다질 때 정철 정철 하며 조상대대로 내려온 억하심정을 풀고 산다고.

2. 시조 논란[편집]


시조가 태봉의 왕 궁예의 첫째 아들 신광의 후손 이종금(李宗金)인지 고려 말 광주 지역의 호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정(李靖)인지 광산이씨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광산 이씨의 대종(大宗)인 상서공파 측에서는 시조를 향공진사(鄕貢進士)를 지낸 이정을 시조로 삼고 있으나, 소수파인 한림공파(대구고령에 집성촌이 있다)에서는 시조를 이종금으로 삼고 있다. 광산이씨종친회의 기본 입장은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정을 시조로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가족을 전부 주살(誅殺)해서 자손이 남아있지 않았던 궁예에게서 이종금이라는 후손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다.[3] 그렇기 때문에 신라계 김씨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4]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태봉왕 궁예의 후손 셋을 광주와 전주에 옮겨서 그 지역 향역을 맡아 살도록 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광산 이씨 상서공파와 한림공파는 본관만 같고 다른 집안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광산 이씨 상서공파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은 O2a1b1a1a1a(O-F11, 옛 O3a1c1)이고, 한림공파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은 O1b2a1a2a1(O-CTS723, 옛 O2b1b)이다. 두 하플로그룹은 지금으로부터 약 3만 500년 전에 갈라졌다. 광산 이씨 족보에는 상서공파와 한림공파가 13세기 말, 지금으로부터 약 750년 전에 갈라진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 두 파가 사실상 남남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쯤 되면 두 공파의 문중 회장들이 모여서 본관을 둘로 쪼개야 할 것 같다.[5] 게다가 상서공파 일부는 하령군의 후손 중 일부가 계유정난 때문에 화를 피해 광산 이씨로 편입한 경우도 있어서 더더욱 복잡하다.[6]

3. 인물[편집]


  • 이선제(李先齊) - 조선 전기의 문신.
  • 이발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남계 동인의 정신적 지주로 당대의 석학이었으나, 송강 정철과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기축옥사 때 주살당한다. 본인은 물론 집안 자체가 멸문당하는데, 호남의 벌열로 꼽혔던 광산 이씨가 조선 중기 이후 몰락하게 된 결정적 이유다. 얼마나 한이 맺혔던지 전라남도에 세거한 광산 이씨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 이라 외칠 정도라고 한다.그 일 때문에 정씨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경채 - 독립운동가.
  • 이국헌
  • 이병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 때 청와대 비서관, 노무현 대통령 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 이연술 - 호남의 거상. 화니백화점 창업주 겸 삼양시내버스(현 을로운수) 창업주.
  • 이영수 -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 이호철(배우)
  • 형진(디그니티)

4.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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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면 조선 중기인 17세기 중반 조종운(趙從耘)이 편찬한 통합보(統合譜)인 씨족원류(氏族源流)에 광주이씨(光州 李氏)라고 기록돼 있다.[2] 철종 때 편찬된 광산이씨대동보 이후로 후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3] 물론 궁예가 죽인건 기록에 남은 두 아들이지 기록되지 않은 손자들까지 모두 죽였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궁예의 후손이 없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쪽 설에 의하면 궁예는 경문왕의 아들이며 첫째 신광의 후손이 광산 이씨가 됐고 둘째 청광의 후손이 순천 김씨가 되었다고 하고 순천 김씨 쪽의 설에 의하면 궁예는 경문왕이 아닌 신무왕의 아들이라고 한다.[4] 반면에 경주 김씨쪽 족보에서 나온 신라계 김씨 동원분관분성록에는 광산 이씨도 등재시켜 놓았다고 한다.[5] 광산 이씨의 경우가 특별한 건 아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발생하였고 시작부터 마을이나 부족 단위로 같은 성씨를 쓰기도 했고 천 년 이상의 긴 세월을 거치면서 온갖 혼란을 겪어왔음은 물론, 조선 후기 신분제도의 붕괴 때 군역을 피하기 위한 족보매매도 흔했다. 그래서 Y염색체 하플로그룹 검사시 아주 극소수만 보유하고 있는 성씨가 아닌 이상 한 가지 하플로그룹만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6] 하령군의 손자이며 여양군 이승윤의 아들인 이소조와 이계조는 광산 이씨 상서공파 중시조 7세로 나오며, 계유정난에 화를 입었고 장릉(莊陵) 배식단에 모셔졌다는 내용이 전주 이씨 족보와 광산 이씨 족보 양쪽에 다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