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 of Our Fa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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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서적 《교부들의 신앙》(The Faith of Our Fathers)
2.1. 저자의 생애
2.2. 내용
2.3. 이야깃거리
3. 성가 Faith of Our Fathers



1. 개요[편집]


Faith Of Our Fathers는 동명의 가톨릭 호교서적 및 성가의 명칭이다.

성공회로부터 박해 당한 영국의 가톨릭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가톨릭 순교 성가로 Faith of Our Fathers가 지어졌고, 이 노래가 유명세를 얻으면서 Faith of Our Fathers이라는 말이 영국의 파란만장한 가톨릭 교회사 및 부흥을 함축하는 관용구가 되었다.

동명의 서적 제목 역시도 이런 교회사가 반영된 것이다.

2. 서적 《교부들의 신앙》(The Faith of Our Fathers)[편집]


파일:교부들의신앙.jpg

미국 볼티모어가톨릭 대주교이자 추기경이었던 제임스 기본스(James Gibbons, 1834~1921)가 1876년에 가톨릭 교리와 호교론을 서술하여 출판한 책이다.[1]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팔리는 가톨릭 교리 관련 서적계의 롱 런 스테디셀러. 우리나라에서도 가톨릭출판사가 국역 3판까지 찍어냈는데, 이 판본은 한국 실정에 맞게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2] 마태오 신부(1903~1979)가 일부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2.1. 저자의 생애[편집]


저자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은 1834년 7월 23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Baltimore)에서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제임스 추기경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에는 틀림없이 부모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3] 1855년에 성 찰스 칼리지(St. Charles College)를 졸업하고, 1857년에 고향에 있는 성 마리아 신학교에 입학하여 1861년(26세)에 신부로 서품되었다. 1868년(34세)에 교황 비오 9세가 미국에 노스캐롤라이나 대목구(代牧區)[4]를 설정하고 제임스를 첫 대목구장으로 선택하였으므로 그해에 주교로 서품받았다.[5] 이듬해(1869)에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가 개최되었으므로 참석하였는데, 제임스는 참석자들 중 최연소 주교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교황권을 중심으로 그 일치구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내외정세에 대해서 가톨릭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임스 주교가 바라보기에 미국 개신교단이 자기분열하는 모습은 신앙의 정통에서 멀어졌음을 증명하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또한 사목자로서도 개신교종특이나 다름없던 가톨릭 까기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

1872년 1월에는 리치몬드(Richmond) 교구의 교구장서리를 겸임하고, 동년 6월에는 대목구장 직위를 내려놓고 리치몬드 교구의 4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처음 제임스가 대목구장으로서 사목한 노스캐롤라이나가톨릭 신자가 겨우 700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개신교가 강세였다. 제임스는 주변 개신교 예배당을 뛰어다니며 근성으로 많은 개신교인들을 가톨릭 신자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기존의 서적들로는 갓 입교한 개신교 출신 가톨릭 신자들을 이해시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제임스는 저서 ≪교부들의 신앙≫을 집필하여 (리치몬드 교구장으로 재임하던) 1876년(42세)에 출판하였다. 제임스가 저서를 ≪교부들의 신앙≫이라고 이름한 데서도 가톨릭의 정통성을 얼마나 확신했는지 알 수 있다. '가톨릭교회야말로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신앙을 계승하였고, 개신교는 여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이다.

1877년(43세)에는 고향 볼티모어 대교구의 9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사목하였다. 볼티모어 대교구장으로 재임 중이던 1886년(51세)에는 교황 레오 13세가 제임스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그 외에도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미국 가톨릭 대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여, 당시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존경받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제임스는 1921년 3월 24일, 향년 86세로 사망하였다. 리치몬드 교구장이 된 지 43년, 신부가 된 지 60년 만이었다.

제임스 추기경의 묘는 본인이 사목하던 볼티모어의 성모승천 국립 대성당(Basilica of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에 있다.


