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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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라남도 광산군 휘장(광주편입 전까지 사용).jpg

광산군의 휘장
광주직할시 편입 이후에도 광산구 휘장으로 한동안 사용했다.


전라남도 폐지된 행정구역

파일:광산군 CI.svg
광산군
光山郡
Kwangsan County[1]





군청 소재지
송정읍 송정리 833-8 -> 송정시 중앙동 833-8[2]
광역자치단체
전라남도
하위 행정구역
1 9
면적
252.81㎢[3]
285.54㎢[4]
인구
136,584명[5]
인구밀도
478.34명/㎢[6]
현재 인구
497,049명[7]
398,116명[8]
지역전화
062
존속기간
1935년 10월 1일 ~ 1987년 12월 31일

1. 개요
2. 역사
3. 광주 편입 이후
3.1. 인구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895년 광주군이라는 명칭으로 설치되어 1935년 광산군으로 개칭한 뒤 1988년 광주직할시송정시와 함께 편입되어 사라진 전라남도의 폐지된 행정구역.


2. 역사[편집]


광산군은 1935년 10월 1일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면서, 광주군의 잔여지역이 광주의 조선시대 별호인 '광산(光山)'을 따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출범하였다. 당시의 광산군은 극락면·대촌면·동곡면·비아면·서방면·서창면·석곡면·송정면·임곡면·지산면·하남면·효지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1949년 8월 14일에는 나주군에서 평동면·삼도면·본량면을 편입하였으며, 이때 군청이 송정읍 송정리로 옮겨졌다. 1955년까지는 충청북도 청원군[9]처럼 구 광주시를 100% 둘러싸는 도넛 형태의 행정구역이었다. 여담으로 군청 자리에 현재 광산구청이 그대로 위치해 있다.

1955년 극락면[10]·서방면[11]·석곡면[12]·효지면[13]이, 1958년 지산면[14]·대촌면·서창면이 광주시에 편입되었다. 1963년 대촌면·서창면이 도로 광산군으로 환원된 이후, 송정시가 출범하는 1986년까지 유지되었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광산군 송정읍도 인구 50,000명을 넘기면서 송정시로 승격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송정시와 광산군은 경산시, 양산시와 비슷하게 광주직할시 외부의 위성도시 역할을 할 예정이었으며, 광주로의 편입은 장기적으로 계획되고 있었다.[15] 한편 당시 송정시청사는 옛 송정읍사무소를 그대로 이용했고 지금의 광산문화예술회관 자리에 있었으며, 송정광산교육지원청[16]은 지금 구청 앞에 있는 2층 규모의 흰색 떡갈비집 건물이었다.


3. 광주 편입 이후[편집]


하지만 송정시와 분리된 지 1년 2개월만에 1988년에 광산군·송정시광주직할시에 편입되었다. 참고로 송정시의 광주 편입은 지금까지도 도 산하 시가 인접한 특별시광역시에 병합된 유일한 사례다.[17][18][19] 이때 광주로 편입되지 않았더라도 광산군과 송정시는 1995년 전국적인 도농통합의 일환으로 광주광역시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다만 1995년 도농통합 때 편입됐다면 지금처럼 舊 광산군 전체가 통째로 광산구가 되는 것이 아닌 송정시를 송정구로 하고 나머지 광산군 지역은 그대로 광산군으로 편입됐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94년 1월99년 10월 두 차례 광산군 환원운동이 있었지만 광산군으로 환원에 대한 방식도 전라남도로의 환원이었으며 광주광역시의 무관심과 소극적인 행동으로 끝내 무산되면서 부산, 대구, 인천, 울산, 세종과 달리 행정구역상 도농복합시가 되지는 못했다.

광산군+송정시 편입과 동시에 해당 지역에 광산구를 설치하였는데, 이 때문에 현재 출범한 지 2년 만에 도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송정시라는 지명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농담이 아니라 몇몇 현지 사람들은 송정리가 시인 적이 있었냐고 되묻는 정도다.[20][21] 광주 편입이 확정되면서 장기계획들의 우선순위가 변하였다. 이때 계획된 것들이 하남공단 확장, 광주와의 간선도로[22] 건설 및 확장, 2순환로 건설, 경전선광주역 이설 계획, 지하철 계획 등이 이때 이루어졌다. # 하남공단 확장과 하남대로는 급하게 진행되어서인지 90년대 초에 완료. 경전선 이설은 2000년에 완료. 광주 도시철도 1호선, 무진대로, 광주제2순환도로의 완전개통은 각각 2008년, 2007년, 2009년이다. 그리고 광주역 이설은 아예 나가리났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미뤄진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첨단산업단지 건설과 상무대 이전계획이 90년대 초에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SOC 계획은 이를 무시한 채 기존 계획을 그대로 들이부은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포화상태였던 구시가지를 위해 광주 외곽지역을 개발할때 이를 연계하지 못한 건 실수라고 할 수 있다. 광산구의 인구가 두 배 이상 증가하는 동안 광산구에 2호선을 들여놓겠다고 선언한건 2010년대 들어서였다. 이렇듯 기존의 광주 구시가지와 광산구는 지역적 동질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광산구 출범 이후 광산군의 들은 전부 출장소로 전환되었으며, 1995년에 대촌출장소가 남구, 서창출장소가 서구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출장소는 1997년~1998년에 전부 으로 전환되어 지금에 이른다.

