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창모(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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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규 음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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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u:z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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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 음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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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해변가요제


KBS
드라마주제가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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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참여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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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 드럼 / 기타 : 배철수[1]
메인 보컬
구창모 (2~4집)
메인 기타
지덕엽(1집)
김정선 (2집~9집)
베이스
이응수 (1집)
김상복 (2집~6집)
이태윤 (7집~9집)
드럼
오승동 (2집~6집)
이건태 (7집~9집)
키보드
이봉환 (1집~9집)
이종욱(7집~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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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colbgcolor#424242> 구창모
具昌謨[1] | Koo chang-mo


파일:가수구창모.jpg

이름
구창모(具昌謨)
출생
1954년 4월 27일 (69세)
경기도 인천시 북구[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능성 구씨(綾城 具氏)[3]
배우자
박미순(1964년 6월 11일)[4]
가족
아들 구교현(具敎炫)(2000년 5월 19일)[5]
학력
배재고등학교 (졸업)
홍익대학교 이공대학 (전자전기공학 / 학사)
데뷔
제1회 TBC 해변가요제
종교
개신교[6]
소속 그룹
블랙테트라(1978년 ~ 1979년)
송골매(1980년 ~ 1984년)
직업
가수, 기업인
별명
구두창, 단신대두, 짱구

1. 개요
2. 삶
3. 송골매, 그리고 배철수
4. 가창력
5. 음반
6. CF
7. 수상
8. 영화
9. 기타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78년, TBC 해변가요제홍익대학교 밴드인 '블랙테트라'의 2기 멤버로서 출전해 데뷔, 이후 1980년에 배철수가 이끄는 밴드 송골매에 가입해 전성기를 누린 가수. 수려한 외모와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로 많은 10대 소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 삶[편집]


1954년 4월 27일, 인천에서 구본혁(具本赫)과 교하 노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미군 기지촌에서 살았으며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꿀꿀이죽을 배급받아 먹었다고. 배재고등학교(88회)를 졸업하고 홍익공업전문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이후 홍익대학교 전자공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78년 블랙테트라 2기 멤버로 제1회 TBC 해변가요제에 출전, 〈구름과 나〉라는 노래로 우수상을 받았으며,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송골매의 리드 보컬이었다. 송골매 탈퇴 후 발표한 〈희나리〉,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문을 열어〉 등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희나리의 번안곡인 〈기허풍우(幾許風雨)〉는 홍콩 영화 《영웅본색》에 나오기도 하였다.(영화 시작 13분 쯤)

1991년 카자흐스탄 가요제에 간 것이 계기가 되어 키르기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10년 동안 사업을 한 바 있다. 현재 건축회사 엠엔아이의 사장이며 방송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3. 송골매, 그리고 배철수[편집]


배철수와는 1978년 TBC 해변가요제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방에서 구창모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활주로[7]로 출전한 배철수[8]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엄청난 미성의 목소리여서 잊을 수가 없었다고. 이후 배철수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가 송골매 2집을 준비하던 시기 그를 영입했다고. 그리고 그 뒤에는...



정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9], '모두 다 사랑하리', '다시 한 번' 같은 곡들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크게 히트를 하면서, 국민 밴드와 인기 아이돌로 거듭나게 된다. 조용필이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존재이던 1980년대 시절에, 조용필 다음가는 인기는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나 공히 '송골매'라고 대답할 정도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배철수의 독특한 캐릭터와 담백한 창법, 구창모의 수려한 외모와 부드러운 미성 역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인기가 얼마나 엄청났던지 이들을 주연으로 한 영화가 무려 세 편이나 제작되었다. 80년대 당시 이런 영화가 제작된 가수들이 조용필, 전영록, 이상은 같은 가수들이었던 걸 생각하면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예능 프로, 광고까지 발을 뻗쳤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해서 당시 음반사 사장이 보너스로 거액의 돈을 주기도 했다고. 이 인기는 구창모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송골매 4집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높은 인기에 구창모는 솔로 활동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다른 멤버들과 음악적으로 마찰도 잦아지게 되고 많은 스케줄에 목상태도 안좋아지기 시작한다. 결국 갈등이 심화되어 1985년 송골매를 탈퇴하고 솔로로 데뷔해 희나리로 크게 인기를 얻는다.