2.2. 내용[편집]


개신교가톨릭에 대해서 무의식처럼 열을 올리는 여러 가지 비난과 모함에 대해, 가톨릭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정도로 대응하곤 하였다. 오히려 그럴 시간에 기도를 더 하고 미사를 더 드리면서 우리끼리나 잘하자는 반응이 컸다. 사실 개신교에서 일삼는 각종 가톨릭 비난에 남들이 보기에 무대응에 가까움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죽음의 권세조차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한다."[6] 하는 등 워낙 교회론적 확신이 강한 데다가, 어차피 말한다고 듣지도 않는데 오해만 더 생기므로 반응을 안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이런 공격을 겨냥하고 정면반박하는 목적으로, 그 대상 역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로 명확히 규정하였다. 내용 또한 가톨릭 교리들 중 개신교가 공격하는 부분을 여러 가지 방향으로 방어하고 설명하며 역공하였다. 그 때문에 이 책은 가톨릭에서 찾아보기 힘든, 어조가 강렬한 개신교 반박서 겸 가톨릭 호교서로 명성을 떨쳤다.

현대 가톨릭계에서도 대(對) 개신교 호교론서로 매우 유명하다. 개신교계에서 천주교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방법을 겨냥하여 서술하였는데, 인터넷상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인들의 공격에 맞서는 방법이 모두 이 책과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교부들의 저술과 성경 본문 등을 인용하여 가톨릭 교리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때문에, 반박서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재교육 서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천주교 내 보수파에서는 반개신교 및 천주교 호교론에 최적화된 책이라 판단하여 천주교 입문자에게 이 책을 추천하곤 한다.

그러나 현대 가톨릭보다 성향이 훨씬 강경한 당시 상황 때문에 어투나 교리해석이 상당히 공격적이다. 이 책이 나온 1870년대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는 등 反 가톨릭 수사법에 반격하느라 교황권이 매우 강조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책이 매우 보수적ㆍ호교론적이며 개신교를 강하게 비판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미사트리엔트 미사를 기준으로 설명하고, 개신교를 적대적인 표현인 '이단'에서 다소 순화된 '갈라진 형제'로 전환한 계기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관점이 없으므로, 현대 천주교인이 이 책을 읽으려면 보충교육이나 일부 자가필터링이 필수이다.

기본스 추기경은 가톨릭을 옹호한 세속군주는 좋게 평가하지만, 가톨릭을 박해하거나 척을 진 세속군주는 세속의 업적과 상관없이 폭군으로 비난했다.[7]

  • 요한 크리소스토모[8]와 동로마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9]를 비교하며 성인을 옹호했다. 에우독시아는 이제벨로 비유했다.[10]
  • 그레고리오 7세하인리히 4세[11], 비오 7세나폴레옹 1세[12]를 비교하며 교황들을 옹호했다.
  • 토마스 베켓을 처형한 헨리 2세를 비난했다.[13]
  •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6세가 1492년에 반포한 알람브라 칙령[14]은 "스페인의 통합을 위한 조치였다"고 옹호하며, "가톨릭 부부왕은 적어도 무어인과 유대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처형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가톨릭 신자를 처형한 헨리 8세를 비난한다.[15]
  • 한국판 282페이지에서는 1481년 스페인 종교재판소 설치를 다루면서 "스페인의 박해를 피해 교황령으로 망명한 유대인과 무어인의 망명을 식스토 4세가 받아 주었다"고 언급한다.
  • 샤를 9세 때 일어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도 콜리니와 샤를 9세의 암투 끝에 일어난 사건으로 주장하며, "가톨릭교회는 학살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으며, 그레고리오 13세가 기뻐한 것도 샤를 입장에서 유리한 보고를 교황에게 전한 걸 믿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16]
  •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성공회를 세우고 가톨릭을 박해했다는 이유로 폭군으로 비난받았다.
  • 잉글랜드 가톨릭의 복권을 꾀한 메리 1세제인 그레이를 처형한 것은 반역자에 대한 응징이라 보아 옹호하며,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를 반역죄로 처형한 것을 포함해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잔혹하다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엘리자베스가 성공회를 옹호한 것도 서출 컴플렉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17]
  • 교황령이탈리아 왕국에 병합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18]에 비유하며 비난했다.[19]
  • 빌헬름 1세오토 폰 비스마르크크세르크세스하만에 비유하여 프로이센 직할령인 포젠[20]을 포함한 프로이센 가톨릭교회를 탄압한 것을 비판했다.[21]