광주의 다른 지역과는 과거에 행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광주 편입 전까지 읍면단위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지명 등에서 예전 행정구역명을 쓰는 것을 자주 보고 들을 수 있다. 광주 편입 이후에도 송정읍 송정리였던 송정동 일대는 송정리, 비아면 신가리, 신창리, 수완리였던 신가동/신창동/수완동 일대는 신가리로 불리기도 했으며,[23] 첨단지구, 신창지구, 운남지구, 수완지구 등의 신도시 지역을 제외하고는 옛 면 단위, 즉 현재의 행정동(동사무소) 이름으로 불리는 편이다.[24] 태어나면서부터 광산구민, 아니 광주광역시의 대다수 2010년대청소년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불리는 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리’라는 명칭을 흔히 사용하는 곳은 ‘송정리’가 거의 유일한 편.[25] "난 송정리 살아"나 "떡갈비는 송정리에...", "송정리역에서 KTX타고..." 등의 용례로 흔히 쓰인다. 광산구 사람이든 타지 사람이든 '송정동'이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다수가 송정리 라고 한다. 특히 구청 근처의 전통시장에서 ‘송정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송정리 이외의 다른 시내 지역들은 시 당국에 의해 계획적으로 개발되었기에 주로 지구 단위로 나뉘어 불린다. 쌍암동과 월계동, 산월동은 한데 묶여 첨단지구로 불리며, 장덕동은 혼자서 따로 동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는 없고 수완동과 묶여 수완지구로 불리워진다. 신가동은 심지어 같은 동이어도 선창초등학교 부근은 신창지구, 선광학교 부근은 신가지구, 임방울대로 부근은 수완지구, 동 중앙부 주택단지는 신가동으로 다르게 불린다(...).

3.1. 인구[편집]


전라남도 광산군 인구 추이
(1966년~1985년)
1966년 128,740명}}}
1970년 131,825명}}}
1975년 130,206명}}}
1980년 128,896명}}}
1985년 136,584명}}}
인구는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5만 명
통계청 인구총조사


1985년 읍면별 인구 통계

[ 펼치기 · 접기 ]
송정읍 60,104명}}}
비아면 14,614명}}}
서창면 14,468명}}}
대촌면 11,072명}}}
평동면 8,876명}}}
삼도면 6,175명}}}
본량면 5,565명}}}
임곡면 5,372명}}}
하남면 5,321명}}}
동곡면 5,017명}}}
1985년 기준 통계청 인구총조사, 그래프 최대 값은 5만 명


1980년 읍면별 인구 통계

[ 펼치기 · 접기 ]
송정읍 50,771명}}}
서창면 12,946명}}}
대촌면 12,392명}}}
비아면 10,194명}}}
평동면 10,001명}}}
임곡면 7,316명}}}
삼도면 7,208명}}}
본량면 7,002명}}}
하남면 5,554명}}}
동곡면 5,512명}}}
1980년 기준 통계청 인구총조사, 그래프 최대 값은 4만 명


1975년 읍면별 인구 통계

[ 펼치기 · 접기 ]
송정읍 41,827명}}}
대촌면 14,142명}}}
서창면 13,411명}}}
평동면 11,204명}}}
비아면 10,234명}}}
본량면 9,054명}}}
임곡면 8,870명}}}
삼도면 8,752명}}}
하남면 6,627명}}}
동곡면 6,066명}}}
1975년 기준 통계청 인구총조사, 그래프 최대 값은 4만 명


1970년 읍면별 인구 통계

[ 펼치기 · 접기 ]
송정읍 37,721명}}}
대촌면 14,901명}}}
서창면 12,688명}}}
평동면 12,058명}}}
비아면 10,706명}}}
삼도면 10,686명}}}
본량면 10,403명}}}
임곡면 8,966명}}}
하남면 7,149명}}}
동곡면 6,527명}}}
1970년 기준 통계청 인구총조사, 그래프 최대 값은 4만 명