배철수는 송골매가 롤링 스톤즈, 이글스 같이 오래가는 밴드가 되길 원했기에 이를 매우 안타까워 했다고. 게다가 구창모는 솔로로 잘나가는데 비해 송골매는 이전보다 흥행이 떨어져 상황이 좀 껄끄러워지기도 했다. 물론, 리즈 시절이었던 1981~1985년에 비해 그렇다는 거지 인기도는 여전히 나쁘지 않았다. 후기에 모여라 같은 곡이 히트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이후 화해해 현재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구창모가 다시 방송 복귀를 하게 된 계기도 배철수 덕분이라고 한다. 또 더 늦기 전에 송골매 기념 공연이라도 하는 게 소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4. 가창력[편집]


트레이드 마크는 비음 섞인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 미소년 느낌이 강한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타고난 하이톤의 미성을 바탕으로 비음을 적절히 활용하고, 울림도 일정하게 주어 노래를 운용하는 스타일이다. 이를 통해 고음역대를 매우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것이 특징. 뿐만 아니라 매우 정확한 발음과 음정, 박자감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리듬감이 매우 좋아 펑키한 곡에서 큰 강세를 보였다. 스타카토를 유지하며 ‘허’ 등의 추임새를 넣어 리드미컬함을 살리는 부분에 있어선 거의 장인의 수준. 위와 같은 점들 때문에 라이브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너가 없던 시대에 비교적 안정적인 발성과 테크닉으로 라이브를 기복없이 운용했던 대단한 보컬이었다.[10]

실제로 송골매 시절 대표곡들을 직접 불러보면 사람이 아예 못부를 정도로 어렵지는 않으나, 기본 키가 꽤 높은 편에다[11], 비음과 울림, 호흡을 기가막히게 조절해 소리를 안정적으로 끌고가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구창모한테 맞춰서 써진 곡들이 많은지라 초심자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편이며[12] 기본이 갖춰져 있다 해도 느낌을 살리기 매우 어렵다. 일단 구창모의 그 미성과 리듬감을 살리기가 어렵다. 당장 노래방에서 모두 다 사랑하리,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을 원키로 불러보면 이게 은근히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팝적인 세련된 감각[13]과 보통 여린 미성의 보컬들에겐 결여되기 쉬운 파워까지 갖춘 보컬이었다. 고운 음색과 고음, 성량, 리듬감까지 모두 갖췄던 것이다. 하드록, 펑크(Funk), 발라드, 포크 등 표현 가능한 장르의 폭도 상당히 넓은 편. 때문에 그의 가창력은 언제나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14] 당시에 '조용필을 제외하면 미성의 젊은 보컬들 중에서 최강'이라는 평도 자주 받았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이런 그의 장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이 바로 송골매 2집 다시 한번, 송골매 3집 꽃씨.

당시 다른 보컬들과 비교되는 젊고 세련된 감각의 표현력은 정말 많은 극찬을 받아서, '보컬이 쎄끈하다(...)', '보컬이 세련됐다' 등등 젊은 층의 극찬도 많이 보일 정도로 지금 들어도 세련된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80년대 초반, 송골매 2, 3집 때의 구창모는 그 시절 미성 보컬리스트가 설 수 있는 정점까지 갔던 걸출한 보컬리스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폭발적인 인기에 스케줄이 많아져 혹사당해 목이 점점 상하기 시작했다. 송골매 2집 다시 한번과 송골매 3집 처음 본 순간을 비교해보면 파워가 조금 떨어진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 이에 대해서 배철수는 승승장구를 통해, 자신이 당시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행사 들어오는 건 다 받고 그래서 구창모가 목이 많이 상한 것 같다며 매우 미안해했다. 하지만 구창모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위의 배철수의 말대로, 고된 스케줄에다 목상태도 점점 안좋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리즈시절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하이톤이면서도 시원시원하고 내지르는 보이스를 잃게 되었다.


