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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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파일:Photo_of_Gustav_Mahler_by_Moritz_Nähr_01.jpg

출생
1860년 7월 7일
오스트리아 제국 칼리슈테[1]
사망
1911년 5월 18일 (향년 50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2]
직업
작곡가, 지휘자
사조
후기 낭만주의
학력
빈 컨서바토리 (1875~78)[A]
빈 대학교 (철학 / 학사)
배우자
알마 말러 (1902년 3월 10일 결혼)[A]
자녀
2녀[A]
종교
표면상:유대교가톨릭, 실질적:불가지론자[3]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청년기
2.3. 결혼 이후
3. 작품 목록
3.2. 실내악
3.3. 성악곡
3.4. 기타
4. 어록
5. 기타



1. 개요[편집]



대지의 노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작곡가지휘자. 생전에는 에서 전설적인 오페라 지휘자로 명성을 날렸으나, 작곡가로서의 혁신성이 점차 인정받아 오늘날에는 후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교향곡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1860년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 보헤미아 왕국[4]의 칼리슈테에서 유대인 집안의 자녀로 출생했고, 이후 모라비아독일인 거주지역인 이글라우(Iglau)[5]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보낸다. 어린 시절 이미 수천곡의 민요와 군가를 욀 정도로 대단한 음악적 소양을 드러냈다 하며, 6살부터 본격적으로 학과 공부와 음악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뛰어난 음악적 소질이 있었지만, 유년시절 여러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경험으로 살아남았다는데 대한 심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유년시절의 경험은 그의 음악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이것과 관련을 맺는 음악이 바로 탄식의 노래다. 15살이 된 1875년 빈 음악원에 입학해 율리우스 엡스타인에게 피아노를, 로베르토 후스에게 화성학을, 프란츠 크렌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당시 동료 학생으로는 한스 로트 , Hugo Wolf , Mathilde Kralik von Meyrswalden 등이 있다.


2.2. 청년기[편집]


3년 뒤 빈 대학교에 입학해 음악과 역사, 철학 등을 공부하게 된다. 한편으로 빈에서 처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을 접했고 안톤 브루크너에게서 대위법 강의를 받았는데 이들은 말러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빈 대학 시절 칸타타 탄식의 노래를 작곡해 베토벤상에 도전했지만 입상에는 실패했다. 후일 그는 친구인 나탈리 바우어 레히너에게 "만약 이때 베토벤상을 수상했다면, 작곡에만 전념했을 것"이라 고백했다 한다.[6]

작곡에만 전념할 처지가 아니었던 말러는 빈 대학교를 졸업한 후인 1880년, 바트 할의 여름극장에서 지휘자로서 데뷔하게 된다. 이후 1881년에 류블랴나, 1882년 올로모크 극장을 거쳐 1883년에는 카셀의 왕립 극장에서 부지휘자가 되었다. 카셀에서 소프라노 요한나 리히터와 사랑에 빠졌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경험이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로 승화되었다. 당대의 최고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한 뒤, 1885년 프라하로 옮겨갔고, 이듬해인 1886년에는 라이프니츠에서 지휘자 생활을 했고 1888년에서 1891년까지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1887년, 병에 걸린 아르투르 니키쉬를 대신해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해 평론가들과 관중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베버의 손자의 위촉으로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 "세 사람의 핀토"를 완성해 명성을 쌓아나갔다. 그 사이에 교향곡 제1번 "거인"을 작곡해 부다페스트에서 초연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한편으로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를 무삭제로 공연하기도 했다.[7]

이후 1891년, 함부르크로 옮겨 7년여 동안 장기계약으로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활동하게 된다. 함부르크 시절, 말러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슈타인바흐에서 유일하게 작곡에만 전념할수 있는 오페라 극장의 비수기인 여름철에 휴가를 얻어 작곡에 전념했고, 이곳에서 교향곡 제2번 "부활", 제3번, 그리고 그의 초기 교향곡에 지대한 소재를 제공한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를 작곡했다.