한국어판은 윤형중[22] 신부 등이 한국 내 상황에 맞는 내용을 추가하였는데, 특히 33장 이후부터는 모두 윤형중 신부가 쓴 글이다. 한국어판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국무총리를 맡았던 장면(세례명 요한)이다. 장면은 매우 독실한 프란치스코회 재속회 회원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5.16 군사정변 당시에도 서울 가르멜 봉쇄수녀원에 들어가 숨었을 정도로 정계에서 유명한 가톨릭 신자였다. 또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동성상업학교[23]에 다닐 당시, 동성상업학교 교장까지 지냈다. 당시 장면은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들의 공격에 제대로 반박을 못하는 것에 화가 나서 이 책을 번역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판에서는 책을 번역할 시점의 정세를 반영해서 소련과 중국, 북한의 가톨릭 박해 사례도 실렸다.

≪교부들의 신앙≫과 유사한 가톨릭 호교론서로, 미국인 존 오브라이언(John Anthony O'Brien, 1893-1980) 신부가 1938년 출판한 ≪The faith of millions; the credentials of the Catholic religion≫(our sunday visitor 출판)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을 정진석 추기경이 신학생 시절이던 1960년에 ≪억만인의 신앙≫(가톨릭 출판사)이란 제목으로 출판하고 1999년에 개정판을 내었다가, 2020년에 재개정판을 출판하며 제목을 ≪참신앙의 진리≫(가톨릭 출판사)라고 바꾸었다.

≪교부들의 신앙≫은 19세기 개신교계의 공격을 겨냥하여 쓴 반박서라, _현대의 최신 성서학과 역사학에 입각한 논쟁/공격[24]에 매우 취약하다._ 다시 말해서, 최근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에 따른 가톨릭 비판이 아닌, 19세기~20세기 초반 근본주의 개신교의 반가톨릭주의를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라는 것이다. ≪교부들의 신앙≫뿐만이 아니라 오브라이언 신부의 책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20세기 초에 첫 출판되었기 때문에 교부들의 신앙과 단점을 공유한다.

따라서 현대 가톨릭교회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현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현대 교회의 상황에 맞는 최신 호교론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보수 개신교계에는 최신 성서학이나 역사학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아 여전히 19세기스러운 공격[25]을 반복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아직도 ≪교부들의 신앙≫이 유효하다. 가톨릭을 힐난하는 개신교 세력들 대부분은 적극적 에큐메니즘을 주장하는 진보파가 아니라 근본주의 계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로회 목사 출신의 가톨릭 평신도 학자 스콧 한 박사의 저서들이 현대의 가톨릭 호교론에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스콧 한 박사의 호교서들은 교부들의 신앙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의 학문적 성과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 저서의 개신교판이라 할 수 있는, 反 가톨릭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 개신교 호교론서도 있다. 미국인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1901-1990)가 1962년에 출판한 ≪Roman Catholicism≫인데, 한국에는 1992년(2014년 재출간)에 기독교문서선교회가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였다. 개신교 문화권이나 가톨릭 문화권의 자유민주주의 실태 등 사실에 가까운 내용도 일부 있지만, 가톨릭 교리를 보수 개신교 시각에서 힐난한 내용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에 한정된, 시대에 뒤떨어지는[26] 가톨릭 비판 등이 뒤섞였다.