리즈시절


현재

보다시피 갈수록 목소리에 힘이 없어지고 톤도 낮아지는 걸 볼 수 있다. 팝적이면서도 시원시원한 록보컬에서 부드러운 발라드 보컬이 되어 버렸다(...). 물론 김현식, 윤종신 같은 가수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목소리 보존이 잘된 편이다. 원래 기본기가 출중했던 가수인지라 여전히 듣기 좋은 가창력을 보여주곤 하지만 전성기 시절 보여주었던 시원시원한 보컬은 이제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록보컬로 시작해서 시원시원한 보컬과 미성의 보이스로[15] 동년배 최강 소리를 들으며 아이돌적인 인기를 얻다 발라드 가수로 전향하고, 이후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목소리에 힘이 떨어져 갔다는 점에서 후배 이승철과 비슷한 케이스라는 평이 많다. 공교롭게도 당시 부활의 연습실이 과거 송골매 초창기 시절 연습실이었다고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구창모는 송골매 시절 이미 경력이 꽤 긴 보컬이었던지라 신인임에도 꽤 프로적인 모습을 보였고 빠른 템포의 정통 록음악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면, 이승철은 데뷔 당시 경력이 얼마 안된 어린 보컬이어서 부활 1집땐 아직 아마추어적인 면이 남아있었고 빠른 템포의 곡이었던 인형의 부활같은 곡에서는 꽤 쓴소리를 들었다는 점이 있다. 실제로 당시 이승철의 목소리가 구창모의 목소리보다 훨씬 어리다. 변성기도 거의 다 안지났는지 쇳소리까지 나는 매우 어린 목소리였다.


5. 음반[편집]


연도
제목
비고
1978년
제1회 TBC 해변가요제

1979년
블랙 테트라 1집 《열대어》

1982년
송골매 2집
[16]
1983년
송골매 3집

1984년
송골매 4집

1985년
구창모 1집 《희나리》

1986년
구창모 2집 《아픈만큼 성숙해지고》

1987년
구창모 3집 《외로워 외로워》

1988년
구창모 4집 - 《한때는 진정 그대를》

1989년
구창모 5집 - 《슬픈연정》



6. CF[편집]


연도
광고
비고
1982년
해태제과 (매치매치바, 폴라포)
[A]
1984년
삼양식품 삼양 1분면
[A]
1986년
롯데칠성 칠성사이다

쌍방울 SYT 캐주얼*스포츠 웨어



7. 수상[편집]


연도
수상
1978년
동양방송 해변가요제 우수상
1982년
한국방송 로크그룹상 · 문화방송 10대 가수상
1983년
제12회 도쿄음악제[17] 음악제협력상, TBS상 · 한국방송 로크그룹상 · 문화방송 10대 가수상
1985년
제1회 ABU가요제 대상# · 문화방송 10대 가수상
1986년
제8회 서울국제가요제 동상, 특별상 · 한국방송 PD선정 가수상 · 문화방송 10대 가수상
1987년
한국방송 올해의 가수상[18]][19]


8. 영화[편집]


연도
제목
1982년
갈채
대학 얄개
1983년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
대학 들개
1985년
《춤추는 청춘대학》


9. 기타[편집]



  • 래퍼 창모, 야구선수 구창모와 이름, 한자, 심지어 항렬까지 같다. 능성 구씨 29대손의 항렬자가 '○모(謨)'인 탓에 동명이인이 많으며, 같은 돌림자를 쓰고 한 글자만 다른 '구ㅇ모'란 이름까지 치면 굉장히 많아진다.