1897년, 말러는 빈의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 법으로는 가톨릭 교도가 아닌 사람은 관직에 기용될 수 없었다. 말러는 결국 가톨릭 교도로 개종하고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빈 시절, 말러는 타협할 줄 모르고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철저한 완벽주의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특히 당대 주목받는 화가로 저명한 알프레트 롤러와의 협력작업으로 탁월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8]

지휘자로서 모차르트, 베토벤, 글루크 등의 오페라들을 자주 무대에 올렸으며 특히 그가 가장 추종하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기회가 생길때마다 무대에 올려 가장 열성적인 바그너의 전도사로 활동했다.특히 알프레드 롤러와의 협력작업으로 완성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대표적이다.[9]


2.3. 결혼 이후[편집]


1902년, 말러는 19살 연하인 알마 쉰들러와 결혼했다. 흔히 사람들 사이에 말러의 에피소드로 회자되는, 오케스트라 연습중 1시간 정도 자리를 비운 말러에게 단원들이 어디 갔다 왔냐고 묻자 '결혼하고 왔다'고 말하는 에피소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조지 버나드 쇼도 어쩌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진위는 알 수가 없다.)[10] 그 사이에서 '푸치'라는 애칭의 마리아 안나와 '구키'라는 애칭의 안나 유스티네[11]를 낳았다. 빈 시절은 말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말러는 마이에르니히의 별장에서 여름 휴가철에 작곡에 열중해 교향곡 제4번, 5번, 6번 "비극적", 7번, 8번 "천인의 교향곡"과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가곡집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와 "뤼케르트 가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1907년, 산산히 깨지게 된다. 그해 말러는 장녀인 마리아 안나를 성홍열로 떠났보냈으며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에다가 말러 자신도 심장에 병이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걸음걸이 수까지 세면서 걸을 정도로 건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말러의 비타협적 성격과 완벽주의에 반감을 품고있던 적들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19세기말 유럽을 강타한 반유대주의[12]에 발맞춰 언론들도 말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신공격을 가했고, 그는 그해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이후 말러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제안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한 시즌동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봉을 잡는다. 그러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더 선호하던 메트 이사진들의 선호도에 밀려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제안으로 뉴욕 필의 지휘자가 된다. 이후 말러는 죽을 때까지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했다.

이시기 말러는 끊임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부인의 외도로 인한 충격으로 마음 편할 날 없는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으로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제9번, 그리고 결국 완성하지 못한 교향곡 10번이 있다. 이 시기 작품들에는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정서, 알마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뒤엉켜 있다. 말러가 교향곡 9번격에 해당하는 "대지의 노래"에 9번의 번호를 붙이지 않은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의 영향으로 보인다.[13]

결국 스스로도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듯, 말러는 1910년,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정신분석학의 시조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심리면담을 받게 된다. 프로이트는 말러의 잠재기억을 이끌어내 말러의 우울증이 어린시절 형제들의 죽음과 아버지에게서 받은 학대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끌어냈고, 부인 알마에 대한 집착은 알마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갈구하려고 한 탓이라 진단했다. 말러 본인은 어머니의 모습을 갈구한다는 진단은 부정했다.

1911년 2월, 말러는 뉴욕에서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심내막염이 걸려 발열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애 마지막이 된 공연을 마친 후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서[14]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말러 자신의 요청으로 빈으로 옮겨진 후 1911년 5월 18일, 아내 알마가 임종을 지킨 가운데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세상을 떠난 딸의 묘가 있는 빈 근교 그린칭 공동묘지에 딸 옆에 안장되었다.

말러는 생전에는 뛰어난 지휘자로만 주목받았고, 그의 교향곡들은 제2번 "부활"과, 제3번, 8번 "천인" 정도가 연주에서 호평을 받은 정도일 뿐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이자 친구들인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정도 외에는 그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지휘자도 별로 없었고 나치 독일의 억압 하에 유대인 예술가들에 대한 탄압에 의해 거의 묻히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960년 이후,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해 말러의 교향곡은 다시 주목을 받아 활발하게 연주되었고 오늘날, 세기말의 정서를 그려낸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 위상이 재정립되었다.