4. 관련 문서[편집]


[1] 폐지 당시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기준[2] 현 광산구청.[3] 1987년[4] 1985년[5] 1985년[6] 1985년[7] 2023년 1월, 광주광역시 광산구남구 대촌동, 서구 서창동, 금호동, 풍암동의 인구를 합친 것.[8]송정시 지역의 현재 인구를 제한 것.[9] 2014년 청주시와 통합[10] 現 북구 동림동·운암동, 서구 동천동·상무동·유덕동·치평동·화정동[11] 現 북구 두암동·매곡동·문화동·문흥동·삼각동·신안동·오치동·용봉동·우산동·중흥동·풍향동[12] 現 북구 석곡동[13] 現 남구 봉선동·송암동·주월동·효덕동, 동구 지원동·학운동[14] 現 북구 건국동·양산동·일곡동[15] 반면에 비슷한 시기인 1981년에 시 승격한 경기도 광명시(당시 시흥군 광명출장소)는 원래는 잠정적인 서울 편입 예정지로서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주거지로 개발되어 서울 편입이 검토되었으나, 사실상 서울 편입 배제 차원에서 광명시로의 시 승격이 이루어진 케이스다.[16] 현재 상무지구에 있는 광주광역시 서부교육지원청의 전신이다.[17] 광산군 편입을 대전시대덕군 편입과 같이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보기에는 광주와 광산의 동질감은 매우 작았다. 대덕군의 경우 대전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편입되었고, 대덕군보다 먼저 대전에 편입된 유성회덕의 경우 이미 대전 생활권에 깊숙히 편입되었던 상태였다. 반면에 광산군은 광주시가 먼저 직할시가 되고, 그 이후에 편입된 경우로 생활권이 별로 겹쳐치지 않았다. 당시 광주시는 현재의 무등경기장 지역이 시 외곽일 정도로 시세가 작았으며, 광주시와 광산군은 영산강을 경계로 동서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광산군 지역은 송정리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형상이라, 충청북도 구 청주시 외곽을 빙 둘러쌌던 청원군과 비슷하게 대전시 외곽을 빙 둘러싸다시피 해서 군의 중심을 할만한 곳이 없는 대덕군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외에도 송정시와 광주직할시 승격은 같은 날(1986.11.1)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시에 외부에서 보기에도 두 지역의 동질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증거다. 물론 광산군 자체가 일제강점기1935년 광주군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면서 광주군의 잔여지역이 개칭된 것이므로 광주시와 광산군이 역사적으로 같은 동네인 것은 사실이나, 현재처럼 통학, 통근 등 각종 생활권이 하나로 묶이기 시작한 것은 광주시가 확장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부터다.[18] 광주의 송정시, 광산군 편입은 대전의 대덕군 편입보단 대구달성군 편입, 울산울주군 통합과 더 유사하다. 달성군도 현풍권(구 현풍군 지역)을 제외하고 대구와 역사성을 공유하지만 대구와의 동질감은 대구와 직접적으로 접한 화원, 다사, 가창 등을 제외하면 그렇게 크지 않았고, 울주군 역시 언양읍 중심 서부권은 울산과의 동질감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19] 1995년 행정구역 대개편 때에는 경산시인접한 광역시에 병합된 두 번째 도시가 될 뻔했다. 김포시시흥시도 이 시기에 인천으로 편입될 뻔했으나, 당시의 김포시는 김포이었다.[20] 이 때문에 송정시와 광산군의 6자리 우편번호 또한 흑역사가 되었다. 1986년 체신부(현재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우편번호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1988년 2월 1일부로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511, 512로 시작했던 6자리 우편번호가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두 지역이 1988년 1월 1일에 편입돼버렸고 그걸 모른채 우편번호부까지 인쇄 완료. 결국 다음날 관보에 정정된 우편번호가 실리면서 지금처럼 506으로 시작하는 우편번호를 사용하게 되었다.[21] 다만 아래에 나와있듯 송정리라는 이름은 흔히 사용되며, 과거 송정시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다. 원동성당의 '원동'은 송정1동의 송정시 시절 명칭이다.one동 신동사거리 뒷편의 호남동은 송정3동(인구감소로 송정2동에 흡수)의 옛 이름.[22] 하남대로, 무진대로[23] 다만 이것도 2010년대를 지나면서 송정리 정도를 빼면 사라졌다.[24] 비아, 하남, 본량, 임곡, 동곡, 삼도, 평동[25] 굳이 꼽자면 비아동 지역이 현재까지도 광산군 시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비아리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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