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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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常
1919년 9월 16일~2004년 5월 11일 (향년 84세)

1. 소개
2. 생애
3. 시집
4. 대표작 「초토의 시」
5. 시세계
6. 여담


1. 소개[편집]


대한민국의 전 시인이다. 본명구상준(具常浚)[1]이며 본관능성 구씨[2]다. 종교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2. 생애[편집]


1919년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642번지에서 아버지 구종진(具鍾震)과 어머니 아산 이씨 이정자(李貞子)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은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보냈다. 50세 아버지와 44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만득’이란 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여러 남매를 다 잃고 일곱 살 위 형 구대준(具大浚) 하나 뿐 이었던 집안의 막둥이 아들은 불면 꺼질세라 금지옥엽으로 길러졌다. 시인의 어머니는 한문 고전과 평민 소설, 시조를 두루 섭렵한 고전적인 인텔리로, 그가 네 살이 되자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머니로부터 동몽선습, 명심보감, 고시조, 옥루몽, 삼국지연의 등을 배운 시인은 그 영향으로 보통학교 시절 조선어와 작문과 화법시간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에 젖어 살아온 시인은 열다섯 살에 소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지만, 3년 만에 중도 포기한다. 그와 달리 형 구대준은 끝까지 신학교를 다녀서 신부 서품을 받았다. 이후 도쿄로 밀항해 니혼대학 종교과에 입학했는데, 이 때 학점을 받기 위해 습득한 불교 지식이 평생 시인을 받쳐줄 마음 속 깊은 자양분이 되었다.[3] 이처럼 구상 시인의 시세계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고전문학과 집안의 가톨릭적 분위기, 대학 시절 배운 불교 지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에 게재한「길」, 「여명도」등이 공산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자 월남하였다. 6·25 전쟁 때는 종군작가단 부단장을 지냈다.[4] 2004년 5월 11일에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


3. 시집[편집]


시집으로 『구상시집』(1951), 『초토의 시』(1956), 『까마귀』(1981), 『구상 연작 시집』(1985), 『유치찬란』(1989) 등과 자선 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1984)를 냈으며 『구상 시 전집』(1986)을 간행했다.


4. 대표작 「초토의 시」[편집]


<서울시 문화상>을 받은 15편의 연작시다. 이를 통해 구상은 전쟁에 의해 초토화된 조국을 노래했다. 8번째 작품 적군 묘지 앞에서가 잘 알려져 있다.

조국아, 심청이 마냥 슬프기만 한 너로구나.

시인아 너의 이름을 부를 양이면 목이 멘다.

저기 모두 세기의 백정들

도마 위에 오른 고기모양 너를 난도질하려는데

하늘은 왜 이다지도 무심만하더냐.

조국아, 거리엔 희망도 절망도 못하는

백성들이 나날이 환장해만 가고

너의 원수와 그 원수를 기르는 벗들은

너를 또다시 두 동강을 내려는데

너는 오직 생각하며 쓰러져 가는 갈대더냐(후략)

'초토의 시 10 - 휴전 협상 때' 중


‘세기의 백정들’과 ‘너의 원수와 그 원수를 기르는 벗들’ 은 조국과 민족을 분단시키고 서로를 적으로 만들었던 자들이다. 난도질당하려는 조국의 운명을 목이 메어 부르는 시인의 고조된 외침은 우리 민족 모두의 외침으로서 절박함이 배어 있다.[5]


5. 시세계[편집]


시인은 작품을 통해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고발하는데, 그 고발이 자기 참회로 귀결되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건국 신화, 한자 문화권의 전통 교양, 자연 탐구는 물론 선불교적 명상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이운룡은 구상의 시를 두고 “진리의 모색이며 그 기록으로써 종교·존재·역사에 대한 비평이고 인간 전체와 우주에 대한 거대한 온유”라고 칭하며 극찬했다.[6] 시인은 스스로 “나의 시를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고들 하는데, 오늘의 현상학을 영원 속에서 조명코자 한다고 할까, 오늘과 영원을 조응시켜, 존재 자체 안의 신비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나의 문학관이라면 문학관이지”라며 자신의 시세계를 정리한 바 있다.


6. 여담[편집]


프로야구 선수인 삼성 라이온즈구자욱이 친형의 증손자(종증손)이다 .실제로 구자욱의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실제로 구자욱은 어릴 때는 서울에 올라가서 자주 뵙기도 하고, 학교에서 학생들 읽으라고 걸어놓은 시가 종증조부의 시라서 놀라기도 했다는 일화가 드러나기도 했다.