여담으로, 말러 본인의 명언 중에 '나의 시대는 올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명백히 사실이 되었다. 오늘날 말러의 인기는 대단해서 말러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레리안이라는 용어까지 생겼을 정도.

현대 영화음악의 발전에 있어서도 말러 특유의 초섬세부터 초거대 다이나믹의 스케일과 드라마틱한 서사성, 풍부한 감정표현으로 에리히 코른골드부터 엔리오 모리코네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끼친 지대한 영향 역시 결코 부정할 수 없다.[15] 또한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비롯한 말러의 곡들이 수 많은 영화나 TV 드라마 등에 테마 음악으로도 쓰였다.#



말러 사후 아내 알마는 1915년 바우하우스로 유명한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와 재혼했으나 5년만에 이혼했고 1929년 시인이자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1890~1945)과 재혼했다. 베르펠이 세상을 떠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말러를 추앙했던 번스타인등과 교류하며 살다가 1964년 85세에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목록[편집]


작품 수도 적은 데다가 작곡한 장르는 사실상 교향곡과 가곡밖에 없다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16] 교향곡 하나 하나가 규모가 크고 작곡 속도 자체도 빠른 편은 아닐 뿐더러 지휘자로 바쁘게 생활하는 와중에 시간을 쪼개 작곡한 탓인 것으로 보인다.[17]


3.1. 교향곡[편집]




3.2. 실내악[편집]


  • 피아노 4중주 A단조[18][19]


3.3. 성악곡[편집]


  • 젊은 시절의 노래
  •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20]
  • 뤼케르트 시집에 의한 노래
  • 탄식의 노래


3.4. 기타[편집]


  • 블루미네(교향곡 제1번의 원래 2악장)
  • totenfeier(장송제전,교향곡 2번의 1악장 초고)

4. 어록[편집]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한다. 모든 것을 끌어 안아야 한다.

(Die Symphonie muß sein wie die Welt. Sie muß alles umfassen.)

-1907년 장 시벨리우스와의 대화 중.


당신들 오페라 극장 사람들이 전통이라고 일컫는 것은 무사안일주의와 주먹구구식 일처리일 뿐이다.

- 빈 국립 오페라극장 재직 중. 흔히 '전통은 재를 숭배하는게 아니요, 불을 보존하는 것이다[21]

.'란 말로 알려져있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Das Wichtigste in der Musik steht nicht in den Noten.)


나는 세 가지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또 온 세상에서는 유대인으로...

(Ich bin dreifach heimatlos; als Böhme unter den Österreichern, als Österreicher unter den Deutschen, und als Jude unter der ganzen Welt...)



5. 기타[편집]


  • 말러의 음악은 대부분이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인지 20세기 중반까지 많이 연주되지는 않았다.[22] 하지만 녹음기술의 발달에 따라 점점 자주 연주되고 녹음되었으며 일시적인 유행이나 재발굴, 열광의 수준을 넘어 현재 전세계 오케스트라들이 일상적으로 자주 연주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부천필의 말러 사이클이 큰 주목을 받았으며 2011~2012년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이 말러 전곡 연주 시리즈를 진행했다.[23][24]

