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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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무진도독성
2.1. 기록
2.2. 위치, 규모
2.3. 구조
2.4. 무진고성
3. 광주읍성
3.1. 역사
3.2. 구조
3.2.1. 성벽
3.2.2. 건물
3.2.3. 도로
3.2.4. 성저
3.3. 광주읍성과 방위



1. 개요[편집]


조선 전라도 광주목의 중심지였던 현 광주광역시 동구에 있었던 읍성이다. 극히 일부만이 남아서, 1994년에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0호 '광주읍성 유허'로 지정되었다.


2. 무진도독성[편집]


무진도독성(또는 무진도독고성)은 광주읍성의 전신이 되는 통일신라 시대의 토성이다. 이름처럼, 통일신라 무진주 도독의 치소가 있었다. 7세기 후반에 무진주가 설치된 후, 8세기 말~9세기 초에 건설되어 통일신라 말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최영주,2021]


2.1. 기록[편집]


통일신라 기록에는 문무왕 또는 신문왕 재위기에 무진주를 설치해 도독을 파견했다고 하지만, 성에 관한 언급은 없다. 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1452),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여지도서(1765), 광주목지(1798), 대동지지(1866) 등에 언급되어 있다. "무진도독 때의 옛 토성이 있는데 둘레가 2,560보이다."[세종실록지리지] "무진도독고성: 현의 북쪽 5리에 있으며, 토성이고, 둘레가 32,448척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2.2. 위치, 규모[편집]


위치는 광주 원도심인 금남로·충장로 일대로 추정된다.[임영진,2008][조광철,2015][도도로키,2020][최영주,2021] 도독성에 관한 기록,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우물지·기와 조각 등 유물, 방리제에 따른 격자형 도로망, 일제강점기 지적원도·지형도에 나타난 흔적 등을 근거로 한다.

'무진도독성이 현의 북쪽 5리에 있다'는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무진고성이 무진도독성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광주읍성을 기준으로 한 방위 개념(참조)을 생각하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같은 기록에서 무등산은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고 하고, 경양역(현 무등산자이&어울림)은 동쪽 8리에 있다고 한다. 무진도독성이 무진고성을 칭하는 것이라면, 동쪽이라고 기록하지 북쪽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같은 기록에서 십신사(十信寺, 현 임동오거리 근처)는 북쪽 5리에 있다고 한다. 당시 그 근처에 옛 토성이 남아있었다는 추정으로, 무진도독성이 북쪽 5리에 있다는 기록을 간단히 해석할 수 있다.

여러 기록을 고려했을 때, 무진도독성의 규모는 둘레가 6,771m로 추정된다.[임영진,2008] 광주읍성은 2,500m 정도 되는데, 고려 말 건설된 광주읍성이 무진도독성보다 크기가 작은 것은 고려시대에 중심지가 나주로 바뀌어 다소 쇠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최영주,2021]


2.3. 구조[편집]


파일:무진도독성_도도로키2020.png
파일:무진도독성_최영주2021.png
[도도로키,2020]
[최영주,2021]
두 지도 모두 조선총독부 제작 광주지형도(1917년, 1:10000)를 바탕으로 하여 복원.
  • 성벽
    • 성벽: 기록에 따르면 토성이다. 무진주의 방리를 아우르는(동서로는 동계천광주천 사이, 남북으로는 남동에서 북동까지) 나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도도로키,2020][최영주,2021]
    • 해자: 동계천광주천이 해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도도로키,2020]
  • 구조: 현재는 단편적 정보만 남아 있을 뿐, 격자형 도로망 위에 경작지, 주거지, 관아, 장터, 종교시설 등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 도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방리제를 시행했는데, 이 당시 형성된 격자형 도로망은 지금도 광주 원도심에 남아 있다.
      • 충장로: 1994년 광주일고 신축공사 전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이 건물이 충장로와 평행하게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장로가 이 시기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임영진,2008]
      • 주작대로: 현 충장로와 금남로 사이에 폭이 좁은 구획이 있는데, 주작대로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도도로키,2020] 비슷하게 남원경(남원시), 사벌주(상주시) 방리구획에도 중앙에 폭이 좁은 구간이 확인된다. 마찬가지로 주작대로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황인호,2014]
    • 관청: 아시아문화전당 부지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일대에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최영주,2021]