서양화가 이중섭과 친한 친구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릴 때 그를 도와주기 위해 삽화를 그리는 직장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7] 이후로도 2번째 개인전을 열게 도와 주었고, 1956년에 이중섭이 타계했을 때 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도 치렀다. 이중섭이 죽은 해에 구상이 발표한 대표작인 "초토의 시" 연작 중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시가 한 편 있다. 한편 이중섭의 작품들 중에 구상의 가족을 그린 "시인 구상의 가족" 이란 작품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6.25 전쟁 때 구상은 종군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장의 소개로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구상 스스로가 '의기투합'이라고 표현할 만큼 둘이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격의없이 술자리를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둘이 얼마나 친했는지 구상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박첨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때에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했는데, 쿠데타 이전 한 달 가량 박정희는 신변 안전을 위해 구상의 집에 숨어지내기도 했다. 다만, 쿠데타 성공 이후 박정희가 정계 진출을 권하자, 구상은 '남산골 샌님으로 남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리고는 경향신문의 도쿄지국장 자리를 맡아 1960년대 초반은 일본에서 지냈다. 다만, 박정희 정권에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은 아니어서,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품을 쓰기도 했고 이 때문에 필화를 겪기도 했다. 문인간첩단 사건[8] 때에는 속임수까지 써 가면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문인들을 위해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9] 사실 구상 자신도 이승만 정권 시절에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언론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누명을 쓰고 구속수감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1979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된 후 자신이 다니던 성당에 5년 내내 연미사(위령 미사)를 넣었다고 하니, 적어도 친구로서 정은 두터웠던 모양.[10]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구상은 민정당 10인 발기위원회 위원, 민정당 총재 고문, 민정당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11]에 구상문학관이 있다. 홈페이지

문학관이 있는 만큼 문학관 주변 도로명주소는 구상길이다. 나름 집필실인 '관수재'도 복원되어 있긴 하지만 외관만 볼 수 있을 뿐, 항상 잠겨 있어서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

그런데 그가 왜관읍에 살긴 했지만 영남일보 편집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하와이 대학교에서 강의 활동을 하며 타지 생활을 더 오래 했다. (...) 그래서 그가 왜관읍에 살던 시기에, 칠곡군이나 왜관읍과 관련하여 쓴 작품은 전무하다.

한편, 구상 시인을 기리는 '구상문학상'이나 '구상한강백일장'은 서울 영등포구[12]에서 한다.(...) 문학관보다 먼저 거행되었다.

동이 트는 하늘에

가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

이윽고 북이 울자

원한에 이끼 낀 성문이 뻐개지고

구렁이 잔등같이 독이 서린 한길 위를

횃불을 든 '시빌'이

깨어라! 외치며 백마를 날려.

말굽소리.

말굽소리.

창칼 부닥치어 살기를 띄고

백성들의 아우성 또한 처연한데

떠오는 태양 함께 피 토하고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


1946년 발표한 '여명도'라는 위의 시가 월남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당시 김일성이 이 시를 '퇴폐적, 세기말적, 반동적, 감상주의'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곧이어 어용작가들이 구상 시인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심지어 위 시가 실려있는 책 '응향'을 금서로 지정해버린다. 이미 김일성의 눈 밖에 난 뒤라 계속 북한에 잔류했다면 말로가 썩 좋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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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이름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2] 항렬자를 쓰지 않지만 능성구씨종보 제157호에 전 대종회 고문이라고 써져 있으며, 27세손 자(滋)자 항렬을 쓴 야구선수 구자욱(具滋昱)이 종증손(從曾孫, 자기 형제의 증손자.)이라고 문화일보 기사에 써져 있다. 그러므로 구상은 24세손이다.[3] 윤정구,『한국현대시인을 찾아서』,「존재의 비의를 캐는 묵상의 시」,국학자료원, 2000, pp.26-30.[4] 최동호, 『한국 현대 시사의 감각』,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p.63.[5] 최동호, 『한국 현대 시사의 감각』,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p.64.[6] 문덕수 외, 『한국현대시인연구 下』,「현존과 영원에의 조응」, 푸른사상, 2001, p.282.[7] 고은의 글로 이중섭이 삽화 그리기를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미술사학자 최열이 밝혀낸 바로는 실제로 삽화를 그린 적 있다. 1952년 10월 《문학예술》 김이석의 소설에 이중섭의 삽화가 남아 있다.[8] 1974년 월간지 '한양'에 참여했던 이호철, 김우종, 정을병, 장병희, 임헌영 등 문인 다섯 명을 간첩죄로 몰아 체포한 사건이다. '한양'은 1970년대에 유신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재일동포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잡지로, 국내 문인들도 원고료를 받고 글을 싣고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모윤숙, 박종화, 조연현 등도 이 잡지에 투고했고, 구상 또한 '한양'의 한국총판을 맡아국내 보급 업무를 담당했다. 대학가와 문단을 중심으로 유신 체제 반대 움직임이 커지자, 본보기로 문인 몇 명을 잡아넣기 위해 보안사령부가 혐의를 조작한 것.[9] 증인으로 나간다고 하면 박정희 대통령도 탐탁잖아 하고, 정부 기관에서도 만류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구상은 증인 채택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증인에 나갈 의향이 없는 척 하다가 재판 당일에 법정에 나타나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10] 박정희와 구상의 인연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조[11] 6.25 전쟁 이후 왜관읍에 정착하여 1974년에 서울 영등포로 이사가기 전까지 왜관에서 살았었다.[12] 1974년 이후 30여년 간 살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