다만 오해하면 안 될 게 후술할 바와 같이 작곡가 말러는 사후에 한동안 잊혀진 상태는 결코 아니었다. 당장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2번, 4번, 대지의 노래, 9번의 전곡 음반 각각 1종과 5번 4악장의 발췌 음반 2종이 SP로 발매된 바가 있는데, 정확히는 2번은 무려 1921년에 말러의 지인이었던 오스카 프리트가 어쿠스틱 녹음으로 녹음했고,[25] 4번은 한술 더 떠 1930년에 무려 일본인 지휘자인 고노에 히데마로가 녹음했으며, 대지의 노래와 9번은 브루노 발터가 각각 1936/1938년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했고, 이후에도 1939년에 NBC 교향악단과 1번의 전곡 방송 녹음을 남긴 바가 있다. 그리고 5번 4악장은 빌럼 멩엘베르흐와 브루노 발터가 각각 1926/1938년에 녹음한 적이 있다. 애초에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작곡가 말러가 잊혀진 사람이었다면, SP 시대에만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 무려 4개[26]나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당시 클래식의 변방이었던 일본에서도 전곡 녹음을 시도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19세기 초까지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처럼 사후 한동안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끌었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 장녀인 마리아 안나의 죽음 이후 말러 부부는 사이가 멀어졌다고 전해진다. 말러는 빈 궁정 가극단에서의 자리를 사임하고 새로운 환경을 위해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가극단으로 향했는데, 이곳에서 알마는 아이를 유산하는 등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경험한다. 결국 미국에 적응하지 못한 알마는 1910년 여름, 오스트리아 그라츠 근교의 작은 도시로 작은 딸과 함께 요양을 떠났고, 그곳에서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로피우스는 한 통의 편지를 말러 앞으로 보내 자신과 알마의 관계를 고백하게 된다.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말러는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끝내 알마의 마음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말러가 사망한 후 알마는 코코슈카라는 화가와 염문을 뿌리기도 하고, 옛 애인인 그로피우스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도 했다. 새로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중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 1929년 프란츠와 다시 결혼했다.

  • 토마스 만의 소설인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말러에게서 영감을 받은 소설로 알려져 있다. 만이 베네치아에 여행을 갔었는데 현지에서 친분이 있었던 말러의 부고를 듣게 되었고 그때 영감을 받아 집필했다고 한다. 동명 소설을 1971년에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영화화했다. 이 영화에서는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에서도 쓰인 말러 5번 4악장이 주요 영화 음악으로 인상적으로 쓰였다. 영화 촬영장에서 5번 4악장을 계속 틀어놓았는데 비스콘티 감독이 이 음악이 누구 것인지 모르고 '음악이 좋은데 작곡가를 소개시켜달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 비록 남아있는 사진은 없지만, 알프레드 롤러의 회고에 의하면 상당한 근육질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말러는 많은 운동을 즐겨하던 사람이었으니 근육질인게 당연할 듯도 하지만. 그리고 사실 지휘자한테는 체력이 무척 중요하기도 하다.


  • 애니메이션 은하영웅전설의 OST는 각종 클래식의 명곡으로 채워져 있으나, 그 중에서도 말러의 분량은 독보적이다. 은영전은 말러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애니이다.

  • 말러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말러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정신병을 앓았으며, 말러의 15명의 형제 중 8명을 일찍 잃었다. 게다가 그의 가족 중에는 맹인도 있고 정신병과 뇌종양을 앓거나 권총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말러의 조울증과 강박신경증 등은 어린 시절에서 유래한 듯하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Mahler, Gustav 항목에 의하면, 어머니에 대한 고착이 있었다. 절름발이였던 어머니를 흉내내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약간 저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 말러는 작품을 쓰면서 언제나 고민하고 갈등했던 작곡가이며, 그의 교향곡들은 그의 실험정신의 결과이다. 그는 조성을 거의 무조성의 경계까지 몰고 감으로써 교향곡이 갖는 조성감각을 거의 무력화시켰다. 말러가 교향곡을 최종적 해체지점까지 확장시켰다고 평가되는 이유이며, 쇤베르크나 베베른 같은 다음 세대 작곡가에게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망치를 타악기로서 기용하는 등의 실험도 했었다. 말러가 현대음악 등장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27]