2.4. 무진고성[편집]


무등산 장원봉·잣고개 일대에 있는 산성.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 말에 건설되어, 통일신라 말기에 수축되었고, 고려 후기까지 사용되었다.[임영진,2008]

무진고성이 무진도독의 치소(무진도독성)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박태우,1987] 그러나 1988-1989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도독의 치소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입지와 내부 시설을 보면 무진고성에 행정 기능이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우며, 한반도의 여러 고대 성이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구조를 갖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무진고성은 무진도독성의 배후산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임영진,2008]


3. 광주읍성[편집]


사이버 광주읍성

3.1. 역사[편집]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조정규,2013] 최초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1452)이다. 이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여지도서(1765), 대동지지(1866), 광주읍지(1899)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읍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가 972보이다."[세종실록지리지] "돌로 쌓았다. 주위가 82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백 개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다른 읍성들처럼 조선 후기까지 전해지다가 1908년부터 1918년 사이에 항일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철거되어 그 자리에는 도로가 나게 되었다.[1]

1992년 옛 전남도청(現국립아시아문화전당)주차장 부지정리 사업 도중 성벽과 토축이 발견되었고, 1994년 4월 13일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 20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2007년에도 발굴 조사가 이어졌다. 문화전당 건설 중인 2014년 성벽 유허를 복원했다. 문화정보원 위쪽, 동구청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다.

2001년 광주광역시 동구청은 광주읍성 및 성문 유허 복원사업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남문 진남문에 대한 문헌 및 현지조사를 전남대학교에 의뢰했고 진남문과 양쪽 약 30m 성곽을 복원하기 위해 예산(문화재청 지원40억원, 시·구비 30억원)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대선 공약으로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건립이 거론되며 흐지부지되었다. 2011년에는 예산 622억을 들여 4대문 및 체성을 복원한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복원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3.2. 구조[편집]


19세기 후반 광주읍성 추정
읍성 내부는 주로 행정기능, 외부는 종교·농업·상업 기능이 수행되었다. 성 내부에는 관청이 남·동문 인근에 분포했다. 성내 주거지는 북·서문 사이, 지금의 충장로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다. 성저에는 북문 밖, 서문 밖, 공북루 인근에 주거지와 장터가 있었으며 동문과 남문 밖에는 경작지가 있었다.[조정규,2013][전경숙,황영산,2015]


3.2.1. 성벽[편집]


  • 성벽: 둘레는 약 2,500m, 높이는 약 2.8m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꽤 큰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2] 법정동 구획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충장로3가-금남로3가-궁동-대의동-광산동-황금동이 둘러싸는 영역이다.
  • 해자: 성벽을 둘러싸는 해자가 있었다. 광주천 조탄보를 통해 물을 끌어왔다.
파일:공북문.jpg
1900년대 공북문(충파 앞)
  • 공북문(拱北門, 북문): 충장로3가 충파(충장치안센터) 앞에 있었다. 광주폴리 99칸이 설치되어 있다. 한양으로 연결되는 관문이기 때문에 가장 위상이 높은 정문으로 인식되었다.[전경숙,황영산,2015]
  • 서원문(瑞元門, 동문): 대의동, 제봉로와 제봉로140번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광주폴리 서원문 제등이 근처에 있다.
  • 진남문(鎭南門, 남문): 문화전당 부지 안, 문화전당역 1번 출구 근처에 있었다.
  • 광리문(光利門, 서문): 황금동, 광주폴리 기억의 현재화가 성문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


3.2.2. 건물[편집]