  • 얼굴이 꽤 동안이다. 2023년 기준 무려 칠순을 맞이했는데, 구창모가 70세라는 이야기에 놀라는 주변인, 네티즌들도 보인다. 곱상하고 온실 속 화초 같은 외모가 여전하다.

  • <눈동자>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가수 이승재의 이종사촌동생[20]이다.

  • 가창력이 뛰어나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작곡에도 대단한 재능이 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자작곡이다.

  • 2000년 엔터테인먼트를 차리고 사이버 3인조 혼성그룹 TG를 제작했었다. 당시 엄청난 투자로 화제였으나 흥행엔 실패했다.

  • 배재고등학교 재학시절 풍류로는 전교에서 손꼽혔으나 학내 중창단에서 떨어진 이력이 있다고 한다.

10.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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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의 한자가 '具昌模'라고 나온 신문 기사도 있으나, 족보에 '昌謨'라고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므로 '具昌謨'가 맞는 이름의 한자다. 출처 사진[2] 현 인천광역시 부평구[3] 도원수파(都元帥派) 충렬공계(忠烈公系) 29세손 '謨'자 항렬이다. 현재 이 나이대의 능성 구씨 사이에서 항렬이 상당히 낮은 편에 속한다. 가수 구준회의 증손자뻘, 야구선수 구자욱, 축구선수 구자룡, 구자철의 손자뻘, 펜싱선수 구본길, 축구선수 구본상, 양궁선수 구본찬의 아들뻘이다(...).[4] 朴美順, 밀양 박씨 박태형(朴太亨)의 딸이다.[5] 구글 지식 패널(파일:구글 지식 패널.png)에서는 이름이 구정연이라고 나오나 족보에 아들 이름이 敎炫(교현)이라고 등재되어 있으므로 구교현이 맞는 이름이다. 30세손 항렬자인 '교'를 썼다.[6] 일산 거룩한빛광성교회 집사이다.[7] 한국항공대학교의 밴드[8] 드러머를 맡으면서 보컬까지 겸했다고 한다.[9] 리프의 명곡으로 손꼽히며, 사실상 1980년대를 대표하는 최대 히트곡이다.[10] 학창시절부터 밴드 활동과 합창 활동을 병행했던 것이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실제로 그 시절 가수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본적인 발성을 익혔다. 투투김지훈 역시 학창시절에 밴드와 교회 성가대를 병행하며 발성을 익혔다고 한다.[11]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노래방에선 낮춰져서 나와서 잘 모를수도 있으나(태진은 Cm으로 키가 낮춰져 연주되며 금영은 Em 그대로이다.), 원곡은 2옥타브 시가 나오는 꽤 고음곡이다.[12]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서 조장혁이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두고 비슷한 이유를 들어 해당 곡이 꽤 어려운 곡임을 설명하기도 했다.[13] 팝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많이 언급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당시 영상을 보면 팝송을 커버하는 영상도 꽤 많다.[14] 대학 시절부터 캠퍼스 밴드들 사이에선 상당히 유명인사였다고 한다.[15] 비음과 공명감이 트레이드 마크라는 공통점도 있다.[16] 이 음반에 수록된 〈어쩌다 마주친 그대〉·〈다시 한번〉·〈내 마음의 꽃〉을 작곡했다.[A] A B 당시인 음악 그룹 송골매와 함께 출연.[17] 동경가요제라고도 하며 송골매 그룹으로 참가했다. 참가곡은 《모두 다 사랑하리》#[18]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7122300209208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12-23&officeId=00020&pageNo=8&printNo=20377&publishType=00020]|「KBS「올해의 가수상」 수상자 28명 선정발표」, 『동아일보』, 1987년 12월 23일.][19] MBC는 10대 가수 수상제도를 폐지하고 축하무대로만 꾸며진 '한국 가요대제전'을 개최했으며#, 1987년 8월의 인기가요로 조용필 - 아하! 그렇지 그렇고 말고, 구창모 - '외로워 외로워' 공연 [20] 출처.