이런 이유로 '말러는 그가 죽은 이후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완벽히 부활했다. '나의 시대는 올 것'이라는 그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는 식의 말레리안들의 설명[28]은 이런저런 의미에서 어폐가 있다. 이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생전에 광적인 팬덤을 주렁주렁 거느리며 군림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이 말러가 작곡해서 남긴 작품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안 가졌을 리도 없고, 20세기 전반에 걸쳐 말러의 작품들은 '흥미로운 현대음악'으로서 많이 연구되었다. 1960년대 이후로 '말러의 음악이 부활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적인 레퍼토리로서 재조명되었다는 의미에 가깝다. 당장 아르놀트 쇤베르크/알반 베르크/안톤 베베른부터가 말러의 숭배자로서 사후에도 여러 오마주를 남겼고, 여러 독일 작곡가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던 데다가 상술한 것처럼 작곡가 말러가 잊혀졌다는 시기인 2차 대전 전에도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 4개[29]나 발매된 판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먼 소련 땅에서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어린 시절부터 말러를 숭배하여 그의 교향곡 세계를 계승하는 듯한 작품 행보를 보이게 되었는데, '말러가 20세기 전반에 묻혔다'면 애초에 그게 가능했을 리도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오래 묻혔다가 1960년대에 부활했다'는 설명에 부합하는 작곡가는 찰스 아이브스라고 할 수 있다[30].


구스타프 말러의 피아노 연주 녹음

  • 말러의 지휘 녹음은 단 1장도 남아있지 않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말러가 남긴 녹음이 아예 없지는 않다. 정확히는 1905년 11월에 자동피아노용으로 4개의 롤지에 연주를 기록한 것이며 음반으로 출반되어 있다. 말러가 롤지에 기록한 4곡은 모두 자작곡으로,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2곡 '아침에 들판을 거닐면', 20대 초반에 쓴 가곡 '나 즐거이 푸른 숲을 지나며', 교향곡 4번 4악장과 교향곡 5번 1악장 피아노 편곡이다. 말러가 남긴 유일한 녹음 기록이기 때문에 가치가 매우 높은 역사적인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31]

  • 말러의 교향곡 악보를 보면 템포 지시와 악상기호, 악기 연주 시 유의 사항 등이 다른 작곡가들의 교향곡에 비해 매우 세밀하게 적혀 있는데, 이는 말러가 지휘자로서 연륜이 깊었다 보니 자신의 곡이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울릴지에 대한 완벽주의에 시달린 것의 산물이다.[32]

  • 독일 출신의 후배 지휘자 겸 작곡가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도 비슷한 점이 많다. 실제로 말러와 푸르트벵글러는 원래 작곡가 지망생이었지만 생계 문제로 지휘자로 전향했고, 스스로를 '지휘도 하는 작곡가'로 여겼지만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작곡가로서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하는 대신 전설적인 지휘자로서 더 유명했으며 작곡가로서 무시당하던 오랜 기간 동안 둘을 멘토로 섬기는 지휘자들이 그들의 작품들을 홍보하고 다니기도 했으나[33], 다른 명지휘자가 작곡한 작품을 깔보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34]. 다만 이미 대중적인 작곡가가 된 말러와 달리 작곡가로서의 푸르트벵글러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매우 낮다.