2.3. 이야깃거리[편집]


롯데 자이언츠키움 히어로즈에게 1대 8로 대패한 2020년 7월 26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코로나를 뚫고 직관하러 온 경기가 요단강을 건너가는 꼴을 보다 못한 한 관중이 참이슬과 이 책으로 분노를 다스리는 웃지 못할 장면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이 책을 모르는 대중들이 이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또한 개정판 출간일이 2020년 8월이라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팬들도 많았다.

다음날 당사자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으로 본인임을 인증했다.#


3. 성가 Faith of Our Fathers[편집]




[1절]

Faith of our Fathers! living still

In spite of dungeon, fire, and sword:

Oh, how our hearts beat high with joy

Whene'er we hear that glorious word.

우리 아버지들의 신앙! 여전히 살아있네

지하감옥과 불과 칼에도 불구하고:

오, 우리 심장이 기쁘게 요동치네

영광스러운 말씀 들을때마다.

[후렴]

Faith of our Fathers! Holy Faith!

We will be true to thee till death.

우리 아버지들의 신앙! 거룩한 신앙!

끝까지 충실하리라.

[2절]

Our Fathers, chained in prisons dark,

Were still in heart and conscience free:

How sweet would be their children's fate,

If they, like them, could die for thee!

우리 아버지들은, 암흑의 감옥에 묶였어도,

여전히 심장과 양심은 자유로웠네:

아이들의 운명은 달콤하도다,

그들처럼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3절][27]

Faith of our Fathers! Mary's prayers

Shall win our Country back to thee:[28]

And through the truth that comes from God

England shall then indeed be free.

우리 아버지들의 신앙! 성모님의 기도는

우리 나라를 당신께 되돌리리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통해

잉글랜드는 정녕 자유로워지리라.

[4절]

Faith of our Fathers! we will love

Both friend and foe in all our strife

And preach thee too, as love knows how

By kindly words and virtuous life

우리 아버지들의 신앙! 우리는 사랑하리라

벗들도 우리 투쟁 속의 적들도

그리고 당신을 설교하리라, 사랑이 알듯이

친절한 말들과 미덕의 삶으로


성가 Faith of Our Fathers는 가톨릭 성가로, 영국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찬송시인인 프레드릭 윌리엄 페이버Frederick William Faber(1814-1863) 신부가 작사하고, 동시대 가톨릭 오르가니스트인 앙리 헤미Henri Hemy[29]가 작곡하였다.

원래 페이버는 성공회 신부였으나, 대학 시절 옥스퍼드 운동 및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옥스퍼드 운동이란, 1830년대에 시작된 잉글랜 성공회 내부의 가톨릭화 운동으로, 1829년에 박해에서 해방된 영국 가톨릭의 부흥과 맞물려있는 운동이었다. 이 옥스퍼드 운동의 주도급 인사가 당시 성공회 신부였던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이었는데, 뉴먼 신부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페이버 신부 역시도 개종하여 1847년에 가톨릭 신부가 되었다.[30] 이렇게 가톨릭 사제가 된 페이버 신부가 작사한 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Faith of Our Fathers이다.

Faith of Our Fathers는 성공회에게 박해당한 가톨릭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노래로, 영국 가톨릭 교회가 내놓은 가장 인기있는 성가 중 하나이다. 워낙 인기 있어서, 태생이 가톨릭 순교성가(그것도 가해자가 개신교)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물론이고 심지어 몰몬교에서도 부르는 공전의 히트곡이 되었다.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Faith of Our Fathers라는 말 자체가 영국의 파란만장한 가톨릭 교회사를 함축하는 관용어처럼 쓰이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교에서도, 가톨릭 성가 286번 〈순교자의 믿음〉 및 개신교 새찬송가 336장 〈환난과 픽박 중에도〉로 번안되어 불리고 있다. 한국 가톨릭의 경우, 가사와 곡조가 한국 순교자들을 연상시키기에 좋아서 매우 자주 부르고 있다.