파일:광산관_1910.jpg
파일:황화루_1900.jpg
1910년대, 회의실과 광주군청으로 개조된 광산관(왼쪽)
광주군청으로 사용된 광산관 동익헌(오른쪽)
1900년대 황화루
  • 객사 광산관(光山館): 충장로1가 25-1 일대에 있었다.
    • 황화루(皇華樓): 광산관 정문인 2층 누각이다.
파일:광주읍성관청_1900.jpg
1900년대 광주읍성 관청들. 문화전당역 3번 출구 옆에서 동명동 방향을 바라본 풍경이다.
  • 동헌 하모당(何暮堂): 구도청 앞 광장 일대에 있었다. 이 근처에 여러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다.
  • 희경루(喜慶樓): 충장로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2023년 광주공원 천변에 중건되었다.


3.2.3. 도로[편집]


격자형 도로망이 있었다. 무진도독성 시절 만들어진 격자형 도로망을 그대로 이어서 광주읍성이 그 위에 축성되어 나타난 특징으로 보인다. 도로망의 중심은 충장로우체국 사거리였다. 4대 문에서 이어지는 길이 충장로우체국 앞에서 만났다.


3.2.4. 성저[편집]


파일:공북루_1910.jpg
파일:공북루에서공북문_1901.jpg
1910년대 공북루
1901년 공북루에서 공북문으로 이어지는 풍경(충장로5가)
  • 공북루(拱北樓): 충장로5가, 독립로와 충장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북쪽에서 공북문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어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누문동 이름의 유래이다.
  • 장터
    • 큰 장: 공북루 일대, 현 광주대교-광주교 근처 천변에서 열렸다.
    • 작은 장: 현 부동교 근처 모래톱에서 열렸다.
파일:광주전경_1900.jpg
1909년, 광주공원에서 바라본 광주교(1907년 건설)와 북문 밖. 오른쪽 화살표는 공북문.
1900년대, 사직공원에서 바라본 광주읍성 일대. 앞쪽은 작은 장이 열리던 모래톱. 오른쪽은 노지다리.


3.3. 광주읍성과 방위[편집]


조선시대에, 북문 밖 도로는 북서쪽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 북쪽에 있는 한양으로 이어지기에 그 방향을 북쪽으로 취급했다. 북문을 기준으로 하여 동·서·남문 방향도 정해졌다. 현재 그 흔적이 도로명 등에 남아있다.[조광철,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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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주,2021] A B C D E F 최영주. (2021). 삼국·통일신라시기 광주 중심지 연구. 역사학연구, 83, pp. 35-72.[세종실록지리지] A B 세종실록151권, 지리지, 전라도, 장흥도호부, 무진군[신증동국여지승람] A B C D 35권, 전라도, 광산현[임영진,2008] A B C D E 임영진. (2008). 統一新羅武珍都督城의 位置와 規模. 지방사와 지방문화, 11(2), pp. 243-266.[조광철,2015] 조광철. (2015.09). 무진도독고성, 어디에 있었을까? 광주드림.[도도로키,2020] A B C D E 도도로키 히로시. (2020). 지적원도를 활용한 신라 무진주(무주) 경관 복원. 한국고지도연구, 12(1), pp. 5-24.[황인호,2014] 황인호. (2014). 新羅 9州5小京의 都市構造 硏究. 중앙고고연구, 15, pp. 105-146.[박태우,1987] 박태우. (1987).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 백제연구, 18, pp. 49-91.[조정규,2013] A B 조정규. (2013). 일제강점기 光州邑城內의 경관변화. 남도문화연구, 24, pp. 237-262.[1] 다른 설로는 1907년 7월 30일에 내각령 1호 ‘성벽처리위원회 규정’이 반포된 뒤 1916년에 완전철거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확실한 것은 1910년대 후반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전경숙,황영산,2015] A B 전경숙, 황영산. (2015). 광주읍성 공간의 형성과 해체 그리고 재현. 한국도시지리학회지, 18(1), pp. 1-11.[2] 동래읍성의 절반정도, 대구읍성과 비슷한 정도였다.[조광철,2016] 조광철. (2016.10). 남광주역은 광주의 남쪽이 아니다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