  • 국적은 보통 오스트리아로 인정받고 있다.[35] 하지만, 태어난 곳이 현재 체코라 그런지 체코에서도 체코계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에서 국적에 대해 모호하게 대한 걸 두고 유태인이니 이스라엘인이라고 주장하는 점도 있다. 그나마 프란츠 카프카처럼 왜곡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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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체코 비소치나주 칼리슈테, 프라하 근교에 위치한 도시로 행정상으로는 비소치나주 펠흐르지모프구에 속해있다.[2]오스트리아 [A] A B C "Gustav Mahler", nndb.com[3] 유대교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었고, 오스트리아에서 상임 지휘자 자리를 얻고 출세하고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말러의 교향곡 중 교향곡 4번과 같이 기독교 성인과 천국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작곡한 곡들이 있다.[4] 이 때문에 체코 출신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5] 현 체코 이흘라바(Jihlava)[6] 이 때의 심사위원은 브람스였다. 말러의 스승 브루크너가 바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고려하면, 바그너와 대립 관계였던 브람스가 말러의 음악에 좋은 점수를 주었을 가능성은 애초부터 낮았을 것이다.[7] 바그너의 악극들은 워낙 길어서 당시에는 이곳 저곳을 삭제하고 공연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말러가 빈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도 신들의 황혼 서막의 노른 장면은 삭제되는 게 거의 관례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말러는 그것이 예술적이지 않다며 무삭제판 공연을 자주 진행했다.[8] 하지만 제작비가 높아서 극장의 이사회측에선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9] 그러나 정작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는 말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싫어했다고 한다.[10] 그런데 말러는 본인이 의도치 않게도 NTR을 행하게 되었다. 본래 알마는 말러의 지인이자 알마 본인의 음악 선생이었던 알렉산더 쳄린스키와 연인 관계였다. 하지만 알마의 가족들은 쳄린스키가 못생기고 명성이 낮다는 이유로 헤어질 것을 강요하였고, 결국 알마와 쳄린스키는 헤어졌다. 그 직후에 말러와 알마가 결혼해 버린 것이다.[11] 언니와는 달리 안나 유스티네는 오래 살아서 1988년까지 생존했고 조각가로 활동했으며, 그녀의 딸인 마리나 말러(Marina Mahler)는 말러 재단(mahler foundation)을 설립하여 현재 말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12] 1897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과 1905년에 러시아에서 공개된 시온 의정서 파문으로 유럽에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13]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이후 클래식 작곡가의 유명한 징크스 중에 9번 교향곡을 쓰면 쓰다가 죽거나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는 것이 있다. 이 저주를 겪지 않은 작곡가 중 하나가 20세기에 15개의 교향곡을 쓴 쇼스타코비치가 있다. 말러는 이 징크스에 대해 꽤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9번 교향곡이 되었어야 할 곡을 대지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여서 피해갔으나, 방심했는지 10번째로 교향곡을 하나 더 썼는데 이게 9번 교향곡이 되면서 이 징크스의 새로운 희생양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9번 교향곡의 저주 항목 참조.[14] 당시 새로운 백신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쇄상구균 감염의 경우 백신은 치료 효과가 없으며, 항생제 발명 이전 시대였기에 심장병을 가진 말러에게 생긴 심내막염은 치명적이었다.[15] 007 시리즈, 아웃 오브 아프리카, 늑대와 춤을 등의 사운드트랙들로 유명한 아카데미 수상 영화음악가 존 베리는 롱 아일랜드의 자택 풀장에서 말년까지 말러의 교향곡을 거대 오디오 스피커 시스템에 틀어놓고 수영을 하곤 했다고. #[16] 사실 빈 음악원 재학 시절에는 실내악을 상당히 많이 작곡했지만, 말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 파기해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말러의 실내악 작품은 미완성의 피아노 4중주 1곡밖에 없다.[17] 이렇다보니 말러의 작품명엔 작품번호(Opus)가 붙어있지 않으며, 실제로도 작품번호로 분류된 목록도 찾을 수가 없다.[18] 미완성이다. 1악장만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 부분만 단악장으로 연주되며 2악장은 개략적인 스케치만 존재한다. 전술한 이유 때문에 말러가 남긴 작품들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기도 하다.[19]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2010년작 셔터 아일랜드대단히 인상적인 씬에서 긴장감높은 대사와 인서트 장면을 배경으로 극중 LP에서 흘러나온다.