1) 환난과 핍박 중에서 순교로 믿음 지켰네 이 믿음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

2) 순교자 옥에 갇혀도 양심은 자유로왔네 우리도 진리 위하여 주님께 생명 바치리

3) 순교자 믿음 본받아 형제를 사랑하리라 인자한 말과 행위로 이 믿음 전파하리라

[후렴]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충성하리라

가톨릭 성가 286번 〈순교자의 믿음〉


1)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

2)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3)성도의 신앙 본받아 원수도 사랑 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 하리라

[후렴]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 하겠네

개신교 새찬송가 336장 〈환난과 픽박 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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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교부들의 신앙>을 출판할 때에는 리치몬드 교구장 주교였고 아직 추기경으로 서임되지 않았다.[2]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정 추기경은 소년 시절에 마르크스주의유물론 등을 접하고 신앙심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러다 1947년 사순 시기명동성당에서 윤 신부의 강의를 듣고 크게 깨달아, 다시 신앙심을 굳건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천주교요리문답>에 해설을 단 <상해천주교요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3] 아일랜드는 골수 가톨릭 국가이다. 反 영국 독립투쟁 때 가톨릭이 사실상 국가 정체성 역할을 하였다.[4] 현 롤리(Raleigh) 교구의 전신이다. 롤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주도. 대목구는 영어로는 Apostolic vicariate라고 쓰는데, 정식으로 교구를 설정하기 전에 임시로 정하는 관할구역이다.[5] 당시 미국 가톨릭교회가 선교지역임을 감안하여도, 대체로 해당지역에 정착하여 안정궤도에 오른 교회의 주교 서품 나이가 빨라야 40대 이상이다. 30대 주교는 당시나 지금이나 교회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다.[6]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가톨릭 성경)[7] 제17장 민권 자유와 종교 자유에서 인용한 자료 포함.[8]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한다.[9]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황후.[10] 한국판 264페이지.[11] 카노사의 굴욕 및 서임권 분쟁.[12]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결혼 문제[13] 한국판 265페이지.[14] 스페인에서 무어인과 유대인을 추방한 칙령.[15] 한국판 280페이지.[16] 한국판 284페이지.[17] 한국판 286~287페이지.[18] 1열왕 21.[19] 한국판 175페이지.[20] 19세기에는 독일 땅이었다.[21] 한국판 266~267페이지.[22] 상해천주교요리를 저술한 사람이다.[23]동성중학교동성고등학교. 당시 동성상업학교는 사제를 지망하는 신학생 학급과 일반학생 학급으로 나뉘었었다.[24] 최신 진보 에큐메니즘/자유주의 신학.[25] 성변화 성찬론은 빵에 대한 우상숭배라느니,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 공경은 이교도의 여신숭배에서 유래되었다느니 등의 주장.[26] 예를 들어 가톨릭 성직자가 사제서품을 하며 하는 서약 중에 '개신교의 파멸에 기여하겠다.'는 조항이 있다고 비판하는데, 실제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삭제되었다. 일부 전통 가톨릭에서는 그 맹세가 현대 가톨릭에서 삭제된 점을 비판하기도 한다. 개정판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의 초기 현대 가톨릭의 모습이 일부 반영하였다. 예를 들어, 천주교인과 개신교인 간 혼종혼인에 관한 규정이 2차 바티칸 공의회로 완화되었다는 내용을 각주로 추가했다. 하지만 1966년에 가톨릭이 공식 인정한 RSV 영어성경이 그 책에서는 아직도 가톨릭 신자에게는 금서 취급인 양 서술된 점 등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들도 있다.[27] 3절은 가사 특성상 가톨릭 교회에서만 부르고, 비가톨릭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주 스킵한다.[28] 아일랜드에서는 이 부분의 가사를 Shall keep our country fast to thee
[
우리 나라를 당신께 충실히 유지하리라
]
로 바꿔서 부른다.
[29] 이름이 프랑스스럽지만, 영국인이다.[30] 한편 뉴먼은 가톨릭 추기경이 됐고, 선종 후 가톨릭 교회에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