[20] 아이러니하게도 이 곡이 초연된지 2년 만에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큰 딸이 사망했다고 한다. 5곡의 연가곡집으로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어둡고 우울하며, 그 중에 4번째 곡이 그나마 밝은 분위기의 곡이긴 하지만 아이들이 잠깐 외출하러 나갔을 뿐이라며 현실부정하는 내용의 곡이라 실제 주인공의 심정은 현시창에 가깝다.[21] Tradition ist Bewahrung des Feuers und nicht Anbetung der Asche.[22] SP는 플레잉 타임상 한계가 있었다. 약 50~100분의 말러의 교향곡들을 담기에는 쉽지 않은 매체. 어느정도 말러 르네상스는 녹음 매체와 기술의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상 8번 교향곡의 경우는 1950년 이전의 녹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향곡 9번만 해도 벌써 약 80분에 달하는데 처음에 CD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에는 40분대로 두장에 나눠 발매했으나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는 80여분에 달하는 9번을 한 장에 담은 중가반이 발매됐다.[23] 이때 연주된 말러 교향곡 10번 전악장(데릭 쿡의 2번째 판본)이 대한민국 초연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모든 교향곡을 연주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휘는 상임지휘자이던 정명훈이 진행했지만, 교향곡 7번과 대지의 노래의 경우는 부지휘자인 성시연(전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이, 교향곡 10번은 제임스 드프리스트가 지휘를 맡았다.[24] 10번 교향곡은 엄밀히 말하면 미완성이라 논외로 하고, 말러를 그렇게 좋아하는 정명훈이 아직까지도 7번은 단 한차례도 지휘한 적이 없다. 이유는 불분명.[25] 이게 어느 정도냐면, 베토벤의 교향곡 9번도 처음으로 전곡 녹음된 것이 말러 2번 전곡 녹음 2년 후인 1923년이었다. 사족으로 이 녹음을 지휘한 사람은 1908년에 카르멘을 전곡 녹음한 독일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브루노 자이들러-윙클러(Bruno Seidler-Winkler, 1880~1960).[26] 대지의 노래를 교향곡으로 간주하는 경우[27] 실제로 현대음악의 시초라 볼 수 있는 무조성의 음악을 확립한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말러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말러는 멘토로서 그를 긴밀히 이끌어주었다.[28] 주로 말러의 예언자적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런 설명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29] 브루노 발터의 1939년 1번 녹음은 방송용 녹음이었기에 발터의 사후에 발매되었다.[30] 실제로 아이브스는 음악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보험회사 사장으로 일하며 곡을 썼던 데다가, 음악이 워낙 독창적이여서 생전에 대다수의 작품이 몰이해를 받으며 연주되지 못했다.[31] 사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았으면 선배인 아르투르 니키슈처럼 빈약하게나마 오케스트라 지휘 녹음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말러의 생전이던 1910년에 프리드리히 카르크(Friedrich Kark, 1869~1939)라는 지휘자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축음기에 녹음하기도 했다.[32] 이와 비슷하게 말러와 똑같은 명지휘자이기도 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곡들도 관현악법과 세부적인 성부 구성이 매우 세밀한 것으로 유명하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브루크너 스타일의 교향곡 3곡과 피아노 협주곡 1곡을 남긴 수준급의 작곡가이기도 했다)도 말러만큼은 아니었어도 자신의 작품에 템포 지시와 악상기호를 세밀하게 지시한 것은 물론 어느 면에서는 슈트라우스 이성으로 세밀하게 성부를 짰다.[33] 실제로 젊었을 적에 말러의 조수였던 브루노 발터오토 클렘페러는 말러의 교향곡을 적극적으로 연주했으며, 푸르트벵글러를 존경하던 예후디 메뉴인다니엘 바렌보임도 푸르트벵글러의 교향곡을 연주하기도 했다.[34] 실제로 말러는 브루노 발터가 작곡한 교향곡을 발터가 자기 앞에서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알마한테 "아무래도 발터는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집중해야 할 것이며 이에 당신도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편지를 보냈으며, 푸르트벵글러도 라파엘 쿠벨릭이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 5번을 듣고는 대기실로 찾아가 쿠벨릭에게 "연주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서 연주할 만한 곡인지 모르겠군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35] 이와 비슷하게 뉴질랜드 출신 화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도 일반적으로는 영국 국적으로 인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